⊳ track 01. 가버려 Sung by DJ DOC 그 날도 역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은.... 아니고 모처럼의 휴일의 오후에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이 비가 내리고 있는 서울의 하늘이라니....... “........... 재수 없어......” 일단 비가 오는 걸 보고는 조심스레 일어나 방바닥을 발로 디디며 뭔가 날카로운 것이 없는지 살폈다. 그래, 나는 바로 특이 체질 중의 특이 체질로 비가 오는 날이면 재수 없는 경지를 넘어 악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징크스를 가진 인간인 것이다. 이런 날이면 으레 일어나는 일이기에 눈을 번쩍 뜨고 온 바닥을 샅샅이 뒤지고 다음에는 일어나 조심스레 소매를 끌어당겨 손을 가리고는 그 손으로 방의 스위치를 눌렀다. 훗.... 형광등 스위치를 뭘 그렇게 소심하게 키냐고? 후훗, 그건 안 당해 본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지. 나는 그 절대 일어나지 않을 감전을 머리털 나고 7번을 당해본 사람이다. 일단 불을 키고 전기가 들어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거실로 나가 역시나 같이 조심스레 스위치를 누르고 어제 밤 피다만 담배가 꺼졌나를 확인하고는 다시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역시나 몇 배로 조심해 스위치를 키고는 욕실 내부를 살피며 어디 물이 흐른 적 없나를 보고는 슬리퍼를 찍찍 끌고 샤워기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하나, 둘, 셋!! 타악-- 빠른 속도로 샤워기를 틀고는 순식간에 옆으로 비켜나 수도관이 터져도 절대 물이 떨어지지 않을 벽으로 몸을 밀착시키며 물줄기가 제대로 쏟아지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흐음, 여기까지는 무난하군. 그대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고는 - 아, 다행히 샴푸도 안떨어졌다. - 세면대 앞에 서서 면도를 하려다...... 패스. 비 오는 날 면도를 하면 99%의 확률도 얼굴을 벤다.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얼굴에 상처를 갖고 만나면 안돼지. 체모가 적고 수염이 빨리 자라지 않는 체질이라 다행이지..... 안그랬다면 장마철 내내 얼굴에 밴드를 붙이고 다녀야 할꺼다. 하여간 그렇게 조심스레 씻고 준비를 하고는 아침을 먹으려했지만.... 이것도 패스. 이런 날 요리라도 하다가는 어디가 데이거나 어디에 불이 붙는 고로..... 가스 벨브를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 5월의 비 오는 날씨는 아직 춥지만.... 그렇다고 절대 긴바지는 입고 나갈 수 없다. 틀림없이 어디선가 물을 튀길 것을 알기에 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체크 면반바지에 티셔츠 위에 긴 남방을 걸쳐 입고 절대 젖지 않는 특수 비닐 가방을 메고 신발을 확인했다. 얼마 전 통판으로 구입한 미끄럼 방지 워커. 눈 밭에서 달려도 절대 엎어지지 않는다는 신발..... 그 카피에 신뢰도는 그닥 높지 않지만 이 신발의 아래에 박힌 스파이크를 믿어보기로 했다. 뭐, 카페 같은 데서는 좀 쪽팔리지만..... 나의 악재에 비한다면 이 정도는 아주 귀여운 거다. 드디어 모자에 우산까지 준비 완료. 일단 우산을 펴서 어디 구멍난 데가 없나 확인한 후 큰 맘을 먹고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아니지, 아니야. 이러다 이거 틀림없이 멈출꺼야. 그냥 걸어서 내려가자. 그래, 가는 거야..... 12층은 조금 버겁지만..... 끄응......” 결국 난 12층을 걸어서 내려오는 수고를 하고야 말았다. 조심스레 내려와 차를 타고..... 내 차를 탄다면 100% 사고가 나기에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이게 왠 일인지.... 오늘은 오는 도중 사고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악운도 이제 끝인 건가? 아니지, 아니야. 절대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20년 간의 나의 비 오는 날의 징크스들은 다 뭐냔 말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머리를 도리 도리 저으며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온 듯한 명세 녀석이 보였다. 이거 너무 순조로운 걸...... “일찍 왔네.” “...... 응.......” 자리에 앉으며 묻자 이 녀석은 간만에 만난 애인이 반갑지도 않은지 그저 무뚝뚝하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비 오는 날은 질색이라니까. 밥 먹고 나왔어?” “........응.......” 일단 앉았으니 커피를 시키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어째 이 놈이 나랑 눈을 마주치질 않는다. “왜? 무슨 일 있어?” “.............” “뭐냐? 애들이 속 썩이냐? 그런 건 이 선배한테 상담해라! 하하하, 내가 남고만 벌써 3년 아니냐!” 이번에 내가 발령 받은 학교가 바로 이 녀석이 새로 들어간 학교다. 후훗, 이 녀석과 같은 학교에 다니기 위해 내가 행한 그 끈질긴 로비와 현명하고 적절한 학교 생활은 과히 칭찬 받아 마땅한 일이다. “....... 할 얘기가 있어.” “응, 해봐!” 학교 선생님답게 짧게 자른 머리가 학교에서와는 달리 살짝 흘려내려 편하게 입은 케주얼 복장과 함께 아직도 학생처럼 보이게 한다. 뭐, 그게 귀엽기는 하지만...... “우리 헤어져........” “뭐.........?” 어머, 얘가 지금 누구더러 뭐라는 거야? 이 녀석이 못 먹을 걸 먹었나? “미안..... 우리 헤어지자.” “헤에........?” 고개를 갸웃하며 이 녀석이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하고 얼굴을 들여다보니..... 그건.... 아니군. 허어....... 새 학교에 들어가고 얼마돼지 않아 맞은 모처럼의 휴일. 군필자로서 졸업과 동시에 순식간에 모모시의 공고 영어 선생으로 발령을 받고 출근한지 2년 만에 겨우 이 녀석을 위해 옮겨온 학교. 나이, 현재 29살. 키 182에 몸무게는 국가기밀. 상학고등학교 2학년 5반 담임이자 영어교사. 장인하, 아직 싸늘한 5월에 4년을 사귄 애인에게 실연당하다? 괜찮은 기사 꺼리군....... “너....... 아프냐? 아님 또 너 나 놀리는 거지? 임마, 솔직히 말해, 이번엔 뭐야? 또 뭐 사줄려고? 내 생일 멀었는데.......” 호탕하게 웃으며 나간 내 말에 녀석은 고개를 더욱 깊게 떨구었다. “미안...... 미안........” 이라며 고개를 숙인 녀석이 바로 내 앞에서 눈물을 후두둑 흘리기 시작했다. 얼라리? 얘가 왜 운대? 채인 건 나인 거 같은데 왜 이 자식이 이렇게 절절하게 우는 거야? 내가 울어야하지 않나? 그렇지? 그게 이치에 맞지? “야, 울지마!!! 꼭 내가 울린 거 같잖아!! 내가 뭐랬다고!?” “미안해..... 나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미안..... 선배........” 「선배」라는 말에 난 입까지 멍하니 벌린 채 아방하게 반응을 해보였다. 이 녀석과 내가 사귀기 시작한 대학교 3학년의 어느 날인가부터 이 자식이 절대 입에 담지 않았던 단어..... 4년 간 그렇게 심하게 싸우고 헤어지기 직전까지 갔을 때에도 녀석이 입에 담지 않았던 단어다. 이건, 단지 같은 대학교의 선후배로 돌아가자는 직격탄인 거지. 그렇지? 나 이제 “인하형”이 아니라 “장선배”인 거냐? “그..... 래? 그랬구나.... 어쩐지...... 어어......” 극심한 심적 쇼크에 정신을 멍하니 놓고 있는데 커피를 나르던 웨이트레스가 우리 대화를 듣고 놀랐는지 내 다리 위로 커피를 쏟아버렸다. 젠장....... “어머!!!” 우윽...... 졸라 아프다. 씨발..... 하필 직격으로 반바지 아래로 떨어질 게 뭐야? 이 분위기에 쪽 팔려서 아프다고 하지도 못하겠고...... 졸지에 다리에 화상 자국 생기겠네. 망할...... 눈물까지 날려고 하네..... “죄송해요, 손님!!! 죄송해요.... 이거 뜨거운 건데......” “저기..... 찬 물수건 좀 갖다 주시겠어요?” “아, 네!!!” 요란하게 주방으로 뛰어들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잠시 이 상황을 어떻게든 벗어나려 머리를 굴려봤지만 내 앞의 전 애인은 너무나 진지한 눈동자에 눈물을 한가득 담고 슬프게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해, 선배. 선배한테는..... 할 말이 없어. 하지만..... 이건 확실히 해두고 싶어. 나 그 사람 너무 사랑해......” .... 란다..... 그렇다는 건 이젠 난 사랑 안한다고 봐야되는 거냐? 나도 사랑하기는 하는데 그 사람을 더 사랑한다고 봐야하는 거냐? 아니면 그 사람도 너무 사랑하고 나도 너무 사랑한다는 거냐.. 라고 묻고는 싶지만 그럴 분위기가 아니기에 일단은 참는다. “그 사람 없이는 어떻게 살았나 싶을 정도로..... 소중해..... 선배한테 진짜 몹쓸 짓 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멈출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해......” 내가 이 녀석을 안 게 4년이지만 이 녀석이 이렇게나 슬픈 눈으로 나를 보고있는 건 처음인 거 같다. 그래, 그 사람 그렇게나 사랑하는구나. 내 앞에서는 언제나 무표정하고 담담하던 니가 내 앞에서 울 정도로... 그렇게 사랑하는구나. 아아, 다리가 아프다. 이 놈의 알바생은 왜 물수건을 안가져 오는 거야? “죄송해요, 손님!” “됐어요.....” 그녀의 손에서 수건을 받아들고 차가운 물수건을 덴 다리 쪽에 얹자 어딘지 쓰리고 아픈 감각이 느껴졌다. 진짜..... 아프다...... “괜찮아, 다리?” 눈물을 닦으며 말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더욱 아파졌지만 뭐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응, 안 아파. 이 정도야...... 야, 나 다리 때문에 들어가야겠다. 그럼 그렇지, 내가 비오는 날 무슨 좋은 일이 있겠냐. 나 먼저 간다!!” 하고는 일어나 말리는 알바생들을 뿌리치고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뭐, 내 다리에 커피를 엎었으니 커피 값은 안내도 되겠지. 멍하니 가게를 나와 택시를 잡는데도 그 녀석은 뛰어나와 잡지도 않는다. 망할 자식.... 좀 잡아주면 어때서.... 잡아서 장난이라고.... 오늘 모처럼의 데이트라 장난 좀 쳐본 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눈꼬리를 휘어뜨리며 웃고 작은 상자를 하나 건내야지. 그리고 내가 머리 한 대 때리면 맞아주고..... 자기도 히죽 웃으며 뒤에서 한 번 안아주고 집까지 바래다 주고...... 그리고....... “젠장..... 아프잖아......” 툭-- 투둑--- 눈가에서 방울 방울 정체를 알 수 없는 흘러내렸다. 하필..... 비 오는 날........ 재수 없게...... 다리가.. 커피의 뜨거운 물에 데인 상처가 너무 아팠다. 정신 없이 택시를 타고 아파트에 내리자마자 어디서 엎어지든 말든 열심히 뛰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대로 화장실 행.... 비 오는 날의 징크스를 보면 가장 많은 사고가 일어나는 장소가 확률적으로 욕실이기에 비오는 날만큼은 절대 들어오고 싶지 않았지만 오늘은 자발적으로 내가 먼저 들어와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을 틀고 다리를 씻어 내렸다. “젠장..... 아파...... 아프다구..... 나쁜 자식아!!!” 꼴사납게 절대 울지 않는다는 나의 신조를 거역하고 내가 기억하기로 통상 3번 째로 눈물을 흘렸다. 처음은 10살 때, 우리 엄마 아빠가 집안 말아먹고 사채업자들이 쳐들어와 나 끌고 가서 팔아 먹었을 때였고 두 번 째는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처음 사겼던 녀석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 그리고 세 번 째의 눈물....... “나쁜 놈!!! 확 벼락이나 맞아라!!” 샤워기조차 던진 채 난 그대로 욕실에 앉아 펑펑 울었다. “배 고파.......”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 동물인지 울고 나니 배가 고팠다. 생각해보니 일어나자 마자 그냥 나갔었지. “...... 짜장면 시켜먹자......" 막 전화번호를 찾으려 책자를 드는데 타이밍 맞게 전화벨이 울렸다. 명세..... 일까? 설마.... 이제 와서 장난이라는 건 아니겠지? 알 수 없는 기대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전화기를 들었다. 부디, 명세이길.... 장난이길...... 장난이면 넌 오늘 죽었어, 주명세. “여보세요?” <...... 인하니?> “어, 어어...... 성준이구나........” 실망해서 목소리까지 그대로 튀어나와 버렸다. 뭐, 어쩌냐? 미안하다, 친구야. <오늘..... 명세 만났다며?> “응, 날씨가 안좋아서 그냥 들어왔어. 너, 나 알잖아. 이런 날 재수 오질나게 없는 거, 하하하하하하.......” 점점 작아지던 웃음소리는 어느 새 인가 사그라들어 민망한 기운만이 전화기에 감돌았다. 그나저나 이 놈은 내가 오늘 명세 만나는 걸 어떻게 알고 있었대? <미안해.......인하야..... 미안..........> 라며 잠시 후 흐느끼는 성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가 왜 나한테 미안한대? 너도 나한테 죄지은 거 있니? “무슨 소리야? 미안하긴 뭐가 미안.....” 있다면...... 설마....... <나 명세 없으면 안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대체 오늘만 이 소리를 몇 번을 듣는 거냐? 그러게 미안할 짓을 왜 해? 흐느끼는 성준이의 목소리를 듣자 이제 슬슬 일의 진상이 파악이 되었다. 한 마디로..... 난 좇 된 거로군. 내 친구 놈과 애인 녀석이 붙어먹다니...... 허허..... 고등학교 졸업한 후부터 이런 말투는 삼가려고 했는데 말이야. 내가 그 씹새랑 사귀기 시작한 게 대학교 3학년 때부터니까 정확히 4년 째이고 그리고 이 개새는 중학교 때부터 내 사정 다 아는 친구 녀석으로 근 15년지기 친구인데..... 내가 두 녀석을 소개해준 게 대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내 친구라는 개새가 군대에서 막 돌아왔을 때니까..... 대략 이 녀석들도 4년 째 알고 지냈던 거로군. 그렇다면 그 4년 사이 내가 모르는 사건들이 있었던 건가? 그 녀석이 나와 만나는 걸 피한 이유가 직장 생활을 하던 나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이 녀석 때문이라는 거로군. 후후,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다더니...... 나, 장인하가 이렇게 연타 스트레이트로 당할 줄이야. “.......... 언제부터냐?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말해라.” 간만에..... 정말 간만에 내가 들어도 무서울 정도의 목소리가 나왔다. 성준이 녀석은 간만에 듣는 목소리겠지. 그씹새는 나 화난 걸 본 적은 거의....... 가 아니라 아예 없으니 이 목소리를 들을 일도 없었겠지. <2년 전에..... 너 학교 들어가고 바빠지면서.......> 씨발, 일반 고등학교 선생이 그 정도면 진짜 바쁜 셀러리맨들은 연애도 못해먹겠군. 아니, 사실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결국은 다 핑계 아냐? “어떤 계기로? 솔직히 불어. 기분 더러우니까......” <미안해...... 그냥.... 나도 그 땐 쉬던 때라서 자주 만나다 보니...... 잘 통했고.......> 그러냐? 아주 잘 통해서 좋겠군. 씨발, 그래, 나랑 처음 사귈 때 나더러 깡패라서 싫다던 놈이니 고상한 이 새끼랑 잘 맞았나 보지? 아아, 젠장, 화딱지 나네, 이거. 그 씹새가 담배 피는 걸 싫어해 혼자 집에 있을 때만 필려고 사놓았던 담배를 급하게 찾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라이터, 라이터...... <미안해..... 정말..... 나 널 배신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 녀석 없으면 나 죽을 것 같아. 우리 이해해 줄꺼지? 그렇지?> 라며 징징대는 목소리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해 안하면 어쩔껀데? “씨발, 닥쳐. 짜증나게 짜고 지랄이야? 그 씹새한테 전해. 당분간 내 앞에 그 면상 들이밀지 말라고. 너도 마찬가지고. 걸렸다간 옛날에 내 성질 나온다. 끊어!!!”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고는 그것도 성질에 차지 않아 집어던지려다 비싼 거라..... 참고 코드만 뽑았다. “죽었어...... 씹새끼가..... 날 갖고 놀아?” 이가 으드득 갈린다. 두고 보자. 어떻게 돼나? 내 성질에 널 가만 두나....... 깡패의 저력을 보여주마, 주명세! ⊳ track 02. 필승 Sung by 서태지와 아이들 “안녕하세요!!” 복잡한 심정으로 밤을 지새고 학교에 도착하자 운동장을 뛰고 있던 농구부의 망할 것들이 시시덕거리며 웃다 인사를 한다. “그래.” 힘없는 목소리로 작게 말하고 - 생각 같아서는 들고 있던 가방을 머리에 집어 던져주고 싶었지만 - 교무실 쪽으로 향하는데 문득 학생들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우, 오늘도 예쁘시네요~ 미스 장♡” 순간 눈썹이 꿈틀, 주먹이 불끈!! 했지만...... 이제껏 쌓아온 나의 이미자가 있기에 뒤를 돌아보며 살짝 웃으며 답해주었다. “원래 예뻐!” 흥, 어린것들이 어디서 누굴 이겨 먹을려고......... 고개를 픽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데 들려온 목소리에 다시 돌아보자 이번에는 아주 가관인 소리를 지껄인다. “선생님!! 언제 한 번 하게 해주세요~ 예쁘잖아요♡” 라며 웃는 것은 우리 반 녀석이다. 강태민...... 저 새끼가 간이 부어터졌나? 아무 말 없이 눈으로만 쳐다보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였다. 여기서 2년 3개월의 착한 교사 가면을 벗고 저 면상들에게 주먹을 날릴 것인가...... 아니면, 가볍게 웃어넘기며 착한 선생의 명맥을 유지할 것인가....... 한참을 고민을 하다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결론에 다시 방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난.......... 비싸.” 계속해서 농구공을 들고 키득거리던 놈들은 나의 짤막한 답에 그대로 얼어버린 듯 하더니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젠장, 그래, 웃어라. 얼마나 웃나 두고 보자. 강태민 새끼, 오늘 영어 시간에 죽을 줄 알아라..... 자기 담임을 뭘로 보고 저 지랄이야? 내가 이 안의 다른 남선생들에 비해 굉장히 어려 보이는 외모에 청순가련 - 꾸엑이다 - 한 미모를 지녔다고는 해도 저것들이 어디 선생한테 할 말인가? 옛 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던데..... 저 어린 놈들이 누굴 깔아뭉갤려고 해? 내가 늬들을 깔면 깔았지, 절대 깔릴 일은 없을 꺼다. 그리고 누차 말하지만 난 나보다 어리고 덩치 크고 운동하는 놈들이 제일 싫어!!! 게다가 생각도 없고 상식도 없고 할 줄 아는 거라고는 공 던지는 일하고 섹스뿐인 늬들같은 저능아들은 더더구나 사양이다. 저것들은 태어나기 전에 엄마 뱃 속에 뇌를 두고 태어났을 놈들이라니까. “흥!” 다시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며 교무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뭔가 다다다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내 가방을 낚아채어 앞으로 달려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 “내기해요, 선생님! 이걸 선생님이 뺏으면 오늘 점심 제가 사죠!” 라며 방글거리는 건 역시나...... 애물단지 강태민. 얼굴은 곱상하게 생긴 게 하는 짓은 또라이라니까. “강태민, 이리 내놔!” “선생님이 가져가세요!” 라며 빙글거리며 가방을 흔드는데...... 으악, 그 안에 MD랑 다 들었단 말야!!! “태민아!!” “오우, 무섭네. 선생님 화도 내나 봐요~” 지친 듯이 말을 해도 돌아오는 건 놀림 뿐이다. 인간, 장인하, 잘나가던 인생이 왜 학교에서 이런 취급을 받고 사는 거냐? 그것도 저런 골빈 병신들한테! “강태민, 좋은 말로 할 때 내놔라.......” “쿠쿡, 그럼 힘으로 해보세요. 아니, 안돼죠. 제가 힘쓰면 선생님 날아가요.” 라며 빙글거리는 그 새끼의 얼굴을 보자 자꾸 삐질 삐질 기어나오려는 성질을 죽이느라 안간힘을 써야했다. 이제는 저 가방에 대한 걱정보다 내 성질 나올까가 더 무섭다. “선생님 이거 못잡으시면 오늘 농구부 점심 사주셔야 돼요!” 내가 미쳤냐? 그 돼지 새끼들 사료를 대게? “너..... 그 말 진심이지?” “물론이죠!!” 라며 자신 만만하게 앞에서 빙그르르 돌더니 서서히 걷기 시작했다. 진짜 날 아주 만만하게 본 모양이군. 하긴..... 학기 초에 명세랑 싸우다 손이 먼저 나가던 찰나에 저 태민이란 놈이 지나가서 그대로 머리에 손을 얹고 가련하게 쓰러지는 연기를 해보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다른 말 하기 없기다!” “하하하하!!” 라며 환하게 웃던 녀석은 런닝을 하듯 거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 내가 100m 기록이 얼마였지? 고3 때 13초였으니까..... 지금 아무리 늙었어도 14초는 돼겠지. 그리고 난 절대적으로 순발력이 강한 타입이니까....... 속으로 깊이 심호흡을 하고 간만에 달릴 각오를 다졌다. 농구부라도 저 놈의 덩치가 있으니 나보다 빠르지는 않을꺼고 한 2, 3m 앞에 있을 경우엔 그대로 날아서 덮치면 되니까......... 앞에서 여유 있게 거꾸로 달려가는 녀석을 보며 다시 한 번 깊이 숨을 내쉬고 순식간에 스피드를 내서 녀석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어어?” 라며 처음에는 웃으면서 뒤로 달리던 녀석이 갑자기 돌어서더니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나도 이에 질세라 스피드를 올려 혼란스러워하는 녀석의 뒤를 바짝 쫓으며 달리다, 뒤를 돌아보던 녀석의 등에 순간적인 가속도를 붙여 뛰어들었다. “으아아악!!!” 요란한 비명 소리를 내며 나의 무게에 깔려 바닥을 헤집는 녀석의 등을 왼손으로 누르고 그 자식이 들고 있던 내 가방을 가볍게 뺏어들었다. 그러게 왜 덤비니? 나 이래뵈도 육상 선수도 할 뻔 했었다. 뭐, 애들하고 싸우다 정학 처분 먹는 바람에 다 깨지기는 했지만. “오늘 점심 기대할게. 강태민!” “으윽........” “남아일언중천금. 아, 그렇게 어려운 말은 모르나? 바/보/라/서?” 싱글거리며 간만에 비꼬자 녀석이 새햐얘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알아요!!” “그래? 알면 사! 그럼 이따 점심 시간에 보자, 태민아!” 하고 싱긋 한 번 웃어주고는 가방을 툭툭 털고 녀석의 등에서 일어나다 다시 한 번 욱하는 성질에 등을 지긋이 즈려 밟고는 꽤액-- 하는 녀석을 무시한 채 교무실로 들어갔다. 아아,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 Track 03. Come Back Home Sung by 서태지와 아이들 “장선생!!!" 점심 값 굳었다는 생각에 노래를 흥얼대며 교무실에 도착하자 마자 엄청난 후광을 등진 교감이 날 부른다. 왜 불러? 씨발, 차라리 다 밀어버리지, 저 민망하게 남은 3가닥은 뭐야? 자존심도 없냐? “네, 교감선생님.” “잠깐 할 얘기가 있으니 교감실로 와요.” “네.” 라며 다소곳하니 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할, 오늘 지각한 것 때문에 그런가? 아니지, 이 정도는 지각도 아니지. 이 학교에 온지 2개월 그다지 큰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고 학교에서는 일단 난 착한 교사인데..... 으윽, 다시 생각나 버렸다. 내가 성질 다 죽이고 착한 척, 순진한 척,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이 학교에 적응해 가는 것도 다 그 씹새를 위해서였는데...... 아아, 가슴 아픈 일이지. 사랑의 힘으로 성격을 죽였다만 그 빌어먹을 사랑의 종말로 다시 성질이 기어나오니..... 붉은 색의 카펫이 깔린 교무실내의 복도를 지나가자 곧 교감실이 보였다. 원목의 핵상과 의자, 비싼 가죽 소파들. 저 새끼, 공짜를 밝히니 머리가 저렇게 까지지. 대머리가 괜히 대머리겠어? 학교 비품에도 요즘엔 기증서를 확실히 써야한다니까. 이 소파는 모모모 회장 어머니 드림, 저 기백만원은 나갈 듯한 박제는 모모모 어머님의 기증 식으로 말이야. “저기 장선생. 특활 맡은 거 없죠?” “네. 부임한지 얼마 안돼서요.” 하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내 더러운 성질을 커버해주는 유일한 나의 무기가 바로 나의 이 청순해 보이는 외모다. 체모가 적은 쪽이라 늘 하얗고 가늘게 쭈욱 뻗은 팔 다리 -이상하게 그렇게 쌈질을 하고 다녀도 정도 이상의 근육은 안붙더라.- 와 가는 허리, 그리고 아기 피부처럼 뽀얀 살결과 다소 중성적으로 보이는 나른해 보이는 눈매 덕에 사람들은 절대 내게 경계심을 갖지 않는다. 키가 180을 넘어 가다보면 왠만해서는 갖게 되는 꺽다리 특유의 싱거움도 없이 - 사람들은 내 키를 보통 176정도로밖에 안본다. 실제로 옆에 서고는 대부분이 놀란다. - 마디 마디가 가늘어 유난히 청순 가련형의 부드러운 남자로 비치는 게 나의 메리트이다. 뭐, 그렇다고 실제 성격까지 그렇다는 건 아니고..... 하여간 그렇다는 것이지. “그게 말이야...... 3학년의 체육, 전선생 알지?” “물론이죠.” 알다마다.... 그 놈이 날 얼마나 만만히 보고 갈구는데. 날 잡아서 습격이라도 해버려? “그 분이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 두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공백이 생기거든......” 어머, 설마 저더러 체육 교사를 하라구요? “저기..... 저 체육 잘하기는 하는데요.... 피부가 약해서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곤란하거든요.” 약하긴 개뿔. 그냥 체육복 입고 어슬렁거리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집에서야 츄리닝 이상 좋은 옷은 없지만 학교에서까지 뭣하러 그러고 다니나? 그리고 곧 날씨 더워질텐데. 우에엑!!! “그게 아니라..... 흐음, 우리 학교 농구부 알죠?” “네.” 물론 알지. 작년에 있던 학교가 체육이 유명한 공고였는데 그 학교랑 붙어 처절하게 깨준, 좋은 환경의 부자집 도련님들이 계시는 농구부라고.... 고등 학교 팀 중에 몇 년 째 지존을 누리고 있는 팀이잖아. 다만 그 부원들이 문제일 뿐이지. “그 농구부의 고문 선생이 전선생이었는데 말이지.... 그 선생이 없으니 새 고문을 정해야 하잖아.” “전...... 농구를 몰라요.” 일부러 눈을 풀고 불쌍한 표정으로 말하자 교감은 난처한 듯 흠흠거리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아, 어차피 전용 코치랑 트레이너, 감독까지 있으니 굳이 알 필요는 없어요. 그냥..... 고문이란 게 형식적으로 필요한 거니까......” 망할, 다 있으면서 고문이 왜 필요해? “저기..... 저 남자애들은 잘 못다루거든요......” 아예 패든가, 무시하든가 둘 중의 하나지. “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학교 애들 착한 애들이니까......” 이봐요, 영감탱이 지금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구? 우리 반에도 농구부 애 있다구. 그 새끼가 얼마 전에 다른 학교애들 직살나게 패놔서 사건 처리하러 미친 년마냥 뛰어다닌 내 모습을 벌써 잊었단 말야? 그리고 작년에 대대적인 사건으로 퇴학까지 갈뻔했던 고 3의 학생은 어느 부더라.....? “저기, 교감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른 선생님들께 말씀해보시는 게.......” 결국 제일 이용하기 싫었던 초강력 청순 분위기 어택을 가했지만..... 이 대머리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래, 잊고 있었다. 이 대머리가 나 고등학교 때 우리 학교 선생이었다는 것을...... “지금 맡길만한 선생이 없어요. 다들 각자 클럽이 있고 또 신입선생님들께는 무리라......” 저도 경력 3년 찬데요. “내가 장선생을 믿으니 맡기지 않소. 해보시오, 응? 좋은 경험도 될테고 학교 적응에도 도움이 돼고.....” 도움은 개뿔, 언제 때려칠지 모르는 학굔데......... “그냥 이름만 빌려준다고 생각하면 돼요. 할꺼지? 선생.....” 안하면..... 나 짜를꺼야? “네.... 일단은......” “그래, 고맙소! 허허, 내가 사람은 잘 본다니까......” 씨불탱이, 내가 만만해 보여서 그러는 거면서......... 하여간 그래서 난 한국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는 농구부의 고문을 맡게 되었다. 그것이..... 모든 사건의 시발이었다. 망할......... “그럼 오늘부터 새로운 농구부의 고문이 되주실 선생님이시다. 장인하 선생님..... 2학년들은 알지?” 앞에서 나를 한 번 쭈욱 훑어본 후 만만해 보였는지 피식 웃고 나를 소개하는 전속 트레이너의 얼굴을 한 대 갈기고 싶은 걸 참고 싱글거리며 웃어댔다. 생각 같아서는 저 앞에서 야리고 있는 두 놈과 저 뒤에서 퍼져자는 새끼 세 놈도 덤으로 갈기고 싶지만 참는다. 애새끼들 상대로 열 받는 것도 우습고, 결정적으로 난 나보다 덩치 크고 어린놈들은 질색이다. 거기다 운동을 하는 놈들이라면 더더군다나 질색팔색을 하니, 저런 놈들과 아는 체 할 필요도 없지. “안녕하세요.” 하고 최대한 살가운 미소를 날리자 옆에 옆의 코치라는 작자와 감독은 만족스러운 듯 나를 쳐다보았다. 왜 만만해 보이니 좋냐? 저것들이..... 어우, 성질대로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제부터 당분간 여러분들의 고문을 맡게 되었습니다. 농구에 - 미친 병신 새끼들에 마음에 -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잘해봅시다. 아, 2학년 문과반은 저를 알지만 다른 학생들은 잘 모르죠. 올 해 이 학교로 부임한 2학년 5반 담임이자 영어교사에요.” 인상이 찌그러지려는 걸 겨우 겨우 웃음으로 무마하며 생긋거렸지만 머리통은 이미 뚜껑이 울려있었다. “자아, 그럼 저기 주장은 3학년 7반에 유권형, 선생님께 잘 도와드려라.” 라면서 웃는 트레이너는 그래봐야.... 나는 있으나 마나한 인간이라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래, 무시하려면 무시해라. 너희한테 무시당하는 게 그 악몽의 날들을 떠올리는 것보다는 낫다. 망할..... 농구에 관해서는 조금도 좋은 기억들이 없으니.... 대체 농구의 어떤 면이 아이들을 그렇게 이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과거의 기억들 덕에 난 아직도 농구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다. “..... 네........” 한참 후에 무겁게 말을 한 놈은 바로 맨 앞에 서서 분위기를 잡고 있던 3학년 생으로 얼굴만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녀석이었다. 190이 훨씬 넘는 키에 쌍커풀이 짙게 진 눈매에 높지는 않지만 어딘지 자존심이 강해 보인다는 인상의 날카로운 콧선과 꽉 다문 굳은 입술까지... 그래, 그 녀석을 닮았어. 흐음.... 키까지 크군, 아니 키는 더 큰가? “잘 부탁해.” 예의상 웃고 인사를 한 후 다시 한 번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젠장, 농구부다 보니, 게다가 요즘 애들이 하도 발육이 좋아 고등학생들 주제에 모두 180은 훌쩍 넘어버렸다. 나 때만 해도 내가 전교에서도 제일 큰 키였는데 이제는 평균 조금 넘는 키라니. “자아, 그럼 바로 연습 들어간다. 체육관 5바퀴 뛰고 시작!!” 이라며 호루라기를 부는 트레이너의 지시에 따라 다들 정렬을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흐음, 트레이너 말은 잘듣네. 달리는 학생들을 보며 옆으로 비켜서서 리스트를 보며 명단을 확인했다. 흐음.... 있는 건 사진과 생년월일 이름, 그리고 키와 몸무게다. 확실히 농구부라 틀리군. 평균키는 186에 몸무게는 80. 으악, 돼지들. 팔랑팔랑 리스트를 넘기며 대강 학생들을 파악하는데 문득 저기 멀리 달려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데...... 3학년, 아까의 주장이다. 어딜 야리냐? 흐음, 기 싸움이다! 있는 대로 눈에 힘을 주고 바라보는데 나를 노려보던 녀석이 갑자기 시선을 돌리더니 다시 달리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헤헤, 이겼다. “선생님.” “아, 네.” 앉아서 리스트를 보는 사이 트레이너가 말을 걸어왔다. “2학년 중에 집 나간 놈 아시나요?” “네?” “2학년 4반 앤데.... 이틀 전에 집을 나갔나 보더군요.” 아, 얘기는 들었다. 아까 수업에 들어가니 그 커다란 덩치가 자리에 없어 과결 체크를 하던 게 기억난다. “네, 얘기 들었어요.” “4반 담임 선생님이 여자분인데다 지금 임신 중이라서요.... 고문 선생님이 좀 고생하셔야 겠는데요. 그 놈 농구는 잘하는데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전 그냥 트레이너라 학교 문제는 거의 터치할 자격이 없기 때문에.” 라며 말을 흐르는 트레이너는 속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망할...... 그 대머리 그래서 급하게 날 고문으로 넣은 거군. 젠장할, 내가 왜 그 커다란 자식을 찾으라구?? 우리 반도 아닌 자식을...... 으으..... 그 새끼가 어딜 가있을지 알 게 뭐야..... 아아악!!! 그 대머리, 내 전력을 알고 맡긴 거야. 크아아앗!!!!! 얼굴에는 웃음을 띄고 있었지만 머리카락이 불끈 불끈 하늘로 솟아 오를려고 한다. “그럼 부탁합니다. 여기, 그 녀석 집 주소와 연락처입니다.” 라고 종이 한 장 딸랑 주고는 서둘러 저 멀리로 가버렸다. “맙소사.......” 내가 미쳤지. 아무리 그래도 무슨 생각으로 고문을 맡는다고 했을까? 귀찮은 건 질색인데. 머리카락을 쥐어뜯다 다시 종이를 보니 말한 대로의 것들이 적혀있었다. 2학년 4반 48번, 이지혁. 아버지는 의사, 어머니는 문필가. 호오, 집안은 빵빵하군. 게다가 교우관계는....... 땡! 1년 3개월 동안 일으킨 사건으로 두 번의 정학과 작년 가을에 몰수게임에 참가. 이 딴 건 왜 쓰냐? 몰수 게임에 참가는 뭐야, 참가는 그냥 몰수면 몰수지. 흐음, 그렇다는 건 이 놈이 그 사건의 주범이라는 건가? 교우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이 농구부원들과만 친하다는 거지. 한 놈을 잡고 족쳐 봐? 2학년에 농구부들이 몇 명이 있더라.... 우리 반에 두 명이 있고 4반에 이 자식 하나, 그리고 10반에 세 명, 8반에 두 명. 역시 우리 반 녀석을 족쳐볼까? “후유..... 내가 미쳤지.” “열받앗!!!!” <그만 열 받아. 머리에 열나겠다.> 간만에 전화를 해 한다는 소리가 차였다는 거니 조금 미안하지만..... 모처럼 사촌인 상원이 놈에게 전화를 걸어 스트레스를 풀었다. <머리 좀 식혀라.> “........ 말도 하지 마. 열 받아서 돌아가시겠다.” 담배를 또 하나 꺼내들고 불을 붙였다. 이 시간에 내 전화를 받아주는 놈이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지. 이젠 친구라는 놈도 못믿겠고.... 흐응, 그러고 보니 세하 자식은 잘 있을라나? “씨발, 내가 이런 말은 안하려고 했는데..... 그 개새끼들...... 아우...... 정말 머리 뚜껑 열리겠다.” <........ 일단은 시간을 두고 지켜 봐. 어쩔 수 없는 거잖아.> “그럼 가서 죽여버리기라도 하냐? 아아, 운도 지지리 없지!!!” <그래서 이 새벽에 잠도 못자고 전화한 거야? 뭐라도 먹고 좀 자라. 내일 출근해야 잖아.> “씨발, 출근 안해!! 그 놈의 대머리 자식이 날 농구부로 넘겼단 말야, 니미럴..... 농구의 농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데...... 게다가 한 놈이 집을 나가셨단다. 으악!!! 내가 왜 선생이 됐을까????” <참아..... 니가 원해서 된 거잖아.> 차분한 목소리로 날 진정시키려 하는 사촌 녀석의 말에 맘에도 없는 말을 뱉어버렸다. “흥! 젠장, 그냥 체질에 맞는 조폭이나 되는 건데.” 툭 내뱉 듯 말하자 전화기 저편의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런 말 함부러 하는 거 아냐. 그리고...... 열 받는 건 알겠지만. 성준이 마음도 생각해 줘라. 너랑 15년을 같이 지낸 녀석이야. 그 정도면 너한테 온 몸을 다바쳐 충성한 건데...... 오죽하면 그랬겠니?> “.... 알아, 씨발... 그 녀석이 나 얼마나 좋아했는지 나도 알아. 나도.... 좋아했으니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녀석이 다시 한 번 김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안 묻냐?> “흥, 당연히 물어봐야지. 나 좋아해?” <......... 좋아해. 아주 많이.> 웃음기가 묻어나는 상원이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기분이 좀 풀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흐응, 나한테 충성을 맹세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나 예쁘잖아?” <그래, 예뻐. 이 악랄한 자식아.> “알았어, 끊는다. 좀 생각 좀 해야겠어. 꼬맹이가 커서..... 날 이렇게 엿 먹일 줄은 몰랐는데.....” <성준이 정도면 진짜 잘한 거지. 누가 니 성질에 배겨나냐?> “끊어라, 사촌. 다음에 얼굴이나 보자.” <응, 빨리 쉬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중학교 시절부터 친했던 성준이..... 이지메 당하던 녀석을 도와준 걸 계기로 그 놈에게 충성 각서까지 받아내고 내 밑으로 끼고 15년을 지냈다. 사촌인 상원이야 당연히 내 곁에 있는 거였고 그 조폭 새끼는 나한테 반해 헤롱거릴 때 내 수중으로 넣었고. 그러고 보면 진짜 친구 관계도 악랄하게 이어왔다는 죄책감이 들지만.... 그래도 그 놈들 나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내 성질에도 옆에 있어주는 거잖아. 그랬는데....... 왜 날 배신한 거니? 차성준..... 나쁜 자식. 그렇게 밤을 새고 다음 날이 되었다. 일단, 그 놈을 잡아야지. 부시시한 몰골로 대강 옷을 차려입으려는데 왠지 귀찮아져서 간만에 검은 색 니트에 청바지를 입고 학교로 향했다. 천천히 차를 몰아 담배 한 대를 피고 도착하니 저 멀리서 농구부와 축구부 애들이 엎치락 뒤치락하며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지각한 놈들도 열라 토끼뜀을 뛰고있다. 학교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열쇠를 손에 감아 돌리며 크로스백을 메고 교무실로 들어가 책상을 정리하고 출석부를 든채 문제의 녀석을 찾기 위한 계획을 짜고 교실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교실에 오면 인사도 받고 조례 비슷한 것도 해줘야 잖아. 아우, 귀찮아. “어이, 좋은 아침.” 문을 열고 그렇게 소리치자 아이들이 짧게 네에..... 하고 답한다. 저것들도 덜 깼군. “그럼 인사, 반장!” “차렷, 경례.....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하다. 농구부 애들 오면 둘 다 상담실로 오라고 해. 그리고 반장, 애들 자율 학습시키고 조례 때 안올라올 꺼니까 출석부 확인해라.” “네...... 저기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뭔가 말할 게 있는 듯한 반장의 눈은 팅팅 부어 진짜 떴는지 감았는지 조차 구분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반장 눈 좀 떠라. 왜 그렇게 눈이 풀렸어? 다들 정신 차려, 왜 그렇게 졸려, 표정이!” “졸려요.....” 라고 앞 자리에 작은 녀석이 말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니네 보니 나도 졸립다. 다들 수업 시간에 졸지 말고, 영어 시간에 보자!” 하고 교실을 나가려는데 반장이 우물쭈물하다 입을 열었다. “선생님!” “왜?” “저기......” “왜?” “태민이...... 집 나갔다는데요.......” 그러니까 말이지...... 그래, 4반 놈에 이어 이번엔 우리 반이냐? 망할, 줄줄이 비엔나로 같이 집 나가기로 약속이라도 한 거냐? 일단 다른 농구부인 경진이를 상담실로 부르기는 했는데 그 새끼가 알까? 아니지, 집 나갈 때 친구들 사이에는 연락처 돌리고 나간다는 법칙을 내가 모를 리가 없지. 훗, 내가 누구냐? 나도 집은 안나가봤지만 내 주변에 집 나간 친구들이 태반이었다. 그 중에는 지금까지도 안 들어가고 있는 새끼들이 있는데 내가 모를까? 자아, 어디로 샜냐? 친구 집이냐, 술집이냐, 아니면 사귀고 있는 애들 집이냐, 혹은 어디 주유소냐..... 가 문제로군. 똑똑-- “들어와라.” 잠시 훈 문이 열리며 포워드라는 우리 반의 경진이 자식이 들어왔다. 크다..... “부르셨다구요.” “불렀으니까 왔겠지. 앉아라.” 발로 앞의 의자를 터엉-- 차며 자리를 내주자 그 자식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에 앉았다. 왜? 내가 일어나서 정중히 의자라도 빼주길 바란 거냐? 미안하지만 난 이미 그 전의 담임이 아니다. “솔직히 불어라. 태민이 어디로 샜냐?” “..... 모르는데요.” “솔직히 불라고 했지?” “모릅니다. 같은 농구부라도 별로 친하지 않고 집 나간 놈이 연락하고 나갑니까?” “친구들끼리는 다 연락하고 나가잖아. 내가 모를 줄 아니?”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 녀석은 다시 인상을 찌푸린다. “아니면 알 것 같은 녀석이라도 불어. 안 그럼 다친다.” “몰라요.” “임마, 너는 모릅니다 밖에 모르냐? 아는 거 알아. 성질 건들지 말고 사실대로 뱉어.” 쌍욕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순화해서 말하는데도 녀석은 눈을 크게 뜨며 이상하다는 듯 나를 쳐다본다. 그래, 내가 이럴 줄 몰랐겠지.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그 험한 고등학생 녀석들을 보면서도 이제껏 욕 한 마디 안한 사람이니까. “어디야? 친구 집이야, 아니면 술집이야, 주유소야? 아니면 어디 여관에라도 쳐박혔냐? 아니면 애인 집이야?” “........ 몰라요........” 무표정한 얼굴로 모른다는 그 자식의 앞에서 일어나 녀석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녀석의 무릎을 발로 차고 왼손으로는 아파서 낑낑대는 자식의 목을 뒤에서 누르고 오른손으로는 녀석의 오른 쪽 어깨를 뒤로 잡아 빼주었다. “으악!!!”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불라고 했잖아. 그 자식 어디 갔어? 그리고 4반의 이지혁이란 놈도 어딨는 줄 알지?” “으악, 몰라요.” “모르긴 개뿔, 새꺄! 내 친구들은 가출 안했는 줄 아냐? 그 새끼들 집 나갈 때 짱인 나한테 다 불고 나갔어. 니네 리더 누구야?”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더 하고 위로 올리자 이젠 아예 비명을 지른다. “으아아악!!! 저는 몰라요, 그냥 지혁이 자식 따라서 나간 것 밖에는요. 그 자식 찾으러 간다고 갔어요!!!” “흐응.......” 헉헉대는 녀석의 어깨를 놓아주고 다시 앞자리에 앉아 바라보자 얼굴에 식은 땀을 흘리며 어깨를 주물거린다. “그러게 좋은 말로 할 때 불라니까. 니네 리더 누구야? 3학년 주장이냐?” “.........” 눈에 눈물까지 고인 놈이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가서 그 새끼 불러오고 넌 수업 들어가. 수업 빠지거나 튀면 너도 죽을 줄 알아.” “저기..... 권형선배..... 무서운데.....” “까불지 말고 넌 빨리 불러오기나 해.” 다리를 꼬고 강압적으로 말하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 자식이 문을 열고 나갔다. 흐응..... 하여간 애새끼들 다루는데는 매가 약이라니까. 일단 그 주장인지 뭔지를 불러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확인하고 족쳐서 찾아오게 만들어야지. 아이, 귀찮아...... 그런데....... 이 놈은 왜 안오지? 왜 안오는 걸까? 선생님이 불렀으면 재깍 재깍 뛰어와야지. 어디서 헤매고 있는 거야? 시간은 어느 새 1시간이 흘러갔고 이제 1교시 끝나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개새끼...... 아우.......” 이를 갈며 이 자식을 어찌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상담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 두개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즐겁게 웃으면서........ “그랬어? 애들이 말을 잘 안.......” ..... 듣냐? 망할, 저 둘이 같은 학교 선생이라는 걸 생각도 못하고 있었군. “어.... 상담실에 있었어?” 라며 말하는 건 미안한 듯 한 얼굴의 15년지기 친구 놈. 그리고 그 옆에 부동자세로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건 4년지기 애인 놈. “....... 응, 애들하고 상담 좀 하느라.......” 망할, 저 개새와 씹새를 같이 보다니. 나를 엿먹인 두 놈이 동시에......... 그래, 내 인생이 그렇지, 뭐. 내가 언제 일이 잘풀린 적이 있었나? 풀릴만하면 꼬이고 걸리고 끊어지고. 쳇, 이 때까지 살아있는 것만도 다행이지. “아, 성준이 너 3학년 7반 담임이지?” “어, 응......” “7반에 농구부 부장 있지. 그 놈 오늘 왔어?” “응, 권형이 왔는데.” “씹새끼, 왔는데도 안왔단 말이지. 죽었어.....” 낮게 씹으며 말하자 4년 지지 애인 놈이 고개를 들어 얼굴을 찡그린다. “선생 말투가 그게 뭐야?” “아가리 닥쳐, 새꺄! 니가 내 애인이냐? 뭔 상관이야?” “같은 선생님이잖아. 그게 무슨 말투야?” “나 원래 깡패야, 그거 몰랐냐?” “조용하더니 왜 그래, 사람이?” “너 때문에 열 받아서 그런다. 어쩔래?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할래?”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잠시 숨을 멈추고 눈치를 보던 녀석이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건.......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게 미안한 사람 태도냐? 이게 사람을 얼마나 호구로 봤으면 이 지랄이야? 내가 너한테 빠져서 헤롱대니 내가 인간으로도 안보이디? 씨발, 내 4년이 아깝다. 그 괜찮은 애들 다 차고 겨우 사겼더니만..... 으아아악!! 생각나게 하지마. 그렇지 않아도 애새끼들 일로 머리 터질 것 같아, 으악, 수업이다, 수업! 니네 둘 다 당분간 내 앞에 면상 들이밀 생각도 하지 마.” 마지막으로 일갈을 날리고 서둘러 상담실을 나와 교무실로 들어가 출석부를 찾았다. 망할, 3학년 7반이랬지? 두고 보자, 부장! <3학년 7반 유권형학생은 지금 즉시 상담실로 와주십시오. 3학년......> 결국 내가 한 방법이란 점심 시간에 방송 내보내기. 직접 쫓아가기도 쪽팔리고 그렇다고 그냥 놔두기도 벨꼴리니 부를 수 밖에. 농구부는 원래 4교시 수업까지만 받는 거니까 좀 있다 체육관 가도 볼 수 있겠지만 굳이 상담실로 부른 것은...... 내 심술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 자식을 여기에 오게 하고야 말겠다는 오기. 어우, 유치해. 먼저 녀석이 오기 전에 그 자식의 프로필을 살폈다. 3학년 7반. 귀환자녀. 아버지는 외교관, 망할이군. 하필 외교관이냐, 어머니는 바이올리니스트? 어쭈? 고1 때 한국으로 왔고, 가족 사항은 별 이상 없고. 학교 생활은 큰 문제는 없었던 듯. 하지만 이 자식이 리더라면...... 그건 농구부 주장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이 학교 짱이라는 거겠지. 내가 그 정도 모를까...... 흐응....... 애들은 이 자식이 휘어잡고 있을테니 이 놈만 족치면 되겠군, 그래. 발을 까딱 까딱하며 기다리는데 이 새끼가 20분이 넘도록 나타나질 않는다. 씨...... 직접 찾아가? 아니지, 선생으로서의 위엄이 있지........ 그리고 30분..... 가서 끌고 와 버려? 이를 으드득 갈며 자식을 기다리는데 순간 문이 열리며 엄청난 놈이 상담실로 들어왔다. 진짜.... 크군. 운동 선수답게 짧게 깍은 머리카락과 시원스레 째진 눈매, 그리고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 선에 비해 얼굴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작아 보였다. 떡발은....... 죽이다. 가까이서 보니 더 엄청난 놈일세. “왜 이렇게 늦었어?” “점심시간이라 밥 먹고 왔어요.”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며 의자를 향해 눈짓하자 그 쪽에 터억하니 앉는데...... 졸라 존재감 있는 새끼다. 으윽, 난 나보다 어리고 덩치 큰 놈들이 제일 싫어, 거기다 운동하는 놈들이면 질색이고 게다가 저렇게 잘생긴 놈이면 더 싫어!!! “너 이지혁, 어딨는 줄 알지?” 이 새끼의 눈매를 보아하니 아까 우리 반 경진이 같은 방법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 같아 말을 돌리기로 했다. 사람은 상대를 잘 보고 덤벼야 하는 법이니까. “............” “2학년 4반에 이지혁하고 5반에 강태민. 어디 있어? 두 놈.” “....... 알면 어떻게 하게요?” “어떻게 하긴, 잡으러 가야지.” “왜요?” “사람들이 시키니까.” “사람들이 시키면 다 해요?” “벌어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지. 누군 좋아서 니네 같은 새끼들 뒤치닥꺼리 하는 줄 아냐?” “... 그게 선생이 할 말입니까?” 라며 자식이 그 잘생긴 얼굴로 살벌하게 인상을 구긴다. 어쩔꺼냐? 나 때릴꺼냐? 니가 때리면 내가 맞고만 있을 것 같냐? “웃기지마. 너네한테 선생에 대한 조금의 존경심이라도 있으면서 그런 말 하면 할 말 없지만 늬들도 어차피 선생 개좇으로 보는 거 아냐? 나도 그랬으니 알아. 잔말 말고 그 새끼들 어딨는지나 말해.” “싫습니다.” “왜?” “당신 같은 선생한테 알려주기 싫습니다.” 하아, 이 새끼 봐라~ 머리에 근육만 가득 찼는 줄 알았더니 꼴에 할 말은 다 하네. “그럼 집 나간 채로 둘꺼냐? 막말로 나 같은 인간 아니면 누가 그 새끼들 찾아? 집 나가서 고등학교 졸업도 못하고, 늬들 목숨 걸고 하는 농구도 못한 채 굴러다니게 할꺼냐?” 삐딱하니 말하자 이 차가운 인상의 주장놈이 무표정하니 나를 응시해온다. 막말로 누가 그런 문제아들 굳이 찾으려 드냐? 냅두지. 어딜 가서 사고를 치든 말든 일단 학생의 입장에서만 벗어난다면 학교는 상관없는 거 아냐? 그래서 내가 우리 학교 깡패 애들 죽어라 자퇴는 못하게 했던 거구. 말썽을 피우려면 학생의 이름으로 거하게 문제 일으키고 학교에 엿이나 떡칠하라고...... 우리 같은 애들 학교 관두면 선생들이나 좋아하지, 누가 좋아하겠냐? 지들 인생만 조지는 거야. 죽을 때 죽더라도 학교에서 얼굴 도장 찍고 장렬하게 전사하는 게 집안을 위해서도, 죽은 후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지. “...... 제가 찾아오겠습니다.” “같이 가.” 딱 잘라 말하자 인상을 찡그린다. “선생들은 못들어가요.” “걱정 마. 나 누구도 선생으로 안보니까. 그럼..... 오늘 연습 끝나고 10시에 어디서 볼까?” “당신이 상관할 문제가 아냐.” 어쭈? 순식간에 당신이냐? 망할! 묘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신경질적으로 화를 내는 놈의 표정에 난 더 오기가 생겨 이죽거렸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츳, 누가 어쨌던 난 그 두 놈 잡아야 돼고 너도 그 새끼들 학교 관두는 거 싫음 협조해. 지금 당장 그냥 들어온다고 학교에서 문제없을 것 같아? 이런 문제는 내가 전문이니 길이나 잘 안내해.” “쫓겨나서 망신 당해도 몰라.” 라며 조금 전의 선생을 대하던 태도와는 달리 이젠 아예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반말까지 찍찍 싸댄다. 흐응..... “망신이야 내가 당하는 거 아냐?” “10시에 압구정.” “시계나 잘 보고 와라.” “그럼.....” 무뚝뚝하니 답한 놈이 문이 빠개져라 세게 닫고 나가자, 조금 신경이 풀렸다. 아우, 그 애물단지들, 걸리기만 해봐라!!!! 안쫓겨날려면 선생으로 보이면 안돼겠지...... 흐음, 원래 동안이라 나이는 문제 없을 테니 분위기가.... “후우........” 결국 퇴근 후 집으로 날아와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을 최대한 지저분하게 내리고 가장 케주얼한 차림으로 갈아입고 압구정 역으로 향해갔다. 그런데..... 어디서 기다려야 돼지? 다행히 역 근처에 오자마자 깔끔한 케주얼로 차려입은 몇 명의 무리를 발견했고 그들이 우리 학교 농구부라는 것도 알았다. 차는 당연히 두고 왔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어이, 시간은 칼이군.” 피식 웃으며 말하자 같이 서있던 네 놈이 동시에 돌아보고는 히껍한다. 왜? 너무 멋져서 놀랐냐? “으악, 선생님이 옷이 그게 뭐에요?” 라며 난리를 치는 건 우리 반 정경진. 뭐긴 뭐야? 옷이지. 검은 색의 헐렁한 니트에 청바지가 비정상으로 보이냐? 이 정도면 아주 깔끔한 차림 아냐? “뭔 상관이야? 학교 밖에서야 보통 사람인 걸. 어디냐? 빨리 가라.” 다들 꽤나 옷차림에 신경 쓰고 나온 듯 삐까리들 했다. 유행을 타지 않는 깔끔한 세미 정장에 럭셔리한 아이템들. 이래서 돈 많은 것들은....... “향수 써요?” 라고 인상을 구기는 건 주장 놈. “아니, 샤워 코롱.” “여자 꺼에요?” “공용이다. 어디야? 시덥잖은 소리 끊고 그 새끼들 있는 데나 안내해.” 고개를 틀며 말하자 말없이 걸음을 옮긴다. 압구정동...... 명세 놈이랑 사귄 후로는 거의 와본 적이 없는데. 그 새끼는 누가 오리지날 고지식파이니랄까 봐 가는 곳도 꼭 광화문이나 종로 쪽이었다. 녀석에게 맞추다 보니 자연히 나도 그 쪽에서 놀았고....... 으흑, 역시 아까운 내 4년. 그 녀석한테 잘 보일려고 발악을 했던 내가 불쌍하다!! “여기에요.” 라고 경진이 놈이 가리킨 곳은 「Moldiv」라는 작은 바였다. “니네 이런 데 다니냐?” 휙 돌아보며 묻자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요즘 어린것들은 진짜 좋은 세상 산다니까. 틀림없이 이곳은 내가 대학 시절에도 있었던 곳으로 비싼 칵테일과 양주만을 전문적으로 파는 고급 바로 회원제라는 명목하에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는 폐쇄적인 클럽이었다. “여기 회원제라, 회원 아님 못들어가요.” 라며 나를 돌아보는 주장. “나도 여기 회원이다. 됐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답해주자 주장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빈해 보였나? 뭐, 나야 친구 놈이 하는 바다 보니 무료회원이지만..... 그러고 보니 그 자식 오늘 나와 있으려나? 세하 자식이 있으면 찾기 쉬울텐데. “여기.. 회원 맞아요?” 경진이 놈이 놀란 듯 물어온다. “그래, 들어가자. 성우가 아직 있을지 모르겠네. 흐음......” “성우형도 알아요?” “뭐, 어쩌다 보니. 성우가 아직도 이 클럽 맡고 있냐?” “네, 여기 매니저에요.” “매니저? 허어, 이상하네. 둘이 깨졌나? 일단 가자!” 고개를 갸웃하며 일단 클럽 안으로 들어서자 멤버쉽 카드를 재시하라는 녀석들과 마주쳤다. 손쉽게 카드를 꺼내드는 다른 녀석들을 보고는 난 얼굴로 패스하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카드를 안갖고 갔기 때문에! 사실 어디서 굴러다니는 지도 모른다. “회원이 아닌 분들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내 앞을 막아서는 덩치를 보며 싱긋 웃고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4번 메모리를 눌렀다. “야, 난데..... 나, 니네 가게 안이다. 근데 카드 없다고 들어가지 말래.” 싱긋 웃으며, 그를 바꾸라는 세하의 말에 그 아저씨를 바꿔주자 갑자기 사색이 된 그가 전화를 끊고 90도로 인사를 하고 직접 자리 안내까지 맡았다. 역시... 조폭 친구는 둘만 하다니까!! “선생님....... 진짜 여기 사장이랑 아는 사이에요?” “사장은 개뿔!! 조폭주제에..... 내가 끼고 살던 놈이야. 고등학교 때는 귀여웠는데.... 새끼가 점점 커가면서 무식해지잖아.” 그래, 그 놈의 첫사랑이 나였다지? 뭐, 내 성질하고 악랄함에 놀라 나가 떨어지긴 했지만..... 흐음..... “자아, 그럼 두 놈 잡아야지!” 가장 중심에 있는 사방이 잘 보이는 테이블을 잡고 앉아 양쪽에 그 놈들을 끼고 앉으니 웨이터들이 알아서 주문을 챙기고 저 멀리서 아는 얼굴 하나가 서둘러 달려오고 있었다. “간만이다, 성우!” “어서 오십시오, 형님!!” 거의 90도 각도로 꺽어 인사를 하는 놈은 180에 가까운 키에 호리호리한 체격을 한 미청년이었다. 누가 저 놈이 이 쪽 조직의 보스 오른팔이라고 믿을까? 그 녀석의 기분 좋은 외모와 반응에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녀석이 자석에 이끌려 오듯 가까이 다가왔다. “응, 오랜만이네. 그런데...... 여기, 두 놈 오지? 이지혁하고 강태민이라고..... 여기 회원이라던데.” “아, 네. 최근 들어 자주 오던데요. 그런데 형님과.....” “응, 그 놈이 우리 학교 애물단지들이거든. 그 새끼들 잡아서 여기로 끌고 와. 도망가려고 하면 애들 동원이라도 해서!” “아, 네! 곧 수배하겠습니다. 걱정은 마시고..... 술은 늘 하던 걸로 드릴까요?” “응, 대강 아무 거나..... 어차피 곧 가야할테니까.” 싱긋 웃으며 답하자 성우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틀었다. “아, 성우야!” “네?” “세하 잘 있지?” “네, 형님 걱정하시던데요. 새 학교에 적응하는 게 괜찮은지.” 그 놈이야 내가 애들 잡아 죽이지 않을까 걱정이겠지. 뭐, 과거의 내 전적을 보면 그런 걱정을 들어도 할 말은 없지만...... “그래? 나 상당히 잘 살고 있는 걸. 너, 얼굴이 까슬하다. 잘 좀 먹어라.” “아뇨... 저야.......” “그래, 됐어. 가 봐!” 손을 휘휘 내젓자 그제야 안심했다는 표정으로 카운터 쪽으로 사라졌다. 저 녀석은 아직도 나를 보면 긴장을 한단 말야. 보통 사람들이 내 성격을 알고 긴장하는 거에 반해 저 놈은 내 얼굴만 보면 긴장을 한다.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는 내 얼굴 자체를 무서워한다는 쪽이지만. 대체 이 청순 가련한 얼굴 어디가 무서운 건지. 흥! 조금 이미지 관리를 해봐야 하나? “선생님.... 정체가 뭐에요? 정체가?” 어느 새 놓인 과일 안주를 집어 먹던 경진이가 신기한 눈으로 나를 보며 물어왔다. 정체는.... 무슨. 내가 지구 정복을 꿈꾸는 외계인이나 둔갑한 구미호라도 되는 줄 아냐? “정체는 개뿔! 이 나이에 저런 친구들 하나 둘 있는 게 뭐 대수라구.” “말도 안돼! 보통 선생님들은 조폭 친구 없어요. 설마..... 선생님......” 이라며 갑자기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경진이 자식을 노려보자 녀석이 수박을 하나 후루룩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소문이 진짜인 거 아니에요?” “소문?” 담배를 빼무는데 웨이터가 헤네시 한 병을 올려놓았다. 그 모습에 스트레이트 잔을 들자 단정한 자세로 잔에 따른다. “수고!” 낯 선 웨이터에게 싱긋 웃으며 말하자 그 역시 미소로 대꾸한다. 아아, 느낌이 좋군. 세하 자식 모처럼 괜찮은 놈을 쓰고 있잖아? “그나저나 소문이라니?” 잔을 한 번에 들이키며 말하자 경진이 놈이 신이 나서 주저리 댄다. “선생님, 전에 고급 호스트바에서 일했다던가.... 혹은 야쿠자 오야붕의 정부라고 하는 거요.” 빈 잔에 술을 채우다 녀석의 말에 그만 병을 떨어뜨릴 뻔 했다. 뭐가 어째? “뭐? 누가 그 딴 소리를 지껄여?” 하아, 내가 이 나이 돼서까지 늬들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어디 클럽에서 일한다느니 형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느니 - 그건 사실이었지만... - 날 입양하신 아저씨와도 그런 사이라느니, 아무나 원하면 대준다느니...... 허어.... 내가 왜 그 딴 소리 듣고 살아야 돼? 이래뵈도 나 졸업 때 조폭에서 스카웃 무지하게 들어온 오리지널 원조 깡패였다구!! 게다가 애들 다루는 방법도 악랄해서 그 근방에서 제일 무서운 인간이라고 명성을 떨쳤건만.... 왜 나보다 10살은 어린 놈들한테까지 그런 얘길 들어야 되냐구? “대체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애새끼들 떠드는 건 변함이 없구만. 뭐, 옛날보다 지금이 더 악질이기는 하지만. 세상에...... 내가 어딜 봐서 그런 짓할 인간으로 보이냐? 난 뻑치기 하거나 삥을 뜯으면 뜯었지 몸 팔진 않는다!” 자의로는...... 말이지. “그거나 그거나 아니에요? 치사한 건 마찬가지네.” 라며 사과를 어그적 대는 경진이 자식...... 이거 다시 보니 완전 또라이 아냐? “병신아, 그게 어떻게 똑같냐? 전자는 당하는 쪽이고 후자는 행하는 쪽이다. 난 절대 피해자인 척 하고는 못살아. 차라리 악당 소리를 듣고 말지. 망할...... 어떤 새끼들이야?” 열 받아 한 잔 더 따르는데 옆자리에서 잔을 따르는 내 손을 저지했다. “뭐야?” “애들 잡으러 온 거 아니에요? 그만 드세요.” 라고 하는 건 그 과묵한 주장 놈이다. “걱정 꺼라. 취할 정도로는 안 마셔. 그나저나 이 놈들은 언제나 오는 거야?” “잡기 힘들어요, 요리 조리 피해가니..... 그래서 태민이 놈도 직접 잡으러 온거구요.” “흐응? 그래? 그렇다는 건 결국 이지혁이 문제라는 거네.......” “..........” 갑자기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주장을 보나 나 역시 할 말이 없어져 다시 잔을 따랐다. 뭔가...... 상당히 걸리는 느낌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이 놈과 그 놈들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걸지도...... 흐응...... 잠시의 시간을 둔 후 술을 마시고 있는데 성우 녀석이 서둘러 달려왔다. “뭐야?” “저기 지혁이란 애 잡힌 모양인데요. 이 쪽으로 곧장 데리고 오는 중이랍니다. 따로 준비하거나..... 할 것은 없을까요? 룸으로 옮겨드릴까요?” “아니, 됐어. 그 새끼 오는 중이라구?” “네.” “한 놈만이야?” “네, 한 녀석은 아직인데요.” “그럼 됐어. 그 놈 하나만 제대로 끌고 와. 정신 번쩍 들게 해줄테니...... 후훗.......” 지혁이랑 태민이 놈이야 항상 착하고 부드러운 듯 했던 내 모습만 알테니..... 머리통에 도끼맞은 기분이겠지만 지금은 니네 머리가 깨지든 갈라지든 내 알 바 아니다. 난 늬들 반드시 잡아가야겠다. 막 따른 잔을 마시고 글라스를 내려놓는데 바로 앞에서 커다란 덩치에 싸인 그에 못지 않은 녀석이 이 쪽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후후, 드디어 잡혔군. 너 날 잘잡았다. 니가 죽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어이, 간만!! 이지혁!” 싱긋 웃으며 말하자 지혁이 놈이 인상을 쓰더니 날카롭게 대꾸했다. “뭐에요? 사람을.......” 화가 난 듯 이를 가는데..... 예쁘게 올라간 고양이 같은 눈에 흰자가 꽉 차 보였다. 저 덜떨어진 새끼가 어디서 눈을 치떠? “죽고 싶냐? 이 지혁?” 피식 웃으며 나간 내 말에 녀석이 놀란 듯 인상을 썼다. “내가 너 때문에 이 밤 중에 여기까지 왔는데 말야.... 진짜 만땅으로 열이 올랐거든. 씹새야, 누가 니 맘대로 집 나가래?” “..... 뭐에요?” 라며 소리를 빼액 지르는 녀석의 뒤에 서있던 떡대 둘이 녀석의 어깨와 목을 감싸쥐자 커억대며 나를 노려본다. 참, 다루기 힘든 놈일세, 저거! “야, 막말로 니가 우리 반이냐? 우리 옆반인 자식이 말이야..... 왜 집 나가고 지랄이야? 너 때문에 하기도 싫은 농구부 고문까지 돼서 잡으러 원정까지 왔잖아?” 말하고 나니 왠지 열받아 일어서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았다. “왜 때려요? 선생이면 다야?” “다야! 몰랐냐?” 하고 말하는 싸가지가 눈에 거슬려 발로 한 대 차주었다. “욱, 왜 그래요? 취했어요? 평소엔 욕 한 마디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내지른 녀석의 말에 우리가 있던 테이블은 썰렁해졌고 뒤에 서있던 성우 자식은 허파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씨발아, 그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는 거다! 내가 지금까지는 참았는데 말이지. 니네 하는 꼴들을 보아하니 더 이상의 인내는 내 수명을 줄일 것 같아서 말야. 이 싸가지야!!” 하고 뺨을 한 대 날리자 그 뒤에 떡대들까지 휘청하더니 그 놈의 면상에서 빨간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까불지 마라, 임마. 나 성질 더러워. 건드리지 말라구! 그리고 아울러 말하자면 집 나간다고 일이 다 해결되는 거 아냐! 난 너처럼 칭얼대리는 놈들만 보면 열이 확 오르거든.” 생각해 보니 더 열받아 한 대 더 때리려 손을 드는데 누군가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뭐야?” “애들 때리지 마세요.” 낮은 목소리로 위협하 듯 말하는 주장놈. 그 녀석과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손을 내려버렸다. 쳇, 졸라 박력 있네, 이 새끼..... 천하의 장인하가 쫄다니..... 아니지, 내가 약해진 건가? 으음.... 더 열받는군. “지혁이 너 그만 집어 들어가!” 타이르 듯이 말하는 주장의 말에 지혁이란 놈은 외려 지가 큰 소리다. “내 맘이야, 무슨 상관이야?” “너 자꾸 이럴래?” “이러든 말든 뭐가 어때서? 자기 일이나 잘해?” 갑자기 공중에서 스파크가 튀며 엄청난 신경전이 시작되었다. 허허..... 이게 무슨 일인가? 한 바탕 뒤엎으로 온 건 난데, 왜 저 놈이 더 난리야? 왠지 더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 질 것 같아 성우를 불렀다. “네, 형님......” “태민이란 놈 오면 지혁이 집으로 잡혀갔으니까 그 놈도 집에 들어가라고 전해라. 난 이 놈 끌고 갈란다.” “저기, 집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아니, 됐어. 일 잘하고 몸 조심해라. 나중에 시간 나면 놀러올게.” “그러세요. 형님도 많이 마르셨는데 몸조심하세요.” “난 원래 이런 체질이야. 그럼 간다.” 성우에게 인사를 하고 잡혀있는 지혁이란 놈을 인계 받아 귀를 잡아끌고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야, 늬들은 놀다 가던가 지금 가던가 알아서 해라. 계산은 안해도 될꺼야.” 짤막하게 말을 하고 그 놈을 끌고 나가려는데 열심히 과일을 집어먹던 경진이 놈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으악!!! 선생님이 학생들을 이런데 두고 나가면 어떻게 해요?” “씨발, 내 맘이다. 닥치고 넌 과일이나 쳐먹어! 내가 늬들 집까지 바래다 주랴?” “그런.... 선생님은 그러면 안되는 거에요!!” “선생님은 안되지만 난 돼! 나 이런 인간인 거 이제 알았겠으니 앞으로도 명심해라. 망할, 선생은 개뿔!!” 거칠게 말하고 나랑 비슷한 키의 녀석을 끌고 나가는데 이 놈의 난동이 장난이 아니다. 대체..... 이 새끼 무식하니 힘만 센 게 바둥거리는데 대책이 안서서 나가는 길에 다섯 번이나 걷어차야했다. “집에 안들어가요!!!” “닥치고 따라와라!” “젠장, 선생이 학생한테 이렇게 대해도 돼요?” “안됐지만 난 늬들이 학생이 아니라 웬수로 보이니까 이래도 돼!! 빨리 안따라 와?” 머리를 한 대 내리치고 겨우 문을 나오는데....... 바로 앞에서 나머지 한 놈과 마주치고 말았다. 제 2의 애물단지 강태민!! “잘만났다, 강태민.” “지혁아!!!” 퍼억--- 지혁이 놈의 귀를 잡은 채로 소리를 지르는 태민이 놈의 무릎을 발로 까주었다. “니 눈엔 지혁이면 보이고 선생은 안보이냐?” “헉, 선생님......” “그래, 선생님이다!! 이 새끼가 간이 부어터졌지, 집을 나가? 내가 학기 초에 뭐라고 그랬어? 학교를 말아먹든 삶아먹든 볶아먹든 상관 안할테니 학교만 나오라고 했지? 너 때문에 우리 번 무결석 상 못타면 책임 질꺼야?? 내 목표는 무결석 모범반이라고 했어? 안했어?” “해, 했어요......” 내 박력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얼떨떨하니 대답하는 놈을 다시 한 번 발로 차고 그 놈의 귀까지 잡아끌고 택시 정거장에 섰다. “골라라. 이 야밤에 학교 가서 운동장 100바퀴만 달릴래, 아님 우리 집에 가서 나랑 소주 10병 씩 깔래, 아님 나한테 10대씩만 맞고 집으로 들어갈래?” “아파요!! 귀 좀 놓고 말해요!!” 그래도 입은 살아서 나불대는 태민이 놈의 발을 꾸욱 밟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나만 골라. 원하는 대로 죽여줄테니.” 뭐, 그 태세라면 다들 3번을 고르겠지만...... 그 뒤에 후회는 막심이지. 나 힘세거든. 가볍게 세 대만 대려도 엉덩이에 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힘 조절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냥 집에 얌전히 들어가면 안될까요?” “어쭈? 이게 아주 뻔뻔스런 말을 하시네? 너도 양심이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오냐? 아유, 이 애물단지들아!!” 두 녀석의 머리를 잡고 박치기를 하자 불꽃이 튄다. 씹, 진짜 돌들이네. “내 친구들 같았으면 어디 하날 부러트렸겠지만...... 이제까지 내 이미지가 있어서 참는다. 쪼만한 것들이 어디서 치기를 부려! 진짜, 이것들을!!” 한 대 더 박아줄려다 생각을 바꿨다. 일단 내일 해결하자. “너희..... 좋아, 오늘은 여기서 봐준다. 내일부터 학교 확실히 나오고..... 특히 이지혁 너! 여기서 한 번 만 더 잡히면 그 때는 이 가게 조폭들 시켜서 조져놓을테니 알아서 해! 그리고 태민이 너는 오늘밤에 집에 들어가서 싹싹 빌고 어머님께 해외 여행 확인서 받아와.” “에? 저 해외 안나갔는데요?” 눈을 멍하니 뜨고 말하는 놈을 한 대 때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씨발, 니가 해외 나갔음 여기 왜 있어? 너 가출하면 정학인 거 몰라? 가서 엄마한테 두 손이 발이 되게 빌고 가짜 확인서 받아다 내라구. 학교에는 급해서 못 알린 걸로 하고! 외국에 계신 친척이 아팠다고 구라 쳐! 그리고 너 지혁이 너는 아파서 입원했다고 뻥까!! 너희 집안에 아는 의사 있을테니 적당히 사유서 쓰고!! 정학 먹고 농구부에서도 쫓겨나기 전에 알아서들 해! 대체가 무슨 일을 벌려도 생각을 하고 벌려야지!! 진짜 이래서 덩치 크고 무식한 놈들은 질색이라니까!!!” “씨발 학교 안다녀요!!” 하늘을 향해 외치는 나의 소리에 고양이 눈을 한 예쁘장한 놈이 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뭐야?” “학교 같은 거 안다녀요!! 무슨 상관이야?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허어, 이 놈 좀 보게! 이 거 완전 비행청소년들의 가장 기본적인 증상 아닌가? “그래서? 관심도 없는 사람들 관심 끌어보겠다는 거냐? 아니면 관심 없을테니 속 시원하게 사라져 주겠다는 거냐?” “.......둘 다에요......” “그래? 아직 이게 무서운 맛을 덜 봤구만, 그리고 근성이 부족해!!” “그 딴 거 상관없어요!!” “병신아, 너한테 무관심한 사람들 너 사라진다고 죄책감을 느끼거나 뭐 섭섭해할 것 같아?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하지, 아니 최악에는 없어진 것도 몰라!! 내 지론이 뭔줄 알아? 죽어도 내가 소속된 곳에서 죽자는 거야!! 말썽을 부려도 거기서 부리고 다쳐도 그 안에서 다쳐야 돼!! 왠 줄 알아? 그래야 사람들은 기억하거든. 니가 마음 좋게 사라져 준다면 니 뒷일 누가 걱정해? 게겨도 마지막까지 니가 싫어하는 것들 앞에서 게기라구! 보란 듯이 속 썩이고 뒤엎고 개망신 줘가면서 속을 뒤집어 놔야지!! 니넨 그런 근성도 없냐? 하여간 요즘 것들은 심약해서 안됏!” 머리를 한 대 내리치며 말하자 지혁이 놈이 또 그 큰 눈을 희번뜩 뜨며 나를 노려본다. “그게 선생님이 할 말이에요?” “이것들이 언제부터 날 선생 대접 했다고 선생, 선생 노래를 불러? 씨발아, 막말로 니네가 날 어리버리한 호구로 봤지 선생으로 봤냐? 그냥 만만하게 보다 그게 아니니까 선생이라는 이름 들먹거리는 거잖아? 알아? 난 그런 인간들만 보면 더 열 받고 캡 재수 없어. 니네 말대로 재수 캡이라구!! 니 새끼 내 수업 때마다 엎어져 자는 꼴 내가 성격이 좋아 참아 넘긴 줄 알아? 니네들 내 뒤에서 나 욕하는 걸 모를 정도로 내가 바보 같냐?” 사정없이 양심에 찔렸는지 태민이 자식까지 얼굴이 하얘져서 멍하니 서있는다. 망할...... 성질 다드러났잖아!! “........ 빨리 집에나 들어가라, 왠수들아!! 진짜 내 친구들도 이렇게 고생시킨 놈들은 없었는데..... 어째 조폭들보다 더 성질을 건드냐?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유언이라도 선생짓만은 안하는 건데...... 어우, 어웃!!” “죄송해요........” 태민이 놈이 갑자기 고개를 푸욱 숙이더니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허어, 왠 일이래? 저 가축같은 것이 저런 말도 다하고? “이지혁, 넌 빨리 집에 들어가! 집에 가서 확인해 봐서 없으면 넌 죽는 거야! 내가 이 쪽 조직 애들 다 풀어서라도 너 잡는다.” “흥, 웃기지 말아요. 선생님이 무슨 힘으로 조직을 풀어요?” 입을 삐죽 내미는 녀석을 보자 한숨만 흐른다. 이게 아직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네. “안됐지만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말이지..... 전교생의 50%가 조폭으로 전향하는 학교였고 내 친구 놈이 이 클럽의 오너이자 이 일대 잡고 있는 조폭이란다. 마음만 먹으면 돌 달고 바다로 잠수도 시켜줄 수 있어.” 아까 그 떡대들의 태도를 봐서인지 이 놈도 히겁하며 약간 뒤로 물러섰다. 츳, 꼴같잖게 어린 것들이 난리를 치니 나한테 이런 대우를 받지!! “빨리 기어들어 가. 안 그럼...... 진짜 조폭 부른다.” 내가 치는 고함 소리가 다 들렸는지 어느 새 문가에 나와 서있던 성우를 향해 슬쩍 보며 손짓하자 성우가 내게 꾸벅 인사를 해왔다. 그러자 더욱 얼굴이 새파래진 두 놈들을 보며 혀를 차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골라, 학교 운동장 100바퀴냐, 소주 10병이냐, 엉덩이 10대냐?” “........ 소주요.......” “그래? 잘됐네. 일단 우리 집으로 가자.” 감히 내 앞에서 술 얘기를 하다니....... 후훗..... 그래 소주 10병씩 까봐라. 세상 보는 눈이 틀려질테니. 중간에 토하거나 맛탱이 가면 억지로 깨우고 토하고 난 후에 또 먹인다. 어디 갈 때가지 가보자, 왠수들아!! 우리 집으로 돌아와 소주를 각 두 병씩 마셨을 때 즈음..... 지혁이 놈 눈이 뒤집혀 화장실로 뛰어가더니 거하게 토해놨다. 그렇다고 내가 봐줄 줄 아니..... 얘들아? “두 병이야. 아직 여덟 병 남았어. 원한다면 더 갖다 줄까?” “더 이상..... 우욱...... 못마셔요.” “그래? 그래도 마셔. 니네가 원한 체벌이야.” 소주 반 병 가량을 녀석의 앞에 놓인 물컵에 따라 주었다. 후후후....... 이 컵도 스스로 원한 거다. 바보새끼들, 술도 안마셔봤나? 소주 한 꺼번에 마시면 완전 죽음이라는 걸 몰랐더냐? “진짜..... 못마.....” 라고 마지막 말을 못끝내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임마, 일어나!!! 일어나서 술 마셔!!!” 쓰러진 녀석의 멱살을 쥐고 뺨을 때려도 영 소식이 없다. “마셔!!! 까논 술도 있잖아!!! 빨리 못마셔? 원래 남의 잔의 술은 마시는 게 아니란 말야!!!” “흐윽........” 취해 쓰러진 녀석의 위에서 열심히 뺨을 때리는데 갑자기 옆에서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 쪽을 보니 우리 반 강태민이다. 얼굴이 시뻘건 게 눈에 핏발까지 서서 울고 있다. 저 새끼..... 혹시 취하면 우는 타입? 으악, 난 그런 놈들 제일 싫어!!!! “선생님.... 후윽........” “으악! 왜 짜고 지랄이야?” “흑...... 지혁이 때문에 속 상해 죽겠어요......” 라며 눈물을 뚝 뚝 쏟는 녀석을 보고 다시 한 번 뻗어버린 지혁이의 얼굴을 돌려보았다. 역시..... 친구 이상의 뭔가가 있는 건가? “죽어라, 임마.” “우욱..... 매일 바람 피고 집 나가고. 지가 먼저 좋아한다고 해놓고......” 라며 비극적인 포즈로 한 잔 따르더니 마신다. 원래는 10병 마실 때까지 족칠 생각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 쪽보다 이 쪽 얘기를 듣는 쪽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옆에 앉았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사귀자고 해서 했고 섹스하고 싶다고 해서 했는데...... 자기는 매일 바람만 피우고. 나랑 시선도 안마주치고, 말썽만 부리고....” 허억...... 둘이 사귀는 사이라구? 어쩐지....... 친구 따라 강남 간다면 모를까 집 나간 친구 찾으러 자기까지 집 나가는 건 드문 일이지. “이유는 물어봤냐?” “몰라요. 얘기 안해요.” “그래? 너도 마음 고생이 심하구나.” “흑, 나 선생님 괴롭힌 것도 다 저 놈이 시켜서 한 거란 말이에요. 저 놈이..... 선생님 가방 들고 도망 가면 집 안나간다고 했단 말이에요. 근데 했어도 집 나갔잖아요.” 얼래..... 저 쌥새끼가 전생에 나랑 뭔 원수를 졌길래 나를 갖고 넘어지냐? 막말로 내가 저 놈 가방이나 지갑이나 훔친 적이 있냐? “나 저 놈 사랑해요. 이런 거 어른들이 보면 이상하고 웃기는 일이겠지만..... 나 진짜 사랑해요. 다시는 이런 사랑 없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사랑하는데...... 쟤는 나 사랑 안하나 봐요. 나 봐도 짜증만 내고.... 도망다니고.....” 이 놈이 말이지. 하는 짓이 좀 얄미워서 그렇지, 나도 솔직히 이뻐하는 놈이다. 큰 키에 약간 마른 듯 한 체구, 뼈대가 예뻐서 무슨 옷을 입혀도 뽀대가 나고 얼굴도 예쁘장하니 요즘 여자애들이 환장을 하고 좋아할 타입에 하는 짓도 그다지 밉지 않다. 가끔 심한 장난을 쳐서 그렇지..... 다른 놈이면 욕이 바가지로 나갈 짓도 이 놈이 하면 귀여워 보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도 이 놈을 조금은 사적으로 예뻐했더랬지. 역시 외모란..... “나 선생님 놀리려고 한 거 아니었어요. 선생님 좋아하는데..... 그래서 집도 안나갈려고 했는데.... 저 새끼가 전화해서 선생님 치마폭에 싸인 놈이라고 놀리는 바람에 잡으러 간거에요.” 하면서 아주 꺼이 꺼이 잘도 울어댄다. 일의 전말이 그런 거였냐? 이지혁이 저놈 지가 나랑 몇 번이나 마주쳤다고 애 마음을 이렇게 아프게 하나? 그리고 내가 어디 애들 싸고 도는 거 봤냐? 그냥 우리 반 놈들이니 대우해주는 거지? 진짜 저거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네. 보아하니 이 자식, 덩치만 컸지 수준은 완전 초등학생 수준인데...... “알았다. 너, 그만 들어가서 자라.” “흐윽, 술 다 마시고......” 부은 눈을 비비며 콧물까지 뚝뚝 흘리기에 휴지를 주고 방으로 들여보냈다. “됐어. 오늘은 봐준다. 그치만 다음에 걸리면 그 때는 진짜 죽어.” 그 덩치가 왠지 귀엽다는 생각에 머리를 한 대 치자 녀석은 코를 풀더니 그대로 내 침대 위로 널부러져 버렸다. 무거운 게 뛰어드니 매트리스가 출렁댄다. “꺼지면 안되는데......” 잠시 매트리스 걱정을 하고 나와 보니 문제인 지혁이가 거실 바닥에서 뒹굴거리고 있었다. 왠지 열이 받아 뻗은 녀석의 배를 퍼억--하니 밟자 갑자기 일어나더니 화장실로 뛰어가 다시 오바이트. 씹새, 저거 노는 거 다 구라 아냐? 술 그거 마시고 취하냐? “우욱.........” “어이, 살아있냐?” 겨우 화장실 문을 걸어 나오는 녀석을 보고 말하자 녀석은 히껍하더니 양손을 들어 흔든다. “저 더 이상은 못마셔요!! 저 죽어요!!” “그럼 여덟 병은 맞는 걸로 채울래? 아님 내일 운동장 80번 뛸래?” “차라리 내일 운동장 뛸게요!! 우웁......” 하더니 다시 화장실 행이다. 그래, 니 입으로 말했겠다. 내일 두고 보자, 이지혁!! 다음 날 아주 초죽음이 된 두 녀석을 새벽녘에 집으로 보내고 출근하니 내 말대로 잘 이행해 등교했다. 태민이 놈은 어머니 친필 사인까지 받은 해외여행에 관한 통보문과 지혁이 놈은 위궤양으로 인한 입원이란다. 그런데 그건 사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오늘 아침 집으로 들어간 녀석은 그대로 병원으로 갔고 거기서 가벼운 궤양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뭐, 술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내 알 바 아니고....... 뭐, 그래봐야 결국 입원 확인서는 짜가로 받았겠지만. 후후, 학생들에게 참 좋은 거 가르치지, 나? “선생님!!!” 막 교실로 조례를 끝나고 나오는데 태민이 자식이 뛰어나오며 내게 소리쳤다. “왜?” “엄마가 고맙다고 전하래요, 좋은 방법 알려주셨다고!! 제 동생 어제 집 나갔거든요. 거기에도 써먹으신데요!” 망할.... 누가 니 동생 집 나갈 때 써먹으라고 알려줬냐? 뭐 어차피 학교에서도 뻔히 아는 일 쉬쉬하는 거기는 하지만..... 아이구, 두야!! 저 자식도 진짜 말썽이네. “전교에 니 동생 집 나갔다고 자랑을 해라. 수업 시간에 졸지나 마!!” “헤헤, 알았어요. 엄마가 나중에 밥 산데요.” 전혀 반갑지 않다. “알았어. 얼른 들어가기나 해!!” 커다란 덩치가 그에 비해 작아 보이는 문으로 사라지자 난 조금 생각을 달리 하게 되었다. 선생이 된 거 어쩌면 조금은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라고. Track 04. 그댈 원했지만 Sung by 박지윤 & 박진영 “이번 주에 신성고하고 연습 게임 있는데요. 바쁜 일이 있으세요?” “하아..........” 바쁜 일은 없지만..... 흐음, 내가 왜 나의 피 같은 휴일을 투자해가며 저 애물단지들의 얼굴을 봐야하는 것이지? 주중에 보는 것도 지겨워 죽겠는데...... 체육관 벤치에 앉아 발만 까딱 까딱하며 인상을 쓰자 트레이너가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올 꺼면 올 꺼다, 말 꺼면 말 꺼다 빨리 하나 고르라는..... 흐으응........ 저 트레이너 새끼, 왜 저렇게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한 대? 앞에서 깝죽대면 이것 저것 재보기가 민망하잖아. 처음부터 맘에 안들더만, 하여간 미운 놈들은 끝까지 미운 짓만 한다니까. “생각 좀 해보구요, 일정은 없지만.... 사람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거잖아요?” 라고 이리 봐도 삐딱, 저리 봐도 삐딱하니 눈을 치뜨고 말하자 트레이너도 그 험상궂은 얼굴에 인상까지 써가며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본다. 씨발, 어딜 야려? 내가 그리 만만하게 뵈디? “....... 그래도 명색이 고문 아닙니까?” 고문은 무슨, 망할!! 저것들도 너도 감독도, 학교의 감시자 정도로 생각하면서 무슨. 이름만 고문이면 다 고문이냐? “글세요, 인간만사 알 수 없는 거라니까요. 시간 되면 나와보죠, 뭐.” 라고 크게 선심 쓰 듯 말하자 상당히 벨이 꼴렸는지 팽하니 돌아 연습하는 애들 앞에 선다. 사람이란 자고로 먼저 제압하는 자가 이기는 법이지. 내가 저자세로 나갔어 봐, 저거 학기 끝날 때까지 나한테 이런 저런 일 다 떠넘기고 자기가 다 해결한 냥 잘난 체 할 꺼 아냐? 내가 또 그 꼴은 못보지. 내가 저 지혁이 놈 잡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실연의 아픔과 배신의 고통으로 한참 힘들 때 저것들 치다꺼리까지 하는 내 기분, 잘난 농구 선수들이 알까? 나는 인간도 아닌 줄 아냐? 그렇게 상처를 받았으면 어느 정도 회복기를 줘야할 꺼 아냐? “어우, 짱나!!!” 이를 갈며 혼자 내뱉고 앞을 보자 앞에서는 커다란 녀석들이 미친년 널 뛰 듯 사방 팔방으로 뛰어 다니고 있다. 대체 저 단순하고 체력만 만땅으로 요구하는 운동이 뭐가 좋다고 저 지랄들을 할까? 아아, 생각하지 말자. 농구에 관해서 역시 좋은 기억이 전혀 없잖아. 농구........ 서윤진...... 망할 새끼...... 잊자, 잊어! 잊는 게 정신 건강 상 좋다, 장인하. 그런 인간 말종 기억해서 뭐 할래? 갑자기 생각나 버린 이름에 아파 오는 관자노리를 꾸욱 꾸욱 누르며 허리를 굽혀 앉았다. 체육관 밖에는 뜨거운 태양과 모래 바람, 그리고 체육관 안에는 그렇게 질색을 하는 공 소리와 덩치들의 정신 없는 움직임. 지옥이 따로 없군. “으악, 피해요!!!” 순간 귓가에 들려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자 내 얼굴 정면으로 날아온 농구 공!! 파앙--- 그 소리도 경쾌하게 얼굴에 들어맞은 농구 공은 내 얼굴을 바운드 해 나가 바닥으로 통통 거리며 굴러간다. 으, 으아...... “어떤 새끼야!!! 눈을 어따 두고 운동을 해!!!!” “죄....... 죄송........” 버럭 나간 내 소리에 답하는 것은 우리 반...의 옆 반의 애물...... 이지혁...... 아웃!!!! “너... 죽었어!!! 야, 공 가져와!!” “엑?” 공 가져오라는 내 말에 히껍한 녀석이 바로 옆에 있던 태민이 놈의 뒤로 숨었다. “어딜 숨어? 이리 안나와!! 너도 맞아봐!!” “으악, 선생님, 왜 그래요? 실수라니까요!!” “실수면 사람 죽인 것도 용서 돼냐? 너 이리 안나와!!!” 아까 내 얼굴에 맞아떨어진 공을 들고 그 쪽으로 달려가자 태민이 뒤에 있던 놈이 태민이를 방패로 요리 조리 잘도 피한다. “너 죽었어, 이지혁!!!!” 방법이 없다 싶어, 먼저 이미 날 한 번 물 먹인 태민이 자식을 쓰러뜨릴 결심으로 공을 들고 투수의 모션을 취했다. 한 번에 맞고 떨어져라, 강태민!! 멋지게 포즈를 잡고 공을 던지려는데 날아가야 할 공을 잡는 손이 있었으니...... 많이 봤던 손이다, 이거. “선생님, 지금 연습 중이에요. 참으세요.” 라고 하는 건 이 팀의 주장 놈...... 으윽..... 이거 왠지 묘하게 위압감이 있단 말야. 두근-- 순간 가슴이 찡하니 아파왔다. 왜 이러냐.... 이거? “그럼 니가 대신 맞을래?” “농구부 연습 중에 공 잘못 나가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 좀 참으세요.” 두근-- 낮고 부드러운 그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 아니, 사실은 요상할 정도로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 난 공을 들고있던 손을 내렸다. “흥, 농구부 놈들이 조준도 못해서 어쩔래?” 삐죽하니 말하고 공을 드리볼하며 걸어가 3점 슛 라인에서 슛 폼을 잡았다. “어엇!!!?” 모든 이들의 어방한 반응과 함께 내가 던진 공은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고 깨끗하게 골대를 통과했다. 흐응, 아직 실력은 녹슬지 않았군. 뭐, 옛날부터 슛은 잘 넣었으니까. 일단 게임을 시작하면 몸싸움을 너무 심하게 해서 문제였지. “선생님!! 농구 못한다면서요!!!!” 라고 소리를 빼액 지르는 강태민, 내가 농구를 잘하건 못하건 뭔 상관이냐? 왜 벨꼴리냐? “누가 못한다고 했냐?” “첫날 그랬잖아요.” “멍청아, 못한다는 게 아니라 모른다고 했다. 뭐, 그 사이에 뺐던 말을 모두 삽입하자면 「농구에 미쳐 날뛰는 병신새끼들의 마음에 대해서 모른다」고 한 거지. 농구 못한다고는 안했다. 참고로 나도 대학 때 잠깐 농구했었다.” 그 갈아먹을 자식을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1년 정도 동안 말이지. 그 후로 농구장이라면 이를 갈며 피해 다녔으니까. “잠깐이 아니잖아요, 그거 완벽한 포즈였다구요!!!” 라고 소리를 지르는 건 이지혁. 아아 저 놈이 포인트 가드였지. 저게 기껏 봐줬더니 어디서 눈을 치뜨고 바락 바락 대들어? 확 얼굴로 패스해 버릴까 보다? “가르치던 놈이 잘하던 놈이었으니까...... 뭐, 그런가 보지. 자아, 난 간다. 연습 잘하고 다음에는 삑사리 나게 던질 꺼면 트레이너 얼굴에 맞춰라.” 서둘러서 더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 체육관을 나왔다. 으악, 절대 생각하고 싶지 않아. 6월, 농구, 서윤진...... 나보다 나이 어리고 덩치 크고 건방진 데다 실력도 있고 예의 바르고 집안 빵빵한 더더군다나 잘 생기기까지 한 농구 선수...... 완벽한 키워드로군. 망할......... 체육관 문을 나오면서 은근슬쩍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팀을 정렬하는 주장의 얼굴이 보였다. 단정한 얼굴 선과 부드러운 말투, 게다가 인망까지 있는 좋은 성격.... 아아, 싫다. 나 설마 또 빠지는 건 아니겠지. “설마..... 내가 아메바가 아니고서야...... 하하하.......” 라고 웃어 넘겼지만 사실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새벽 2시. 혼자 머리를 싸쥐고 고민을 하다 결정한 게 고작 사촌인 상원이놈한테 전화해서 상담하는 거라니..... 내 인생도 볼 장 다 봤구나. <그래?> 어딘지 시큰둥한 반응에 눌려 난 거창하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생각을 해 봐!! 내가 말이지.... 내가 학습 능력 없는 바보가 아니구서야 설마 또 그런 놈한테 빠지겠어? 난 연하에 덩치 큰놈은 질색이라구, 게다가 농구하는 녀석이라면..... 아악, 싫어!!!!" <하지만..... 너 남자 보는 눈은 괜찮지만 남자 취향은 최악이라구.> “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남자를 고르는 눈은 좋지만 선택하는 남자 취향은 엉망이란 소리다. 대체가 너랑 안 맞는 녀석들을 고르니까 그런 거잖아.> "어, 비약하지 마. 나 그 녀석한테 반했다는 말은 안했어, 아직. 그냥 보면 심장이 두근 거리고..... 조금 신경이 쓰이는 거라니까." <...... 병신........> 에? 내가 잘못 들었나? 이 녀석이 나한테 절대 이런 말을 할 놈이 아닌데...... 허어, 기가 쇠해졌나? <장인하, 너 나 좋아하냐?> “그야...... 좋아하지. 친구잖아." 피 한 방울 안 섞인 사촌이기에...... 차마 「가족」.... 이라는 말은 입에 담지도 못한 채 그저 「친구」라는 틀에 녀석을 넣었다. 가장 가깝고도 편한 친구, 그게 나의 사촌 강상원에 대한 내 이미지였다. <.... 그래........ 친구 맞지, 우리.......> “그럼!!” 어딘지 근심이 느껴지는 목소리라 조금 뜸을 들이고 다음의 말을 기다렸다. 어디가 아픈가? 아님 새벽에 깨워서 화났나? <지금 나와라, [ Knives ]에 가 있을게. 빨리 와.> “지금? 뭐... 그래........” 무거운 목소리로 청하는 녀석의 요청에 OK를 날리고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술 마실테니 차는 두고 집에서 입던 트레이닝 복의 가벼운 차림으로 여름 샌들을 껴신고 가벼운 마음으로 뛰어나갔다. 간만에 술이나 마셔볼까.... 하는 기분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자주 다니던 술집이 호프집과 소주집을 거쳐 최종적으로 낙찰된 재즈바 [Knives]는 일종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다. 대학 시절에는 시간만 나면 와서 죽치고 있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동창이나 친구들의 모임 장소로 애용되었고 최근에 들어서는 혼자 오는 일이 많았다. 원래는..... 고등학교 때 친했던 나, 세하, 그리고 상원이와 꼬맹이....... 가 아니라 성준이 넷이 서로 인정한 애인들만 출입시키자고 굳게 약속했던 곳이다. 그래서.... 결국 첫 번 째 애인 놈은 들어온 적도 없었고 두 번 째 였던 명세 놈은 들어온다면 꼬맹이의 연인 자격으로 들어오겠지. 결국 이 가게에 정식으로 애인을 데리고 왔던 건 세하 놈 뿐이었군. 깡패 주제에 지지리 복도 많은 놈. 그렇게 착하고 예쁜 놈을 꿰차다니..... 부러운 놈..... “하이!!” 바에 들어가 먼저 들어와 구석 자리에 있던 상원이 놈에게 다가갔다. 집안에 있다 나왔는지 역시나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얼굴은 그다지 평온해 보이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깊게 드리운 눈가의 그림자. 저 녀석, 자기가 불러놓고는 왜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거야? “어?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프냐?” 오늘따라 유독 창백해 보이는 녀석에게 묻자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어서 앉으라는 고개짓을 한다. “나랑 얘기 좀 하자.” “응, 해!!” 가벼운 칵테일 종류를 주문하고 녀석에게 시선을 돌리자 상원이 놈이 오늘따라 분위기를 잡는다. 큰 일이라도 있는 건가? 회사 일, 아님 가족....? “...... 너 말이지...... 나랑... 살래?” 갑작스래 나온 상원이의 말에 꺼내들던 담배를 놓고 녀석의 얼굴을 한 번 들여다보았다. 어딘지 초점 없이 흔들리는 눈빛이 안타까워 보여 난 힘을 빼고 서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왜? 너 아파트에서 쫓겨났냐?” “.......... 나 좋아하지?” “응.” “그런데....... 나 사랑은 안하지?” 어두운 바의 조명 아래 비친 상원이 놈의 표정이 어딘지 상처를 받은 거 같아 즉시 답을 못하고 잠시 바라보았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데? 너처럼 축복 받고 자란 녀석이....... “... 질문의 요지를 파악 못하겠는데? 그 사랑이란 게 폭넓은 의미의 사랑을 말하는 거냐, 아님 섹스하고픈 사랑을 말하는 거냐?” “......... 둘 다야.” 잔뜩 할큄을 당한 듯 한 다갈색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가 상처 입힌 건가........ 그냥 사랑한다고 할 껄 그랬나...... “전자라면 「yes」지만 후자라면 「no」다. 너, 나랑 섹스하고 싶냐?” 직접적으로 날아간 내 질문에 상원이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그렇게 가슴 아픈 얼굴 하면 안된다고 했잖아. 난 나한테 징징대는 놈 질색이라구. “하고싶다면 하게 해줄 거야?” “아니, 난, 나 사랑 안하는 놈하고는 섹스 안해.” “널 사랑해.” “거짓말.” 나도 모르게 입이 먼저 움직여 상원이 놈의 고백을 막았다. 뭐, 이 자식이 나 좋아한다는 건 옛날부터 알고있었지만...... 그 좋아함이라는 게 과연 사랑일까? 진짜 이 녀석은 나를 연인으로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No」다! 어릴 때부터 나와 함께 커온 녀석이다 보니 내 성장과정과 그 여타의 주변 환경, 그리고 내 연애사까지 꿰뚫어 일종의 가족애와 함께 길러온 연민과 우정의 집합체 정도가 나에 대한 녀석의 감정이다. 그리고 이 녀석은 나에게 어떤 신성함과 함께 동경을 갖고 있던 터라 그 감정을 착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왜 거짓말이라고 단정하지?” “거짓말이니까...... 넌 나 사랑 안해.” “사랑해.” “아니다, 병신아! 사랑한다면 넌 날 진작에 잡았어야 돼. 하지만 넌 나 안잡았어. 그건 사랑 아냐.” “잡을 수가 없었어! 상처 주기 싫었으니까.... 니가 상처 받을 줄 알면서 어떻게 너를 잡아!” “내 연애사 보고도 그 딴 말을 하냐? 사랑한다면...... 니가 날 잡았으면 나 너한테 잡혔을 꺼다. 뭐, 3년 전 정도만 해도 나 너한테 잡혔을지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넌 나 사랑 안해, 바보탱아!” 어느 새 날라져온 칵테일 잔을 들고 쭈욱 마신 후 담배를 꺼내 들었다. 씨발.... 담배 줄여볼려고 했는데...... “정신 차리고 눈을 제대로 떠 봐. 그런 얼굴로 사랑한다면 누가 믿냐? 씨발아, 난 여지껏 두 번의 연애에 엄청난 녀석들만 줄줄이 걸려 머릿 통에 헤머에 도끼에 미사일까지 연발로 맞은 놈이다. 그런데....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으로 고백하는 놈 말을 믿으라구? 웃기네, 좇 까라 그래. 사랑에는 말이지 그 징후가 있어."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망할, 새로 나온 담배라서 펴봤는데.... 순하기는 해도 향이 개판이다. 으윽, 이 도라지 향기...... “첫 째 가슴이 두근 거린다. 둘 째, 보고는 싶은데 얼굴 보면 심장에 부담이 간다. 셋째, 앞에서 깝죽대도 패고 싶은 게 아니라 귀엽다고 생각된다. 넷 째, 조금 힘든 연애의 경우 피하고 싶으면서도 시선이 간다. 다섯 째 볼 때마다 만지고 싶어진다. 너의 해당 사항은?” 첫 째는 이 놈과 내가 안지 어언 20년 두근 거릴 시기는 지났다. 둘 째는 이 자식 표정 보면 심장에 부담은 전혀 없어 보인다. 셋째는 패스. 넷 째는 우리가 막말로 피가 섞였냐, 가족끼리 안면 트고 지내길 하냐 전혀 문제 없음이고 다섯 째는....... 나야 모르지. 이 놈이 알지. “............ 모두 다 해당이라면?” 헤엑? 어어, 아닌데........ 이게 아닌데....... “웃기지 마라. 넌 나 불쌍해서 그러는 거야. 나 보면 잘해주고 싶고 친절하게 하고 싶지? 그리고 가끔은 만지고도 싶은 거는 같아. 하지만 그건 니가 날 잘 알고 내가 예뻐서 그런 거야. 젠장, 나도 거울 보면 가끔 내 얼굴 만지고 싶다고는 생각한다. 하여간 얼굴은 예쁘잖아.” 그래, 사랑이란 거는 그 사람이 예뻐서 만지고 싶은 게 아니라, 아무리 미워도 못생겼어도 예뻐보이고 아무리 우라부락해도 만지고 싶은 거야. “나... 너 사랑해.......” 순간 심장이 철렁 주저앉았다. 이게....... 진짜 큰 일이 있는 건가? 표정이 왜 이래? 항상 무표정하던, 그래서 마치 화난 듯 보이던 녀석이 아예 핏기가 가신 채 얼음처럼 굳어있다. 그리고 그 안에 유일하게 슬픈 빛을 띤 눈동자. 상처받은 거야...... 그것도 굉장히 큰..... 자신도 알지 못하던 엄청난 상처가...... 어쩌면 나보다도 더 크게, 더 잔인하게 상처받은 얼굴이다. 나야, 원래 회복력이 강하다지만.... 이 음침한 놈은 어쩌면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확 스쳤다. 대체 어떤 일로 이 단단한 놈이 상처를 받았을까? 절대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던 이 고래심줄 같은 신경의 소유자를. “너..... 무슨 일 있지? 왜 그래?” 그 차갑게 얼어붙은 얼굴을 손을 들어 감싸자 녀석이 스르륵 어깨에 기대어 온다. 분명히 키는 나보다 조금 작지만 항상 강해 보이던 어깨가 조금씩 떨리며 내 품안으로 안겨왔다. 몸이 싸늘히 식은 것 같은 느낌의 체온에 얼굴을 어깨로 안고 이마에 키스를 해주었다. “모르겠어........ 아무 것도 제대로 된 게 없어.” “괜찮아. 곧 괜찮아져. 뒤죽박죽이면 어때? 정리가 안되도 그냥 두고 살면 돼........” “훗, 넌 역시 터프해.” “나처럼 살아 봐라. 뒤죽 박죽이고 정리되고 가릴 틈이 있나.” “응, 그래........” 내 어깨 안에서 눈을 감는 녀석을 살며시 끌어안고 시선을 돌렸다. 대체 뭐가 이렇게 이 놈을 상처받게 했을까? 나야 상처도 잘 받고 치료도 잘하지만 이런 놈은 안된다고.... 그러니까...... 그냥 같이 살아? 뭐 나쁠 건 없지. 정신 차릴 때까지만이라도 같이 지내고 다음에는....... 싫다, 그럼 내가 또 상처받을 꺼야. “후우.........” 무거운 한숨을 몰아쉬는데 바의 중심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날카롭게 찢어지는 여자의 음성. “왜 그래요? 진한씨!!” 뭐야? 사랑싸움인가? 싸울려면 나가서 싸워. 그 녀석을 안은 채 안 쪽의 동황을 살피려는데 문득 바에 앉아있던 한 남자가 이 쪽을 향해 걸어왔다. 큰 키에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자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 한...... “손 치워.” 차갑게 나를 향해 떨어지는 언어 폭력에 난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올려다봤다. 술을 어디로 처마시고 꼬장이야? “넌 뭐야?” 지지 않고 대꾸하자 우악스러운 힘으로 내 팔을 상원이에게서 떼어냈다. “씨발, 개새끼, 너 뭐야? 상원아!!” 정신없이 눈을 감고 있던 상원이의 팔을 잡은 그는 상원이를 대롱대롱 든 채 험악한 기운을 뽑아냈다. 그 기세에 희미하게 눈을 뜬 상원이는 나와 그를 번갈아 보고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방금 전의 표정들과도 닮기도 한 그런 것이었다. “........ 손 놓으세요. 인하야, 나중에 연락......” 그는 경어를 섞어 쓰며 또박 또박 말하는 상원이를 등 뒤로 숨기며 내게 세찬 싸대기를 선사했다. “뭐.......... 야? 넌 뭔데?” “내 꺼다.” 지옥 끝까지 깔린 것 같은 무거운 음성에 놀라 그 예의 없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가 어째? 니 꺼라구? 뭐가? “그러니 앞으로는 손댈 생각도 하지마.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마치 자신의 소유권을 주장하 듯 상원이의 팔목을 세게 쥔 채 숨긴 그의 모습에 난 벙쪄 입을 헤에 벌리는 수 밖에 없었다. 상원이 자식, 이제껏 애인 있다는 말도 안했었는데....... “당신이 뭔데 인하를 때려?” 상원이 자식이 화가 났는지 그에게서 빠져나오려 애를 쓰며 소리쳤다. 대체가..... 말이지. 애인 사이는 맞는 거 같은데..... 상황이 이상하잖아. 저 녀석이 이제껏 내게 말을 안한 것도 그렇고 저렇게 서로의 의견이 엇갈리는 것도 그렇고, 헤어지려는 건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그 렇다면 오늘 상태가 안좋았던 이유가 저 남자? 이런 저런 생각에 인상을 쓰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을 해봐라, 상원아. “자기 좋을 때만 부려먹는 거 치사한 거 아냐? 이제 이 녀석 놔줘. 사람 갖고 노는 것도 정도 껏 해, 예쁜 얼굴을 하고 악질이잖아!” 상원이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폭언을 쏟아내는 그에게 난 아방한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그랬다구? 내가 상원이를 이용했다구? “이봐, 아저씨, 날 언제 봤다고 반말을 찍찍 싸대? 그리고 난 이 놈 사촌이야. 친척끼리 친하게 지내는 게 잘못이야?”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 몸 팔아먹었던 더러운 새끼가 어디서 감히 가족 어쩌고 나불대?” “사장님!!”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상원이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이 인간이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하, 상원이가 말했을 리는 없으니 나름대로 조사를 하셨나? 내가 그 정도로 눈에 거슬렸나 보지? “인하야........” 성질대로라면 저 인간의 면상을 그대로 쳐박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차마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나에게 어떤 폭언을 붓고 어떤 모욕을 하든 상원이 놈의 연인이다.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저 심지 굳은 놈을 상처 입힐 정도로 깊은 관계의 사람이니....... 도저히...... 주먹을 쥘 수는 없었다. “이 개새끼 데리고 꺼져라. 상원아. 나중에 얘기하자.” 이를 악물고 부들 부들 떨리는 주먹을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쥐었다. 상원이가 상처받을까 봐 참는 거야. 유일하게 날 인간 취급해 줬던 가족이야. 20년을 알아온 친구이고.. 절대 저 놈만큼은 상처 입히면 안된다. 온갖 야비하고 더러운 짓 다 해봤지만 그것만은 해선 안될 일이라는 거 너무 잘 아니까 참는 거야. 저 놈 상처 입히면 넌 개도 아니다, 장인하. “나중은 없어. 이게 끝이다. 두 번 다시 만나게 하지 않을 꺼니까.” 차갑게 떨어지는 그의 말에 상원이의 얼굴이 하얗게 굳은 채 순식간에 그의 팔을 떨치고 나와 그의 뺨을 올려붙였다. “인하한테 함부로 대하지 말아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20년을 사랑한 녀석....... 이에요.” 그를 향해 울분을 터뜨리는 듯 소리를 지른 상원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맺혀 떨어지지 않는 눈물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 왜 그런 표정을 하니? 또 내가 불쌍해 보이냐? 저건 잘 나가다가 가끔씩 사람을 열 받게 한단 말야. 그렇게 불쌍하고 안됐다는 눈으로 보지 마. 그래서 나 너는 절대 사랑 안하기로 했던 거라구. 나만 보면 불쌍해서 죽으려고 하는 놈하고 어떻게 연애를 하니? “..... 사랑이 아니라...... 동정이겠지.” 얼어붙어 버린 나의 목소리에 상원이는 당혹스러운 눈길을 보내왔지만 난 그 시선을 피하고 그 이상한 불청객을 향해 말했다. “이봐요, 아저씨!! 이 놈 좀 챙겨다 정신이 번쩍 나게 만들어. 아저씨는 맘에 안들지만..... 이 녀석 그래야 정신 차릴 꺼야. 20년 동안 나를 불쌍하게 보다니...... 진짜 열 받잖아. 짜증나!! 다른 녀석들이라면 죽도록 패버렸겠지만 이 놈은 내가 좋아하는 놈이니 체벌권 넘겨줄게. 상처 입히지 말고 정신이 번쩍 들도록 사랑해 주라구! 진짜...... 애물단지야, 이거.” 녀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상원이는 확실히 상처받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20년을 날 불쌍하게 여겨준 친구, 그리고 앞으로도 평생을 내 옆에 둬야할 친구다. 그러니 행복해야지. “난 날 불쌍하게 여기는 놈이랑은 절대 연애 안해. 그리고 자지도 않아. 그러니 포기해라, 사촌아!” “인하야.......” “잘 생각해 봐. 넌 날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내가 불쌍한 거야. 난 그런 동정 바라지 않아.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는데? 너한테 가끔 못되게 군 거 그것 때문이야. 니가 이런 표정으로 볼 때마다 나 진짜 열 받는다구. 나 원래 악랄하고 나쁜 놈이니까..... 나 같은 거 생각도 하지 마. 나쁜 놈은 원래 오래 오래 잘 사는 법이잖아. 이제 널 끌어주는 손을 잡고 가. 미련 두지 마. 사촌아.” “아냐.... 그런 거 아냐.......” 더듬 더듬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는 사촌에게 난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말로 잘라냈다. “맞아! 나 내가 생각해도 불쌍한 놈이야. 그러니까....... 절대 나 불쌍해 하는 놈하고는 안사겨. 난..... 날 잘났다고 생각하는 놈하고만 잘꺼야. 그게 내 지론이야.” 그 놈의 지론 한 번 거창하군. 망할..... 지론은 무슨 개뿔!! 저 놈 하나 책임질 자신 없어서 그런 거면서..... 그래, 나도 사실 이 사촌 조금은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게 안되는 거잖아. 나 불쌍하게 여기고 안됐다고 생각하는 놈을 사랑해서 나한테 좋은 일 없는 거잖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이렇게 착한 녀석 곁에 있으면 징하게 매달려 버릴꺼야. 이 놈의 약한 부분 이용해서, 악랄하고 잔인하게 뼈까지 벗겨먹을 테니까, 넌 너를 위해서 나한테 다가오면 안돼. 나 진짜 나쁜 놈이라니까. “그럼 얘기는 끝났군. 다신 이런 식으로 마주치지 말자구, 장인하.” “마찬가지야. 아저씨, 진짜 성격 나쁘잖아. 나도 나쁜 놈이지만 아저씨도 어지간하네. 이 놈은 나쁜 남자들한테 인기 있는 형인가 보지? 잘 데리고 살아. 상처 입히면...... 달밤에 칼 맞을 꺼야, 씨발 새끼야!” 간만에 웃으며 협박해 보는군. 눈은 빙그래 입은 이죽 씨죽! 한쪽 입술 끝만 살짝 올린 채 평소 성격대로 하니 그 쪽도 조금 놀란 눈치로 입술을 씹는다. “생각보다 성격이 험하군.” “원래 생겨먹은 게 이래서!” “그럼 협상은 종료된 거겠지. 가자.” 나와 이야기를 마친 그가 정신이 반쯤 나간 듯 한 상원이의 팔을 잡고 썰렁한 바를 가로질러 문을 나섰다. 그리고 그에게 버려진 여자가 하나...... 저 쪽에서 멍하니 서있고. 난 시켜놓은 술이 아까워 일단 다시 앉아 한 모금 들이켰다. 바 안이 정리되자 다시 시작되는 음악 소리...... 흐응....... 간만에 듣는 「Harlem Blues」였다. 신다 윌리엄스의 깨끗한 보컬에 처량한 기분이 더욱 고조되었다. 친구 하나 보내고...... 둘 보내고...... 사촌도 보내고...... 애인한테도 차이고...... 남은 건 내 한 몸뚱이구나. “젠장, 할렘으로나 가버릴까 보다........” Track 05. 악동 보고서(YO!) Sung by 신화 조금은 힘들었던 주간을 지나 주말이 되었다. 원래는 절대 올 생각이 없었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길래 농구부의 연습 경기를 참관하기로 했다. 꼴에 고문 선생이라고 대접은 해주는구만. 벤취 자리를 주다니. 편하게 앉아 멍하니 경기를 관전했다. 농구 룰은 기본적으로 아니까..... 뭐, 룰이 문제가 아니라 저 놈들의 경우는 몸싸움이 도져 패싸움만 안일으켜도 다행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무리지 싶다. 어째 시합에 들어가기 직전부터 상대팀 녀석들과의 신경전이 만만치 않으니...... 허어.....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경기를 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민이 놈이 시작한지 5분만에 테크니컬 파울을 먹었다. 세상에나, 전에 있던 학교도 농구부가 있어서 좀 아는데 고등학교 시합에, 그것도 연습 시합에 테크니컬 파울을 먹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로 저 놈들이 굉장하다는 소리다. 아니 굉장하다기 보다는....... 상태가 안좋은 거겟지만. 생각 같아서는 박수치며 응원이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대머리 교감과 코치들의 눈총을 받을 것 같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표정으로 시합을 지켜봤다. 진짜...... 파울 잘한다. 저것들 농구는 안배우고 파울하는 법만 배운 거 아냐? 게다가 태민이 놈은 왜 저리 날뛰는 거야? 상대팀의 한 녀석이 볼을 몰고 가 드라이브 인을 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민이 놈이 몸을 날려 반칙을 해버렸다. 오옷!! 저 엄청난 덩치를 비호와 같은 몸놀림으로 날려서까지 파울을 범하다니!!! 그 비장한 희생정신만은 높이 쳐주고 싶다만.... 이거 잘하다간 몰수 게임이 되겠는 걸. 보이지 않게 히죽거리며 관전하는데 태민이의 필살의 파울을 당한 녀석이 마루 바닥에 쿠당하며 격렬한 소리를 내고 널부러졌다. “욱, 아프겠다......... 츠츳.......” 덩치가 크다보니 그 소리까지 요란해 혀를 차며 그 쪽을 보자 상대팀의 선수 하나가 다다다 달려오더니 태민이의 멱살을 쥐었다. 호오, 드디어 육탄전이 전개되는 건가? 후훗, 좋아, 아주 좋아!!! 코치들이 정신 나간 틈을 타, 작게 박수를 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그 쪽을 보자 쓰러져있던 선수가 일어나며 태민이에게 시비를 걸었다. 진짜.... 잘하면 몰수게임 되겠군. 그러고 보니 저 놈 작년에도 몰수게임에 주범 중 한 명이었다지? 흐응, 지 버릇 개 못준다더니...... “츠츳........” 고개를 설래설래 또 한 번 흔들고 다시 보기 시작했다. 싸움은 양팀 코치들과 주장의 무마로 겨우 안정되고 프리드로우로 들어갔다. 후훗,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프리드로우까지 주냐? 하여간...... 태민이 저건 얼굴은 곱상하게 생긴 게 말이지..... 성질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뭐, 그 덕에 재미는 있지만...... 프리드로우 두 개 모두 노골!! 그리고 다시 시합이 시작되었다. 물론..... 태민이의 반칙도 재개되었다. 연습 시합이라서인지 쿼터제가 아닌 전후반제로 경기를 치뤄져 힘들었던 전반이 끝나자 모두 벤취로 돌아왔다. “태민이 너 왜 그래? 자꾸 이럼 너 정규 선수에서 빼버린다?” 감독의 엄청난 목소리에 남아도는 포카리를 마시다 열라 깨지고 있는 녀석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점수는 이 쪽이 더 높지만..... 그만큼 파울 수도 많다. 그러고 보니 저것들 전국대회 우승까지 간 거 다 파울로 이겨먹은 거 아냐? 아이구, 장하다. “지혁이 넌 또 왜 그렇게 빌빌대고? 연습 시합이라고 우습게 보는 거야?” 우습게 본다구? 설마..... 아까 태민이 자식 눈에 살기 도는 거 못보셨나? 이 감독 아직 사람 보는 눈이 없군. 후훗...... 작게 키킥거리며 그 모습을 감상하는데 그 작은 소리를 감독이 들었는지 신경질적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선생님!! 선생님도 뭐라고 좀 하세요!!!” 왜.... 내가 뭔데 뭐라고 하나? 난 그저 하찮은 고문 선생일 뿐이네. “웃고 계시지만 말구요!!!” 우욱, 그 사이에 내가 웃는 걸 다 봤나? 하긴 아직도 표정이 콘트롤이 안되니. 난 싸움하는 것만 보면 입이 찢어진단 말야. “제가 뭐라고 한다고 되나요? 왜요? 재밌는데요? 왜 더 해보지 그러냐? 강태민, 아예 애들 다 조져 버려서 못 뛰게 해! 혹시 아냐? 너도 이 나라 최고의 바스켓 플레이어 킬러가 될지? 할려면 아예 팔꿈치로 코뼈를 치던가 복부를 발로 걷어차 버려!! 그럴 배짱 없으면 아예 하질 말든가, 하여간 소심해서는..... 츠츳!! 나 같으면 신경에 거슬리는 놈들 시작 3분 안에 저 안에 못서있게 했을 꺼다.” 심각한 얘기를 하면서도 입술이 사정없이 찢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어린놈들 농구 관전도 꽤 재밌잖아. 왜 이런 걸 여태까지 안했을까? “선생님!!! 그게 지금 할 말이에요?” 화가 난 코치와 감독이 모두 날 노려 보길래 어깨를 으쓱하고는 음료수 하나를 더 뜯어 빨대를 꽂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럼 지금 하지, 언제 해요? 이왕 몰수당할 꺼 화끈하게 당하면 좋잖아요. 그치만 병신새끼들이 그 정도로 크게 사고칠 자신 없으니 자꾸 엄한 등이나 치고 밀고 하죠. 나 같으면 그 자식 고자 만들어 버렸을 껄. 어설프게 등만 떠밀고 신경질은 안내!! 강태민...... 너도 사내자식이냐? 씨발, 나 같으면 죽여버렸다. 뭐, 그래서 내가 운동을 못하는 거기는 하지만..... 후훗....” 빨대를 빙빙 돌리며 웃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한 녀석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안에는 황당하다는 듯 얼굴이 굳어버린 주장도 있었다. 미안타.... 그치만 성격이 원래 이래 먹은 걸 어쩌겠니? 하여간 저 자식은 심장에 안좋다니까....... 흐응..... 그래서 결국 좀 더 비꽈 줄래다 참고 겨우 표정을 굳혔다. “강태민!!” “..........” “어설프게 할 꺼면 하지를 마. 너 아까부터 자꾸 11번 갖고 넘어지는데...... 그 애랑 무슨 원한인지 몰라도 개인적으로 풀 일이면 경기 끝나고 죽여놓던지, 아님 경기 안에서 확실하게 꺽든지 해! 니가 지금 하는 짓은 겁 많은 양아치 새끼들이 하는 짓이야. 스스로 꼴불견이라 생각 안해? 넌 깡패 축에도 못끼고 플레이어도 아냐, 개새끼야!” 딱 잘라 말하고 음료수를 다시 빨아대니 감독과 코치, 덤으로 대머리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왜, 씨발!! 휴일에까지 나와서 좋은 충고 해주는데 뭐가 어때서 저래? 음료수를 마시며 남방에 있던 파란색이 들어간 안경을 끼고 싱긋 웃으며 그 녀석들의 배알을 뒤틀어주었다. “어딜 야려? 쉬고 나가던지, 그대로 저기로 쳐들어가서 11번 사단을 내던 지 맘대로 해. 그대로 두 번 다시 농구할 맘 없으면 니 맘대로 하세요!! 니가 농구를 하던 못하던 난 상관없으니까.” “화...... 나셨어요?” 차가운 내 말에 쫄았는지 태민이 놈이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작게 물어왔다. “아니, 난 재밌었어. 난 싸움 구경 좋아하거든. 싸움하는 녀석들을 싫어할 뿐이지.” 무심하게 얘기하고 체육관 안을 쭈욱 돌아보는데 당황한 코치의 외침이 들려왔다. “자!! 다들 5분 간 휴식!!” 그 소리를 듣고 흩어지는 녀석들을 보며 빨대로 음료수를 쭉 쭉 빠는데 태민이 놈이 갑자기 내 옆으로 와 털썩하니 앉는다. 참.... 무거운 놈이 앉으니 의자가 다 덜컹거리데. “왜? 할 말 있냐?” “화내지 마세요...... 이제 안그럴게요.” 얼라? 얘가 왜 이런데? “저 놈이...... 지혁이랑 바람났던 놈이에요..... 그래서 화가 나서 그만........” “11번?” “...........” 말 없이 끄덕하는 놈을 보고 반대쪽의 11번을 보니 불가사의한 생각밖에는 들지를 않았다. 어떻게 저 얼굴에, 저 스타일을...... 허거덕.... 저 놈이 테크닉이 죽이나?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태민이 놈과 비교가 되지 않는 놈이다. 아니지, 성격이 착할지도..... 라고 생각했지만 태민이 도발에 번번히 걸려들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녀석을 생각한다면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거길 차버려!” “네?” “저 놈의 거시기를 발로 차버리라구! 어때? 바람핀 놈인데.” “그치만........” “누가 경기 중에 차래? 끝나고 나가다 슬쩍 걷어차고 나가. 저 놈도 죄가 있으니 뭐라고는 못하겠지.” 얼마 남지 않은 음료수를 쭉쭉 빠는데 태민이 놈이 진지하게 내 말을 곱씹고 있다. 아이구, 이 빠가야!! 그걸 진짜 할려구? 차라리 야밤에 야구 빠따 들고 덮쳐라. 하여간 근성이 없어요, 근성이!! “됐다, 내가 어린애들 데리고 이게 무슨 짓이냐? 나 같으면 지혁이 자식을 먼저 아작냈을 꺼다.” “.......... 나 그 놈은 진짜 좋아해서 못패요!” “그럼 그냥 참아. 괜히 쓰잘데기 없는데 신경질 부리지 말고. 오늘 시합 잘 끝내면 내가 밥 사줄게.” “진짜요?” 어느 새 들었는지 경진이 놈이 내 등에 찰싹 붙어서는 눈을 반짝여댔다. 씹, 이건 시합도 안나간 새끼가!! “시꺼, 누가 너 사준대?” “에엑? 선생님 왜 차별대우해요? 태민이만 예뻐하고!!” “니가 예쁜 짓을 하냐? 맨날 돼지 같이 쳐먹기나 하고! 음료수 니가 반통은 다 먹었잖아, 경기도 안하는 놈이 무슨 수분이 부족해서 반 박스를 비우냐?” “선생님도 같이 비운 거에요!!!” “닥쳐라, 정경진!! 졸 꾸사리 먹고 찌그러지기 싫으면 음료수나 따먹고 있어.” “치잇, 선생님은 태민이만 예뻐해........” 라면서 자기 자리로 가더니 바닥에 뭔가를 놓더니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이라기엔 묘한 그 움직임에 눈을 돌려 자세히 보니....... 망할, 공기를 하고 있다. 저거 대체 왜 저래? “너, 뭐하냐?” “공기요, 선생님도 같이 하실래요? 전 어차피 오늘 안나가요.” “관두자...... 어우, 진짜!!! 또라이 자식......... 가만, 너 포지션이 뭐지?” 뭔가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물어보니 경진이가 배시시 쪼개며 답한다. “포워드요.” “S?" “아뇨, P." “흐응, 그래? 그렇단 말이지....." 뭔가 생각나는 바가 있어 태민이의 어깨를 투욱하니 치고 코치에게 다가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다음 시합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경진이 놈이 말이지...... 먹는 것에 대한 근성이 장난이 아니거든. 시합이 바로 시작되기 전에 코치는 태민이를 쉬게 하고 경진이를 불러 냈다. 같은 표지션이니 상관 없겠지. “정경진!” “네?” 몸을 풀고 있는 녀석에게 싱긋 웃으며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저 11번, 조져 놔. 눌러버리면 오늘 점심 내가 쏜다.” “진짜요?” 눈을 반짝이는 녀석에게 웃음이 삐져 나오는 걸 겨우 참고 머리카락을 흐트러주었다. “그래, 너 특기있잖아. 그냥 서있기만 해도 애들 튕겨져 나가는 거. 별거 없이 저 11번 앞만 줄기차게 막으면 돼. 알았지?” 말도 안되는 내 명령에 감독과 코치가 뭐라고 하려 했지만 곧장 시합이 시작되어 무시당해 버렸다. 잘해라, 정경진!! 니 떡발과 힘으로 눌러버리라구!! 가끔 연습을 지켜보다 보니 저 놈의 특기가 눈에 띄였단 말야. 저 놈은 진짜 쳐먹는 것도 오살나게 먹더니 몸도 잘 만들어 놔서 굳이 파울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달려들던 상대가 그대로 튕겨져 나가기 일수였다. 뭐, 그 덕에 여지껏 농구를 하는 거겠지만 말야.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고 곧 시합이 시작되었다. 점프볼을 하고 공은 우리 쪽, 경진이 놈은 내 명령대로 착실하게 그 11번을 마크해 주었다. 계속해서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11번을 손을 든채 몸으로 막는 경진이 덕에 그 놈은 골대 앞에 제대로 가보지도 못한 채 이리 튕, 저리 튕 팅팅팅 농구공만큼이나 여러 번 바닥에 엎어지고 깨지며 튕겨져 나갔다. 그 모습에 연신 킥킥대며 웃는 나를 바라보는 코치와 감독, 그리고 시합 중 기가 막히다는 듯 나를 돌아보는 주장놈의 얼굴 따위 그 모습의 즐거움에 비한다면 별 거 아니었다. “쿠쿠쿡...... 키킥...... 너 죽인다..... 정경진..... 아주 맘에 들어......” 시합은 물론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정리를 하고 나오는 중에 난 죽어라 웃어 재꼈다. 너무 웃겨서 할 말이 없었던 거다. 시킨다고 그렇게 잘해내다니 말이야. 난 내 말 잘 듣는 놈은 무조껀 좋아하거든. “밥 사줄꺼죠?” “그래, 당연하지. 근사하게 사주마. 이 선생님을 믿어라...... 쿠쿡...... 진짜 웃기네......” 거의 죽어갈 것 같은 나를 보며 코치와 감독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왜? 내가 즐거워 하니 기분 더럽냐? “선생님..... 작전 지시는 제 몫입니다. 아무리 담당 고문이라 해도 이런 건......” “아무튼 이겼잖아요? 이겼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깨를 들썩이며 말하자 감독은 얼굴이 하얘지며 뭔가 내게 화를 내려는 포즈가 되었다. 흐응, 간만에 맘껏 긁어줄까나? 이 감독 꽤나 유명한 선수였는데 사생활 문제랑 알콜 중독으로 관뒀었지. 예전에 윤진이가 TV에 나왔던 그를 보며 했던 게 기억났다. 1년 전까지는 유명한 실업팀에도 있었는데.... 그 뒤의 일은 나도 잘모른다. 어떻게 돼서 교동학교 감독으로 오게되었는지는....... “장선생님, 자꾸 이러시면......” “아아, 일단 시합은 끝난 거잖아요. 자아, 가자!! 경진아 나랑 밥 먹으러 가자.” 경진이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하자 경진이는 스포츠 가방에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 신나게 웃었다. “많이 사주시는 거에요. 중간에 많이 먹는다고 구박하기 없기!” “그래, 배 터져 죽을 때까지 먹어봐라.” 한 주간의 지겨운 생활을 말끔히 정리해주는 듯 한 시합이었다. 이제 자주 보러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태민이를 쳐다보자 잔뜩 기가 죽었던 녀석이 마주봐 왔다. “너도 갈래? 후반전에 못나갔으니 밥 사줄게.” “진짜요?” 라며 이 녀석도 대번에 달려든다. 어린것들이라 단순해서 좋단 말이야. 킥킥대며 가려는데 코치와 감독, 그리고 주장과 다른 농구부들의 눈초리가 뒷 통수에 찔렸다. 왜 저래? 내가 이쁜 놈들 밥 좀 사주겠다는 데. “가요!! 맛있는 거 사줘요!!” “그래.” 간만에 기분이 좋아져서 걸음을 옮기려는데 주장이 눈에 밟혔다. 에이, 사주는 김에 같이 사주지 뭐. “야, 주장, 이지혁, 늬들도 와라. 선생님이 쏜다.” 피식 웃으며 말하자 지혁이와 주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그럼 말고...... 에이, 그러지 말고 그냥 오지. “싫어? 밥 사준다니까.” “됐어요.” 한숨을 내쉬는 주장의 말에 어쩔 수 없어 두 놈을 데리고 가려는데 저 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부웅하니 달려왔다. 검은 색의 가와사키였다. 이런...... 저거 쓰는 놈들 폭주족 아니면 스피드에 미친 놈들 뿐인데. 고개를 갸웃하며 그 쪽을 보자 열심히 달리던 오토바이가 내 앞에 와 멈춰섰다. 얼래? 의아한 눈으로 아는 놈이 있나 하고 돌아보니 폭식돼지 정경진의 얼굴이 굳어가면서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이 바르르 떨었다. “아는 사람이야? 경진아?” “........ 몰라요.” 라고 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려있다. 그게 모르는 표정이냐? 비슷한 덩치의 녀석들을 팡팡 튕겨내는 이 녀석이 이렇게 파르르 떨다니 웃기는 일이라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녀석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놈은 그렇게 무서운 놈도 아니었다. 그냥 평균 정도의 키에 눈매가 부리부리한 고등학생 정도의 남자애랄..... 까? 아니지, 조금 나이가 들어보이기는 하는데. “가자, 경진아!” 상대가 그렇게 말하자 이 놈이 갑자기 내 뒤로 숨어든다. 이 놈아, 니 덩치로 내 뒤에 숨는다고 안 보이겠냐? 니 어깨 내 두 배라구, 두 배!! “나와!” 라고 윽박지르는 그 녀석의 얼굴에게 난 위압적으로 밀어붙였다. “뭘 나와? 왜 남의 학생한테 난리야?” 삐딱하니 말하자 그 쪽은 인상을 구기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눈매가 굉장히 매서워 보여 순간 조직 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다물고 아직 떨고 있는 경진이의 손을 꽉 쥐어주었다. “남의 꺼에 손대지마. 얼굴 보니 다른 남자도 많을 것 같은데.” 허어, 이 놈 좀 보게? 뭐가 어째? “이 놈이 니 꺼라는 증거 있어? 도장이라도 찍어놨냐? 이건 내 꺼야.” 정확히는 내 학생이지만........ “빨리 안나와? 정경진, 돼지새끼!” “씨발아, 니가 뭔데 이 새끼 보고 돼지 새끼래? 이게 폭식증이 있긴 하지만 내 새끼야!” 그러니까........ 우리 학생이라구...... “넌 뭐야? 뭔데 그 새끼 싸고 돌아?” 소리를 버럭 지르는 녀석의 반응에 열받아 앞으로 나서려는데 내 앞에 커다란 그림자가 막아서더니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진이 담임 선생님이에요. 왜 오신 거에요?” 「선생」이라는 주장의 말에 녀석이 갑자기 눈빛이 온순해지더니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주장과도 아는 사이인가? “......... 경진이 형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만.......” 이라고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러자 뒤에서 들리는 왁자한 웃음소리들, 저 새끼들 다 알고 있었던 거 아냐? 아우, 씨발. “경진이 담임 선생님이 스물 아홉이란 얘기를 들어서....... 새로 오신 선생님인가요?” “나 스물 아홉 맞는데.” 경진이 형이라길래 조금 성질을 죽이고 답하자 그 쪽은 손을 들어 내 뒤의 경진이를 잡아당겼다. “빨리 와.” “싫어, 안가! 선생님이 밥 사준다고 했단 말야!!” 허어, 이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애 같은 반응이냐? 이거 완전 유치원생 아냐? “내가 사줄게, 빨리 와!” “싫어, 형 싫단 말야!!” 라며 앵앵되길래 남의 가족 우애 망쳐놓기 싫어 나를 잡고 있던 팔을 떼어 그 놈에게 넘겼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형이라니 준다. 이 새끼 굶기지 마.” “선생님!! 나 선생님 따라갈래요.” “왜 애같이 그래? 나중에 선생님이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형 따라 가라. 급한 일인 모양인데.” “싫은데........” 눈에 눈물까지 고여 글썽거리는 녀석을 보자 순간 내 안에 있을 꺼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부성애가 끓어올랐다. 망할...... 내가 이렇게 착한 인간일 줄이야. 흐윽,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나중에 사준다니까. 형이 부르잖아.” “하지만.......” “가자, 정경진. 그럼, 선생님 경진이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가라.” 나보다 어린 거 같기에 끝까지 반말을 쏘고 끌려가는 녀석을 보는데 그 놈은 가기 직전 뒤를 돌아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저게 왜 저래? “경진이형 브라더 컴플랙스에요. 경진이 그것 때문에 질색을 하는데.” 주장이 돌아서며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숨을 내쉰다. 어린 놈이 무슨 한숨이 저렇게 많냐? “그래? 형하고 안닮았네. 아아, 이런 오늘의 히어로가 가다니. 우리 둘이서라도 밥 먹으러 가자.” 고개를 옆으로 틀고 말하자 태민이가 고개를 끄덕여 먼저 그곳을 빠져나갔다. 가는 내내 멀리서 바라보는 주장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일단 오늘은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지나치게 저 놈과 접촉하는 건 내 수명을 줄이는 일이야. “이상하죠?” 일식집에 들어와 음식을 시키고 앉아 있는데 태민이 놈이 문득 입을 열었다. 뭐가 이상한대? “뭐가?” “우리 말이에요. 경진이, 지혁이, 주장... 이렇게 넷이요, 어쩌다 보니 같이 다니게 된 거 같은데 알고 보니 집안 사정이 다 비슷해요.” “그래? 뭐가?” 막 잡은 신선한 돔을 먹으며 궁금해 묻자 녀석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길게 말할 태세로 입을 열었다. “다들 부모님들이 재혼하셨거든요. 지혁이랑 주장 부모님 재혼하고 저도 아버지가 재혼해서 새 어머니랑 살거든요. 그리고 경진이도 새 어머니고. 거기다.......” “거기다?” “주장이랑 지혁이 원래 사겼었어요. 뭐, 부모님 재혼 전에 주장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헤어지기는 했지만.......” 순간 그 이야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어쩐지 분위기가 이상하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군. 둘이 사겼었다니..... 어째 그림은 된다. “지혁이 부모님 재혼했는데 주장 어머님이 잘해주시는데도 자꾸 다른 데로 나돌더라구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주장네 어머니 굉장히 친절하고 부드러운 분인데.” “그래? 사정이 있나 보지. 혹은 아직 주장에게 미련을 못버렸다던가.” 욱하는 심정에 툭 뱉고 나니 태민이 표정이 흐려진다. 이런..... 완전 내가 괴롭힌 꼴이잖아. “왜 그래? 표정이.” “그거 맞을 거에요. 지혁이 아직 주장 좋아해요. 그래서 주장이 좋아하던 선생님 괴롭히고.......” “주장이 좋아하는 선생님?” 선생이라는 말에 놀라 묻자 녀석이 히껍하더니 다시 젓가락을 집어든다. “왜 그래?” “아, 이거 맛있다. 고마워요, 선생님 맛있게 먹을게요.” “........ 그래, 먹어라.” 녀석이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기세라 나도 포기하고 다시 회를 집어들었다. 어쩌겠어? 그 자식이 좋아한다는 사람 얘기는 나랑 상관 없잖아. 내 꺼 될 것도 아니고..... 그 놈이 좋아하는 선생이라면 1학년의 예쁜 처녀 선생? 아니면..... 옆반의 신선생, 아니지 그 여자는 기혼녀에다 임신까지 했는데..... 아니, 녀석의 성적 취향을 두고 고려한다면 남자일 가능성도 있지. 남자라면...... 부모님 재혼이 작년이었으니 그 전이라면 혹시나 성준이? 하긴 그 놈 예쁘고 사근사근하니까. 선생이라는 말에 잠시 설래여 했던 내가 바보지. 멍청이....... 그 놈이 내가 농구부 고문되기 전에는 날 알기나 했었냐? 관두자, 장인하, 비참하다. 너 쳐다보지 않는 놈에게는 미련 두는 거 아냐. 그것도 이미 다른 사람 있는 놈을..... Track 06. 깡패들의 천국 Sung by DJ DOC 시간은 대강 대강 흘러 곧 6월이 되었다. 학교 안 정원에는 녹음이 가득하고 학교 전체에는 장미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 삭막한 남고에 왠 장미 정원.... 이냐고 생각했지만 여름이 되어 만발하니 꽤나 조경에 신경 쓴 듯 그 화려한 자태가 드러났다. 처음 부임했을 때는 앙상해 보이던 교정이 이젠 붉은 색과 녹색의 화려한 조화로 현기증이 일 정도로 아름답게 꾸며지고 그 선명한 색채에 머리가 어지럼증이 일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녀석에 대한 미련도 어떤 정리도 하지 못한 채 어중간한 채로 이 시간까지 닿아있었다. 어린 놈이 뭐가 좋다고..... 솔직히 이게 확실한 사랑이라는 장담은 못하겠다. 아직 스스로는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이고 이건 단순히 흥미정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스카웃 문제로 주장이 코치와 감독을 따라 학교에 안나왔다는 얘기를 듣자 마자 왠지 맥이 빠지는 게 사랑의 징후가 아닐까... 도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두근거리는 정도 밖에는..... 하긴 성 불능인 내가 그 이상의 자극적인 상상을 하는 것도 안 어울리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얘기지. 답답한 마음에 수업이 없는 5교시를 이용해 상담실에서 담배를 빨고 있는데 누군가가 후다다닥 달려와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뭐야?” “선생님!!! 큰 일!! 큰 일 났어요!!” “뭐야? 정경진!! 농구부 새끼들이 패싸움이라도 하냐?” “어떻게 아셨어요?” “뭐야? 왜?” “3학년 형들이요 선생님 욕하는 거 보고 태민이가 대들다가 지금 지혁이까지 합세해서 싸우고 있어요.” “주장은?” 아차, 대학교에 갔지!! “무슨 일인데? 선생들 욕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태민이 놈 왜 그런 데에 일일이 도발당하는 거야?” “그게.......” 내 질문에 머뭇거리던 경진이가 겨우 이을 열어 엄청난 얘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다. “선배들이..... 선생님이 태민이 예뻐한다고...... 둘이 사귀냐고..... 태민이가 기둥 서방이냐고.... 그런 얘기해서.......” 허어, 기가 막혀. 우리 반 놈 좀 예뻐하는 게 잘못이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리고 왠 기둥서방? 얘기를 듣자 서서히 그 이야기들의 뼈대가 잡혔다. 무슨 소리 했을지 뻔하지, 개새끼들. 또 남창이 어쩌고 저쩌고 호바얘기부터 과거사까지 드러내며 ‘내가 어디서 뭘 들었는데~’ 라는 식이겠지. 씹새끼들. 고3이나 쳐먹어서 그렇게 할 일들이 없냐? 남의 뒷다마나 까고 다니게? 이를 갈며 그대로 상담실을 뛰어나가 체육관으로 달려가 보니 안은 가관이었다. 3학년 세명과 태민이, 지혁이 싸움이 아니라 완전 패싸움이다. “뭐야? 모두 안 멈춰? 학교에서 뭐 하는 짓이야?” 달려가 저기서 신나게 얻어터지고 있는 태민이한테 걸린 놈을 붙잡아 내던지자 저리 날아간 새끼 하나가 가관인 소리를 지껄인다. “뭐야? 서방 도와주러 왔냐? 씨발, 어디서 굴러먹던 게 지랄이야?” “어린 새끼가 함부로 까부는 거 아니다.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해야지.” 낮게 화를 삭히며 말하자 녀석은 이죽거리며 입을 열었다. “너, 남창이었다며, 아무하고나 잔다던데 우리 것도 박아줄래? 돈 많이 줄테니 한 번만 하자. 니 얼굴이면 입으로 해줘도 좋아.” 순간 머리 안이 하얘지며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19년 전 얘기가 저런 자식들의 귀에까지 흘러들어갔는지는 알 바 아니다. 내가 선생님으로서의 굉장한 위엄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이건 기분상의 문제다. 어디서 저 어린 것들이 맘대로 지껄여대? 니가 나에 대해 뭘 어떻게 안다구? 다들 이쪽의 기세에 히껍하며 그대로 멈춰서 이 쪽을 바라보고만 있다. 병신 새끼들, 이래서 머리 나쁜 것들은 질색이라니까. 입으로 해서 될 말과 안될 말도 구분 못하다니 말이야. 설사 그게 사실이 아니라해도 그게 얼마나 사람 열 받게 하는 일인지 모르고 지껄여 대는 거냐? “다들 운동장으로 집합해!!!” 단번에 날려간 나의 외침에 체육관에서 웅성대던 녀석들은 못볼 걸 본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딜 꼬라봐! “씹새들아, 어딜 야려? 빨리 운동장으로 집합 안해? 나보다 늦게 정렬하는 새끼들 잡히면 죽을 줄 알아!” 라고 엄포를 놓자 몇 명은 서둘러 체육관을 나섰고 몇 명은 어슬렁대며 그래봐야.... 라는 표정으로 걸어나갔고 몇 명은...... 여전히 우습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지들끼리 쑥덕거리고 있다. “훗......” 그러게 인간이란 본성은 절대 변하지 않는 동물이라니까..... 아, 4년을 성질을 죽이며 착한 척 해와도 결국은 이 꼴이라니..... 게다가 10년 전의 욕들과 현재 학교에서 애들에게 배운 욕들도 아주 자연스럽게 튀어나가는 걸 보니 난 역시 깡패가 길이었어. 일단 움직일 기세가 안보이는 내 앞의 3학년의 멱살을 움켜줬다. 어쩔꺼냐구? 어떻게 할까? 전의 착한 선생 모드로 ‘어서 가야지. 얘기 못들었니?’로 나갈 것인가, 아니면 그냥 홧김에 ‘너 선생님 말이 말같지 않아?’라고 엄포를 놓을까, 아니면 성질대로 죽어라 패버릴까...... 후훗, 정답은...... 3번. 철썩--- 앞에 서서 가장 건방지게 구는 새끼의 뺨을 있는 힘껏 날리고 옆에 있던 놈의 머리를 그대로 바닥으로 밀어 뜨려 근사한 키스를 선물했다. 그리고 옆에서 달려오는 또 다른 새끼의 복부를 발로 차고 막 일어서려는 첫 놈의 명치에 직격 스트레이트 한방 날리고 쓰러지는 그 새끼의 등을 발로 지근 지근 밟아주었다. 흐음, 이대로 계속 패면..... 교감 오겠지? “야, 문 잠궈. 거기 문 앞의 또라이 말 안들려?”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바로 체육관 문 앞에 있던 한 녀석이 서둘러 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어느 새 일어나려는 두 번째 녀석의 멱살을 쥐고 뺨을 내리치고 왕복 10회 정도로 정신없이 따귀를 날렸다. “....... 니가 선생이야?” 라며 뒤에서 어느 새 덤벼든 세 번 째 녀석의 주먹에 등이 휘청했지만 그 정도야 쌈박질에 단련된 나에겐 파리가 스쳐간 정도지. 그대로 일어나 그 세 번 째 새끼의 무릎을 발로 차고 다리를 안고 펄펄 뛰는 새끼의 등을 회전차기로 날리자 저기 먼 곳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씨발 새끼들아, 내가 정말 성질 죽이고 잘해 볼려고 했는데..... 새끼들아, 나도 아쉬워서 선생짓 하는 거 아냐. 니네 깡패짓 하고 다니는 거 나도 다 해봤고 내가 늬들보다 더 악랄하게 놀면 놀았지, 착하게 살진 않은 놈이다. 과거 청산하고 잘해보겠다는데 왜 시비야, 시비는? 밝은 세상을 살아보겠다는 이 착한 선생의 의지를 그렇게 꺽어 버려도 되는 거야? 학생들이!!” 말하다 왠지 분통이 터져 밟히다 그대로 뻗은 첫째 놈의 등을 무자비하게 한 번 더 밟고 쌍코피를 흘리며 얼굴을 움켜 쥔 두 번 째 놈의 배를 발로 걷어차자 이상한 비명들이 새어나왔다. 걱정마라, 난 전문가다. 뼈랑 이빨 안나가게 때렸으니 운동하는 데에는 지장 없을 꺼다. “애새끼들이 놀 줄도 모르면서 겉멋만 들어서 염병은. 누가 제대로 선생 대접 해달래? 입 닥치고 니네 앞 가림이나 잘하라구. 왜 시비야, 시비는?” “우욱........” 이상한 소리를 내는 녀석들을 일단 뒤로 하고 난 운동장에서 기다리는 다른 학생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야아, 차한 척 하던 거 그만하니 상쾌한 걸. 후후.... 진작에 관둘 껄 그랬지. “그 피 닦고 3분 내로 튀어 나와. 남/창/선/생한테 맞아서 뻗/었/다/면 개/쪽/이지?” ‘개쪽’을 유난히 강조하자 쓰러진 세 놈들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걸 보았다. 뒤를 돌아보며 간만에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문으로 향했다. 너무 건방지고 사악해 보인다고...... 명세 놈이 보면 왠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람을 깔보는 듯 한 표정이라서 4년 동안 잘 안쓴 필살기인데 오늘 다 써버리는군. 뭐, 어쨋든 좋아. 이제 나머지 골칫덩이들을 처리해줘야지. “오우, 정렬 다했네.” 왠일로 다들 보여있던 녀석들을 돌아보며 싱긋 웃자 내가 나오기 직전에 문을 닫고 나온 놈 하나가 그 새 말을 퍼뜨렸는지 다들 굳은 표정이다. 혹은 아주 믿을 수 없다는...... “더도 말도 덜도 말고 딱 40바퀴만 뛰어라. 페이스 떨어지는 놈은 끝날 때까지 머리 박고 엉덩이 100대 씩, 쓰러지거나 하면 처음부터 다시 센다.” 왠지 기분이 좋아져서 상쾌한 미소를 날리며 말하자 다들 아예 얼어버린다. 왜? 내가 모처럼 천사 모드로 바꿔줬는데 기뻐해야지, 안기쁘냐, 새끼들아? 머릿 속이 근육으로만 가득 찬 저능아들을 상대로 내가 이 정도로까지 배려해주는데 기뻐해야지. “왜 이렇게 조용해? 다들 할 말 있으면 하고 웃고 싶으면 비웃어 봐. 엉덩이에 랩 감고 온 새끼들 있으면 그 랩이 어떻게 해야 터지나 보여줄 테니까.” 내 마지막 말에 히껍했는지 다들 서로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엉덩이에 랩 감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아니? 아니면 늬들이 그 매질을 어떻게 버텨내니? 학교 끝나고 할 일도 많으신대. “아니면 실사로 엉덩이에 핏줄 터지는 거 중계해줄까? 빨리 뛰어. 오늘 연습은 달리기로 대체한다. 떨어지면.... 죽는 거야.” 다시 방글거리며 말하자 이 더운 날씨에 식은땀을 흘리며 달릴 준비를 한다. “구령은 반씩 나눠서 앞은 <나는> 뒤는 <개다> 이어서 <나는 개다.> 자아, 뛰엇!” 손으로 팔랑거리며 방향을 가리키자 얼굴이 새하얘진 녀석들이 웅성거리다 겨우 방향을 잡았다. “원산폭격에 먼저 100대 맞고 시작할까? 그럼 다리 풀릴 것 같니? 아니지..... 으음, 박게 해주면 풀린다니..... 반 씩 나눠서 한 쪽은 박고 한 쪽은 엉덩이 댈래?” 원초적인 내 대사에 다들 입을 벌린 채 어어어어..... 만 반복한다. 병신 새끼들. 지들이 나한테 했던 말들도 못 기억 못하냐? 내가 너희들 나 뒤에서 씹고 다니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 같냐? “존말로 할 때 뛰어라.” 마지막 일타로 표정을 굳히고 팔짱을 끼자 선두에 선 녀석이 먼저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뒤로 허둥지둥 달려가며 외치는 소리란...... 나는 개다..... 흐음...... 나는 고자..... 라고 해줄 껄 그랬나? 누굴 깔아? 감히...... 호적에 잉크도 안마른 것들이. “츳.......” 낮게 혀를 차며 달려가는 녀석들의 모습을 바라보는데 체육관 쪽에서 어슬렁거리며 두 그림자가 다가왔다. 그리고 한 놈은 가방을 맨 채 교문을 향해가고 있었다. 첫 번 째 놈이군. 자존심이 무진장 상하셨나 봐. 그래서 집에 가서 일르게? 아직도 엄마 치마폭에 쌓여서 잘하는 짓이다. 저런 게 무슨 터프에 섹시야. 엄마 젖도 못뗀 애새끼를. “오우, 늦었네. 자, 선택해. 나랑 면담 후에 대가리 박고 엉덩이 100대 맞을래? 아니면 저 새끼들 따라 가볍게 운동장 40바퀴 돌고 따로 상담에 임할래?” “...............” 아직도 나한테 맞은 곳이 아픈지 배와 다리를 문지르던 녀석 둘이 내 서슬을 보더니 그대로 뒤로 물러나 저 멀리 달려가는 후배들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흐음, 역시.... 이 나이 또래의 남자애들을 다루려면 폭력이 필요하다니까. “흐음..... 날씨 좋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냥 머릿 속에 떠오르는 노래의 노랫말을 흥얼대며 박자에 맞춰 발을 까딱거리며 열심히 운동장을 도는 녀석들을 보았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아암..... 패싸움하다 걸려서 정학도 먹고 혼자서 운동장도 돌아보고...... 훗, 그 때는 내가 선생이 될 줄 알았나,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그러고 보니 지금 우리 학교 가면 나도 선생들과 맞먹는 거군. 뭐, 나야 싸움만 해서 그렇지, 성적도 괜찮고 꽤나 편한 학생이었으니까.......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고자! 고자~~” 삐리리릭---- 혼자서 멍하니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갑작스레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그 쪽을 바라보자 거기는 내 백년 지기 원수 주명세가 서서 농구부를 정렬시키고 있었다. “망할, 뭐야?” 간만에 부려보는 심술인데!!!!! “다들 집합!!” 명세자식의 호출에 다들 구원의 신이라도 만난 듯 신나게 그 쪽으로 달려갔다. 하아, 새끼들, 얍쌉하기는.... “주선생! 무슨 짓이야?” 결국 나도 어술렁 거리며 그 쪽으로 다가갔다. 그 때 집합하고 있던 학생들은 얼굴이 새하얘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감선생님 지시입니다. 다들 체육관으로 돌아가!!” “누구 맘대로?” “방금 학부모님께 항의 전화가 왔습니다. 장선생님, 학교폭력이 얼마나 무서운 건 줄 모르시나요?” 어쭈? 이 개새가 눈에 뵈는 게 없나? 어디서 설교야, 설교는? 씨발, 내가 지금 니 설교 들을 군번이냐? “학교폭력은 지들끼리 치고 받고 지랄하는 거지, 선생의 체벌도 학교 폭력에 들어가나? 그렇게 배웠습니까? 주선생?” 싱글거리며 그 자식이 예전부터 질색을 하는 그 아니꼬운 표정으로 맞대해주었다. 이제 뭐라고 할꺼냐? 새끼야, 내가 너 때문에 착한 척 살다 개피박 맞고 다시 외로운 조폭의 길로 들어선 놈이다. 인간의 삶을 그렇게 꼬이게 하고 너만 웃으며 잘 살아보겠다고 안돼지. 그거 양심도 없는 짓 아냐? 난 너 진짜 사랑했다고, 이렇게 자존심 높고 제 멋대로 인데다 괜찮은 인간이 너한테 온 몸을 다받쳐 충성하고 깔려도 줬는데 넌 내 뒷통수에 도끼를 내리찍은 거야, 그거 알아? 니가 날 버렸다는 마음의 상처보다는 니가 날 배신했다는 신의와 자존심의 상처가 더 크다는 걸. “이것도 폭력입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폭력은........” “닥치고 자기 일이나 하시죠. 저 깡패 출신인 거 몰랐나요? 그리고 학생들? 이 새끼들이 학생이라구요? 어딜 봐서 저게 학생입니까? 선생을 선생 대접하지 않는 것들도 학생입니까? 사제간이라는 거 한쪽의 정성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선생이 학생들에게 하는 만큼 학생도 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있어야죠. 제가 왜 절 남창으로 보는 저 미친개들을 학생 취급해야 됩니까?" 싱글 웃으며 더없이 밝은 미소로 그렇게 말하자 명세의 표정이 시퍼렇게 굳어버렸다. 그리고 저기 학생들의 표정 역시....... “장선생님..... 학생은 아직 어립니다. 아이들에게는 좀 더 깨우칠 시간이 필.......” “깨우치기 전에 학교 때려치겠죠. 힘 있다고 애들이나 패고 다니는 새끼들, 주선생 말대로 깡패 아닌가요? 기억 안납니까? 닥치는 대로 싸우고 패는 놈들은 학생이 아니라 조폭이라구요. 조폭을 조폭이 맘껏 다루는데 불만 있어요? 선생은 빠지시죠.” 안면을 싸늘히 굳히고 말하자 명세보다는 학생들 얼굴이 아예 얼어붙어 버렸다. 그러게 내 성질 왜 건드니? “장선...... 아니, 선배..... 이런 거 좋은 거 아냐. 이러지 마, 왜 이래?” “씨발, 왜 이러냐구? 그걸 나한테 물어? 니가 당해 봐!! 저 새끼들이 날 뭘로 봤길래 그 딴 개소리를 지껄여? 거기 3학년 두 명 아까 했던 말 그대로 다 해봐!!” 나의 일갈에 하얘진 두 명의 3학년이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씹새끼들아, 처리도 못할 일을 왜 벌려? “왜 기억 못해? 아하, 머리를 엄마 뱃 속에 두고 나서 기억 못하나 보지? 내가 그대로 읊어 줘? ‘너, 남창이었다며, 아무하고나 잔다던데 우리 것도 박아줄래? 돈 많이 줄테니 한 번만 하자. 니 얼굴이면 입으로 해줘도 좋아.’ 왜 더 한 말이나 빠진 말 있어?” 온 운동장이 싸늘히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게 날아간 내 말에 명세마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니네 진짜 그랬니?” “..............” 가만히 서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익숙한 놈들이 보였다. 정경진, 이지혁, 강태민..... 저 초특급 애물단지들. “너네........ 선배는 들어가. 내가 처리할게.” “내 일은 내 선에서 처리해. 니가 뭔데 참견이야? 니네 빨리 안뛰어?” 얼굴이 하얘진 새끼들을 향해 소리치자 명세도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물러섰다. 개새끼들..... 저것들을 한 순간이나마 학생들이라고 귀엽게 봐줬던 게 실수지. “........ 선배, 그만하고 나랑 올라가.” “닥치라고 했다, 주명세.......” 이제는 고함이 아닌 낮게 울리는 목소리만이 울려나온다. 내가 듣기에도 오싹할 정도로 차갑고 무서운 목소리. 마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분노와 절망이 서서히 몸을 채워가고 있었다. 나 스스로도 자신이 제어가 안되던 그 때, 나를 멈출 수 있던 건 몇 안되는 친구들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 친구들도 없다. 안전장치가 박살이 나버린 거다. 조절이 안된다면..... 그대로 끝장을 보는 수밖에. 어딜 가서 박든 결국 파열되 조각 조각 나던, 어떻게든 멈추어질 때까지 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마....... 선배.....” “............” 우물 쭈물 거리며 차마 달리지 못하는 녀석들을 그대로 눈동자만 들어 쳐다보자 입술을 꾹 깨무는 녀석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렇게 불쌍한 척 해도 내게는 안 먹히니 문제지만. “참아....... 선배, 선배만 더 상처받아......” “........ 더 이상 지껄이면 너라도 가만 안둬. 닥치고 관전을 하든 들어가든지 해.” “............ 내가 세하형한테 굳이 연락해야 돼? 아니면 상원이형 불러 줘?” “그 새끼들한테 연락하면 넌 죽어.” 내 팔자도 기구하지만 그 놈들도 힘든 인생들이야. 내 일이라면 두 손 놓고 달려오는 놈들인데.... 이런 꼴 보면 마음 많이 상할꺼야. 나한테는 가족 대신인 친구들이다. 조금 악랄한 수를 쓰기는 했지만 내 인생 끝까지 옆에 있어줄 놈들은 그 놈들 밖에 없어. 그러니까 죽어도 안돼. “그럼 그만 둬!!” “웃기지마. 저 새끼들 처리하고 사표내면 그만이야. 나도 유언이고 뭐고 미련 안둘테니.” “선배!!!!” 명세가 내지르는 소리에 그대로 몸을 돌려 그 자식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자 저 멀리로 나가떨어졌다. 그 놈이 쓰러질 때 일으킨 모래바람이 내 쪽으로 휭하니 날려온다. “한 주먹 꺼리도 안되는 게........” 신경질적으로 돌아서 농구부 놈들을 돌아보자 녀석들은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멈춰 서있었다. “흥....... 그래, 관두자. 애들 데리고 뭐하겠니? 나만 미친 놈 돼지. 그래, 거기서 평생 그러고 버텨 서있어 봐. 개새끼들!” 눈으로 녀석들을 일일이 확인한 후 그대로 운동장을 걸어 차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다행히 지금 옷에 차 열쇠랑 지갑이 다 들어있어 그대로 튀어버릴 생각이었다. 뭐, 짜르든 말든~ 니 맘대로들 하세요!! “선생님!!” 뒤에서 들리는 작은 음성들도 전혀 불쌍하게도 안타깝게도 들리질 않는다. 뭐, 어쩌겠니? 원래 감성과는 담 쌓은 인간인 걸. 뒤에서 웅성거리는 녀석들을 무시한 채 걸어갔다. 아, 진짜 이제 끝이다. 이 지겹던 학교도 지긋 지긋한 새끼들과도.... 그래도 태민이랑, 경진이는 많이 친해졌는데...... 그리고 주장도..... 이제 얼굴 못보겠네. TV나 신문에서나 볼까? 아님 농구 경기 관람 때나..... 뭐, 내가 자의로 농구장에 갈 일은 없을테니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리고 거의 차에 다달아 차문을 여는데 뭔가 웅성거리는 느낌이 났다. 뭐야.... 라는 생각에 인상을 쓰며 그 쪽을 보는데 낯익은 엄청난 덩치 하나가 바로 내 앞을 터억 가로막고 서있었다. “뭐야?” “얘기 들었어요.” “뭘?” 내 앞에 선 그 엄청난 덩치를 올려다 보며 마음 껏 이죽거렸다. 니가 뭘 들었는데? 나에 대해 뭘 아는데? “애들한테는 내가 말할게요. 이대로 가면 안돼요.” “왜 안되는데?” 심장에 조금 무리가 가긴 하지만 아직 참을만 하기에 이죽거리며 녀석을 향해 신랄한 비웃음을 날려주었다. “이대로 관두면 여기서 끝이에요. 학교 진짜 미련 없어요?” 순간 울컥하는 마음에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았지만 차마 입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이 놈하고 아직 시작하지 않길 천만 다행이지. 시작했다면..... 나 이렇게 오기 못부렸을 꺼다. “상관없어. 지겨운 새끼들 안보니 기분 찢어지겠지. 할 말 다 했지? 비켜!” “아직 못했어요. 선생님도 내게 들을 말 많잖아요.” 순간 심장이 두근-- 하고 평소보다도 심하게 뛰었다. 내게 할 말이 많다는 거, 혹은 들을 말이 있다는 거.....에 어떤 기대감 같은 게 생겨서 였다. “없어..... 그 딴 거.....” “머리 식히고 얘기해요. 그런 표정으로 어딜 간다는 거에요?” “내 표정이 어때서?” “........ 아프잖아요. 많이 상처받았으면서 오기 부리지 말아요.” 이 자식은..... 왜 이렇게 묘하게 아픈 곳만 헤집는 걸까? 내가 가장 건드리지 말았으면 하는 부분만 자극하는 녀석의 말에 난 이를 꽉 악다물었다. 절대 표정을 보여선 안돼. 슬픈 표정, 아픈 표정... 그런 거 나중에 다 약점이 된다구. 난 악랄하고 잔인하고 제 멋대로인데다 이기적이고 못된 놈이어야 돼. 세계 최악의 악질적인 인간이 내 인생의 목표잖아. 상처받은 거 따위 없어. 그 딴 거 안키워...... “비켜라......” 낮게 말하고 절대 비킬 수 없다는 의지를 담은 녀석을 보는데 뭔가 엄청난 엔진 소리가 들려오더니 검은 색 BMW가 운동장을 향해 돌진했다. 저거.... 많이 보던 찬데....... 허억.... 강상원. 주장의 등 너머로 명세 놈을 보자 녀석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고개를 젓는다. “꼬맹이가......” 이를 으득 가는데 차가 바로 내 차 옆에 멈추더니 그 안에서 익숙한 녀석이 후다다닥 달려나왔다. “무슨 일이야? 인하야!! 너 또 사고 쳤지?” 녀석답지 않게 흐트러진 모습에 크게 한숨을 내쉬고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웃었다. 옛날처럼...... 아주 못된 짓만 하고 다니던 그 시절처럼.... 누구도 반박 못할 정도로 예쁘게... “아냐.... 사고는 무슨! 놀라서 여기까지 달려왔냐?” “그럼 이거 무슨 일인데?” 숨을 몰아쉬는 상원이의 어깨를 두 손으로 안고 잡아당기자 뜨거운 열이 느껴졌다. “별 거 아냐. 애들 기합 좀 줬지. 왜 걱정했어?”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로 녀석의 얼굴을 잡아당기고 눈으로 웃자 녀석이 한숨 놓았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난 또..... 꼬맹이가 전화해서 난리를 치길래 놀랐잖아. 괜찮아?” 내 허리를 안고 정확히 마주치는 검은 눈동자에 난 작게 웃고는 답해주었다. “괜찮지, 넌 이 시간에 나와도 괜찮아?” “상관없어. 쉬던 중이야.” “휴가?” “응.” 지독하게 다정한 태도로 녀석을 안고 눈을 맞춘 채 이야기를 했다. 그 분위기는 꽤 괜찮았지만...... 문제는 저 멀리서 차 한 대가 더 달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망할..... 세하 녀석. 그 꼬맹이 대체 얼마나 연락을 해댄거야? 상원이와 동시에 그 쪽을 보는데 고급스런 디자인의 BMW 한 대가 더 달려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인간 하나. “뭐야? 또 사고쳤냐? 장인하!!” 앞에 성우까지 태우고 참 작게도 말한다. 씨발, 누가 보면 내가 매일 사고만 치고 다니는 줄 알겠다. “몰라, 왜 와서 지랄이야? 꼬맹이가 너한테도 연락했냐?” “응. 괜찮냐?” 라며 다가오길래 상원이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녀석의 목가를 휘어잡아 이제는 나보다 큰 녀석의 눈가를 나와 맞추었다. “괜찮지 않으면.... 니가 나 위로해줄래?” 옛날부터 나랑 자자는 말에 치를 떨던 녀석이라 유혹하 듯 웃으며 말하자 얼굴이 사색이 된다. 이 새끼는 나랑 자면 이 세상이 멸망하는 줄 아는 놈이니까. “싫어. 절대로 너랑은 싫어. 팔 놔라, 임마. 난 이미 임자 있는 몸이다.” “흐응, 그러셔? 좋겠네. 임자 있어서.” 녀석의 목을 안고 있는 팔을 슬쩍 빼는 척 하다 그대로 목을 잡아당겨 딥 키스를 했다. 성우한테는 미안하지만.... 화풀이니까 봐줘라. “으응......” 묘한 신음 소리를 내며 내 키스에 응하던 녀석을 보며 계속 키스를 하려는데 뭔가 엄청난 힘이 나와 녀석을 떼어놓았다. “뭐야?” 한창 재밌어질 판인데!! “학교에서는 이러지 마!!” 하는 건 명세 놈이다. 언제 일어서서 온 거야? “흥, 왠 상관? 잘됐네. 간만에 우리 마시러 가자. 성우도 같이, 아 그 아저씨도 부를까?” 상원이를 보고 목을 끌어당겨 속삭이자 상원이 놈이 고개를 젓는다. “뭘...... 그냥..... 우리끼리 가자. 아, 꼬맹이는 안불러?” 눈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길래 그 쪽을 보니 저 멀리서 성준이가 안절부절하며 서있었다. 뭐, 사실..... 우리 넷이 친구라고 해봤자 그 연결고리가 되는 것은 나이니 나와 틀어진 이상 성준이 놈에게 이 둘은 친구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는데...... 시간이 왠수지. 15년은 무시하지 못할 숫자다. 그 쪽을 보고 아무 말 없이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녀석이 긴장한 얼굴로 서서히 다가왔다. 작은 체구에 동안, 예쁘장한 얼굴이 나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보이는 녀석이다. “저기..... 다들 안녕......” 머뭇 머뭇거리며 겨우 말하는 녀석에게 둘은 웃으며 반겨주었고 난 그대로 녀석의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선배.....” 내 성질을 아는 명세가 흠칫했지만..... 싸가지 없는 자식. 지 애인이라고 싸고 돌긴. “별로 안녕은 못한대. 차성준, 너 나한테 썼던 그 각서 기억하지?” 각서라는 말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장면을 또 장면을 해석했는지 명세 놈이 눈을 부라리고 난리를 친다. “.........응.” “읊어봐.” “첫 째 절대 장인하를 배신하지 않는다. 둘 째 절대 장인하와 자지 않는다. 셋 째 언제나 좋아한다고 말해준다.” “니가 어긴 사항을 알아?” “........ 알아.......” 녀석의 눈에 눈물이 그렁 그렁하게 고이자 두 녀석이 고개를 저으며 물러섰다. 그리고 설치는 명세 놈을 세하가 가볍게 쥐어박고 이 쪽을 쳐다본다. 우리 둘의 문제는 우리 둘이 해결하라는 뜻이겠지. “나, 좋아해?” “.... 많이 좋아해.....”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 진짜 울겠다, 이 자식. “그래, 계속 좋아해. 나 예쁘잖아.” 얼굴을 잡고 생긋 웃어주었다. 정이 무섭긴 무섭구나, 장인하. 옛날 같았으면 애들 시켜서 회생불능으로 만들고 그 쪽으론 쳐다도 안봤을 것을. “미안..... 미안해..... 인하야.” “미안한 짓은 애초에 하지마. 나 애들 울고 매달리고 애원하는 거 질색이 야. 그걸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짜증난다고.” “응...... 나 너 좋아해. 너무 너무 사랑해.......” “그래, 계속 좋아하고 영원히 사랑해라. 나 같은 인간이 어디 흔하냐?” 그야 말로 천연기념물이지. 한참 분위기 잡고 있다 시선을 돌려보니 바로 앞에 교복을 입고 서있는 주장과 저 멀리 이게 뭔 상황이냐... 며 눈을 빛내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이런..... 저것들을 잊고 있었군. “화 내지마..... 인하야. 쟤들도 어리니까 그런 거야.....” 꽤 가까이서 있었는지 얘기를 모두 들은 듯 나를 설득하는 꼬맹이의 말에 결국 마음이 풀려버렸다. 이 놈들 다 있는데서 또 난리를 칠 수도 없고. 이 사실을 세하나 상원이가 알았다간 오늘 학교 안에서 영웅본색을 찍을 지도 모를 일이다. “됐어, 내가 참는다. 니네 어딜 쳐다봐!! 운동장 안뛰어?” 서있다 꽤액하니 소리치자 멈췄던 놈들이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기분 풀자..... 그래, 이런 게 하루 이틀 일이냐? “주장, 넌 왜 안뛰냐?” 앞에 선 놈에게 말하자 주장이 인상을 일그러트리며 스탠드로 가 가방을 놓고 달리기 시작한다. “권형이는 왜?” 그래도 자기 반이라고 걱정하며 말하는 성준이에게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난 세 명 이상 사건에는 무조껀 단체야. 저 놈은 농구부 아니냐?” 그나 저나 저 놈은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이상한 기분에 성준이를 보자 성준이가 상원이를 가리키며 답한다. “상원이가 얘기했더니 그 안에 주장 없냐고 해서..... 오늘 주장 없다고 했더니 주장 부르라고 해서......” 진짜 상원이 놈은 내 머리 끝에 앉아있는 놈이다. 가끔 이럴 때는 무섭단 말야. “아아, 모르겠다. 관두자. 그런데 너희 학교 올라올 때 누가 안 먹대?” 그러고 보니 우리 학교 수위는 교수―교만한 수위―라고 불릴 정도로 온갖 건방을 다 떠는데 이 놈들을 안 잡았나? “아 누가 잡길래 무시하고 왔는데..... 가야겠다.” 라는 세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저 멀리서 곤봉을 든 수위들이 뛰어 올라왔다. 망할 새끼들, 어우!! “가라, 내가 말할테니 빨리 사라져라.” “응, 그럼 우리 간다. 조심해. 너무 열 받지 말고.” “그래.” 상원이의 인사를 끝으로 들어왔던 녀석들은 처음 왔던 속도대로 차를 몰고 신나게 운동장 밖으로 질주해갔다. 저것들 어디서 사고나 안치나 몰라. 순식간에 휭하니 달려나가는 차를 보자 웃음이 빠져 나왔다. 저것들 말이야, 나한테 악질이니 사악하다느니 하면서도 이럴 때는 온 몸이 부서져라 달려온단 말야. 늬들 때문에 저 새끼들 봐준다. 진짜, 장인하 많이 약해졌지. 하늘을 올려다보니 온 몸을 태울 듯 강한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 눈부심에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언제 쯤 그런 소리 안듣고 살라나....... 순간의 실수가 평생을 좌우한다더니.... 내 실수는 아니지만 하여간 과거사 하나가 19년이 지난 지금에도 따라 붙어온다. 조금 괴로워 한숨을 쉬고 꼬맹이를 낀 채 스탠드로 돌아갔다. 뭐, 이 사건으로 짤리든 말든. Track 08. 왜 또 다시 난 Sung by god 그렇게 요란한 한 주가 가고 주말이 되었다. 일요일이지만 특별히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어딘가로 나가기도 귀찮아 집 안에서 빈둥거렸다. 친구나 애인이라도 만나라고 있는 날이지만 친구 녀석들도 모두 바쁘고 애인도 없다. 그렇다고 집으로 들어갈 정도로 가족들과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뭐, 사실 인연 끊은지 10년이지만.... 멍하니 앉아있다 여기 저기 전화를 했지만 세하는 여전히 바쁘고 상원이 놈은 그 새 핸드폰 번호까지 바꾸고 집 전화도 안된다. 뭐할까나...... 새삼 내 인간관계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되는군. “심심해........” 소파에 앉아 잠이라도 청할까 해서 소파 팔걸이에 다리를 올리고 몸을 깊숙이 뉘어보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얼마 전에는 요란했던 집안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혼자 살기 시작해 이런 적막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요란했던 날들의 여운이 남았는지 답지 않게 외로움까지 느껴지고..... 뭐 솔직히 애인이 있었어도 절대 동거만은 사양이었으니까..... 같이 살다보면 당연히 부딪칠 일도 많고 자기 개인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 그 이상의 선은 넘지 않겠다고 했는데. 나이가 드니.... 슬슬 혼자 사는 게 부담이 되는군. 열 받는데 진짜 결혼이나 확 해버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시계를 보니 막 정오가 되었다. 할 일도 없는데 학교나 가볼까? 그 애물단지들도 학교에 가있겠지? 결국..... 그 빛나는 일요일 오후에 내가 한 일이란 잠옷 채로 학교로 향해 가는 것이었다. 학교에 들리기 전에 근처의 수퍼에서 음료수와 먹을 것을 잔뜩 주문하고 서서히 차를 몰아 체육관 앞에 멈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6월의 뜨거운 날씨에도 열심히 팀을 나눠 연습하고 있는 녀석들이 보였다. 이 더운 날씨에 잘도 저렇게 뛰는구나. 나라면 미쳐 버릴꺼다. 내가 들어온 것도 모른 채 시합에 열중하던 녀석들이 휴식 시간이 되자 비로소 내 존재를 알아챘다. “선생님!! 왠일이세요!!?” 태민이 놈이 방방 뜨며 나에게 달려왔다. “왠 일은! 심심해서 왔다. 다른 녀석들 다 제대로 왔냐?” “네!!” 저 쪽을 슬쩍 보자 주장과 경진이 그리고 지혁이도 보였다. 애들을 정리하던 코치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체육관을 나갔다. 그 3학년 문제아들은 내 눈치를 보며 슬슬 저 쪽으로 피하길래 한참 동안의 연습으로 체육관 바닥에 주저앉는 녀석들 곁으로 다가갔다. “농구 재밌냐?” 왠지 진짜 궁금해져 녀석들의 옆에 가서 물으니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흐응....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아리까리해 갸웃거리자 태민이 자식이 이상한 듯 묻는다. “선생님은 좋아하는 거 없어요?” “나? 글세..... 섹스하는 거랑..... 노는 거랑, 술 마시는 건 좋아하지만 특별히는......” 이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니네 그 표정은 뭐냐? 나도 학생들한테 할 말 아닌 거는 안다. “.... 그런 거 말구요. 진짜 이것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거요. 애인이라던가.....” “아...... 애인은 말도 꺼내지 마라. 처절하게 차였으니까. 에구......” 그 녀석들의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다 나도 다리를 쭈욱 뻗고 옆에 앉았다. “차였어요?” 태민이 놈이 신기한 듯 묻는다. 차인 남자 처음 봤냐? 임마. “응, 처절하게.... 4년 동안 사겼는데..... 내 친구하고 눈 맞아서 나 차더라.” 트레이너도 없고 감독도 없기에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켰다. “체육관에서는 담배 피면 안돼요.” 주장 놈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쿠쿡 진짜 어울리지 않게 성실하다니까.... 이 자식들. “아, 휴대용 재떨이 있으니까 걱정마. 참, 어린것들이 이렇게 고지식해서 어쩔래?”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시시덕거리자 같이 앉아있던 녀석들이 기가 막히다는 듯 날 쳐다본다. 헤헤..... 역시 사람 원래 성격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 나 역시 깡패들하고 맞는 모양이야. “선생님.... 진짜 선생 일 왜 해요? 암만 봐도 백수 타입이야.” 지혁이 자식..... 이게 기껏 학교 문제 해결해줬더니 선생보고 한다는 소리가!!! “나도 모르겠다. 나도 좋아서 하는 거 아냐. 뭐, 그렇다고 돈이 궁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놀기는 그러니까..... 선생이란 거 방학도 있고 칼 퇴근이고 좋잖아. 뭐, 그리고 학교 싫어하지 않고.” “에엑? 학교가 좋아요?” “누가 좋다냐? 싫지 않다는 거지. 나 학교 다니는 거 좋아했거든. 알만한 사람들 다 알고 조폭에서도 스카웃 제의 온 깡패 주제에 개근상도 받았잖아. 하하하, 그러니까 늬들도 학교 열심히 다녀. 평생 잊지 못할 곳이니까.” 싱긋 웃으며 다시 체육관 밖을 바라보았다. 하아...... 그 두 인간들 때문에 열 받아서 난리치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니 풍경 구경할 여유도 생기는구나. 왜 이런 걸 잊고 살았을까. “아, 코치 오겠다. 난 간다. 연습 잘하고 어디 딴데로 새지 마라.” “선생님이나 사고 치지 말아요. 우리 학교 학생이야 그렇다 쳐도 밖에서 애들 패고 다닐까 걱정이야.” 지혁이 놈이 입을 삐죽 내밀더니 투덜댄다. 보기 보다 진짜 착한 녀석들이라니까....... “그래, 그래. 권형아 애들 단속 잘해라. 선생님은 간다.” 손을 휘휘 휘젓고는 체육관을 나와 주차장으로 향해갔다. 그리고 거의 주차장에 닿을 무렵이었다. “선생님!!” 바로 뒤에서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온 하나의 그림자가 순식간에 내 어깨를 잡아끌었다. “...... 놀랐잖아, 임마!!!” “오늘..... 뭐 하실꺼에요?” 내 어깨를 붙잡은 놈의 정체는 바로 내가 잘 아는 농구부 부장이었다. 유권형...... 죄 지은 바가 있어서인지 왠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집에 가서 잘꺼야. 그건 왜?” “오늘...... 저녁 때 만날 수 있어요?” “왜? 보호자 필요하냐?” 이 놈이 사고칠 놈이 아닌데..... 라는 생각에 팔짱을 끼고 쳐다보자 이 녀석이 고개를 설래 설래 젓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뭐, 살 게 좀 있는데...... 같이 골라주셨으면 해서요. 선생님 센스 좋으니까......” 허거덕!! 장인하 머리털 나고 28년 살면서 나더러 센스 좋다는 사람은 이 놈이 처음이다. 크어어억!! 역시 난 조폭 체질이었던 것이야....... 망할....... 인정해주는 거라곤 깡패들 밖에 없으니. “알았어. 연습 언제 끝나는데?” “4시 정도에요.” “그럼 그 때 쯤 데리러 올게.” “아뇨, 저녁 때 만나요.” “그러던지.” 약속 장소를 정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가슴이 두근 두근했다. 허어.... 지금 나이가 몇인데 이러니? 저 나이 어린놈을 상대로 말이야..... 안돼, 장인하. 너 꿋꿋하고 근성 좋은 건 알지만 그 이상은 절대 안돼. 서른 되기도 전에 미쳐서 죽을래? 너한테 나쁜 짓 한 놈들 이 세상에서 모두 사라질 그 날까지 열심히 살기로 했잖아. 아직 형들도 남아있고 찾지 못한 부모님도 있고 서윤진 망할 자식도 살아있는데 벌써 죽으면 너의 지론에 어긋나는 거야. 절대 안돼..... 위험해. 다시 집으로 돌아가 옷장을 뒤지며 이것 저것들을 꺼내 보았다. 최근 들어 출근 외에는 거의 츄리닝 차림이라 옷을 고르는데 그러고 있는 내 꼴이 왠지 우스워져 버렸다. 애인도 아닌 놈과 잠깐 외출하는데 설레이는 마음이라니. 명세한테 채이고 열받아 길길이 날뛰던 게 언제 일이라고 넌 학습 능력도 없는 거냐? 장인하? 정신 차려라. “진짜...... 아메바였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러면 안되는데...... 또 상처받기 전에 관둬라. 너 이제까지 순 오기랑 악발 아니었냐? 이젠 그 악이 통할 나이가 아니다. 너도 예전에 비해 많이 칼날이 무뎌졌잖아. 마음도 약해지도 정도 많아지고..... 사실, 그 친구들이란 것들도 이용하기 위해서 사귄 거잖아. 악랄하게 약한 점을 물어뜯어서... 말이야. 상원이의 그 성격 나쁜 애인이 그 놈 이용한다고 했을 때도 너 할 말 없었잖아. 인생을 증오와 근성으로 살아온 게 너란 거 아니냐? 사실 말이지...... 죽을 생각 한 번도 안했다는 거 순 오기였단 말야. 내 삶에 대한 집착은 진짜 내가 봐도 징글맞을 정도니까. 그냥 죽기가 너무 열 받았을 뿐이지.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고 꺼냈던 옷들을 모조리 옷장에 쑤셔넣고 제일 편한 옷으로 골라 입었다. “정신차려라, 장인하. 병신 짓 하지마. 니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거잖아.” 그리고 시간이 되어 녀석과 약속한 장소로 나섰다. 강남 거리는 대 낮인데도 일요일이라서인지 사람들이 붐벼 움직일 틈도 없었다. 어디 시원한 커피 숖에서라도 만나기로 할 껄. 나와 본지가 하도 오래 되서 처음 보는 것들 뿐이다. 항상 자리 잡고 있던 타워 레코드도 어느 새인가 다른 옷가게로 변해 있었고 여기 저기 다른 가게들이 들어차 있었다. 새삼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이제는 진짜 꺽어지는구나. 그냥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할 껄. 그럼 사람들에게 안치여도 되는데 핸드폰에 지갑만 들고 멍하니 서있는데 지나가던 몇 명이 힐끔거리며 본다. 사람들 시선이야 익숙하지만...... 이런 대로에서의 것들은 조금 신경이 쓰였다. 생각 같아서는 가서 뭘 쳐다보냐고 해주고 싶지만 그냥 참기로 했다. 이것도 저것도 다 귀찮아. “일찍 오셨네요.” 멍하니 있는데 말을 걸어온 것은 주장이었다. 집에 들렀다 왔는지 깨끗한 폴로티와 청바지 차림에 몸에서는 희미한 CK One의 향이 풍겼다. 어린 놈이 향수라니.....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향수 - 향수는 잘 모르지만 상원이 놈이 죽어라 고집하는 게 이거라 이 향만은 알고 있다. - 기는 하지만 말이다. “너 향수 뿌리냐?” 내 물음에 피식 웃은 녀석이 손을 내밀며 답했다. “시덥잖은 소리 그만하고 가요. 생일 선물 사야돼요.” “생일 선물?” “아, 동생이요. 이번에 8번 째 생일이라서요.” “너 나이가 몇인데?” 놀라 쳐다보자 녀석이 기분 좋게 웃는다. 왠지 그 웃음에 머쓱해져 그냥 어깨만 으쓱하자 녀석이 쉽게 답한다. “작년에 부모님 재혼하시고 얼마 전에 입양한 애에요. 설마 애를 낳았겠어요?” “그래? 좋은 부모님이네.” 덕망까지 있는 분들인가? 고개를 갸웃하고 녀석과 함께 여기 저기 작은 팬시점과 유아 전문 용품 점까지 쏘다니고 작은 카페로 들어가 앉았다. “덥다. 벌써 여름 같아.” “여름 싫어하세요?” “덥잖아. 땀 나고 귀찮아서. 여름에는 잘 안나오게 되거든. 피부도 타고.” “잘타요?” “아니, 너무 안타서..... 원래 안 타는 체질이라 한 여름에 새카만 놈들 다니는 거 보면 벨 꼴려서.” 아이스 커피를 두 잔 시키고 앉아 주장과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눴다. 집안 얘기부터 학교 얘기, 그리고 농구를 시작하게 된 얘기까지.... 생각보다 고생을 많이 한 놈이었다. “너랑 11살 차이 동생이지? 안 이상해?” “별로..... 지혁이도 있구요. 동생은 좋아해요, 착하니까.” “그래?” 어머니와 단 둘이 미국에서 살면서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덕에 많이 힘들었다는 거,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위해주는가... 하는 사소한 얘기까지 녀석은 속의 이야기를 술술 털어내었다. “다른 친형제는 없고?” 가족 얘기를 듣다 문득 궁금해져 묻자 녀석의 표정이 굳는다. 그리고 또 한 번의 한숨. 왜 이렇게 한숨이 많은 건데? “형이 있는 거 같기는 한데.... 죽었...대요.” “그래? 안됐네.” “네......”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지는 녀석 때문에 나도 더 이상 말을 않고 서서히 져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들어가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하는 녀석을 보고 나도 따라 일어섰다. 그래, 집에 갈 시간이지. 차로 녀석을 집까지 바래다 주고 헤어질 시간이 되자 녀석은 자리에서 내리지 않은 채 조용히 내 이름을 중얼거렸다. “뭐?” “인하.... 맞죠? 장인하.” “이제 알았냐?” 뭐, 예상은 했지만 이제까지 몰랐다고 생각하자 조금 속이 상했다. 난 니 이름 정확히 기억했는데. “알고는 있었어요.... 선생님.....” “왜?” “만약에요......” “만약에?”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잔잔한 목소리로 고백하는 듯 한 녀석의 말에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왠 주책이냐, 이 녀석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다잖아. “어떻게 하긴... 학교 다니는 동안은 속이고 사귀고 졸업한 다음에 공식선언하면 돼지.” “....... 그래요?” “응, 그래. 어차피 들키지만 않으면 되느 거야.” “....... 그러게요. 저 들어갈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문을 여는 녀석을 보자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결국 오늘 3시간 가량 함께 있으면서 수다만 떨었을 뿐, 아무 것도 한 게 없으니. 뭐 그렇다고 무슨 짓을 하려던 건 아니지만...... “들어가라.” “네.” 커다란 대문 앞에 서서 가방을 멘 채 내 차를 보는 녀석에게 손을 한 번 흔들고 내가 먼저 차를 뺐다. 그대로 있으면 뭔가 이상해질 분위기였다. 망할.... 그래도 집 알아낸 게 얼마냐? 다음에 성준이 보고 저 녀석 프로필 좀 보여달라고 해야지. 수업이 없는 오후 시간, 상담실에 들어가 창문을 열고 담배를 꺼내들었다. 원래는 금연구역이지만 이 상담실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골치덩이들을 짊어진 나밖에 없는 걸 알기에 문도 잠그지 않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운동장과 연결된 그 창으로는 운동장이 한 눈에 들어온다. 우라지게 넓은 그 운동장의 저 쪽에서는 축구부 애들이 열심히 골을 차고 있었고 그 한 귀퉁이에는 자기들 나름대로 놀고있는 학생들이 보였다. 그리고 창과 가까운 쪽의 운동장에서 농구부 애들이 열심히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이 더운 날씨에 운동장에서 달리기라니... 원래 농구는 실내 스포츠 아니던가? 열심히 달리던 그 무리 중에서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 주장을 발견하고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이거 진짜 안좋아........ 심장에 안좋다고....... 저 녀석..... 나 학습능력 하나는 끝내준다고 생각했는데 왜 감정적으로는 제어가 안될까? 나보다 연하에 덩치 크고 운동 선수에 더더군다나 얼굴도 잘생겼단 말야. 저런 놈은 나한테는 쥐약이라구. 먹으면 그대로 즉사인데..... 왜 이렇게 끌리는 걸까? 아, 또 간만에 멜랑꼴리가 되는군. 저렇게 덩치 크고 싸움질이나 하고 다닐 것 같은 얼굴로 바른 생활 사나이인데다 특기생 주제에 공부도 열심히 하고 수업도 열심히 듣는다는 모범생, 플러스로 집안도 좋고 아주 예의까지 바른 놈. 나랑은 극과 극이군...... 외모에 비해 깡패 기질이 넘쳐흐르는 나에 비해 생긴 건 카리스마 있는 개날라리같이 생겨서는 너무나 모범적인....... 녀석. 절대 안돼. 생각을 해보라구 나이는 10살이나 연하에 앞날이 창창한 농구선수란 말이야!! 또 한 번 그 때의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잖아. 또 한 번 그런다면 회생 가능성이 없어. 아직도 그 일갖고 물고 늘어지는 자식들이 많은데. “후우.......” 이미 꺼져버린 담배를 후대용 재떨이에 비벼 끄고 담배 한 가치를 더 꺼냈다. 속이 안 받아서 밥도 안먹은 상태에서 담배를 필려니 미치겠다. 한 동안 끊었었는데 또 시작이로군. 내가 병으로 죽는다면 반드시 사인은 폐암일 꺼야. 그러니까 이건 다 저 녀석 때문이라구. “미치겠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멀리서 다다닥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갑자기 상담실의 문을 열어 젖혔다. “으아악!!!” 순간 교감인 줄 알고 놀라 담배를 숨기려다 그만 재떨이를 들고 있던 손에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으악, 담배빵...... “선생님........” 이라고 숨을 헥헥거리며 들어온 녀석은 여전히 기분 나쁜 눈빛의 예쁘장한 얼굴, 그리고 막 뛰다 왔는지 산발을 한 머리에 숨을 몰아쉬고 있는 우리 반의 태민이었다. “새끼야, 놀랐잖아!!! 조용히 들어와, 조용히!!!” “선생님........” “선생님 안죽었어. 아우, 아파!” 아픈 손을 털어 내며 제대로 담배를 끄자 그 자식은 열었던 크기만큼의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터벅터벅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선생님...... 이제 도저히 안되겠어요.” 눈이 완전히 뒤집혀서 숨을 내쉬는 녀석을 보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이 나이 또래의 녀석들이 저런 험악한 눈빛에 숨을 몰아쉴 때면 대부분이 안좋은 사건의 징조이기 마련이니. 이것들아...... 또 무슨 사고를 칠려고? “왜? 또 누구랑 싸웠냐?” “...... 지혁이...... 지혁이 자식이!!!! 우아아악!!!” 그 소리는 가히 곰의 표효와도 같았다. “그러니까 또...... 란 말이지?” “그 자식이 그럴 줄 몰랐어요. 내가 그 놈한테 어떻게 했는데!!!!” “재수 없네. 헤어져!” 이번엔 안전하게 상담실 문을 잠그고 담배를 피웠다. 망할 새끼들이 진짜 잠시라도 쉴 틈을 안줘요. 모처럼 이 선생이 분위기 잡고 사랑의 고민을 진지하게 해보겠다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달려와 또 사고 칠 기미를 보이니...... 어우, 진짜 내가 왜 하고 많은 직업 중에 선생 짓을 택했을까....... 빌어먹을 이것도 다 명세 자식 때문이잖아!! “.......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아요.” 라며 눈을 흘기는 방년 18세의 강태민. 어쭈구리? 남은 기껏 걱정해서 말해줬더니 어디서 눈을 흘겨? “눈 깔아라!” 그 녀석 못지 않게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한 쪽 눈썹만 치켜 올려 말하자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결국 눈을 내린다. 젠장, 소심한 놈 같으니. “선생님은 그런 거 모르죠?” “뭘?” “애인이 바람 피는 거 기분 정말 더럽다구요.” “당연히 더럽겠지. 바람을 핀다는 건 곧 끝날 꺼라는 의미니까. 뭐, 끝나고 알아도 기분은 백배 더럽지만.” “......... 먼저 알아도 기분 더러워요.” 짜식이 꼬박 꼬박 말대꾸는..... “진짜 안될 것 같아.... 그 녀석 너무 심해요.” “흐응..... 저번에 그 농구부 애냐? 다른 애냐?” “....... 다른 농구부 애에요.” 순간 피던 담배 연기를 먹어버렸다. 또 농구부냐? “어디서 만났대냐? 이번엔 경기냐, 길거리 농구냐, 아니면 우연히냐?” “길거리 농구장에서.......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처음에 사귀자고 한 것도 자기면서....” 라면서 고개를 푸욱 숙이는데..... 이게 진짜 선생이 한 말을 아니지만 키가 190에 가까워 오고 어깨와 허벅지에는 근육으로 온통 싸인 사내 녀석 둘이 러브 모드 풍기는 걸로도 모자라 사랑 싸움까지!! 뭐, 그게 나름대로의 멋이라면 멋이겠지만....... 내가 기본적으로 근육질을 싫어하다 보니...... 허허..... 지혁이 놈이 좀 야리야리한 놈을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않을까..... 싶지만..... 말은 못하지. “사람 마음이란 게 원래 남의 떡이 더 커보이는 거잖아.” “사람은 떡이 아니잖아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원래 내 애인은 우스워 보이는 게 인간 심리잖아. 사귀기 시작한 시점에서는 더이상 매력도 없어 보이고.... 흥.....” 내가 말해놓고도 그러고 보니 그럴 듯 하다. 그렇지...... 이미 잡은 물고기에는 밥을 안준다잖아. 뭐, 그야 회쳐 먹든 해물탕을 끓여 먹든지 하려고 하는 거니까...... 잡힌 애인의 말로는 결국 난도질인가? “.... 그런 걸까요?” “그럴지도.........” “..... 그렇군요. 나쁜 자식.......” “그래, 나쁜 놈이지. 그런 놈은 니가 먼저 차버려. 그런 자식은 언젠가 널 버릴테니까.” 몇 년 전에 내가 당한 게 있어서인지 칼을 품고 나간 내 말에 녀석이 묘하게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나의 경험에 비추어 진심 어린 충고를 해준 것 외에는 죄 없다. “..... 그렇게 생각하세요?” “이건 내 경험상의 얘기다. 그런 놈은 언젠가는 헤어지게 돼있어.” “경험이요?” “내가 옛날에 사겼던 사람이 그랬거든. 먼저 고백하고 유혹했으면서 나중에 내가 더 좋아하게 되니까..... 계속 바람피다 결국은 헤어졌지. 다른 사람 만나면서 나랑 비교하고 있었어. 그러면서 그러더군, 역시 그 쪽이 더 좋다고..... 친절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부드럽고.......” “...............” 한 동안 녀석도 나도 말이 없었다. 아마 같은 경험을 한 듯한 나의 말을 무시할 수도 그렇다고 그 녀석을 버릴 수도 없어서겠지. 하지만 나 역시 경험으로 아는 건데 그런 관계는 빨리 끝낼수록 좋아. 길게 끌어봐야 상처받는 건 더 좋아하는 쪽이라구. “......... 선생님.......” “응.” 눈을 잠시 깔았다 다시 뜨고 진지하게 바라보던 태민이가 서서히 입을 열었다. “.......... 선생님도 남자 사겼어요?” “.......... 알았냐?” 말 없이 끄덕. 흥, 눈치 하난 기가 차다니까. “어떻게 알았냐?” “선생님 말 중에...... 그랬잖아요, 친절하고 예쁘고 상냥하고 부드럽다고...... 선생님 성격을 아니까, 다른 건 이해가 가는데 예쁘다는 건 어폐가 있죠. 선생님 성질이 그래서 그렇지, 남자치고는 굉장한 미인이니까..... 더 예쁘다면 여자가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애인이 레즈? 아니면...... 애인이 남자였던가.” “멍청한 게 눈치는 빠르구나.” “멍청한 거 아니에요!!” “it~ that 용법은?” “으윽....... 대명사 용법?” 빠악-- 어이없는 녀석의 답에 탁자에 있던 교무 수첩으로 녀석의 머리를 내리쳤다. “아프잖아요!!” “돌도 아프냐?” “씨잉-- 그런 거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 없어요. 농구 선수는 실력이지, 공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늬들은 나한테 뇌가 근육으로 돼 있다는 소리를 듣는거야. 어떻게 기본 용법도 모르냐?” “우욱....... ” 억울한 듯 눈을 들어 날 보는 녀석을 한 대 더 내리치고는 담배 한 가치를 더 빼물었다. 이러다 진짜 위암으로 죽겠다. “담배 좀 그만 펴요. 무슨 선생이 매일 욕이나 하고 담배나 뻑뻑 피고 애들이나 패고 그래요?” “불만 있으면 고문 교사 바꿔달라고 그래라.” “치잇......... 그러고는 싶지만 나..... 선생님 좋아해요.” “계속 좋아해라..........” “진짜 사랑한다니까요.” “그래, 사랑해, 나 예쁘잖아?” 담배를 하나 더 빼물고 말하자 녀석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그러게 먼저 얘기 꺼내래? 내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을 꺼낸 니 죄야. 막말로 내가 안 예쁘냐? 예쁘잖아? “선생님..... 의외로 공주?” “공주가 아니라 사실이잖아. 이 정도면 예쁜 얼굴 아냐?” "..... 뭐, 성격만 아니라면........ 나 진짜 선생님 사랑해도 돼요?“ 좋아하는 것도 허락 받고 좋아해야 하는 거냐? 그냥 멀리서 보기만 하면 그게 어때서? 어느 정도의 선만 지킨다면 좋아하는 건 절대 폐 될 일 없잖아. 그렇다고 내가 스토커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난 그저 건전한 정신과 마음으로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상관없지? “니가 사랑하는 거지, 내가 사랑하는 거냐? 니 벨 꼴리는 대로하세요!” “그럼 나랑 사귈 수도 있어요?” “누가 날 좋아하랬지, 사귀랬냐? 열심히 좋아하는 건 상관없는데 난 좋아하는 사람 있으니 포기해라.” 히죽 웃으며 태민이 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보다 조금 큰 키에 색소가 엷은 갈색 머리카락,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앳되 보이는 얼굴을 한 이 문제아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지친 듯 한 눈을 하고 있었다. 18살이든 29살이든 연애 문제에 관해서는 별반 그 깊이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다. 이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들도 저런 눈빛을 하는구나...... 라고 생각하자 왠지 그 덩치가 귀여워져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안 어울려요.... 선생님이 다정한 거........” 라고 톡 쏘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몸을 기대온다. 묵직한 중량감이 있는 뜨거운 몸의 느낌에 팔을 돌려 녀석의 어깨를 안고 끌어당겨 안았다. 덩치는 커도 아직 애라는 것만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게다가 나, 옛날부터 덩치 큰 놈 좋아했으니까..... 으음, 여기서 나의 기본 취향이 드러나는군. “나 그 놈 진짜 좋아해요.......” “응.......” “진짜 좋아하는데...... 더 이상 못할 거 같아요.” 시무룩하니 숙인 고개와 맥이 풀린 목소리. 이 신경도 없을 것 같은 농구선수가 어지간히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뭐, 바로 며칠 전만 같았어도 몇 대 패주고 「니 일은 니가 해!!」라고 윽박질렀겠지만 지금 내 상황도 상황이니만치 그 고통을 알기에 동조해 주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면 어떻게도 하지 마. 내 기본 신념은 말이지...... 뒤죽 박죽 엉망진창이라도 정리하지 말고 그대로 가는 거야. 뭐가 찢어지든 깨지든 엉망이 되든 생각하기 싫을 때는 안하고 행동하기 싫을 때는 안해. 특별히 생각을 하고 행동하지 않으니까. 맘 편하게 사는 거지. 내 것이 아니라면 포기하고 내 꺼라면 어떻게든 얻어서 지켜. 시비 걸면 싸우고 맘에 안들면 죽도록 패거나 무시하면 돼. 남한테 민폐만 안된다면 소심하게 사는 것보다 그 쪽이 맘 편하고 멋지잖아.” “그건 막 나가는 거잖아요.” “뭐,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그래, 어차피 애초에 막나가던 인생이라 말이지. 이 끝에 뭐가 보일지 몰라도 어디 갈 데까지 가보자는 게 내 신념이야. 그러니까 너도 갈 데까지 한 번 가봐라. 그리고 최후에 남은 걸 잡으면 돼. 니넨 나보다 아직 어리잖아. 시작할 시간도 기회도 넘쳐 흘러. 나처럼 꺽어지는 청춘이 힘든 거지. 웅성거리는 점심 시간의 운동장의 소리와 어깨에 기대어 있는 뜨거운 몸을 안고 나도 눈을 감았다. Track 09. 하늘색 꿈 Sung by 박지윤 재수도 더럽게 없지. 수업이 이빠이로 있는 날, 비가 오다니..... 학교 가기 싫어. 집에서 죽치고 있으면 안될까? 그렇다고 진짜 안가면 뒷 일도 귀찮고. 그 대머리가 날 죽이려고 할텐데.... 심한 폭우가 내리는 날에 빠지려면 이 정도에는 나가줘야지. “아아..... 비 없는 나라에서 살고싶다.” 언젠가..... 나이가 들면 진짜 비 안내리는 나라로 가서 살자던 윤진이의 말이 기억났다. 그 놈하고 엄청나게 더럽게 헤어지긴 했지만 어렸던 만큼 열정적이었고 현실보다는 꿈을 더 많이 보고 달려갔던 사랑이었다. 뭐, 명세 자식은 일부러 비 오는 날 나오라고 해서 나한테 많이 혼나기도 했지만. 또 조심 조심 사방을 살피면서 몸 사리고 움직였지만 결국 찬물로 샤워를 했고 나와서는 엘레베이터 고장으로 인해 또 한 번 계단을 내려갔고 택시를 잡으려다 길가에서 한 번 뒹굴 뻔하고.... 지각까지 하면서 학교에 도착했다. “진짜..... 이건 신의 저주야......” 투덜거리며 비닐 백에 준비해 온 옷과 수선을 들고 상담실로 들어가 젖은 옷을 벗었다. 얇은 옷을 챙겨 입었기에 망정이지.... 어설프게 두꺼운 옷을 입었다가는 갖고 돌아갈 짐만 해도 장난이 아니었을 꺼다. “어우, 뻐근해.” 으음, 농구부 탈의실에 세탁기랑 건조기가 있던데. 한 번 가볼까나? 젖은 셔츠를 다시 비닐 백에 담고 수건을 꺼내 젖은 몸을 닦는데 갑자기 벌컥하니 문이 열렸다. “선생..... 으악!!!” “뭐가 으악이야? 문 닫아, 임마!” 문 앞에 서서 소리만 지르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태민이 놈에게 소리치자 서둘러 문을 닫는다. “뭐야? 지혁이가 또 바람피냐?” “그게 아니라.... 왜 여기서 그러고 섰어요?” “젖은 옷 갈아입는 것도 죄냐? 왜 쳐들어와서 난리야?” 긴 소매의 니트를 입고 바지를 갈아입으려 버클을 푸는데 태민이가 더 크게 소리치며 지랄한다. “우악, 무슨 짓이에요? 왜 벗고 그래요?” “왜 벗긴, 갈아입는다니까!!” “어린 학생 마음에 불 지르지 말아요!” “내가 방화범이냐, 불을 지르게? 그나 저나 무슨 일이야?” 무심하게 버클을 내리며 묻자 이젠 아예 죽어라 꽥꽥 댄다. “벗지 말아요. 벗으면 덮쳐버릴 꺼야.” 허어, 이 고삐리가.... 감히 누굴 덮쳐? 얼굴이 아예 불 타오르는 녀석을 보자 왠지 벨이 꼴려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덮쳐 봐. 니가 살아있을 수 있나?” “으아아악!!” 이라며 갑자기 돌아서는 녀석. 아아, 할미꽃도 꽃은 꽃인가 보지? “어이, 강태민!” “빨리 갈아입어요.” 병신 새끼, 안보려면 나가 버림 될 것을, 왜 돌아서서 떨고있냐?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내가 아니지.... 크크큭.... 예전에 했었던 장난이 생각나 일부러 그 놈이 서있는 쪽으로 다가가 녀석의 등에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바지는 아직 젖은 채였고 버클과 지퍼가 내려가 있어 내가 봐도 상당히 자극적인 상황이었다. “왠수야.... 하고 싶냐?” 은근히 허리를 움직이며 귓가에 속삭이자 눈에 보이게 긴장하는 녀석. 아이, 귀여워라. 쿠쿡, 옛날에는 상당히 악질적인 장난을 많이 했는데 말이지. 애들 데리고 장난치기도 그러니..... 가볍게 흥분만 시켜볼까? “떨어져요, 선생님..... 팔팔한 10대를 우습게 보지 말라구요.” “킥, 그래?” 녀석의 말을 무시하며 문에 거의 달라붙은 녀석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고 엉덩이와 허벅지를 만지작거리자 목가에 새빨게졌다. 크큭, 이거 보기 보다 순진하네. 세상 일 다 안다는 듯 했던 녀석이 말이야. “할래? 해줄까?” “...떨어져요.....” “하고 싶으면 해도 돼. 쿠쿡, 대줄까? 응?” 하면 안되지만.... 그래도 간만에 부리는 심술이니 변덕 저도는 봐줘야잖아. 뭐, 해달라면 몇 대 패면 되니까. 눈 앞의 덩치의 몸을 돌려 얼굴을 잡고는 서서히 입술을 겹쳐갔다. 알아서 피해야지.... 응? “...... 선생님.......” “응?” “후회하지 마세요.!” “뭐.......” 슬슬 놀리고 있는데 순간 녀석이 내 허리를 잡아끌고는 이빨이 부딪칠 정도로 깊이 입을 맞춰왔다. 그리고 내 혀를 감고 도는 녀석의 혀...... 우아악!!! 나 이럼 짤린단 말야!! “우우욱... 으읍.......” 밀쳐내려고 가슴을 떠밀어봐도 꿈쩍도 안한다. 무식한 놈..... 나 짤려!!! 테크닉이라곤 하나도 없이 내 허리를 안고 사정없이 엉덩이를 주무르고 한 손을 앞으로 돌려 앞을 잡는다. “욱, 아팟!!” 잡작스런 공격에 몸을 빼려는데 이 자식....... 무지하게 세다!! “후회하지 말라니까요.” 다시 겹쳐오는 입술과 등을 쓰다듬는 따뜻한 손길. 온 몸이 분화구인 듯 열이 나는 그 육체를 어떻게든 떠밀어 보려 하지만..... 나이가 나이다 보니.... 힘만으로는 부족하다. “임마, 놔!! 놔!!!” “해준다면서요?” “그걸 진짜로 믿냐?” 버럭 소리를 질러도 몸을 떼지 않은 채 상담실 테이블 위에 나를 내팽개쳤다. “아파, 임마!!!” 딱딱한 것에 닿은 충격에 신경질을 내는데 내려다보는 녀석의 얼굴이 장난이 아니었다. 아침 운동 중이었는지 트레이닝 복을 입은 녀석의 하체는 텐트를 쳤고 표정은 상기된 게 아주 맛이 가기 일보적전이었다. “임마... 꺽어지는 고목을 상대로 뭘 할려구?” “도발한 건 선생님이에요. 책임지세요.” 책임..... 이라면 좀 찔리지만. 그렇다고 덮치는 건 곤란하지. 내가 나이 스물 아홉에 열 여덟 살 먹은 애새끼한테 뒤를 대줘야겠냐? 비록 앞은 절대 안된다고 해도 말야. 어떻게 해볼 방도를 찾는 사이 이미 다리를 가르고 들어온 녀석에게 패닉이 일었다. 이걸...... 패? 그럼... 곤란하긴 하지만.... 성폭행에서는 정당방어가 아닐까? “야, 너야말로 후회하지 마라.....” “안해요.......” 라면서 다시 입술이 닿기 전에 주먹을 쥐고 안면을 한 대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선생님!!! 여기 태민........ 으아악!!!” 엄청난 목소리로 소리치며 문을 열고 멈춰 선 놈 하나는 우리 반의 정경진, 그리고 그 옆에 얼굴이 하얗게 변한 놈은 이지혁, 그 옆에서 아예 얼어버린 놈은..... 문제의 주장. “...... 뭐..... 야? 이거.....” 입술을 들썩이며 간간히 말을 잇는 지혁이는 거의 기절일보 직전인 듯 얼굴이 하얗다 못해 파르스름하다. “선생님..... 문은 좀 잠그고 하지......” 눈을 땡그랗게 굴리며 스르륵 문을 닫는 것은 정경진.... 먹는 데 환장한 새끼지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그러니까 여기가 교무실 바로 옆인데 말이야.... 다른 선생이 지나가다 보기라도 하면 끝장나는 거 아니겠어? 아니, 그건 문제가 아니지. 이미 눈 앞에 닥친 게 문제지. 지혁이 놈과 경진이 놈만이었다면 별 문제 아니지만.... 주장까지 있는 것이다. 주장..... 허걱...... 생각하자 또 가슴이 울렁.. 두근 두근... 미치겠네. “너 이거 무슨 짓이야?” 갑자기 화를 내며 다가오는 건 이지혁이다. 저게 저런 말할 자격이나 있나? “닥쳐, 이 지혁! 넌 바람 펴도 돼고 난 안돼냐?” “상대가 틀리잖아!! 너 원래 저런 얼굴이 취향이었냐? 그런 거야?” “취향이 아니라도 이 얼굴은 좋아. 예쁘잖아.” 허거... 덕.... 나 옛날에 장난친 벌 받나 보다. 이건 완전 내 대사잖아. 말도 안돼... 말도 안돼.... 내가 사악한 짓을 많이 했었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이런 상황은 너무 하잖아. 갑작스런 비상사태 난 그 차가운 테이블 위에 등을 댄 체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일어서서 뭐라고 변명은 해야겠지? 하지만 이 놈들이 말이 통할 상황이 아니니... 조금 관전을 하다 칠까? “너... 이럴 수 있어?” 막무가내로 다가오더니 위의 녀석을 내 앞에서 떼어낸 지혁이는 태민이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에 뒤로 휘청한 태민이 역시 곧 지혁이의 멱살을 쥐더니 한 방!! “오우!! 나이스!!” 작게 박수를 치며 암만해도 이 바지가 너무 찝찝해서 창가로 돌아가 싸움을 보며 바지를 벗고 싸온 면 바지로 갈아입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두 놈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니가 그런 말할 자격 있어?” “너 왜 이래?” 한 마디에 한 대씩 치는 걸 잊지 않고 싸우는 놈들을 보며 작게 휘파람까지 불고 창가로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후후.... 멋지구리하군. 역시 남의 애정싸움 구경은 꽤나 볼만하단 말야. “선생님.... 죄책감 같은 거 없어요?” 라며 옆으로 스스슥 다가와 묻는 경진이에게 상담실에 있던 과자를 집어주자 입을 다문다. 그리고 아그작 아그작 대는 과자 씹는 소리. 아이구, 저건 어렸을 때 과자 사준다면 납치범도 그냥 따라갔을 놈이야. “너 나랑 헤어지고 싶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헉, 어느 새 분위기가 이렇게까지 됐다냐? 조금 걱정스러워 주장의 눈치를 보며 그 쪽을 다시 보자 태민이 놈이 소리를 빽 지른다. “그래!! 헤어져!! 차라리 헤어져, 너 같은 놈 나도 지겨워!!” 순간..... 상담실이 조용해졌다. 태민아..... 아무리 열 받아도 해도 되는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이 있는데 말이지, 지금 니 말이 바로 후자쪽에 해당하는 거 같다. 너 저 놈 좋다며? 그럼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이야, 그거. 물론 내가 깨지라고 먼저 부추기긴 했지만 이게 이런 상황에서는 나가지 말았어야 될 말이란다. 왜냐 하면.... 나도 당해 봤기에 그 심정을 알아서야. 그런 말 들으면 진짜 캡만땅으로 신경질나거든. 그럼 그걸로 아듀다. 어떻게 해도 그 말은 평생을 남게 되어 있어. “츠츳......” 혀를 차며 고개를 도리 도리 하는데 지혁이 놈이 상대를 바꿔 나를 노려본다. 그러면서 예쁜 고양이 같은 눈이 한 순간 살기를 띄었다. 씨발, 저 좇만한 놈이 어디서 눈을 흘기고 난리야? 저게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뭐냐? 이지혁, 죽고 싶어?” “선생님이 이럴 수 있어요? 치사해, 진짜!! 학생하고 이러는 거 말도 안돼!! 교감한테 일러버릴꺼야!” 그 인신 공격에 화가 치밀어 그대로 녀석의 멱살을 쥐었다. 지가 뭐 잘한 게 있다고 지랄이야? 나도 잘한 거는 없지만 애초에 문제 꺼리는 너야, 이지혁! “한 번 더 말해 봐, 씹새야!” 목소리를 깔고 낮게 말하자 지혁이 놈이 그 커다란 눈동자 안에 백치미를 드러내는 동공을 올려 뜨고 눈을 흘긴다. 그래 봐야 너 같은 놈 무섭지도 않아. “언제나 문제는 너야, 저 놈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너 진짜 모르겠냐? 모르겠으면 헤어져. 오기로 되는 일과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구분 못해? 나야말로 너같은 놈 보면 캡 재수 없어. 아무 생각 없이 상처만 주고 자기는 편한 얼굴을 하고 말이야.... 누구든지 니 안에 가둬둘려면 너도 그만한 희생을 해야 된다는 거 모르냐? 끝까지 너만 손해보기 싫은 거라면 그걸로 끝장내. 너흰 안되니까.”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의 말을 하자 지혁이 놈 눈빛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울음을 참고 있는 듯한 눈동자에 오물거리는 입술. 안됐지만 그 정도 말에 미안하다는 생각은 안든다. 어린 객기에 난동을 부리는 거라면 알맞는 상대를 찾아야지, 왜 하필 태민이 같이 순진한 놈이야. 저 놈은 그런 거 감당할 주제도 못되는 새낀데. “시끄럽게 굴지 말고 늬들 일은 알아서 해결해. 진짜 어린 새끼들이 주제를 모르고 날뛰......” “무슨 일이야?” 갑작스래 문이 열리며 등장한 것은 2학년 3반의 여자 담임이었다. 으악!!! 두 놈의 싸움으로 의자 하나는 날아가고 분위기는 험악 그 자체!! 게다가 이 놈 멱살을 쥐고 있는 내 손!! 방법이 없다!! “아, 머리가......” 라며 은근히 멱살을 쥔 손을 지혁이의 어깨 뒤로 하며 아주 리얼하게 쓰러지는 연기를 펼치자 선생이 놀라 달려온다. “어머, 장선생님 괜찮으세요?” 임신한 배를 앞으로 내밀고 달려온 그녀는 내 얼굴 색을 살피더니 학생들을 바라봤다. 벙찐 네 녀석들은 할 말을 잃고 나를 내려다보고만 있고. 임마들아!! 그게 무슨 눈빛이냐? 이게 다 너희 때문 아냐? “너희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지 않아도 몸도 약한 선생님이 농구부까지 맡아주셨는데!!” 라며 날카롭게 날아간 그녀의 말에 애들은 기가 막혀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졌다. “니네 그 표정이 뭐야? 무슨 짓 한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왠지 일이 더 커질 것 같아 서서히 상체를 일으켜 그녀에게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아, 선생님.... 제가 빈혈을 일으켜서 도와주려던 거에요. 놀라셨을텐데 가보세요. 애들한테.... 시킬게요. 나 좀 일으켜주라, 주장...” 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손을 뻗자 주장은 거의 넋이 나간 얼굴로 내 팔을 잡아 끌어당긴다. 그런데..... 젠장 그 표정은 뭐냐? 좀 안된 표정을 지어주면 안되냐? 사람을 괴물 보듯 하다니.... 츳! “괜찮으세요? 요즘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아뇨.... 괜찮아요. 가보세요.” 핏기 없는 얼굴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구나. 배시시 웃으며 답하자 진짜 불쌍해서 못봐주겠다는 눈초리의 그녀가 학생들에게 한바탕 설교를 한 후 복도로 나섰다. 문이 닫히고 구두 소리가 멀어진다. 완전히 그 소리가 사라진 후에야 한숨을 내쉬고 몸을 쭈욱 피며 톡 쏘듯 입을 열었다. “망할, 연약한 척 하기도 힘드네.” 아까 쓰러질 때 엉덩이 뼈가 바닥에 부딪쳤는지 뒤가 얼얼한 게 멍이 든 거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 아침도 안 먹고 나왔었지. 빨리 옷 갈아입고 매점이라도 갈려고 했는데 이것들 때문에 다 망쳤어. 아침 식사를 걸러야 한다는 생각에 화가 나 뭔가 한 마디 해줄 생각으로 고개를 드는데 인상을 사정없이 일그러트린 녀석 넷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쳐다봐? 니네는 빨리 연습 들어가든지 교실에 가든지 해!! 그리고 늬들 일은 늬들이 알아서 해라.” 네 놈이 동시에 굉장히 벨이 꼴린다는 눈으로 날 펴다본다. 그 눈빛의 의미가 뭐냐? “선생님...... 혹시 학기 초에 주선생님하고 싸우다 쓰러진 거..... 그것도 이거였어요?” 그 열렬했던 광경을 목격한 태민이가 아주 사색이 된 얼굴로 말하길래 답해주었다. “흥, 말이라고 묻냐? 난 머리털 나고 쓰러져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애들 패서 기절시키면 시켰지. 아우, 쪽팔려, 스타일 구기게!”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비닐 백을 챙겨들자 네 녀석들은 부동자세다. “인간이..... 왜 그렇게 사악해요?” “웃기네. 사악은 개뿔! 나보다 더한 놈들도 많은데 왜 나더러 그래? 나, 이 정도면 진짜 착하게 살고 있는 거야!” “..... 말도 안돼.... 왜 선생들 인성 검사를 안하는 거야?” “그럼 학생들도 인성검사해서 뽑게? 왜 선생들만 잘해야 되는데? 불만 있으면 늬들도 선생해!” 입을 꾹 다문 녀석들을 뒤로 하고 비닐 백을 어깨에 걸쳐 멘 채 상담실을 빠져나오려는데 순간 문가에 서있던 주장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저질......” 비꼬는 기색이 완연한 그 한 마디에 놀라 돌아보자 주장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지혁이에게 다가가 나가자는 재촉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인상을 쓰며 그 쪽을 바라보지만 주장 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진짜 기가 허해졌나? “선배, 쓰러...... 어?” 갑자기 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보니 명세다. 허어..... 복잡한 상황이로고!! “쓰러졌다며? 어디 아픈 거야?” 상담실 안을 쭈욱 돌아본 명세가 그 선생한테 뭔 소리를 들었는지 은근히 물어본다. 안됐지만 아니다, 임마! 내가 애들한테 맞겠냐? “내가 쓰러지는 거 봤냐?” “비오잖아. 그래서 걱정돼서.... 어디서 다친 거 아냐? 또 감전됐어?” “아냐, 임마!! 오늘은 길바닥에 슬라이딩만 한 번 했어. 아, 엘레베이터 고장도 있군.” “오늘은 양호하네. 다행이야. 비 내리길래 어디 또 부러져서 오나했더니.” “그게 왜 다쳤었는데? 죽어도 나가기 싫다는 거 니가 억지로 끌어내서 그런 거잖아. 흥, 나 반에 들어가야 돼! 니가 이 안 좀 정리하고 나와라, 그리고 강태민, 정경진 너희 빨리 교실로 뛰어 올라가!! 조례 시간에 없으면 죽을 줄 알아!” 엄포를 놓고 비닐 백을 든 채 교무실로 가는데 명세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으악!! 이게 뭐야?” 뭐긴 뭐냐? 저 놈들이 해놓은 짓이지. 하루 종일 음울하게도 내리는 비를 쳐다보면 멍하니 있다 겨우 수업이 끝나고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여기까지..... 무사히 왔으니 집까지도 무사하길 바란다. 오늘 오전에 그 난동만으로도 하루치는 충분히 했으니.... 괜찮겠지. 괜찮을 것이야!! “장선생!!!” 서둘러 퇴근하려고 짐을 챙기는데 대머리가 또 날 부른다. 내가 동네 개냐!! 왜 사방 팔방 부르고 지랄이야? “네, 교감 선생님.” 그래도 예의 상 웃으며 대답하니 만족한 듯 음흉하게 웃으며 내게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요?” 착한 선생 훈장이나, 선도위원 상장이라던가, 혹은 갑작스런 보너스 봉투라면 즐거이 받겠지만 그 외의 종이라면 절대 반갑지 않은 걸요. “여름 방학 때 있을 농구부 합숙 푭니다. 애들에게 전달하고 합숙소에 대한 의견 들어주세요. 그리고 합숙에 참가하지 못하는 학생들 처리하구요.” 허거덕..... 이 비오는 날 내가 체육관까지 가야한단 말야? 말도 안돼!! 이제까지 겨우 살아왔다고!! “저기 내일까지 하면 안될까요?” “급한 일입니다. 오늘 안으로 넘겨야하는데요.” 씨발, 그런 걸 지금 주면 어떻게 해? 저 대머리 나머지 세 가닥 다 뽑아버릴까 보다!!! “그럼 부탁합니다. 서둘러 끝내서 갖다주세요.” 하고는 뒷짐을 진 채 비오는 날 오늘도 형광등의 후광을 달고 사라진다. 망할...... 기름기 줄줄 흐르는 돼지새끼 같으니. 자아, 어떻게 한다지? 교무실에서 체육관까지의 최단 거리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 건데. 방법이 없지, 정면돌파다!! 신발이 젖는 건 질색이니까 양말을 벗고 건물 안에서 신는 슬리퍼를 찍찍 끈 채 바지를 접어 올렸다. 그리고 팔을 올려붙이고 그 위에 미리 학교에 준비했던 비옷을 입고 파라솔을 쓰고 비옷 안쪽의 옆꾸리에 비닐로 된 화일에 넣은 서류를 끼고 조심스럽게 체육관으로 향해갔다. 질척한 운동장을 걸으며 온몸으로 튀기는 빗물을 그대로 맞고 체육관 근처로 도착했다. 그리고.... 드디어 다 왔구나 안심을 할 무렵이었다. 체육관 문 앞에서 서서 우산을 접으려는데 체육관 문이 열리며 안에서 누군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옆의 녀석과 씨부렁대더니 그대로 나에게 촤악--- “으............” “으아악!!! 선생님 왜 거기 있어요?” 하는 건 1학년의 어떤 놈이었다. “이거..... 뭐야?” “아.... 저기.... 체육관에 비가 새서..... 받은 건데...” “너..........” “죄송해요!! 계신 줄 몰랐어요!!!” 라면서 양동이를 집어던지고 두 손으로 싹싹 비는 놈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이게 내 팔자지. 비 오는 날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허어.... “어떻게 해!!!” 라면서 거의 울 듯 한 놈 앞에서 난 우뚝 선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재수가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제 조금만 더 조심하면 집에 도착할 수 있는데.... 위에서 내린 것도, 등으로 날라 온 것도 아닌 정면에서 물을 맞은 덕에 비옷과 우산은 전혀 소용이 없어 난 그 비닐 옷안에 축축한 옷을 입고 있어야 했다. “...... 들어와요. 더 젖을려고 그래요?” 멍하니 서있는데 내 우산을 받아들고 내 손목을 잡아끄는 게 있었다. “야, 탈의실 가서 수건 가져와.” 라고 명령을 하는 것은 주장. “비 맞고 서있을 거에요?” 주장은 문 귀퉁이에 내 우산을 집어던지더니 내 비옷을 벗겨 한 놈이 날아서 가져다 준 수건으로 내 머리카락과 얼굴, 목 부근을 닦아주었다. 수건을 통해서지만 녀석의 손이 몸에 닿을 때마다 가슴이 더욱 크게 두근거린다. 나를 감싸안은 크고 따뜻한 손. 이 손이 진짜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택도 없는 얘기고. “줘, 내가 할게.” 머리 위에 있던 수건을 잡아당겨 내가 심하게 젖은 부분을 닦아냈다. “옷 갈아 입으세요. 야, 준비하고 있어.” 라며 내 손을 잡아끄는 것도 주장. 임마, 내 옷 갈아입을 게 뭐가 있다고?? 다른 때 같았으면 신경질을 부리며 빠져 나왔겠지만 내 손목을 잡고 있는 그 손이 묘하게 기분 좋아 뿌리치길 포기하고 얌전히 뒤를 따라갔다. 체육관 바깥의 빗소리와 내 심장 소리가 서로 얽혀 기분 좋은 리듬을 만들고 있는, 보기 드물게 괜찮은 비오는 날이었다. “이거 입어요.” 라면서 주장이 내준 것은 노란색의 트레이닝 복이었다. “누군 껀데?” “여벌로 갖다논 제 운동복이에요.” “응, 그래 고맙다.” 고개를 긁적이며 옷을 받아들고 젖은 니트를 벗으려하자 주장이 새 수건을 꺼내 던져준다. “닦아야죠.” “응.” 수건을 받아들고 닦는데 주장이 탈의실을 나갈 생각은 않고 문 앞에 떠억하니 버티고 섰다. “먼저 가있어. 따라갈게.” “비 오는 날 사고 잘 난다면서요. 같이 가요.” “어떻게 알았냐?” “그냥 알았어요. 빨리 갈아 입어요.” 노려보듯 보고 있는 녀석 앞에서 옷을 갈아입기가 참 쪽팔리지만 어쩔 수 없이 니트를 벗고 몸을 닦았다. 우, 쪽팔려..... 어째 기분이 찝찝하군. “윽, 너무 커.....” 라고 투덜대도 입을 옷이 없으니 그냥 윗 옷을 입고 나머지 바지를 벗었다. 다행히 옷을 커서 아래까지 확실히 가려준 덕에 덜 쪽팔리지만 그래도 태민이 놈 마음 알겠군. 녀석의 바지는 나보다 키가 커서인지 발등을 덮을 정도로 길게 내려왔다. 소매도 너무 길어서 두 어번 접고 바지도 두 번 정도 접어 올렸다. “가자.” 젖은 옷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녀석의 락커에 들어있던 비닐 백에 넣고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 생각이 바뀌었어요.” 난데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녀석의 반응에 난 녀석을 바라보며 되물어 주었다. “옷 돌려달라구?” “.......... 아뇨.” 달칵-- 문 잠그는 소리가 들리고 주장이 내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뭐가 바뀌는데? 농구 안한다구?”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애들이 가장 많이 변덕 부리는 얘기를 묻자 녀석이 약간 인상을 쓰며 말한다. “누가 농구 관둔데요?” “그럼 뭔데? 다른 길을 찾은 거 아냐?” 문득 바지 뒷 주머니에 들어있던 담배가 생각나 다시 바지를 뒤지며 찾자 뜨거운 손이 내 손목을 휘어잡았다. “그냥 안아버릴래요.” “뭘 안아?”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는 녀석의 시선과 맞추며 의아한 듯 묻자 녀석이 한치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으로 마주봐온다. 아니다, 사실은 다른 것이 있다. 평소의 녀석다운 단정함이나 부드러움이 아닌, 그 눈에는 남자의 욕망 같은 것이 서려있었다. “....... 권형아.....” 무서워가 아니라.... 사실은 놀라서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자 순식간에 입술을 겹쳐왔다. “우웁!!” 오오, 패닉!! 장인하 니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이런 어린 놈한테도 먼저 키스를 당하다니!! “우우웁!!” 가슴을 쳐내려 밀어내려 했지만 전혀 움직이질 않는다. 아니, 사실은 있는 힘껏 쳐낸다면 가능한 얘기지만.... 이 놈에게는 그렇게 힘이 나가질 않는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놀라기도 했지만..... 왠지 녀석의 체온이 기분 좋아져 포기하기로 했다. 싫은 놈이라면 죽여버리겠지만 좋아하는 놈이 키스해오는데 왜 말리겠어? 키스를 그다지 해본 적이 없는 듯 기교 없이 파고 들어오는 거친 혀에 입안이 시려왔지만 날 안고 있는 녀석의 손의 따스함이, 그리고 안겨 있는 가슴이 기분 좋아 그대로 반항을 포기하고 녀석의 목을 끌어안아 서서히 혀를 풀어주었다. 이렇게 거칠게 하면 십중 팔구 무서워 달아난다고, 바보야. “.... 우응... 하아....” 한참만에 떨어져 나간 입술에 겨우 숨을 내쉬는데 녀석이 사정을 봐주지 않고 락커룸에 있는 테이블 위에 나를 밀어 넘어뜨렸다. 젠장, 오늘만 해도 두 번이다!! “임마, 아파!” 빽하니 소리를 질러도 녀석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본다. 그 눈빛에 뭔가가 찔려 녀석을 밀려는데 이 어린 놈이 내가 밀 사이도 없이 입고 있던 커다란 바지를 끌어내려 버리다니! “야!! 무슨 짓이야?” 이게 왜 이래? 그렇지 않아도 커서 헐렁한 고무줄 바지를 자연스레 끌어내린 놈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안의 속옷까지 끌어내렸다. “야!!! 안돼!! 나 짤려!” 사실 짤리는 거야 별로 무섭지도 않지만...... 이 뒤가 무서운 거지. 막판에 가서 울거나.... 혹은 후회한다거나 한다면.... “야, 이성을 가지고 생각을 하자!! 너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하는 건 별 거 아니지만...... 너 후회하면 가만 안둘꺼야!” 그래, 이 놈이 이래뵈도 내가 짝사랑하는 놈 아니겠어? 그런 놈이 객기에 섹스하고 나중에 후회한다고 하면 나 진짜 미쳐버릴꺼야. “후회 안해요. 할 꺼라면 아예 시작도 안해요.” 나즈막히 말을 마친 녀석이 옷을 완전히 끌어내리고 내 다리 사이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이 놈 경험이 없는 거 같지?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그.... 남자끼리 할 때는 말이야 서로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이 필요한데 장화도 없이 게다가 아무런 여흥도 없는 상태에서 쳐들어 온다는 게 말이야...... “저기..... 너 이대로 할꺼야?”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 녀석이 자기 바지를 내리더니 엄청난 걸 보여주고 말았다. 임마야!!! 너 진짜 섹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냐? 지혁이랑 사겼다며? “후우.... 그래, 하는 건 하는 건데....” “좋아해요.... 그냥 객기 같은 거 아니에요. 좋아해요......”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보며 말하는 녀석의 말에 난 하려던 말까지 까먹어 버렸다. “뭐... 라구?” 놀라 올려다 보는 나의 눈에 녀석의 슬픈 듯 한 얼굴이 박혀왔다. 이거... 얘 왜 이래? “...............” 내 말에 더 이상의 대답 없이 갑자기 뚫고 들어온 녀석의 움직임에 그 이상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망할..... 간만에 하니 진짜 아프다...... “괜찮아요?” 아무런 테크닉 없이 힘만 좋은 녀석에게 휘둘려 완전 녹초가 되어버렸다. 비도 오는데..... 망할...... “괜찮지 않아.... 옷 좀... 줘.” 딱딱한 테이블 위에서 요가를 다하고... 하아.... 성질 많이 죽었다, 장인하. “닦아 드릴게요.” 라며 아까 빗물을 닦았던 수건이 아닌 새 수건으로 정성스레 내 아래를 닦아주는 녀석을 보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틀 간 설사..... 끔찍하기는 하지만..... 왠지 미워지지도 않는 게.... 신기하지. “이거.... 어린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나 진짜 선생님 좋아해요. 나 선생님 좋아해도 돼요?” “...... 진심이냐?” “진짜 좋아해요.”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내 눈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눈동자에 마음이 아팠지만...... 무조껀 OK라고만은 할 수 없지. “좋아하는 건 좋은데........ 말이지......” 그래, 내가 좋아하지 않는 놈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좋아하라고 하겠지만 말야.... 내가 좋아하는 놈이라면 그런 게 쉽게 안되거든. 나도 감정 콘트롤이 잘 안되는 체질이라서 말야.... 나 한 번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아직은 버틸만 하지만 네 고백에 OK사인 보낸다면 나 진짜 정신 없이 빠져버릴꺼야. “선생님도 저 좋아하잖아요.” 갑자기 떨어진 놈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놈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렇게 티내고 다녔나? “...... 그건.....” “사랑해요.” 애절한 눈빛으로 고백을 해오는 녀석을 보자 쓴 웃음이 떠올랐다. 막말로 말이야, 반하는 건 순식간이라지만 이 놈이 알 몇 번이나 봤다고 벌써 「사랑」씩이나 하는 걸까? 난 그게 의문이란 말야. 이 놈이 날 알게 된 건 끽해야 내가 부임해 왔을 때이고 몇 번 마주친 적도 없는데..... 왜 벌써 거기까지 진도가 나가는 거지? 뭐, 이미 갈 데까지 간 후에 할 말은 아니지만. “생각 좀 해보자..... 그리고, 나중에 얘기하자. 유권형.” 그 때 난 처음으로 녀석과 눈을 마주치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말과 함께...... 그리고 그 날 오후 목숨 걸고 겨우 집에 도착했고 녀석의 고백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런 저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짝사랑하던 사람에게서 고백 받은 기분은, 비록 그걸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가슴 떨리는 일이었다. 너무 엄청난 고백에 정신이 나가있는 데에 더해 그 날 새벽에는 더 엄청난 소식을 들어 버렸다. 셋 째 개새끼가 기어코 자살에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Track 10. 기차 Sung by god 그 새끼의 자살 소식에 찝찝한 기분으로 등교한 날의 오후. 그건 우연한 일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교무실을 스쳐가다 성준이의 자리에서 교무수첩과 서류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뭐야?” 한숨을 쉬며 서류들을 챙겨 올리려는데 서류들 사이에 두툼한 꾸러미가 눈을 끌었다. 뭔가 해서 보니 3학년 7반의 주민등록 등본 꾸러미였다. 그냥 지나치려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꾸러미를 뒤져 맨 끝 번호의 권형이의 것을 찾아냈다. 부모님의 프로필은 대강 알지만 그냥 생일이라도 알아두자는 기분에서였는데..... 열심히 서류를 보던 중 곧 후회를 하고 말았다. 부모님이 재혼하셨어도 아직 아버지 성을 따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진짜 엄청난 것을 보고야 말았던 것이다. “하...... 말도 안돼.......” 딱딱하게 굳어오는 몸에 본능적으로 서류를 집어던지고 서둘러 상담실로, 아니 옥상으로 향해갔다. 콰앙-- 오래된 철제문을 열고 뛰어가 서둘러 담배를 빼무는데 손이 부르르 떨려 제대로 불도 붙일 수 없었다. “제기랄.......” 터져 나오려는 울음소리에 입술을 이빨로 깨물고 그대로 난간을 붙들고 서서 오열을 토해냈다. 재수가 없다 없다 해도 이렇게 연타로 핵폭탄을 쏘아댈 수는 없는 일이다. 겨우 찾아낸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윤진이 때 만큼 격렬하지는 않아도, 명세처럼 너무나 익숙한 일상이 아니라도 가슴이 설래고 잡고 싶었던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하필 너냐? 잊고 살았는데..... 아니 잊었다고 체념하고 자기를 달래고 있었는데 왜 하필 이제 와서...... “흐윽........” 이건 사랑을 잃은 슬픔이나 경악스러운 진실에 대한 울분이 아니다. 그냥..... 내가 불쌍해져서, 그 순간 내 인생이 너무 처량하고 불쌍해져서 터져 나온 비명일 뿐이다. 그 엄청난 매춘 소굴로 팔려갔을 때도, 형이라는 것들이 위선적인 가면을 쓰고 나를 놀이개로 삼았을 때도 이렇지는 않았다. 그 저 담담히 살아있는 것만을 기뻐하며 언젠가 그 안에서 벗어날 날만을 기다리고 악다구니를 써서 살아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결과가 이것이다. 결국 힘겹게 돌고 돌아온 곳이 시발점이라는 것, 그 절망감을 지금 뼛속에서까지 감지해 내고 있는 것이다. 왜 이래야 하는 건데..... 내가 왜 이렇게 운명의 냉대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독하게 살아온 18년 간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허물어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고 머리 속은 텅 비어가고 있었다. 마른 나무 껍질처럼 순식간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발 밑으로 허물어 내리는 기억들. 지난 시간들이 마치 모두 거짓처럼 느껴진다. 멀고 슬프고 닿지 않는 환상들...... 알지 못하는 쪽이 나았어. 보지 않는 쪽이 좋았다. 장인하.... 너를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잘 자라난 그 주장을 위해서 말이야..... “거짓말.......” 병신, 그래 거짓말이다. 이제라도 안 게 얼마냐? 이제 맘을 정리할 구실이 생기니 좋지? 그게 낫지 않아, 장인하? 스스로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낸 거야. 그 녀석의 사랑과 진실이 무서워서 언제나 빠져나갈 궁리나 하는 주제이니 잘 된 거 아냐? 그래, 도망쳐라, 그대로. 핑계를 대고 어디까지나 도망가 보라구...... 그게 너한테 가장 어울리는 길이야. 겨우 수업을 끝내고 멍하니 체육관에 들리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기를 하루, 이틀..... 권형이와 마주칠 새라 3학년 복도 쪽은 알아서 피해 다녔고 체육관은 근처도 가지 않았다. 하지만.... 수업이 없을 때마다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는 버릇은 늘어가기 시작했다. 녀석에 대해 특별히 원망이나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진실을 안 순간의 쇼크는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래서.... 도저히 녀석을 마주 볼 자신이 나질 않았을 뿐이다. “후우........ 관두자, 처량 맞게 뭐냐? 장인하..... 그만 둬, 추해.”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해댄 말이다. 하지만..... 그게 잘 되질 않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겠지.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 나는 사랑이라..... 그런 거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말야, 며칠 못봤다고 이렇게 그리우면 어떻게 할려고 그러니, 너. 촌스럽게 말야.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다음 수업 때문에 상담실을 나와 교무실로 향해갔다. 그리고 막 교무실 문을 열려던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녀석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 “안녕하세요?” 큰 덩치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는 녀석을 보자 내 다리는 내 뇌의 명령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냥, 고개를 숙여 답하고 교무실로 들어가면 될 것을 난 그대로 뒤를 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1층인 교무실을 지나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 순식간에 거의 인적이 들지 않는 지하의 특활실 복도에 닿아있었다. 아무 곳에나 들어가려고 하는데 바로 뒤를 따라오는 걸음 소리를 들어 버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내 손목을 잡아오는 뜨거운 체온. “..... 왜 자꾸 도망가요?” “누가 도망을 가?” 갑자기 잡혀 버려 차마 더 뛰진 못하고 녀석의 말에 발끈해 답해주었다. 그럼 어쩌리..... 이 늙은이 마음이 대책이 안서는 걸. “아니면 똑바로 얘기해 봐요. 저 싫어요?” 어떻게 얼굴 보고 똑바로 말을 하냐? 생각을 해봐라...... 내 나이가 29이고 넌 19살이다. 난 늬들 만대로 꺽어지는 겨울 가지라구....... 게다가 너와 난 절대 안될 이유가 있어. 그런 이유로 난 더 이상 상처받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단 말야. 한 번만 더 상처받음 난 심장마비로 죽어버릴 꺼야. 아직 어린 너는.... 저돌적이고 무서운 게 없겠지만 난 아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도 매번 같은 상처만 뜯어내는 것도 지쳤어. 나 오래 살고 싶다구. “난...... 어린 놈들은 싫어.” 내 마음에 들어와 이미 안방 차지하고 앉은 니가 싫다고는 말 못하지만...... 난 어린놈들은 정말 싫어. “그리고 나보다 덩치 크고 운동하는 놈들은 더 싫어. 나.... 상처 많이 받았단 말야. 그러니까....... 너도 싫어.” 딱 잘라 말하는 내 마지막 말에 권형이의 눈이 커지더니......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진심이에요?” “..... 그래.......” “...... 싫은데...... 귀찮게 해서 미안해요.” 그렇게 예의 바르게 인사 같은 거 하지마!! 나, 넌 싫지 않아. 덩치 크고 연하에 운동선수에다 - 그것도 농구 선수 - 열 받게 얼굴까지 잘 생겼지만..... 나 넌 싫지 않아. 사실 그게 문제인 거지만...... “갈게요........” 말할 수 없이 아픈 표정으로 버림받은 강아지 같던 녀석이 내 눈앞에서 멀어진다.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그 커다란 덩치로 조심조심 복도를 걸어 계단을 향해간다. 저 모습이, 저 잔상이 평생 잊혀지지 않을 가슴의 못이 된다 해도, 내가 네게 의도치 않은 비수를 꽂았다 해도...... 나 더 이상 상처받기는 싫어. 어차피 오래 가지 않을 사랑이라면 하지 않는 게 낫잖아. 버림받을 꺼면 애초에 주인따윈 없는 게 나은 거야. 권형아.... 인생은 그런 거야. 나도 너처럼 좋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그게 최고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어. 하지만..... 그 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잘 치유가 안되더라. 사랑은 되도록 상처받지 않을 관계의 누군가를 골라서 해야 하는 거야. 아무리 사랑해도 말이지.....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으면 굉장히 아프다는 거..... 넌 아직 모를꺼야. 아무리 당당해도 뒤에서 손가락질 받는 사랑 같은 건 말이지 객기만으로는 견디기 힘든 거야.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나는 객기 부릴 나이는 지났잖아? 그러니까 널 보내는 거야. 나는 나한테 맞는 사람을, 너는 너한테 어울리는 사람을 찾아서 가는 게 너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잖아. 나 연애 말고도 너무 아픈 일이 많아. 나 평생 버림만 받고 산 사람이야. 아니, 아직까지는 괜찮았어. 버림받아도.... 내가 견딜 수 있었으니까, 인이 배겼다는 거야. 하지만 난 너한테 버림받으면.... 진짜 미칠지도 몰라. 너 진짜 사랑하거든. 이 나이가 되면 사그러 들어야 한다는 사랑이란 게 너무 강렬해져서..... 한 번 닿으면 나 너 절대 놓치 못할꺼야. 차라리 시체를 끌고 사는 한이 있어도...... 나 너 못보내. 그러니까..... 내가 놔줄 때 가라. 나 어제 죽은 그 자살중독증 환자보다 더 독한 놈이야. 그 불쌍한 자살 중독증 환자 말이지..... 나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새끼야. 내 과거들 너한테 이해 받을 자신 없어. 그러면 당연히 나오게 되는 진실들. 그러면 너...... 나 떠날꺼야. 아무리 버틸려고 해도 넌 나 못 받아들여, 나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내가 놓을게. 니가 잡은 내 왼손, 내 오른손을 잘라 놓을게. 예뻤던 내 동생...... “여기서 뭐해?” 멍하니 녀석이 사라진 복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성준이가 어깨를 툭 건드린다. “...... 아니, 아무 것도........” “지환이..... 형 죽었다며?” “....... 응, 어제 오후에. 그 미친 새끼, 그렇게 죽을려고 발악을 하더니..... 결국은 죽더라. 씨발, 아직 미치는 꼴도 제대로 못봤는데 결국 뒤지네. 더 시도하다 안되면 내가 도와줄려고 했는데.” 차가운 복도의 벽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말하자 성준이 놈이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건데? “왜? 내가 불쌍하냐?” “....... 솔직히 그래. 너 상처 받았잖아.” “내가? 왜? 그 새끼 죽었으니 63빌딩에 올라가서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기분인데.” “너...... 사과 받을 일이 있잖아. 그 형한테.......” “.................” “아직 다 상처 낫지도 않았잖아. 어떻게 해........” “새끼야, 니가 왜 울어?” 갑자기 녀석의 뺨에 흐른 눈물에 당황한 건 오히려 나였다. 이 새끼, 나한테서 명세 뺏어갈 때도 뻔뻔스래 지가 울더니, 이런 상황에서도 지가 울면 어떻게 해? 왜 이래, 진짜? “너, 불쌍해서 어떻게 해!!” 라면서 이젠 아예 통곡을 한다. 이게, 여기가 아무리 사람들 안다니는 길이라지만 쪽팔리게 그렇게 울면 어떻게 해? 너 왜 그래? 내가 뭐가 불쌍해? 나 안불쌍해!! “내가 뭐가 불쌍하다고 난리야? 왜 그래, 너!!!” “너...... 평생 사과 받을 수 없잖아. 그렇게 이를 갈면서도...... 어쩔 수 없던 사람인데..... 너, 지환이형, 사랑했잖아.” 이래서... 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친구놈은 싫다니까. 그래, 나 그 놈 사랑했었다. 하지만 그 놈이 내 상처 너무 헤집어 놔서 못되게 굴었어. 사랑하지 않는다고 지겨운 새끼라고 욕하고 조롱하고, 비웃고.... 하지만 아직도 조금은 사랑하고 있어. 그 놈이 내 첫살이었단 말야... 물론 처절한 짝사랑으로 끝났지만. “너.... 어떻게 해......” 병신 같은 새끼...... 내 실연의 원인인 놈이 내가 불쌍하면 어쩌니? 난 안불쌍하니까...... 그만 좀 울어라, 바보야. 나 안 불쌍해, 하나도. “야, 그만 울어라, 내가 어디가 불쌍하냐? 나 돈도 많고 나이는 좀 걸리지만 미모는 된다. 그리고 학력도 괜찮고 아직은 힘도 세. 살만 하다고, 나. 진짜 불쌍한 건 당장에 돈도 먹을 것도 없이 쫓겨난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이지. 나 돈만은 평생 쓰고도 남는다. 나, 이래 뵈도 재벌 집 막내아들이었어. 우리 엄마, 아빠가 나 팔았지만.... 그래서 내 인생 엉망이 돼버렸지만...... 나 돈 진짜 많아. 그다지 정상적인 루트로 번 돈은 아니지만..... 꽤 괜찮잖아, 그거. 10살 때부터 그렇게 살고 번 돈이면 꽤 큰 거 아냐? 그 일 때문에 계속 채이고 설움도 많이 받았지만.... 나 명줄도 기고 기골도 세다. 울지마, 병신아........” 내가 미안할 정도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녀석을 안고 조용히 토닥거렸다. 바보같이, 남의 일에 울면 어떻게 하니? 그러니까 넌 아직 약지 못했다는 거야. 세상은 적당히 모른 척 하고 적당히 눈치 까고 살아가야 잘 사는 거다, 너. 이렇게 마음 약해서 어쩔래? 우리 엄마 아빠가 나 팔아먹었단 말 듣고 일주일을 울던 놈이니....... “너 이제 어떻게 해?” 라면서 아예 통곡을 한다. 임마, 나 안운다니까. “어떻게 하긴! 내가 너 같은 줄 아냐? 나 아직 살 날이 구만리 같아. 결혼도 할 꺼고 애는 못낳으니 입양해서 키우고 나 버린 부모님 여봐라 잘 먹고 잘 살꺼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어떻게 하기 어떻게 하냐? 이제 와서 뭘 어쩌고 할 시간이나 있냐? 그냥 해왔던 대로 난 내 방식대로 꿋꿋하게 살 꺼야. “야, 쪽팔리니까 그만 짜. 나 종례하러 가야돼!! 우리 반 애들이 기다린단 말야.” “으응.......” 이라며 눈을 비비는 녀석을 바도 뒷주머니에 있던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하여간...... 애물이야, 애물!! 이것도 농구부 놈들하고 똑같다니까.......” 눈이 붉게 부어오른 녀석의 눈가를 매만지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게 내가 사랑한, 가장 친했던 친구의 얼굴이다. 착하고, 성실하고, 곧고 바른.... 내가 항상 동경하던 세계에 속해있던 녀석. 그래서 나 이 놈을 끝까지 미워할 수 없었나 봐.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걸..... 어떻게 미워하겠어. “나 종례 간다. 넌 얼굴 씻고 가라.” 녀석을 혼자 두고 아까 권형이가 올라갔던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내 신발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그 어둡고 차가운 복도를 지나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처럼 계단으로 발을 올렸다. 난간을 잡고 한 계단, 두 계단 오르는데 보이는 긴 그림자........ 나를 보고 있는 듯 한 그 느낌에 무거운 머리를 겨우 들어 본 곳에 있던 건 지금까지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얼굴, 단 한 순간 헤어졌던 시간도 그리울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 “권형아.......” “.......... 엿들어서 미안해요. 갈게요......” “권형아........” 애타게 부르는 내 목소리는 녀석의 뒷모습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그 녀석의 커다란 그림자가 석양에 비추어 내 발끝에 닿는다. 내가 너 상처준 거 맞지? 그런데 어떻게 하니..... 나도 상처 받았는 걸...... 길게 늘어지는 그 그림자에 니가 우는 거 같아서..... 내가 울어버릴 거 같은데........ 나, 우리 엄마가 나 팔아 넘길 때도 안울었는데...... 온갖 짓 다 당하고 엉망이 돼서 죽고싶었을 때도 난 울지는 않았는데..... 너 때문에 울면 나 어떻게 해? 나 평생 안 울기로 맹세했는데...... 왜 그래, 너. 왜 자꾸 날 울릴려고 해. 니 그런 모습 보면 자꾸 슬퍼진단 말야. “......... 권형아........” 복도 안에 울리는 차가운 메아리...... “망할.......”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서둘러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나의 발소리만이 시멘트 바닥을 울릴 뿐 초저녁의 복도는 한산했다. 그렇게 해도 시간은 흘러 가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무뎌져야할 감정들이 더욱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녀석에 대한 반응도 내 감정도, 자꾸 의식하게 되는 시선도 무뎌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서히 눈을 감고 다시 떠도 잊혀지지 않는 잔상들. 니가 날 사랑한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그 일이 바로 어제 일 같은데 말이지..... 그 뒤로 이렇게 엄청난 걸림돌이 생길 줄이야 몰랐지.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더 보고싶고 말을 걸고 싶은데..... “주장..... 나 좀 보자.” 애써 말 걸 꺼리를 찾다찾다 겨우 발견한 게 합숙 이야기였다. 이런 문제가 아니면 저 놈은 내 얼굴 쳐다도 안볼 꺼다. “무슨 일이신데요.” 바로 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야윈 얼굴이 측은하고 안되보이지만....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수는 없지. 사나이, 아니냐.... 내가...... “합숙 문제 때문에 그러는데...... 여름 합숙 때 장소가 신성고 옆이다.” 라고 서류를 보여주자 살짝 인상을 찡그린다. “그런데요?” “지혁이 놈하고 태민이 자식, 단속 잘 해야지. 애들한테 미리 말하고 잘 타일러 놔라. 니 말이면 듣잖아, 두 놈 다.” “그럴게요. 할 말 다 하셨죠?” “어........ 그야.......” “그럼 가보겠습니다.” 하고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더니 그 덩치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그래도 명색이 선생님이 말 건 건데.....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서면 내가 무안하잖아. 그냥,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혹은 선생님은 안오시나요.. 라고 물어봐 주면 안되니? 왜 이렇게 모질게 구니? 나도 너한테 잘한 거 없지만..... 그래도 보통 학생과 선생님 정도도 안되니? 아니, 혹은...... 차갑게 돌아선 그 등이 마치 나를 뒤로 밀어내려는 거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녀석은 지금 온 몸으로, 마음으로 나를 거부하고 있다. 제발 비켜달라고, 더 이상 쳐다도 보지 말라고...... 아프게 하지 말라고...... 그냥...... 바라만 보는 것도 안되니........ “권형아..........” 작게 나간 나의 부름에 녀석이 우뚝 멈춰 서 돌아본다. 일말의 작은 기대를 담은 눈으로...... “......... 아, 미안. 들어가 봐라.” “...............”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내게 어떤 말 한 마디를 요구하고 있었지만 니가 원하는 걸 난 네게 줄 수가 없을 것 같다. 세월이 무섭긴 무서운가 보다. 이제는 앞서 나가기보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서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니까. 연하에 덩치 큰 농구 선수, 게다가 집안까지 대단한 장래 유망주..... 라면 말이지. 내게 떠오르게 하는 게 너무 많거든. 또 한 번 되풀이 하기는 싫다, 그런 일. 게다가 네가 알지 못하는 추악한 것들이 너무 많아. 원래 그렇게 걸리는 게 많은 상대하고는 연애하면 안되는 거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속이고 너와 함께 한다해도 말야, 언젠가는 모든 것을 알게된 니가 나 버린다면.... 나 아마 니가 상대라면 그 놈에게처럼 나쁜 짓 못 할꺼야. 그 놈한테 한 것처럼 대자보에 므흐한 사진 붙여 개망신 당하게도 못할 꺼고 학교 안에 호모라고 소문내지도 못할 꺼고 그 놈에게처럼 야구 방망이 들고 밤길에 습격도 못할 꺼야. 그리고 그 때처럼 군대로 도망가지도 못하겠지, 나이가 나이다 보니....... 가봐야 이 재단 하의 학교겠지. “........ 모질이......... 후우..........”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Track 11. 올가미 Sung by Baby Vox 요즘은 계속해서 멍한 상태로 있다 보니 주변 선생님들이나 친구들의 걱정이 장난이 아니다. 그 걱정도 귀찮아 뿌리치지만 줄기차게 귀찮게 구니.... 이거야 원.... 내숭 까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착한 척하는 것도 다 물리고 학교에 나오는 것 조차 힘들지만 학교가 아니면 내가 언제 그 놈 볼까... 하는 생각에 학교만은 죽어라 나오고 있었다. “장선생!!” 그리고 막 마지막 수어블 들어가려던 찰라에 옆 자리의 신선생님이 말을 걸어왔다. 이제 출산일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교육 정신만은 투철한 그녀였다. “네?” “체육관에 가보세요. 오늘 OB들이 안다는데 고문선생님이 계셔야죠.” “아, 아까 얘기는 들었는데 다음 수업이 있어서요.” “어머, 그래도 선배들인데 얼굴만 비치고 가세요. 전 학생들은 얼굴도 다 모르잖아요. 우리 학교 유명한 선수들 많아요.” “아.... 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그녀의 설득과 권형이 얼굴이나 볼까 하는 생각에 진짜 얼굴만 비칠 생각으로 체육관으로 향해 갔다. 그리고 진짜..... 무서운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너!!! 너너너너너너!!! 너, 니가 왜 여기 있어?” “너야말로 왜 여기 있는 거야?” 라는 녀석의 말에 들고 있던 출석부를 녀석에게 집어던졌다. “누구더러 너야? 선배라고 불러!!”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그 출석부를 아슬아슬하니 얼굴 앞에서 막은 녀석은 일그러진 미소로 답했다. “여전하군, 이 엄청난 콘트롤이나 성질이나!” “아우, 재수 없어!!!” 온 체육관이 울리게 바락 바락 소리를 지르고는 뒤돌아서 가려는데..... 문득 뭔가가 허전해져 다시 뒤돌아 그 녀석의 쪽으로 다가갔다. “출석부 내놔!” “성질 좀 죽여.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네.” 라며 출석부를 건내는 녀석의 손에서 그걸 받자마자 녀석의 머리를 냅다 내리 갈겨 주었다. “왜 때려?” “10년이 아니라 7년이다, 병신아!” “어우,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야?” “이 학교 교사이자 농구부 고문이다. 넌 왜 여기 있냐?” 라는 내 질문이 무색하리만치 녀석은 방방 뜨며 소리를 질러댔다. “어째서!!!! 어째서!!!! 너 같은 게 우리 학교 농구부 고문 따윌 하고 있는 거야?” “으아아악!!! 너 이 학교 출신이었냐?” “그래!!!” 라고 말하는 녀석의 말에 자동적으로 발이 먼저 나가 녀석의 쪼인트를 까주었다. “으악, 또 왜 때려?” “어쩐지 불길했어!!! 이 학교!!! 씨발, 너 다니던 학교인 줄 알았으면 절대 안오는건데!! 으악, 이 학교, 이 농구부가 내 인생을 좀먹고 있어!!!” 리고 이번엔 내가 길길이 날뛰며 출석부까지 집어던지자 체육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벙찐 얼굴로 쳐다본다. 저기 나이든 인간들한테는 뭐라고 못하겠고 시선을 돌려 이 쪽을 보고 있던 학생들에게 냅다 소리쳤다. “어딜 쳐다봐, 새끼들아!! 늬들 일이나 해!!!” “아휴, 저 성질!!” 이라고 발끈한 녀석을 쫘악 노려보고는 입을 다무는 녀석을 보고는 이를 갈고 눈을 한 번 희번득 떠준 후 출석부를 들고 체육관의 문으로 향해갔다. 난 아무 것도 못봤어, 아무 것도 못본 거야. 난 오늘 이 체육관에 온 일이 없어. 이건 꿈이야, 아암...... 꿈이고 말고. 그렇지 않고서야 저 인간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날 리가 없잖아? 내가 들어온 학교가 저 녀석의 모교라는 그럴 듯한 우연이 진짜 있을 리가 없잖아? 하하하........ 있다면....... 그건 운명의 장난이지. “그래, 난 아무 것도 못봤어. 후후후..... 그래, 이건 꿈이야, 꿈. 아암...... 후후후후후후후........” 음산한 미소를 날리고 한 시라도 바삐 빛의 세계로 나가고자 서두르는데 뒤에서 뭔가 다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돌아서 가까이 오는 물체를 걷어차자 그 물건은 참으로 빠른 속도로 나의 다리를 피하고 내 팔목까지 잡아들였다. 허허, 빠른 물건이로고........ “얘기 좀 해, 형, 아니 선배.” 라는 것은 환영(幻影). 그래 이건 환영이라니까. 그러니까...... 못 본 척 해도 돼. “난 아무 것도 안보여.... 그래, 이건 환영이라니까.......” 자기 암시를 걸며 잡힌 손목도 무시하고 돌아가려는데....... 환영치고는 꽤 힘이 세더군. “왜 그래? 얘기 좀 하자는데.” “이것도 환청이야. 훠어이~ 악귀야 물러가라. 내가 기가 약해졌군..... 환청에 환영에...... 허어.......” 고개를 도리 도리 흔들며 열심히 움직이려는데 손목을 붙잡은 게 빠질 생각을 안한다. 그래, 이건 필시 가위를 눌린 것이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고.........” 라고 간만에 주기도문을 낭송하는데 뺨에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들어왔다. 허걱....... 저 악귀가 엑토 플라즘까지..... 다시 한 번 눈을 질끈 감고 이번엔 반야심경을 외웠다. “마하반야 바라밀다시.......” “선배, 왜 이래?” 귀를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노성에 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앞에 선 덩치를 바라보았다. 허어...... 이게 왜 아직 있나? “나랑 얼굴 맞대하기도 싫다는 거야?” “........... 어떻게 알았니? 제발 성불해 줄테니 극락환생해라. 넌 나한텐 죽은 사람이야.” 반은 장난으로, 그리고 반은 진심으로 말하자 내 앞에 선 녀석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하아, 이제 가려나 보네. “아직도 화난 거야?” “그걸 말이라고 묻니? 니가 준 상처... 난 평생 안잊을 꺼라고 했잖아. 죽을 때 내 자서전에도 넣어줄게.” “남자가 쪼잔하게........” “나 원래 쪼잔하고 소심해. 그러니까 제발 우주로 날아가 주라. 나, 살면서 농구장이라면 알아서 피해 다녔고 니네 팀 있는 데로는 그 근방 100m 내외도 들어가지 않았다. 바쁠수록 돌아가라잖냐. 제발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라. 나, 너 보면 또 무슨 짓 할지 몰라.”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횡설수설하며 내 손목을 부여잡고 있는 녀석에게서 나오려고 했지만 택도 없는 얘기다. 이게 뭔 힘이 이렇게 세대? “미안해. 상처 준 거.... 나도 후회하고 있고...... 만나고 싶었어, 계속........” “그래? 만났으니 이제 원 풀었지? 그러니 내 눈앞에서 꺼져 줘, 아니 내 인생에서 나가 줘, 영원히...... 후생에라도, 실수로라도 우리 다시 마주치지 말자. 나 너라면 아직도 이가 갈려.” “........ 인하야......” “이름 부르지 말아줄래? 난.... 너에 관한 좋은 기억 하나도 남아있질 않아. 니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날 정도야. 그렇다고 이 꽃다운 인생 여기서 끝낼 수는 없잖아. 그러니까..... 제발 니가 사라져주라. 하다못해 이런 우연으로라도 마주치지 않게 제발 좀 꺼져 줘.” 무표정하게 하지만 나의 온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하자 손목을 잡은 힘이 서서히 약해진다. 나, 이런 말로 너 상처 준걸 지도 모르지만.... 지금 내가 했던 말의 몇 백 배, 아니 몇 만 배로 더 잔인하게 니가 날 죽였었다는 거 기억해야 돼. 날 만신창이로 만든 너잖아. 그렇지 않아도 힘든 내 인생 더 꼬이게 만든 게 너잖아....... “형, 아니 인하야, 한 가지만 물을게....... 너 나 진짜 사랑은 했니?” 순간 머리통을 해머로 후려치는 듯 한 충격을 받았다. 하, 뭐? 사랑 한 적 있냐구? 그럼, 사랑하지 않았으면 내가, 너도 깡패에 성질 더럽다고 하는 내가...... 그 수모 겪어가며 너 따라다니고 니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니 말이면 죽는 척이라도 하며 니 발목 잡았겠니? 내가..... 니 말대로 고등학교 때, 걸레였던 내가 너만 따르고 너만 쳐다보고 니 말만 들었겠니? “그럼 나도 하나만 묻자. 너야말로 나 사랑했니? 아니, 날 한 순간이라도 사랑한 적 있어? 날 니 연인으로 인정했던 적 있었냐구? 날 믿은 적 있어? 날 소중하게 느낀 적 있어? 내가 사람이라고 느낀 적 있었냐구?” 조용한 체육관을 울리는 나의 외침에..... 그 울림에... 몸이 떨려왔다. 과거의 그 수많은 상처들과 잔인한 기억들이 얽혀들어 울리고 울리고 또 울려서...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만약..... 니가 날 조금이라도 사랑했다면..... 나 니 발 밑에 엎드리고 빌어서라도 너 잡았을 꺼야. 조금이라도 니가 날 사랑했다면 나 성질이고 자존심이고 뭐든 버리고 니 옆에서 죽어 살았을 꺼야. 하지만..... 넌 날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어. 너한테 난 사용하기 쉬운 변기였지. 내 말 틀려?” 속 안에 있던 진심들이 흘러나가자..... 녀석은, 서윤진은 눈을 크게 뜨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미 이 안이 녀석의 모교이자 내가 선생질을 하고 있는 곳이고, 이 안에는 내 제자와 이 녀석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더불어...... 저 대머리까지 있다는 사실을........ “......... 날 믿지 않았구나....... 너.....” 라며 핏기가 가신 입술로 떨고 있는 건 서윤진이 아냐. 날 그렇게 상처 입히고 내친 그 녀석이 아니다. “장인하...... 넌 정말 날 믿지 않았구나........” “........ 너의 모든 행동에 진실성은 조금도 없었어. 설혹 모든 게 오해에서 오해로 꼬였다 해도...... 너와 내가 했던 건 사랑이 아냐....... 그런 게 사랑이라면....... 그 딴 사랑 개나 줘 버리라 그래.” 내가 들어도 놀라울 정도로 차갑게,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야 모든 것이 맑게 개이고 현실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한 건 사랑이 아니었다. 이기적이고 유치한 어린아이들의 장난이었을 뿐....... 아니, 애초에 난 제대로 된 사랑 따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짝사랑의 행진. 처음 고백한 것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의 대쉬를 무시하며 비웃고 여기 저기로 빠져나갔지만 결국 녀석에게 빠져버렸고 정신 없이 그 사랑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비극이었다. 결코 잘 될 리가 없었던 사이였지만..... 그렇게까지 나를 상처 줄 꺼라고 생각지 못했던 방법으로 녀석은 나를 조각 조각내 버렸다. 아마, 내 사랑 법이 잘못된 거였겠지. 무지막지하게 빠지는 나의 스타일에...... 무서울 정도로 헌신적이고 그 사랑에 안주하려드는 나의 방식에 염증을 느끼는 거겠지. “그러니까...... 이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 서윤진.” 짤막하게 말을 끝내고 돌아서 체육관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깥으로 나가면 여전히 햇빛은 뜨거울 것이고 운동장의 모래바람은 무서울 정도로 휘몰아치겠지. 그리고 들리는 학생들의 웅성거림과 축구부 애들의 달리는 소리, 그리고 들뜬 오후의 분위기가 도는 우리 학교다. 이 안은 너무 춥고....... 조용하고, 차분하니까...... 어서 탈출하자. 이 세상 밖으로........ “얘기 들었어. 윤진이 만났다며?” 퇴근 길 집앞에 서있던 형체는 나를 보자 마자 그 말부터 시작했다. “왜? 얼마나 개판인지 확인하러 왔냐? 시비 걸 꺼라면 꺼져. 나 지금 너까지 눈 앞에서 알짱 대면 폭팔할테니까.” “왜 그래, 선배....... 나 선배 화 돋굴려고 온 거 아냐. 성준형도 걱정 해. 형, 아직도 서윤진이라면 치를 떤다고.” “씨발, 아는 새끼들이 왜 그래? 제발 혼자 내버려 둬. 너희까지 내 머리 돌게 할래? 아님, 너도 그 말하려고 왔니? ‘미안해, 내 실수였어, 걱정했어, 다시 만나고 싶어.’ 이젠 지긋 지긋 해. 제발 미안한 짓들 좀 하지 말란 말야!” 거칠게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명세 자식까지 어느 새 따라 들어왔다. “너 거기서 한 걸음만 더 들어오면 죽을 줄 알아.” “나 가면 혼자 울려고 그러지?” “내가 혼자 울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제발 꺼져라. 윤진이 자식만큼 보기 싫은 게 너야. 꺼져!!” “알았어, 오늘은 얘기할 날이 아니다. 난 갈테니까...... 머리 좀 식혀.” 한숨을 깊이 몰아쉰 녀석이 조용히 현관문을 닫고 사라져간다. 그 커다란 덩치가 6월의 저녁 노을 사이로 사라지고 쇠문이 닫힌다. 이제 혼자 남겨졌다는 안도감과 적막감에, 그리고 다시 밀려오는 외로움에 입술 사이로 한 마디가 비집고 새어나갔다. “망할...... 가란다고 진짜 가냐?” 점점 멀어지는 구둣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거실 바닥에 불도 켜지 않은 채 주저앉았다. “씹새끼, 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내 말 잘 들었다구.........” 베란다 창으로 들어오는 노을 빛에 왠지 더 감상적인 기분이 되어버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래, 잘난 늬들끼리 다 해 먹어라. 난 깡패에다 성질도 더럽고 맨날 애들만 패고 단순한 데다 걸레다, 어쩔래? 우리 엄마, 아빠는 나 10살 때 팔아넘기고, 그 집에서는 온갖 구박 다 받으며 천덕꾸러기로 자랐다. 그 형들한테 안얻어터질려고 운동도 했고, 하다 보니 어딘가 삐딱하게 나가 깡패 짓도 했고 그 더러운 새끼들한테 대준 거 열 받아서 이리 저리 굴러도 봤지만...... 나 정도면 착실하게 인생 살지 않았냐? 그 정도면 다들 죽어버릴까... 도 생각하겠지만 나 자살 같은 거 한 번도 생각 안하고 꿋꿋하게 이 날, 이 때까지 잘 살아 왔다구. 그렇다고 내가 사회에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냐, 사람들한테 혐오감을 준 적이 있냐? 조금 민폐를 끼치기는 했어도 공부도 열심히 했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어. 내 친구들 다 조폭으로 빠질 때도 난 대학가서 꼭 교사가 될 꺼라고 했고 그래서 선생님까지 됐잖아. 이 정도면 나 칭찬 받아야 돼지 않아? 그럼.. 일이 잘 풀려야 될 꺼 아냐. 왜 이렇게 꼬이기만 하냐구........ “흑............”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이가 드니 청승만 느는지..... 최근 들어 참 많이도 우는구나. 씨발, 쪽 팔려. “나 빼놓고 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 봐라!! 나쁜 새끼들아!!!!” 흐느끼며 눈물 콧물을 다 짜내고 울었다. 이 김에 아예 통곡도 해볼까...... 했지만 그건 언젠가 먼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아껴두고 새어나오는 눈물과 오열을 잇사이로 악다물며 조용히 울었다. 커다란 베란다창의 노을을 배경 삼아 내가 소원하던 멜랑꼴리한 광경을 연출해낸 것이다. 그 래, 소원대로.... 진짜 꾸질하구나. 망할..... 내 인생 왜 이 모양이냐? 29년을 살았으면 그 중 좋은 인연도 하나 둘 정도는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친한 친구라는 놈은 나 배신하고 내 애인이랑 붙어먹고 애인이란 것들은 하나 같이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날 차고. 버림받고 차이고 길가에 뒹구는 돌멩이보다 더 처참하게 짖밟히는 내 인생..... 내 성격이니까 이렇게 꿋꿋하게 참고 살았지. 음침한 놈이었으면 이미 동맥을 끊고 뒤졌든지, 아님 저기 어느 감방에 들어가 이 사회를 한탄하며 벽에 머리나 박고 있었겠지. 끼이익-- 혼자 이것 저것 생각을 하는데 조심스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와 난 그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던졌다. “씨발, 나 우는 거 구경하러 왔냐? 꺼져, 주명세.” “............” “나가, 걱정하지 말고. 울면 곧 괜찮아져....... 곧 잊고..... 멀쩡해져.” “........ 혼자 울어요?” 뜻밖의 음성에 놀라 돌아보자 그 앞에는 있지 말아야 할 주장이 뻔뻔하게 고개를 들고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저게 왜 여기 있는 거야? 낮의 난동 부린 것만해도 쪽 팔려 죽겠는데. “그 사람한테 상처받았어요?" “....... 몰라, 임마. 왜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하고 난리야?" 콧물이 나와 가방 안에서 티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패앵- 하니 코를 풀고 또 하나 뽑아 눈물을 닦고 자세를 고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 좋아해요. 난 그런 무책임한 짓은 안해.... 선생님도 알죠?" “내가 뭘 알아? 말도 꺼내지마." 퉁명하니 내쏘는 내 말에도 권형이는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서서히 숙여지는 고개에 닿는 권형이의 체온. 이 놈도 두루 두루 안좋은 조건은 다 갖고 있는데 말이지. “혼자 울지 말아요. 나이 들어 청승이야." 퍼억-- 청승이란 말에 잠깐 일어나 머리를 한 대 때려주고 다시 어깨에 기대었다. “선생님.... 상당히 제 멋대로인 성격이죠?" “응........" “고집도 세고. 지고는 못살죠? 받으면 몇 배로 갚아줘야 하고......." “맞아.... 잘 파악하고 있구나." “오늘 학교에서 소리 고래 고래 지를 때 다 알아봤어요. 열 받으면 눈에 아무 것도 안보이죠?" “응..... 나도 쪽팔린 거 안다. 대머리가 봤으니.... 조만간에 호출당하겠군. 농구부 고문...... 관둬야 될 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하다면서요? 잘 된 거 아니에요?" “관두면 너 못보잖아."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가버렸다. 그 지긋 지긋한 덩치들은 둘 째 치고라도 지혁이랑 태민이 경진이 놈은 내가 가르치는 반이니 계속 보겠지만...... 넌 3학년에 내가 가르치지도 않고 내년이면 졸업이잖아. 내가 좀 변변치 않게 빠져서 그렇지 반할 때는 확실하게 반하니까. 보지도 못한다면 그거 너무한 거 아냐? “그럼 나랑 사겨요. 나도 선생님 좋아한다니까요." “...... 안돼, 임마. 넌 너무 어려......" “...... 내가 나이가 많았으면 사겼을 거에요?" “....... 몰라." “나 싫어요?" “아니." “좋아해요?" “응.......” “나랑 잘래요?” “싫어. 임마.... 그거 한 번으로 됐어.” 그대로 말을 자르자 내 어깨를 끌어안는다. “좋아해요.” “응, 나도 좋아해.”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그런데 사귀는 건 생각 좀 해봐야겠어.” “보기보다 끈질기네요. 그렇게 말하면 넘어올 줄 알았는데.” “내가 바보냐?” “머리 굴리는 거 같지만 단순하잖아요.” 더 이상의 말싸움은 의미가 없겠다 싶어 그대로 녀석의 어깨에 기댄채로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어쩌겠냐? 복잡하면 복잡한 대로 살아야지. 그냥 확 사겨버려? 내가 사귄다고 뭐라 그럴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양심적으로 찔리고 미래가 어두울 뿐이지...... 뭐, 사실이 밝혀진다면 좀 무섭기는 하지만...... 멍하니 눈을 감고 이것 저것 재고 있는데 녀석의 입술이 내 이마에 와닿았다.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다. 까짓 꺼, 내가 언제부터 착하게 살았다구....... Track 12. 한 사람을 위한 마음 Sung by 이오공감 오늘도 여전히 그 녀석의 앞으로 나서지는 못한 채 그 놈과 애물단지 세 녀석이 모여 농구를 하는 공원으로 숨어들었다. 태민이랑 얘기하다 우연히 들은 바가 있어 몰래 나와봤지. 그나 저나 이 나이에 스토커 짓이라니..... 옛날 같으면 패서라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아니지, 패서 될 문제가 아니지. 오히려 좋다는 게 문제지. 하, 그 망할 놈의 새끼를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딱딱 가리는데...... 사실, 이 놈은 그럴 놈이 아니라는 거 알지만. 아니까 더 문제인 거다. 이 녀석하고 사랑한다면 나 진짜 깊이 빠져버릴 것 같단 말야. 게다가 절대 들키면 안될 일도 있고...... 게다가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내 인생 누가 책임질 껀데? 저 녀석이? 물론 책임질려고는 하겠지만..... 인간사라는 게 그렇게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거잖아. 예전에 TV를 보면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기 싫은 곳, 살기 싫은 곳에서는 안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거야. 하기 싫은 일이라도 해야하고 살기 싫은 곳이라도 살아야 하고. 누가 보면 진짜 인생 편히 산 망나니가 하는 소리라고 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저 녀석은 얼마 전에 농구로 유명한 모 대학에 스카웃을 받은 놈이고 자기도 계속 농구를 할 생각이 있고 유학 얘기까지 나왔다구. 진짜 내가 마음을 돌려 사귀게 되다해도 말야. 고등학교와 대학교는 확연히 틀린 거거든. 고등학교 때는 대단해 보이던 것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면 아주 우스워 보이는 거야. 그렇잖아, 고등학교 땐 나도 대학만 들어가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대학에 가니 그것보다 더 무서운 현실이라는 게 있더라 말야. 저 놈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예의바른 바른 생활 소년이라구, 그런 놈이 한 순간의 감정으로 나와 사귀게 된다면, 물론 책임감은 갖고 임하겠지만 앞으로 닥칠 많은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조금은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피해가야 할 꺼야. 게다가 절대적으로 무서운 일이 앞에 버티고 있는 걸 아는데 말이야. 게다가 인간이란 게 워낙에 환경 친화적인 동물이다 보니 남학교에서와는 달리 공학에서의 생활에 따라 서서히 변해가는 거라구. 저 놈은 암만 봐도 스트레이튼데 말야..... 지금이야 이 삭막한 남학교 안에서 - 할미꽃도 꽃이라고 - 내가 꽃으로 보이겠지만 장래 유망한 농구 선수에 집안 빵빵하고 착하고 얼굴까지 괜찮은 저 놈에게 여자들이 시선을 안 둘 리 없잖아? 그럼 저 놈도 변해가겠지. 그리고 그 녀석처럼 말하겠지. ‘아무래도 난 여자가 더 좋아. 아무리 예뻐도 남자랑 결혼할 수는 없잖아. 뭐, 넌 걸레였으니까.... 상대가 나만은 아니었을테니 다른 놈 찾아봐. 그 얼굴이면 꽤 괜찮은 놈 사귈 수 있을 꺼야. 남창 새끼!’ “후우........” 또 생각나 버렸다. 그래, 윤진이 놈에 비하면 명세는 깨끗했지. 뭐, 성준이 자식 이 쪽 길로 빠진 거 내 잘못도 없지만은 않을테니, 고상한 두 놈끼리 잘 살아 보라 그래. 그래도 성준이 놈 나랑 15년 째 알고 지내는 친구고.... 내 사촌 상원이랑, 그 조폭 놈이랑 내가 인정한 몇 안되는 친구 놈들이니까. 버리기는 그렇잖아. 그리고 명세 놈 사람 성질 박박 긁어대도 나한테 잘했잖아. 상원이 녀석 말대로 나한테 말할 수 없었겠지. 성준이한테 내 얘기 다 들었을테니 나 불쌍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래도.... 확실히 끝내준 게 고맙지, 뭐. 질질 끌다 내게 직접 걸렸으면 나 미쳐서 두 놈 다 죽여버렸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그 놈한테 열 받은 이유 중 가장 큰 건 채였다는 것보다는 가장 믿고 신뢰하던 것들한테 배신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으니까. 늦된 첫사랑이었던 윤진이 놈이 불같이 격렬하고 마약 같은 것이었다면 명세는...... 그냥 편했으니까. 바르게 사랑 받고 자란 녀석의 따뜻함과 건실함이 좋았으니까 그 옆에서 그 양지의 기운을 조금 나누어 가져 해서였지. 사랑.... 이라는 것보다는 정이라는 게 더 가까웠을 감정이었어. 그나저나...... 우욱, 다리 아파. 왜 내가 여기서 똥 싸는 폼으로 쭈그려 앉아 저 놈들을 훔쳐봐야 하지? 그냥 앞으로 나가서 ‘우연이네.’하고 인사하고 당당히 볼까? 아니지, 그럼 주장 놈 또 눈에 불을 켜고 달려 들테니까.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튕기는 농구공을 들고 2 on 2 경기를 하는 녀석들을 지켜보았다. 다들 떡발들 하나는 죽이는 구나. 좋겠다. 부딪쳐도 날라가지는 않을테니. 저러니 신경들이 그 모양이지. 혀를 차며 그 모습을 보는데 농구장 부위를 몇 명 불량스러워 보이는 것들이 에워쌌다. “스킨 헤드......?” 노랗고 빨간 머리에 몇 놈은 머리를 밀고 대략 열 대여섯 가량 돼 보이는 녀석들이 갑자기 우르르 그 안으로 몰려들었다. 허어.... 이거 또 싸움인가? 꼴을 보아하니 이 근처 양아치나 짱깨들 같은데, 선생의 입장에서 선도차원의 노력을 쏟아볼까나...... 했지만...... 그랬다간 숨어있었던 거 들통날테니 쪽팔려서 안돼지. 나도 선생으로서의 위엄과 체면이 있지. 아무래도 안되겠단 생각에 여전히 불편한 자세로 그 녀석들을 지켜보는데 서서히 다리가 저려왔다. 무리한 포즈로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아욱, 아파. 제대로 펴기도 힘든 왼쪽 다리를 주저앉아 손으로 주무르는데 진짜 무진장하니 저려왔다. 젠장, 그냥 나가서 아는 체 하고 당당히 볼 껄. “진짜 아파....... 젠장.....” 마비된 다리를 물어주다 보니 어느새 패거리들 중 귀신처럼 산발을 한 빨간 머리 녀석이 앞으로 나가 애들하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허어, 저것들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렇지, 저 떡대들한테 왠 시비? 간이고 쓸개고 다 파먹었나? 츳, 혀를 차며 손으로는 다리를 주무르고 눈으로는 그 쪽의 동태를 살폈다. 스킨 헤드들의 시비에 욱하며 뛰어나가려는 지혁이 놈을 주장이 잡아채며 말을 한다. 주장아..... 괜히 나서지 말아라. 너 다치면 어쩔래? 스킨 헤드들의 거친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다리의 마비가 풀리지 않았다. 갑자기 뭐라고 크게 떠드는 것들. 한 판 붙을 기세여서 다리에서 신경을 돌리고 그 쪽을 바라보자 뒤에 있던 노랑 머리가 뒤에 숨기고 있던 각목을 휘둘렀다. 그 기세에 뒤로 살짝 비켜나 겨우 피한 지혁이 놈이 발로 차서 그 놈을 쓰러뜨리자 그 후로는 완전 난장판. “저것들이....... 어우......” 사람들도 많이 지나다니는 일요일의 공원에서!! 나 또 경찰에 불려가게 할 꺼냐? 저 왠수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지. 그래, 저것들이 이런 공원에서 농구할 때부터 알아봤댔어. 4대 15라....... 일당 4명씩 친다면 그리 어려운 싸움은 아니겠지만 저것들이 생긴 것만큼 싸움을 못한다면 사단이지. 일당 두 명도 버거운데 넷이면....... 나가서 도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아직도 다리가 저릿 저릿 하다. 이 다리로 나가봐야 잘 뛰지도 못할텐데. 일단 다리부터 나아야지. “권형이..... 는......” 색색깔로 섞인 녀석들 머리 사이에서 그 놈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권형이를 찾기는 쉬운 일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바라보자 그 빨간 머리를 발로 걷어차고 아까 각목을 들고 있던 노랑 머리의 멱살을 쥐어 내팽게쳤다. “오우, 잘하는데!!” 작게 박수를 치며 권형이만을 집중적으로 바라봤다. 다른 놈들이야 얻어 터지든 말든 건강한 놈들이니 괜찮지만 권형이는.... 다치면 안된단 말야. 다시 일어난 빨간 머리의 스트레이트 훅을 잘 피하며 다시 주먹을 날리는 권형이.... 저런, 힘은 세지만 역시 싸울 줄은 잘 모르는군. 주먹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구!! 뼈가 튀어나오게 쥐어야지 제대로 먹히지, 그리고 그렇게 애들을 들어서 내던지는 건 체력 소모만 할 뿐이야. 들어서 던지는 것보다는 목이나 뒷통수를 쥐고 땅으로 내다 박는 게 더 효율적이지. 데미지도 강하고. 흐응, 나중에 한 번 강의를 해줘야 겠는 걸. “앗싸!!” 간만의 싸움 구경에 신나 손가락으로 딱 소리까지 내가며 응원을 하는데 한 녀석이 권형이의 목을 팔로 안아 뒤에서 잡아끌었다. “팔꿈치, 팔꿈치!!!” 팔꿈치로 치라고 아무리 응원을 해도 권형이 놈, 역시 싸움을 못해봐서인지 목을 감고 있는 녀석의 팔만 붙잡고 떼어내려고만 한다. 아이구 둔한 놈!!! 팔꿈치로 찍던지 발을 밟으라니까!! 그것도 안되면 손을 뒤로 뻗어서 그 놈 거시기를 잡아 비틀라구!!!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며 바라보는데 아직도 다리가 풀리지를 않았다. 어떻게 하니...... 아욱, 이 다리만 아니었어도..... 분함과 녀석이 당하고 있을 고통에 내 얼굴이 일그러지는데 앞에 쓰러져있던 빨간 머리가 일어나 비실대며 웃더니 권형이의 복부에 주먹을 날렸다. “윽....... 졸 아프겠다.” 권형이 놈보다 왠지 내가 더 아파져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 빨간 머리가 결정타를 날리고 말았다. “다리 하나 부러뜨려!!!” 라고 내 귀에 들어올 정도로 소리친 것. 허, 저것들이 누구 다리를 부러뜨려? 감히 저것들이 우리 주장 다리를 부러뜨린다구!!!! “죽었어!!!!!” 채 다 풀리지 않은 다리로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나의 모습! 사랑의 힘은 실로 위대했다. “아니, 다 큰 어른이 이런 애들하고 싸우면 어떻게 해요?‘ 지나가던 행인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차에 의해 잡혀온 나랑 권형이, 지혁이, 태민이, 그리고 경진이..... 그리고 다 도망가고 남은 스킨헤도 네 명. 망할........ “저 녀석들이 먼저 시비 건 거에요.” 태민이 자식이 열 받았는지 소리를 빽 지르길래 머리를 한 대 갈기고 핸드폰을 들었다. “왜 때려요?” “닥쳐, 씹새야, 누가 그러게 싸우래?” “씨, 패는 건 선생님이 다 팼잖아요!!!” “너도 맞을래?” 조용히 노려보며 말하자 입을 닫는 태민이를 보고 핸드폰 메모리 4번을 눌렀다. <뭐냐? 장인하!> “경찰서다. 나 찾으러 와라.” <뭐야?> 소리를 지르는 녀석의 반응에 귀를 막아 버렸다. <...... 아,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해. 또 경찰서야?> “소리지르지 마, 개새끼야. 누군 오고 싶어서 왔냐? 애새끼들이 시비를 걸잖아. 아우, 내가 지금 고삐리들 하고 싸울 판이야?” <그래, 니 나이가 몇인데 애들하고 싸워서 경찰서에 끌려가냐? 이건 진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흥, 남이사! 빨리 와서 빼주기나 해. 너 이 쪽 관할이잖아.” <진짜, 왠수!! 왠수도 이런 왠수가 없어. 내가 이런 놈 밑에서 있었단 말야?> 이게, 간만에 전화해서 도움을 청하니 참 예쁘게도 받는다. 씹새끼, 내 밑에 있던 놈이 많이 컸지. 지금은 니가 조폭이고 내가 선생이라 이거지? “닥치고 빨리 오기나 해, 나도 열 받아.” <씨발, 알았어. 나잇 값 좀 해라!> “너나 잘해, 애새끼들 끼고 노는 주제에!” <한 번이다........ 지금 갈테니 시간이나 끌고 있어.> “좇 빠지게 튀어 와.” 전화를 끊고 다시 앞을 보자 경찰인지 순경인지가 대화를 듣고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왜 쳐다보냐? 왜 이 얼굴에서 욕 나오니 니가 봐도 신기하냐? 기분이 상해 시선을 돌려 스킨 헤드 놈들을 보자 다들 이 쪽을 보다 찔끔해서 시선을 치운다. 어욱, 저 좇만한 것들 때문에!!!!!! “너흰 죽었어. 어딜 꼬라 봐!” “선생님..... 말투가 그게 뭐에요? 그리고 왜 거기 있던 거에요?” 라고 묻는 건 주장. 이게 기껏 도와줬더니만...... 너 훔쳐 보러 거기 갔었다고 어떻게 말하니? 쪽 팔리게..... “산책.... 하고 있었어.” “선생님네 여기서 멀잖아요. 차 끌고 산책하러 다녀요?” “내 취미다.” 대답하기 곤란한 건 묻지마, 짜샤! “이 새끼는 왜 이렇게 안와?” 괜히 애꿎은 핸드폰을 열어 만지작거리며 기다리는데 앞에서 경찰은 한숨을 내쉬고 이것 저것 묻는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바로 장인하다!! 묻는다고 말하겠냐? 씹지....... 흥! 경찰이 열이 이빠이로 올라 나를 노려보던 중 녀석이 나타났다. 오랜만이군, 세하놈. “또 뵙는군요.” 단정한 어조로 나오는 말에 슬쩍 돌아보자 알마니의 양복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녀석이 서 있었다. 조폭이, 주제에 옷은 좋은 걸 입는다니까. 아마 우리 나라 알마니와 베르사체 수트의 대부분은 조폭 새끼들이 사입는 걸 꺼다. 새끼들이 주제에 명품은 밝혀서....... “어, 여긴 왠 일로.......” “제 친구거든요.” 당황하면서 답하는 경찰에게 세하 녀석이 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왠지 열통이 터져 사납게 말을 걸었다. “씹새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길이 막혔다니까......... 얘기는 대강 들었습니다. 그냥 작은 싸움이니 봐주시죠.” 빙긋 웃으며 말하는 세하 놈. 저거 많이 컸군. 나한테는 찍 소리도 못하던 게..... 뭐, 옛날 일이니까. “하지만...... 애들하고 성인이.......” “성인이라도 이 놈이 어디 애들을 팰 것 같습니까? 맞으면 맞았지. 이 자식은 주먹 한 방이면 날아간다구요. 생긴 걸 보세요.” 라는 세하 놈의 말에 그 경찰이 나를 쭈욱 훑어 보더니 갑자기 얼굴이 붉으스름해 진다. 세하, 저 여우같은 새끼. 어디서 잔머리만 늘어서는....... “그거야...... 으음......” “상부쪽엔 제가 연락하죠.” 라며 말을 자르고 지갑을 꺼내는 녀석의 손길에 끝났군, 이라는 생각을 하고 일어섰다. 그리고, “일어나, 이 왠수들아!” “제발 그만 좀 해라. 애들하고 싸워서 그게 뭐냐?” 경찰서 문을 나오자 마자 나를 갈궈대는 세하 놈의 말에 녀석의 무릎을 발로 차주었다. 이게 예전 짱한테 하는 태도하고는! “아파! 왜 까고 지랄이야? 기껏 꺼내줬더니.” “난 체는...... 오라면 눈썹 뽑히게 달려와야지. 왜 이렇게 늦게 와?” “길이 막혔다니까!! 하여간 성질 머리 하나는 죽인다니까.” 담배에 불을 붙이며 족 팔렸는데 내 뒤 쪽의 녀석들을 돌아본다. 그리고 긴 한숨. “학생들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어린놈들하고.” “닥쳐! 내 맘이다. 일하는 중이라며? 빨리 가봐, 이 원수는 이자까지 쳐서 갚으마.” “별로 받고 싶지도 않다. 니 보답이라면 후환이 두려워.” 흥, 자식이 쪼잔하게 옛날 일들에 연연하냐? 예전에 좀 놀려준 걸 갖고 앙심을 품다니. 슬쩍 노려보며 뭐라고 공격할 태세를 취하는데 녀석의 뺀질 빼질한 BMW 차량 앞에 선 녀석이 하나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나를 보고 90도 각도로 굽혀 인사하는 녀석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유쾌하게 인사를 건냈다. “어, 성우네. 너 아직도 거기 있니?” “네.........” “흐응, 오래 가네. 너무 괴롭히지 말라구. 성우 얼굴이 저게 뭐야? 잘 먹여가면서 하든가.” 일부러 이죽거리며 세하 녀석의 담배를 빼앗아 피우자 기분 나쁜 듯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 녀석, 아직도 순진하다니까. “잘 먹이마. 그러는 니 애인은 잘 먹여가며 키우냐? 명..... 아 미안.....” “잘 키워 엉뚱한 곳에 헌납했다. 아아, 복도 지지리 없지.” 미안한지 서둘러 말을 끊는 녀석을 보며 겨우 웃으며 짧게 답해주었다. 지금은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고 무엇보다 지금 옆에는 주장이 있으니까. “가라!” “가지 말래도 간다. 너나 잘 먹고 다녀, 임마. 나이 서른이 되도록 몸이 그 꼴이냐? 부러진다, 부러져. 너 안을 때 뼈끼리 부디낀다고 뭐라 안하디?” 칫, 답지 않게 걱정하는 척은. “난 살집 있는 놈만 사귀니 걱정 마라. 너나 저 자식 잘 챙겨. 나야 원래 마른 체질이지만 저 놈은 왜 저렇게 말랐니? 잘 좀 챙겨라. 니 꺼라며?” “그래, 내 거다.” 내 말 한 마디에 발끈해서 나오는 세하 녀석의 여전한 반응에 즐거워져 피식 웃으며 녀석의 뒤로 돌아 어깨를 잡고 무릎으로 엉덩이를 차댔다. “일 하러 가기 전에 어디 가서 밥이나 사 먹여라.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팍팍 쓰는 놈이 지 애인한테는 그렇게 짜게 구냐? 친구한테 목숨 건 남자치고 멋진 놈들 없어. 있을 때 잘해, 새끼야.” “임마, 놔!!” “빨리 가, 나중에 성우랑 한 잔 하자. 근사하게 쏘마!” “선생은 박봉이라며? 상원이 월급 뜯지 말고 싼데서 사.” “나 돈은 많아, 자식아! 그리고 상원이 자식은 요즘 말도 못붙인다. 가라!” “뭐야? 그렇게 바빠? 언제 한 번 모일려고 했더니.”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듯 한 표정의 세하를 보자 역시 친구란 좋은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 늬들 있어서 내가 산다. 아무리 엉망으로 얽혀도 늬들 나 걱정해 주지. 그래서 친구가 좋은 건가 봐. “고등학교 깡패들이 뭐가 자랑이라고 모이냐? 그 자식 애인 무서워서 전화도 함부로 못한다. 새끼가 걸려도 그런 순악질한테 걸리냐? 나야 얼굴 안보면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얼마 전 그 서슬 시퍼런 놈이 떠올랐다. 복도 지지리 없지. 나 같은 사촌 둬 고생하다 겨우 만난 게 그런 놈이라니...... “하여간... 뭐, 나중에 시간 봐서 마시자. 빨리 가라. 나도 가보게.” “응, 잘 있어.” 마지막 인사를 하고 녀석이 차 앞으로 가자 성우 놈이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잠시 둘이서 뭔가 쑥덕거리더니 세하 놈이 운전석에 타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이 왠지 굉장히 행복해 보여 Fuck you!를 날리자 손가락으로 튕겨보낸다. 자식, 진짜 많이 컸군. “새끼, 척은!” 아마 우리 네 명 중에 가장 순탄한 연애를 하고 있는 게 저 놈이겠지. 하여간 부러우면서도 걱정은 된다. 저 놈..... 의외로 고지식해서 말야. “선생님, 친구에요?” 바로 뒤로 다가와 묻는 태민이 덕에 화들짝 앞으로 뛰어나갔다. “임마, 갑자기 기습하지마!!! 친구다!” “조폭?” “응, 이 쪽 조직 대가리야. 그리고 늬들 다니는 그 클럽 오너고.” “......... 조직....... 진짜 조폭 친구 있었어요?” “그럼 내가 구라 까겠냐? 애들 상대로? 그나 저나, 어떻게 된 거야? 저 스킨 헤드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시비를 걸 리는 없잖아.” 팔짱을 끼고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모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또..... 군. 뭐냐? 이번엔. “솔직히 불어, 경진아..... 어깨 빠지고 싶지 않으면!” “..........” 은근히 나머지 세 놈의 눈치를 보던 경진이 놈이 나를 보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또 이 세 놈과 연관 있는 일이냐? 아니, 두 놈이겠지. 주장이 어디서 일 낼 리가 없으니까. “이지혁, 솔직히 불어. 뭐야?” 역시나..... 키포인트는 저 놈이었어. 내 물음에 표정이 하얗게 굳어버린 놈을 보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건 대체 어딜 가나 말썽을 부리니 가만 둘 수가 있어야지!! 대체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가 뭔데? “이지혁, 강태민!! 뱉어라..... 죽기 싫음.” “...............” 내가 물어도 침묵만을 지키는 녀석들의 반응에 두 녀석의 왼 쪽과 오른 쪽 귀를 양손으로 잡고 각각 무릎을 발로 까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성(性)고문이라도 했겠지만 어린 놈들이고...... 이젠 나도 나이가 있으니 봐준다. “으악, 아팟!!!” “빨리 말해, 아님 내가 최후의 수단을 쓸지도 모른다.” “악, 말할게요. 말할게요!!! 별 거 아니에요! 그냥 저번에 지혁이가 연습하다 깝쭉대는 새끼 하나 조졌는데 그 놈이 저 팀이래요.” 아팠는지 금새 말하는 태민이 귀를 놓고 지혁이 놈의 머리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하여간 어디 가나 말썽이야, 말썽!! “이 놈아, 싸울 꺼면 근성 있게 덤벼! 죽이든 살리든 맘대로 하라고 덤비라구!! 그것도 안되면 성질 버려!” “저 놈들이 먼저 시비 건 거에요.” 소리를 빽 지르는 지혁이에게 머리를 한 대 더 친 후 놔주자 여전히 치켜 올라간 눈매로 나를 노려본다. 저게, 진짜 정신 못차리네. “그나 저나 선생님은 왜 거기 있던 거에요? 우연히 봤으면 먼저 와서 도와주던가, 싸움을 말리죠.” 라는 건 의외로 날카로운 폭식 돼지 정경진이다. 저거 돼지가 왜 저렇게 감이 좋은 거야? “우연히.... 그렇게 된 거야. 누군 오고 싶어서 왔냐?” “일요일에 그런 차림으로 차까지 끌고 산책을 와요?” 라는 건 바로 옆에 서서 삐딱하니 서있는 주장. 어쩌니.... 그냥 보고싶은 걸. 보고 싶어서 왔는데 사실대로 숨어서 지켜봤다면 쪽 팔리잖아. 이래뵈도 나이 스물 아홉에 니네 선생이다, 이 놈들아.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토를 달긴! 하여간 일 정리됐으니 나 간다. 잘 가라!!” 더 이야기가 나올까 무서워 손을 흔들고 서둘러 공원 쪽으로 발을 돌렸다. 차까지 두고 왔으니 천상 거기로 가야겠지. 하여간 한 시라도 빨리 주장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급하게 걸어가는데 지들기리 쑤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씨발, 좀 잡아라. 살갑게 밥 좀 사달라던가 집에 태워다 달라던가 못하냐? 사달라면 밥도 사주고 집까지 태워다도 준다니까. 마음으로 아무리 외쳐도 녀석들은 꿈쩍을 하지 않았고 마음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터벅 터벅 걸어가는데 뭔가 다다다 달려오더니 내 팔을 휘어잡았다. “선생님, 밥 사주세요!! 저번에 밥 사준다고 한 거 아직 유효하죠?” 라고 싱긋 웃는 것은 폭식 돼지, 정경진이었다. “그래, 사주마... 어차피 할 일도 없다.” 결국 내가 끌고 간 놈은 경진이 뿐이었다. 식당에 들어서자 마자 여기 저기 음식을 잔뜩 시키는 녀석을 보고는 한 번 웃고 날라온 음식을 먹었다. 이 놈은 이 나이까지 아직도 짜장면을 좋아한다. 그리고 탕수육에 팔보채.... 아이 같은 그 식성이 인상을 쓰고 쳐다보자 게걸스럽게 먹어대던 놈이 나를 보더니 싱긋 웃는다. “먹어라.” “네..... 저기요, 선생님.” “왜?” “저기요, 권형이 형 좋아하세요?” 녀석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물을 마시던 나는 그대로 물을 뿜어내 버렸다. “무슨 소리야?” “그냥..... 그런 것 같아서요. 아니에요?” 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본다. 저거 돼지 새끼 주제에 말야..... 돼지면 돼지 답게 먹기나 해라. “............ 좋아해. 됐냐?” “흐응, 그렇구나.” 라며 녀석은 애써 답한 내가 민망하게 다시 음식으로 신경을 돌린다. “야!!” “왜요?” “그게 끝이냐?” “네.” “뒤에 더 할 말은 없냐?” “아뇨, 그냥 그런 눈치길래 한 번 물어본 거고 그 외에는 관심 없어요. 다른 거는 궁금해지면 물어볼게요.” 라면서 시선을 돌리길래 왠지 벨이 꼴려 나도 입을 열었다. “너도 하나 물었으니 나도 물어볼게. 너 니네 형하고 무슨 사이냐?” “..........!” 순식간에 짜장면 곱빼기를 먹고 있던 놈의 입에서 반쯤 들어갔던 면발이 흘러나왔다. 으엑, 더러워....... “어떻게 알았어요?” “감이지.” 라고 피식 웃고는 그 녀석이 손 안댄 탕수육을 집어먹었다. “......... 섹스하는 관계에요.” “그래? 먹어라.” 뚝 잘라 말하고 마음 속에 브이자를 그리며 다시 탕수육으로 젓가락을 옮기자 녀석이 시무룩해지더니 젓가락을 놓는다. “왜? 안 먹냐?” “...... 나 이상하죠?” “응.” 니 폭식증은 사춘기 때의 음식 밝히는 거라고 해도 이상현상임이 분명하다. “나요..... 진짜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데 형이.....” 라며 밥 먹다 말고 얘가 왜 운대? 어머, 얘, 왜 이래? “야..... 왜 우냐? 내가 꼭 너 울린 거 같잖아!!” “흐윽.......” 애기 같은 얼굴로 눈물을 뚝 뚝 흘리던 녀석이 소매를 들어 눈가를 닦고 냅킨을 들어 코를 푼다. “저요..... 형하고 그러는 거 이상한 거 알아요......” 그러면서도 결국 젓가락은 다시 들어 짜장면을 먹는다. 엽기적인 놈..... “이상한 거 아냐...... “..... 위로할 필요 없어요......” “그런 거 아냐. 나도 우리 형이랑..... 잤었어. 얼마 전에 자살한 개새끼랑.” 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먹던 짜장면이 또 흘러내린다. 그거....... 그냥 버려라. “별 거 아냐, 그 딴 거 섹스잖아. 당하면 재수 없었으려니 하고, 좋았으면 계속하면 돼. 특별히 누군가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별 거 아니잖아. 니가 잘못한 것만 아니라면.... 말야. 죄책감 같은 거 시작한 놈들이 느껴야지 당한 사람이 느끼는 거 아냐.” 옆에 따라놓은 물을 한 잔 마시고 녀석을 보자 녀석은 다시 젓가락을 들고 이리 저리 애꿎은 음식들만 쑤셔댄다. 나한테 비밀 하나 케내려다 피박 쓴 꼴이군. “밥 먹어라.” “네...........” 다시 음식을 주저 먹기 시작하는 녀석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 학교 농구부 굉장히 문제 있는 거 아냐? Track 13. 마지막 편지..... 그것조차도 거짓 Sung by 노바소닉 모처럼 별 일 없는 학교에서 우아하게 차나 마실까 하고 상담실로 가려는데 엄청난 소리를 들어버렸다. “차선생님 안됐어요. 어서 가보셔야죠.” 상담실 키를 빙빙 돌리는데 들려온 말에 뒤를 돌아 그 쪽으로 다가가 성준이의 어깨를 두들겼다. “무슨 일이야?” “응...... 어머니... 돌아가셔서......” “니네 어머니?” “응.”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보자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상할 정도로 신경질적이고 금욕적인 이 녀석의 어머니는 이 녀석을 무서울 정도로 닥달해대던 여자였다. 기억하기로는.... 고등학교 때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도저히 두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이 녀석 집으로 잘 가지 않게 될 정도였으니까. “집에 가봐야지.” “그래야지.” 3년 전부터 따로 나와 살던 녀석이라 모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거였다. “7반 조례랑 종례는 내가 할게. 어서 가봐라. 수업 걱정은 말고.” “응, 고마워.” 한숨을 쉬며 멍한 녀석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손을 잡아 주었다. “가라. 병원 어디냐? 퇴근하고 들를게.” “그래, 갈게.” 멍하니 있던 녀석이 가방을 주섬 주섬 챙기더니 교무실을 나갔다. 데려다 주고는 싶었지만 곧 수업이 있어서 포기하고, 지금 수업에 들어가 있는 명세의 핸드폰에 메시지를 남기고 상담실로 향해갔다.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 거고 모르는 사람이 죽었다고 그렇게 센치해질 의리 같은 거는 없으니까. “씨, 왜 죽고 난리야?”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종례를 마치고 퇴근하자마자 날라 간 명세 놈을 보고는, 나도 집으로 돌아가 검은 양복을 찾아 갈아입었다. 양복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문상을 가는데 아무렇게나 입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불편을 감수하기로 했다. 상원이 놈은 지금 해외 출장 중이고 세하 녀석은 어딜 쳐박혔는지 도저히 연락이 되질 않는다. 성우 녀석에게까지 연락을 해도 묵묵부답이다. 한숨을 내쉬고 내려가 차를 몰고 녀석이 말한 병원에 도착해 보니 온갖 아줌마 아저씨들과 교복을 입은 놈들이 웅성거렸다. 개 중에는 잘 아는 얼굴들도 보였다. 성준이 녀석의 반인 권형이와 이지혁과 강태민이었다. “선생님!!” 아는 체 하며 다가오는 태민이에게 슬쩍 물었다. “너흰 여기 왠 일이야?” “저희 작년 담임 선생님이셨어요. 부모님들도 오셨어요.” 녀석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검은 투피스 차림의 여자들이 모여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꽤나 사는 듯 한 집안의 여자들은 슬픈 얼굴을 억지로 만들며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익숙한 얼굴도 있었다. 검은 색의 라인이 들어간 우아한 투피스에 검은 망사가 달린 모자를 쓰고 멀리서 봐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중년의 여성. 망할, 이런 자리에서 마주치다니...... 죽을 때까지 다시 보고싶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나 절하고 올게.” 녀석들을 무시하고 사진 앞으로 걸어가 절을 하고 성준이와 인사를 한 후 어깨를 두들겼다. “괜찮아?” “응.” “다행이다.” 다행히 녀석은 괜찮아 보였다. 외동 아들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몰아붙이던 극성스러운 어머니에 대해 그다지 애도의 감정을 느끼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의 어머니인지라 최대한 예의를 표한 것이다. “수고해라.”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데 저기 아줌마 군단들이 우르르 몰려와 성준이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각자의 새끼들도 끌고. “안되셨어요. 어머님 아직 젊으신데......”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옆에 서서 얌전한 세 녀석을 한 번 돌아보고 안됐다는 이야기를 하며 쑤군덕거리는 아줌마들 옆으로 빠질까 하는데 상당히 신경에 거슬리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제 첫 째 아들도 다 자랐다면 선생님 나이 또래일텐데...... 권형이한테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아닙니다. 제가 무슨......”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도 선생님이 죽은 제 아들 같아서.......” 40대 초반으로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을 한 그녀는 가증스러운 눈물을 보이며 성준이의 손을 꼬옥 잡고 있었다. 때 마침 바깥에는 빗방울 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과거의 기억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떠들어 버렸다. “...... 얼굴에 철판을 깔아도 유분수지........” “....... 네?” 낮게 나간 내 목소리에 순간 놀란 듯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물론 성준이와 애들도 함께. 그들의 갑작스런 반응과 눈에 물기를 머금은 착한 어머니의 얼굴에 벨이 꼴려 생각지도 않은 말들이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 웃기잖아? 그 새끼가 죽었다고? 내가 기억하기로는 니가 니 입으로 말했잖아. 이 애 데려가라고, 가서 팔아먹든 어떻든 맘대로 하라구.” “... 뭐...........” 기억하기론 이제 50을 훌쩍 넘었을 그녀는 내가 피를 타고난 여자 답게 여전히 아름답고 젊어 보였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얼굴에는 그다지 동정이 일지 않았다. 헤어진 어머니로서의 감회나 애정, 혹은 어떤 감동 같은 것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잖아. 니 아들 아니라며? 넌 나 같은 애 모른다며? 나도 모르게 내가 죽은 거냐? 난 아직 이렇게 눈 멀쩡히 뜨고 살아있는 걸.....” 차가운 조소와 함께 나간 나의 말에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더듬 더듬 말을 이었다. “...... 너....... 세영이...........” “그런가? 내 이름이 세영이었나?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군. 아예 잊고 있었는데 말야.” 눈을 크게 뜨고 숨이 넘어갈 듯 손을 떨던 그녀를 보고 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날려주었다. “미친년...... 지 새끼 팔아먹은 년치고는 지나치게 잘 사네. 재수 없어.”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이죽거리고는 그대로 몸을 틀어 그곳을 나왔다. 뒤에서 쓰러지는 그 년의 오버액션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나를 따라 달려오는 성준이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가족 기억 안난다며?” “몰라. 그냥 기억나 버렸어. 생각하게 하지마. 어서 들어가라......” 성준이의 팔을 뿌리치고 그대로 비를 맞고 차를 타고 막무가내로 달려갔다. 비까지 내리니 금상첨화군.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 어떻게 되나........ 한참 후에 차를 멈춘 곳은 자주 가는 술집 앞이었다. 혹시나 해서 왔던 것인데 주차장에 보니 세하의 차가 있었다. 나쁜 자식, 그래서 연락이 안됐구나. 차에서 내려 담배를 들고는 가게 앞에 쭈그려 앉아 내리는 비를 모두 맞으며 담배를 빼물었다 비 때문에 불이 잘 붙지는 않았지만 피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알고는 있었다. 우연히 3학년 7반의 등본 꾸러미를 봤을 때 그 여자의 이름을 보고 말았다. 정확히 19년 전에 태어났던 그 놈이 권형이었다니..... 그 후로 미국의 친정으로 돌아가 있다 한국으로 돌아와 교수 생활을 하다 1년 전 재혼이라....... 미친 년, 지 새끼 버리고 참 잘살았다. 원래는....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너무나 고운 그 얼굴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그 더러운 매춘 소굴에서 구르는 동안 나 팔아먹은 돈으로 여유 있게 공부를 하고 애를 키우다 지금은 외교관의 부인까지 되 있다는 더러운 년. “미친 년..... 씨발...... 잘 사는 꼴 보니 속 뒤집히네. 어디 가서 빌어먹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권형이 상처 받았겠지? 그래, 나 같은 놈이 니 형이다. 피는 반 밖에 섞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같은 배 속에서 태어난 놈이라구. 왜 내가 그 동안 안된다고 했는 줄 알겠지? 형제라던가...... 그런 이유가 아니야. 난 그 여자의 아들인 너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야. 나 악으로 똘똘 뭉친 놈이거든. 죽을 때까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저주를 퍼부은 여자의 아들 따위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내가 막간다고 해도 그건 너무하지 않냐? 나 버린 여자가 눈에 불을 켜고 치마 바람 휘두르며 끔찍히 위하는 아들 녀석을 말야....... 다 타들어간 담배를 버리고 다른 담배를 빼물었다. 아무 생각 없이 길가에 앉아있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씩 나를 쳐다보고 간다. 쳐다 보든지 말든지...... 내가 쭈그리고 앉아 청승 떠는데 보태준 거 있냐? 씨발, 엿 같은 하루다. 한참이 지나고 빗줄기가 점점 약해질 때 즈음이었다. 눈을 풀고 줄담배를 피고 있는데 가게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나왔다. “어이.” 익숙한 그 얼굴에 손을 들어 말을 걸자 세하가 나를 알아보고 놀란 듯 말한다. “..... 장인하, 너 왜 그러고 있어?” 물에 빠진 생쥐같은 내 꼴에 놀라는 세하를 보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나서인지 다리와 허리가 뿌드득거렸다. “그냥...... 성준이 어머니 돌아가셨다. 거기 갔다오는 길인데 우리 엄마 만났어. 나 버린 미친 년.......” 내 말에 세하는 한 순간 숨을 멈추었다 겨우 말을 이었다. “기억..... 안난다며?” “기억 나. 모두 기억나는데...... 열 받아서 말 안한 거야. 나만 기억하는 거 너무 비참하잖아.” “.......... 너.....” 뭔가 더 말하려던 녀석은 하려던 말을 끊고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 봤구나.” “응, 가서 욕해 주고 왔는데 기분 더러워.” “그래......” 녀석은 언제나와 같이 그 이상은 묻지 않고 따뜻하게만 해주었다. 그래서... 내가 이 놈을 택한 거였다. 어려움 없이 밝은 세상에서 자란 제대로 된 아이. 반 쯤 미쳐 제 정신이 아니던 나에게 밝은 세상을 알려주던 착안 아이.... 내가 망쳐 버렸지만..... 그래도 이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녀석은 나의 이상이었으니까. “오늘은 우리 집에 가자.” “응.......” 그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자 오늘 스케줄을 취소하라는 말과 함께 세하가 나를 차 안으로 먼저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고 난 잠에 빠져들었다. “괜찮아?” 눈을 뜨자 녀석의 침대 안이었다. 그대로 잠에 빠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눈을 떠보니 녀석의 잠옷을 입고 있었다. 은은한 불빛에 스탠드와 포근한 침대, 바깥에는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응...... 나 잔 거야?” 집에서 입는 편한 셔츠에 바지 차림으로 나를 내려다 보는 세하는 이마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죽은 것처럼 자더라.” “그래.......”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갔다. 그렇게 곯아떨어진 적은 거의 없는데. “나..... 학교 관둘까?” “왜?” “그냥..... 쉬면서 여행이나 다닐까 해서.” “...... 힘들어?” “....... 조금...... 그 미친 년.... 보니까 사는 게 정이 떨어지네. 그냥 쉬고 싶어.” “맘대로 해. 우리가 니가 한다는데 반대한 적 있냐? 선생되는 것도 찬성했는데 관둔다는 거야 절대 환영이지.” 웃으며 앞머리를 쓰다듬는 세하를 한 대 치고는 녀석의 목을 잡아 끌어 안았다. “놔, 나 임자 있는 몸이라니까. 이 애정결핍증 환자야.” 내 품에 안기기엔 지나치게 커버린 친구를 안고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나..... 좋아하지?” “응, 좋아해. 사랑도 해. 불쌍한 놈아.” “응..... 계속 사랑해 줘. 니네는 나 버리지 마라. 배신하지도 말고 상냥하게만 대해 줘. 우리 엄마처럼 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버리지 마... 그럼 나 그거 죽을 때까지 못잊을 꺼야.” “............” 내 말에 녀석이 몸에 힘을 풀고 그대로 안겨들었다. 잠시 동안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내 가슴에 있는 녀석의 작은 숨소리와 내 심장, 그리고 베란다 창에 부딪치는 빗소리만이 울려퍼졌다. “얘기해 봐..... 사실대로..... 너 그 때 말한 거 다가 아니지? 우리가 모르는 얘기를 해봐.” 너무 정직하게 나온 세하의 말에 멍하니 허공을 향하던 시선이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그 녀석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에게 진실을 원하고 있다.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없이 강하고 정직한 시선이었다. 뭐, 그 시선에 끌려 녀석을 끌어들인 거기는 하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사실이야. 그런데..... 사실은 말야, 그 여자를 한 번은 봤었어. 그 조직에 잡혀있을 때 그 녀석들에게 끌려왔었는데 울며 불며 애원하더라. ‘이 애는 이제부터 내 애가 아니에요. 어디로 팔아넘기든 어쩌든 살려만 주세요. 아기와 저는 살아야 돼요.’ 라고 무릎까지 꿇고 눈물 콧물 다 짜면서 빌어서...... 그 대가리도 황당했는지 웃더라. 살다 살다 그런 독한 년 처음 본다구. 그래서 나 판 돈에서 원금에서 이자 빼고 그 년 주더니 그 돈 갖고 어디 살아보라고 하대. 그리고 연락 땡!!” 피식 피식 웃어가며 나간 내 말에 빤히 마주보던 시선을 거둬 녀석이 먼저 시선을 피한다. 그 녀석의 눈에 눈물이 얽혔다는 건 금새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지금 울려고 하는 거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안울겠지. 내가 이 녀석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 듯이 이 녀석도 마찬가지이다. “.......... 쉬어라. 나 소파에서 잘게.”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녀석이 겨우 겨우 말을 내뱉고 방을 나갔다. 상체를 일으켜 앉으며 그 모습을 보다 무릎을 모아 끌어안고 녀석이 울 타이밍을 기다렸다. 병신새끼들, 울지 말라니까...... 침대에 앉아 기다리는데 잠시 후 욕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청승 맞게 화장실에서 우냐? 울어도 좀 뽀대나게 울어야지. 그 소리에 이끌리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욕실 쪽으로 다가가 문을 두들겼다. “아, 나 있어.” 안에서 들려온 세하의 음성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바보야, 그렇게 티내면 어떻게 하니? “알아..... 울지 마. 바보야. 나보다 더 힘들게 사는 놈들도 있어. 나 그 때 이후로는 괜찮잖아. 그 일로... 많이 힘들어지기도 하고 성격도 좀 이상해졌지만 나 괜찮아. 살만 하잖아...... 왜 친구들이 자꾸 우는 건데......” 대답 없이 흐르는 안의 물소리에 문을 등지고 바닥에 주저 앉아 시선을 들어 거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자주 보았던 환영이 다시 시작되었다. 공간이 균열을 일으키며 서서히 무너져 가고 차원은 일그러진다. 그 불안정한 형태의 공간 안에 나타나는 환영들, 환영의 속삭임과 나를 향한 비웃음에 잠을 못자던 시기도 있었다. 눈만 감으면 보이는 추악한 잔상들은 내 귓가를 물어뜯으며 비웃어댄다. 무너진 모서리들에서 튀어나온 원귀들은 내 주변을 싸고 돌며 비명을 질러댄다. 그들은 내게 죽기를, 삶을 포기하기를 강요하지만 그러기엔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해서 이를 악다물고 오기로 생을 연명해갔다. 어느 순간이든 나타나는 그 망령들은 나를 서서히 분열증으로 몰고 가기도 했지만... 그 정도에 질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잊은지 4년인데..... 왜 이제 와서 다시 시작되는 거야? “세하야........” “........ 말해.” 온 몸에 식은 땀이 흐르며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입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듯 목구멍에 걸린 듯 세게 두들겨대는 고동이 숨을 막아간다. “나....... 괜찮아. 그러니까.... 나와. 난 괜찮아...... 난 살아..... 난 살아남을 꺼야.” 눈을 꾹 감고 기도하 듯 되뇌이며 정신을 바로 잡으려 애썼지만 눈을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아니다. 정신을 차리자, 장인하. 아직은 괜찮아. 괜찮아. 까짓 꺼 저딴 환영이 나를 죽일 수나 있겠어? 난..... 살아 남을 꺼야. “인하야..... 장인하, 너 문 앞에 있지!!” 나의 반응에 걱정이 되었는지 세하가 문 뒷 쪽에서 세게 문을 두들긴다. 지금은 비킬 힘도 없어. 나를 깨워줘야 하는데..... 세하......야.... 숨을 서서히 몰아 쉬며 입술을 깨물고 겨우 겨우 입을 열었다. “운 벌이야. 갖혀 있어 봐라. 화장실에서.... 나 안 비킬꺼다.” 쿠쿡거리는 소리를 내며 겨우 겨우 심술궂게 말을 이었지만 여전히 앞에는 그것들이 날아다닌다. 젠장, 19년 째면 레파토리 좀 바꾸지. 내 상상력의 한계인지 환영들의 모습은 여전하다. 사채 쓰다 망한 개새끼랑 나 팔아먹은 미친년, 그리고 그 변태 개자식과 얼마 전에 죽은 자살 중독증 환자, 그리고...... 아, 레파토리 하나 늘었다. 빌어먹을 서윤진. “인하야, 괜찮아? 너 괜찮은 거야?” 문 저 쪽에서 들리는 외침에 겨우 몸을 일으키고 여전히 문에 등을 기댄 채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틀어 문이 열리자 마자 녀석을 툭하니 치고는 온 힘을 다해 웃어 보였다. 그리고 혀를 쭉 내밀고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당분간은 세하의 집에서 지내기로 하고 뒹굴거리기 시작했다. 하루를 보내고 무단 결근을 한 후 세하의 집에서 이것 저것 음식을 하고 정리를 하는데 친구녀석들이 떼거지로 몰려온단다. 망할 자식들, 나 음식 시킬려고 뻑쓰는 거로군. 흥, 그렇다고 잘해주나 봐라. 무단 결근을 한 그 날 밤 모처럼 고등학교 깡패들이 모두 모여 앉았다. 나와 꼬맹이, 조폭, 그리고 사촌. “그런 줄은 몰랐어. 권형이도 많이 놀란 모양이던데.” “흐음.......” 소파에 누워 앞에 앉아 술을 마시는 성준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그래도 담임이라고 챙기네. “어쩔꺼야? 진짜 학교 관둘꺼야?” 가만히 술을 마시던 상원이가 진지하게 물어왔다. 글세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지. 기분 같아서는 때려치고 싶은데 그럼 권형이도 태민이도 지혁이도, 경진이도 못보잖아. 그 놈들 착하고 재밌는 놈들인데 말야.... 그리고...... 권형이, 내 동생. 나 진짜 그 놈 사랑하는 거 같아. 이게 진짜 연애감정인지 그냥 핏줄이 끌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단 말이야. 보고싶고..... “야!” “왜?” 툭하니 나간 내 말에 세 놈이 동시에 날 돌아본다. “내 인생에서 근친상간 하나 첨부된다고 별로 달라질 거 없겠지?” 내 말에 세 녀석이 동시에 눈이 커지더니 잠시 후 동시에 한숨을 내쉰다. 그 표정은 뭐냐? 난 이렇게나 고민하다 겨우 말하는 건데...... “그럼 그렇지...... 니 맘대로 해라. 니 놈이 그렇지, 뭐. 이 놈은 하여간 순식간에 결론을 내버린다니까.” 세하 녀석이 그렇게 말하자 왠지 욱하니 뭔가가 치솟았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얼마나 고뇌하고 있는데. “뭐야? 무슨 일인지나 알고 그러는 거야?” “다 알아. 상원이한테 얘기 들었어. 그 주장인가, 동생인가 좋아한다며?” “......... 입 싼 놈.” 하고 상원이를 노려보자 상원이는 피식 웃으며 내게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뭔가 굉장히 진지하고 무거운 이야기를 오래 할 기세여서 담배를 빼물었다. “장인하, 그냥 니가 살던 대로 살아. 내키면 하고 하기 싫음 말고. 니 특기잖아? 그리고 니가 언제 남의 이목이나 눈치 신경이나 썼냐? 그냥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니 그동안의 악행에 그런 거 하나 포함된다고 한 번 더 욕할 사람 없어. 지금까지가 더 악질이었지.” “..............” “가고 싶은 길로 가다 가다 막히면 U턴을 하고 그래도 길이 끊어져 버리면 죽기 살기로 벼랑으로 쳐박혀 보라며? 근성을 보여...... 장인하.” 성준이 녀석까지 한 수 거들고 나섰다. 그래, 내가 언제 고민 같은 거 했다고 포기하고 자시고 하겠냐? 그냥...... 하던 대로 하자. 진짜 가다 가다 막히면 뚫으면 돼고 길이 없으면 그대로 다이빙이라도 하면 돼지. 윤진이 놈 때는 익사해보자는 각오로 덤볐는데 벼랑이야 가볍지. 만약 녀석과의 관계로 인해 그 놈이 날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가지고 논 벌이라고 한 대 날리고 포기하고.... 그래도 상관 없다면 얼씨구나 잡아 버려야지. 어쩌겠니? 내 팔자가 원래 이런 것을...... 그냥 갈 데까지 가보자구. 빌어먹을 운명따위 어떻게 되나 두고 보자구. 그래도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테니까.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학교에 가보니 녀석들이 연락을 해놨는지 모두가 독감으로 결근한 걸로 알고 있었다. 분향소에 있었던 선생님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어떤 소문이 돌았을지 궁금했지만 굳이 그걸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없어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지들이 뒤에서 떠들든 말든 난 앞으로도 꿋꿋이 잘 살아갈 테니까. 활기 찬 생각에 머리를 정리하고 출석부를 들고 교무실을 나서는데..... 이봐, 아무리 내가 금새 회복을 하고 엄청난 각오를 했다고 해도 말야...... 나오자 마자 이 놈과 마주치는 건 너무 심하다고 생각 안해? “...... 오셨네요.” 겨우 이틀 사이에 까칠해진 얼굴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멈춰 그대로 멍하니 서있었다. 마음 고생이 심했구나, 어린 놈이..... “응, 들어가 봐라.” 서둘러 문을 열고 나오며 걸어가는데 뒤에서 녀석이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으아악!! 따라오지마!! 머리 좀 더 정리하고 말하자구!! 나중에 보자구!! 내가 직접 찾아가서 말한다니까. 지하의 그 음침한 길로 다시 내려가는데 녀석 역시 내 템포에 맞춰 따라왔다. 그냥 성질대로 확 끝장을 봐버려..... 라는 생각에 우뚝 서는데 바로 뒤에까지 따라온 녀석이 손목을 낚아채어 잡았다. “또 도망갈 꺼에요?” “.............” 위에서 내려오는 시선에 난 한 껏 눈을 치뜨고 올려다 봐주었다. 젠장, 또 이 복도냐? “도망가는 거 아냐.” “그럼요?” 신랄하게 나를 향해 날아오는 차가운 눈동자. “........ 끌고 가는 거야.” 잠시 분위기를 잡던 녀석이 내 말에 황당하다는 듯 눈빛이 비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마른 웃음 소리. “..........진짜......... 말은.......” “불만 있냐?” 살짝 흘겨 보자 녀석은 유쾌하게 웃던 표정을 풀고 어딘지 모를 씁쓸함이 묻은 얼굴로 돌아왔다. 어린 게 저런 표정을 어디서 배웠을까...... 싶을 정도로 슬퍼 보이면서도 차분한, 눈 앞의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차가운 성인의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19년 산 저 놈이 왜 저런 눈빛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서러운 인생을 산 인간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저 눈빛의 경지를. “언제까지 도망만 칠꺼에요? 아직도 무서워요?” “도망치는 것도 아니고 무서운 것도 아냐. 니가 생각하는 거하고는 조금 틀려.” “뭐가요?” 사내자식이 치사하게 꼬치 꼬치 묻냐? “넌 어려서 몰라.” “그런 걸로 핑계 대려고 하지 말아요!!” 조용하던 녀석의 눈이 갑작스래 사나워 지며 내 팔목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핑계가 아냐. 너 그 날 일로 내가 누군지 알았을 거 아냐? 그래도 상관없어? 그래, 솔직히 난 상관없어. 하지만 악랄하게 말하자면 그 날 말한 게 내 진심이야. 니네 엄마 나 진짜 재수 없거든. 더 심한 말 나오기 전에 나온 거야. 거기 더 있었다면 나도 자제 못했을지 몰라.” 솔직하게 나간 나의 말에 녀석이 조금은 상처받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다음 순간,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무너져 버렸다. “그거..... 알고 있었어요.” 눈을 내리깔고 나오는 그 말은....... 순간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알고 있었다구? 어떻게? 대체 어떻게 알고 있었다는 말이야? “무슨 소리야?” “1년 전에 이상한 남자를 봤어요. 내게 웃으면서 이상한 말을 하더군요. 노숙자 같은 사람인데 나한테 형이 있다고 니네 엄마가 니 형 팔아먹었다고.... 그리고 그 형 이름하고 지금 살고 있는 데까지 알려주던데요. 그래서.... 몰래 가봤어요. 진실인가 해서.... 그리고 알았죠. 당신 엄마를 많이 닮았어요. 그 사람도 거짓말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고...... 그런 내가 선생님을 잡은 거에요. 그런데 왜 선생님은 그렇게 도망가려고만 해요? 왜 같은 위치를 보려고 하지 않아요?” 녀석의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겨우 숨을 쉬고 녀석의 시선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다구? “너..... 그래도 좋은 거야? 난 니가 마지막 이여야만 해. 상처를 치료하기엔 내 재생 능력은 너무 느리고 그렇다고 나 평생 상처 안고 살 정도로 미련한 놈 아냐.” 그래, 미련하지 않지. 그래서..... 방법은 둘 뿐이야. 널 죽을 때까지 못 놓던가, 혹은.... 네게 상처 받으면 너 죽이고 같이 뒤지던가. “그리고...... 이 나이에 몇 번의 사랑을 더 해야한다는 거 나한테 고문이야. 나 보기보단 팔팔한 놈이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고 조금은 쓴 웃음을 지었다. 내 미소에 녀석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왜요? 항상 우리보다 더 팔팔해 보이던데.” “너도 나이 들어봐.” “나도 나이 먹어요. 하지만 앞 일은 알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 앞 일은 알 수 없지. 너 나 아직 모르지? 나 너희가 생각하는 만큼 멀쩡한 인간 아냐. 내 친구들도 인정할 정도로 악질이라구. 솔직히 말할까? 나 너 좋아해. 좋아해서....... 나 너 잡으면 절대 못놓을 꺼야. 내 스스로 널 놓을 정도로 크게 배신한다면 그 못지 않게 복수할꺼고 그게 아니라면 나 어떤 악랄하고 비열한 방법을 써서라도, 널 죽여서라도 옆에 둘려고 할꺼야. 그게 말뿐인 게 아니라.. 난 진짜 한다면 해.” “놓지 말아요. 안놓지면 돼잖아요. 놓더라도.... 형이라는 이름이 있어요. 나도 평생 선생님, 아니 당신을 놓치지 않을테니까.... 당신도 놓지 말아요. 좋아하고 있었어요. 그 때..... 처음 봤을 때부터.... 형이란 거 뻔히 알면서도.... 끌렸으니까. 그래서 1년을 기다렸으니 앞으로 10년은 갈 껄요, 어쩌면 평생 놓치 못하는 건 선생님이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요.” 제법 진지하게 말하며 녀석은 손을 들어 내 얼굴을 감싸쥐었다. 검은 눈동자가 푸른 빛을 띠며 차가운 빛을 발했다. 온 몸이 오싹하니 떨려올 정도로 뜨거운 눈동자...... “평생.... 쫓아다니면서 전신에 나를 새기고 죽을 때까지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할 꺼에요. 각오하세요.... 선생님 악랄한 거 유명하지만, 저도 선생님 못지 않게 악랄하다는 거..... 이제 아시게 될 거에요.” 그리고 서서히 겹쳐지는 입술에 혼을 빼앗겼지만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악랄하다는 걸.... 안다고? 그리고 나보다 악랄하다면..... 그건 좀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그리고 안다면 어떻게 알게 된 거지? “나에 대해 안다구?” “...... 알아요..... 담임한테 다 들었어요. 그러니까..... 도망치려고 하지 말아요.” 그 꼬맹이 쪼끄만 게 행동이 빠르단 말야. 쓴웃음을 지으며 나를 안고 있던 녀석의 허리에 팔을 둘러 마주 안아주었다. “다 알아?” “다 알아요. 그러니까 도망가지 말아요.” “어린 놈이......” 그대로 녀석의 얼굴을 잡아끌고 딥키스를 감행했다. 이미 이 안이 학교 안이고 이 놈이 내 동생이라는 것도 언제 누군가 지나갈지 모른다는 생각은 없었다. 내 가장 안좋은 성격 중에 하나가 쉽게 빠지지 않는 대신 한 번 빠지면 무식할 정도로 빠진다는 점이다. 일단 사랑을 시작하면 주변이나 다른 것들은 일체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간다. 그래서..... 문제가 생기기도 하지만 기본 성격이 이 모양인 걸 어떻게 하겠냐? 그냥 생긴대로 살아야지, 뭐. 그러니까..... 너도 도망칠 생각 못할 꺼다. 틀림없이 시작은 니가 한 거야. 나중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해도 너 나 못 떠나. 나 너 죽여서라도 옆에 둘꺼야. 내 근성을 무시하지 말라구. “이제 맘 바꿨어요?” “응, 대신 너도 나한테 잘해. 못하면.... 달밤에 칼 맞을 꺼야.” 킥킥거리며 머리를 끌어안고 말하자 나의 갑작스런 태도 돌변에 녀석이 어리둥절해 한다. “소심하게..... 사내면 소소한 일에 신경쓰지 마. 나 사랑한다며?” “...... 사랑해요. 그런데 원래 성격이 이렇게 변덕스러워요?” “응, 나 원래 이래. 그러니까 잘해.” 다시 입술을 겹쳐 부드러운 베이비 키스를 하고 그대로 녀석을 안고 있었다. 모르겠다...... 어떻게 될지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갈 데까지 가보고 안된다면 그대로 박아버려야지. 어쩌겠냐? 어차피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고 그렇게 살아갈 팔자라면 말이야..... 너를 내 괘도 안에 끌어들인 건 조금 미안하지만 원래가 불행을 온 몸에 휘감고 다니는 인간이라 말이지. 그냥...... 가보자....... End Of The First Album 「Korean Pop-Song」 Continued to Second Album「Ani-Music」 폭력선생찬가 Second Part - 01 - ▷ track 01. 보노보노 Ending Song “아아 기적이 일어나서 금방 마법처럼 행복이 찾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가끔씩은 지름길로 가고파, 그럼 안될까. 고생은 싫어 그치만 으음~ 어쩔수 없지, 뭐~ 어디론가 지름길로 가고파 그럼 안될까 상식이라는 걸 누가 정한 거야 정말로 진짜 으음 으으음~” 햇살은 죽이고 날씨는 맑고 기분은 째진다. 직원 조회를 끝낸 후에도 조절이 안되는 표정 때문에 싱글거리며 출석부를 들고 교실로 올라갔다. 어쩌면 길고 긴 시간을 돌아 겨우 찾은 행복이라고나 할까나..... 이제야 내 짝을 찾았다는 기쁨에 헤벨레한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까짓 꺼 동생이면 어떻고 내 아들이면 어때? 내가 좋다는데....... 교실 앞에 서서 일단 표정을 정리한 후 목소리를 가다듬고 문을 열어 젖혔다. 그런데..... 왜 또 입이 찢어지냐? “자아, 오늘 조례 시작한다.” 문을 열어 젖히자 마자 외친 내 말에 모두들 어이가 없는 반응들이다. 그리고 수군거리는 분위기.... 내가 좀 웃으면 안돼냐? 왜들 반응들이 저 모양이야? “이제 곧 기말 고사 기간인데 시험 공부 열심히 하라고는 말 안한다. 말썽만 부리지 말아라! 그리고 내가 얘기한 거 아직 기억하지? 무지각 무조퇴 무결석반! 그게 내 목표야, 잊지들 말고, 오늘 수업 잘 들어라!” 간단하게 조례를 마치고 싱글거리며 인사를 받고 교실을 나서자 또 다시 웅성거린다. 완전 나를 미친 놈 취급하는 거군. 흥, 멋대로들 해라. 그래봐야 내 기분은 하늘 끝까지 솟아있으니까. 표정 관리가 안돼 자꾸 벌어지는 입 때문에 얼굴 근육까지 땡긴다. 에이, 왜 자꾸 웃어지지...... 이럼 안되는데...... “선생님!” 얼얼한 볼을 어루만지며 복도를 걸어가는데 헉헉거리며 태민이 놈이 달려나왔다. 뭐, 또 사고쳤냐? 에이, 오늘은 사고 쳐도 봐준다. “왜?” 싱긋 웃으며 돌아보자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된 녀석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왜? 내가 모처럼 착한 선생 모드로 돌아서 줬는데.... 나도 알고 보면 착한 인간이라구. 명세 놈 때문에 열 받아서 난리를 치기는 했지만........ 뭐, 다 용서해 주지. “오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라면서 다시 한 걸음 다가와 내 이마에 손을 대고 다른 한 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어 열을 잰다. 이게...... “안 아파, 임마. 왜?” 손을 툭 쳐내며 말하자 약간 고개를 틀고는 인상을 쓴다. “왜? 또 사고 쳤냐?” “아뇨..... 선생님 반응이 암만 봐도 이상해서....” “내 반응이 왜?” “너무 기분이 좋아서요...... 학교 빠져서 걱정했는데 너무 멀쩡하니 돌아오니, 이상하잖아요.” “난 기분 좋으면 안돼냐?” 왠지 벨이 꼴려 톡 쏴주자 녀석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이상해서요..... 그 날 일 때문에 어디 가서 사고나 안치나 걱정했는데.......” “내가 니네 같은 줄 아냐? 난 사고 쳐도 처리는 확실히 하니까 걱정 마라. 그것 때문에 따라 나왔냐?” “...... 괜찮아 보이니 다행이네요. 권형이 형하고 얘기 해봤어요?” “어.... 응......” 아이, 권형이 얘기가 나오니 또 입이 찢어지네. 난 진짜 싸울 때랑 기분 좋을 때는 조절이 안된다니까..... “....... 권형이 형이 동생인 게 그리 좋아요?” “어..... 어어..... 으응......” 차마 좋아하던 그 놈하고 잘됐다는 말은 예의 상 못하고 그저 웃기만 했다. 우리 형제라는 사실까지 다 아는 놈들이니 사귀기로 했다는 얘길 들으면 기절하겠지. 아이... 그래도 자랑은 하고 싶은 걸. 뭐 어때? 내 인생 내가 사는 건데.......... “....... 이상해..... 선생님 이상해요.” 이 놈이 왜 이래? 내가 좋다는데!!! “시덥잖은 소리는 그만하고 수업이나 들어가! 난 간다.” 출석부로 녀석의 머리를 한 대 치고 복도를 터벅 터벅 걸어 교무실로 향해갔다. 오늘 끝나고 체육관에 들려야지. 그리고 가서 권형이 운동하는 거 보고 같이 나가서 밥도 먹고 집까지 바래다 주고..... 헤헤...... 아이씨.... 왜 얼굴이 자꾸 땡기냐? 하루 종일 얼굴이 땡겨 고생을 하다 체육관으로 향했다. 곧 기말 기간이라 시험 문제도 내야하고 할 일은 많지만.... 그 자식 얼굴이 너무 보고 싶은 걸 어쩌겠어? 아이, 또 볼이 땡기네~ 이 표정으로 가면 뽀롱날텐데. RRRRRRRR 체육관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울린 벨 소리에 핸드폰을 들었다. 이런.... 꺼놓는 것도 잊다니..... 오늘 하루 종일 정말 정신이 없기는 없었구나. “네, 장인하 선생님 핸드폰입니다.” <...... 아주 날아다니는구나. 꼬맹이 얘기 듣고 설마... 했는데 말야. 기분 찢어지냐?> 라며 톡 쏘는 것은 13년 지기 친구, 전세하였다. 이 몸께서 드디어 실연의 상처를 딛고 인연을 만드셨다는데 왜들 이리 불만이야? “그래, 찢어지다 못해 넝마 조각이다. 왠 일이냐?” <왠 일은....... 너 어제까지 기분이 곤죽이라 연락해본 거지. 괜찮아?> “응, 잘 됐거든. 오늘 오전에 출근하자마자 잘됐지, 뭐.....” <그래.... 또 시작이구나. 당분간은 사고 칠 일 없겠네. 동생한테 안부나 전해라.> “응, 전해줄게. 성우한테도 안부 전해라.” <하여간 한 번도 그냥 넘어가질 않는 다니까.> “안그럼 장인하가 아니지~” <그래, 날아 날아 추락하지만 말아라.> “쿠쿡, 그래. 당분간은 아닐테니 안심해라! 끊는다. 나 지금 권형이 보러 가는 중이거든.” <젠장, 잘 사는 거 보니 벨 꼴리네, 이거.> “남이사! 나중에 같이 술이나 마시자.” <그래, 잘 살아라, 이 악질아!> “당연하지, 나 좋아하지?” <그래, 좋아한다..... 장인하.> “응, 그래..... 나 예쁘지?” <또 시작이냐? 그래, 예쁘다. 그 얼굴로 평생 빌어먹어라!> “오오, 나의 미모를 질투하지 말라구.” <아웃!!!> 하는 비명 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래도 내가 걱정은 됐나 보지? 간만에 술이나 마시자고 할까나..... 후훗... 삐직 삐직 삐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입이 사정없이 찢어진다. “우응..... 저녁은 카레라이스? 아니면 간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해볼까?” 권형이 연습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는 그러니까..... 난 먼저 가서 밥 해놓고 들르라고 할까? 고3이니 조금 무리인가? 에이, 뭐 어때? 어차피 체육 특기생으로 갈텐데. 공부야 바닥을 기던 말든~ 여차하면 동생이니 공부 가르쳐 준다고 해도 돼고. 햇살이 내비치는 운동장을 지나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의 열기가 느껴졌다. 진짜 사방 팔방 잘도 뛴다. 싱글거리며 익숙한 얼굴들을 확인하고 벤치 자리에 가서 앉자 트레이너가 다가와 인사를 건낸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 네. 좀 일이 있어서요.” 빙긋 웃으며 말하자 이 트레이너 역시 뜨악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거 참.... 신경질 내도 지랄, 잘해줘도 지랄이냐? “기분 좋으신 모양이죠?” “아, 네. 10년 묵은 체증이 싹 가신 거 같아서요. 그나저나..... 방학중에 합숙이요, 저도 가도 돼나요?” 예전 학교에서의 처세술을 살려 사근사근 말하자 트레이너가 못 볼 걸 본 듯 한 얼굴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선다. 망할...... 사람의 호의는 호의로 받아들이라구!! “가도 되는 거죠?” 방글거리며 약간 나사 풀린 듯한 미소를 피식 흘리니 아예 얼어버린다. 다른 녀석들처럼 넋이 나간 것도 아닌, 그렇다고 기가 막히다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이었다. 뭐냐..... 그 괴물 보는 듯 한 얼굴은? “뭐.... 안좋은 일 있으세요?” “....... 아뇨? 기분은 굉장히 좋은데요. 같이 따라가도 되는 거죠?” 씨발아..... 내가 모처럼 웃으면서 잘해주면 반가이 받아들이라구. 이거 잘 안보이는 천만불짜리 미소다. 이런 미모가 이 세상에 그렇게 흔한 줄 아냐? 나 정도 되는 얼굴 이제 껏 나도 거의 본 적 없다. “그거야.... 따라가 주시면 고맙죠. 원래 가야하는 거기도 하고...... 하여간..... 그렇게 하기로 하죠. 전 그럼......” 이라며 뒤걸음을 치며 달아난다. 왜 저래?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 다시 마주친 권형이와의 시선에 다시 볼이 땡기기 시작했다. 아이, 이렇게 헤벨쭉해서 다니면 안되는데........ “선생님.... 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티내면 안돼요.” “으악!!” 콰당탕--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음침한 목소리에 요란하게 벤취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우웃, 망할.....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달려온다. 쪽팔리게..... “임마, 음침하게 나타나지 좀 마!!” 버럭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들자...... 쭈욱 뻗은 곧은 다리 - 씨발, 털 좀 깍지... - 를 지나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운동복을 지나 그나마 나오지 않아 다행인 배 부근을 넘어 목이 꺽여라 쳐들어 겨우 보이는 얼굴.... 열라 높기도 하자. 좋겠구나, 정경진..... 폭식돼지. “왜?” “선생님이 너무 기분 좋아 보이니 이상하잖아요. 4월 달부터 갑자기 이상해지더니 인상만 쓰고 다니다 웃으니 기분 묘해서요. 게다가 이틀 전의 그 사건도 있는데......” 엎어진 상태에서 녀석의 얼굴을 보자니 천장까지 보인다. 아주........ 하늘을 찔러라, 찔러. “정경진...... 니 일이나 잘해라.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냐?” “다음에 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본다고 했잖아요.” 라며 뚱하니 쳐다보는 돼지를 보고 다시 시선을 돌리자 다들 운동을 하다 그대로 멈춰 서 바닥에 엎어져있는 나만 보고 있다. 나 엎어진 게 그렇게 신기하냐? 아우, 개쪽!! “뭘 쳐다 봐! 봤으면 일으켜 주던가 해야지!!” 신경질을 내자 멀리 있던 권형이가 터벅 터벅 다가와 손을 뻗어온다. 그 모습에 다시 헤벨레 해지려는 얼굴을 겨우 고정시키고 손을 잡고 일어섰다. 아이, 그렇다고 금방 오니 너무 좋잖아...... “왜 그렇게 칠칠맞아요?” “칠칠은...... 원래가 좀 정신을 빼놓고 다녀서..... 고맙다.” 멋적음에 목을 벅벅 긁고 말하자 다들 이 쪽만 바라보고 있다. 아이, 또 표정 관리가 안되나 보네...... 애들 있는데...... 정신 차리고...... 애들한테 미소를 너무 남발하면 날 우습게 본단 말이지. 그렇지 않아도 연야게 보이는데.... “뭘 멍하니 쳐다 봐? 연습 안하냐?” 꼴을 보아하니 이미 학교 안에 소문이 다 돌았는지 권형이가 내 동생인 거는 아는 듯 하다. 수근거리는 폼들이... 젠장, 왠지 열 받잖아. 사내자식들이 남 뒷다마 까는 게 즐겁냐? “왜 신경질이에요?” “내 맘이다. 너도 빨리 연습이나 해. 나 연습보고 집에 갈거야.” 라고 등을 떠밀자 웃으며 다시 체육관 중앙으로 나간다. 참...... 표정 관리 안돼네. 왜 이렇게 기쁘다냐? “선생님...... 권형이 형이랑 사귀기로 했죠?” “으악!!!” 바로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속삭임에 다시 앞으로 근사하게 엎어져 버렸다. 씨발, 오늘만 두 번 째다!! 원래 잘 엎어지긴 하지만.... 재수 없게 애들 앞에서 슬라이딩을...... 망할. 신발에 고무를 바닥을 깔 건다, 스파이크를 박아야지.... 츳! 앞으로 장마철 되면 사방 팔방 굴러다닐텐데........ “정경진!! 너 왜 그래? 사람 놀라게!” 다시 소리를 지르자 또 날라오는 시선들과 권형이의 황당하다는 표정...... 나도 나 칠칠맞은 거 안다. 씨발...... 이번엔 내가 일어서 엉덩이를 털고 앞에 있는 나보다 조금 더 큰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알고 싶은 게 뭐냐?” “둘이 사귀기로 했는지가 궁금해서요.” “그래, 사귀기로 했다. 속 시원하냐? 더 물어볼 껀?” “흐음...... 그거면 됐어요.” 라고 돌아서길래 이젠 무시하고 운동을 계속하는 부원들을 흘깃 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 말했다. “그대로 가면 안돼지, 정경진!” 하고 녀석의 어깨를 잡아채자 약간 굳은 얼굴로 돌아본다. “........ 왜요?” “잠깐 상담 좀 할까?” 라고 싱긋 웃자 얼굴이 몇 배로 굳어버렸다. 그러게..... 누가 시작하래냐? 내가 당하기만 하고 그냥 끝날 줄 알았냐? 훗, 그럴 순 없지. 니가 하나 캤으면 난 두 개를 캔다. 녀석을 끌고 체육관 뒤 쪽의 뜰로 가서 담배를 빼물고 벽에 기대어 서서 삐딱하니 돼지를 올려다보았다. “너도 한 가지 물었으니 나도 한 가지 물을 권리 있는 거지?” “...... 네......”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피하는 녀석을 보자..... 왠지 더 캐고 싶어졌다. 그건 뭐, 내가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 원래가 인간이란 이렇게 귀여운 것들을 보면 더 괴롭히고 싶어지는 게 본성 아니겠어? 이건 내 성격 탓이 아니라구...... “좋아, 니네 형하고는 어떻게 자게 된 거냐?” 싱긋 웃으며 핵심 포인트만 묻자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눈물을 뚝뚝 흘린다. 으아악!!!! 얘, 왜 또 울어? 누가 너더러 뭐라고 했니? 니가 물어보길래 나도 물어보는 거잖아!! 상부상조!! 우라나라 기본의 전통 정신도 모른단 말이냐!! “야, 왜 울어!!! 니가 물어 봤으니 나도 물어보는 건데!!” “형이...... 덮쳤어요. 엄마 아빠 재혼하고 얼마 안지나서.....” “....... 그러냐?” 라고 쉽게 묻자 녀석이 셔츠 자락으로 눈물을 닦더니 거기에 코까지 푼다. 엽기적인 놈...... 어떻게 입고 있는 옷에 코까지 푸냐....... 나 같으면 그 옷 두 번 다시 안 입는다. “나 진짜 그럴려고 한 거 아닌데..... 형이......” 라며 또 한 번 눈물을 흘리고 다시 셔츠 자락을 드는 녀석의 모습에 오만상을 찡그리며 바지 뒷주머니의 손수건을 꺼내주었다. 원래가 나도 이런 거 챙겨 다니지는 않지만 날씨가 더워져서 땀 닦을려고 준비했던 건데... 말이지, 내 땀보다는 니 콧물 쪽이 위험해 보이니 잠시 빌려준다. 대신 그거 돌려줄 생각은 말아라. “알았어. 그만 좀 울어라. 그만 울고.... 들어가.” 손수건을 건내고 어깨를 툭 치자 코를 팽- 하니 푼 녀석이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진지하게 날 바라본다. 왜 손수건 두고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이 놈 사정이고 눈물과 땀이 섞여 때꾸정물이 줄줄 흐르는 꼴을 보는 게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닌 건 사실이군. 대체.... 세수는 하고 다니는 거 같은데..... 왜 얼굴에서 땟국물이 흐를까...... “선생님......” “왜?” 갑자기 시선을 들고 나를 바라보며 내가 준 손수건으로 코만 풀던 녀석이 말을 하길래 진지하게 - 인상은 그대로 쓰고 - 답해주자 나를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연다. “배 고파요.......” 투욱-- 정색을 하고 나온 녀석의 말에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이... 돼지새끼.... 누가 돼지 아니랄까 봐 이런 상황에서도 먹을 꺼 타령이냐? 으흑, 아까운 담배...... 그나마 이 놈을 정상으로 여겼던 지난 시간이 아깝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이런 놈일 줄 알았나..... “넌...... 돼지야....... 새끼야.......” “배 고파요.....” 라며 눈에 힘을 주는 녀석의 얼굴에 남은 눈물 자국 때문에 사정없이 양심이 찔려 결국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진짜.... 내가 왜 선생이 될려고 했을까? 뭐, 핑계라면 돌아가신... 나를 키워준 아저씨의 유언도 있었고 굳이 할 일도 없는데다 사람하고 가장 부대끼는 직업이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칼퇴근에 방학이 있잖아. 휴일도 꼬박 꼬박 쉬고 공무원이니 망할 일도 없고, 무엇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 자식들의 미래까지 보장이 되니까. 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나름대로 편한 직업이란 말야. 사실..... 말이지.... 진짜 선생이 된 이유라면.... 그 망할 명세 자식 때문에 따라온 건데 말야. 그 놈이 졸업하면 당연히 그 놈 모교로 갈 줄 알고 그 재단의 공고에서 2년을 썩었는데 갑자기 이 학교로 오더라구. 그 자식 여기 발령받고 나서 내가 이 학교로 올려고 온갖 사기에 공갈에 협박은 다했는데.... 돈도 좀 쓰고.... 지금 생각하면 참 가슴이 찢어지지. 아까운 내 돈....... 그리고 그 착한 척 하며 살던 시절이 말이야..... “알았어, 가자. 잠깐 매점 가서 먹고 오자.” “....... 코치한테 말해야 돼요. 안 그럼 나중에 혼나요.” “내가 말할게. 나랑 상담했다고 뻥쳐.” “네.” 라고 답하는 녀석을 데리고 뒷뜰을 지나 매점으로 향해 갔다. 원래가 자기가 벌린 일이라면 책임을 져야 하지만 말이야. 그렇다고...... 왜 이 놈의 폭식증까지 내 몫이 되는 거야! 진짜..... 아무리 봐도 이 자식 정상이 아니라 말야. 형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해도 어차피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니 상관없는 거고...... 싫으면 이 거구로 압사시켜도 되는 건데 말이지..... 그렇게 싫다면 어째서 같이 자는 거지? 게다가 형이 덮친 거라면 이 놈이 깔리는..... 으음.... 조금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이 놈..... 귀엽잖아. 몸만 컸지 애인데다 생긴 것도 동글동글하고 하는 짓도 아이큐 80정도 되보이는 게 내가 되기만 한다면 한 번은 깔고 싶은 타입이니까.... 흐응... 그래서인가? 복잡한 생각에 머리를 긁적이고 옆에서 걸어가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귀엽기는 하지만...... 얼굴에 흐르는 땟국물을 보니.... 앞의 말은 취소다. 절대 안아주고 싶지는 않은 걸..... “왜요? 또 돼지라고 할 꺼죠?” 빤히 바라보는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녀석이 뽀루퉁한 얼굴로 대꾸해온다. 알았냐? “알기는 아냐?” “선생님...... 못됐어요.” “웃기네. 내가 진짜 못된 짓 하는 걸 못본 모양이지? 진짜 못됐다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게 아냐 기회가 닿으면 언젠간 악랄함의 극치를 한 번은 보여주지.” “그게 자랑이에요?” “내 특기니까.” “인간이 왜 그렇게 살아요?” 씹... 어린 놈이..... 어딜 보고 까대? 인간이 왜 그렇게 살긴?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인간도 있으니까 그러고 사는 거지. 난 청승은 질색이거든. 절대로 당하고 착하게는 못살지. 그렇다고 내가 굉장한 폐를 끼친 적 있나? 없잖아? 아마.... 없을 껄...... 없을 꺼야..... 없겠지, 뭐....... .............................................................................. 젠장, 있으면 어때? 남한테 평생 폐 안끼치고 사는 사람 있나? 살다보면 민폐도 끼치고 그러는 거지... 뭐.... 이 때까지 내가 당했던 거 생각하면 그 정도 폐는 애교 아냐? “...... 애들도 맨날 나만 보면 돼지라고 놀린 단 말예요.” “너 돼지 맞잖아.” “............” 딱 잘라 말한 내 말이 녀석이 또 주인 잃은 강아지 마냐 기가 팍 꺽인다. 우욱, 심장으로 화살들이...... 나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착해진 거지? “애들이....... 많이 놀리냐?” “....... 네......” 이젠 뒤에 쳐진 꼬리까지 보인다. 대체 이 돼지 새끼 말이지, 매일 여기 저기 깝죽거리는 놈이 왜 이렇게 자기 얘기만 나오면 기가 꺽이는 건데? 평소대로 하란 말이다, 이 놈아!! “돼지라고 놀리면 그 돼지 몸으로 친절히 깔아 뭉개줘라. 한 번 숨막혀 죽어 보라구! 몸 잘 만든 놈들보고 놀리는 것들은 대부분이 자기 몸에 컴플랙스 있는 것들이니까 무시해도 상관없고. 까불면 그대로 조져버려!” “........ 싸우면 안돼요...... 착한 학생은 애들하고 싸우는 거 아니랬어요.” “............!” 녀석의 말에 운동장을 걷던 그대로 자리에 멈춰서 버렸다. 뭐라구....... 이 돼지가....?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형이 착한 아이는 싸우면 안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형 말 잘 들어야 한다구요.” “뭐라구.........?” 이 새끼 말이야..... 혹시 암시에 굉장히 약한 타입인가? 그래서...... 안싸우고 형 말 잘들으라구 해서.... 그대로 당해도 참고....... 이 녀석의 폭식증은 그 반작용인가? “너..... 말이다.... 정경진....” “왜요?” “너 폭식증 언제부터 생긴 거냐?” “저 폭식증 아니에요.” “맞아, 새꺄!! 많이 쳐먹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냐구?” “......... 13살 때 쯤부터.......... 요........ 나 많이 안먹는데.” 씨발, 니가 많이 안 먹는 거면 이 세상 사람 태반이 영양 실조겠다. “그 때가 너희 부모님 재혼하신 때 맞지?” “우와!! 선생님 돗자리 펴도 되겠다.” 이 정도에서 그걸 모르면 그게 곰이지, 인간이냐? 보통 어느 정도 눈치나 머리가 있는 인간이면 눈치 깔 때라구! 내가 안당해 봤으면 모르지만 나도 한 때 폭식증 비슷한 거에 시달린 적이 있어서 안다. 물론 난 그 때 11살이었고 폭식증이 아니라 알콜 중독에 니코틴 중독이었지만..... 뭐, 그래도 나 정도면 착한 거 아니겠어? 나랑 같이 있던 애들 몇은 그 때 벌써 헤로인과 아편을 쓰던 애들도 있었는데..... 포주 새끼가 억지로 시킨 거기도 하지만. 몸에 상처 남는다고 그것도 전부 먹는 약이나 뒤로..... 만 넣었었지. 그러고 보니 미약도 사용을 했었나? 하도 오래 되니 가물가물하네...... 아,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하여간.... 이 놈의 그 알 수 없는 폭식증은 아무래도 억압된 의식에 의한 정신질환인 듯 하다. 그러니까 형에 대한 감정의 폭주를 먹는 걸로 대체하는 거야. 노처녀들이 먹는 걸로 스트레스 푸는 것처럼 말야. 내가 정신병에 대해 좀 아는데..... 아무래도 그래서 형 얘기만 나오면 배가 고픈 거 같아. 사실 내가 말이지, 내 상태가 이상해서 병명을 찾았었거든. 그런데..... 진짜 아무데도 없더라구. 이건가 싶으면 저거 같고 저건가 싶으면 이것도 같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증세를 알 수 없는 정신병이거나, 나한테 엄청난 신기가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후자는 내가 봐도 말도 안되지만.... 뭐, 여튼 내 일은 내 일이고 이 놈 진짜 정신병 맞단 말야. 아무래도 카운셀링을 받게 해 보는 쪽이 낫지 않을까? 이 놈의 폭식증은 진짜 조금 심각하단 말야....... 뭐, 사실 언제나 배가 고픈 것도 사실은 사실겠지만.... 괜히 돼지겠어...... “후유........ 이 놈의 농구부.......” “농구부가 뭐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나간 내 말에 녀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내려다 본다. 젠장, 이 때까지 누구한테 내려다본 적은 없는데..... 기분 더럽데..... 눈 올려! “너 인간적으로 니네 농구부가 좀 이상하단 생각 안하냐?” “뭐가요?” “관두자. 애들이 뭘 알겠냐? 냅둬라..... 밥이나 먹자.....” 진짜.... 문제 많다니까..... 한 놈은 조금 찔리기는 하지만 자기 형하고 연애에, 한 놈은 그 덩치로 깔리고, 두 놈은 알 수 없는 애증의 폭주에 휩싸여 있고 말야.... 내가 모르긴 해도 이 학교 농구부 녀석들 하나씩 케보면 다들 엄청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으윽, 애비!! 불길한 생각은 하질 말자. 진짜 그럼 어떻게 해? 이 네 놈도 벅찬데 다른 농구부 부원들까지.... 우엑이다. 그럴 때는 진짜 내가 이 학교 관두고 말지...... 는 아니고.... 사실 남의 얘기는 재밌잖아. 내 얘기야 희극 쪽이 좋지만 다른 사람은 비극 쪽이 더 재밌는 거 아냐? 공공연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이랑 싸움 구경인 이유가 뭔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남이 잘되는 꼴은 못본단 말씀이야. 혀를 차고 안됐어.... 라고 하면서도 솔직히 남의 불행을 즐기고 있는 거 아냐? 뭐...... 자기는 착해서 아니라면 말고...... 씨발, 그런 인간들이 꼭 남의 일에는 관심도 많고 오지랖도 제일 넓어요. 하여간 속물들이라니까! 나처럼 까놓고 즐긴다고 말하면 될 껄..... 씨, 관둘래. 짜증나.... 녀석의 배를 채우고 난 곧장 주차장으로 가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틀 전에 그 난동을 부린 거에 비하면 내가 생각해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한 반응이지만 어쩌겠어? 원래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걸? 불만 있으면 다들 꺼져버리라고 해. 나만 잘살면 된 거 아냐? 으흣! 그러니까.... 또 웃음이..... 후후, 오늘 권형이 오면 밥도 해먹고.... 얘기도 하고 게임도 하고... 즐거운 하루를 보내는 거야. 남들이야 뭐라 건 어때? 나만 좋으면 되는 건데 말야. “아.... 연락......” 그리고.... 집에 거의 도착해 생각해 보니.... 난 권형이의 핸드폰 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나머지 놈들의 전화 번호를 아는 것도 아니고..... 기분이 너무 뜨다 못해 완전 맛이 갔던 거군. 이런 사전 조사도 없었다니.... 뭐, 사실 그 놈하고 아침에 므흐흐흐한 관계로 발전하기 전에는 이렇게 될 줄 알았었나? 확실히 선을 그으려고 했었으니까..... 뭐...... 젠장, 그 놈 엄마, 아빠 확인하기 전에 연락처를 먼저 확보할 껄. 그 년 이름에 놀라서 물밑 작업이 소홀했어. “으으..... 꼬맹이한테 전화해 볼까?” 핸드폰을 꺼내들고 메모리 5번을 누르려는데 벨이 울렸다. 필이 통했나.... 란 생각에 놀라서 핸드폰까지 떨어뜨렸다 서둘러 다시 주어 들었다. 씨발, 저번에 깨먹은 전화도 아까운데 이 핸폰까지 날리면 곤란하지. 액정화면을 열고 번호를 보자 낯선 번호가 잡혔다. 설마....... “네, 인하 핸드폰입니다.” <쿡, 원래 전화를 그렇게 받아요?> 두근-- 순간 가슴이 기분 좋게 울렁거렸다. 아아..... 자꾸 이렇게 좋으면 어떻게 해? 나 감동 받고 있는 거 같단 말야.... “어.... 왠 일이냐?” <왠 일은요....... 지금 어디에요?> “아, 집 앞. 그렇지 않아도 전화할려고 했는데..... 저녁 때 올래? 밥해줄게.” 내가 요리는 좀 하거든...... 자주 안해서 그렇지. <그렇지 않아도 갈려고 했어요. 저 지금 연습 끝났으니까 30분 후 쯤에 도착할 거에요.> “어..... 우리 집 아나?” <한 번 갔었잖아요.> 아아........ 그 술 먹고 뻗은 날..... 그러고 보니 그 날이 역사적인 우리의 동침의 밤 아니었나? 흥, 무드는 졸 구렸지만 만리장성 기본 공사는 했던 거군. “어, 그래. 그럼 빨리 와. 뭐 해줄까?” <아무 거나요.> 아무거나.... 라... 내가 친구들한테 뭐 해줄까.... 라고 했을 때, 아무 거나 라고 한다면 열 받아서 들고 있던 칼 집어던지는 사람인데 말야. 사실이 그렇잖아. 사람이 성의를 가지고 - 뭐, 사실 내가 요리할 때는 이빠이로 열 받았을 때나 머리가 터질 정도로 기분 좋을 때 뿐이지만 - 음식 해준다고 하면 먹고싶은 걸 성의 있게 답하는 게 예의 아냐? 아무거나.... 라니... 그렇게 무책임한 발언이 어디 있어? 하지만...... 이 놈이니까 참는다. 헤헤헤..... “그래, 아무 거나 해줄게. 빨리 와라." <달려갈게요.> 기쁜 듯 한 목소리에 나도 얼굴이 사정없이 찢어지는 걸 느끼며 전화를 끊고 집으로 올라갔다. 그러고 보니 집에 음식이 전혀 없을텐데. 재료랑 이것저것하고 간만에 편하게 마실 와인도 사고..... 담배도 좀 약한 걸로 바꿔볼까? 그리고... 에 또..... 권형이 오면 쓸 칫솔하고 속옷하고 잠옷도 준비하고....... “흐흐흐흐흐흐.........” 방학되면 신나게 놀아야지. 경진이랑 태민이도 데리고 여행도 가고....... 역시 인생은 살아볼만 하다니까..... 올라가던 걸 틀어 근처의 슈퍼로 날아가 재빠르게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답지 않게 집까지 청소하고 술병들은 감추고..... 재료를 다듬고 재떨이를 털어냈다. 서둘러 정리하지 않으면 사생활 뽀롱...... 났나, 이미..... 흐응, 그래도 예의상.... 후훗! 또 볼이 땡겨 푸시식 웃음을 흘리고 쌀을 찾는데..... 있던가, 없던가..... 있나? 있겠지..... 있다면 다 썩었을지도...... 쌀도 시킬 것을...... “흐음..... 집에서 밥 먹은 지가 하도 오래라......” 그 동안 거의 발광을 했으니까.... 참..... 정신이나 좀 차리고 다닐 것을..... 요리하는 건 좋아하지만 먹어줄 사람이 있어야지. 나중에 돼지새끼랑 태민이도 불러서 한 번 거하게 해주지. 대강 집이 정리된 후 또 뭔가 할 일이 없나..... 하며 주변을 돌아보자 벨 소리가 들렸다. 찾아오는 이가 드물어 잘 울리지 않는 벨.... 친구들은 모두 스페어 키를 갖고 있어서 -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이유로 상원이 놈이 강제로 만들어준 - 벨을 누르지 않고 그 외에는 찾아올 사람들이 없으니... 녹이 슬만도 한 그 벨이 울리자 가슴이 울렁거리며 기분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 두근거리면서 인터폰을 들어 바깥은 확인하자 익숙한 얼굴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들어와!” 서둘러 답하고 문을 열자 현관문으로 주장, 아니 권형이가 들어선다. 허어 참 저번에 왔을 때랑은 느낌이 다르네..... 그게 참 사람이 간사한 동물이라 말이지.... 그 때는 당황스럽고 짜증났는데 지금은 왜 이리 기쁘고 좋을까? 그 때 좀 잘 보여둘 걸.... 성질 다 들통났으니 내숭도 못까고.... 내가 이래뵈도 다른 녀석들에게는 꽤 착한 척 굴어줬거든. 뭐 덕분에 완전 병신 취급당하고 처절하게 차인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내 팔자고..... 사정없이 벌어지는 입에 히죽 웃고 인사를 건내자 녀석도 웃으면서 받아친다. “집, 저번보다는 깨끗하네요.” “아, 원래..... 깨끗한데..... 그 때는 컨디션이 엉망이라.....” 좀 찔리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너저분한 성격은 아니라구.... 조금..... 늘어놓는 편이라 그렇지.... 책이랑 음반이랑..... 술병만 없으면 그런대로 깨끗하다구. 옷도 많이 꺼내놓고 입는 스타일이 아니니까.... 끄응..... 그러고 보니 나 세탁 안한지도 꽤 돼잖아..... 흐음... 쌓인 옷이 장난이 아니겠군. “...... 그래요? 저 샤워 좀 해도 되죠?” “응, 저 앞에 욕실!” “연습 끝나고 곧장 오느라 씻지 못해서요.” 라며 싱긋 웃고 가길래 나도 웃어주는데...... 으악!! 안돼!!! 세탁기 안돌린지 근 한 달이라구!! 귀찮아서 세탁소에도 안 맡겼는데.... 그러고 보면 나도 옷은 참 많단 말야. 한 달동안 세탁 안해도 입고 다닐 옷들이 있다니...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 잠...... 욱!” 미쳐 달려가 말리기도 전에 욕실문을 연 권형이는 욕조에 담가놓은 옷들을 보고는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쪽 팔리지만...... 어쩔 꺼냐? 여기 우리 집이다, 뭐. “빨래 좀 하지 그래요?” “귀찮아서......” “그 옷 며칠 입은 거에요?” “이거? 사흘..... 인가.......” 으음...... 내가 원래 옷 갈아입는 걸 싫어해서...... 쳇, 뭐 어때? 집에서 입는 옷인데.... 뭐, 그래도 학교 갈 때는 매일 새 옷 입고 나갔다구.... 아니.... 가끔은 아니고..... “세탁기 어디 있어요?” “저기.... 다용도실에....” 주방 옆의 베란다 쪽을 가리키고 말하자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가더니 욕조에 가득 쌓인 옷을 바구니에 담아 들고 나간다. 내가 할 껀데.... 뭐, 해주면 거절은 안하마. 팔짱을 끼고 서서 그 꼴을 보자 남의 세탁기인데 참 잘도 조절해서 돌려놓고 욕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는다. 그래, 닫아라.... 뭐,내가 훔쳐보기라도 한 대냐? 왠지 기분이 나빠져 휙 돌아서는데 문 잠그는 소리까지 들린다. 저게.... 내가 변태라도 되는 줄 아냐? 젠장, 이거 우리 집이라구, 열쇠 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열쇠 따고 들어가서 훔쳐본다는 건 아니고....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머리를 벅벅 긁고 주방으로 가서 식사나 차릴까.... 하는데 가장 궁극의 문제인 밥이 없어서..... 쌀통을 박박 긁어보니 그래도 아직 썩지 않은 쌀들이 쏟아진다. 기쁨에 넘쳐 쌀들을 씻어 밥을 하고 온갖 요리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역시.... 나 요리 잘한만 말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요리사나 되볼걸.... 훗, 뭐 못하는 게 있겠어, 내가. “후후후훗!” 내가 듣기에도 음침한 웃음을 날리고 권형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밥 먹고..... 영화라도 빌려다 놓을 걸 그랬나? 아니면..... 얘기하기는 낯 간지러우니 영어 공부라도 할까? 어머, 왠 답지 않게 학구파인 척! 잘도 공부를 하겠다, 흥...... “선생님, 수건이요!!” “안에 없냐?” “없어요!” 내가 안갖다놨나? 하긴 수건 신경쓸 틈이 어디 있었냐? 사방 팔방 신경질 내고 다니느라구....... 건조대에 가서 여기 저기 뒤져 겨우 성한 수건 하나를 발견하고 문 쪽으로 가 두드리자 손만 빠져나온다. 으음..... 왜 손만 나온 걸 보니 이렇게 문을 닫아버리고 싶지. “여기......” “고마워요.” “실컷 고마워해라.” 뚱하니 내뱉고 거실로 가 담배를 빼물고 앉아 불을 붙였다. 거 참, 까탈스러운 놈일세.... 다른 놈들은 사귈 때 같이 자자고 혈안이 되더만.... 샤워 정도 가지고..... 뚱하니 혼자 앉아있다 옷까지 다 입고 터벅 터벅 걸어나온다. 누가 너 벗겨본대니? 새삼스레.... 거 참...... “담배 좀 줄여요. 그리고 집 좀 정리하고 살구요.” “잔소리는...... 사내 자식이 그런 사소한 일에 신경쓰냐?” “선생님이 너무 무심한 거 아녜요?” “내 친구들도 다 이래.” “유유상종이라잖아요.” “흥, 웃기네. 밥이나 먹자.” 피식 웃으며 날 따라 주방으로 들어간 권형이가 그 식탁의 호화스러움에 놀라고 만다. 호홋, 나의 음식 솜씨가 좀 굉장하긴 하지. “이거 진짜 다 한거에요?” “진짜 다하지, 그럼 뻥치겠냐?” “집안에 라면하고 술 뿐이라 요리 못하는 줄 알았어요.” “귀찮아서 그런 거지..... 한 번 하면 잘해. 먹자.” 식탁에 앉아 찜과 찌개까지 내오자 식탁이 비좁아..... 참..... 먹기도 힘들 양이다. 그 짧은 사이 이 음식을 다했다는 것도 굉장하지만.... 이걸 먹을 생각을 했다는 것도 굉장하다. 어떻게 치운다지.... 으음..... 좀 과하긴 한데..... “먹자..... 먹어보자......” 스스로 만든 음식의 양에 놀란 내 얼굴에 권형이 놈이 실실거리며 젓가락을 든다. 저게..... 남은 지금 쓰레기 치울 걱정에 머리가 빠게지겠는데.... 젠장, 그냥 대강 시켜먹을 걸. 내가 왜 이런 무식한 짓을 한거지? “먹어요, 치우는 건 제가 할게요.” “진짜? 고맙다..... 나 치우는 건 무진장 싫어하거든.” 그래서 늘 친구들이 치우지. 역시 나는 허드렛일 할 팔자는 아니라니까. 거의 한 시간 여에 걸쳐 밥을 먹고 보니 배가 터질려고 한다. 원래 천천히 많이 먹기는 하는데 오늘은 그 천천히 많이에서 많이 벗어나 버렸다. “으음......” 거시렝서 담배 하나를 빼물고 설거지를 하는 권형이의 뒷모습을 보자 푸식거리며 웃음이 새어나왔다. 으음.... 동거는 질색이지만 이거 왠지 괜찮겠는 걸. 이제까지는 와서 귀찮게 하는 녀석들 뿐이었는데 저 놈은 아주 착실하니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아주 좋은 걸........ 그렇다고 내가 뭐 왕자병이나 공주병 걸려서 손에 물 묻히고 살 수는 없으니 하인을 원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잖아. 사실 이제까지 사귄 사람들에게는 내가 모두 하인 노릇을 했는데 말야. 사실 이 미모로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야? 참...... “흐음......” 목 안의 담배맛을 음미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차가운 손이 어깨에 닿았다. “뭘 그렇게 혼자 좋아해요?” “어.... 아니.... 이런 저런 생각에....” “설거지 다 했어요.” “응, 앉아.” 소파의 옆자리로 비켜나며 은근슬쩍 바로 옆 자리를 권하자 서서히 내려앉는다. 후훗, 가까우니 참 좋군...... 아이, 부끄러워라. “이틀 동안 뭐했어요?” “어, 친구들하고 놀았어.” 성준이 어머니 장례식에서 미친년 만나고 지랄을 한 후로 이틀을 빠졌으니 걱정될만도 하겠지. 사실 나도 이틀 동안 머리가 빠개져라 고민했다고, 이 놈이 이래뵈도 내 동생 아니겠어? 뭐, 사실 내가 걸려서 그런 거라기 보다는 이 녀석이 도망갈까 봐 먼저 뒷통수 치고 내빼기로 했던 거지만 이왕 뽀롱난 거 어쩔 수 없잖아? 내 인생이 뭔 언제 제대로 된 적이 있던가? 살인데 강간(?)에 공갈 협박에 안해본 게 없는 인생인데 근친상간 하나 포함된다고 누가 뭐라고야 하겠어? 흥, 내가 언제부터 착실하게 살았다구? 그래서 이 놈이 다시 달라붙었을 때 얼씨구나 하고 잡아버렸지. 그게 바로 오늘 오전의 이야기고 벌써 여기까지 발전한 거 아니겠어? 아무리 멋대로 산다지만 지나치게 빠른 전개에 멀미가 올라올 것 같지만 한 번 시작했으면 속전 속결이지.... 사실 바로 전에 내 머리 해머로 내리친 명세 놈도 거의 반강제로 사귄 거였으니까. 흐음....... 조금 찔리기는 하는군. “뭘 그렇게 중얼대요?” “........ 중얼대지 않았어? 생각할 게 있어서...... 흐음, 그러고 보니 너 집에 안가도 돼냐?” “...... 좀 있다 갈거에요.” 라면서 어깨로 팔을 둘러 안아오길래 가만히 기다리자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긴다. “왜?” “....... 아니에요...... 이대로 조금만 있을게요.” “있어라.... 누가 뭐라니?” TV의 만화 프로를 틀어놓고 멍하니 바라보자 어깨를 안고 있던 손이 머리로 올라가 자꾸만 흐트러 트린다. 그 리고 귀와 목가를 쓰다듬는 손의 느낌과 바로 피부에 닿는 숨결..... 이게..... 왜 분위기 잡고 지랄이야? “선생님한테서 좋은 향기 나요.” “샴푸 냄세인가?” 내가 쓰는 샴푸에서 좋은 향이 나던가? 원래 향 자체를 싫어해서 제일 약한 걸로 쓰는데..... “아니, 그런 거 말고..... 아기 향 같은 게 나요. 비누 냄세 같기도 하고 우유 냄세 같기도 한 거......” “그럼 비누 냄세네.”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좀 틀려요...... 굉장히 좋은 향기가 나요.” “내가 쓰는 비누 하나 줄까?” 자꾸 만져대는 손을 살짝 붙잡고 말하자 그냥 웃어버린다. 그 얼굴에 나도 얼껼에 따라 웃고 살며시 입술을 겹쳤다. 입술에 닿는 부드러운 살결과 바로 앞에서 풍기는 비누 향이 코를 간지럽힌다. 좋은 향이 나는 건 너잖아. 샤워 코롱 향이 좋은 건가? 어깨를 끌어안고 더욱 깊숙히 입을 맞추자 그에 응해온다. 흐음.... 고등학생을 사대로 사귀기로 한지 하루만에 갈 데까지 가는 건 조금 걸리지만 어쩌겠어? 뭐..... 원한다면 가드리지요. 서서히 목으로 팔을 돌려 간만에 해볼까.... 라고 생각을 했지만.... 흐음, 해본지가 하도 오래라..... 사실 내가 불능이거든. 그러니까 섹스는 원래 관심이 없고 안해도 상관은 없지만 하면 잘하지. 그게 놀던 가락이 있다보니...... 긴입맞춤을 하며 권형이가 상의 사이로 손을 집어넣어 넣고 허리를 쓰다듬는데 순간 녀석이 나를 퍼억 하니 밀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 잔뜩 준비하고 있던 중에 밀려져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자기도 당황했는지 시선을 피하더니 가방을 챙겨든다. “죄송해요..... 저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 그래라...... 뭐.......” “그럼 일찍 주무세요.” 라고 서둘러 인사를 꾸벅 하더니 도망치 듯 나가버린다. 뭐야..... 지금 저 녀석 뭐하는 거야? 가장 중요한 순간에 내팽게치다니..... 내가 하다가 짜증나서 몇 명 후리친 적은 있어도 날 거절한 남자는 없었는데..... 내가 너무 늙었나? 머리를 긁적이며 제대로 자세를 고치고 앉아.... 고민을 했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 딴 거 못한다고 내가 손해볼 것도 없고. 뭐, 니 맘대로 해라. “흐음......” 고개를 갸웃하고 커피라도 마실까 해서 주방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권형이인가? “뭐 놓고 갔냐?” 주방에서 나오면서 그렇게 묻자 권형이 놈이 당장에 달려와 꽉 끌어안는다. 으겍, 방금 전에 집어던지고 갈 때는 언제고 또 와서 난리야? 숨막혀!! “임마, 놔라...... 이 늙은 선생 호흡 곤란으로 죽게 하고 싶냐?” “미안해요...... 자꾸 생각이 나서.....” 뭐가? 뭘 생각하길래 미안한대? “놓고 말해, 임마. 숨막혀.” “........ 미안해요..... 엄마 일. 상처 많이 받았죠?” “그딴 거 상관 안해. 난 금방 잊어버리고 괜찮아져.” 그래서 돌아온 건가? 착한 놈 같으니라구....... 나 같으면 고민하든 말든 내치고 그냥 튀었다. “...... 조금 시간 좀 더줘요. 잠 잘자구요.....”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어른스럽게 말한 녀석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로 인사를 하고 다시 가방을 챙겨든다. “내가 애냐?” “애잖아요. 아직도 어린애 같아요. 문 단속 잘하고 빨리 자요.” “....... 늙은이같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내뱉자 녀석이 피식 웃고는 마지막으로 이마에 입을 맞춘다. 씨발.... 내가 진짜 애긴 줄 아나? “빨리 가, 임마!” 왠지 화가 나서 등을 떠밀자 느린 걸음으로 문을 나선다. 그 모습에..... 잠시 생각하다 열쇠를 들고 따라나갔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요. 들어가서 쉬어요.” “아니, 산책할래. 같이 나가자.” 나보다 조금 더 큰 녀석의 팔짱을 끼고 걸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함께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타고 권형이의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내리기 전에 장난스러운 키스를 한 번 더 나누고 들어가는 걸 다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모처럼 맘 편히 잠들 수 있었다. ▷ track 02. 즐거운 기분에 차를 몰고 학교에 도착해 천천히 교무실로 향해 가는데 운동장을 뛰고 있는 농구부가 보였다.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네..... 그 모습에 생긋 웃고 잠시 멈춰 서서 운동장을 바라보자 열심히 달리던 녀석들도 나를 보고는 수군덕거린다. 후훗, 얼마든지 떠들어라..... 특히 2학년들은 이번 기말 고사에서 피 볼 각오하고.....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 권형이를 보기 위해 일부러 스탠드까지 가 털썩 주저앉았다. 내가 말이지...... 상당히 단순하거든. 그래서 좋으면 눈에 뵈는 게 없어.... 물론 덕분에 사고도 더 많이 치기는 하지만 말야. 즐거운 기분에 더욱 찢어지는 입을 겨우 다물게 하고 담배를 하나 꺼내 물고 앉아 운동장을 여유 있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또 뭘 하고 노나? 후훗, 좋아....... 즐거운 기분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박자까지 맞추며 그 쪽을 바라보는데..... 문득 뒤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한기라기 보다는..... 사실은 열기에 가까운 후광의 느낌이랄까? 한 마디로.... 대머리의 기운이었다. “장선생......” 착 가라앉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기름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얼굴.... 아니 아니라 배가 보였다. 씹탱, 얼마나 나왔으면 얼굴이 아니라 배만 보이냐? 그래도 아침 햇살에 비쳐지는 저 후광은 보이는군. 왁스로 머리 닦고 오시나? “네, 교감선생님.” 이라며 싱긋거리며 예의상의 미소로 다하자 흠흠거리기만 한다. 씨발, 배 좀 치워! 내가 딴 건 다 봐줘도 - 사실 대머리도 용서 못하지만 - 배 나온 것만큼은 절대 NO라구!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장선생?” “아아..... 네, 그러죠.” 씹탱구리.... 또 뭘 시킬려구? 아님, 갈굴려구? 내가 동네 똥개냐? 툭하면 불러다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게? 장인하 성질 많이 죽었지? 학교 다닐 때 저 대머리 나한테 말도 못붙였는데...... 찝찝한 기분에 가방을 들고 일어서자 저 멀리 달리던 권형이가 이 쪽을 보고 잠시 멈춰 선다. 그 모습에 또 헤벨레해지려는 얼굴을 겨우 닫고 그냥 상쾌하게 미소 한 방 날린 후 교감을 따라 교감실로 향했다. “장선생...... 요즘 돌고 있는 소문..... 들었겠죠?” 라며 10분만에 겨우 본론을 꺼낸 대머리를 보고는 이마에 솟으려는 핏대를 이성으로 누르고 생긋 웃어 답했다. “소문이라뇨? 전 왕따라 잘 모르겠는데요? 선생님들이 절 이지메하시더라구요?” 사실...... 내가 전부를 따시키고 있는 거기는 하지만..... “흐음.... 그런 다른 얘기고...... 얼마 전 차성준 선생님 댁 문상에서 있었던 일말인데요...... 유권형군과 형제시라구요.” 그 말 한 마디 하는 게 뭐 그리 어렵다고 그리 땀을 흘리시나? 그리고 막말로 내가 그 놈 담임도 아니고 그저 그 놈이 있는 농구부 고문인데 그게 뭐? “벌써 소문이 돌았네요. 선생님들이 의외로 뒷다마에 강하시나 봐요?” 라며 또 한 번 샐쭉 웃자 곤란한 듯 또 헛기침을 한다. 나이 들어 주책이야, 그러게 왜 하기 힘든 얘길 꺼내? 망할...... “흐음....... 사실..... 그 동안 장선생이 학교에서 일으킨 사건들.... 말인데요. 이번에 교무 회의에서 거론될 것 같습니다.” “제가 권형이 형인 거랑 그거랑 무슨 상관인데요?” 삐딱하니 앉아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말하자 잔뜩 쫄아버린다. 그러게....... 내 눈빛 하나면 쪼는 사람이 왜 내 신경을 들여? “상관은 없지만..... 사실을 확인해두고 싶어서요. 장선생.....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장선생 형님의 보호로 막을 수 있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학부모 항의도 있고 아무래도 이번에는 형식상으로라도 교무회의를 소집해야하니까요.......” 잔뜩 꼬아줄 셈으로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열중해서 듣고 있는데 뭔가 무서운 말들이 흘러나왔다. 뭐..... 형? 형이 뭐가 어째? 나한테 형이란 게 있었던가? “자, 잠깐만요...... 지금 형님이라구요?” “아........” 순간 퍼득거리는 것들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씨발...... 어쩐지 그 지랄을 하고도 학교에서 시말서 제출하라는 말도 없더라니. 내가 학교 안에서 직접 문제를 일으킨 건 아니지만 그 동안 사방 팔방 난리를 친 걸 생각하면 다른 학교로 이전 명령이 떨어져도 시원치 않은 걸 아무 징계도 없다 좋아했더니만...... 젠장...... 장지원.... 개새끼! “장지원인가요?” “.......... 장지원 회장님께서 우리 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신 거 모르셨나요?” 알 리가 없잖앗!!! 난 그 딴 일에는 전혀 관심 없었다구! 빌어먹을, 언제 취임한 거야? 그리고 장지경, 그 새끼는 왜 연락도 안한거야? 그런 일 있으면 알아서 알렸어야지. 어쩐지....... 쉽게 발령이 났다 했어. 이 놈의 학교가 그래뵈도 레벨이 꽤 높은데 내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자리 하나 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거 눈치 했어야 했는데....... “언제 취임했나요?” “작년...... 겨울에요. 이 쪽 재단을 이수했는데 장선생은 몰랐었나 보군요. 그러니..... 형님께 사정을 잘 설명드려.....” 미친 새끼..... 씨발, 어쩐지...... 재수가 없더라니...... “씨발..... 개새끼! 죽여버릴꺼야!!” “예?!” 대머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소파를 박차고 일어나 가방을 들고 인사도 없이 교감실을 빠져나왔다. 그 개새끼.... 아직도 내 앞길을 막고 있단 말야. 그 새끼 이름만 들어도 치 떨리는데... 하, 이제 와서 마음 좋은 척 나를 감싸고 돌아? 웃기네, 막말로 니가 내 형이냐? 아니면 이제 와서 죄책감이라도 느껴지는 거야? 니가 그렇게 권력 휘두르면서 도와주지 않아도 난 내 세계에서 살아남는데 문제없어. 이제 와서 잘난 척 하지 말라구, 장지원!! 콰앙--- 열이 받아 교실로 올라가지 않고 상담실에 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그러고 보니.... 장지원도 장지원이지만.... 망할 놈의 대머리 같으니라구.... 사람을 그런 식으로 은근히 갈군단 말야. 게다가 뭐? 교무회의? 흥! 어디 교무회의든 교실 회의든 뭐든 소집해봐라...... 내가 그냥 넘어가나.... 날 너무 만만히 보시는 거 같은데. 내가 아무리 마음잡고 착실히 살기로 마음먹었다 해도 핫바지로 보면 곤란하지. 내가 고등학교 때 얼마나 대단한 악명을 떨치고 다녔었는지 까먹으신 모양인데 다시 떠오르게 해드리지.... 후훗..... 우리 학교 근방 5Km 내에서는 우리 학교 교복만 봐도 도망 다녔던 걸 기억에서 지운 모양이지? 훗..... 미안하지만 사람 본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구. 멍하니 쳐박혀보니 있다 문득 노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반짝 반짝 대머리~ 느끼하게 빛나네~ 머리 뒤는 빛나고~ 기름기는 흐르고~ 반짝 반짝 대머리~ 세 가닥도 뽑히네~” 훗, 확실히 뽑아주지. 감히 나를 건들여? 게다가..... 장지원 개새끼. 어쩐지 처음 이 학교 올 때도 명문고에 너무 쉽게 발령이 났다 싶었더니 내가 돈 쓴 거 말고도 그 놈이 뒤에서 뭔가를 더 했던 거였다. 씨발.... 명세랑 헤어졌을 때 알았으면 가서 뒤집어 엎었을 텐데, 그나마 권형이 봐서 참아준다. “....... 그래도..... 내 존재감은 부각을 시켜야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당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메모리 4번을 눌렀다. 이럴 때는 다 하는 수가 있지.... 후훗.... 좀 건전하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세상이 나를 가만 두질 않는구만. <뭔 일이냐........> 전화를 받자마자 당장에 팍 쉰 목소리로 답해오는 세하의 목소리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잤냐?” <응...... 무슨 일이야?> “좋은 사건 하나 만들어볼까.... 해서......” <사건?> 미심쩍은 목소리로 답하는 세하에게 음산한 웃음을 날려주었다. “후후후훗....... 우리 학교 대머리 알지? 우리 고등학교 때 윤리 교사.” <아, 알아...... 요즘 세 가닥 남았다며?> “응, 이번에 그 세 가닥도 모조리 뽑아버려야겠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못들을 껄 들은 듯한 세하의 반응에 다시 한 번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훗, 날 갈구잖아. 잘 빠진 여자 애, 그것도 될 수 있으면 어린애 하나로 골라서 촬영팀하고 준비시켜.” <...... 무슨 소리야?> “우리나라 공직자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게 뭔지 알아?” <..... 스캔들.... 특히 섹스 스캔들... 이겠지?> “Bingo! 나이는 대강 14- 15살 정도가 좋겠다. 싸구려 호텔방으로 잡고 이번 주말 정도에 너희 가게 룸 예약해 놔. 물론!! 약도 같이!” <..... 악랄한 놈...... 뭐라고 갈궜길래 그래?> “나중에 자세히 말해줄게. 대머리가 뒷통수를 치네. 망할...... 이래서 나이 들면 죽어야 된다니까.” <니가 나이 들고 말해봐라.> “난 괜찮아!” <어째서?> “예쁘잖아.” <........ 너는....... 어떻게 그런 말도 안되는 말을 당연한 듯 할 수가 있냐?> “흥, 돈 많고 예쁘기까지 한데 내가 뭐가 어때서? 애들 준비시켜.” <그래, 알았다.......... 끊는다.> “그래..... 가만 안둘꺼라구......” <............ 알아들었어..... 독한 놈.......> 전화기를 접고 다시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시선을 돌려 창문 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오전 수업 중이라 모두 수업에 들어간 듯 해 나도 포기하고 교실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뭐 3학년 교실 어슬렁거리면 운 좋게 볼 수도 있겠지. 흐음..... 그 놈 네 영어 담당이 누구더라.... 그 인간 전근보내고 내가 그 반만 맡으면 안될까? 흐음, 생각해볼만 하네........ 계획은... 서서히 짜지..... 후훗........ 일단 더러운 기분은 접고 교실에 들렸다 다음 수업에 들어갔다. 다음 수업이래야 봤자, 우리 반이다. 곧 기말 고사도 가까워져 오는데 이번에 시험 문제도 내야 돼고...... 그 전에..... 으윽...... 망할 놈의 교무회의가 걸리는군........ 으드득 이를 갈며 책을 펴자 책도 눈에 안들어온다. 씨발놈들이 왜 이렇게 꼬부랑거리는 문자를 쓴대? 하긴 일어보다는 영어가 낫지........ 난 일어 처음 봤을 때 상형문잔 줄 알았으니까. 반 아이들도 내 심기가 안좋은 걸 눈치 깠는지 다들 입 다물고 조용히 명상하고 있다. 사실.... 다 퍼져 자고 있다. 저것들 자는 걸 보니 또 수업할 맘 안나네...... “졸립냐?” “네.......” 다들 웅성거리는 모습에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책을 덮었다. “자, 지금부터 다들 명상에 들어간다. 절․대 자는 게 아니다! 다들 책 덮고 허리 꼿꼿히 펴고 앉아서 깊이 생각에 잠긴다. 꿈틀하면...... 죽는다. 자, 실시!”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우르르 책을 덮고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명상 - 절대 자는 게 아니다. - 을 시작한다. 망할 자식들...... 꼭 이럴 때만 말을 잘 듣는단 말야. 다른 때도 지금 같으면 얼마나 좋아? “츳!” 낮게 혀를 차고 나 역시 책상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았다. 사실......... 내가 말이지..... 진짜 이렇게 사는 건 별로 내키지가 않거든. 그치만 어쩌겠어? 사회가 이 모양인 걸..... 그나저나 장지원 그 새끼는 왜 이제 와서 설쳐? 아아.... 머리 아파...... 그 새끼 생각하니 옵션으로 떠오르는 누구 덕에....... 망할 자식..... 장지환.......... 죽어서도 사람 골치 아프게 하는군....... 하필이면 그 멀고 지저분한 바닷가에서 죽냐? 물론 그 놈이 살던 곳에 가본 건 아니지만 이야기는 들었었고..... 나, 장례식도 가지 않았으니까..... 미친 자식.... 맘 잡고 살기 시작하니 죽냐? 하긴 맘 잡고 살기 시작했다는 것도 개뻥이지, 그 바닷가에서 고기잡이 다녔다니. 집안 재산 두고 병신 같이 구냐? 나 같으면 그 돈 들고 멀리 나가 떵떵거리면서 살았을 꺼다. 같이 살던 놈도 있다는데 그 놈만 불쌍하지. 얘길 들어보니 어린 놈 같던데....... 바다에 살던.... 벙어리 소년이라.... 흥, 소설을 쓰는군. “병신.......” 그렇게 죽을 꺼 뭣 하러 아둥바둥 살았냐? 씨발, 자살도 아니라 사고사로 그렇게 갈꺼면서..... 왜 그렇게 나를 괴롭혔어. 나만 더 악에 바치게 말야. 나 그렇게 괴롭혔으면 완전 미치는 꼴 볼 때까지는 죽지 말았어야지. 나 행복해지니 죽냐...... 병신새끼.... 덜 떨어진 새끼..... 팔푼이 같은 놈...... 초조한 마음에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손톱을 물어뜯었다. 병신 같은 자식 때문에... 왜 내가 이러는 거야? 그 잘난 새끼 죽은 게 뭐 대수라구..... “병신......” 끝까지 살지...... 살았으면...... 살아서..... 훗, 살았으면 니가 어쩌게? 어차피 끝난 관계고 이젠 상관도 없는 사람이잖아. 니가 끊었잖아. 그 놈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홧병으로 죽을 것 같아서.... 니가 죽일려고 했잖아. 죽고 나니 아쉽냐? 진짜 병신은 너다, 장인하.... 미친 자식..... 죽은 놈은 묻어, 그게 정상이야.... 그렇게 사는 거야. 그래, 그 놈이 죽은 게 아쉬운 건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해서야..... 그렇잖아...... 그래야 돼.... 그게 아니면.... 넌 접시 물에 코 박고 뒤지는 게 나아, 장인하. 독하게 산 세월 다 날릴래? 막판에 그렇게 매달리던 놈 내치던 게 넌데....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그리워 하냐? 입 안에 있던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다 헤어져 피가 나올 것 같은 손톱이 눈에 들어온다. 그 고통에 두 손을 마주 잡고 책상에 기대어 고개를 숙여버렸다. 손이 너무 아파서...... 갈라진 손톱 사이에서 조금씩 배어 나오는 피 때문에..... 너무 아파져서...... 그 새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흐를 것 같아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언젠가.... 그 자식이 말한 적 있지. 살려면..... 살고 싶으면 아무 것도 듣지 말고 아무도 보지말고 믿지 말라구. 그냥 그렇게 혼자 박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살아가라구. 그럼... 아프지 않겠지...... 그런데 넌 왜 죽은 거야, 그렇게 잘 알면서...... 장지환...... 남에게는 그럴 듯 하게 말도 잘하면서 자기는 그러지 못한 거냐? 덜 떨어진 자식. “선생님..... 저 화.........” 갑자기 어깨를 툭 치는 힘과 작은 목소리에 눈을 뜨자 뿌옇게 흐려진 눈앞에 돼지의 얼굴이 보였다. “어..... 왜?” 반사적으로 답을 해주자 뭔가 차가운 것이 얼굴을 타고 주르륵 흘러간다. “어? 어어......” 생각지도 못한 감각에 손을 들어 뺨을 닦아내자 뭔가 차가운 것이 흘러있었다.......... 하, 이게 뭐야? “서... 선생님....!” 소리지르는 녀석의 반응에 놀라서 내 손에 묻은 액체를 보는 사이 경진이 놈이 후다다닥 교실 저편으로 가더니 뭔가를 들고 쿵쿵거리며 뛰어온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고 쳐다보자 갑자기 이상한 천 쪼가리를 들고 내 얼굴을 박박 닦아댄다. “욱, 뭐..... 뭐야?” 사정없이 얼굴을 문질러대는 그 느낌에 퍼억-- 하니 밀치고 보자... 씨발.... 이거 칠판 걸레잖아! “임마, 걸레로 얼굴을 닦으면 어떻게 해?” 화가 나 녀석의 머리를 내리치자 자던 녀석들이 하나 둘 씩 꾸물 꾸물 기어 일어난다. 씨발, 쳐자! 자라도 난리야? “...... 놀랐어요..... 왜 울어요.....” 라면서.... 자기가 후두둑 눈물을 흘린다. 으아악!! 너 왜 그러니? 울지 마!! “니가 왜 울어, 임마!! 운 게 아니라 졸려서 하품 한 거야!!!” 녀석의 멱살을 쥐고 소리를 빼액 지르자 잠깐 눈물을 멈추고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앞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자기 목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보고는 다시 울음을 터뜨린다. “으악!! 그만 울어, 너 못그쳐!! 빨리 뚝 해!!!!” “손..... 손톱..... 흐윽......” 거의 경기를 일으킬 듯 통곡을 하는 돼지의 소리에 아이들이 놀라서 발딱 발딱 일어선다. 뭐야? 이 상황은..... 꼭 내가 이 놈 괴롭힌 거 같잖아. 왜 이렇게 된 거야? “괜찮아, 안 아파!! 피 좀 난 거 같고 죽지 않아!!” “피..... 피...... 손톱 깨졌어!!” “으아아아악!!!!” 환장하겠네...... 손톱 좀 깨진 것 같고 왜 난리냐구? 이게 니 손톱이냐, 내 손톱이지? “경진아, 그만해라. 선생님 빨리 양호실 가요.” 어느 새 달려와 경진이를 떼어낸 태민이가 내 손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린다. “손.... 왜 그랬어요? 아프게......” 손톱이 깨진 손의 손목을 잡아들고 경진이 어깨를 툭 치더니 나를 끌고 무턱대고 나가는 태민이 놈 덕분에.... 교실과 문을 번갈아 보며 멍청하게 어어.... 만 반복했다. “어.... 다들... 자라..... 자고 있어.....” “빨리 나와요......” 손을 흔들어 애들 정리를 하는데 태민이 놈이 개무시를 하고 끌고나간다. 이 놈이.... 선생님을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차마 내치지는 못하고 끌고 가면 끌고 가는 대로 가기는 했지만.... 참.... 별 짓을 다해보네. 내가 왜 그랬다지? “왜 그랬어요?” 양호 선생이 수업을 들어갔는지 비어있는 양호실에 앉아 소독약과 거즈를 꺼내 친절히 치료까지 해주는 건 좋은데..... 왜 그렇게 잔소리가 많니, 태민아? 구둘장 늙은이처럼...... 중얼중얼...... “바보 같이.... 어디 부딪친 것도 아니고 자기가 그렇게 세게 손톱을 물어뜯으면 어떻게 해요? 아프지도 않았어요?” “안아파. 나 아픈 거 별로 몰라.” “그렇다고 피가 나도록 물어뜯으면 어떻게 해요? 바보에요? 애도 아니고...... 안에 살이 찢어졌잖아요...... 병원 가야될지도 몰라요.” “괜찮아. 안죽으면 돼.” 뚱하니 내뱉고 잡혀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주머니에서 담배를 찾자 태민이 놈이 재빠르게 그 쪽 손까지 잡아챈다. “왜? 임마!!” “담배 피지 말아요. 여기 양호실이에요.” “..... 꼰대같이..... 까탈스럽게 굴긴......” 잡혀있는 손목이 얼얼해서 툭 내치고 다시 자세를 고치자 그제야 다친 손톱 부위에 거즈를 감는다. 그런데..... 이거 이제야 아프잖아. 쓰라려..... 방금 전까지는 다친 것도 몰랐는데. 내가 단순해서 아프다면 진짜 아픈 줄 안단 말야. “아파......” “당연히 아프죠. 물 닿지 않게 하고 꼭 병원 가야돼요.” “..........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지말고 당장에 가요.” “애늙은이 같이......” “선생님 보면 누구나 그렇게 되는 거 알아요? 대체 왜 그렇게 신경을 안써요? 자기 몸 다치는 것도 모르고..... 선생님이 뭐 자해 공갈단이라도 되는 줄 아세요?” “옛날에 취미였지.......” 그걸로 잡아먹은 놈들 꽤 돼지....... 어렸을 때 죽어라 달라붙는 놈들 귀찮으면 그 앞에서 칼 들고 설치기도 했으니까..... 패고 협박해서 안되면 다음은..... 공갈이지..... 뭐.... 웃으면서 칼로 긁는데 안 떨어지고 베기는 놈들이 정상이냐? “그런 거 취미로 가져서 뭐 하게요? 자기를 좀 아껴요. 신경질만 내지 말구요.” “이 자식이 선생을 보고 그게 뭔 소리야?” 중얼 중얼거리는 녀석이 왠지 얄밉고도 귀여워서 머리를 툭하니 내리치자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멈춰 버린다. “..... 왜? 또 뭔 소리를 하려고?” 그 반응에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벌떡 일어선다. “저..... 먼저 갈게요.” “왜? 나랑 수업 빠지고 놀지?” “갈래요......” 고개를 푹 숙이고 절대로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하는 녀석의 태도에 왠지 화가 나서 나도 일어나 태민이 놈 앞에 섰다. “왜? 강태민! 뭐 잘못 먹었냐? 답지 않게 수업 잘 들어가는 척은.....” 억지로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툭 치자 순식간에 몸을 돌려 나를 안아오는 단단한 팔의 느낌에 놀라버렸다. 왜 이래, 이 자식? “....... 아프지 말아요. 그렇지 않아도 불쌍한 사람이.... 왜 아플려고 해요?” “..... 무슨 소리야?” 숨이 막힐 정도로 나를 끌어안고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기가 막혀 몸을 빼내려했지만 택도 없다. 이 놈 왜 이렇게 무식하게 힘만 센 거야? “태민아........” “............” 조용하게 부르는 자기의 이름도 무시한 채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 등을 감싸안는다. 어깨도 가슴도 딱딱하지만 묘하게 부드러운 뭔가가 느껴져 그대로 멈춰 그 녀석의 어깨로 팔을 돌리고 머리를 손으로 꽉 끌어안자 더욱 강하게 안아온다. 뺨을 간지럽히는 짧은 머리카락과 등을 감싸안은 커다란 손의 느낌에..... 이제 이 놈도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따지고 보면 나 이 놈 다 크고 나서 만난 거 아닌가? “..... 어린놈이..... 말이야......” 피식 웃으며 목을 감싸안자 완전 폭- 하니 안기는 꼴이 되어버렸다. 니 갑빠 넓어 좋겠다, 태민아...... 니 미래가 기대되는구나. 애인이 열라 좋아하겠다. “아프지 말고 밥 잘 먹어요..... 왜 자기 몸을 아프게 해요?” “내 맘이다.” “장난하지 말아요. 그러다.... 아프면 어쩔려고 그래요? 혼자 살면서......” “그래도 챙겨줄 친구들은 많아. 니네도 나 챙겨줄 거잖아.” 으음..... 안긴 느낌도 체온도 다 좋은데.... 말이지..... 어깨가 왜 이렇게 딱딱하냐? 턱이 아프잖아..... “태민아.... 이것도 저것도 다 좋은데..... 아프거든. 좀 놔줄래?” 살며시 허리에서 손을 떼려하는데 이 놈의 손이 떨어질 생각은 안하고 슬금슬금 위로 기어올라와 목가에 닿아 얇은 남방의 옷깃을 잡아끌고....... 곧 부드럽고 따뜻한 무언가가 목가에 닿았다. “....... 응!?” 그 묘한 느낌과 적나라한 부위에 서둘러 어깨를 밀쳐내려 하지만 허리와 등을 감싼 팔은 집요하게 나를 잡아끌고 이번엔 목가에 이빨이 박혀온다. “...... 태...... 강태민!!! 욱.......” 더욱 세게 허리를 끌어안는 팔의 힘에 숨도 쉬기가 힘들어져 어깨에 매달리자 단숨에 나를 잡아먹을 듯 어깨를 물어뜯어서.... .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버렸다. 이 녀석을 떼어내야 하는데 팔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고 선정적인 행위에 더 매달리게 되어버린다. 목을 물어뜯고 그대로 밑으로 입술을 내려 쇄골을 핥고 남방의 단추를 풀어내리자 완전 패닉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자식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으아아악!!!!” 파다닥거리며 가슴을 밀치는데...... 젠장 꿈쩍도 않는다. 젠장할... 이 자식 이렇게 힘이 셌던가? “떨어져, 강태민!! 맞고 떨어질래?” “.........” 아무리 소리를 꽥 꽥 질러대도 무시하고 제 할 일만 하려던 놈이라 어떻게든 밟아야된다는 간절한 생각으로 주먹을 꽉 쥐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이대로 한방!!! “후회하지 마라....... 강태민......” 그래, 제자 하나 인간 만들려고 하는데 주먹 한 방이야.... 뭐, 사랑의 매다, 태민아.... 맞고 떨어져라..... 그러게 누가 덤비래? 자아, 간다!!! 큰맘 먹고 한 대 치려고 자세를 잡는 순간 녀석이 갑자기 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뒤로 슬쩍 물러나며 팔에 힘을 푼다. 그 덕에... 잔뜩 힘 주고 자세를 잡고 있던 꼴에서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서..... 바닥에.... 슬라이딩!! 콰당--- “으악!!!” “....... 괜찮으세요?” 씹탱아........ 너람 괜찮겠냐? “너...... 죽었어, 강태민!!!” “놔달래서 놔줬잖아요..... 그러게 왜 사람을 팰려고 해요?” “씨발아, 니가 안고 안놓니까 그렇지!” “선생님 살 좀 쪄야겠네요. 너무 말랐어요.” 라면서 손을 내미는데 병 주고 약주냐? 애초에 내가 팰려고 한 이유가 뭔데? 니가 꺼리를 제공했잖아, 꺼리를!! “내가 말랐던 말던 니가 뭔 상관이야? 나 안을 놈은 괜찮다는데!!” “......... 일어나세요.” 열은 받지만 뻗어오는 손을 뿌리치기는 싫어서 그대로 잡고 일어섰다. 젠장할, 선생으로서의 위엄 같은 거 애초에 쓰레기통에 버린다고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무시당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아? 이래 뵈도 교원 자격증이 있다고!! “손 괜찮아요?” “괜찮은 거 같아. 너 때문에 놀라서 아픈 것도 잊었잖아.” “그럼 다행이네요. 꼭 병원 가야돼요.” 라면서 방긋 웃기에 왠지 혼자 따지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머리를 긁적이고 어깨를 툭 내리치자 방긋 웃으며 먼저 양호실을 나선다. “아, 나 자고 갈테니까 너 먼저 들어가라. 대머리 뜨면 선생님 아프다고 하고.” “불량선생님이잖아요, 정말.....” “불량 학생들이 판치는데 불량 선생 한 둘이야, 뭐....” “왜 선생님들 인성검사 안하는 거에요?” “벨 꼴리면 너도 선생하라니까!” 양호실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서 소리치자 피식 웃은 태민이가 양호실 문을 열었고 그 앞에는 당연한 듯 권형이와 경진이가 서있었다. 그래..... 아주 잘 어울리게..... 마치 복도의 장식물처럼...... 후훗...... “으악!!” 귀신같은 권형이의 형상에 놀라 벌떡 일어나자 태민이는 아무 말 없이 권형이를 스쳐가고 권형이도 아무 말 없이 그 뒤를 따라 떠난다. 왜...... 왜...... 왜 안도와주는 거야, 강태민!!! 너만 빠져나가면 어쩌라구? 그리고 넌 왜 그냥 가, 유권형!! “선생님..... 너무 야했어요......” 둘을 돌아보며 친절하게 문을 닫는 폭식돼지 정경진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인 즉..... 저 놈은 다 봤다는 거지.... “다 봤냐?” “네.” “주장.....도?” “네.” “주장은 여기 왜 왔냐고 묻는다면?” “걱정돼서 제가 불렀어요.” “...... 너무 고맙다...... 고마워서 머리통이라도 한 대 내리쳐주고 싶구나. 정경진.” “..... 제 잘못 아니에요. 그러게 누가 이런데서 무드 잡으래요?” “닥쳐라, 정경진! 제대로 욕 먹고 쳐박히기 싫으면 알아서 찌그러져라.” 자리를 벌떡 차고 일어나 재빨리 녀석들이 간 쪽으로 달려가자 뒤에서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치는 경진이 놈이 신경쓰였지만...... 너는 나중에 두고 보자, 정경진..... 후훗, 날 물 먹이려 하다니....... 아니, 먹이면서 즐기다니 가당키나 한 일이냐...... 후...... 저 놈들 어떻게 ..... 타이밍도 죽이지. 앞서가는 태민이와 묵묵히 따라가는 권형이의 뒷모습에 서둘러 달려갔지만 두 녀석이.... 교실로 갈 생각은 안하고 왜 옥상으로 가냔 말이다!! 이것들아, 사고치면 늬들 다 죽엇! 수업 중인 반에 들키지 않게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경보로 다다다다 걸어 뒤를 따르자 어느 덧 계단을 지나 옥상에 닿아있었다. 덜컹-- 펜트 하우스 문을 열고 조심스레 옥상으로 나가니 옥상은 황야의 무법자 음악이라도 나오는 게 어울릴 법 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서로 마주 서서 노려보는 두 놈과 멀리서 문을 잡고 서있는 나는 꼭 두 남자 사이에 낀 비련의 여주인공 같은 분위기였지만 실상은...... 뜨거운 햇살과 조급한 걸음에 지쳐 헥헥거리고 있었다는 게 좀 깨지만..... “..... 강태민..... 유권형.....” 이라고 실상은 소리라도 빽 지르고 싶었지만..... 실제 소리는 모기 소리만하게 흘러나간다. 내가 찔리는 게 있어서 말이지...... 거의 기대 듯이 문가에 서서 숨을 몰아 쉬며 서로 뚫어져라 노려보는 두 녀석을 보자니.... 참 묘한 기분이었다. 내 친구들하고 애인들이 싸운 적은 없었는데..... 반대로 너무 좋아져서 내가 채인 적은 있지만. 뭐, 그건 옛날 얘기고..... “포기해라.......” “싫어.” 낮게 나간 권형이의 말에 눈을 깔고 답하는 태민이.... 뭘 포기하고 뭐가 싫다는 거냐? “형은 형제잖아. 그거 불법이야.” 씨발, 이게 불법 어쩌고 따질 일이냐? 그렇게 따지면 너랑 나도 불법이야!! 너 내 제자잖아. “그런 걸 따지는 게 아니잖아. 포기해라, 태민아.” “그럼 형도 포기해.” 으악, 그게 무슨 땡깡이야? 니가 포기하면 돼지, 왜 그 놈더러 포기해라? 이게 얼마나 힘들었는데!! 저 새끼가....... 강태민 잘 나가고 있는 내 연애 행각을 방해하지 말아라!! “니가 그래봐야 소용없어.” “소용없으니 발악이라도 할래.” “너 지혁이 있잖아. 왜 그러는 거야?” “그 자식따위 알게 뭐야?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형에게 가는 거지? 이번만은 나도 포기 못해.” “강태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사정이 있었지. 거 참 복잡한 사이란 말야, 저 놈들...... 으음, 그나저나 말려야 겠지? 하지만 어떻게? 문제의 당사자인 내가 나서서 「싸우지 마!!」 하고 눈물이라도 흘리며 바닥에 쓰러질까? 우욱, 씨발 속 쏠려!!! 살다 살다 별 무서운 생각을 다해 보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차라리 가서 두 놈 다 죽여버리고 말지.... 아웃, 미식거려. “나 선생님 진짜 좋아해.” “좋아하는 정도에서 멈춰라, 태민아.” “사랑한다구!!” 어머, 그렇게 쪽 팔리게 큰 소리를 치시면 부끄러워서 벽돌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어지잖아~ 아이, 쪽팔려라. 운도 더럽게 없지, 붙으랄 땐 하나도 없더니만 하나 붙으니 줄줄이 비엔나로 엉겨오냐? 하나 씩 오란 말이다, 하나씩!! 크윽, 태민이 놈 아까워서 피눈물나네..... 진짜..... “그만두라고 했잖아. 지금 나랑 사귀고 있어, 너는 필요없어!” 라고 크게 나간 권형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했지만..... 그 순간 태민이 놈의 눈이 크게 떠지고 잠시 후에는 울상이 되어버린다. 어어..... 가슴이.... 우욱!! “뭐해요? 여기서!” “으악!!!” 갑자기 나타나 그 덩치로 나를 팅-- 하니 튕겨내는 정경진 덕에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씨발...... 또 엎어졌어..... “배치기 하지마!! 정경진! 니 힘이 보통 힘인 줄 아냐?” “..... 그러게 누가 마르래요?” “마른 것도 죄냐? 연약한 사람은 먼저 보호해 줘야지.” “연약하다는 건 마른 사람에게 쓰는 게 아니잖아요. 말라도 깡다구 센 사람은 연약한 거 아녜요.” 나를 내려다보며 기분 나쁘다는 듯 내뱉는 경진이의 말에 열받아 발딱 일어서자 손바닥이 쓰려왔다. 엎어지면서 까진 것 같아. 어떻게 몸에 상처 없는 날이 없냐.... 제기랄..... “츳!” 찝찝한 기분에 바닥에 침을 뱉고 손을 들어 상처 부위를 확인했다. 다쳤으니 치료를...... “어어..... 으아아악!!! 피다!!!!” 앞으로 엎어지면서 손을 바닥으로 짚은 덕에 태민이 놈이 감아놓은 손톱에서 다시 피가 흘러내리는 걸 보자 아까보다 더 아파져 버렸다. 그리고..... 나를 민 장본인인 경진이 역시 내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더니 경기를 일으킨다. “시끄러워, 자식아!! 니가 밀어서 다쳤잖아!!” “피, 피.... 피.... 피!!!!” “나도 핀 거 알아!!” 아까보다 더 심하게 줄줄줄 흐르는 피를 보고 기절하려는 경진이를 다치지 않은 손으로 받치고 다친 손을 하늘로 들어올려.... 아주 멋진 동작이 되어버렸다. 씨발, 탱고라도 추랴! “무거워!! 돼지야!!!” 으윽, 팔이 떨어질 것 같아. 이 자식 왜 이렇게 무거운 거야? “괜찮아요?” “경진아!!!” 이 쪽 상황에 놀라 당장에 달려온 두 녀석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짓는 건 나중의 일이고 팔 떨어지겠다, 좀 받아라! “이 쪽 손 놓고 그 쪽 손 내려요. 피나잖아요.” 경진이를 받아들고 소리치는 태민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팔에 힘을 빼자 경진이 놈이 바닥에 철퍼덕 쓰러진다. 씨발, 받으라고 했잖앗!! “그것도 못받냐?” “아씨, 이 자식 무겁단 말예요!” 경진이를 바닥에서 일으키며 소리지르는 태민이 옆에서 권형이는 내 팔을 잡고 끌고 가기 시작한다. “저기...... 경진이 양호실......” “선생님!!!” 애타게 나를 부르는 태민이 놈은 경진이 무게에 눌려 그 이상 움직이질 못했고 나는 권형이에게 끌려 옥상을 떠나야만 했다. 저 놈이 내 애인이었으면 한 편의 슬픈 러브 스토리이지만...... 이 놈이 애인이다 보니 바람난 마누라가 잡혀가는 꼴이 돼지. 아이, 쪽팔려라...... “손 괜찮아요?” “응.......” 피가 철철 흐르는 손톱과 슬라이딩하다 까져버린 손바닥을 소독약으로 닦으면서 묻길래 답하자 하던 행동을 멈추고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 표정은 뭐냐? 화낼려면 화내고 소리 칠려면 쳐라. 그런다고 내가 눈 하나 깜빡할 것 같냐? “왜?” “태민이랑 왜 그랬어요?” 나라고..... 알겠니? 본능이었지..... 뭐..... “....... 선생님 지금 저랑 사귀는 거 맞죠?” “맞지.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게 아냐?” “제발.... 바람 피지 말아요.” 나, 이래뵈도 정조 관념은 꽤 있는 편인데..... 신뢰도는 바닥인가 보군. 나처럼 착한 애가 왜 바람을 피겠어? “안펴. 너나 피지 마라.” “저 바람같은 거 안펴요. 하지만 선생님은 바람끼 있단 말예요.” “..........” 사실 아니라곤 말 못하지. 내가..... 좀 단순하다보니 좋아한단 말에 약해서리..... 게다가 방금 전 태민이와의 므흐흐한 광경을 틀키고 나니 조금 찔리는구만. “나도 안펴. 좀 믿어라..... 왜 사람들이 내가 바람 안핀다는 말은 믿질 못하냐?” “........ 선생님....... 아니에요. 믿을게요. 대신 진짜 바람 피면 안돼요.” “.... 알았어. 안필게. 너나 조심해.” 뭐가 그렇기 한심하고 초조한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는 권형이 머리를 쓰다듬고는 꼭 껴안아 주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실 바람이 아니었다. ▷ track 03. 주중의 어느 날..... 고3들이 상담을 시작하는 바람에 상담실을 뺏겨 버렸다. 학교 안은 대부분이 금연구역이니 갈 곳을 잃어 헤매이다 생각난 곳이 화장실! 역시.... 후훗, 나의 센스는 굉장하다니까..... 담배 피는 장소는 옛날부터 변함이 없잖아, 학교 옥상, 화장실, 혹은 쓰레기장. 옥상은 올라가기 귀찮으니 손 쉬운 화장실로 낙찰을 보고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1학년 교사의 화장실로 은근히 침입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칸을 차지하고 앉아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수업 중이니 애들이 올 염려도 없고 교사용도 아니니 선생도 없겠지. 즐거운 기분에 하얗게 뭉개 뭉개 올라가는 연기를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권형이랑 뭘 하고 놀까나..... 에에, 또.... 그러고 보니 녀석도 진학 상담을 해야하나? 에이, 뭐 어때. 특기생인데..... 저녁에는 맛있는 스테이크랑 해물 스파게티라도 하고...... 그리고..... 아, 그러고 보니 세하에게도 연락을 해야되는데. 대머리 얘기는 잘 됐나 모르겠네. 그 반짝이.... 이젠 왁스칠 안해도 반짝 반짝하게 해주지. “후훗......” 즐거운 생각에 담배 한 개피를 꺼내려다 손을 놓았다. 권형이가 줄이라고 했으니까..... 조금 줄여볼까...... 권 형이 생각에 또 입이 귀에 걸리는 통에 볼을 어루만지고 담배를 막 주머니에 넣었을 때였다. 이제 나가려고 일어서는데 뭔가 엄청난 소리가 들리더니 옆 칸의 화장실 문이 큰 소리와 함께 세게 닫겨 내가 있는 칸의 문까지 흔들었다. “......... 뭐..... 야?”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상황을 살피려는데 문 밖에서 엄청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이럴꺼야? 진짜 나랑 끝내고 싶어? 그래도 좋아, 강태민!!!” ....... 라며 엄청나게 울려대는 목소리의 주인은 지혁이 놈이로군. 아아, 지겨운 것들, 아직도 싸우고 있는 거냐? “그래, 헤어질거야! 그러니까 꺼져!!” 꽈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는 문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데 다시 한 번 지혁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나와, 빨리 안나와!! 강태민!!” “씨발, 꺼져! 헤어지자고 했잖아, 왜 귀찮게 난리야?” “귀찮아? 너 빨리 안나왓!!” “나, 이제 너 싫어!! 너라면 지긋지긋해!!!” 사실 말이지..... 내가 지금 나가야 하걸랑...... 나가서 말이지..... 다음 시간 수업 준비해야 되거든.... 그런데 이런 상황이면 나갈 수 가 없잖아. 그래, 솔직히 나갈 수는 있지. 하지만...... 저 놈들 왜 싸우는지 넘 궁금하잖아? 자꾸 궁금증이 일어 결국 다시 화장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문 쪽에 귀를 대로 바깥의 상황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늘 수업 준비 안했는데..... 게다가 곧 기말고산데..... 미치겠네. “너 말 다했어? 빨리 나와! 안나와? 강태민!!!” 콰앙-- “으윽!” 갑자기 발로 차대는 지혁이 놈 덕분에 문에 대고있던 귀가 울려왔다. 그 덕에 근사하게 바닥에 무릎까지 찢고 아파 죽을 것 같았지만 들킬까 봐 소리도 못내고... 씨발.... 졸라 아프네, 이거.... 하지만 사람의 호기심이라는 게 워낙에 막강한 거라 시려오는 무릎을 손으로 열라 비비면서 다시 바깥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콰앙-- 콰앙--- 계속해서 차대는지 화장실 칸막이가 다 흔들린다. 씹새야, 그래 울려라, 울려! 아주 너희 화장실에서 싸운다고 전교에 소리치지 그러냐? 지나가던 대머리라도 쳐들어오면 어쩔려구? 아이구, 진짜 저 망할 자식들 같으니라구!!!! 내가 늬들 때문에 또 교무실에 불려가고 해야겠냐? 아직 3교시니까 저것들 수업까지 빠지고 와서 싸우는 거 아냐? 저것들을 그냥!!! “니가 나한테 이럴 자격 있어? 꺼져!! 이지혁!” 그래, 없지. 저 놈의 이 때까지의 일을 생각한다면 말이야. 뭐, 나야 태민이가 더 예쁘니.... 당연히 태민이 편이라서 그러기도 하지만. “씨발, 너 장인하 때문에 그러지? 너도 장인하 꽁무니 쫓아다니는 거야?” 내가 니 친구냐, 새끼야!! 난 니네 선생이라구!! 저게 누구한테 장인하야? “선생님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훗, 역시 예쁜 놈이라니까, 강태민. 선생으로서 자부심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기분 좋게 미소지었다. 역시.... 이런 맛에 선생 하는 거 아니겠어? “그 딴 게 선생이야?” 이지혁..... 저 자식이...... 내가 말이지..... 교원 자격증도 있고, 대학도 제대로 - 는 아니고 사실.... - 나온 선생이다! 저 이지혁, 씹새가 날 뭘로 보고 깝죽대는지는 모르겠지만..... 흐음, 선생으로서의 위엄이 문제인가? “선생님 갖고 물고늘어지지 마! 뭐가 문제인지는 너도 알잖아?” 앗싸, 잘한다!! 강태민. 넌 진정한 나의 제자였어. “뭐가 문젠데? 이제 잘한다고 했잖아. 문제는 너 아냐? 너까지 그 새끼 얼굴에 헤롱대는 거냐?” 어쭈? 내 얼굴이 어때서? 왜 잘 사는 나한테 시비를 거는데? “선생님 함부로 부르지 말랬지?” 콰앙--- “윽!” 베베 꼬인 지혁이의 말에 도발당했는지 아까의 소리와는 비교도 안되는 굉음을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간 - 듯 한 - 태민이. 그리고 그 때의 나로 말하자면 소리에 놀라 미리 선수쳐 뒤로 물러섰다 변기에 등을 찌고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삼키고 있었다. “무슨 상관이야?” “너, 그런 문제가 아닌 걸 알잖아. 이제까지 널 생각해 봐. 내가 널 믿을 수 있겠나?” “약속했잖아. 너야말로 왜 날 물고늘어지는 건데?” “물고늘어지는 게 아냐. 이건 신의의 문제야.” 그건 그렇지....... 거 참 태민이 자식이 제대로 된 말도 할 줄 아네. 사실 바람 피던 놈이 안그러겠다고 하는 건 내가 개과천선해서 과거 일 모두 잊고 착하게 살아가겠다는 것과 비슷한 거란 말야. 지 버릇 개 못준다잖아? 그리고 준다해도 개도 안받을 버릇이 있는 거라구. “믿으면 돼잖아!” “그렇게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니잖아!!” “해결할 수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픈 것을 참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듣자 이젠 말로는 안되겠었는지 말 한 마디 끝날 때마다 퍽- 퍽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럴 땐 진짜 투명인간이고 싶단 말야. 내가 오디오 세대가 아니라서 듣는 것만으로는 비주얼이 안되거든. 직접 봐야 직성이 풀리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구경하고 불구경이라잖아. “넌 나한테 한 번도 진심을 보인 적이 없어, 그런 너를 믿으라구!?” “모든 걸 보여줘야 돼? 너 나 좋아한다며? 그래서 사귄 거 아니었어? 그거면 돼잖아!” 허어, 참 저 모질이가 판에 박힌 말을 하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사람들이 왜 헤어지겠냐? 원래가 사귀면서 가장 필요한 건 이해와 배려라는 거야........ 뭐, 내가 이런 말하면 웃기겠지만 사실이잖아. 내가 그 윤진이 놈이랑 그렇게 더럽게 헤어졌던 게 뭣 때문이었는데? 감정만 믿고 까불다간 인생 조지지.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걸 용서 받을 꺼란 생각은 만용 아냐? 용서만 하는 사람한테 너무 손해라구! 서로.... 아, 관두자구. 이런 얘기 골치만 아프니까..... 망할... 서윤진.... 나쁜 자식. “씨발, 또 생각나 버렸네.” 한숨을 쉬고 다시 그 쪽으로 신경을 돌리자 둘이 뭔가 툭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젠장..... 보고 싶잖아.... 이거...... 싸움 구경은 피해가면 손해라구...... 으음..... 암만 생각해도 지금 바깥의 녀석들은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거 같으니까.... 내가 조금 소리내도 모르겠지? 모를꺼야.... 뭐, 알면 뭔 상관이래? 내가 먼저 들어왔다구..... 여기에..... 흥! 그런 생각이 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변기통을 발로 밟고 몸을 숙여 화장실 칸막이 위 쪽에 가슴을 대고 서자 두 녀석이 훤히 보였다. 그렇지만..... 예의 상 조금 몸을 내리고 눈 부분만 나오게 한 채로 둘을 감상했다. 이제는 말 없이 태민이 놈이 한 대 차면 지혁이 놈이 한 대 올려붙이고 그 뒤로 태민이가 또 한 번 배에 주먹을 박으면 지혁이 놈이 다시 한 대 더 때리고...... 거 참 싸움도 예의 차려가면서 사이 좋게 너 한 대, 나 한 대..... 상대와 전력이 비슷할 때는 그저 시간 안주고 죽어라 패는 게 순데, 말야. 아깝게 시리....... 못마땅한 듯 입술을 비틀고 한참 녀석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이 찾아들었다. 콰당-- “누구야? 어떤 녀석들이 여기서 싸워?” 망할....... 새로 온 체육 교사..... 씹탱구리같으니..... 혀를 차며 더욱 몸을 숙여 문과 칸막이 틀 틈으로 바라보자 그 선생이 들어오며 신나게 소리를 질러댄다. “니네 몇 학년 몇 반이야? 뭔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 씹탱, 무식한 새끼...... 속으로 욕을 바가지로 하면서 바라보는데 그 선생이 이젠 반까지 물어본다. 몇 반인 거 알면 뭐 하게? “니네 담임 누구야?” 어쭈!!! 이번엔 담임까지? 알면 니가 나 갈굴꺼냐? 저 초짜가 뭐 무서운 걸 모르네..... 죽일 새끼. “이 새끼들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아무 말 없이 뒷짐지고 서있는 새끼들이 맘에 안들었는지 삐딱하니 욕을 해대는 새끼를 보자 점점 머리에 김이 올랐다. 저 새끼가 지금 누구 반 애들한테 저 지랄이야? 이를 부드득 갈며 꼭 복수해 주겠다고 다짐을 하는데 이 새끼가 이번엔 폭력까지 휘두른다...... 저 새끼가...... 철썩-- 철썩-- 명쾌한 소리와 함께 날아간 태민이와 지혁이 놈의 뺨따구....... 지혁이 놈은 상관 없지만..... 저게 왜 우리 반 녀석까지 때리고 난리야? 니가 그놈 뺨에 바를 로션이라도 사줬어? 남의 애를 왜 패!!! 막말로 내가 니네 새끼들 두들겨 패면 기분 좋겠냐? 씹탱이..... 철썩--- 그 새끼가 지혁이 놈을 한 대 치고 태민이 놈한테까지 한 대 더칠 기세가 보이자 내 몸은 내 이성을 거부하고 밖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진짜 기어서..... 내가 왜 멀쩡한 문을 두고 그 좁은 천장과 칸막이 사이로 나가고 있는 줄은 모르겠지만....... 나도..... 완전 바보가 되었군......... 젠장...... “왜 우리 반 애 때립니까?” 라면서 멋지게 말은 했지만....... 천장으로 기어나오는 그 꼴이란..... 그리고 그 꼴을 보는 세 사람들의 시선이란..... 망할..... 나도 쪽팔린 거 안다구...... “선생님......” “으...... 아........” 겨우 몸이 빠져나오고 멋지게 착지를 한 후에도 태민이 놈은 쪽 팔린다는 듯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돌린다. 이 놈아, 내가 널 위해 이렇게 나와주었는데 그게 무슨 눈빛이야? “...... 장선..... 생님.....” 하얗게 얼어 있는 그 새끼를 보고 바로 앞으로 가서 서자 나보다 조금 작은 녀석이 뒤로 물러선다. “우리 반 애들인데요..... 왜 그러시는데요? 애들이 지들끼리 싸우는 것도 죕니까?” “......... 그.......” “애들은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에요. 학교 선생이라고 애들의 성장을 방해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말도 안되다뇨. 애들이 이렇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회에 나가면 자연 도태되는 거 아닙니까? 살아남아야 겠다는 근성이 부족하다구요!! 요즘 애들이 점점 나약해지는 게 많은 형제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못키워서 그런 거 아닙니까? 많이 맞아본 놈이 잘 패는 거고 잘 패야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거 아닙니까? 대체 무슨 권리로 생존하기 위한 아이들의 몸부림을 방해하는 겁니까?” 내 구경 꺼리도....... “....... 그렇군요........” 라면서 갑자기 고개를 끄덕이는 면상을 보자 나도 기가 막힌다. 병신......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하는 소린데 너는 알아듣는다는 거냐? 뭐, 저런 빠가가 선생이 된 거야? 세상 좋아졌다니까..... 하긴...... 나도 선생 되는데 저런 모질이야... 으윽...... 저 새끼도 돈이랑 빽이 센가보군. “흐음.... 너희도 다음에 싸우려면 안보이는 데서 싸워라. 장선생님....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라고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인사까지 하고 나간다. 뭐.... 저런..... 선생이...... 그 선생이 휭하니 나가고 난 후 우리 셋은 말도 할 수 없는 이상한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기가 막혀..... 대체 뭐냐? 저거..... 이 학교에 또 엄청난 놈 하나 굴러들어온 거 아냐!? 이상한 인간은 나로 족하다구!!!! “선생님.......”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하는데 태민이 놈이 뚱하니 묻는다. “왜?” “대체..... 왜 이 시간에 화장실에 있던 거에요. 그리고.... 우리 싸우는 거 다 본거죠? 그리고 왜 천장으로 기어나온 거에요?” 한 꺼번에 너무 질문이 많다, 얘! 사실 화장실에는 담배 피러 온 거니까..... 말해도 돼고...... 싸우는 거 다 들었다는 건 너도 알테고.... 왜 천장으로 기어나오냐고 한다면..... 그건 나도 모르겠고. “흐음...... 담배, ok...... I don`t know." 딱 잘라 설명을 하자 지혁이는 똥 씹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태민이는 이해한 듯 하다. 이것도 의외로 눈치는 빠르단 말야. “쪽팔리게...... 왜 그런 데에 있어요. 알았으면 나와서 말리던가 했어야죠.....” 내가 왜 말리나, 이 사람아.... 재밌는 구경을...... “원래.... 사람이란 게 남의 싸움은 재밌는 거거든.” “선생님...... 가끔은 선생님다워 지는 게 어때요?” “나한테 바랄 껄 바래라. 이 세상 선생님들이 다 선생 같으면 따분해서 어떻게 살아? 씹을 꺼리 없어서.....” “하여간.......” 이라면서 피식 웃어버리는 녀석을 보자 왠지 벨이 꼴리는걸. 저게...... “저 수업 들어갈 꺼에요. 선생님도 상담실 가야죠.” “나 상담실 뺏겼어. 3학년 상담 때문에.” “......... 아.... 그럼 농구부 탈의실 가있어요. 교무실에 앉아있는 거 싫어하잖아요.” 흐응.... 그래도 나를 생각은 해주네. 내가 교무실 싫어하는 거는 어떻게 알았대? “그러지... 뭐......” 머리를 긁적이며 먼저 나가는 태민이 놈을 따라가다 뒤를 흘깃 보니 지혁이 놈이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다. 저게..... 어딜 야려? “이지혁! 넌 수업 안들어가?” “........ 상관 말아요.” “알았어.” 라고 말하고 나도 휙-- 하니 돌아나가자 뒤꼭지가 따끔따끔거린다. 망할..... 저 새끼 눈알을 확! 일단은.... 참자. 애들 데리고 무슨 짓이냐? 난 오늘 저녁에는 권형이랑 밥을 먹을텐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면 안돼지. 신경에 안좋다구. 하지만..... 언젠가는 두고 보자구, 이지혁...... “선생님.......” “으악!!!” 교무실에서 나오던 중 바로 앞에 서있던 태민이 덕에 요란하게 소릴 지르고 지나가던 선생들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심장이 다 벌렁거리네. 자식이.... 왜 이렇게 귀신처럼 나타나는 거야? 스르르륵 걸어서 눈치도 못채게 나타나다니 말야! 그리고.... 거기 서있는 과객들!! 어딜 쳐다 봐!! 늬들 갈 길이나 가란 말야! “뭐야!! 놀랐잖아, 갑자기 나타나지 좀 마!” “........ 얘기 좀 해요.” “그렇지 않아도 지금 교실 가는 중이다. 얘기는 무슨 얘기야?” “중요한 일이에요.” 심각하게 말하는 태민이의 얼굴에 찝찝한 기분을 접고 녀석이 원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대체 또 뭐가 그렇게 심각한 거야? 이 자식은 툭하면 심각한 놈이니...... 그 놈을 끌고 천천히 학교 옥상으로 올라가 서자 아주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연다. “고민이 있어요......” 라고 하는데 이 자식아. 누을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구, 내가 니가 고민 있다면 친절히 들어주고 어드바이스해 줄 인간으로 보이냐? “...... 들어는 주마. 말해 봐라.” “저 선생님 좋아하는 거 같아요.” “그래, 매우 고맙다. 그게 고민이냐?” 라고 짧게 답하자 눈빛이 흐려진다. 허걱...... 설마.... 저 자식...... “나.... 진짜 선생님 사랑한다구요.......” 으아아악!!! 진심.... 이다..... 저게 미쳤나? 너 지혁이 좋다면서? “너...... 아프지? 그렇지? 어서 집에 가서 쉬어라..... 내가 조퇴 처리 해줄게.” 라고 가서 은근 슬쩍 밀자 이게 순식간에 돌아서더니 나를 껴안는다. 우욱.... 숨막혀..... 제발.... 놔라..... “야, 숨.... 막혀.....” “사랑해요...... 진짜...... 너무 사랑해요.....” 라면서 온몸을 감싸오는 몸의 체온과 떨리는 음성에 알아버렸다. 이거 진짜다....... 이 어린 놈이 진심이라구...... 망할 자식같으니...... 너 이러는 거 엄청난 반칙이야!! “태민아..... 떨어져라......” “싫어요.....” 가늘게 떨리고 있지만 확고한 그 목소리에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쓰게 되었다. 나도 가슴 찢어지지만..... 너랑만 벌써 세 번째다. 이런 씬이.... 권형이랑도 못해본 러브러브를 너와 남발할 수는 없잖아. “1m 접근 금지!!!” 나를 안고 있는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차자 녀석이 뒤로 밀려나며 휘청거린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럼 안돼지. 이래뵈도 니 선생이다, 이 놈아!! “..... 이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태민이의 시선에 사정없이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어쩔 수 없지..... 꼴에 나도 양심은 있어서 말이야...... “너무하긴 뭐가 너무해?” “...... 좋아해요........” 철컹-- 머릿 속에서 방아쇠 잡아당기는 소리가 들리고 아찔해졌다. 이 자식..... 말이야..... 내가 너 아낀다는 건 좀 생각하면 안되겠냐? 이렇게 방아쇠를 당길 준비를 하는 거 치사하잖아!! “계속 좋아해.” “사랑해요.” “사랑하는 거야 니 맘이지. 대신 나한테 그 이상을 강요하진 말아라.” 딸 잘라 말하자 녀석이 또 불쌍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다. 미안타....... 나 애완동물은 질색이거든. “사랑하는 게 내 맘이라면 안아도 돼요?” “그건 안돼지. 그건 내 사전 허락이 필요한 거거든.” “곁에 있으면 안돼요?” “............” 이건 완전 벽 보고 대화하는 수준이다. 내가..... 미리 경고를 하잖아. 너 내 옆에 있어서 좋을 것 없어. 나 말이지.... 온 몸에 「불행」이라고 써붙인 인간이거든. 인정하기는 싫지만 내 옆에 있으면 너도 불행해져. 내 주변에 그 잘난 인간들 다 망가진 거 보면 모르겠냐? 그게 비오는 날보다 더 심한 내 징크스거든. 나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내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든단 말야....... 그거 모르겠냐? 진짜 그래, 강태민? “태민아......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알지?” “상관없어요..... 곁에 있기만 해도 안돼요?” “....... 나 사랑하면 그 사람 밖에 안보여. 너만 상처받을 꺼야. 내 곁에 오지 마......” “..... 권형이 형은 돼고 나를 안돼요?” 순간 심장이 털렁-- 하고 내려앉았다. 망할..... 이게 알면서도 그런단 말야? “........ 그 놈이 스스로 판 무덤이고..... 넌 아냐...... 넌 내 친구 같은 놈들이라 안돼.....” “어째서요?” 으윽......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보지 말란 말야!!! 내 심장을 찔러 죽여라, 이 놈아....... “그 놈은 내가 먼저 좋아했고...... 화끈하게 사랑하기로 한 놈이지만...... 나 너는 재밌고 놓치기 싫어서 그래. 난 좋은 녀석하곤 절대 연애 안해. 친구만 해......” 역시...... 이 놈한테도 각서를 받아뒀어야 했어. 지나치게 친해졌을 때부터...... 조금 걱정은 했었는데..... 어린놈이려니 하고 넘겼지만 나도 딱 이 맘 때쯤 제일 많은 놈들을 찼다는 걸 잊고 있었다. “......... 그럼.... 기다릴래요...... 선생님이 권형이 형하고 헤어질 때까지.... 아니면..... 선생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기다릴게요. 그건 돼죠?” 안돼는데........ 나 그 놈하고 사랑에는 목숨 걸고 덤비고 있단 말야..... 너 이러는 거 진짜 반칙이야...... “그건 니 맘이지만.... 그럴 일은 없을테니 시간 낭비야. 너를 위해서니까..... 다른 사람을 찾는 게 나아.” “그래도 기다릴거에요.....” 으아아악!! 이게 왠 땡깡이야! 이 놈아!!! 말 좀 들어라, 말 좀!! “태민아......” “수업 들어갈게요. 저도 근성 있거든요.” 라면서 피식 웃더니 앞서 내려간다. 저 놈이....... 우욱, 골치 아파. 대체가..... 왜 내가 학생한테 그런 고백을 들어야 하는데 나 좀 살려 라.... 이 놈아..... 이젠 지긋 지긋하다구. 아아..... 관두자. 수업에나 들어가야지... 진짜..... 왠수 같은 놈들...... “왜 그래요?” “어?” 권형이와 밥을 먹고 TV를 보던 중 이상했는지 묻는 말에 아방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반응해버렸다. “이상하잖아요..... 드라마 싫어하면서 왜 그렇게 멍하니 보고 있어요?” “어어..... 잠깐 딴 생각 하느라구......” 망할 놈의 태민이 놈 때문에 말이지..... 까놓고 말할 수도 없고..... 어우, 왠수, 왠수도 그런 왠수가 없어. 그냥 학생이면 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던가 눈물을 쏙 뽑아주고 말겠는데 버리기엔 아까운 놈이라서 말이지. 그 놈이 꼴에 내가 편애하는 놈이잖아. 나 생각도 많이 해주고...... 좀 덜 떨어지긴 했지만 귀여운 놈이잖아. ........................................... 진짜 미치겠네!!! “으으으.......” 부드득 이를 갈며 머리카락을 쥐어뜯자 권형이가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아아....... 그러니까.......” “........ 진짜 이상해요.......” “이상하긴 뭐가!! 그냥 머리 가려워서 긁기는 그러니까 쥐어뜯은거야!” “...... 머리 가려워서 쥐어뜯는다는 거 들어본 적 없는데요......” “지금 들었잖아.”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아무렇지 않은 듯 시치미를 떼고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내가 제일 보기 싫어하는 종류의 드라마가 하고 있었다. 으악!! 내가 지금까지 이걸 보고 있었단 말야! “재수없어...... 젠장, 나 이런 류 질색이란 말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리모콘을 들자 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권형이의 시선이 따갑다. 씨발, 그만 쳐다봐라. 나 발광하는 거 하루 이틀이냐? “권형아.......” “...........” “내 미모는 나도 인정하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쳐다보면 꼴리잖아. 시선 치워라......” “..... 솔직히 말해요. 무슨 일 있죠?” 덜컹-- 순간 심장이 놀라 벌렁거렸다. 아니 이 놈이 그 새 눈치를 깠단 말야? 아님.... 정경진 돼지 짓인가? 흐음..... 불어? 말어? 불어서 좋을 꺼 있나? 없지....... 아마....... 말아서 좋을 꺼 있나? 그것도 없지, 아마...... 그럼 부나 마나 똑같다는 거니까..... 귀찮으니까 패스할래. 입 아프게 뭐하러 말해? “별 거 아냐. 대머리가 시비 좀 걸어서 그래..... 지금 처리 중이니까 걱정 마. 걸리면..... 죽음이야.”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되는 대로 말하자 권형이가 걱정되는 목소리로 물어온다. “혹시 소집당한 거에요?” “응.......” 귀신이로군...... “아버지한테 말해서 잘 이야기하라고 할게요. 어차피 학부모 항의나 뭐 그런 것 때문이죠?” “......... 너 신내림 받았냐?” “뻔하잖아요. 애들 보는 앞에서 그 난리들을 쳤으니 지금까지 무사한 게 이상하죠.” “....... 그렇지...... 뭐....... 이 정도면 얌전했던 건데...... 긴 시간이었지......” 그래, 명세 놈 만나고 지난 4년 간 진짜 얌전했지. 큰 폭력사건 일으킨 적 없고 - 물론 「큰」사건 말이다. - 더러운 소문 돈 것도 없었고 - 지난 4년 간의 일로는 말이지....... - 누굴 심하게 갈군 적도 없고 - 약간 심심풀이 차 조금만 갈궈주었지.... - 잠도 잘 잤고 말이지. 명세 놈과 헤어진 것만 아니라면 큰 사건 친 적은 거의 없으니까...... 난 누가 좋아지면 그 사람 밖에 안 보이거든. 솔직히 세 번의 연애 중 내가 가장 산만하게 사귀는 놈이 이 놈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인간애와 박애정신이 넘치는 인격을 갖게 될 줄은 나도 몰랐거든. “....... 다 잘될 거에요.” 당연하지...... 내가 누군데.... 이제까지 나 건들고 두 다리 뻗고 자는 인간 못봤다. 내가 괜히 악질 소리 듣고 다니는 줄 아냐? 천하의 장인하 아니냐..... 후후후...... “그래야지....... 흐흐흐흐흐흐......” 지금 계획하고 있는 것만 잘된다면 말이지. 후훗...... 두고보자, 대머리. 타도하자, 대머리! 뽑아내자, 세 가닥! “후후후...... 그래, 잘돼야지.... 흐흐흐흐흐........” 리모콘을 들고 음산하게 웃으며 머리 속으로 이것 저것 재고 굴리고 있는데 권형이가 못 볼 꺼 본 얼굴로 쳐다본다. 왜, 임마...... 사람이 살다보면 약간 상태 안좋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선생님..... 음침해요.........” “........ 인생살이란 게 원래 음침한 거야......” “또 무슨 짓 하려는 거에요?” “..... 또라니? 내가 뭘? 내가 뭘 어쨌다구?” “......... 큰 일만 터뜨리지 말아요. 그러다 짤리면 어쩔려고 그래요?” “몰라, 임마...... 난 괜찮아......” “그 근거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에요?” 라며 살짝 인상을 찡그리길래 간만의 내 특허 대사를 읊어주기로 했다. “난 예쁘니까 뭔 짓을 해도 괜찮아!” 라고 톡 쏘아 말하자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면서도 폭삭 나를 안아온다. 헤에.... 이렇게 스킨쉽을 남발하니.... 너무 좋잖아. 얼마나 좋아. 나를 안고 있는 권형이의 가슴으로 파고들면서 부비적거리자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나도 따라 웃으며 고개를 들어 살짝 입술을 겹쳤다 진하게 키스 한 방 날리고..... 자지러지게 웃자 더욱 강하게 감싸안아온다. “사랑해요.......” “응, 나도 사랑한다......” 지금 이대로.... 이렇게 행복하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면 나도 정상인 같지 않아, 유권형. 난.... 그 시간이 영원한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한 듯..... ▷ track 04 . 시간이 흘러 드디어 방학이 되었고 당연히 늦잠은 늘어간다. 사회인이 되어서까지 방학을 맞게 된다는 게 좀 우습기는 하지만 하여간.... 휴일은 좋은 것이다. 더더구나 유급 휴일이니 말이야. 이래서 다들 선생짓을 하려는 게 아닐까? 요즘 들어서는 보충 수업 같은 것도 없어져 방학은 진짜 긴 유급휴가다. 역시 나의 선견지명은 굉장하다니까.... 보라구 칼퇴근에 방학까지! 얼마나 좋아...... 날씨가 많이 더워져 에어컨을 켜놓고 자는데 문득 등 뒤에서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일어나요. 오늘 같이 나가준다면서요.” 그리고 목가를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혀의 느낌. 그 목소리와 행동만으로도 누군지 알 것 같아 웃음이 새어나왔다. “10분만 더 자고 일어날게.” “잠병 걸렸어요? 어제도 하루 종일 잤잖아요.” “너도 나이 들어 봐.” 뒤에서 완전히 나를 감싼 느낌에 한 번 웃고는 허리를 안고 있는 녀석의 손을 잡고 뒤로 돌아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이 자식, 왜 또 이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보는 게 난 질색이란 말야. “왜?” “....... 아버지가 알았어요.” “내가 너하고 사귄다는 거?” 놀라 벌떡 일어나며 말하자 녀석이 쓴 미소를 짓는다. “그 정도면 괜찮지만..... 선생님이 형이라는 거 알았다구요. 엄마가 말한 모양이에요. 어차피 소문 다 돌았으니.....” “어어.... 별 거 아니네. 괜히 놀랐잖아.” 녀석의 대답에 다시 침대로 누워 이불을 끌어당겼다. “별 거 아닌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선생님 만나고 싶대요. 만나서 식사라도 한 번 하고 싶대요.” “귀찮아, 생판 모르는 사람하고 얼굴 대하는 거 질색이야. 난 니네 엄마랑 지킬 예의 같은 건 전혀 없고..... 결정적으로 니네 엄마 이름만 들어도 아직도 치가 떨려. 그러니 두 번 다시 나한테 그런 말은 하질 말아라!”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신경질적으로 말하자 그 쪽도 더 이상 말이 없다. 젠장, 뭐라고 말하라구. 이런 분위기 난 싫단 말야. 쳇! “....... 미안해요. 하지만... 엄마 입장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 말에 휙 돌려는 걸 참고 벌떡 일어나 옷장을 뒤졌다. “뭐해요?” “학교 가자. 빨리 가서 애들하고 놀래. 너랑 그런 피곤한 얘기하는 거 진짜 싫어.” “피해갈 수 있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아니, 피해갈 수 있어. 내게 강요하지 마. 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면 갈 데까지 가,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일을 자진해서 거쳐가는 바보는 아냐. 너니까.... 이 정도도 봐주는 거야. 내 앞에서 그 여자 얘기는 금기야. 윤진이 자식이 나랑 깨질 수 밖에 없던 게 그 녀석이 그 금기를 입에 담아서라는 거 모르지?" “그 사람 얘기를 왜 하는데요?" “경고야. 누구든 내 앞에서 가족 얘기하는 건 절대 용서 못해. 더더군다나 그에 더해 과거 얘기까지 거들먹거리면 나 미쳐버리거든. 너라도 예외는 아냐.” 신경질적으로 옷을 갈아입고 테이블 위의 담배를 빼물었다. 요즘은 너무 행복해서..... 너무 꿈 같은 생활만 계속되다 보니 잊고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제어라는 걸....... 아무리 사랑하고 푹 빠져 있는 상대라 해도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어. “선생...... 아니 형......” “형이라고 부르지 말아라. 그 어감에 좋은 기억이 없으니까..... 그냥 선생님이라고 불러. 나가자.” 반도 피지 않은 담배를 꺼버리고 차 키를 들었다. 이런 신경전은 질색이야. 어떻게 해서든 이 음울한 대화를 빼져나가고 싶을 뿐이다. 그런 것과 전혀 상관 없이..... 사귀기로 한 거 아니었었어? 우리 그 딴 거 상관 없다는 거 아니었냐구? 차를 타고 학교까지 가는 내내 권형이도 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너무 예민한 문제라 서로 건들지 말았으면 했는데 이 녀석은 왜 갑자기 그 부분을 건드려는 걸까?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얘기가 내 과거 얘기랑 그 자살한 셋째 놈 얘기랑 가족 얘기라는 거 내가 말 안했던가? “화났어요?” “응.” 짤막하게 답하자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런 얘기 싫어하는 거 알아요...... 알지만..... 아버지 좋은 분이에요. 어머니와는 다른 이야기로 당신을 만나고 싶어해요. 이야기를 하고..... 사과하고 싶어해요.” “그 아저씨가 왜 나한테 사과를 하는데?” 학교 주차장에 파킹을 하고 다시 담배를 빼물었다. “우리만 행복해진 게 너무 미안하데요. 꼭 선생님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 “미안해요.” 라면서 담배를 문 내 입에서 담배를 빼고 입술을 겹쳐온다. 나쁜 자식..... 이거 사기잖아. 이렇게 나를 감동시키면...... 나 너한테 넘어간단 말야. 어물쩡하니 넘어가려 하는 게 어린 놈이 보통 수단이 아니란 말야. “그래도...... 식사는 사절이야.” 마지막으로 끝을 맺고 차문을 열고 나오자 권형이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차에서 내렸다. 골치 아프게 말이야...... 그 주 주말에 권형이는 집안 모임이라며 만날 수 없어 나도 친구들과 간만에 영화를 보기로 마음 먹었다. 세하 놈만 잡으면 다들 연락하기는 쉬우니 먼저 그 놈을 강제로 때려잡고 나머지 녀석들에게 연락을 돌리는데 성준이 놈은 뭔 일인지 바쁘다고 하고 - 씹탱, 사실 명세 자식 만나는 거잖아. - 결국 상원이만 겨우 빠져나와 세하의 차를 타고 한참 즐겁게 영화관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이쪽에는 영화관이 없는 걸로 아는데..... “야, 길 틀려. 어디로 가는 거야?” “응, 새로 생긴 영화관. 가족 드라마를 한대.” 라며 뻔뻔스러운 얼굴로 답하는 세하의 말에 뭔가 미심쩍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확히 잡히는 바가 없어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말이지..... 왜 모처럼 놀러 가는 길에 저 놈들은 정장을 차려입고 저러헥 굳은 분위기인 거지? 게다가 계속해서 내 상태를 점검하는 상원이의 모습에 뭔가 상당히 꼴리는데..... “야, 니네 솔직히 불어라..... 뭐냐?” “좀 있으면 알게 돼.” 라고 딱 잘라 말하는 강상원 사촌. 이상해..... 정말 이상해..... 상원이 놈이 이렇게 말을 돌릴 리가 없는데..... 세하야 그렇다 쳐도 이 놈이 이렇게 내 눈치를 살필 때는 뭐가 있다는 건데...... 끼이익--- 한참을 돌아 주택가로 들어선 차가 갑자기 멈춰선다. “뭐야? 기름 떨어졌냐?” 라고 몸을 내밀자 순식간에 차에서 뛰어내린 녀석들이 문을 열더니 나까지 잡아 끌어내린다. “니네....... 뭐야?” 라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하와 상원이 놈이 나를 양 쪽에서 끌고 문 앞으로 데려갔다. 그 리고 그 대문 앞에 쓰여진 문패에는 「이중환」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제야 그게 권형이의 새아버지 이름이라는 게 머리 속에 떠올랐다. “너희!!!! 죽고 싶어?” 라고 발악을 하는 것도 무시하며 벨을 누르자 곧 권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들이 서로 짜고 날 연행해 온거란 말야!? “이게 무슨 짓이야? 유권형!!” 인터폰에 대고 빽하니 소리를 지르자 곧 문이 열리며 권형이 자식이 서둘러 달려나온다. “죽고 싶지, 너희들!!” “언젠가는 거쳐갈 문제야. 장인하, 이번에 그 독기 좀 가시라구! 너 평생 가족이고 뭐고 없이 그러고 살래?” 세하 녀석, 이 세상 집이 다 자기네 같은 줄 아나? “이 세상 가족이 다 핑크빛에 단내 풍기는 분위기인 줄 알아? 난 가족 같은 거 필요 없어!” “장인하! 널 위해서 하는 일이야. 얘기해 보고 열 받으면 성질대로 뒤엎고 욕이나 바가지로 하고 그게 아니면 성질 좀 죽여. 이대로 혼자 살꺼야? 이 세상 천지에 아무런 연고지도 없이?” 상원이 놈도 거들며 조목 조목 말도 잘한다. 씨발, 내가 진짜 가족을 원했으면 어떻게든 가졌다. 가족은 나한테는 거추장스러운 것들이라구. “필요 없어! 난 평생이라도 혼자 산다구!” “그럼 권형이는? 그 놈도 가족하고 인연 끊게 할꺼냐? 니네 관계 들키고 싶지 않으면 형인 척이라도 하라구!!” 핵심을 찌르는 세하의 말에 난동을 부리던 움직임을 멈추자 권형이가 나와 문을 연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바라봐 온다. 망할 자식...... “죄송해요. 친구분들께 부탁했어요.” “죄송한 줄 알면서 왜 해? 미안한 짓은 아예 하질 말란 말야!!” 양 쪽에서 포박당한 채 한 것 쏘아보며 말하자 녀석을 그저 웃기만 한다. “장인하, 성질 좀 죽여! 이 놈 이 성깔하고 악은 죽을 때까지 못고칠 꺼야!” “흥, 원래가 이 모양이다. 어쩔래?” 혀를 차고 양 팔을 빼려하는데 녀석들이 나를 다시 번쩍 들더니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씨발, 내가 걸어갈테니 손 놔! 내가 지금 연행당하냐?” “니 성질이 보통이어야 놓지. 우리 중 하나만 손 놓쳐도 한 놈 정도는 상대도 안돼잖아. 어떻게 조폭을 이기는 선생이 있냐?” “나 힘 센 거 이제 알았냐? 내가 걸어갈테니 손 놔! 도망 안가.” 소리를 빽빽 지르며 신경질을 내자 그제야 양쪽에서 잡은 손을 놓아주었다. 망할 새끼들...... “그래서 오늘의 용건은 뭐야? 단순한 식사냐? 그거만이라면 봐주지.” “그게........... 죄송해요. 저도 그냥 식사인 줄 알았는데......” “..... 는데?” 말끝을 흐리는 게 왠지 불안해져 눈을 치뜨고 쳐다보자 녀석이 묘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한다. 더욱 엄청난 것이 있다는 뜻이겠지. 저건..... 엄청난 거라면..... 말이지...... “아버지가 가족들을 더 불렀어요. 그러니까..... 선생님네 가족들.... 이요.” “.... 라는 건..... 장지원과 장지경 말이지?” “그리고 조카.....” “그 떨거지들!” 딱 잘라 말하자 녀석이 쓰게 웃는다. 씨발..... 이미 들어가겠다고 했으니 말 바꿀 수도 없고. “간만에 가족 상봉이네. 장인하, 얼지 마라. 넌 화나서 지랄할 때보다 열 받아서 비비 꼬일 때가 더 무서우니까.” 세하 녀석이 한숨을 내쉰다. 그러게 왜 날 데려왔어?! “씨발, 여기까지 와서 니네만 빠져나갈려구? 내가 꼬든 접히든 지랄을 하든 니네가 책임 져. 니네가 데리고 왔으니 끝을 보라구!” “가족 모임에 왜 우리가 들어가?” “장지원 얼굴만 봐도 나 빡도는 거 몰라서 그래? 거기다 그 애물단지 꼬맹이들까지 있다구! 저번에 아버지 제산지 뭔지라서 갔더니 큰 놈이 내 목에 쪼가리 씹어논 거 못봤냐? 어린 것들이 벌써부터 밝히기는!” “요즘 애들이 워낙에 조숙하잖아. 그리고 니가 조금 문제는 있지........” 라면서 말끝을 흐리길래 뒷굽으로 세하의 발을 지긋이 밟아주었다. “아팟, 이 애정결핍증!!” “넌 애정 과잉이라 그 모양이냐? 씨발...... 하필이면 재수 없는 것들이 둘이나 모였냐?” “어른들 기다린다, 어서 들어가라.” 상황이 계속 이어지자 상원이가 등을 떠밀기 시작했다. 같이 가자니까!! “니네 안가면 나도 안가, 여기까지 왔으니 책임지라구!” “......... 하여간.......” 서로 쳐다보고 한숨을 내쉰 두 녀석이 터벅 터벅 함께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냥.... 식사라고만 생각해요.” “일단은......” 진짜... 다른 놈들이었다면 죽도록 패거나 그대로 무시하고 갔겠지만 이 놈들이라..... 망할 자식들 같으니 내가 자기들한테 약한 거 알고 이러는 거야!! 잔디를 잔뜩 깔아놓고 꽤나 조경에 신경쓴 듯 한 정원을 지나 현관에 닿자 안에서 익숙한 얼굴들이 튀어나왔다. “선생님!!” 이라고 달려드는 것은 강태민! 이 자식은 왜 여기 있어? “넌 왜 여기 있냐?” “모임이에요. 저번 일도 있고 해서 저희 부모님도 오셨어요.” “씹...... 아주 올스타 총출동을 해라!” 모여라 꿈동산 찍냐? 장지원에 장지경에 그 가족에 이쪽 가족, 그리고 태민이 놈 부모님에 내 친구들까지.... 내 인생사가 한 곳에 다 모였군. “장인하 빨리 들어와 다들 기다리셔!” 라는 건........ “넌 언제 왔냐? 꼬맹아!” “나도 초대됐어. 그 날 모였던 사람들 거의 다 인걸. 심호흡 한 번하고 니가 참아. 오늘은 잡힌 날이야!” “꼬맹이..... 너 저번부터 계속 날 물 먹이는데....” 이를 으드득 갈자 어깨를 들썩이며 안으로 사라진다. 저 새끼가 말이지...... 저게 쪼끄만 게 약하고 귀여워 보여도 성질이 보통이 아니란 말야. 내 옆에서 하도 단련되서인지 왠만한 걸로는 눈 하나 깜빡 안하고 엽기적인 짓을 한단 말야. “두고 보자..... 꼬맹이.....” 뒷공작에는 천재적인 머리를 타고 난 놈이야..... 저거.... 언젠가 손봐주마. “안들어가? 너 아까 니 발로 들어간다고 했다.” 라는 건 내가 언제 튈지 모르니 뒤를 지키고 서있던 세하 놈이다. 그래...... 일단 왔으니 들어는 가겠지만 뒷 일은 나도 책임 못진다. “알았어. 대신..... 알아서 해라.” “그래, 발광하면 알아서 끌고 나가고 말하기 싫으면 입 다물고 있어. 뒷처리는 우리가 한다.” 라며 나를 떠미는 상원이의 힘에 밀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그 안의 그 엄청난 멤버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말았다. “어서 오게.” 라며 인사를 건내는 건 인자하게 생긴 50대 아저씨였다. 이 사람이 그 외교관이로군. 그 미친 년하고 결혼을 하다니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삔 변태 아저씨인 줄 알았더니 꽤나 괜찮은 얼굴에 모범가장이라고 얼굴에 써붙인 사람이었다. 뭐, 사실...... 사람이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거지만. “네, 안녕하세요. 장인하입니다." 일단은 웃으며 인사를 하고 주위를 보자 왠수 같은 얼굴 두 개가 보였다. “오랜만이네.... 장지원, 장지경!” 장지원은 나보다 6살 연상에 장지경은 4살 연상이다. 그런데도 말을 까는 건..... 내 맘이지. “버릇 없는 건 그대로로군. 간만이다, 장인하!” 라고 인사를 건내는 건 그나마 내가 형으로 인정하는 장지경이다. 저 싸가지 없어 보이는 면상은 여전하군. 올백으로 넘긴 느끼한 스타일의 머리에 그 기름스러움을 무마시키는 산뜻한 외모...... 하지만 성격은 나 만만치 않지.... “흥, 아직 결혼 안했냐? 성질이 그 모양이니 그 나이 되도록 독신이지.” “너는 성질이 그렇게 좋아서 애인들한테 사정없이 채이고 다니냐? 그 얼굴도 여전하군. 진짜 요물은 요물이다, 장인하.” “너야말로 나이를 거꾸로 먹냐? 언제까지 그렇게 느끼하게 하고 다닐래?” 라며 손을 내밀자 맞잡아 온다. 그 손을 잡으며 피식 웃자 그 쪽도 웃음으로 답한다. 이러니까..... 우리가 맞는 거지. “너는 그 고등학교 때 얼굴이 변함이 없냐? 죽을 때까지 그럴까 무섭다.” “설마..... 나도 많이 늙었는걸.” 한 번 더 웃어주고 장지원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 쪽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 새끼는 죽을 때까지 저런 표정으로 살 놈이다. 결혼하고 애를 낳고 어느 정도 지위까지 확보한 서른 다섯의 남자가 아직도 저렇게 인간 같지 않은 얼어붙은 표정이라니.... 말이야. “간만이네. 형수는 안온.......” “삼촌!!!” 그 쪽을 보고 인사를 하려는데 뒤에서 사정없이 매달려 오는 건 다시 보기도 끔찍한 첫째 조카 놈이다. “떨어져, 이놈아!!” “안떨어져도 되는데..... 오랜만이야, 예쁜 삼촌!” 어쩐지 등이 가벼워 돌아보자 진짜.... 안떨어져도 되겠다. 키가 이렇게 크다니...... 이젠 바로 내 눈가 밑에 와있다. 이거...... 왜 이렇게 큰 거야? “너...... 주사 맞았냐?” “아니, 많이 컸지? 이제 얼굴끼리 닿는다.” 라며 바로 나와 눈을 맞추는데 진짜 닿는다. 이거 내가 안고 다니던 놈이 이렇게까지 크다니 말이야. “나 더 클거야.” “그래, 더 커라. 크는 건 니 맘이고 좀 떨어져 줄래? 더워.” “왜 우리 집에 안놀러와! 삼촌, 보고싶었단 말야.” 라면서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는데 온 몸에 닭살이 활개를 친다. 이게..... 내가 니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아냐? 그렇게 느끼하게 쳐다보면 어떻게 해? “한 대 맞고 꺼질래, 그대로 꺼질래? 난 애라고 안봐준다. 어디서 느끼하게 굴어!” 하고 한 대 내리치자 그제야 슬슬 뒤로 물러선다. “민우가 많이 보고싶었던 모양이다. 장민우, 삼촌이 싫어하잖아. 더 옆에 있다간 너도 머리통 나가!” 킥킥거리며 말하는 건 둘 째 장지경. 내 성질 아는 놈이니 저런 말도 하지. 그 반응에 웃으며 Fuck you를 날리려다 다른 인간들이 많아 참았다. “그래도 난 삼촌이랑 결혼할거다, 뭐!” 크윽..... 저....... 게 나이도 15살이나 먹은 놈이...... 이 나라에 동성결혼 금지인 것도 모르냐? “장민우, 니가 우리나라 헌법을 바꿔준다면 내가 너랑 결혼해 주마. 그러니 구석에서 찌그러져라.” “내가 바꿔 놓면 다른 남자랑 결혼할려고?‘ “잘 아네? 알면 꺼져라. 난 너같이 젖비린내 나는 애들은 질색이야. 알아?” “씨, 못됐어, 삼촌.” “원래가 못되먹었다. 쪼꼬만 게 얻어터질려고!” 다시 손을 치켜 들자 금새 쪼르르 달려가 상원이 뒤에 숨는다. 저 쥐새끼 같은 게! “삼촌, 예쁜 삼촌이 나 때린다?!” “그만해, 민우야.” “니가 맞을 짓을 하잖아, 임마. 장인하 성질에 저 정도면 무지하게 봐준 거다. 쪼끄만 게 되바라져서 삼촌을 갈구냐?” 라며 상원이 뒤의 녀석에게 꿀밤을 먹이는 것은 세하였다. 나도 조카놈들은 그렇게 싫어하지 않아 가족과는 인연을 끊어도 저 놈들과는 자주 만나다 보니 친구들과도 모두 친하고 서로 터놓고 지내는 사이지만.... 말이지.... 저게 머리가 커가면서 날 아주 만만하게 본단 말야. “민우는 꺼지고, 세경이는 어디 있냐?” 죽은 장지환이 버리고 간 아들 세경이가 떠올라 찾자 민우 녀석이 금새 입을 놀린다. “세경이, 지혁이 형이랑 명우랑 같이 나갔어. 삼촌은 매일 세경이만 찾아.” 명우는 또 뭐래? “그 놈은 예쁘고 넌 싫거든.” “난 삼촌 좋아한단 말야.” “혼자 실컷 좋아해.” 자리를 돌아보며 무심히 말하자 저 멀리 한 무리의 인간들이 또 눈에 들어왔다. 강태민과 그 부모님들이었다. “안녕하세요? 태민이 담임입니다. 저번에 어머님은 잠깐 뵈었었죠?”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 표정을 바꾸고 인사를 건내자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두 부부가 나를 향해 바라본다. 그 표정에 약간 쓴 미소를 짓고 대하는데 옆에서 태민이 놈이 깝쭉거리기 시작한다. “우리 선생님 원래 변덕이 심해요. 그런데 진짜 예쁘죠?” “난 원래 예뻐!” “그래요, 원래 예뻐요.” 라며 실성한 놈 마냥 실실거리면서 웃어댄다. 망할..... 저 새끼한테는 이제 이런 수도 안통하는군. 저게 어쩔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 날 좋아하는 건 좋은데 말이지...... 그렇게 티내면 곤란하단 말이다. “일단 앉게나.” “네.” 억지 웃음을 짓느라 볼이 땅겨 왔지만 일단 친구들도 있고 권형이랑 태민이도 있으니 내가 참아준다. 씨발..... 내가 이런 인간들 틈 바구니에서 수다를 떨어야 되는 거야? “일단 식사부터 할까? 어떻겠나, 인하군.” “상관없어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전 지킬 만큼의 시간만 보내고 갈 꺼니까요.” “아, 그래도 모처럼인데 쌓인 얘기나......” “전 재수 없는 사람들하고는 오래 같이 못 있거든요.” 라고 이마에 솟아오르는 핏대를 겨우 가라앉히고 웃으며 말했지만 입 근육이 사정없이 굳어 있었다. 아까부터 옆에서 조용히 입 닥치고 있는 미친년의 존재가 너무 눈에 거슬려서..... “........ 솔직한 친구로군.” 이라며 웃는 아저씨는 모처럼 보는 호인같은 인상이었다. 뭐랄까나...... 다른 사람이 저랬다면 틀림없이 분위기 맞추려 용쓴다고 비웃었을 언어가 저 사람이라는 이유로 왠지 호인답다는 인상이 드니까.... 꽤나 괜찮은 인간이든가, 혹은 연극에 능숙한 개새끼든가 둘 중의 하나겠지. “안에 담고는 못 살거든요. 나중에 비비꼬이기 싫으니까 터놓는 거죠. 전 하기 싫은 건 죽어도 안하고 하고 싶은 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요,” 문제는 하고 싶은 일이 그다지 없다는 거겠지만..... 싱긋거리며 그를 대하는데 둘째 장지경이 옆에서 입이 사정없이 찢어진다. 흥, 기쁘냐, 새끼야? 저것도 어지간히 성질 더럽다니까. “왜 쪼개, 장지경.” “니 표정 가관이라...... 이런, 실례. 여러분...... 이 녀석을 모르는 분이라면 이 표정의 의미를 모를테니..... 진짜 니가 열이 받긴 받았구나. 입 근육이 다 굳다니..... 쿠쿡, 가관이야, 장인하.” 라며 거의 넘어갈 듯 느끼한 면상으로 웃어댄다. 망할 자식.... 나랑 잘 맞는 건 좋지만 저런 반응까지 비슷하니 벨 꼴린단 말야. “더 쪼개 봐, 너도 목뼈 으스러지게 해줄까?” 라며 그 쪽을 보고 싱긋 웃자 풀어진 입가를 금새 다물고 전체적인 얼굴 표정을 차갑게 굳힌다. 난 열 받으면 무슨 짓이든 못하는 게 없다는 걸 가장 잘 아는 게 저 새끼다. 물론 상원이야 내 옵션이었으니 다 봤던 게 사실이고.... 그 외의 큰 사건들의 유일한 목격자가 저 새끼였으니 내가 반쯤 정신이 나가 강아지 새끼 목 비트는 것도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겠지. 뭐...... 권형이 아버지..... 그러니까 나 버리고 튀었던 개새끼를 한 겨울에 한강으로 쳐넣은 것도 바로 옆에서 목격해서 나 끌고 도망친 놈이었으니. 내가 미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거 잘 알고 있겠지. “입 버릇 좀 고쳐라, 장인하. 돌 맞아 죽는다.” “니나 잘해라, 장지경. 난 내가 맞기 전에 돌 들고 있는 새끼들 한강으로 먼저 쳐박을테니까.” “....... 미친 새끼.......” 간만에 들어보는 말에 갑자기 웃음이 새어나와 오른 손을 들어 관자노리의 주변에서 빙빙 돌리며 맞받아쳐 주었다. “늘 얘기했잖아. 나 정상이 아냐. 뇌파가 이상하거든.” “........ 진단 잘 받고 있지?” 내 말에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진 장지경의 표정에 대고 피식 웃어주었다. 이봐, 인간 같지도 않은 돌팔이 의사아저씨, 괜히 안됐다는 표정 하지 말라구. 내가 이렇게 된데 그 쪽 집안 인간들이 꽤나 기여했으니까 말야. “아니. 심하게 발작하면 내가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나 기다리는 중이야. 그 상태보고 난 후에 약을 먹든 치료를 하든 해야지.” “거기서 더 갈 게 있냐? 넌 갈 데까지 간 놈이야, 이 정신병자야.” 정색을 하는 서른 세살 아저씨의 말에 난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신병자라...... 진짜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 그래. “장지경, 그래도 의사답네? 꼴에 말이야..... 돈으로 산 면허도 꽤나 유용한 모양이지?” 피식 웃으며 갈구자 그 쪽도 만만치 않게 대꾸해 온다. “뭘..... 돈 퍼부어서 겨우 교원자격증 받고, 학교 들어가려고 교육위원회 임원들 사생활로 협박까지 했던 너도 선생짓 하는데 내가 못할 리가 없지.” “너나 나나 비슷한 인생이지. 난 한 장 들었는데 넌 얼마였냐?” “한 세 장?” “멋져! 그러다 인간 몇 죽이라구. 그 때 쇠고랑 차면 쪽 팔리니까 내가 죽여줄게. 완벽한 사고사 위장으로 말야.” “내가 쇠고랑 차기 전에 니가 먼저 잡혀갈 걸. 너 털어 보면 별이 끝이 없을테니까 말야. 온갖 흉악 범죄는 다 저지르고 다녔잖아.” “난 기소 기간 얼마 안남았어.” “살인은 30년이야.” 피식 웃으며 득의양양한 그 얼굴에 난 빙그래 웃으며 장지경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가 낮고 조용하게.... 그리고 아주 섹시한 음성으로 속삭여주었다. “걱정 마.... 너도 공범이니까.” “장지경, 장인하! 장난도 정도 껏 해. 어린 학생들도 있는데....” 낮게 혀를 차는 장지원의 말에 다시 주변을 돌아보자 모두 우리 대화에 굳은 듯 어색한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대화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인데..... 뭐, 이 새끼랑 만나기만 하면 서로 죽어라 갈구는 게 일상이 되어서 말야..... “그래, 인하야. 손님들 많은데 해도 되는 얘기가 있고 아닌 얘기가 있어.” 라는 건 사촌 강상원. 그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며 한 번 웃어 보이고는 상원이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자 딱딱한 표정의 녀석이 다가온다. “뭐야?” “나 좋아하지?” “좋아해, 이 나쁜 자식아.” “응, 나 예쁘지?” “그래, 세상에서 제일 예뻐.” “응, 난 원래 예뻐.”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내 옆에 기대어 녀석도 웃는다. 이렇게 편한 관계 좋지 않아? 이 녀석은 나를 좋아하니까.... 죽어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놈이니까..... 믿어도 좋아, 그렇지? 강상원. “그러고 보니..... 명우랑 애들이 늦는군. 명우는 본 적이 없지.” 그래, 그 놈은 또 뭐래? 인자하게 말을 건내는 이씨 아저씨 말에 바보처럼 흐드러지게 웃자 잠시 당황한 듯 하더니 다시 말을 돌린다. “인하군에게도 동생 뻘이지. 친하게 지내게나. 외로워 하는 애들이니까.....” 라며 인자하게 웃길래 나도 또 한 번 배시시 웃어주었다. 후훗, 내가 완전 미친 거로군. 계속 웃어대게 말야...... “참, 삼촌아!! 삼촌 집에 좀 와라.” 또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파 뒤에서 내 목에 팔을 두르는 첫 째 조카놈 이마를 팔을 뻗어 한 대 치자 또 징징거린다. “왜 나만 미워해!” “시끄러!” “할머니가 삼촌 집에 와야된다고 했단 말야.” “....... 아줌마가?” 그 집에 입양된 후로도 단 한 번도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한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절대 뭐라고 하지 않던 차가운 여자..... 다른 사람들처럼 경멸스러운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됐다는 표정도 아니었고.... 항상 아무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아줌마가 머리에 스치자....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만간에 간다고 전해라.” “근데 왜 삼촌은 할머니한테 어머니라고 안해?” 라며 더욱 매달리는 막내에게 첫재와 둘째가 다그친다. 가족 얘기는..... 나보다 저 쪽이 더 싫어하는 것 같군. “우리 엄마가 아니니까......” 라고 딱 잘라 말하자 저쪽의 미친 년이 손을 파르르 떤다. 그 행동에 뭔가 미심쩍어 둘 째 장지경을 보자 또 시선을 돌린다. 뭐야.... 왜 저러는 거야? “그럼 삼촌 엄마는 어디 있어?” “..... 삼촌은 엄마 없어. 하늘에서 떨어졌다.” “헤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삼촌 아빠는 할아버지잖아.” “민우야!!” 애들 장난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을 하는 장지원의 외침에 의아해 그 쪽을 보자 얼굴이 파랗게 굳어져있다. 호적상으로야 그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지..... “삼촌 아빠는 할아버지 아냐.” “아냐, 맞아!! 할머니가 그랬는 걸. 삼촌이 다른 삼촌들 동생 맞다구! 이복동생이라고 했단 말야, 그러니까 삼촌한테 잘하라고 했어.” “그건 할머니가 괜히 그러는 거야. 삼촌은 아빠도 없어, 하늘에서 떨어졌다니까.” 자꾸 매달리는 녀석에게 짜증이 나서 뚱하니 뱉자 더욱 세게 매달려온다. “아냐!! 삼촌 우리 삼촌 맞아!! 할머니가 그 얘기한다고 했단 말야! 삼촌 우리 집 핏줄이랬어. 그 동안 너무 혼자 오래뒀다고 할머니 죽기 전에 데려온댔단 말야.” 떼를 쓰며 말하는 민우의 말에..... 온 몸에 한기가 돌았다. 그 여자가... 절대 없는 얘길 할 아줌마가 아닌데...... 제 입에서 나오는 건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한다는 그 아줌마가 진짜 그랬다구? 진짜? “......... 무슨 소리야?” 순간 온 몸에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저 눈과 입과 귀만이 허공에 뜬 채 부유하고 있다. 지금 뭐.... 라고? “..... 아무 것도 아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서둘러 고개를 흔들며 시선을 피하는 장지원의 반응에 그의 어깨를 잡아끌어 내 쪽으로 눈을 돌렸다. “말 바꾸지 마. 장지원. 말해!” “...... 모르는 편이 나아.” “웃기지 마! 이미 들었어. 뭐가 어떻다구?” “인하야......” 저 녀석이... 저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가면의 인간이 순식간에 표정이 변해 초조해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 거야? “말하기 싫으면 관둬. 장지경, 니가 말해. 뭐야?” “나중에...... 말하자. 장인하. 너 알면 미칠꺼야.” “이이상 미칠 게 어딨어? 말해! 얘기해, 장지경. 너도 내 손에 죽고 싶어?” “지금은 안돼, 너 정신 들고....” 콰앙-- 순식간에 원목으로 만들어진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찍었다. 새파랗게 질려버린 나의 안색에 모든 이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주먹에서 배어져 나오는 피도 어떤 아픔도 느낄 수가 없다. “그럼 니가 말해. 너..... 나 버린 미친 년...... 니 입에서 듣는 게 제일 정확한 말이지.” 온 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그 쪽을 노려보자 그 년은 아예 기절 직전의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안됐지만 그런 불쌍해 보이는 표정도 나한테는 거슬릴 뿐이야. “선생님, 이러지 말아요.” 어느 새 뒤에서 다가와 내 어깨를 잡는 권형이의 손을 세게 뿌리치고 그 년의 멱살을 쥐었다. “선생님!!!” “어서 말해. 뭐라고? 내가 들은 게 맞아? 내가...... 그 아저씨 자식이라구? 저것들이 진짜 내 형이라구?” “세..... 세영아.....” “그 딴 이름으로 부르지도 마!! 뭔지 말해. 그 사람이 내 친아버지라구? 장지환이 내 반쪽 짜리 핏줄이었다구?” “....... 세영아.....” 라며 애절하게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자살중독증에 걸린 개새끼가...... 내 형이었다..... 하? “인하야.....” 경악으로 굳어진 이들의 시선이 날아와 난 그 자리에 그대로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나를 데려간 그 아저씨가 내 친아버지? 그럼 처음부터 알고 날 입양한 건가? 그리고 나만 모르고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그 새끼가 죽으려고 한 거야? 그래서..... 나를 버린 거야? 순간 아찔한 빛과 함께 후레쉬가 터진 듯 새하얀 공간의 빛이 쏟아졌다. 그리고 시작되는 빛바랜 영상.... 오래된 흑백 영화처럼 지속적인 노이즈를 담고 나타나는 환영. 언제나와 같이 찬란한 햇살 아래 서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나의 손을 잡아끄는 작고 부드러운 손의 느낌이 손목에 와 닿았다. - 인하야.... 인하야...... - 꺼져...... 나쁜 자식..... - 너 아프다며? - 그래, 개새끼야.... 너 때문에 아파. 아파서 죽을 것 같아. 멍하니 이어지는 내 대답에 14살의 그가 애처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왜..... 너무나 오래된 기억이라 얼굴조차 바래진 기억들 안에 그의 눈빛만큼은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까? - 자꾸 아프면 어떻게 해? 형 이제 인하 아파도 못 보러 오는데.... 이제 너 혼자 아파야 되는데...... - 미친 새끼..... 그럴 꺼면 왜 죽어? - 나 힘들어..... 자꾸 아프면 어떻게 해? 인하... 우리 애기.... - 거짓말....... 힘들어서라고 변명 하지 마. - 너를 제일 사랑해....... - 나도.... 사랑해....... 왜.... 나한테 말을 안했어? 그냥 얘기해 버렸으면 편할 껄..... 왜 말을 안했어? - 널 아프게 하기 싫었어. 우리 인하..... 우리 애기.... - 울먹이는 작은 체구, 슬픈 목소리...... 그 영상에 얼굴에서 한 줄기의 눈물이 흘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 공간이 무너지며 하얀 벽과 주변의 공기들이 그 눈물 속으로 사라져 커다란 물줄기가 되어 나를 감싸 안는다. 점점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에 온 몸에 힘을 빼고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새파란 물 빛 위로 보이는 한 줄기의 빛과 나를 안는 따뜻한 물의 느낌. 이대로.... 이 안으로 빠져들면 편해질까? 그럼..... 나 더 이상 미친 짓 안하고 편해질 수 있을까? 악으로 똘똘 뭉쳐 미치지 않으려고 더 미친 짓 하면서 살았어. 그대로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아서..... 눈에 거슬리는 인간들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 다녔는데... 진짜 미치기 싫어서 미친 짓만 골라서 했는데...... 더 이상은 이렇게 사는 거 끔찍해. 그냥 이대로 편해지고 싶은데...... 이 심연의 아래.... 니가 있는 거야? 그러냐, 장지환..... 개새끼..... 나 버리고 도망친 벨도 없는 씹새끼. - 아이다..... 아이가 가라 앉는다.... - 나른하게 놓은 정신 사이로 섬뜩한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투명한 물의 장막 안에 내 숨을 틀어막는 원귀들....... 내 귓가를 돌며 신경을 찢어놓는 비웃음 소리...... - 죽는다. 죽어.... 가라앉는다..... - 사방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와 냉소, 그리고 나를 끌어당기는 기포들....... 이해할 수 언어로 지껄이며 내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흉악한 기억의 얼굴들이 나를 감싸고 돈다. 그것들을 떼어내려 다시 발버둥을 치며 수면으로 나가려하지만 저 위의 수면에서부터 서서히 얇은 얼음의 장벽이 생성된다. 나를 가두기 위해, 서서히 내 숨통을 조이기 위해 굵어지는 얼음벽. 따뜻했던 물의 기억은 점점 사라지고 뼈까지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타고 심장으로 다가간다. 안돼...... 이렇게 죽으려고 겨우 버틴 게 아냐. 아직..... 해야할 일도 봐야할 것도 많아. 적어도 나를 괴롭히는 모든 기억들의 잔재들이 소멸될 때까지 난 숨을 쉬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무 불쌍해져...... 난 아직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이런 최후를 위해 독하게 연명해 온 게 아냐. 내 인생, 내 친구들의 인생까지 담보로 잡혀가며 아둥 바둥 살아온 게 아냐......... 장지환....... 이렇게 죽으려고 널 보낸 거 아냐....... 니 곁에서 죽기보다 살기를 택한 나야. 너를 버리고까지 택한 삶을 이렇게 버릴 수는 없어. 이 빌어먹을 자살 중독증 환자야...... 나 진짜...... 어쩌면 내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꿔도 좋을 정도로 널 사랑했던 거야...... 그 모든 것과 바꾼 삶을 이렇게 포기하긴 싫어...... 나..... 그럼 불쌍해서 어떻게 해..... 날 깨워..... 누구든 날 깨워 줘. 내 손을 잡고 얼음 벽 위로 나를 끌어올려....... 상원아..... “장인하!! 정신 차려!!” “커억.........” 귀를 때리는 무서운 목소리에 눈을 뜨자 숨이 한 꺼번에 몰려나와 토기가 일었다. “쿨럭....... 커억.....” “인하야!!”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등을 두들기는 손의 힘과 눈빛에 뒤로 돌아가 버린 동공을 겨우 겨우 맞춰 초점을 찾았다. 머리 안에서 멀미가 일어난다. 세상이...... 하얀색에서 무채색의 조합으로, 그리고 다들 서서히 빛을 찾아 색상을 띤다. “인하야, 장인하! 나 누군지 알아 봐, 괜찮아?” 바로 내 눈 앞에 있는 얼굴을 보자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 나갔다. “장지경...... 씹새끼.” “...... 제 정신이군. 괜찮아?” 라며 낸 동공을 확인하는 그의 행동에 눈에 뭔가 거슬리는 게 있어 손으로 닦자 피가 베어 나왔다. “나..... 또 무슨 짓 했어?” “..............” “솔직히 말해. 나.... 무슨 짓 했어?” “...... 별 거 아냐. 민폐는 안끼쳤다. 테이블에 머리 박다 피가 난 거야. 진짜 세게도 박더라. 안에 혈관이 터지지 않았나 걱정이네.” 뭔지 모를 천으로 내 이마를 닦아내려던 장지경의 손목을 잡고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자 시선이 흔들린다. 나와의 시선을 피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너도 알고 있었냐?” “........” “솔직히 불어. 알고 있었어?” “........ 미안......” “..............” 완전 시선을 피한 장지경의 얼굴을 보자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리고 아무 감정 없이 흘러나가는 차가운 목소리..... 나를 찾아오는 그 원귀들의 울림처럼 공허하고 텅 비어버린 목소리..... “....... 그 불쌍한 새끼..... 나 때문에 죽은 거지..... 그렇지, 장지경?” “니 잘못이 아냐. 우리..... 잘못이야.” “내 잘못이라는 게 아냐. 나 때문에 죽은 거지? 내가 사랑해서, 나를 사랑해서 죽은 거지? 그 개새끼..... 열라 죽을려고 발악하던데..... 그거 진짜 나 때문이었지? 그 자식 나 사랑한 거지? 그렇지, 장지경? 그 놈 진짜.... 나만 사랑한 거지.......?” “....... 인하야.....” “그 불쌍한 새끼, 나한테 한 마디도 못하고 혼자 죽은 거지? 니네는 다 알고 있으면서 한 마디도 안한 거지?” “..............” “그렇지, 개새끼들아. 그 새끼가 죽은 건 나 때문이지만, 그 놈을 죽인 건 너희지? 너희가 죽인 거야. 내 모든 걸 걸었던 단 하나의 희망을........” 모든 이들이 침묵한다. 거실 안에는 무겁고 추운 기운만이 감돌고 내 머릿 속에는 무너진 지각 사이의 흉측한 몰골들만이 떠다니고 있다. 내가 죽였던 그 새끼...... 권형이의 친부...... 가 비웃는다. 내 눈 앞에서 즐거운 듯 웃어댄다. 그럴 줄 알았다고........ 거지 꼴을 한 새끼가..... “가자, 인하야. 인하야.........” 내 어깨를 잡아끄는 힘에 난 멍하던 시선을 돌려 나를 보는 눈과 마주쳤다. 눈물이 고여 있는 세 녀석의 표정에 오기가 일었지만 지금은 자존심이고 오기고 세울 정신도 남아 있지 않아. “미안하다. 장인하.....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가자, 인하야.” 조용한 목소리와 내게 내밀어진 손........ “가자..... 우리가 평생을 따라가 줄게. 너 독한 놈이잖아..... 장인하. 이런 거 별거 아니잖아.” 어깨를 감싸안은 힘과 울먹이는 목소리...... 그리고 어깨에 닿는 따뜻한 체온. “가자. 인하야....... 근성을 잊지마.” 울음을 참고 있는 목소리..... 그래, 이 놈들은 다 알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장지환이 나한테 어떤 존재였는지..... 그래서 그렇게 울려는 거지? “체는...... 내 인생의 목표, 늘 말했잖아. 난 이 세상 최고의 악질적인 인간이 내 꿈이야. 그러니까.....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아. 병신들아...... 그러니까 울면..... 가만 안둘꺼야. 나 불쌍하다는 새끼들 난 절대로 용서 안해.” 내 말 한 마디에 울먹거리던 입술을 꼭 깨무는 성준이와 말 없이 내려다보는 상원이, 그리고 겨우 표정을 굳히는 전세하. 진짜...... 이것들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내가 늬들 인생 망쳐놓고 있는데...... 그래도 내가 좋아? “그럼 일어서. 그리고 평소처럼 신나게 비웃어주고 잊어버려. 다 뒤엎고 속 시원히 잊고 니 갈 길로 가. 장인하, 그게 니 특기잖아.”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원이의 말에 난 피식 웃으며 내 앞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어차피 살인에 공갈에 안해본 게 없는 게 내 인생인데....... 근친이야 우습지. 그렇지 않아? “그래, 특기지. 절벽에서 다이빙한 기분이야. 다시 기어올라가야겠지?” “그래, 기어올라가든 절벽을 부숴버리든 니 맘이지.” “그래, 나 좋아하지?” 멍한 정신 안에 도는 일그러진 차원을 무시하고 예쁘게 웃어보이자 모두들 겨우 희미하게 웃는다. “그래, 좋아해..... 정신병자야.” “그래, 나 예쁘잖아.” 싱긋 웃고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우자 빈혈기가 돌아 휘청했다.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고 눈 앞을 가리는 핏줄기는 손으로 대강 닦다 찝찝해져 세하의 양복을 끌어당겨 닦아내자 이마에 저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으아악!! 이거, 악질!! 새양복이란 말야!!” 길길이 날뛰는 세하 놈을 흘깃 올려다보고는 멱살을 쥐고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불만 있어?” “............ 이.... 독한 자식.....” 이를 가는 녀석의 눈에 아직도 나에 대한 연민이 가득하다는 게 느껴져 쓰게 한 번 웃고는 녀석의 타이를 쥔 채 나머지 두 놈을 바라 보았다. “가자, 술이나 마시자! 기분 더럽다.” “그래.” 모두들 아무 저항 없이 웃으며 따라나온다. 그 모습에 싱긋 웃고는 얼어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자 진짜 미친 것을 본 듯 한 얼굴이길래 한 번 피식 웃어주고는 기가 막혀하는 인간들을 떠나 그 집을 나왔다. 이제...... 두 번 다시 가지 않으리라... 맹세하고..... 술을 마시고 한참을 떠든 후 집에 돌아오니..... 또 시작이다. 죽일 것들.... 이미 죽어버린 것들이, 나와 관계없는 것들이 왜 아직도 남아서 내 정신을 갉아먹으려 하는 건데? 늬들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난 죽지 않아. 절대 그 심연 깊은 곳으로 가라앉지 않아. 나는 살아남을 꺼니까.... 뭐라고 해도 너희들이 아무리 비웃고 나를 조롱한다 해도 나는 결국 살아남을 꺼야. 너희들은 원귀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야. 너희는 죽은 자들이고 나는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사람이야. 너희는 나를 죽일 수 없어. “닥쳐...... 꺼져 버려.......” 귀에서 웅웅거리는 외침에 손을 저으며 방으로 들어가 약상자를 찾았다. 이제부터 잠을 자자...... 잠을 자고 나면 괜찮아 질꺼야. 괜찮지 않다면 또 자면 되니까..... 계속해서 자면 괜찮을 꺼야. 수면제를 찾아 들고 그대로 씹어먹은 후 침대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잠을 자고 나면 이마의 통증도 울리는 머리도 괜찮아 질꺼야. 나는.... 괜찮을 꺼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 체 눈을 떠보니 날짜가 이틀이 지나 있었다. 왠만한 진통제는 통하지 않지만 수면제만은 확실히 효과를 보는군.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 대강 아무 거나 먹은 후 다시 수면제를 먹고 잠을 청했다. 머리가 띵해 왔지만 자는 동안만은 조용하니까..... 아무도 나를 방해할 수 없는 시간이니까 점점 잠에만 빠져든다. 이대로..... 가라앉아 편해지고 싶은데...... 미안하게도 아직 죽을 수는 없거든.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 다시 침대에 눕자 금새 잠에 빠져들었다. 또..... 잔다. 언젠가 눈을 뜨면 잊혀지길 바라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또 이틀이 지나있었다. 어떻게 해도 떠오르는 환영들 때문에 4년 전에 끊었던 수면제까지 먹어가며 잠만 자고 있지만. 눈을 뜨면 현실을 알아버릴 것 같아서..... 그게 너무 괴로워서 점점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길어져간다. 또 다시 아무 거나 시켜서 식사를 하고는 또 수면제를 먹었다. 이제 이골이 날만도 한데.... 아직도 머릿 속의 혼란스러움이 사라지질 않는다. 그리고........ 결국 또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또 이틀이 지나 있었다. 찝찝한 기분에 더 이상 자고 싶지도 않아 멍하니 허공을 향해 넋을 놓고 있자 그것들이 또 지랄을 하며 달라붙는다. 피카소의 그림처럼 일그러진 공간과 비명을 지르는 것들 때문에 이제는 아예 짜증이 일었다. “씨발....... 왠지 화나네, 이거.” 머리 안을 맴도는 것들의 존재에 갑자기 화가 뻗쳐 벌떡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공간 감각에 없어져 조금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참을만은 했다. 이러고 19년을 살았으니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하지. 씨발...... 옷장을 열어 젖히고 야구모자를 꺼내 쓴 후 옷장 안 속에 오랫 동안 감춰뒀던 야구 배트를 꺼냈다. 윤진이 자식 밤길에 습격한 바로 그 물건이니.... 참으로 유서 깊은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망할...... 내가 동네 깡패도 아니고..... 그래도.... 역시 무슨 짓이든 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그대로 방망이를 들고 열쇠를 챙겨 현관문을 열었다. - 나간다.... 나간다..... - 씨발, 원귀들. 졸라 시끄럽게도 떠드네. 망할 것들이 왜 이렇게 수군덕거리는 거야? “닥쳐! 환영이면 환영답게 찌그러져!” 혀를 차며 한 번 욕을 하고는 목에 감겨오는 미친 년의 형상을 무시하고 그대로 아파트를 내려와 차를 타고 권형이의, 아니 미친 년의 집으로 향해갔다.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잠만 퍼잔데다 약 기운이 아직 남아 머리가 멍했지만 벨을 누르고 당황해하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과감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가자 안에서 그 미친년과 인상 좋은 아저씨가 튀어나왔다. 항상 집에 계시나? 아주 한가하시네..... 요즘 외무부는 할 일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잘 왔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수상해 보이는 내 차림과 손 안의 야구 방망이를 쳐다보며 말을 끄는 그의 반응에 난 생긋하고 환하게 웃어주고는 찾아온 목적을 간단히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열이 받아서요. 화풀이 하러요.” 말을 마친 나는 그가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야구 배트를 들고 가볍게 스윙하는 동작으로 거실 중앙에 놓인 비싸 보이는 항아리를 먼저 깨보였다. “무슨 짓인가?” “꺄악!!” 귀를 막으며 계단으로 도망가 소리치는 꼬맹이와 아저씨에게 안겨드는 미친 년, 그리고 놀라서 소리치는 아저씨! 그 반응에 피식 다시 한 번 웃어주고는 거실 베란다로 가 전면 유리를 엄청난 파열음과 함께 사정없이 깨버렸다. 차앙-- 명쾌한 소리와 함께 조각 조각난 유리를 보자 겨우 기분이 풀리는 거 같았다. 역시 스트레스는 풀어줘야 된단 말야. “꺄아악!!!” 놀라서 발광하듯 소리치는 미친년의 목소리에 더욱 상쾌해진 기분으로 나머지 것들을 때려부수기 시작했다. 워낙에 힘이 세다 보니 조금 기운이 딸려도 부수는 데는 별 지장이 없군. 역시 힘은 세고 볼 일이야. 있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깨부수고 왠지 상쾌해진 기분에 돌아보니 저 멀리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너한테는 별로 감정 없지만...... 재수 없는 집에 입양된 죄려니 해라. “아, 이제 좀 시원하네요. 그럼....... 이만.” 상쾌한 기분에 아저씨에게 인사까지 하고 나가려는데 현관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뛰어들어왔다. 아아....... 간만이다, 권형아.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 거실 안의 처참한 몰골에 인상을 쓴 녀석이 곧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화풀이하러. 머리가 아파 와서.” “...... 왜 이래요...... 이러지 말아요.” “난 하고 싶은 건 해야 돼. 얘기했잖아, 수단과 방법을 안가린다구.” “선생님!” 무거운 목소리로 화가 난 듯 소리를 지른 녀석의 얼굴을 아무 감정 없이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이건 내 맘이야, 니가 관여할 영역이 아냐.” “.......... 차라리 말을 해요! 왜 이렇게 모질게 굴어요?” “얘기했잖아. 나 독한 놈이라구. 나 악랄하고 잔인한 놈이야. 이 세상에 나 하나만 소중하고 제 멋대로라구. 그런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너는 보기만 하면 돼.”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버럭 내질러진 노성에 난 비웃음을 걷고 녀석의 눈을 노려보았다. 난 틀림없이 경고했다. 내가 하는 일에 관해서는 상관하지 말라구. 경고했었어........ 그 경고를 지키지 않는다면 너도 윤진이 자식과 다를 바 없는 거야. “너와 관계된 사람들의 일이니 무시할 수 없다는 거야? 웃기는군. 자기와 관계없으면 무시하고 이어지는 일이라면 뭐든 상관 하겠다구? 너도 속물이구나, 유권형.” “선생님!” “소리 지르지 마. 나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혼란스럽고 머리 안은 엉망이야. 까불면 너도 가만 안둬.......” 얼마 전까지의 행복이나 다정했던 기억들은 저 멀리로 치우고 있는대로 상처를 입히며 이죽거렸다. 늘 얘기하지만..... 난 절대 상처만 받고는 못살아. 나만 당하고는 안산다구! 모두가 상처를 받는거야..... 그러니까.... 너희도 상처 좀 받아야 돼. 그게 이치에 맞잖아? 주는대로 받는 거 아닌가? “왜 이러는 거에요? 차라리 소리치고 울면 안돼요?” “내가 진짜 미쳤냐? 나만 불쌍하다고 소리치고 울게? 안됐지만 그런 것만은 절대 사양이다. 질색이야..... 나 세상에서 울고 매달리는 새끼들 제일 재수 없다는 사람이야. 그런데 왜 내가 그런 짓을 해야 돼? 널 위해서? 웃기지마.... 너라도 나한테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열 받으면 받은 대로 터뜨리고 받은 만큼 갚아줘. 그게 뭐가 어때서? 아니면 너도 나한테 바르게 살라고 설교라도 하려는 거야?” 철썩-- 순식간에..... 내 뺨을 올려붙인 것은 권형이의 손이었다. 그래도 힘은 조절했는지 나가 떨어지진 않았지만 말하던 중이라 혀를 깨물었는지 입술에서 피가 새어나왔다. 망할...... 재수가 없으려니 어린 놈한테 맞기도 하는구나, 장인하. “........ 바른 생활을 내게 가르치려는 생각이라면 입 닥치고 꺼져. 이 때까지 바르게 산 적도 없고 바르게 살 생각도 없으니까. 그런 내가 꼴도 보기 싫다면 너도 사라져. 너도 다른 녀석들과 마찬가지니까.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마.” 입술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도 야구 배트를 집어던진 후 그 집을 나왔다. 안에서 들리는 그 미친년의 울음소리와 꼬맹이의 비명은 신경쓰일 건덕지도 아니다. 제기랄.....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유권형..... 병신 새끼! 권형이와 싸우고 이틀이 지나도 녀석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재수 없어.... 라는 말을 반복하며 집안에 쳐박혀 있는데 이번엔 상원이까지 사라져서 온 집안이 난리고.... 아줌마가 오라는 연락을 몇 번이나 했지만 무시하고 본가에도 가지 않았다. 점점 불길한 생각이 스쳐간다.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데.... 이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되새기며 생각해도 자꾸만 자신이 없어진다. 장지환과는 어떨 수 없었던 일이었다 쳐도 윤진이는..... 윤진이는..... 다시 되살아나는 아픈 기억에 되는 대로 하고 나와 서윤진의 옛날 집앞에 섰다. 아마...... 이 집이 맞을 것이다. 정확히 내가 야구 배트 들고 습격했던 데니까........ 어떻게 알았는지 선물 꾸러미를 든 여자애들도 몇이 보이니 확실하겠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창틀에 팔을 괸 채 녀석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왜, 기다리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오래 전의 기억들을 더듬다 보니 녀석과의 일을 확실히 정리해둘 필요성을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아마.... 그 녀석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와 장지환의 관계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고백한 녀석이었으니까.... 그리고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던 녀석이었으니까. 서윤진 개새끼야.... 나 잔인하다고 욕해도 어쩔 수 없어. 너는 말 실수로 한 말이겠지만 넌 내가 가장 아파하는 부분을 건든 거야. 너 아니었으면 진짜 죽여버렸을 꺼야. 너니까.... 봐준 거야. 그냥 잊는 걸로, 내 감정 내가 추스리는 걸로 용서한 거야. 내가 틀럼없이 경고했잖아. 자신 없으면 뛰어들지 말라고, 견딜 정도의 정신이 아니라면 객기 부려서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지만 내가 그어준 선을 지워버린 건 너야. 니 스스로 알아채고 추궁하고 생난리 치는 거 꼴깝이잖아. 먼저 사랑한 건 너였어.... 너는 무관심하다 말했지만 그게 아냐. 나 정말 너 사랑했고, 너무 사랑해서 널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이 장인하가 꼴에 니 말이라면 뭐든 믿고 듣고, 너만 따르고 니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줬어. 니가 약속을 어기든, 내게 거짓말을 하든, 다른 여자와 자고 들어오든 난 모두 이해하고 화내지 않았어. 그게 너에 대한 내 사랑이었다는 거 넌 몰랐지? 몰랐다면...... 넌 날 사랑하지 않은 거야. 그게 내 방식이었으니까..... 니가 나 버릴까 봐, 네 세계에서 밀려나기 싫어서 발악을 하던 게 나였어. 그런 날...... 너는 단 한 마디로 죽여버린거야. 나쁜 자식..... 잔인한 자식...... 창 나에서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는데 여학생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차 한 대가 골목으로 들어선다. 라이트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자 짙게 썬팅된 채 지나가던 차가 멈춰 서서 창문을 내린다. “......... 장인하.......” “..........” 운전석에서 나를 알아보고 나온 이름에 난 그대로 아무 말도 없이 차를 몰아 그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윤진이 역시 당연한 듯 내 뒤를 따라나왔다. 한강 고수부지에 차를 세우고 내려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채 담배를 빼물자 곧 윤진이 자식의 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멈춰 선 후 한참이 지나자 문을 열고 나선다. 저게 내가 7년 전 사랑했던 남자의 모습이다. 짧은 머리카락에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큰키와 어딘지 차가워 보이는 인상의 남자..... 역시 내 취향에는 일관성이 있다니까. 하나 같인 다 비슷한 이미지잖아. 나완 어울리지 않게 단정하고 바른 생활에 길들여진 이상적인 녀석들이라니.... 게다가 농구 선수.... 흥, 웃기지도 않는군. “오랜만이다, 서윤진.” “........ 그래....... 오랜만이야. 몸은.... 괜찮아? 아파 보여.” 작게 더듬 더듬 나온 녀석의 말에 그냥 피식 웃어버렸다. 이미 헤어진 녀석 얼굴이 엉망이든 제대로든 상관없는 거 아닌가? “아, 그건 니가 상관할 바 없는거고.... 너한테 물어볼 게 있는데 말야.....” 말을 끊고 다 타들어간 담배를 집어던지고 다리를 쭉 펴서 일어섰다. 그리고 새 담배를 꺼내물고...... 불을 붙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말이지, 사실..... 너랑 헤어졌을 때 딱 한 번 죽으려고 손목에 칼을 댄 적이 있었어. 하지만.... 긋지는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왠지 사귀는 녀석과 헤어지면 진짜 죽어버릴 것 같거든. 물론 혼자서는 안죽겠지만...... 진짜... 이번에는 그 자식 죽이고 나도 같이 죽어버릴 것 같아. 어떻게 생각해? 서윤진?” 담배를 물고 빙긋 웃으며 바라보자 녀석의 표정이 티나게 굳어졌다. “너..... 이제까지 내게 했던 말 중에 가장 잔인한 말을 하고 있다는 거 알아?” “글세...... 네가 그렇게 느낀다면 그런 거겠지. 내 질문에 답해 줘. 내가 어떻게 해야할 거 같아?” “....... 잔인한 자식...... 진짜..... 악마 같은 놈이야, 너. 내게 그런 걸 물으면 내가 친절하게 답해줄 꺼라고 생각한 거야?” “네 때와 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으니까. 항상 말하지만... 니가 준 상처는 나 죽을 때까지 잊지 않아. 물론 그 답례도 잊지 않고 있고. 그러니 넌 내가 원하는 걸 해줘야할 의무가 있어.” 인간같지 않게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윤진이의 눈가가 사락 젖어든다. 씨발, 그렇게 불쌍한 얼굴 하지 말란 말야. “........ 나 아직도 너 사랑해.” 그 한 마디에 머리가 아찔해져 온다. 왜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아직도 날 사랑한다구? 지난 7년 간 계속? 웃기는 소리로군. 그렇게 사랑해서 날 그 꼴로 만들어 놓고 찬 거야? 진짜.... 이건 웃기지도 않은 유머야, 서윤진. “질렸다고 버린 건 너야. 이제 와서 그러는 거 진짜 밥 맛 떨어져. 내가 묻는 말에만 답해.” “장인하.........” “니가 나한테 한 일 생각하면 이 정도는 상처받을 꺼리도 못돼, 개새끼야. 내가 원하는 답만 주면 돼.” “....... 너 진짜 잔인한 놈이구나...... 이기적이고......” 내가 잔인하다구? 그래, 나 잔인해..... 하지만 그 잔인한 놈을 더 잔인하게 차버린 건 너야. 그렇게 악랄한 내가 너 때문에 죽을 생각까지 했었어. 그런데 나더러 이기적이라구? 아주 좋겠구나, 서윤진. 너희는 언제나 내 탓만 하면 되니까..... 언제나 내가 제일 나쁜 녀석이지..... 그래, 스스로 그렇게 되길 바란 것도 사실이지만 넌 내게 그런 말할 자격 없어, 너에게만은 절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웃기지 마. 서윤진...... 너도 조금도 자라질 못했구나..... 병신 같은 새끼. 찾아온 내가 바보지.” ▷ track 05. 어떻게 해도 흘러가는 것은 시간인지 아직 정확한 결론도 내지 못한 상태에서 합숙 날짜가 되었다. 사실 고문 선생이란 거 가도 안가도 그만이지만....... 예의 상 참석은 해야하고 무엇보다 이대로 합숙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되든 가서 해결을 봐야 한다. 이 방학을 이대로 보내고 난다면 2학기 첫 날 신문에 모 고등학교 학생과 선생 동반 자살.... 이라는 타이틀의 신문이 나올지도...... 흐음..... 그건 너무 민폐니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해봐야지. 원 래가 노력이란 건 질색을 하지만 그래도 내가 빠져들었으니 책임은 져야겠지. 망할...... 유권형. 원래 차를 갖고 갈 생각이었지만 그것도 귀찮아 그냥 농구부가 타고 가는 버스를 타기로 하고 가벼운 여행짐을 싼 후 학교에 도착했다. 체육관에 들어가 대강 출석을 확인하고 차에 올라탔다. 원래는..... 말이지. 트레이너랑 감독은 따로 차를 끌고 올테니까... 내가 권형이와 함께 타야겠지만 아침부터 계속 나를 피하는 녀석 때문에 열 받아 경진이 놈을 강제로 옆에 앉혀버렸다. “이거 원래 주장 자리 아니에요?” 라며 자리에 앉으면서 뚱하니 말하는 녀석과 바로 뒷자리에서 나를 눈이 빠져라 쳐다보는 태민이, 그런 태민이 때문에 열 받아 입을 다문 고양이 같은 눈의 지혁이. 통로를 건너 그 반대 쪽의 권형이. 그 놈은 차를 탄 후부터 계속해서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 저게 진짜 나랑 동반 자살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앉히는 건 내 맘이다. 빵이나 먹어라.” 아침에 밥을 못 먹고 나와 사온 빵을 건내자 녀석이 갸우뚱하며 받아들고 봉지를 뜯는다. “권형이 형이랑 싸웠어요?” “몰라. 말도 하지 마라. 해골 복잡해.” 나도 왠지 화가 나 뚱하니 말하자 뒤에서 누가 경진이를 툭툭 치더니 자리를 바꾼다. 넌, 또 왜 오니, 강태민. “뭐냐?” “권형이 형이랑 싸웠어요?” 내가 그 놈하고 싸웠다고 아예 사방 팔방 다 떠들고 다녀라. 그 새끼 바로 옆자리에 있는데 참 작게도 말한다. “조금 그럴 일이 있었어. 그런데 왜?” “........ 제가 옆자리에 앉아 가도 돼요?” “니 맘대로 해라. 귀찮게만 안하면 돼.” “그럼 제가 앉을게요.” 라며 싱긋 웃고는 아예 푸욱하니 내려 앉는다. “표정 안좋아요. 많이 열 받았죠?” “티 나냐?” “네, 많이 티나요. 선생님 얼굴 표정 지금 장난 아니라구요.” “어떤데?” “......... 전 사람이 화나서 얼굴 하얗게 질리는 건 안 무서워요. 그런 사람들은 폭팔하고 나면 곧 괜찮아지거든요. 하지만..... 지금 선생님 표정은요......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런데 어딘지 틀려요. 너무 화가 나는데..... 말도 표현도 안하고 싸늘하게 굳어버린 느낌이에요.” “그래? 잘 봤군.” 시선을 돌리며 받아치자 태민이 녀석이 팔걸이에 걸린 손을 잡아온다. “아프면요....... 저한테 기대도 돼요. 저 별로 믿음직하지는 못하겠지만...... 선생님 진짜 좋아해요.” “....... 어린놈이....” 라고 말하면서도 기분이 많이 풀린 것 같았다. 역시..... 나 말이지..... 좋아한다는 말에 약한 거 같지? 이 놈이 말이지....... 그 난리를 치고 좋아한다고 땡깡을 피고 고집을 부려도 예쁜 이유가 날 좋아해서가 아니겠어? 피식 웃으며 녀석의 말 그대로 그 어깨에 기대었다.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느낌에 눈을 감고 다른 생각을 시작했다. 만약에 말이지...... 만약에 하나라도 권형이 놈하고 쫑 나면 말이지...... 나 이놈한테 조금 떼를 써도 좋을까? 진짜 녀석과 내가 깨지고 그 놈과 내가 동반자살까지 가질 못한다면 나 이 녀석에게 어떤 기대를 걸어도 좋을까? 이 녀석을 믿어도 좋을까? 지금에야 하는 생각이지만..... 만약 권형이와 이렇게 되지 안하따면 나 이 놈에게 끌렸을지도 모르는데 말야. 착하고 순한 녀석이니까........ “미쳤어........” 훗, 나가 죽어라, 장인하. 미친 생각이지. 죽기 살기로 덤빈다던 기지는 어디 가고 그런 약한 생각을 하는 거냐? 여기서 또 자라나는 새싹 하나 인생 조질려고? 이 놈은 안된다...... 절대 안돼..... 권형이 놈이야 지가 판 무덤이고 친구들은 그렇다 쳐. 하지만 이 어린놈은 안돼..... 내 제잔데...... 그리고 아직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어린놈이잖아. 이런 녀석을 데리고 뭘 하겠다는 거야? 길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들려는데 뒤에서 무서운 소리가 울렸다. “선생님하고 태민이가 바람 핀다!!!” 갑자기 뒤에서 날아온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우리 자리로 향했다. 옆 좌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권형이의 시선 역시. “무슨 소리냐? 정경진!” “둘이 같이 안고 있었어!!” 라며 일어서 앞으로 내려다본다. 망할 자식, 이게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냐? “그래, 나 이놈하고 사귄다, 어쩔래?” “말도 안돼!!!” 라면서 또 벌떡 일어서는 것은 이지혁...... 아우, 왠수들!! “말이 되든 안되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이지혁!!” “선생님이 그래도 돼요?” “씹탱아, 늬들 필요할 때만 선생님이냐?” “자기가 선생이라는 자각도 없는 사람이 무슨 소리에요?” 라고 소리를 빽 지르길래 열 받아서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일어서려는데 녀석이 바로 옆의 태민이 놈이 귀가 아파올 정도로 큰 소리를 내질렀다. “시끄러웟, 다들 자리 앉아!” 갑자스런 그 목소리에 심장이 떨려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이 자식이 왜 이래, 얌전한 자식이...... “.... 왜 신경질은 내고 그래, 태민아......” 기가 팍 꺽여 우물거리는 경진이에게 태민이 놈이 한 번 쏘아보고는 내 목을 끌어안는다. 어라? 얘가 왜 이런데? “신경 쓰지 말고 자요.” “신경 쓰여. 너, 니 자리로 가라.” “싫어요. 나 선생님하고 같이 갈 거에요.” 라며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는데..... 말이지, 이거 심각한 상황이지? 아무래도 너랑 나랑 그렇고 그런 관계로 밖에 안 보이잖아. 왠지 그 상황이 벨이 꼴려 손을 뻗어 녀석의 목을 내려 팔로 감고 이번엔 내가 녀석을 끌어안았다. “어린 게 누굴 안아? 이러고 잘테니 참아라.” 녀석의 목을 누르고 그대로 녀석의 등에 몸을 기댄 채 꾹 내리 눌렀다. 그러자 나오는 이상한 신음 소리...... “허리 아파요!!” “아프라고 누르는 거다. 모르겠냐?” 킥킥거리며 녀석을 그대로 누른 채 차가 출발했다. 그리고..... 아마 난 그렇게 잠이 든 거 같다. “선생님 도착했어요. 일어나요!!” 몇 시간 걸리지 않아 도착한 합숙소에서 눈을 뜨니 태민이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 동안 잔 게 얼만데 도 자냐? 아직도 약 기운이 가시지 않았는지 머리가 띵한 게 계속 잠이 올것만 같아 서둘러 일어섰다. “벌써 도착했냐?” “네.... 다들 내렸어요.” “그래.......” 찌뿌둥한 몸을 피며 먼저 일어난 녀석이 나가기를 기다렸다 가방을 내리려는데 순간 멈춘 차가 덜컹거리고 흔들렸다. “어어....... 어?” 아직 정신이 제대로 들지 않아 차의 진동에 휘청이며 쓰러지려는데 다행히 누군가 뒤에서 나를 받쳐주어 엎어지는 건 면했다. 멈춘 버스 안에서까지 엎어진다면...... 진짜 쪽 팔리잖아. “.... 어, 고맙다.” 태민이인 줄 알고 가방에 손을 대며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데 뒤에서 나를 바치고 있던 손이 어깨를 안아왔다. 태민이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느껴지는 숨소리.......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가방을 내리던 손은 멈추고 어깨뒤를 돌아보자 주장의.... 단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보자 마자 도 두근거리네. 속이 울렁거리다 못해 넘어오겠다. “아직도 화났어요?” 나와 시선을 맞추고 진지하게 묻는 주장, 아니 권형이의 목소리에 독기를 잃은 언어가 흘러나간다. “........ 그런 거 같아. 넌?” “....... 모르겠어요.” 라며 깊숙히 허리를 끌어안고 목가에 얼굴을 묻는다. 그 간지러운 느낌과 부드러움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아직은...... 회생의 가능성이 있는 거지? 너 나 진짜 사랑하는 거 맞잖아. “우리 얘기해요..... 얘기해서 서로 오해하고 힘든 거 다.......” 굉장히 진지한 얘기를 하려는 권형이의 기세에 입을 다물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닫혔던 앞문이 열리며 누군가 기세 좋게 들어선다. 쾅!! “선생님 다 집합했어요!!” 차 문을 열고 앞에 버티고 선 태민이 덕에 간만의 분위기가 깨져버렸다. 아우, 저 새끼는 분위기 파악도 못하나? “빨리 내려와요!” 왠지 화가 난 듯 한 표정의 태민이 덕에 할 수 없이 권형이도 내 어깨에서 손을 떼고 나도 가방을 들어 차를 빠져나왔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덕에 눈앞이 하얘져 정신이 아찔해진다. 내가 이렇게 햇빛 찬란한 날에 나온 게 얼마만이더라...... “자! 다들 정렬했냐?” “네!” 어슬렁거리며 줄을 선 녀석들을 눈대중으로 확인하는데 옆에 미리 도착해 있던 다른 학교 애들도 보였다. 대부분이 비슷한 덩치의 녀석들이라 그 모임은 굉장한 박력이 넘쳐 흘렀다. 누가 보면 모 조직의 침목회인 줄 알았을 꺼다. “자, 다들 왔으니 빨리 들어가서 쉬어라.” 간단하게 한 마디 하고 몸을 비트는데 누군가 손목을 잡아온다. “선생님, 방 배정이요!” 라면서 서류철을 흔드는 건 주장..... 아니, 권형이. 아아.... 그것도 내가 해야 되지? 철을 받아들고 파라락 넘기자 보이는 우리 학교가 방이 여덟 개 그러니까..... 애들이 서른 두명이니까 네명씩이군. “앞에서 네 명씩 잘라서 방에 들어가라. 빨리 들어가라!” 하고 서류철을 돌려주고 가려는데 또 손목을 잡는다. 왜, 임마!!! 나 더운 거 싫단 말야! “선생님....... 이대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정확히 해주셔야죠. 그리고 방까지 데리고 가 주세요.” “그래야 돼냐?” “네!” 한숨같이 나온 권형이의 말에 머쓱해져 네 명씩 정확히 팀을 짜주고 돌아서려는데 먼저 온 녀석들이 휘파람을 불고 난리를 친다. 왜 저래? 망할 것들이...... “우우, 상학 고문 죽인다!” 라며 왁자지껄하니 웃는 다른 학교 녀석들의 반응에 맨 앞에 서있던 태민이 자식이 울컥하니 앞으로 뛰어나가려는 걸 간신히 잡아 말렸다. “왜 말려요?” “여기서 싸움 할려고? 그랬다간 넌 죽어!” 귀찮음에 녀석을 조용히 타이르고는 그 쪽을 향해 한 마디 쏴주었다. “어이, 니네 고문은 안죽이는 모양이지? 부러우면 전학 와라! 뭐, 실력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피식 웃고는 돌아서 내 가방을 들고 교사 전용실로 가려는데 다시 한 번 귓가에 녀석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전학가면 하게 해줄꺼에요?” 씹새끼들........ 내가 왜 어디 가나 저런 소리를 듣고 다녀야 돼지? 내 나이가 몇인데.... 게다가 나도 한 성질 하는데 말이야....... “그러고는 싶지만..... 니네 면상이 너무 처절해서 말야. 나랑 하고 싶으면 그 얼굴 뜯어고치고 와라, 뭐..... 견적이 장난은 아니겠지만.” 다시 한 번 이죽거려 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린 놈들이 말이야.... 어우.... 진짜 왜 어딜 가나 저런 개새들이 설치고 다니는 거지? 왜 잘 살려는 나한테 시비냐구? 선생을 때려치든지 해야지. 뜨거운 햇살과 방금 전 어린 놈들과의 공방으로 화가 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고는 서둘러 걸어갔다. 그런데...... 여기 교사용 건물이 어디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봐도 건물은 두 개 뿐이다. 학생들 숙소 둘과 저 멀리 체육관 몇 개. 흐응...... 쪽은 팔리지만 어쩔 수 없지. 망설여봐야 나만 손해지.... 란 생각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뚱하니 돌아서 권혀이를 불렀다. “무슨 일이세요?” “...... 여기 선생들 방 어디 있냐?” “...... 숙소 1층이에요. 저 앞에.....” 건물이 따로 없는 건가..... 흐응......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걸어가려는데 뭔가 투다다닥하더니 내 가방을 낚아채갔다.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뭐냐, 강태민. 할 일 없냐?” “들어다 드릴게요. 어차피 저희 숙소 3층이에요.” “......... 그래, 고맙다.” 뭐...... 옛날부터 내 가방 내가 들고 다닌 기억은 거의 없지만....... 제자들까지 이러니 내가 원래 짐을 들 팔자가 아닌 모양이지? 내가 그렇게 우아하게 생겼나...... 뭐, 그런 소리는 들은 적은 없지만. “아, 그런데 지혁이랑 또 싸웠냐? 왜 그렇게 썰렁해?” “헤어졌어요.” “뭐?” “그냥 헤어지기로 했어요. 우리 둘 안맞는 거 같아서요.” “그래? 뭐...... 그야 니 맘이지만. 사실 말이지..... 널 위해서 하는 말인데.... 잘한거야.” 진심으로 말하고는 햇빛이 너무 강해 썬그라스를 쓰려고 작은 크로스 백 안을 뒤졌다. “제가 생각해도 그런 거 같아요. 그래서 말인데요......” “왜?” “저 선생님 진짜 사랑하는 거 같아요.” 투욱-- 썬그라스를 쓰려고 만지작거리다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게 뭔 소리래? “....... 그래? 고맙다.” 떨어진 썬그라스를 들고 말하자 녀석이 뚝하니 멈춰 서 나를 내려다 본다. “그래서..... 저 선생님 뺏기고 싶지 않아요. 권형이 형이랑 사귀는 거 알지만...... 저한테도 아직 기회는 있는 거죠?” “.............” 차마 뭐라고 내치지는 못하고.... 충격에 그 상태로 굳어 버렸다. 얘가 지금..... 나한테 장난을 하는 건가, 아니면 진심인 건가? 좋아하는 거야, 니 맘이라고 잘라 말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내가 알고 보면 좀 심약한 인간이거든. 좋아한다는 말에 약하단 말야. “더운데 빨리 들어가요. 아까 보니까 안색도 안좋던데 쓰러지겠어요.” 라는 무서운 말에 그 자리에서 돌이 돠어 버렸다. 내가 쓰러진다구? 누가 그런 엽기적인 말을 하디? 너 저번에 그 광경들을 그대로 목격하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태민아..... 다 좋은데 말이지....... 나에 대한 기본적인 환상을 버릴 수는 없겠냐?” “환상 같은 거는 없어요. 저번에 봐서 그래요..... 또 쇼크 먹고 발작하면 선생님만 아프잖아요...... 숨도 못쉬고......” “걱정 마라. 그런 발작은 5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하는 거니까....... 초등학교 때만 조금 심했던 거 뿐이야. 그 때는 상황이 안좋았고....... 나 신경 하나는 질긴 놈이거든.” 어른스러운 체 날 걱정하는 녀석이 귀여워져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같이 건물로 향해갔다. 이럴 때는 선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 track 06. 우주소년 짱가! “으으으......” 합숙 첫 째 날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켜 대가 씻고 나서자 이미 아침 식사가 끝난 후라 매점에서 빵과 커피로 식사를 떼우고 체육관으로 향해갔다. 그래도 예의상 고문이잖아. 기분은 개같지만 무시할 순 없지. 그럼 직무태만이잖아. 그리고.... 주장, 아니 권형이랑 해결 볼 일도 있고.... 망할이다. 진짜...... 복잡하고 머리 쓰는 거 질색인데 그 자식이 왜 사람 비위를 건들여? 사실 내가 말이지..... 첫사랑은 죽은 자살중독증 환자인 거 인정한다. 그 새끼한테도 이렇게 안했단 말야. 그 놈은 아무리 친절하게 대해도 자꾸 거부감이 들어서 말야..... 그리고 그 때는 아무도 믿지 못했으니까 이 엿같은 세상에 누굴 믿어야 할지 몰라서 잔뜩 날이 선 고양이처럼 그 놈의 호의따윈 절대 믿지 않았거든. 뭐.... 사실 우리 관계가 엉망이 된 데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지. 첫사랑이라고는 해도 나 그 놈한테 느꼈던 건 생전 처음으로 사심없이 손을 건낸 사람에 대한 동경같은 거였는지도 모르고...... 으으......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 살아있을 때도 그렇게 사람 아프게 하더니 죽어서도 끝까지 괴롭히는군. 내가 이 때까지 만난 어떤 인간들보다 제일 큰 상처를 준 놈이 왜 그렇게 애처로워 보이는 건데...... 너 나 상처 입혔잖아. 그냥 말해버렸으면 내가 그 정도에 눈 하나라도 깜빡할 것 같아서 혼자 짊어지고 끙끙거린 거야? 그냥.... 말해버렸으면 너도 나도 이렇게 안됐잖아, 이 미련한 새끼야...... 그러니까 그렇게 지랄맞게 사라지지. 죽을 때 죽더라도 세상에 남긴 흔적은 거하게 하고 가야할 것 아냐...... 이 씹새야...... 나한테는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자식이 왜 그 근성으로 살아가지는 못한 건데........ “관두자..... 생각해야 머리만 아프지......” 이미 끝나버린 일에 연연해 하는 거 진짜 멍청한 짓이잖아. 사랑같은 거 일생에 몇 번은 오는 거야. 그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행복해지면 돼잖아. 나 버린 인간들, 나 괴롭힌 것들보다 훨씬 더 행복해져서..... 그 인간들 눈에 피눈물 쏟게 할꺼니까....... 아픈 머리를 두들기고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뭔가 웅성웅성거리는 분위기였다. “... 뭐야?” 또 싸움이냐? 눈쌀을 찌푸리며 인상을 팍삭 구기는데 저 안 쪽에서 많이 낯이 익은 얼굴 하나가 달려나왔다. “선생님, 경진이 경진이가!!!” 라고 외치는 태민이의 목소리에 그 쪽을 보자 힘없이 늘어져 있는 덩어리가 보였다. 저게 뭐래? 뭔가 뭉실 뭉실하니 펑퍼짐한 게 체육관 가운데에 누워 있다니......... “뭐야?” “갑자기 기절했어요!! 경진이, 경진이가!!!” 뭐...... 라구? 지금 내가 들은 마링 맞는 거냐? 저 정경진 폭식 돼지가 기절을 했다구? 그 덩치가? 아니....그 돼지가? “어떻게 해요!!!” 라며 요란을 떠는 태민이 놈 얼굴을 손으로 뭉개고 밀어젖힌 후 그 쪽으로 가보니 진짜..... 그 펑퍼짐의 정체는 경진이 놈이었다. 망할..... 진짜 참 동글동글도 하다.... 멀리서 보면 호빵 한 덩어리가 늘어진 줄 알겠다. 으으, 아니지. 일단 저 놈을..... 깨워야지...... 또 사고치면.... 나만 골치 아프단 말얏!! 대머리의 후광이 떠오르자 몸이 반사적으로 그 쪽으로 달려가 늘어진 경진이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 들어올리는데..... 우욱, 무거워...... 이 새끼, 머리 돌 아냐? 열라 팔 아파!! “어이, 정경진!! 야, 폭식 돼지 눈 떠 봐, 응?” 뺨을 툭툭 치며 아무리 불러도 눈을 뜨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에 더욱 쳐들고 뺨을 철썩 철썩 내리치는데도 안깬다. 이거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갑자기 든 절망적인 생각에 심장이 쿵하니 떨어졌다. 에이, 그래도.... 설마 죽었기야 하겠어...... 아니지.... 재수 없으면 쓰러질 때 머리를 부딪쳐서 뇌출혈이.... 으윽!!! 생각이 이에 미치자 더욱 녀석의 뺨을 세게 갈겨댔다. 안됏!!! 너 죽기라도 하면 고문교사 문책 당한단 말얏!!! 나 귀찮은 건 진짜, 캡으로 싫어!!!! “야, 일어나!! 정경진, 죽으면 안돼!!! 이제 돼지라고 안할게!!! 밥 많이 먹는다고 구박 안할게!!! 돼지야!!! 눈을 떠!!! 나 좀 편하게 살게 해줘!!! 제발!!!” 체육관에 울리는 나의 비통한 외침에 다들 뜨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게 느껴지지만..... 씹새들아.... 막말로 니네가 나처럼 당해봐라. 선생 짓이 할만 하다구? 웃기네..... 전에 했던 말 다 취소다!! 니네 처럼 생각 없고 상식 없고 무대뽀인 녀석들 감당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알아? 씨발..... 차라리 셀러리맨을 하고 말지. 하다못해 외판원이라도 하면 내 얼굴로 물건 못 팔아 먹겠냐? “서, 선생님......” 갑자기 옆구리를 찌르는 태민이의 손을 떨궈내며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야, 나중에 얘기해, 나중에...... 야, 돼지야, 정경진......!!” “선생님..... 아래......” “아이씨, 왜 그래?” “선생님........”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태민이 놈이 이상해 녀석이 바라보는 쪽으로 서서히 따라갔다. 귀엽게 생긴 얼굴을 지나 체구에 비해서는 가느다란 목과 갑바 좋은 가슴..... 그리고 그 밑에 나왔으면 한 대 차버렸을 배와.... 그리고..... 그 밑의.... 므흐흐한 부위....의 아래 쪽..... “으윽........” 놀란 눈으로 태민이를 한 번 보고 다시 그 쪽을 보자 아래의 트레이닝 복 위로 확연한 핏자국이 보였다. 순간 머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에 난 잠시 입을 다물고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자신과 비슷한 체구의 녀석들까지 팅팅 튕겨내던 거구의 정경진이 기절을 했다. 그래, 그건 속이 허해서일 수도 있으니까 -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되지만 -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바지 뒤로 피가 흐른다. 뭐, 치질일 수도 있으니까....... 라고 단정하고는 싶지만 녀석의 사정을 알기에..... 양심적으로 그런 말은 못하겠고...... 세 번 째로 내가 그렇게 세게 치는 데도 일어나질 않는다. 물론 기절은 확실히 한 거고 - 으음, 내일 얼굴에 멍들 걸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 그게.... 아무래도 그것 때문인 거 같지..... 그래서.... 과다출혈로 인한.... 으으.... 순간 머리가 아파져 버렸다. 이 농구부 진짜 이상해!!!! “선생님...... 경진이........” 라며 입술을 파르르 떠는 태민이를 보다 다시 머리를 정리해보았다. 어쩐다냐...... 그 형이라는 작자가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 같기는 한데.... “......... 망할.......” 할 짓이 없어서 애를 이 꼴로 만드냐? 그 새끼....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놈이야? 합숙 들어오는 놈을 이렇게 떡으로 만들어버리면 뒷처리는 누가 하라구? 니네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거 만천하에 고하려고 그런 거냐? 병신새끼..... 할 꺼면 바학이나 쉬는 날을 이용해야할 거 아냐! 막말로 여기 사내놈들만 우글거리는 늑대굴에 이런 새끼양 - 씨발.... 말하고도 넘어오네.... - 같은 놈을 이렇게 쳐넣으면 어떻게 해? 그 새끼 애들 시켜 확 조져버릴까 보다. “으윽.........” 하여간 그 일은 둘 째 치고 일단 녀석을 옮겨야 하는데..... 비슷한 체구의 녀석들이니 엎는 거야 별 문제 없지만...... 뒤 들키면 쪽 팔리겠지? “으음.......” 그래도 이 놈이 내가 예뻐하는 놈이잖아. 그러니까...... 내가 희생할 수 밖에. 난 내 생각보다 훨씬 착하고 인간적인었던 모양이야. 간만에 힘 쓸 생각을 다 하고.. 스스로 대견하다는 생각에는 잠시 후에 빠지기로 하고 난 팔을 뻗어 왼 손은 경진이의 겨드랑이 사이로, 오른 손은 녀석의 무릎 뒤로 넣어 길게 심호흡을 하고 한 순간에 허리의 반동과 어깨힘을 이용해 녀석을 번쩍 안아들었다. 솟아라, 힘이여!!! 파워 업이다! “으악!!!” 주변에서 쳐다보던 녀석들이 놀라움의 환성을 지르는 사이 난 녀석을 번쩍 안아들고 다다다다 달려 햇빛 찬란한 운동장을 지나 저 멀리 보이는 기숙사로 뛰어갔다. 내 힘이지만..... 굉장하다. 이 놈을 번쩍 안다니..... 천하장사 대회라도 나가 볼 껄 그랬나? 젠장 내가 짱가냐? 뭐, 그것도 좋겠군.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짜짱가! 엄청난 기운이!! 헤이!! 씨발, 내가 진짜 미쳐가는군. 힘 쓸 일이 없어서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냐? 망할.... 역시 나 착한 인간이었던 거야.... 으흑...... 축 늘어진 녀석을 안고 내 방으로 들어가 서둘러 에어컨을 키고 옷을 하나씩 벗기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찢어질 정도로 한 걸까? 좋아하는 녀석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그 날카로운 눈을 한 - 날카롭긴 개뿔 뱁새눈이다, 씨바랄.... - 형의 짓임이 거의 분명하지만, 일단은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 한숨을 내쉬고 바지를 벗기려 하는데 뭔가 투다다다 하더니 문이 열리고 태민이와 지혁이 뛰어들어왔다. 콰당-- “선생님 경진이요!!!” “노크해!! 노크 좀!!! 심장 떨어질 뻔 했잖아!!” 갑자기 열려진 소리에 놀라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갑자기 기가 팍 꺽인 태민이 놈이 꼬리를 내린다. 으윽.... 저거 진짜 순진해 빠져서는..... “죄송해요..... 급해서..... 경진이 괜찮을까요?” “괜찮아. 가서 구급 상자랑 얼음물 가져와. 그리고 코치들한테는 대강 말해놓고. 권형이도 오면 곧장 이리로 오라고 해.” “경진이..... 병원에....” “됐어, 이 쪽은 내가 전문이야. 빨리 구급상자랑 물 가져와!” 서둘러 얘기하니 두 놈이 또 같이 사라진다. 일단 아래를 닦고 뒷 일은...... 으아악!!!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 놈의 농구부!! 이 학교 농구부는 진짜 문제 많다니까!! 왜 내가 어린 놈 당한 것 까지 뒷 처리를 해줘야 하냐구!!! “젠장!!!”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리고 아래의 바지와 속옷을 벗기자 허벅다리 사이로 흐른 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에 눈을 찌푸리고 녀석을 핑글 돌려 엎어지게 한 후 주전자에 있던 물을 따라 손수건에 적신 후 핏자국을 닦아내자 적나라한 부위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월경도 아니고 이 정도로 출혈이 날 정도면 보통 상처가 아니란 소린데..... 병원에 가서 꿰메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나야..... 아주 어릴 적 외에는 찢어져 본 적이 없으니...... “으으...... 이걸 어쩐다냐?” 머리를 끌어안고.....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저 멀리서 두다다닥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또 한 번 문이 벌컥 열려 반사적으로 시트를 끌어올려 경진이의 하반신을 가렸다. “구급상자 가져왔어요!!!” “임마 노크하라고 했지!!!” 숨 넘어간다, 넘어가!! 걱정되는 건 알겠는데 니 덕에 내가 더 놀라 쓰러지겠다, 강태민. 열라 빠르고 기동력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말이지..... 아무리 덩치가 있어도 좀 조용히 다니는 게 어떠냐? 건물 다 무너뜨려라!!! “이리 주고 니네는 연습 들어가. 권형이 부르고.”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일단은 없어. 진통제랑..... 해열제.... 아, 여기 있군. 수면제는 나한테 좀 있고.......” 약 상자를 뒤지며 소염제와 붕대, 바를 연고까지 확인하고 태민이에게 손사래를 치자 겨우 알아 먹은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지혁이와 함께 문을 닫고 나간다. 나도 잘 모르니까, 일단 장지경에게 전화라도 해야겠군. 핸즈프리를 끼고 번호를 누른 후 기다리자 기분 나쁜 듯한 음성이 울려왔다. <누구야?> “씨발, 곱게도 전화 받는다. 니 동생이다, 새끼야.” <너야말로 곱게도 전화한다. 뭐야?> “엉덩이 찢어졌다. 피가 많이 나는데 어떻게 하지?” <뭐? 너 또 누구랑 잔거야? 니가 찢어질 정도면.....> “나 아냐, 씨발, 우리 학생이야. 심하게 당한 거 같아. 어떻게 하지?” <많이 심해? 심하면 병원에 가서 꿰매야지.> “그 정도는 아닌 거 같아. 자식이..... 격하게 움직이다 피가 좀 많이 난 거 같은데 상처 부위는 크지 않아.” <그럼 일단 소독하고 연고라도 발라놔라. 소염제랑 꼭 먹이고.> “그래..... 일단 해봐야지.” <넌 괜찮지? 저 번에 수면제 또 타갔다며?> “잠이나 퍼잘려고. 별 건 아냐.” <........ 될 수 있는 한 약 없이 버텨 봐.> “생각 중이야. 끊는다.” 서둘러 폴더를 접고 큰 맘을 먹고 시트를 벗겨냈다. 그리고 소독약과 거즈를 들고 작업에 들어갔다. 씨발..... 나 암만 생각해도 너무 착한 거 같아. 일단의 치료를 끝내고 에어컨의 온도가 많이 내려갔길래 내 옷을 대강 입히고 이불을 덮어준 후 옆에 앉아 담배를 빼물었다. 대체.... 무슨 일로 어떻게 했길래 저 놈이 저 꼴이 돼냐? 핏기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자 한숨만 흘러나온다. 내 주변에는 왜 저런 놈들 뿐인가 몰라. 그나저나 그러니까 상원이도 걱정되네. 요즘 얼굴도 안좋던데..... 그 성질 나쁜 아저씨 말이지... 나랑 친구하기는 좋은 성격인데 애인으로서는 최악이란 말야. 개새끼.... 상처 입히기만 해 봐, 울리기만 해 봐... 상원이 아프게 하면 진짜 두 번 다시 빛 못보게 해버릴테니까. 그 놈한테 심술도 부리고 제 멋대로 굴지만 그 놈이 나한테 어떤 친군데.... 상처 입히면 진짜 죽여버릴꺼야.... 가만 안둬. 나야 이미 넝마 조각에 너무 상처 받아서 미쳐버린 새끼지만 그 놈은 나한테 받은 상처도 있는데 더 아프면 안돼잖아. 그 놈은 감당 못해. 마음 약해서..... 여려서..... 너무 착해 빠져서 절대 아픈 거 감당 못해. “...... 강상원...... 후우... 이젠 그 놈이 내 속을 썩히네.....” 내가 그렇게 괴롭혔는데...... 그 대가인가 봐. 그래도 니가 걱정하게 하는 건 좋아. 강상원, 너 말이지..... 너 진짜 착한 놈이야.... 착해서..... 다른 사람 못 뿌리치고 무시못하는 거 내가 알아. 하지만 너는 그렇게 타인에게 퍼부어주다 니 실속은 못차리는 놈이야. 내가 니 그런 점 이용해 먹은 거 인정해. 나 사실 너도 믿지 못했거든. 하지만 내게 지금 가족을 말하라면 그건..... 너야. 내게 가장 아버지 같고 어머니 같고 형제 같은 존재는 너뿐이야. 내가 인정한 유일한 가족은 너란 말야. 가족이란 게 그런 거잖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악랄한 인간이라도 가족만은 내 편이 되어주는 거잖아. 넌 절대 날 버리지 않을 꺼니까...... 그걸 아니까..... 조금은 심술 궂게 굴어도 니 사랑 지켜주고 싶은 거야. 그 나쁜 자식..... 유부남인 거는 열받지만 니 눈을 보면 안다. 너랑 나랑 18년이다 벌써..... 그 동안 군대 간 거 외에는 1주일 이상 떨어져 본 적도 없는 게 우리잖아. 언제나 찾을 때 바로 손 안에 담겨있는 게 너였어. 니가 나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거 이해할 정도로 우리는 가까운 존재니까.... 니 표정만 봐도 알아. 너도 아직 모르고 있겠지만, 아니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만 너 그 사람 사랑해. 나처럼 놓치고 후회하지 말라는 거야. 한 번 손에 쥔 사랑이면 끝까지 해보는 게 근성 있는 거잖아. 내 곁에서 18년을 버텼으니 너도 그 고지식한 사고만 버린다면 근성은 넘쳐흐르는 거야. 피곤해져서... 아직도 약기운이 가시지 않아 미간을 누르고 눈을 감자 서서히 정신이 잠식되어 간다. 그리고 다시 떠오르는 흑백화면의 노이즈. 울리는 느낌에 머리를 저으려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답답한 기분에 숨을 몰아쉬는데 떠오르는 어떤 잔상들...... 아무 것도 없는 어두운 새벽 바다...... 한 치의 빛도 없이 적막한 바다에서 검은 색의 긴 그림자가 일어나 점점 하얗게 하얗게 변하며 내게로 쏟아져온다. 안타까운 듯 온 힘을 다해 거세게 밀려오지만 바로 발 밑에서 꺼지고 마는 물거품에 멍하니 서서 바다 건너편의 작은 불빛들을 세어본다. 조금 움직이는 어선이 하나.... 그리고 등대.... 하나..... 달빛은 교묘히 구름 안에 갇혀있고 파도는 닿지 않는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 이상..... 그 하얀 물결은 절대 발을 적시지 않는다. 저 물에 뛰어들 용기가 내게는 없지. 그 파도에 휩쓸려버릴 베짱따윈 없어. 그저 여기서 애타게 바라볼 뿐이야. 또 한 번 상처받기 싫어서.....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바다 쪽이 아닌 바다와 평행하게 이어진 모래사장을 따라 발을 무겁게 내리잡는 모래를 밟고 새벽 바다와 함께 걸어간다. 보이는 것은 어둠, 들리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몰아치는 파도 소리....... 눈을 뜨고 있으면 바다는 무섭지 않지만 어느 순간 등을 돌리고 눈을 감으면 바다의 소리가 나를 잡아먹을 듯 덮쳐온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눈을 뜨면 진짜 나를 먹어 삼킬 듯 밀려오는 바다. 그리고 한 순간 두려움에 눈을 감으면 난 어느 새인가 이미 바다 안에 잠식되어 간다. 나른하고 부드러운 감각의 물 속은 표면의 파도가 거짓말인 듯 잔잔하게 몸을 감싸고 나를 아래로 아래로 잡아끈다. 기분 좋은 느낌에 눈을 감고 그대로 빠져들며 그대로 편안하게 숨을 고른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내맡기는 순간 몸을 감싸고 있던 무드러움이 순식간에 피부를 압박하는 따가움으로 변해버린다. 끝이 없을 것 같던 바다의 저편에서부터 서서히 무너져 내린다. 바다는..... 순식간에 모래로 변해 가라앉아 버린다. 숨이 막히고 살갗이 벗겨지는 고통에 눈을 뜨자 오래된 미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모래사막이 펼쳐져 있다. 붉은 모래들로 가득 메워진 길고 끝이 없을 것 같은 사막....... 아마..... 지구가 망한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하고 생각하게 하는 삭막한 풍경에 주위를 둘러보아도 주변에는 낮은 건물 하나, 혹은 작은 생물체의 기척조차 느낄 수 없다. 이 곳은 완벽하게 고립된 곳이다.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어디를 가도 혼자일 뿐인 쓸쓸한 황무지. 이곳에서 나는 살아가야 하는가..... 혹은 죽어야 하는가....... “선생님! 선생님!!” 순간 내 몸을 흔드는 느낌에 눈을 뜨자 순식간의 환상은 사라지고 경진이가 오히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온 몸이 나른한 게 아무래도 수면제 부작용 같지? 당분간은 또 끊어야겠군. 열 받아서 죽어라 먹어댔지만....... 자고 나서도 그다지 개운하질 않으니.... “아..... 잠깐 잤나 보다.” “가위 눌렸어요? 잠깐 자는데 그렇게 발작을 일으켜요?” “발작?” “갑자기 떨어서 놀랐어요. 어디 아프세요?” “아냐.... 요즘 계속 수면제를 먹어서...... 약 기운이 안가셔서 그래.” 머리가 아파 와 뒷골을 꾹 누르자 경진이 놈이 내 이마를 손으로 짚는다. “안색이 안좋아요.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병원은..... 가봤자 어차피 뇌파 검사하고 이상하다고 약만 산더미처럼 안길꺼야. 그나저나...... 넌 괜찮냐? 피가 많이 났어.” “.........” 갑자기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지긋이 깨물던 녀석이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얼굴을 두 손에 묻고 몸을 숙인다. 그 모습에 나도 제대로 자세를 고치고 녀석의 머리카락을 만져 주었다. “괜찮아?” “......... 모르겠어요. 머리가 엉망진창이라......” 고개를 푹 숙이고 눈에 다 보일 정도로 슬퍼보이는 녀석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뭐, 내 인생도 남의 인생에 대고 뭐라고할 입장은 아니지만. “엉망이면 어때...... 어떻게 된 건지나 알자.” 담배를 꺼낼까 하다..... 아픈 녀석 앞이라 참고 조용히 말하자 이 놈이 입을 열 생각을 않는다. 뭐냐, 나도 내 코가 석잔데 이렇게 네게 잘해주려는 거다.... 뭐..... 진상을 알아야 뭐든 할 꺼 아니냐...... “수면제 줄까? 머리 복잡하면 그냥 자는 게 최고야. 생각하기 싫으면 생각하지 마.” “...........” 아무 말 없는 녀석을 보며 나도 다시 의자에 기대고 앉아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햇살은 너무 뜨겁고 모든 걸 태워버리려는 듯 내리쬐기만 한다. 한치의 동정이나 연민 없이...... 마치 방금 전 환상 속의 그 사막처럼........ 물도 식량도 없이 버려진 사막의 미아같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선생님......” “왜?” “배 고파요.......” 콰당-- 심각하게 듣고 있던 나는 그대로 의자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씨발!!! 원래가 좀 정신을 빼고 다니는 쪽이라 구르고 엎어지고 잘하는데..... 이 자식이 사람 놀래키고 지랄이야. “놀랐잖아, 임마!! 넌 이 상황에서 배 고프단 말이 나오냐?” “....... 선생님 진짜 칠칠맞네요. 놀라면 즉방으로 구르고 엎어지고....” “내가 좀 칠칠 맞아..... 씨, 아프잖아. 배 고프다구?” “기절해 있었더니 기운을 많이 썼나 봐요.” 기절해 있었다니 배가 고프다니!!! 니 그 질환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파악을 했지만 이 선생님이 모처럼 진지하게 고민을 들어주겠다는데 그런 식으로 초를 쳐야겠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몇 시간이나 기절했다구. 그럼 방학하고 잠만 퍼잔 난 미이라 됐겠다.” “선생님하고 전 틀리죠. 배 고파요.” 라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대드는데 이걸 아픈 놈이니 패지도 못하겠고...... “알았어. 기다려 봐, 뭐라도 시켜줄테니까.......” 진짜...... 내가 잠시라도 삶에 관한 성찰을 하고 싶을 때면 왜 이런 반응인 거야? 남 생각하기 싫을 때는 심각하게 들으라고 난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줄라치면 순식간에 무드 깨고! 이러니 내가 멜랑꼴리가 안돼지!! 나도 분위기 좀 잡자! 알고 보면 나도 심약하고 걱정 많고 불쌍한 놈이라구!!! “맛있는 거요......” 라며 눈을 싸가지 없게 뜨고 말하는데.... 너 말이지..... 다 낳고 보자. 내가 꼴에 양심은 있어서 아픈 놈이라 못팬다만 낳기만 해봐라. 씹탱! “닥치고 있어.”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일단 주변 상가라도 알아보게 책자나 팜플렛을 찾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조용히 답하자 곧 문이 열리고 사라졌던 주장이 나타났다. 그 모습에..... 또 가슴이 두근..... 지랄 맞긴! “경진이 쓰러졌다구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또 가슴이 아려와서...... 괜히 죄 없는 책자만 집어던지고 일어섰다. “응..... 나랑 나가자. 경진이 넌 누워 있어. 뭐 시켜줄게.” “....... 많이요. 저 배 많이 고파요.” “알았어, 돼지 새끼야... 진짜.....” 서둘러 일어나 권형이의 팔을 붙잡고 나가려 하자 권형이가 경진이에게 괜찮냐고 묻고 경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발라당 눕는다. 젠장, 침대 끼익거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매트리스 꺼진 침대 질색인데...... 문을 열고 한산한 복도를 지나 매점으로 들어가 커피를 뽑아들고 전화로 음식을 주문한 후 매점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내 맞은 편에 아무 말 없이 앉는 권형이를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진이...... 형.... 아니, 둘이 어떻게 된 거야? 너흰 알지?” “.... 사생활이에요.” “그래, 사생활이지. 하지만 그냥 못넘어가는 일도 있는 거야. 그 돼지 새끼 둔한 척 해도 예민한 자식인데 뒷처리 힘들다. 그거 감당할 주제도 아니고.” “선생님은 지금 저하고 일이 있잖아요. 남의 일 걱정할 때가 아니에요.” 딱 잘라 말하는 녀석의 말에 마시던 커피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나랑 많이 닮은 것 같아. 역시 같은 핏줄이라서인가..... “그럼 말이 나왔으니 묻자. 넌 나하고 어떻게 하고 싶은 거야?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됐네. 우리 복잡하게 몰고 가지 말자. 너와 내가 서로의 선만 침범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간단해. 내 과거, 가족..... 일 터치하지 마. 그것만 지키면 나 니가 무슨 짓을 하던 상관 안해. 사랑하니까 어떤 일 당하더라도 참을 수는 있어. 하지만 그 일에 왈가불가하는 건 못참아. 니가 아니라.... 누구라도 마찬가지야.” 정확히 벽을 쌓아 최후의 방어벽을 쳐도 권형이는 응시하고 있는 눈을 피하지 않고 정확히 바라봐온다. 진짜...... 저 민망할 정도로 당당한 성격만은 유전인 거 같지. 이 정도에서 꼬리 내리는 귀여운 녀석이라면 일이 더 쉬울텐데 말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선을 그어두면 저 선생님의 세계로 못 들어가요. 왜 저를 방관자로 몰려고 하는 건데요?” 단호하게 떨어지는 말에 순간 머리가 띵해왔다. 윤진이와 똑같은 말을 하는 녀석의 반응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어째서..... 이 녀석들은 이렇게까지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걸까? 내가 원치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라고 경고를 해도 소용이 없어. 어째서..... 그 벽을 허물려는 건데? 허물어서 좋을 게 없는 경계를 어째서 부수고 싶어하는 건데? 내 친구들처럼 수용할 정신력도 감당할 능력도 안되는 곱게 자른 녀석들이 왜 객기를 부리는 건데? “방관자로 두려는 게 아냐. 케서 좋을 거 없는 과거는 그냥 흘러가게 두는 거야. 만약에 니가 그걸 감당할 능력이 된다면 상관없지만 너는 아직이야. 스물 하나의 윤진이도 감당하지 못했던 진실들이야. 열 아홉의 너는 미쳐.” 더 이상의 접근을 거부하는 나의 말에 권형이가 잠시 말을 끊었다 입을 열었다. 뭔가 내게 할 말이 많은 듯 한 얼굴이었다. “....... 저번에..... 친구들 만났어요. 전세하씨랑 강상원씨요.” “뭐?” 순간 나의 귀가 잘못되었나.... 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누굴 만나? “묻고 싶은 게 있어서 만났는데.... 얘기하더군요. 선생님께 직접 들으라고. 그 분들도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구요. 그분들이 알고 있는 것은 단편 단편적인 것들뿐이고 진짜 진실은 선생님만이 안다구요........ 왜 그렇게 감춰두는 데요?” “감추는 게 아냐. 말하기 싫어서 말 안하는 것 뿐이야.” “그냥 털어 버리면 안돼요?” “........ 너 어디까지 알고 있지?” “선생님이 내 형이라는 거, 그리고 10살 때 팔려갔고 11살 때 입양돼서 형들과 관계를 가졌었다는 것 정도에요.” “........ 확실히... 반도 모르는 거군. 그 꼬맹이가 그래도 말을 많이 거른 모양이지?” “그게 반도 안된다면 나머지는 대체 어떤 것들인거죠?” “...........” 진지하게 묻는 권형이의 말에 난 갑자기 담배가 피고 싶어져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마시던 커피잔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주머니 안의 담배를 확인 한 후 매점을 나와 기숙사 뒤쪽의 그늘진 공터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담배를 빼물고 조금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한다. 물론 그 전에 확실한 서약을 받은 후의 얘기지만..... 어떤 확신 없이는 절대 못불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윤진이 때처럼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잖아. 뭐, 사실 약속을 한다고 다 지킬 녀석들은 아니겠지만...... “유권형.... 이야기를 해주겠지만 그 전에 너도 약속할 것이 있어. 이야기들 듣고 싶다면..... 이번의 얘기를 끝으로 절대 그 문제에 대해 왈가불가하지 않겠다는 것 말이야. 그럴 자신 없으면 나가떨어져. 들어서 전혀 좋을 것 없는 얘기니까.” 딱 부러지게 말하자 녀석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부딪쳐온다. “...... 약속해요. 이걸로 마지막이에요.” 여전히........ 잘 자란 녀석의 눈이구나. 저 곧고 바른 눈은 세하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의 것과 많이 닮아 있다. 아마... 이 녀석은 10년이 지난 후에도 이런 눈으로 세상을 보겠지. 나처럼 비틀리고 꼬인 시선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인정해 나가는 성인의 시선으로..... “그럼 일단....... 자세히 말해볼까? 나 10살 때 팔려갔지..... 그런데 그 전에 말이지.....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전에 말야.... 니네 엄마가 날 지울려고 별 약을 다 먹었어. 약에 술에.... 피임은 차마 못하고 자연유산을 하려고 한 거겠지. 나도.... 니네 엄마 여동생이 나 자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신나게 떠들더군. 술에 거하게 취해서..... 절대 낳으려지 않던 아이가 저렇게 기가 세게 잘 산다고 말야. 지금 알고 있는 대로 내가 니네 아빠 자식이 아니었거든. 그런데도 어떻게 태어나긴 했는데 말이지..... 덕분에 나 머리가 좀 이상해. 니네 엄마 덕에 뇌가 보통 사람과 달라서 뇌파가 틀려..... 그래서 이상한 걸 봐. 환영하고 환청도 듣고 가끔은 그 환영들하고 수다도 떨고 가위도 눌리고...... 어렸을 때는 자폐증 비슷한 것도 있었는데 뭐, 지금은 괜찮아. 하지만 보통 사람에 비해 지각 감각이 둔해... 그래서 정신을 바싹 차리고 있지 않으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그래서 내가 사고를 좀 많이 치거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싱긋 웃자 권형이는 그래도 시선을 치우지 않은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병신..... 이 쯤에서 나가 떨어져라. 더 이상 내 입에서 끌어내서 좋은 말 안나와. “..... 그래서요?” 다음 말을 재촉하는 권형이의 말에 쓰게 한 번 웃고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래서..... 니네 아빠가 말이야, 알았거든. 내가 자기 자식 아니라는 걸.... 그래서 날 끔찍히도 싫어하더라고 대놓고 지 새끼 아니라고 구박하는 건 별 것도 아니었지. 그 자식.... 말이지..... 니네 아빠가 나 일곱 살 때 건들였거든. 지 새끼도 아닌 놈이 당당히 장자 자리 차지하고 밥만 축내는 걸 보니 벨이 꼴렸는지 밥값이라도 하라더라..... 그래서 뭐, 사실 팔려가기 전에 이미 걸레는 걸레였지. 그러고 보니 기록은 기록이네. 나 니네 엄마하고만 자면 난 직계 혈통하고 다 잔거니까.” 더욱 신랄하게 웃으며 올려다 보자 권형이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시선을 피한다. 그래서 진작에 떨어지라고 했잖아.... 하지만 이젠 내가 제어가 안된다. 내가 너 상처 입히고 있는 거는 알지만 어차피 알게 된 거 끝까지 알아버려. 그래서.... 스스로 해결하라구. 난 틀림없이 경고했다. “지랄맞은 인생이지. 그러다..... 사채업자들한테 팔려가서 1년 정도 별 개새끼들하고 다 잤어. 그 때 불임도 되었고...... 그 아저씨한테 입양되고는 낫는가 했는데 말야..... 어쩔 수가 없었나 봐, 내 팔자라는 게..... 나 우리 큰형이랑 자고 셋째랑도 잤고 둘 째랑도 가끔 잤어. 그리고...... 상원이에게는 죽어도 못할 말이지만 나 그 새끼 아버지랑도 잤었어. 그리고....... 내 친아버지란 새끼랑도..... 한 적 있어. 학교 다닐 때는 아무나 얼굴만 맘에 들면 골라서 끌고 베드인했지. 그리고 한 번 잔 놈과는 두 번 다시 얼굴도 마주치지 않았어. 적어도 서윤진 이전에는 말야.” “그만...... 그만해요........!” 내 말이 이어지던 중에 권형이가 입술을 깨물고 말을 자른다. 어째서? 알고 싶다고 한 건 너야. “니가 듣고 싶다고 한 거야. 끝까지 들어.” “더 이상은 듣고 싶지 않아요.” “들어야 돼.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지.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어줍 잖은 객기로 알려고 하지 말라구! 나 대학 때 교수랑 자서 학점 따고 졸업도 했어. 세하 있는 조직 쪽의 대가리랑도 잤고 내가 원하면 아무나랑 뒹굴었어. 그게 진실이야. 그리고.......” “그만!!!” 갑작스레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난 하던 말을 끊고 삐딱하니 녀석을 바라보았다. 병신새끼..... 이래서 어린것들은 질색이야. 자기가 한 말에 대해 책임도 질줄 모르고 자존심만 있어서 말이야..... 젠장. “니가 알고 싶어하던 걸 말하는데 뭐가 어때서? 병신 새끼가 뭣도 모르고 덤비다가 알게 되니 무서워? 그 정도 베짱도 없으면서 나를 추궁한 거야?” 꺼진 담배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다른 것을 꺼내 물었다. 지금 나의 표정은 안봐도 알 수 있다. 차갑게 굳어버려서.... 아무 표정도 없는 듯 한 무서운 얼굴.... 진짜 정 떨어지는 얼굴이지. 아무리 예뻐도 소용없잖아, 이러면.... 망할, 나의 기지가 떨어지는군. 이 나이 되도록 유일한 재산 목록이자 최고의 자랑 꺼리는 이 얼굴인데 말이야. “꺼져, 유권형. 당분간은 머리 좀 식히자. 너도 나 안보는 쪽이 낫겠지.” “그래도 돼요? 이러다 우리 헤어지면.....” “헤어지자는 게 아냐. 생각을 하자는 거야. 나의 질문은 아직 유효해. 나야, 너희 가족이야? 선택할 수 없다면 꺼져 버려. 재수 없으니까..... 어줍잖은 동정이나 연민으로 감정을 끌고 있는 거라면 내가 사절이야. 지금까지 니가 들은 거, 앞으로 내가 할 얘기들에 비하면 새발에 피야. 넌 아직 그 정도에 벌써 나가떨어진 거야. 그러면서 진실? 뭘 바라는 건데? 진실을 말하면 뒷걸음치고 무서워하면서 말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라고 추궁해? 장지환, 그 빌어먹을 자식도 서윤진도 너도......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으면서 뭘 바라는 거지? 내가 울면서 나 이렇게 불행하게 살았으니 동정해달라고 하길 바래? 그럼 자애로운 마음으로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불쌍한 듯 바라보려구? 하! 그런 거라면 내가 사절이야. 그 딴 거 필요없어! 난 조금도 불쌍하지 않고 내 인생 그 따위로 만든 엿같은 자식들한테 그런 말 들을 이유 없어. 더 불쌍한 건 너희들이야. 남한테 상처만 주고 자기는 좋은 얼굴로 그 상처를 덮어주는 것처럼 말야! 가증스러워..... 위선의 극치잖아. 병주고 약주고 혼자 쇼하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잖아?” 마음껏 이죽거리며 나온 말들이 하나 하나 부서져 가슴이 박혀온다. 그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가장 상처받고 있는 건 난데....... 왜 이런 의미 없는 말을 하게 하는 거야? 너는 그렇게 고고히 서서 내가 불쌍하다는 듯 내려다 보면 그만이지만 니 그런 눈빛에 난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단말야. 나..... 절대 불쌍하게는 안살아. 미쳐서 손가락질 받아도 그게 거리에서 받는 값싼 동정보다 나아. 지옥불에 떨어지든 미쳐버리든 너희들에게 동정받으면서 살진 않아. 그러느니 차라리 혀 깨물고 죽어버리겠어. “넌..... 아직 아냐..... 너무 성급했어. 유권형......” 피고 있던 장초를 발로 비벼끄고 서둘러 돌아서자 권형이의 시선이 달라붙는다. 차마 잡지는 못하고 바라보기만 하는 저 바보같은 덩치가..... 말이야..... 그러게 왜 날 건들여? 너 때문에 머리가 터질 것 같단 말야. 서윤진..... 그 자식한테 내가 어떻게 상처입었는데 너도 똑같은 전철을 밟으려고 해? 나 다른 건 모두 견딜 수 있어. 욕을 하든 발로 차든 그 딴 거는 별 거 아냐. 하지만..... 생각을 하자.... 생각을...... 이대로는 안돼. 장인하 생각을 해...... ▷ track 07. 캔디 권형이와 그렇게 헤어지고 잠시 멍하니 있다 다시 고개를 젓고 방으로 돌아갔다. 머리는 아프고 깨질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돼지 새끼가 있으니 가야지. 복잡한 건 조금 더 생각을 해보자. 아직도 남아있는 게 많은데 벌써 저런 반응이면 무서워지잖아. 그래서 틀림없이 경고했잖아. 알려고하지 말라고...... “바보........” 너도 겁쟁이 다 됐구나, 나이 드니 느는 건 노파심이요, 사랑에 빠지니 느는 건 두려움 뿐이구나. 이제 너도 늙었다. 스물 아홉이면..... 세상 반은 산거야, 장인하. 니 수명이 길어야 쉰 아니겠냐? 저렇게 어린 녀석하고, 그것도 동생하고 사랑을 시작했을 때부터 알아봤지. 나 저 놈 때문에 틀림없이 빨리 죽을 꺼란 걸 말야....... 길게 한숨을 내쉬고 방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잡았다. 나 같이 미친 자식 하나 더 늘리기 싫으니 협력해주지. 달칵 “이제 살만 하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허탈하게 말하며.... 나름대로 분위기를 잡고 돼지를 찾는데..... 망할..... 먹느라 정신 없다, 없어. 저게 사준 사람 은공은 무시하고....... 왠지 열받잖아. 난 며칠 전부터 제대로 된 건 먹지도 못했는돼. 넌 비축해둔 열량이 많으니 며칠 굶어도 되겠지만 난 아니라구. 그런 내 앞에서 그렇게 게걸스럽게 먹어야겠냐? 젠장...... “우으응......” 먹는 것에서 시선도 입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인다. 진짜..... 먹는 것에 대해서는 엽기적이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맛있냐?” “..... 우으응.........” 저거 왠지 벨 꼴리는데 먹는 거 확 뺏어버릴까?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자주 그런 장난을 쳤었지. 애들 먹는 거 뺏어먹는다던가..... 혹은 먹는 걸 엎어버리는..... 생각해 보니 나 어릴 때도 좀 문제가 있었군. “그만 좀 쳐먹어라. 내가 몇 인분을 시켰는데 그걸 혼자 다 먹냐?” “여기.... 맛있어요......” 먹고 있던 음식을 모두 해치우고 입을 닦으며 겨우 인간다운 말을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건 좀 다 먹고 얘기하지. “그래, 좋겠다. 실컷 쳐먹고 먹다 먹다 터져 죽어라, 새꺄!” “왜 구박해요!! 먹을 때는 개도 안건드린다니까요!!” “돼지는 건들여. 어우, 진짜!! 이 선생님의 사랑의 기로에 서서 고민을 하는데 넌 그렇게 먹어대야겠냐?” “....... 권형이 형이랑 또 싸웠어요?” 먹던 걸 멈추고 날카롭게 날아오는 경진이의 말에 흘깃 쳐다보자 보통 때는 둔하니 게슴츠레한 눈이 말똥말똥하니 나를 응시한다. 저것도...... 참 남의 일에는 감이 좋단 말야. 게다가 남의 일에 묘한 관심과 함께 구경을 좋아하는 듯한..... 나와 비슷한 면모를 갖추고 있단 말야. “티나냐?” “네.” “..... 좀 싸웠어. 개인적인 일이야....... 넌?” 확실히 케봐야겠다는 생각에 환하게 - 진짜 화났을 때 외에는 잘 보이지 않는 얼굴로 - 웃으며 말해도 경진이 놈은 꿈틀도 안한다. “화났어요? 선생님.....?” “...... 그것도 티나냐?” “많이요. 웃는데..... 눈이 굳어서요.......” “흐응..... 애기 돼진 줄 알았는데 여우 새끼가 확실하군. 여우는 전혀 안귀여워.” 피식 웃으며 문에 녀석의 앞자리에 의자를 빼고 앉자 녀석은 곤란한 표정으로 뚱하니 앉아만 있다. “왜? 뭐 물어볼 꺼 있냐?” “물어보고는 싶지만 후환이 두려워서요. 그리고...... 물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구요.” 예의 바르게 자란 녀석은 확실히 틀리다.... 는 생각이 들 정도로 상대를 배려하는 녀석의 반응에 그냥 기분이 좋아져 이번에는 진짜 웃었다. “소심하긴..... 덩치에 맞게 놀아라.” “덩치 크다고 남한테 상처될 말해도 되는 거 아니잖아요.” 라며 진지하게 말하는 그 눈빛에 순간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을 겨우 겨우 감출 수 있었다. 이 자식..... 진짜..... 닮았어. 아무리 봐도 상원이랑, 세하처럼 잘 자란 아이 같잖아. 언제나 착하고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알고....... 내가 가장 동경했던 세계에 속한 좋은 인간이잖아, 이거. 아마 그래서 내가 이 놈이 예쁜가 봐. 나도 꼴에 착한 놈들은 좋아해서말야.... 뭐, 그렇다고 절대 동화되어가지는 않겠지만. “그래.... 그렇지. 그래도 누구는 너무 상처를 주던 걸......” 쓰게 웃으며 말하자 경진이도 나와 같은 표정으로 어설프게 웃는다. 어린 놈이..... 참 벌써부터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떻게 살래? 앞으로 더 힘들고 기구한 일들도 많을텐데 말야. 그 나이 때는 나이에 맞게 멍청하게나 굴라구. 영악한 놈들은 악당이 되던가, 아니면 평생 상처만 받다 끝나는 거라구..... “워낙에 인간이 운이 없다보니 꼬이는 것도 다 그런 인간들이다. 팔자가 더러워서.” 녀석이 귀엽다는 생각에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자 잠시 후 고개를 들고 입을 연다. “저 선생님 좋아해요.” “....... 좋아해 주는 건 상관없는데..... 나 태민이 놈 하나로도 충분히 머리 아프니 너는 그냥 포기해주지 않을래?” 뭐 보고 놀란 가슴 뭐 보고도 놀란다고..... 「좋아한다.」는 말에 눈을 게슴츠레 뜨고 뚱하니 내뱉자 녀석도 눈을 착 깔고 똥 씹은 표정으로 마주봐온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선생님으로, 그리고 어른으로 좋아하는 거에요.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하고 좀 다르거든요.” “..... 내가 덜 떨어졌다는 거냐?” “비슷해요. 뭐랄까.... 아직도 아이 같달까..... 어느 날은 덜 큰 거 같기도 하고, 어느 날은 세상 다 산 사람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냥 막연한 느낌이 있어요, 선생님은 애 같아요. 솔직하고 단순하고 제 멋대로에 배려도 없고... 그런 것 같은데..... 안해본 일이 없잖아요. 나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날, 지혁이한테 얘기 들었어요. 선생님도 많이 힘들었고 그래서 성격이 좀 이상해졌다고 해도.... 선생님 얘기 잘 들어주잖아요. 다른 어른들처럼 우리 무시하고 이상하게 보지도 않고 있는 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봐주잖아요. 그리고.... 선생님은 절대 배신하지 않잖아요.” 줄줄이 흘러나오는 돼지의 말에 놀라 녀석의 눈을 바라보자 숨을 한 번 들이키고 다시 입을 연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선생님은 절대 누굴 배신하지 않을 꺼라는 거..... 나요, 형하고 잔 거 딱 한 번 누군가한테 말한 적 있어요. 중학교 때 좋아하던 선생님이었는데.... 늘 웃으면서 자기한테 고민 같은 거 말하라고...... 자기를 믿으라고 해서... 너무 다정해서 고민을 털어놨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게요?” 살짝 웃으며 바라보는 얼굴에 슬픔이 얽혀 더 이상 농을 던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렇게 불쌍한 얼굴로 쳐다보는 거 질색이라니까. “그 선생님이요.... 나보고 미쳤대요. 그래서 정신과 상담하라고 하더니 부모님한테까지 연락해서 무슨 피해망상증인가 뭔가로 진단 받았어요. 갑자기 체중이 늘어 우울증이 겹쳤다고 하더군요. 자신감 부족으로 피해망상에 빠진 거래요. 그래서 농구 시작했어요. 다이어트 겸 우울증 치료로....... 그게 그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얼마 후에 그 선생님이 다른 사람과 얘기하는 걸 들어버렸어요. 저 보고 괴짜에 정신 나간 놈이라고 했어요. 진짜 이상한 애라구...... 돼지 같은 녀석이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한다고요. 잘난 형에 대한 반감에 제가 형을 좋아해서.... 그런 변태라서 그런 망상을 하는 거랬어요. 그래서..... 그 학교 나와서 전학가 버렸어요. 그 다음부터 절대 다른 사람한테 제 얘기 안했어요. 태민이도 권형이형한테도요. 그런데 선생님한테는 왠지 말해도 좋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했는데 선생님은 저한테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아니라.... 형이 나쁜 거라고 말해줘서 기뻤어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잘못한 거 아니라고 말해준 사람은 선생님이 처음이었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경진이의 말에 옛날의 일들이 조금씩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물론 난 누군가에게 내 일을 모두 터놓고 의논할 정도로 귀엽지도 않은 놈이었지만...... 믿었던 단 하나의 희망이 끊겨져 나가던 순간의 고통은 알고 있다. 아무도 믿지 않고 혼자만 웅크리고 앉아 망상만을 거듭하다 겨우 찾은 실날이 어이없이 끊어질 때의 막막함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때는 진짜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으니까, 전신을 칼로 난도질해도 풀리지 않을 듯 한 그 분노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 진짜 제가 잘못한 거 아니죠..... 선생님.....?” 애처로운 강아지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녀석의 눈빛에 입을 다물고 녀석의 머리를 끌어안아 주었다. 불쌍한 놈..... 어린놈이 고생이 많았구나. 다른 녀석들이 징징거렸다면 가만 안뒀겠지만 이 강아지 같은 녀석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그리고 꼴에 내가 이 놈한테는 묘한 부성애(父性愛)를 갖고 있어서 말이지. 이 새끼를 보면 내 과거가 떠오르거든. 게다가 내가 좀 편애가 심하잖아. “잘못하긴 개뿔. 니가 잘못한 거면 난 지옥에서 스카웃 올라왔을 꺼다.” 뭐, 지옥에서 내 스카웃을 고려 중일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팔자가 더러운데 잘못했다고 추궁까지 받으면 캡으로 열받지 않아? 안그래? 사는 것도 서러워 죽겠는데 비난까지 받으면 진짜 불쌍한 인생이 되는 거잖아. “형하고.... 끝장을 봐. 솔직히 말해라, 너 형 좋아하냐?” “..............” “솔직히 말해. 멍청하게 자기 감정도 모르다 끝내고 후회하지 말고.” “........ 잘 모르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건지.” “그럼 일단 그것부터 알아 봐. 알고 나면 비법을 전수해주지. 놓치고 후회하느니 자존심 상하고 한심해 보여도 사랑은 잡는 게 나아. 내가..... 그렇게 놓쳤어. 평생 못 잊을 사랑을 내가 놔줬거든. 그 놈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그 놈이 너무 미워서 놓아버렸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랑이더라. 너는 후회하지 마, 시간이 많으니까......” “....... 그 사람 보내고 많이 후회했어요?” “아니, 별로 후회는 안했어. 사랑이란 것도 몰랐거든. 어려서..... 게다가 그 놈이 하도 성질을 긁어서 죽여버릴려다 말았지. 그런데.... 나중에 보니 그렇게 성질에 거슬리던 게 의식해서였어. 나 진짜 사랑했거든.” 피식 웃으며 말하자 경진이가 약간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연다. “저도 아직 어려서.... 잘 모르지만요...... 그 사람도 아마 선생님 좋아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서로 의식한 거잖아요. 그런 거..... 조금도 슬픈 일이 아니에요. 평생 그런 사랑 못해보는 사람도 있는데 선생님은 복받으신 거에요.” 마지막 말을 끊고 어딘지 희미하게 웃던 녀석이 왠지 애처로워져버렸다. “그래.... 우리 운 좋은 인간들이니까 굳세게 살자. 웃어라.... 돼지야..... 울면 바보래......”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그러게 말이다.......” 그냥 머리속에 떠오르는 노래가 있어서 말이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그렇지.... 왜 우냐? 이 엿같은 인생 떡같이 붙어 살아준다니까. “열심히 생각해봐, 그래서 결론이 나면 어느 쪽이든..... 다음에는 니가 덮쳐라.” “....... 괜찮은 방법이네요....” 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의 반응에 왠지 인간 하나 또 망쳤다는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뭐 사실, 이 녀석도 그렇게 정상적인 놈은 아니었으니까.... 내 잘못 아니다, 뭐..... 폭력선생찬가 Second Part - 08 - ▷ track 08. 다음 날 경진이 놈은 아프다고 연습에 빠졌고 나는 괜한 핑계로 이것 저것 사러 숙소를 나와 시가지를 걷고 있었다. 책과 새 음반을 사고 한참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려댔다. 뭔 일인가... 해서 번호를 확인해도 모르는 번호였다. 지역번호가 여기 꺼니까... 숙소인가? 흐음..... “네! 장인하 핸드폰입니다.” <선생님 큰일 났어요!!> 핸드폰 저 멀리서 들리는 돼지의 급박한 목소리에 놀라 인상을 찡그리고 받아쳐 주었다. “또 뭐? 애들이 다른 학교 애들하고 싸우기라도 하냐?” <어떻게 아셨어요?> “뭣!?” 그냥..... 물어본 건데..... 이것들이 아예 나를 피를 말리려고 작정을 했구만!!! 아이구, 왠수 왠수들아!!! “도대체 뭐야? 이번엔!! 또 그것들이 나 가지고 시비 걸었냐?” <선생님...... 돗자리 펴도 될 것 같네요.......> “아웃!!! 그럼 또 태민이 자식이지? 그 놈이지?” <그건 틀렸어요.> “그럼 누구야?” <맞춰보세요.> 이 돼지새끼야! 지금 그런 말이 나오냐? 그것들 또 사고치면 나 더러 어쩌라구!! 게다가 다른 학교와의 합숙소에서 말야!! 제발 날 좀 내버려 두란 말이다. 이제 지긋지긋하다구!! 오늘도 수면제 사러 나온 거 보면 모르겠냐? 가뜩이나 신경 예민한데 왜 지랄들이야!! 진짜 선생을 때려치든가 해야지..... “누구야? 빨리 불엇!” <선생님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 “내가 잘 아는 사람이 한 둘이야? 대체 어떤 망할 새끼가 이 선생의 방학을 방해하는 거냐?” <권형이 형이요........> 순간 머리가 아득해졌다. 택시를 타고 거의 날아오다 시피해서 도착한 체육관으로 뛰어들어가자 나란히 대갈빡을 박고 옆 학교의 고문인지 코치한테 신나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고 있는 우리 학교 애들이 보였다. 씨발, 또 패싸움이냐? “무슨 일입니까?”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가자 애들을 패고 있던 인간이 나를 돌아보며 그렇지 않아도 찌그러진 면상을 더 찡그린다. 씨발..... 그렇게 못생긴 얼굴로 쳐다보지마! 캡 열 받는다구! “뭐죠? 우리 학교 애들이 뭘 했길래 기합을 받는 겁니까?” 목소리를 내리 깔고 사나운 얼굴로 말하자 나보다 20cm는 아래 있는 못생긴 얼굴이 나를 올려다 보며 툭 하니 내뱉는다. “이 자식들이 우리 학교 애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대체 학교 교육을 어떻게 시키셨기에 애들이 이 모양입니까? 막말로 어린애들도 아니고 나이도 먹을만치 먹은 새끼들이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렇다고 남의 학교 애들을 때려도 되나요?” 삐딱하니 서서 빡이 돈 상태를 최대한 커버하며 말하자 그 쪽도 만만치 않게 나를 노려본다. “합숙소에서 다른 학교 애들 패는 녀석들인데 다른 학교 선생이 때리면 안됩니까?” 라며 못생긴 얼굴을 더 구긴다. 훗, 그렇단 말이지...... “그렇군요..... 제가 초보라서 몰랐네요. 합숙소에서 일을 벌리면 담당 교사가 아니라도 패도 되나보죠? 참 좋은 방침이네요.” 열이 받자 이제는 웃음밖에 안나온다. 온 얼굴에 만면한 미소로 그 쪽을 바라보자 갑자기 뒷걸음친다. 왜? 씨발아, 니 말이 맞다잖아. 그런데 왜 쫄아? “....... 좋은 걸 가르쳐주시네요..... 그런데..... 왜 우리 애들만 맞고 있는 거죠? 우리 학교 애들끼리 싸운 겁니까?” 라고 환하게 웃으며 묻자 안색이 파리해진다. 나한테 감사해라, 그 열라 시커먼 얼굴이 하얘지기도 하니 말이야..... “그건.... 아니지만.... 이 녀석들이 먼저 시비를 건겁니다.” “흐응, 요즘 싸움은 한 쪽 만으로도 가능한 모양이죠? 우리 애들은 전혀 안맞고 그 쪽 애들만 직살나게 터진 모양이로군요.” 피식 웃으며 입술 끝을 올려 비꼬듯이 말하자 얼굴이 다시 울그락 불그락해진다. 거 참 표정의 변화가 다양해서 좋네. “어느 학교 애들하고 싸운 겁니까?” “.............” “어/느/학/교/애/들/이냐구 물었잖아요.”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위협하 듯 말하자 한 걸음 더 뒤로 비켜선다. 씨발 진짜 못생겼잖아...... 짜증나게 시리.... “우... 우리 학교 애들입니다만.......” 하고 작게 답하길래 트레이닝복의 상의를 보니 <우진고교>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우진이라...... 훗..... “니네 다 일어나.” “선생님!!” 엎어져있는 우리 학교 애들에게 소리치자 그 못생긴 게 막아선다. 씨발, 비켜라...... 나 기분 더럽다.... “같이 싸운 놈들은 일어서 있는데 왜 우리 학교 애들만 엎어져 있는 건데요?” 하고 삐딱하니 묻자 흠흠거리며 물러선다. 그리고 눈치를 살피다 은근히 일어선 녀석들의 얼굴들을 보니 가관들이다. 아이구..... 그래 늬들 잘났다. 싸웠으면 차라리 패야지 그렇게 시퍼렇게 멍자국들만 지고 있냐? 우진 애들 보니 별로 맞지도 않았더만.... 씨발 싸울 꺼면 제대로 싸워서 이기란 말야! 마대 자루를 쓰던 공을 집어던지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기라구! 내 쪽에서 가까운 녀석들부터 찬찬히 훑어본 후 천천히 걸어가 맨 앞에 서있던 권형이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철썩-- 반동으로 뒤로 날아가 떨어진 새끼 앞으로 가서 그대로 몇 대 더 후려친 후 옆에 서있던 녀석들 역시 차례 차례 왕복으로 따귀를 날려주었다. 엉망으로 부은 얼굴에 멍 자국 위에 내 손자국까지 선명하게 새겨지고 서른 두 명을 거의 아작을 냈을 때에는 내 팔이 다 얼얼할 정도였다. “으........” 다 때리고 나니 저 멀리서 작은 신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강태민, 니네 몇 대 맞았어?” 양 볼을 붙잡고 있는 태민이 놈에게 묻자 겨우 입을 열어 답한다. “엉덩이.... 서른 대...요....” “우진은?” “아직..... 안맞았어요.” “그래? 그건 공평하지 않은 거네. 우진 다 엎어!” 내 목소리가 울리자 우진 녀석들이 선채로 웅성거린다. 씨발, 늬들 선생은 우리 애들 패도 되고 늬들은 나한테 맞으면 안된다구? 그런 개같은 법이 어디 있어? “니네 한국말 못 알아들어? 아니면 귀가 막힌 거냐?” “...........” 웅성거리기만 하는 녀석들의 반응에 아까 그 코친지 뭔지를 바라보자 옆으로 슬쩍 피한다. 당연하긴 하지.... 지금 내 표정이 사람이라도 잡을 기세일테니까..... “귀 뚫려있고 머리에 도끼 맞은 거 아니면 다 엎드려 뻗쳐! 아니면 그 상태로 따귀 서른 대씩 맞을래?” 그 못생긴 놈이 들고있던 마대자루를 강제로 빼앗아 그 쪽으로 다가가니 하나 하나 엎드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직 뻗대고 서있던 녀석이 서 너명.... “니네는 병신이냐, 저능아냐?” “병신도 아니고 저능아도 아닙니다! 저흰 잘못한 거 없습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우리 애들 얼굴이 저 모양이야? 시비건 게 어느 쪽이든 맞서 싸운 건 똑같은 녀석들이야.... 엎드려 뻗쳐하기 싫다면 뺨으로 맞아.” 몽둥이를 잠시 내리고 오른 손을 들어 경쾌하게 한 방 날리자 저 멀리로 나가떨어진다. 사실 우리 애들 때릴 때는 팔에 힘을 안넣었지만.... 늬들은 안봐줘.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진 녀석이 자기 입술 위에 흐르는 피를 보고는 놀라 뒤로 물러난다. “아직 한 대야. 한 대 맞고 나가 떨어져? 별 거 아니잖아.” 피식 웃으며 도발하 듯 말하자 멀리 나가 떨어진 녀석이 다시 일어나 다가온다. 그 모습에 빙긋 웃으며 다시 한 대를 내리치자 다시 한 번 나가떨어진다. 그 모습을 팔짱을 끼고 바라보자 서있던 나머지 놈들이 엎드리고 다들 조용히 숨만 삼킨다. 그러길래 날 왜 건들여? 젠장, 밝고 건전하게 살아보겠다는데 말야. “스물 여덟 대 남았다. 어서 와.” 싱긋 웃으며 말하자 겨우 겨우 일어선 녀석이 이 쪽으로 다가온다. 훗, 꼴에 자존심은 있는 모양이지? 다시 걸어온 녀석을 한 대 더 치자 저 멀리 나가떨어져서 이번에는 일어나질 못한다. 몇 번 일어나려고는 했지만 세 대에 넉다운이라..... 심약한 놈들. “츳, 약골 새끼!” 낮게 혀를 차고는 엎어져 있는 나머지 녀석들의 엉덩이를 정확히 서른 대씩 때리기 시작했다. 워낙에 많은 숫자라 벅차기는 했지만 우리 학교 애들이 맞은 걸 생각하니 열통이 터져서.... 팔이 떨어져 나가도 좋다는 오기로 녀석들을 하나 하나 때려나갔고 그 녀석들을 모두 때리고 났을 때는..... 내 팔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였다. “괜찮아요?” 팔에 파스를 붙여주며 경진이 자식이 답지 않게 걱정을 해준다. 지금 니가 나 걱정할 때냐, 이 놈아. “성격 더러운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선생님.... 다른 학교 애들까지 그렇게 패면 어떻게 해요?” “왠 설교야?” 신경질적으로 툭 내쏘자 근육이 삐걱거리는 데를 철썩하니 손으로 내리친다. “이 자식이!!! 아프단 말야!!” “그러게 왜 그랬어요? 여기서 일 커지면 어쩔려구요? 걔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구요.” “씨발, 그러게 누가 우리 학교 애들 건들이래?” “시작은 권형이 형이 한거에요.” “알아.” 알고는 있었지만 확실히 듣고 나니.... 뭔가 걸린다. 그 자식이 왜 그런 거야? 대체!! “걔네들이 연습 중에 선생님하고 권형이 형 같이 있는 거 봤다고 뭐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로 시비건 거야?” “아뇨.... 그냥 그렇게 말하고 지들끼리 수군덕거리는데 권형이 형이 갑자기 달려가더니 발로 찼어요. 그래서 그 쪽 애들 우루루 몰려들고 우리 학교애들 우루루 몰려가고 했단 말이에요.” “........” 상황을 들어보니 뭔지 대강은 알겠는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정경진...... “너는..... 그걸 어떻게 보고 어떻게 빠져나가서 전화한 거냐?” 그 엎어져 있던 놈들 중에 이 놈은 없었단 말야. “심심해서 연습 구경이라도 하려고 가서 봤고 싸우길래 조용히 내빼서 전화한 거에요.” “...... 우리 학교 애들 단체로 몰려가서 싸웠는데 넌 왜 빠진 거냐고 물으면?” “형이 애들하고 싸우면 안된다고 했어요.” 라고 뚱하게 답하는 녀석의 반응에 머리가 띵하니 울려왔다. 이 자식 암시가 아무리 잘 먹힌다고 해도 이 정도면 심한 거 아냐? 보통 그런 상황이면 조국의 원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들처럼 두 손 불끈 쥐고 합세하는 게 정상아냐? 니네 또래는 원래 그런 거 아니냐, 정경진? “너...... 진짜...... 치사하구나.” “치사한 거 아니에요. 바른 생활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다구요!!” 라며 벌떡 일어서더니 소리를 꽤액 꽤액 질러대는 정경진의 반응에 아연해져 버렸다. 이게... 말이지..... 자기 형하고 그렇고 그런 관계에 내 일 다 알고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녀석의 세리프란 말야? 대체 너의 사식의 경계선은 어디냐? 왜 진짜 상식적이어야 하는데서는 과감하고 상식적이지 않아도 되는 데서는 그렇게 소심하냐구! “어이구... 두야.... 별 거지 깽깽이 같은 놈을 다 보네......” 갑자기 머리가 아파져 관자노리를 꾹꾹 누르면서 말하자 입술을 댓발은 내밀고 씰룩거린다. “입 넣어라......” “씨, 선생님이 그래도 돼요?” “씹탱아, 내가 늘 말하지만 니 눈에는 내가 선생으로 보이냐?” “그건 아니지만.......” 비틀.... 그렇다고 당장에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최소한 선생 비슷한 걸로는 보인다고 해야지!! “그래도 다른 사람은 선생님으로 보잖아요.” “그래, 잘났다..... 돼지야..... 머리 아프니까 알아서 꺼져라.” “왜 맨날 사람 구박만 하고 그래요!?” “니가 구박받을 짓을 하잖아!!” 나도 열받아 소리 지르며 벌떡 일어서자 갑자기 문이 스르륵 열린다. “두 사람이 뭐해요? 복도 끝까지 싸우는 거 들려요.” 라고 들어서는 건 주장, 아니 권형이다. 저 놈이 왜 저렇게 무섭게 등장하고 난리야. 깜짝 놀랐잖아!! “선생님이 나더러 거지 깽깽이래!!” “경진이 나가 있어라. 나 선생님하고 할 얘기 있으니까......” “............ 알았다, 뭐.....” 라고 말하며 조용히 방 문을 나가는 경진이 놈은 나가기 직전에 한 마디를 잊지 않았다. “저 돼지 아니에요!” “저걸!” 홧김에 침대에 있던 쿠션을 들어 집어던지자 참 빠르게도 피해나간다. 진짜.... 내가 저 놈하고 비슷한 또래에 애도 아니고 이게 뭔 짓이래? 쪽 팔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어웃!!! “팔 괜찮아요?” “안괜찮아.” “죄송해요. 일 벌여서......” “죄송한 줄 알면 하질 말아야지. 일 다 벌리고 죄송하다면 끝이냐? 사과하면 뭐든 다 용서받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런 건 아니에요...... 화가 나서.... 그랬어요. 아무 것도 모르는 것들이 떠드는 게 화가 났어요. 왜 선생님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를 듣는 거에요?” “....... 그 녀석들이 뭐라고 했냐?” 물론 당연히 짚히는 바야 쌓이고 쌓였지만 너무 많으니 알 수가 없잖아. 제대로 살아온 인생이 아니다 보니 어쩌겠어? “...... 우리 얘기들은 녀석이 있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잖아요. 뭘 들었는지 제 멋대로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왜 선생님이 그런 녀석들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생각하면 화나고..... 그냥 짜증이 났어요.” “내가 그런 소리 듣는 게 하루 이틀이냐? 얼마 전에도 학교에서 생난리 친 거 보면 몰라? 그런 일에 일일이 신경 쓰다간 인간 불신증 걸려서 정신병에 들어갔을 꺼다. 남이야 뭐라건 무슨 상관이야? 줏대 없이 남의 얘기들에 휩쓸려 여기 저기 떠다니는 거 병신 짓이야.” 얼얼한 팔을 털어내며 말하자 권형이가 그대로 멈춰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날 내려다보기만 한다. 왜? 왜 또 그러는데? 왜 그렇게 불쌍하게 쳐다보는데? 난 그렇게 뭔가 아프다는 듯, 안됐다는 듯 쳐다보는 거 캡으로 싫다구! 열 받는단 말얏!! “..... 저랑...... 헤어지면..... 어떻게 할 거에요?” 두근--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며 심장이 아려오기 시작했다. 내가 꺼내기는 쉬었지만 권형이의 입에서 듣는 것은....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는 게 나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 뭐야......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나랑 헤어지겠다는 거냐? “그거 무슨 뜻이야?” “....... 그냥.... 해본 말이에요. 선생님..... 너무 차가워요. 나랑 헤어져도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죠? 그냥 신경질 부리고 며칠 지나면 또 괜찮아 질 거에요. 나만..... 안달나 하는 거죠.... 바보같이..... 선생님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쉬세요.” 라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고 나간다. 그 모습에 녀석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윤진이처럼.... 장지환처럼.... 두 번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아서.... 머리가 아찔해져 버렸다. 너 왜 그러는 건데? 왜 자꾸 기억나게 하는 건데? 이젠 완전히 잊었다고..... 모두 잊고 재미있게만 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거야? 난.... 상처받은 건 기억 안해. 모두 지워서 아픈 것을 저장하는 메모리는 항상 깨끗하게 비워두고 제 멋대로 살아가기로 한 사람인데 왜 그 기억들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하는 거야? “.............. 뭐야...... 그게?” 내가 아무렇지도 않다구?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혼자 화내도 초조해 하는 거 넌 보이지도 않아? 왜...... 윤진이랑 똑같은 표정으로 똑같은 말을 하는 거야? 내가 차갑다구? 이렇게 처절하게 매달리는 게 니 눈에는 안보여? 너야말로 뭘 보고 있는 거야? 왜 너희 둘이 똑같은 말을 하는 거야? 뭘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안다는 거야? 머리가 아파..... 빌어먹을.... 머리가 너무... 아프다구....... 짜증나.... 자고나면 괜찮아 질꺼야. 자고 눈을 뜨면 다 괜찮아져...... ▷ track 08. 수면제를 먹고 한참을 잔 후에 눈을 뜨자 하루가 지난 후였다. 머리는 텅비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문제는... 배도 같이 비었다는 것인데... 먹는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일단 살려면 먹어야 하니까 시간은 어느새 저녁 6시가 다 되어 있었고 기분이 더럽다 보니 꿈쩍하기도 싫었지만..... 그래도 뭘 먹긴 먹어야겠기에...... 매점으로 가서 쵸코파이 한 상자를 사들고 입에 하나 물고 터덜 터덜 숙소로 걸어갔다. 사실..... 쵸코파이가 말이지 만국민의 영양식 아니겠어? 당분 높지, 칼로리 왕짱이지! 게다가 맛있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먹기 편하고.... 가격도 싸고 말이야. 이거 하나 칼로리가 한 끼 식사와 맞먹는다는 말에 혹해서 자주 애용하고 있지. 저녁 식사시간인데도 운동장을 달군 열기는 가라앉지 않아 온 몸이 다 후끈거린다. "씨...... 아주 구워 먹어라..... 내가 삼겹살이냐?" 투덜투덜하면서도 당분을 섭취하니 즐거운 기분이 들어 어서 먹고 자야겠다.... 라는 생각으로 숙소 앞에 닿았는데..... 말이지.... 저녁 식사시간인 이 때에 저 멀리 숙소의 음침한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오다니.... 뭔가 이상하지? 씨발.... 또 뭔 일이냐? 우리 학교 녀석들만 아니면 상관없지만..... 사실...... 그 소리는 틀림없이 뭔가가 뭔가를 구타하는 소리였지만...... 호기심이 발끈해 그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난 우리 학교 애들일까 봐 걱정 돼서 그러는 것 뿐이다....... 뭐...... 살금살금 인기척을 내지 않고 그 쪽으로 다가가 벽에 찰싹 달라붙어 보니 그 야리꾸리한 소음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커다란 덩치의 세 놈이 작은 어떤 놈을 벽으로 밀어붙이고 린치를 가하는 장면인데..... 뭐, 다행히 우리 학교 애들은 아니군. "흐음.... 다행이야......" 으음..... 그냥 여기서 구경하기엔 지금 들고 있는 한 상자의 쵸코파이가 걱정이 돼고, 그냥 들어가자니 놓치기 아까운 구경거리고........ 또 그 이전에 선생으로서의 사명감을 발휘해 저것들을 말려야 하는 책임이 있지 않나.......... 라 는 고뇌에 빠졌지만 쵸코파이는 여기서 뜯어먹으면 되는 것이고 구경은 바로 하면 장땡이고 선생으로서의 사명은 잠시 버렸다, 필요하면 다시 주어오면 되는 거지. 내가 언제부터 선생으로서의 위엄 어쩌고 했다고..... 흥, 웃긴다지. 고개만 빼곡이 내밀고 셔츠 주머니에서 안경을 빼고 벽 뒤에 쭈그리고 앉아 쵸코파이 하나를 더 까들고 그 쪽을 구경했다. 커다란 세 녀석은 학교 선배인 듯 반말로 꼬맹이를 윽박지르고 꼬맹이는 고개만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다 맞고 서있다. "젠장............. 열 받네, 이거...." 하여간 요즘 것들은 근성이 부족하다니까!! 선배고 뭐고 시비걸면 목숨 걸고 덤벼야지. 왜 맞고만 있나? 아우, 짜증나!!! 재수 없어!! 열 받아서 구경 안할래..... 쪼끄만 게 예쁘게 생겨서는 완전 빠가 아냐? 덜 떨어진 새끼.... 어우, 짜증나!! 당하고 있는 꼬맹이를 보자 중학교 시절의 성준이가 떠올라서인지 더 열통이 터졌다. 그러고 보니.... 그 놈은 저것보다 더 했지. 내가 그 새끼 당하는 꼴보고 열 뻗쳐서 더 괴롭혔으니까.... 병신 새끼들, 엄마 치마폭에 싸여 자란 놈들이 다 저렇지, 뭐.... "츳!" 낮게 혀를 차고 더러운 기분에 그 조그만 놈이 그 놈들에게 맞던, 죽던, 어디가 부러지던 맘대로 하라는 생각에 일어나 내 방으로 가려는데...... 그게 말이지..... 내가 나이가 들다 보니 신경통이...... 왜 이리 무릎이 시리다냐.... "으윽....." 한 번 앉으니 일어나기가 힘드네... 게다가 요즘 잘 먹지도 않아서..... 빈혈기까지..... "으응...... 인나야 되는데......." "여기서 뭐해요?" 혼자 끙끙대며 다리를 펴려는데 누군가 등에서 나를 일으키 세우며 귀 바로 뒤에서 이야기한다. "어...... 강태민......" "지금 식사시간인데 뭐하시는 거에요? 여기..... 어?" 나를 보다, 쵸코파이 상자를 보고, 그 다음에 내가 꿇어 앉아있던 작은 건물 틈새를 본 태민이 놈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 안 쪽으로 들어섰다. 아, 저 놈이 왜 저런대..... 쟤네 학교 일은 쟤네끼리 해결하라고 냅두란 말야. 니가 끼어서 뭐 하려고 그래....? 강태민!!! 당하는 놈들은 다 이유가 있는 거란 말야!! "너희 뭐야?" 무서운 목소리로 쫘악 깔며 상대를 위협하 듯 말하는 태민이의 말투에 큰 덩치의 세 녀석이 순식간에 쫄아버린다. 뭐 사실 크다 크다 해도 말이지.... 태민이 놈이 더 크거든. 저 놈들은 살이고 태민이는 키와 떡발이지..... 후훗..... 자랑스럽냐? 장인하? 니 제자 덩치 크고 힘 센 거 같아서? 씨발, 이러니까 내가 조폭 선생 소리 듣고 다니지..... 이 미모에 가당키나 한 소리야, 그게.... "........ 상학이냐? 다른 학교 놈은 빠져! 우리 학교 문제야." "학교 문제를 이런 음침한 곳에 와서 해결 해? 빨리 놔줘!" 꼴에 저 놈이 의협심도 있네. 그런데.... 태민아.... 너 거기서 싸우면 나한테 죽는다∼ 그것만 알아둬라..... "넌 니네 학교 가서 놀아!" "니네나 집에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와, 돼지새끼들이......" "이 새끼가!!" 먼저 손을 들어 내리치려는 땅딸막한 - 사실 그 셋, 키도 작더라구..... 태민이 보다는... - 놈들의 도발에 태민이까지 손을 들려는 기세가 보였다. 망할.... 너 죽어, 강태민!!! 내가 여기까지 와서 니네 치다꺼리 해야한단 말야!!! "거기 뭐야!?" 서둘러 쵸코파이를 바닥에 던지고 안보이게 발로 슬쩍 밀고 선생인 척 당당하게 서있는 나의 개폼이라니.... 여기 와서 선생다운 말을 해본 게 처음 인 거 같지? ".......... 으..........." "니네 어느 학교 애들인데 우리 애를 때려? 너네 어느 학교야?" 당당하게 걸어가 앞에 서자 이 놈들 나보다도 작다. 거 참 우리 학교 애들 때문에 요즘 애들이 다 큰 줄 알았는데 아니네. 이것들 순 비곗살들 아냐. 굴러라, 굴러! 아우 짱나, 저 산 같은 배... 면상도 열라 구리잖아. 난 못생긴 놈들 보면 더 열 받는단 말야.... "저기....... 저희...." 당황한 듯 더듬거리는 꼴들을 보니 그 때 체육관에 있긴 있었던 모양이로군. 어제 그 요란했던 과거를 생각해 보라! 우리 학교 애들하고 붙었던 딴 학교 놈들 내 손에 아작나서 그 동안 뜀박질도 못했다던데.... 다행히 그걸 기억하는지 머뭇머뭇한다. 망할 자식들, 그러게 왜 우리 학교 애를 건들여? "뭐야? 너희 뭔데? 우리 학교 애한테 지랄이야? 니네 고문 누구야? 어떤 자식이야?" "저............" 서로 곤란한 듯 눈치만 보는 녀석들 틈에서 태민이 놈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갑자기 싱긋 웃는다. 후훗, 내 수제자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군. "선생님, 그만하세요. 전 괜찮아요....." 라면서 불쌍한 듯 고개를 숙이고 명연기를 펼치는 태민이 놈의 모습에 나머지 네 놈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고 나는 애처로운 얼굴로 답해주었다. "태민아..... 이런 애들은 안감싸줘도 되는 거야....." "아니에요, 전 진짜 괜찮아요....... 그냥 좀 놀란 거에요." 씹탱..... 니 그 덩치로 놀랐다는 게 말이 돼냐? 당당히 나서서 소리치던 놈에게서 나올 법한 소리냐, 그게? 하지만...... 내가 사주한 거니...... 잘 키운 제자 하나 열 아들 안부럽다더니 - 젠장 잘 키워서 사기꾼으로 만들 일 있냐? 제자가 저 정도면 내 친자식이면 자해 공갈단이나 해먹으면 되겠다...- 저게 이미 내 본능을 눈치챈 거 같아. 하긴.... 저 녀석은 다 봤으니.... 그 열렬했던 모든 장면들을..... 거기에다 그 덕에 나에 대한 환상까지 갖고 있었을테니,..... 뭐...... "하여간 착해빠져서......" 착하긴 개뿔..... 손 쳐들고 있던 그 새끼 한 방이면 날릴 녀석을..... 으아, 미치겠네, 이거... "너희 이번에는 봐줄테니까 빨리 니네 방으로 돌아가.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이런 일 있으면 가만 안둘 줄 알아!" 라고 낮게 윽박지르자 다들 알아서 뿔뿔히 흩어진다. 어우... 어우! 어우! 어우! 작은 틈 밖으로 모두 사라진 녀석들을 확인하고 태민이 놈이 뚱한 얼굴로 바라본다. ".... 뭐냐, 그 표정은?" "그러게 진작에 도와주죠. 왜 보고만 있어요.... 똥 싸는 폼으로 앉아서....." "똥 싸는 폼이라니...... 그리고 남의 싸움을 내가 왜 말리냐? 옆에서 구경해야지. 돈 주고도 못보는 게 싸움 구경인데......" "선생님.... 가끔은 선생님 모드로 전향해 보는 게 어때요?" "모드는 개뿔! 내가 기계냐, 모드 전향을 하게? 그리고 막말로 저 놈들이 우리 학교냐, 아니잖아? 난 남의 학교 일까지 간섭할 정도로 오지랖 넓지 않다." "선생님이잖아요......" "이럴 때만 선생 찾지?" "........ 하여간..... 저 이 놈 방으로 데려다줄게요. 식당 가서 밥 먹지 왜 그러고 있어요." "식당 밥 너무 맛없어. 그런데....." 데려다 준다는 말에 아직 남아있던 작은 놈을 보자 조그마한 게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다. 얘가 사람 볼 줄은 아는지 내 미모에 넘어간 듯 한 얼굴인데..... 흐응..... "..... 자... 장이... 인하......" 더듬 더듬 정확히 내 이름을 말하는 녀석의 반응에 놀라 정면으로 바라보자 시선을 피한다. "너...... 내 이름 어떻게 알아?" 왠지 싫은 예감이 들어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려다보자 푹 수그리고 있던 얼굴을 겨우 겨우 끌어올리며 다시 더듬더듬 말을 잇는다. "..... 지... 지환이... 혀, 형이.... 말해... 줬어..... 어요...." "너..... 영매사냐?" 죽었단 놈에게 들었다니..... 이 놈.... 귀신이라도 보나? "...... 저.... 저..... 지환이.... 형이..... 바다....다에...." "장지환..... 말하는 거냐..... 꼬맹아?" "..... 이, 이름.... 수.... 수경이... 이에요..... 꼬, 꼬맹이... 아니...에요....." 라고 조목조목 따지는 꼴이 열 받지만...... 그 자식이로군. 장지환이 죽기 전까지 끼고 살았다던 벙어리가 저 놈이냐? 재수 없으려니 별 거랑 다 마주치네..... 젠장..... "그 키면 꼬맹이야. 장지환 새끼랑 살던 게 너냐?" 차갑게 얼굴을 굳히고 내뱉자, 정확히 시선을 들어 나를 응시한다. 자신과 똑같은 시선을 갖고 있는 누군가를 보 듯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물러서지 않고 시선을 맞춘다. 도전적인 눈으로 나와 정면으로 눈 맞추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몇 되지 않는데 말이야. 제법 베짱은 있잖아....... 흥, 그런 새끼가 선배들한테 얻어터지고 다니냐? "새.... 끼.... 아니, 아니에요.... 지환이형.... 좋, 좋은 사람....." 끔찍할 정도로 바른 눈으로 교과서에 나올법한 말을 지껄이는 새끼의 말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그 자식이 좋은 사람이라구? 그 따위 병신 새끼가? 웃기지도 않는군...... 사정이야 어떻든 죽어라 날 괴롭히던 놈이야.... 너 따위 꼬맹이가 눈 부라리고 내게 좋은 사람이라고 우길 만한 인간이 아니라구.... 젠장, 차라리 나더러 착한 사람이라는 쪽이 설득력이 있겠다. "펴, 펴, 평생 말하고 있어라..... 언챙이!" 왠지 신경질이 나 말을 자르고 비비꼬자 태민이 놈이 놀란 눈으로 이 쪽과 저 쪽을 번갈아 쳐다본다. 젠장, 저 새끼 알지. 권형이네서 난리 칠 때 같이 있었으니.... 대강 눈치는 깠겠군. 왜 자꾸 기억나게 하는 거야, 다들.....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걸..... 죽어버린 자식을 기억해서 뭐 하게? "선생님..... 말을 왜 그렇게 해요?" 입술을 깨물고 조그만 녀석과 노려보는 내게 태민이가 화난 듯 소리친다. "넌 상관 마, 강태민 니가 끼어들 문제가 아냐....... 그 새끼가 끼고 살던 병신이 너냐? 그런 미친 새끼랑 사니 그 모양이지..... 죽어서도 도움이 안되는 놈이로군, 진짜....." 씨발...... 이래서 밖에 나오면 좋은 일이 없다니까...... 빨리 내 방으로 가서 쵸코파이나 뜯고 잘래. 역시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게 아니었어. 재수 없어..... 진짜.... 재수 만땅이야..... 제기랄.... "선생님!!" 뒤에서 애타게 부르는 태민이의 목소리야 어쨌든 서둘러 내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좁은 틈을 나왔다. 대체 죽은 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란 말이다...... 다시 나타나지 말라구. 왜 이제 와서 자꾸 떠오르는 거야..... 장지환, 서윤진.... 너흰 이미 나한테 죽은 지도 한참 된 백골들이야. 사라져, 사라져서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마! 콰당-- 방에 돌아와 열 받을 대로 받아 침대를 발로 걷어찼다. "으악!!!" 제기랄!! 아프잖아!! 맨발로 걷어차다.... 발톱이 빠지는 줄 알았잖아.... 젠장할..... "아프잖아....." 아직 저번에 물어뜯은 손톱도 다 낫지 않았는데 왜 또 아파지는 거야? "아파..... 젠장..... 아프다구..... 장지환......." 발톱이라도 빠지면 다 네 탓인 줄 알아..... 너 때문에 손톱도 그렇게 된 거란 말야. 왜 죽은 거야..... 왜 그런 바닷가에서 혼자 청승 떨다 저런 떨거지 하나 버려놓고 사라진 거야? 망할 자식..... 너 같은 거 잊고 살려고 했는데.... 마음 비우고 너 같은 거 잊었다고 당당하게 소리치고, 아프지 않다고 했는데 왜 자꾸 기억나는 거야? "아파...... 젠장......." 발과 예전의 다친 손톱까지 아파 와 겨우 아물어가던 엄지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질근질근 씹어대자 빠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친 손이 너무 아파서 다른 손의 손톱으로 아픈 손등을 할퀴어대지만..... 고통이 줄어들지 않는다. 이렇게 아픈 거 질색이란 말야. 권형이만 아니었어도.... 그 녀석만 아니었어도 너 생각 안났잖아. 혼자서 죽어버리면 어떻게 해. 너 살려고 했잖아, 그렇게 죽으려고 발악하다 겨우 살려고 했는데 왜 죽었어? 미련한 새끼...... 내가 복수할 시간은 줬어야 하잖아. 니 말대로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았으면 좋았을 걸..... 차라리 그랬으면 행복했을 걸...... 부러진 손톱 사이로 피가 흘러 바닥으로 떨어진다. 조금씩.... 조금씩...... 씨발, 과다 출혈로 죽진 않겠지. RRRRRRRRRR 손톱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무는데 핸드폰이 울려댄다. 잠시 받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 열어보니 세하 놈이다. "나야...... 왜?" <대뜸 「나야」가, 뭐냐?> "....... 그럼 「나야」라고 하지, 「너야」라고 하냐?" 반가운 목소리에 아픈 내색을 하지 않고 웃으며 애써 받아쳐 주었지만 여전히 손톱이 아려온다. <하여간...... 합숙은 어때?> "그냥 그래.... 빌어먹을이다. 재미없어." <........ 동생이랑 화해는 했냐?> 짐짓 걱정스러운 투를 겨우 접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는 그 목소리에 쓴 미소가 흘렀지만 굳이 내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들이라면 내 목소리만 듣고도 이미 파악했겠지. "...... 더 싸웠어." <뭐라고 했길래?> "뭐라긴..... 그냥..... 옛날 얘기하다가 싸운 거지..... 미친 년 때문에 되는 일이 없네. 씹, 벨 틀려......" <벨이 틀리건 속이 틀리건 참아라..... 저번에 보니 반듯하니 착한 녀석 같더라. 너랑은 딴판이야.> "씨가 틀려서 그런가 보지." 뭐, 그 새끼 애비도 별로 좋은 씨는 아니었지만...... 그럼 그 놈은 돌연변이인가? <하여간 왠만하면 화해해라. 니가 좀 숙이고 들어가. 괜히 성질 부리지 말고.> "내가 언제 성질 부렸다고 그래?" <니 성질 내가 모르냐? 겨우 잡은 거면 놓치지 마라..... 상원이 너 걱정 많이 하더라.> "지 앞가림이나 잘하라 그래라. 나야 어딜 들이받던 고꾸라지건 다이빙을 하건 금새 일어나지만 그 놈은 아니잖아." <하긴...... 그 고지식한 성격에 니 옆에서 버틴 게 기적이지.> "그렇지....... 앗......" 전화를 다른 손으로 옮겨 쥐는데 그만 손톱을 건들여 너덜너덜한 조각이 앞으로 휘어져 버렸다. 젠장...... 아예 넘쳐 흘러라, 흘러! 요즘 영양섭취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출혈량은 많은 거야? <어디...... 아프냐?> "아니, 손톱이 깨졌어." <뭐? 어쩌다가? 너 또 엎어졌지?> 답지 않게 흥분하며 소리치는 목소리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착한 녀석.... 저런 놈이 어떻게 조폭이 됐을까 싶을 정도로 맘 약하고 여린 놈 같으니라구..... 뭐, 이 놈을 조폭으로 민 거에 내 공이 크긴 컸지만....... "아냐, 임마...... 그냥 뭣 좀 하다 다쳤어. 아, 많이 다쳤나 보다. 양호실 가봐야겠네." <그러게 조심 좀 하지! 어휴, 왜 그렇게 칠칠맞아?> "닥쳐라, 내가 칠칠맞던 팔팔맞던..... 니 애인이나 잘 챙겨." <....... 알았어..... 아프지 좀 마라, 애정결핍증 환자 주제에 아프기까지 하면 어떻게 해?> "안아파, 임마. 나 아프면 누가 나 간호하라구......." 그러고 보니 이제 상원이도, 성준이도 없네. 이젠 진짜 혼자구나..... 장인하, 모두 보내버렸구나. 진짜.... 이젠 너 혼자다. 친구들이랑만 평생 살겠다던 것도 어릴 때 얘기지. 니 나이가 몇이냐...... 장인하, 너 많이 늙었어. 이렇게 아파도 너만 손해야. <치료 잘해. 또 낫기도 전에 다치지 말고.... 싸우지 말고.> "잔소리는..... 하여간 젊은것들이 그렇게 걱정이 많냐? 걱정 마라, 내가 내 몸 하나는 천금같이 여기는 인간 아니냐? 들어가라..... 나도 빨리 치료하고 잘래." <그래.... 올라오면 연락해라.> "응........" <밥 잘 챙겨 먹고 귀찮다고 또 잠만 퍼자지 말고 너 배고프면 그냥 자버리잖아.> "내가 곰이냐?" <비슷한 종류지.... 그럼 끊는다. 일 가야 돼.> 뭔가 부스럭거리며 챙기는 게 곧 어딘가로 갈 것 같아서.... 왠지 녀석마저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이름을 불렀다. "전세하......." <왜?> 낮게 울리는 목소리..... 전세하, 착한 놈...... 넌 안 사라질꺼지? 너 내 친구지? 내 친구 맞지? 나 좋아하지? "........ 나..... 좋아하지?" 입근육을 억지로 땡겨 웃으며 겨우 나간 말에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왜? 이럴 때는 곧장 말해줘야지. 각서 파기했다고 그런 것도 안해줄꺼야, 전세하? <........ 너..... 무슨 일 있지?> 귀신 같은 놈..... 둔하게 생긴 놈이 눈치 하나는 죽이게 빠르다니까. 잘 자란 놈들이 왜 그렇게 영악한 건데? "무슨 일은, 언제나 물어보는 건데, 새삼스레....." <새삼스러운 게 아니잖아. 너 왜 그래? 무슨 일 있지? 내가 주명세나 서윤진같은 둔탱인 줄 알아? 니 목소리 톤만 들어도 무슨 일 있는 거 알아, 무슨 일이야? 너 많이 아프냐? 아니, 권형이랑 크게 싸운 거야?> 이래서 내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들은 이럴 때 질색이란 말야. 그런 거까지 다 알아채면 나 할 말이 없어지잖아. 그냥 좀 모른 채 하고 넘어가란 말야. "....... 무슨 일은.... 그냥 손톱이 아파서 그래 ......" 억지로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지만 세하 녀석은.... 답이 없다. 이 녀석들이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앉은 거 같아,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사겼나 봐. 이제 내 거짓말이 통하지 안는 걸 보니까 말야. <......... 너...... 많이 아프구나........> - 너 아프다며? - 세하의 말이, 목소리가.... 기억 속에 존재하는 누군가의 목소리와 겹쳐져.... 목구멍까지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아련하게 보이는 윤곽과 슬픈 목소리..... 왜 이런 걸 닮는 거야? <장인하!! 대답해.......> 다급하게 울리는 세하의 목소리에 물기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그 사람에게는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이...... 터져 나간다. "...... 응, 나 많이 아픈가 봐..... 그런데 어쩌지? 와서 도와줄 사람이 없다..... 어떻게 하지, 전세하..... 어떻게 할까?" 눈 앞에 뿌옇게 흐려져.... 잘 보이질 않지만 본능적으로 웃으면서 말해본다. <바보 같이... 왜 혼자 있을 때 아프냐? 그러게 정신 좀 차리고 다니지....... 내가 갈게, 지금.> - 자꾸 아프면 어떻게 해? 형 이제 인하 아파도 못 보러 오는데.... 이제 너 혼자 아파야 되는데...... - "응, 와라...... 혼자 있기 싫어.... 세하야..... 손이 너무 아파..... 손톱이.... 피가 나..... 자꾸만 흘러나와......" <바보같이...... 얼마나 다친 거야? 너 아픈 줄도 모르고 피 철철 나도록 가만있었지? 거기 어디야? 내가 갈게. 지금 갈테니까 너 가만히 있어.> - 나 힘들어..... 자꾸 아프면 어떻게 해? 인하... 우리 애기.... - "나도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 그냥 몰랐으면 편할 걸...... 권형이 보다 자꾸 그 놈이 생각나. 어떻게 해.... 세하야....." <.... 장인하........> - 너를 제일 사랑해....... - "그냥 그 놈 말대로 아무 것도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살 걸 그랬어. 그럼.... 이렇게 돼지 않았을텐데...... 손톱이.... 너무 아파......" <..... 내가 갈게..... 내가 갈테니까...... 인하야.....> - 널 아프게 하기 싫었어. 우리 인하..... 우리 애기.... - "그 놈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날 너무 아프게 해서 진짜 죽여버리고 싶었는데...... 그 놈이 사라지니까..... 아니, 날 사랑했다는 걸 알아버리니까..... 그 새끼가 옆에 없어서 죽을 것 같아. 어떻게 해, 세하야....... 나 진짜 그 녀석 사랑했나 봐. 잡을 껄 그랬어..... 그 때 죽을 것 같아도 잡을 걸 그랬나 봐....." <울지.... 마...... 인하야......>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목소리만.... 남아서.... 사라져가. 아무 것도 보이질 않아......" <............> 장지환이 죽었을 때도 흐르지 않던 눈물은 지금도 흐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화기 저 멀리로 울고 있는 세하가 보이는 것 같아서..... 나 대신 울고 있는 녀석이 보일 것 같아서..... 그냥 멍하니 뿌연 시야로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곳에는 14살의 장지환과 17살의 세하가 울고 있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내가 화낼까 봐 숨 죽여 조용히 흐느낀다. <좋아해, 사랑한다, 장인하...... 이 불쌍한 놈아......> "...... 응, 계속 좋아해 줘. 나도 너 좋아해. 사랑해..... 세하야....." 이젠 아픈 것도 모르겠어. 그냥..... 이렇게 있다 보면 언젠가는 해결 돼겠지. 뭐, 언제부터 즉각 즉각 잘 풀리는 인생이었다고.... 시간이 지나면 모두 잊혀질 거고 괜찮아 질꺼야. 그렇지, 새하야....... The Second Album End To Be Continued to Third Album ▷ Track 01. Hotel California Sung By Eagles 방안에는 오래된 이글스의 앨범이 흐르고 여름의 습한 공기로 가득 매워져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고등학교를 옮겨와 뜻하지 않게 담임의 자리를 맡고, 드디어 함께 학교를 다니던 애인에게 채여 제 정신이 아닌 때에 갑자기 맡게된 농구부 고문..... 그 때부터가 바로 나의 악몽의 시작이었던 거지. 그 농구부가 상당히 문제가 많은 곳이라서 말이야. 훗, 주장은 알고 보니 내 이복동생이라지, 한 놈의 떡대는 지네 형과 삐리리한 관계라지, 교내 불순 동성교제를 하던 두 놈은 서로 못잡아 먹어 안달이면서 싸우다 결국은 헤어졌다지. 후훗, 그리고 3학년 몇 놈들은 내게 별 소리 하다 열라 깨졌다지. 아주 멋진 학교야. 이런 멋진 학풍이 또 어디 있겠어? 아, 씨발.... 내가 그 명세 놈이 나 찰 때부터 알아봤어. 그 놈 따라 들어온 학교니 어지간하겠어? 아, 열 받아..... 씨발!!! 내가 결국 그 놈의 농구부 합숙에까지 따라와 손톱 뽀개 먹고 이렇게 신경질 내는 것도 전부 이 학교 새끼들 때문인 거라구!! 내가 매져 기질이 있다거나 성격이 나빠서가 아니라니까. “무식한 놈........” 내 전화를 받고 단숨에 이곳까지 달려온 녀석이 한숨을 내쉰다. 내 12년 지기 친구 놈.... 전세하,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사겨온 내 친구 놈으로 애인과 싸우고 홧김에.... 그리고 생각 난 여러 가지 때문에 손톱을 물어뜯어 아예 나가 버렸다는 말에 기가 막히다고 타박을 주지만, 고문을 맡고 있는 고등학교 농구팀의 합숙장소에까지 달려오는 착한 녀석이니 굳이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다른 녀석들이었다면 머리라도 한 대 내리쳤겠지만.....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돼냐? 상원이한테 연락하니 아예 기겁을 하더라. 너 왜이래, 요즘!”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나마 내가 괜찮은 모습만 봤으니 기가 차겠지. 이러쿵저러쿵 하면서도 결국은 걱정하고 있는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화난 듯 한 얼굴로 노려본다. 이 자식이.... 어디서 눈을 치뜨는 거냐?!! “이게 웃을 일이냐? 바보야..... 진짜 대책 안서는 놈..... 너 이거 니가 이랬지?” “응, 그냥.... 기분이 나빠서.....” “기분 나쁘다고 자기 손톱을 빠개는 무식한 놈이 어디 있어?” “처음이잖아..... 조폭 주제에 이 딴 걸 갖고 요란을 떠냐?” “이 구제불능아..... 진짜...... 내가 평생 끼고 살 수도 없고..... 안되겠다, 너 병원 가자.” 서울에서 이 녀석이 도착할 때가 이미 9시가 넘은 시간이었는데........ 왠 병원? “병원 문 닫았어.” “응급실로라도 들어가. 너 이거 손톱 뽑아야될지도 몰라!” “....... 귀찮아. 냅두면 알아서 낫겠지. 인간의 치유능력을 무시하지 말라구.” 그리고 나 병원 질색이라구. 별로 가본적도 없고 가서 좋은 기억이 없어. “웃기지 마. 안그럼 강상원하고 꼬맹이 다 부른다!” “너..... 그걸 협박이라고 하냐? 좀 조폭다운 말은 못하겠냐?” “너 같은 악당을 무슨 수로 협박을 해? 조폭들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구. 빨리 일어나, 안 그럼 너 강제로라도 끌고 간다!” “끌고 가 봐라, 내가 끌려가나?” 의자에 깊숙이 앉으며 피식 피식 웃음을 흘리자 녀석이 당황한 눈으로 쳐다본다. 후훗, 니가 내 힘을 이기냐? 어디 해보라구!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으며 눈을 쳐다보자 잔뜩 굳어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뭔가를 되씹 듯 말한다. “너, 그거 진심이지?” “끌고 갈 자신 있으면 해봐!” “..... 알았어.” 라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내 허리로 팔을 뻗어온다. 훗, 그래야 니가 날 이기냐? 이 녀석 재롱이나 봐주자... 는 기분으로 피식거리며 담배를 무는데........ “으악!! 내려놔, 임마!!! 내가 짐이냐?” 이 자식이 갑자기 나를 안아들더니 어깨에 털썩 얹고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 거다. 이 자식아, 나는 인간이라구!!! 너 인간하고 짐을 구별할 줄도 모르냐? 씨발, 인간은 두 팔로 안아드는 거고, 한쪽 팔로 끼고, 들고 가는 건 물건이란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최근 살이 빠졌다 해도 내 키가 몇인데!!! “임마!! 내려놔!!” “가만있어!!” “안 내려놔? 쪽 팔리게!! 여기 우리 학교 합숙소란 말얏!” “그런 놈이 숙소에서 손톱을 뽀개냐? 가만있어, 안 그럼 진짜 묶어서 들고 가 버릴 꺼야.” 협박하 듯, 하지만 그냥 협박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대사에 온몸에 핏기가 가셨다. 평소라면 택도 없겠지만 내 몸 상태로 보아하니 악을 쓰지 않는 이상 이 녀석을 이기기는 힘들 것 같으니..... 그러니까 인간의 싸움은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힘으로 하는 싸움과 테크닉으로 패는 싸움. 현재의 상황은 테크닉보다는 힘이 필요한 승부의 상황이었고, 내가 아무리 힘이 세다 해도 기본적인 뼈대의 라인과 근육, 현재의 몸 상태를 종합해 본다면 내가 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맞짱은 포기했다. 지는 싸움은 하는 게 아니란다..... 내가 무슨 열혈 투사라고 내 목숨 줄 걸고 이 놈하고 싸우냐? “임마!! 나, 이래 뵈도 선생이야!! 선생으로서의 기본 위엄을 지키고 싶다구!” “니 고함치는 소리에 다들 달려나오겠다. 가만 좀 있어! 그러게 가자고 할 때 순순히 따라나오지!” “씨발, 내가 누구 말 조용히 듣는 거 봤냐? 잘 먹던 밥도 옆에서 더 먹으라고 하면 열 받아서 밥상 뒤엎는 게 난데!!” “자랑이다! 애정결핍증에 성격까지 나빠서 너 어떻게 살래?” “너더러 책임지라고 안해!! 빨리 내려놧!!” “성깔은!! 가만있어!” “씨발, 내려놔! 내려놔!! 으아아아악!!!” “미친 새끼..... 아우, 진짜!!” 라면서 이제는 입까지 틀어막고 나를 떠매고 나간다. 이 자식이!!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말 안듣는 짐승 취급이냐? “우으으으읍!!!” “시끄럽다. 너 내버려두면 죽어도 병원 안갈 꺼잖아, 제발 조용히 좀 따라와라. 젠장, 왜 이리 말랐어?” 겨우 건물을 나와 자기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 나를 차안으로 밀어 넣는 녀석에게 한 대라도 날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 주먹을 쥐는데 차 문을 연 채로....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기만 한다. 그것도 아주 착하니 가라앉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슬퍼하는 눈빛으로..... 젠장...... “왜?” “너, 더 말랐다. 왜 자꾸 마르냐?” “아, 몰라....... 밥맛 떨어지게 하는 것들이 많아서 그래.” “잘 좀 먹어라. 병원 갔다 어디라도 들려서 밥도 먹자. 어떻게 성우보다 더 마르냐?” 한숨만 푹푹 내쉬는 꼴에 쓴 미소가 떠오른다. 진짜 끝까지 못되지는 못할 녀석..... 저런 놈이 어떻게 조폭 짓을 할까? 지 애인 이름까지 들먹여 가면서 내 걱정하는 놈이 말이야. 뭐, 그래도 항간에 들려오는 얘기로는 악랄의 극치를 보인다고는 하지만.... 그래봤자지. “난 원래 살 안쪄. 내가 너희보다 적게 먹는 거 봤냐?” “너 잘 안먹잖아. 하여간 가서 밥 좀 먹자. 너 미이라 같아, 꼴이..... 그 얼굴로 마주하면 오만정 다 떨어져서 도망가겠다. 니가 자랑하는 그 미모도 소용 없다구.” “내 미모는 그 정도에 사그라드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구!” 왼손 약지를 들어 휘휘 저으며 말하자 기가 막히다는 듯 녀석이 쾌활하게 웃어 보인다. “푸핫, 너 그 버릇 오랜만에 나온다. 장인하, 여전하긴 여전하구나. 가자!” 드디어 정신을 차렸는지 문을 닫고 운전석에 탄 녀석이 시동을 걸며 안전벨트를 매준다. 후훗, 세상에 말이야..... 온갖 나쁜 짓 - 사채에, 매춘에, 패싸움을 비롯한 연장질..... 등등 - 은 다 하는 조폭 대가리가 말야, 운전할 때는 꼭 운전벨트를 메고 차선에 신호, 안전선까지 지켜가며 운전한다는 거 진짜 웃기지 않아? 살인에는 눈 하나 깜빡 안하는 녀석이 교통신호 위반이나 음주운전에는 피를 토하니..... 웃기는 자식. “병원에서 진료 받고...... 뭐 먹을래?” “요즘 안먹어서 별로 생각 없어. 갑자기 먹으면 위가 거부할 껄.” “죽 먹을래? 전복죽 좋아하지?” “좋아는 하지만...... 횟집으로 가게?” “차라리 그게 낫잖아, 너 지금 완전 좀비같아. 못봐주겠다, 임마.” “니 애인이나 잘 챙기고 말해라.” “걱정 마, 그 녀석도 너처럼 안찌는 체질이더라구.” 라고 말하는 걸 보니..... 같이 끌고 오질 않은 게 이상하군. 그러고 보니 24시간 껌처럼 들러붙어 다니더니 왜 같이 안왔지? 아아.... 말해놓고 나니 찔리는군. 내가 그 귀여운 녀석만 보면 잡아먹으려고 사납게 대드는 꼴이 보기 싫어서 안데리고 나왔나? 흥, 싸고돌긴. 내 친구 애인 좀 괴롭혀 주겠다는데 그게 어때서? 친구 뺏어간 나쁜 것들은 좀 혼을 나봐야 한다고. 막말로 친구들이 내 애인 건들면 내가 말리는 거 봤냐? 더 갈구면 갈궜지? 하여간...... 벨 꼴리게 행복한 것들. 칫...... 아, 열 받는데 그냥 손톱 뽀개지 말고 이빨이나 부러트려 볼 껄 그랬나 봐. 미치도록 부럽고 예쁘고 사랑스럽고 얄미운 녀석들. 너무 행복해서..... 과거의 아팠던 일들 다 잊고 지금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대견하고 사랑스럽고 아껴주고 싶은, 하지만 가끔은 너무 행복해 보여서 심술이 나는 착한 것들..... 아, 젠장..... 근데 왜 나는 아직도 이 꼴이지? ꌓ 근처의 가장 큰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치료를 받고 - 젠장, 진짜 손톱 뽑을 뻔 했단다. 의사자식이 하도 여기 저기 건들여 대는 통에 열 받아서 참는데 죽는 줄 알았다. 씨발, 니 손톱 너덜거리는 거 누가 자꾸 건들면 넌 기분 좋겠냐? - 나오던 중 눈에 보이는 가장 큰 횟집으로 들어가 앉았다. 아아..... 먹기 싫은데..... 진짜. “뭐 먹을래?” “사골.” 이라고 눈을 게슴츠레 뜨자 지 맘대로 씹고 아무거나 주문을 한다. 니 맘대로 시킬 꺼 왜 물어봐? “너, 그 심술 좀 어떻게 해. 좀 먹고..... 여름 타냐, 또? 왜 이렇게 자꾸 말라?” 라는 그 말에 그냥 피식거리면서 웃자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인다, 진짜 속이 타 미치겠다는 듯이. “나도 줘.” “넌 그만 펴! 그러다 진짜 일찍 죽는다, 너.” “웃기네. 누가 날 데려가? 씨발, 세상 멸망할 때까지 살아준다니까. 내가 죽을 정도면 핵폭탄 터트리고 전인류와 함께 폭사할거다.” “독한 자식...... 으휴!” 라면서 결국 건내 주는 담배에 불을 붙이자 순한 맛이 입가에 돈다. 이 새끼, 언제부터 이렇게 약한 걸 폈지? 나 못지 않은 해비 스모커라 피는 종류는 말보로 레드, 아니면 마일드 세븐 종류일텐데..... “담배 바꿨냐?” “응, 나이가 있잖아.” 아, 그래..... 알겠다, 임마. 이거 성우가 바꾸라고 한 거지? 피울 꺼면 약한 걸로나 피우라고. 아, 재수 없어..... 눈꼴시게 행복한 놈들. 가서 확 엎어버릴까 보다. “콩기름, 참기름, 식용유, 올리브유까지 쏟아 부어라.” 혼자 생각에 툭하니 내뱉자 피식 웃으며 바라본다. 그래, 너 행복하다! 그런 놈이 왜 이런 데까지 달려 내려와? 아, 괜히 전화 받고 센치해져서 지랄했나 봐. 이 녀석 와서 좋은 꼴 보여줄 것도 없는데...... “무슨 일이야, 정확히 말해봐.” 둘이 마주 앉아 담배만 뻑뻑 피워대다 나온 말에 가만히 머리 안을 정리해보았다. 그리고 왠지 말해야 할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이해시켜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오늘 오후에 장지환하고 살던 벙어리새끼 만났다.” “뭐?” “농구하는 놈이더라구. 그 놈의 농구, 나랑 무슨 철천지 원수를 졌길래 이렇게 사람 들볶는지..... 츳, 하여간 그 놈 봤는데..... 자꾸 기억나게 하더라. 그 새끼, 나랑 닮았거든.” 진짜 신기하게도 나랑 비슷한 느낌의 악바리 같던 녀석을 떠올리자 쓴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 나 닮은 놈이 왜 이렇게 많냐? “그래서? 무슨 얘기한 거야?” “아니, 그냥 마주친 거야. 별 건 아니었는데...... 그냥 자꾸 기억나게 해서 그래. 왜 하필 나랑 그렇게 닮은 놈을 옆에 뒀을까... 해서.” “....... 밥이나 먹어라.” 심각한 분위기에 더 이상은 못견디겠는지 그냥 밥이나 먹으란다. 그래, 밥이나 먹자. 더 이상 생각 해봐야 뭐하겠냐? 그 놈이 나한테 뭐 해꼬지를 한 것도 아니고, 뭐라고 비난을 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씹어버리면 돼. 나와 아무 상관도 없는 놈의 출현에 왜 자꾸 땅으로 꺼지려고 하는데? 다 꺼진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한 대를 뽑아드는데 드르륵거리며 문이 열린다. 그 리고 상위에 차려지는 스키다시들을 한 번 보고 아직도 식욕이 들지 않아 가만히 쳐다보자 젓가락을 내민다. “식욕이 없어.” “억지로라도 먹어. 어차피 즐기면서 먹는 것도 아니잖아. 살고싶으면 좀 먹어 둬.” “....... 아, 몸 안에 필요한 영양분만 넣어주는 캡슐 같은 거 안나오나?” “할 수만 있으면 내가라도 만들어 내고 싶다, 진짜.” 한숨을 푸욱 내쉬는 그 꼴에 가만히 젓가락을 들어 - 그래도 아직 양심은 좀 남아있었나 보다, 내가. - 앞에 놓은 음식들을 쿡쿡 찔러보았다. “다른 거 먹을래?” “아니, 됐다. 먹고 죽을 일 있냐?” 영 먹지 못하는 내가 걱정됐는지 나오는 세하의 말을 피식 웃으며 묻어버리고 다시 한 번 젓가락에 힘을 주었다. 그 때 다시 문이 열리며 문 쪽으로 긴 그림자가 늘어져 회가 벌써 나왔나..... 라는 생각에 돌아보자 그 문에는 뜻밖의 인간이 서있었다. “상원이..... 까지 오는 이유가 뭐냐?” “뭐긴? 너 때문에 왔지. 이거 먹어라.” 앞에 놓인 가오리를 밀어주는 그 꼴에 젓가락을 입에 물고 세하를 노려보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씹는다. 오늘 어째 하루종일 이 새끼한테 씹히는 기분이군. 젠장, 내가 껌이냐, 씹게? 어쩐지 아까부터 열라 문자 날리더라니...... 성우한테 보내는 러브메시지가 아니었군. “전세하..... 너, 두고보자.” “지금 봐. 상원이 이 쪽으로 앉아라.” 자기 옆자리로 부르는 그 모습에 나무 젓가락을 우적우적 씹자 상원이가 혀를 찬다. “얼굴 꼴이 그게 뭐야? 그리고 왜 젓가락을 씹고 있어? 여기 먹을 게 없냐?” “없어, 먹기 싫어.” “다친 데는?” 걱정스러운 얼굴의 상원이 앞에 붕대를 칭칭 감은 손가락을 보여주었다. “무슨 짓 한 거야?” “열 받아서 벽 주먹으로 치다가 깨진 거야.” “웃기지 마라, 장인하. 그거 이빨로 물어뜯은 거잖아. 내가 그 정도도 모를 줄 알아? 성질은....” 혀를 차며 상원이 그릇을 챙겨주는 세하 녀석을 잠시 노려보다 이번엔 소리가 날 정도로 젓가락을 우적거리자 상원이가 기가 막힌 듯 한 얼굴로 젓가락을 잡아 빼려한다. 그 모습에 더 열 받아 이빨로 콱 물고 절대로 놓지 않자 나중에는 세하까지 달려들어 젓가락을 빼려한다. “임마! 이거 또 왜 심술이야? 빨리 놔! 이빨 부러지고 싶어?” “으윽.........” “야, 장인하! 아우, 이 독한 자식!! 니 그 독기랑 심술 죽을 때까지 안고 가라!!” 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면서도 열심히 잡아당기는 두 놈의 모습에 생긋 웃고는 입과 손의 힘을 풀었다. 콰당--- “윽..... 저거...... 아우...” 내가 힘을 풀자 동시에 저쪽으로 나가떨어진 두 녀석이 뭐라고 욕을 하며 자리를 찾아 앉는다. 그 모습에 왠지 기분이 명쾌해져 젓가락을 들고 여기 저기 나온 스키다시들을 찝쩍거렸다. 으음..... 음식은 제대로 하는 집이군. “장인하..... 하여간 넌......” “내가 뭘..... 그나저나 어떻게 둘 다 온 거냐? 상원이, 너 휴가 다 쓴 거 아냐?” “월차라도 내야지. 무식한 자식 혼자 아파할 게 뻔한데 어떻게 그냥 있어? 성준이도 내일 온대더라.” “여기서 동창회라고 하려고?” “그것도 좋겠네. 넌 며칠 안 보면 불안해서 둘 수가 없어. 대체가 생각이 있게 행동하란 말이다!” 훈계하는 듯 한 세하의 말에 피식 웃으며 같이 주문한 술을 한 잔 따라 한 모금에 털어 넣자 이제는 포기한 듯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진짜 괜찮은 거야, 너?” 잠시 조용한 분위기를 틈타 물어오는 상원이의 말에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걱정스러워서 미치겠다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 나라도 나 같은 인간 두고 보면 미칠 꺼다. 물론, 난 패죽이고 싶어서겠지만..... 하는 일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고, 애인들은 하나같이 병신 짓 하느라 매일 싸우기만 하고..... 일은 엉망으로 굴러가니.... 젠장, 관두자! 뭘 생각해!! “괜찮지 않으면? 내가 접시물에 코 박고 자살이라도 할 거 같냐?” “접시물에 코 박고 자살하면 낫지. 넌 열 받으면 주변에 막대한 페를 끼치니까 상원이가 걱정하는 거잖아. 니가 조용히 분을 삭힐 놈이냐? 어떻게든 복수하고 뒤집어엎고 말지.” “그러니까 걱정 마라. 열 받으면 주변에 소문 다 퍼지잖아. 내가 워낙에 크게 노는 인간이라서 말야.” 라고 살짝 웃고 다시 술을 따르자 이번에는 상원이의 손이 술병을 잡아챈다. 어허..... 내가 마시겠다는데 누가 말려? “그만 마셔, 손도 다쳤는데 식사하고 잠이나 좀 자. 여기 음식 괜찮은데 음식은 손도 거의 안대고 자꾸 술만 마셔대냐? 그리고 담배도 넣어, 넌 다 먹고 한 대만 펴. 세하도 어서 먹고...... 진짜 자꾸 왜 이래, 너. 너 자꾸 이러면 나도 회사고 뭐고 때려 치고 니네 집으로 쳐들어가서, 그 버릇 고치기 전엔 혼자 안놔둘 테니 알아서 해.” 이제부터 잔소리 시작..... 이라고 써붙인 그 이마덕분에 더 이상의 말은 듣기 싫어져 술병을 순순히 내려놨다. 저 녀석이 한 번 이런 저런 말 시작하면 최소가 1시간이다. 그 시간을 어떻게든 줄이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지 . 괜히 술 한 잔 마시고 한 시간으로 끝날 잔소리 3시간 듣는 수가 있으니까. “알았다, 임마. 잔소리는..... 벌써부터 애 키우는 연습이라도 하는 거냐?” 라고 툭하니 내뱉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호오~ 재밌는 걸? 유부남하고 눈 맞아 애까지 같이 기르기로 했다면서 뭘 그렇게 부끄러워 하시나~? “강씨 아줌마, 거기 앞에 콘샐러드 좀 주세요.” 라고 방긋 웃으며 말하자 이를 갈면서도 일단 넘겨준다. “아, 엄마!! 그 앞에 굴도요~ 저 굴 사랑해요~ 편식하면 안돼잖아요♡” “그만해, 장인하.” “왜 화내세요?” 눈을 반짝거리며 초귀여움 광선 - 살다 살다 별 짓을 다 한다, 시발. - 을 쏘자 으드득 이를 갈며 낮게 내뱉는다. “그만 좀 해. 빨리 밥이나 먹어.” “엄마 화내면 미워할 꺼야♡” 라고 방실방실 웃으며 말하자 아예 하얗게 질린 얼굴로 팔을 뻗어 내 입을 막는다. 그리고 옆에서 사정 다 아는 세하는 묘한 얼굴로 웃지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있고..... “그만해라, 인하야. 상원이 머리 다 빠진다.” “빨리 밥이나 먹어, 장인하!” 야예 목까지 하얘진 녀석이 고개를 푸욱 숙이고 젓가락을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에 생긋 웃고는 드디어 자의로 젓가락을 들었다. “아, 알았어, 알았어. 누가 뭐래, 아․줌․마♡” 라며 이것저것 앞에 놓인 음식을 찌르자 눈을 치켜 뜨고 나를 노려보는 상원이와 숨이 넘어갈 듯 킥킥거리는 세하의 얼굴에 기분이 좀 풀린 것도 같고.... 아, 역시 남 갈궈 먹는 재미가 없으면 입맛이 안난단 말이야. 그러게, 그 놈들이 날 그렇게나 갈궈대니 내가 이렇게 못 먹지. 남 갈구는 게 낙인 내가 갈굼을 당하다니!! 이 무슨 어불성설이란 말이냐? 말도 안된다구!! 자, 먹고 기운 내서 이번엔 내가 엎어버리자! 유권형이, 너.... 두고보자구!! 장인하가 한 번 독한 마음 품으면 어떻게 되는지?! 널 위해 맘껏 심술 부려주마!! ▷ track 02. 바보 sung by god 근처에 호텔을 잡아두었다는 녀석들이 다음 저녁 어김없이 빵과 음료수를 사들고 숙소로 달려왔다. 대체 말이지.... 내가 밥 못찾아먹는 애도 아니고 대체 내 꼴이 어때 보였길래 저 녀석들이 일까지 집어치우고 여기까지 달려와 고작 한다는 게 나 밥 챙겨 먹이는 일인지.....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먹기는 해야할 것 같아 - 사실 오늘도 하루 종일 굶고 있었거든. 찾아 먹는 것도 귀찮고 인간적으로 여기 음식 너무 맛없더라.... - 음료수를 잔에 따르고 빵을 먹으려는데 누군가 방문을 박차고 달려 들어왔다. “선생님!!! 저기.... 서......” “뭐야?” 먹으려던 빵을 그대로 들고 그 쪽을 쳐다보자 경진이 놈이 나와 같이 있던 녀석들을 돌아보고 크게 한숨을 내쉰 뒤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서윤진.... 왔.... 어요.” “누가 와?” “서윤진이요!! 서윤진!!” “걔가 여길 왜 와?” 인상을 팍삭 찡그리고 다시 먹던 빵으로 시선을 돌리자 같이 먹던 녀석들이 빵을 놓고 모두 기대어 앉는다. “왜?” 녀석들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보며 말하자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다. 그리고 윤진이 놈에게 쌓인 게 장난이 아닌 상원이가 먼저 말을 꺼낸다. “서윤진이래..... 장난하지 마, 장인하.” “내가 왜 너랑 장난하냐? 서윤진이 여길 왜 와?” “진짜라니까요!! 지금 1층 복도에 있어요!!” 숨이 넘어가라 과장되게 떠들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경진이의 모습에 인상을 팍싹 구기고 돌아보았다. “...... 진짜냐?” “제가 그런 걸로 장난하겠어요?” “할망 하지...... 그런데 그 놈이 왜 왔는데?” “저한테 물으면 알아요? 선생님 불러 달래요. 지금 권형이 형이랑 둘이 딱 마주쳤단 말예요!!! 분위기 장난 아니게 살벌해요!!” 손으로 목을 잘라내는 흉내를 낸 경진이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해보니.... 왠지 점점 화가 나는군. 일단 그 놈이 이제 와서 여길 왔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는 거고, 난 나름대로 열이 받았단 말야. 오든 말든 뭔 상관이래? 그리고 재수 없는 두 새끼가 부딪쳤는데 나더러 어쩌라구? 가서 눈물이라도 흘리면서 「싸우지마!」라고 소리라도 치라구? 씹, 속 쏠려! “몰라, 두 놈이 서로 죽이든 살리든 내가 알 게 뭐야?”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진짜 둘이 서로 죽여버릴 것 같단 말예요.” “아니긴, 뭐가? 두 놈 다 내 속 박박 긁어놓는 놈들이니 한 놈이라도 죽어주면 고맙지.” “선생님!!!” 애타는 목소리로 애원을 하는 경진이 덕분에 머리가 다 울려온다. 저 새끼 목소리 열라 크단 말야. 귀청 떨어지겠다, 씹새야!! “시꺼, 새꺄! 내가 알 게 뭐야?” “내가 가볼게. 너 여기 있어.” 조용히 말을 한 상원이 놈이 내 앞에서 일어선다. 니가 왜 가야하는데? “그래, 니가 윤진이 만나서 좋을 거 없어. 상원이, 니가 가서 적당히 돌려보내고 와라.” 하, 니네 나랑 장난하냐? 내 일에 니네가 나서는데? 세하 놈까지 옆에서 거들고 나서다니...... 뭐, 내가 그 놈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식칼 가는 거 아는 녀석들이니 당연하기는 하지만...... 젠장, 그러고 보니 식칼 갈아서 뭐 하게? 갈든 밀든 사시미정도는 돼야지. “씨발, 그 자식들까지 난리야! 아무튼 밥 먹을 시간도 안줘요!! 내가 무슨 무식욕 괴물이라고 먹는 시간까지 방해해? 쌥새끼들.... 하여간 내가 위암이나 폐암으로 죽으면 다 그 새끼들 때문이야!! 아, 심장병도 추가!” 간만에 식사를 하겠다고 결심을 한 상태라 늘어져 있는 빵들을 보자 더 화가 났지만 일단은 이 쪽이 먼저지. 씨발, 저번에 학교에서 지랄한 것도 아직 쪽 팔린데...... 씹.... 머리를 긁적이며 빵을 집어던지고 벌떡 일어서자 상원이가 앞을 막아선다. “가지마.” “나한테 할 말이 있나 보지. 알아서 해결하고 올 테니 가만히 있기나 해.” “장인하!! 너 그 녀석 만나면 안돼!” 바로 앞에서 강경하게 나를 막아서는 상원이 놈의 반응에 한숨만 흘러나온다. 임마, 지금 니가 나 걱정할 처지냐? 니 앞길이나 잘 닦아. 그렇지 않아도 혼이 반은 빠진 놈이 왜 내 일까지 막아서려는데? 너 매져라도 되냐, 강상원? 그렇게 고생만 하고 싶어? “내가 가서 얘기할게. 나 만나러 왔는데 왜 니가 가?” “너 미치는 거 보고싶지 않아, 가지마. 세하나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야.” “너희가 뭘? 내 일을 어떻게 해결하는데? 피해갈 수 있는 거라면 내가 알아서 방향 틀겠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거면 가서 부딪쳐야지. 나더러 그 자식 볼까 무서워 입 닥치고 찌그러지라구? 웃기는 소리하지마, 강상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해.” “피할 수 있어!! 왜 피해갈 수 없다는 거야?” 여전히...... 곧은 눈으로 입바른 소리만 하는 녀석. 이래서 넌 세상 살기 힘들다니까. 이럴 때는 적당히 꼬리 내리고 사라지는 거야. 너 왜 그렇게 요령이 없냐? “걱정 마. 얼굴보고 단방에 내쫓아 버릴 테니까. 그래도 밀려나지 않으면 적당히 패주면 돼. 기다려라.... 여기서, 내 빵 다 먹지말고.” 실실대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입술을 꽉 깨물면서도 여전히 비켜서질 않는 그 모습에 한숨만 흘러나간다. 이 자식아...... 좀 비키란 말이다. 뭐, 갈 꺼라면 얼마든지 그 자식 돌아서 가면 되지만...... 내가 성격이 이상해서 빙 돌아가는 건 또 못 참거든. 앞에 있는 걸 깨부수든 그걸 그대로 밟고 지나가든 둘 중의 하나지. “너...... 진짜 괜찮은 거야?” “괜찮아,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으면 먼저 만나러 간다고 하냐? 욕이나 바가지로 하고 기다리다 창문 열고 재떨이라도 집어던지지. 비켜 서.” 끝까지 비키서지 않으려는 녀석을 반 강제로 떠밀고 뒤에는 경진이를 단 채 천천히 현관 쪽으로 가자 현관 앞에서 서로 노려보고 서있는 두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키도 체격도 분위기도 비슷한 두 놈이 서로 죽어라 노려보고 있으니 박력 있군. 젠장, 똑같은 녀석들끼리 무슨 짓들이야? “뭐냐? 서윤진!” 마침 저녁 식사가 끝난 시간이라 숙소로 돌아오던 녀석들이 서윤진을 보고 멈춰선 채 모두 눈을 반짝거리고 있다. 아, 이 녀석들 모두 농구 선수들이었다는 걸 깜빡했군. 골치 아프게 됐네...... “얘기 좀 해.” “여긴 어떻게 알고 온 거야?” “나도 합숙했던 곳이야.” “그러냐? 그래서 잘 찾아왔구나.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난 너랑 말하기 싫은 걸.” “잠깐만 시간 내주면 돼.” “너한테 할애할 시간 없어. 다들 방으로 돌아가, 그리고 유권형, 너도 어서 방으로 돌아가.” 박수를 치며 소리치자 못내 아쉬운 듯 윤진이를 돌아보면서도 내 서슬에 놀라 걸음을 옮겨간다. 하아, 참..... 요즘 새끼들은 근성이 없단 말야. 나라면 선생이 뭐라 하든 게기고 끝까지 버텨볼텐데 말야. 윤진이가 나한테는 철천지 왠수 같은 놈이지만 농구하는 놈들에게는 선망의 대상 아니겠어? “잠깐만 시간 내줘. 중요한 일이야, 선.... 아니, 인하야.” “........ 누가 너더러 내 이름 부르래?” 삐딱하니 서서 녀석을 다시 올려다보자 순식간에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돌아본다. 왜? 사실이잖아? 너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내 이름을 불러? 넌 그냥 같은 학교 후배고 내가 고문으로 있는 농구부의 OB일 뿐이잖아. “언제나...... 그랬잖아.” “무슨 소리야? 난 전혀 기억에 없는데? 안그래, 서윤진씨? 너랑 나랑 서로 이름 부를 관계였던가?” 피식 피식 웃으며 비비꼬자 녀석도 이번에는 쓰게 웃고 만다. 씨발, 저거 점점 내 꼬인 어투에 익숙해져 가는 거 아냐? 좀 더 강력한 무기를 마련해야겠군. 이젠 이것도 안통하네. “얘기 좀 해.” “내가 말했잖아, 이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구.” “....... 너는 나 만나러 왔잖아. 나도 한 번 쯤은 만나러 와도 되는 거 아냐?” “안돼!” “어째서?” “나야, 내 맘대로 해도 되지만 넌 니 맘대로 하면 안되거든.” 언제나처럼 반은 오기로 반은 억지로 나간 내 말에 윤진이가 잠시 말을 끊고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권형이 역시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아, 무안해라, 얼굴 다 뚫어지겠다, 임마들아. 내가 예쁜 건 알지만 제발 시선 좀 치워줄래? 너무 부끄러워서 당장에 몇 대 씩 패버리고 싶단 말이다. 젠장, 왜 사방에서 지랄들이냔 말이야? 그냥 좀 내버려두라구!! “저번에..... 물어 본 거 있지? 그 답해주러 왔어. 니 말대로 나 너에게 빚이 많으니까.” 진지하게 눈을 맞추고 말하는 윤진이 녀석의 말에 잠시 말을 끊고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나칠 정도로 정직한 그 눈에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이자, 먼저 나가 차에 올라탄다. 여전히 그 녀석을 보며 웅성거리는 패거리들을 뚫고 나가려하자 가만히 보고 서있던 권형이 자식이 손목을 잡아온다. “가지 말아요.” “....... 얘기할 게 있어. 중요한 일이야.” “가면, 나 두 번 다시 선생님 안 볼지도 몰라요.” “놔! 그 딴 걸 협박이라고 하냐? 넌 나중에 얘기해.” “가지 말아요!” “닥쳐!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 같은 거 하지마! 내가 나이를 먹어도 너보다 10살은 더 먹었어! 그리고 넌 내 동생이야.” 손목의 가장 가는 골을 붙잡고 놓기 싫다는 녀석을 뿌리치고 윤진이 녀석이 몰고 온 차의 조수석에 앉자 서서히 차가 출발한다. 방금 전에 받았던 충격에 똑같은 말을 내뱉는 녀석이 동시에 보이니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대체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친절하게 대하면 차갑다고 하고 제 멋대로 굴면 이러지 말라고 애원하면서... 어쩌라는 거야? 사랑 같은 거.... 시작하는 게 아니었어. 애초에 적성에도 맞지 않는 짓을 하니 이 꼴이잖아. 진짜 병신은 너다, 장인하. 이제라도 관둬라. 아무리 근성 있게 덤벼도 미쳐버리면 끝장이야. ꌓ “너랑 바다 온 건 처음이지?” 한참을 달려 근처의 바닷가에 차를 세운 윤진이가 조용하게 입을 연다. 그래, 처음은 처음이지. 겨울에 시작해서 초여름에 끝난 사랑이었으니..... 해가 져가는 여름의 바닷가는 방금 전의 열기가 거짓인 듯 금새 찬바람이 돌았고 사람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원래가 물을 싫어해서 바다는 잘 오지 않으니까, 저녁바다가 이렇게 춥고 외로운 것일 줄은 몰랐다. 뭐, 사실 새벽 바다는 더욱 질색이지만. “그런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나 요즘 기분 개판이니까 쓰잘데기 없는 말하려거든 관둬.”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며 톡쏘 듯 말하자 가만히 서 나를 들여다 보던 녀석이 한숨같이 말을 흘렸다. “....... 나한테도 그랬으면 좋잖아.....” “무슨 소리야?” 머리를 꾹꾹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돌아보자 녀석이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뭐야..... 그건? 왜 그렇게 아픈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진짜 상처받은 건 니가 아니라 나란 말야!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하고, 화내고 싶으면 화내고, 그럼 좋았을 걸.... 왜 나한테는 그러지 않은 거야?”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하면서 나온 윤진이의 말이 도끼가 되어 머리에 박히는 느낌이었다. 저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나한테 답을 주기 위해 왔다는 놈이.... 왜 옛날 얘기를 꺼내는데? “..... 넌 나한테 항상 조심스러웠지.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화도 내지 않고..... 언제나 타인처럼 한 발 물러서서 지켜보기만 했어. 알아? 그게 나한테는 너무 큰 고통이었다는 걸 말야.” “......... 그래서 따지러 온 거냐?”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삐딱하니 대꾸하자 또 웃는다. 쓸쓸한 얼굴로, 세상 다 산 사람 마냥 웃기만 한다. 병신새끼..... 뭘 미련두고 있는 거냐, 너.....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때는 몰랐거든. 그게 네 배려라는 걸. 나름대로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고 믿기만 한다면 주변의 상황따윈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한 마디로 이상론이었지. 하지만 사랑은 이상만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니가 말해줬다면 좋았을 걸.... 니가.... 단 한 마디라도 털어놓고 화를 냈다면 나도 안그랬을텐데. 언제나 후회하던 건 그거였어. 지난 7년 간 그것만 생각하며 언제나 널 기다려왔다면 믿겨져? 장인하?” 당연히....... 안믿겨지지. 미쳤냐, 끝난 사랑을 7년씩이나 기다리게? “얼 빠진 자식.... 뭐 하러 미련하게 굴어? 끝난 건 다시 되돌릴 수 없어. 그걸로 끝이야...... 어떻게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들도 있어.” 딱 잘라 말하고 다 타들어간 담배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새 담배를 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손에 든 은색의 지포 라이터..... 머리 아파..... 젠장..... “그래, 그렇지.... 하지만.... 이미 끝난 사랑이 운명이라면 다시 기다릴 수도 있지 않을까? 니가 나의 운명이었다면.....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장인하?”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내 눈으로 똑바로 날아오는 그 시선에 나도 그대로 멈춰 서버렸다. 내가 니 운명이라구? 그래서 그렇게 끝나 버린 거야? 그렇게 처참하게..... 상처를 치유할, 아니 하다 못해 그 상처를 인식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그 따위로 끝나버린 거냐? 그딴 게 운명이라구? 너 지금 그렇게 말하는 거니, 서윤진? 하, 웃기지도 않는군 그래.... 팔자가 더럽다 보니 사랑도 그 모양이라는 거냐? 그럼 나는 평생 사랑도 하지말고 살라는 거냐? 전부 버리고 혼자 외롭게 골방에 갇혀 신세 한탄만 하라구? 씨발, 그게 진짜 운명이라면 운명 같은 게 개도 안쳐먹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무리 바둥거려도 그게 내 운명이라면 난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 따고 죽는 편이 나아. 이를 갈며 녀석에게 쏘아붙이려 하는데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 하지만 니 운명은 내가 아니었나 봐. 장인하..... 아마 네 운명은 장지환이라는 사람이었겠지. 그래서 그렇게 냉담한 거지.” 순간 바람이 모래사장을 훑고 지나간다. 그리고..... 거세게 울려 퍼지는 파도 소리..... 얼마 전에 꾸었던 꿈처럼 나를 집어삼킬 듯 거세게 올라오는 파도가 바로 발 밑까지 밀려 올라온다. “너, 낮술이라도 마시고 온 거냐? 무슨 헛소리야, 서윤진?” “넌 모르고 있지, 그 때도 몰랐고 지금도 전혀 모르고 있어. 니가 마음 속에 담고 있던 게 장지환 뿐이라는 걸 말야. 니가 날 사랑하지 않았다는 게 아냐. 다만....... 나를 사랑하면서도 잊을 수가 없었겠지. 상처를 많이 남긴 사랑이라 그런 거겠지만 그 때는 그게 견디기 힘들었어.” 그렇게 말하고 잠시 나를 보고 희미하게 웃은 녀석이 말을 이어간다. “너, 장지환이라는 사람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다고 했지? 사실은 내가 그랬어..... 내가 니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았어. 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화도 내지 않고 추궁하지도 않으니까.... 니가 날 사랑하고 있나라는 의심까지 해버린 거야. 그래도 넌 내가 뭘 하든 용서해주니까, 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그래 버린 거야. 객기였지. 너한테 상처 주고 싶었거든.” 멍청하게 서있는 내 앞으로 다가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는 녀석의 손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다정한 듯 머리카락 하나 하나를 만져주고 그대로 이마를 타고 내려와 뺨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체온.....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해준 건 이 녀석뿐이었고 내가 그렇게 사랑한 것도 이 녀석뿐이었으니까 과거로 흘러간 사랑이라 해도 이렇게.... 생생하게 떠오른다. 머리 안에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그리고 아프게....... “왜 이렇게 됐을까, 우리? 그렇게 사랑했는데..... 아직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애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 손을 떨쳐낼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반응해 보였다. 하지만..... 그렇게 아팠던 기억들도 이제는 추억일 뿐이야. 지나간 일일 뿐이야. 눈을 질끈 감고 이빨을 악다문 채 서서히 눈을 뜨고 그 눈과 마주했다. “...... 서윤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서서히 입을 열자 촉촉한 눈으로 바라본다. “...... 이도 저도 좋지만..... 떨어져라, 나 임자 있는 몸이다.” 얼굴을 붙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뒤로 물러서자 잔득 상처받은 표정을 짓는다. 그래도 소용없어. 끝난 건 끝난 거고....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이야. “.... 니 답은 잘 들었어. 이걸로 조금은 빚을 갚았다고 위로해도 좋아. 나도 생각을 해 봐야겠다. 원래가 생각하는 건 질색이지만....... 노력해 봐야지.” 뭔가가 풀어져 버린 마음에 그렇게 말하자 윤진이가 쓰게 웃는다. 왜 웃고 난리야, 서윤진...... 그래도 나 아직 너 용서 못해. “예전보다는 좋아졌구나. 기다릴게..... 기다리는 건 괜찮지?” “미친 자식, 멍청한 짓 하지 말아라. 나 이 번의 놈 절대 안놓쳐. 기다려도 너한테 갈 일은 없을 꺼야.” “기다릴게.” “너, 옛날보다 머리 전혀 좋아지질 않았구나. 아직도 나란 인간 모르겠냐? 난 끝이라고 한 건 절대 되돌리지 않아. 머리를 써라. 상처받는 건 결국 너 뿐이야. 멍청한 짓은 하지마..... 머저리 같은 자식.” 차갑게 돌아서며 내쏴도 아무렇지 않은 듯 뒤로 따라붙는다. 등뒤에서 느껴지는 녀석의 존재와 예전의 기억들이 되살아나 쿡쿡거리며 쑤셔오는 머리에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다. 대체 너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거냐? “네게 해주고 싶은 일이 많았어.” 씨발, 실컷 떠들어대라. 누가 대꾸나 해주나. 씹새끼...... “보통의 연인들처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작은 선물을 하고 꽃을 사주고, 네가 기뻐하는 모습에 두근거리며 다음 계획을 짜고......” 그래서 대신 엄청난 상처를 선물하고 배신을 더미로 사주고, 내가 아파하는 모습에 두근거리며 다음에 괴롭힐 계획을 세웠냐? 그렇게 내게 해주고 싶은 게 많았냐? 그 해주고 싶은 게 아직도 남아있다면 절대 사양한다. “알고 있어? 네 생일 날..... 네게 주려고 했던 반지, 아직도 갖고 있다는 거?” 내가 알 게 뭐야? 네가 그 때 주려고 했던 게 반지인지, 개목걸이인지..... 씨발..... “아직도 녹슬지 않고 내 안에 남아있어. 언젠가 네게 다시 돌려주고 싶어서..... 안고있어.” 미친 새끼, 그 사이에 내 손이 커졌거나 살이 팅팅하게 불어 안들어가면 어쩌려고? 너 그렇게 멍청하냐? 목안으로 욕을 내뱉으며 무시한 채 걸어가도 이 녀석의 수다는 멈추질 않는다. “그 반지, 갖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 그런데 어느 날 청소를 하다 우연히 발견을 했는데.... 그 때 모든 기억들이 다시 떠올랐어. 너를 사랑해서 행복했던 거 아팠던 거,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울었어. 혼자서 방에 갇혀서.....” 하, 그래서 위로금이라도 달라는 거냐? 그 반지 값 내놓으라구? 미안하지만 그런 걸로 물어줄 돈 없다. 나 먹고 죽어도 아까운 돈이야. 내가 그걸 어떻게 얻은 건데? “그 반지 같았어, 내 마음이. 잊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떠올리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 그 추억들과 고이 고이 남겨둔 사랑이란 것이.... 너 외에는 아무에게도 맞지 않는 그 반지 같았어.” 이 세계에 인구가 몇인데 나한테만 맞는 반지가 있냐? 막말로 내가 가서 내 손에 재단해 맞춰놓은 단 하나의 비밀반지라면 모를까, 이미 유행은 지났겠지만 아직도 널리고 널린 것들 중에 하나일 거 아냐? 그 추억과 사랑이 그렇게 반지 같으면 아무나 잡고 반지 껴봐서 대강 맞는 놈이나 잡아라, 나 귀찮게 하지말고. “널 사랑해, 장인하....... 아직도 사랑해.....” 작게 울려오는 목소리와 함께 멈춰선 모래사장 위의 발걸음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순간, 돌아본 것을 땅을 치며 후회하고 싶어졌다. 그 눈빛이, 아니 나를 향한 그 시선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눈물이....... 조용히 바다 안에 녹아든 듯 멈춰 선 그 모습이....... 사무칠 정도로 아프게 가슴을 배어내 생생한 고통을 기억나게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따뜻한 추억들, 행복했던 과거의 잔상들, 그리고 그 녀석의 진심이 흘러들어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돌아서 그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해, 어떻게 해도 지울 수 없을 정도로..... 7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널 사랑해. 너만을 사랑해. 인하야...... 나의 인하야......” 다 큰 남자가, 이제 곧 서른 줄에 들 젊은 남자가 작은 아이처럼 울먹이며 내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가 말하지 않았던 과거의 감정들을, 그리고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그 말들에 비어져 있던 나의 가슴 안쪽에 어떤 이물감이 느껴졌다. 내 가슴을 할퀴던 조각들이 있었다. 가슴 안에 가장 깊은 곳에 몰래 쌓아두었던..... 깨어진 유리조각들처럼 날이 서고 투명한,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시던 그런 조각들이 있었다. 평생을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조각들이 지금 하나 하나 뭉그러져 간다. 그 날이 닳고 닳아 무뎌지고 덩이가 녹아내려 그 곱게 싸놓은 가슴 안으로 스며들어간다. 이젠 더 이상 내 안을 헤집고 상처 내는 조각들이 아니라, 내 안의 한 부분으로 그렇게 흡수되어 사라져 간다. 그걸로 알아버렸다. 나도 이 녀석을 아직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걸..... 보기 싫다고 밉다고, 증오한다고 해도 아직도 내 마음 안 쪽에는 그 녀석에 대한 애뜻한 사랑이 남아, 그 사랑이 굳어져 유리가 되고 갈갈이 찢겨 조각이 되어 가슴에 상처를 냈다는 걸......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고이 고이 포장해 가슴 안 쪽 깊은 곳에 방치해 두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도 아직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이 돌아올까? 어떻게 해야..... 널 찾을 수 있을까?” 한없이 애절하게 나오는 말이었지만 별로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 와서 재고의 여지를 찾는다는 건, 그건 너무 이기적인 일이야, 서윤진. 어떤 말로 포장을 해도 과거의 상처들을 깨끗하게 낫게 할 수는 없어. 너 때문에 얼마나 아팠는데..... 너 때문에 죽어도 낫지 않을 정도로 아파서, 그래서 죽을 수도 없었던 걸 어떻게 보상할 건데? 네가 과거의 나로 돌아가서 똑같이 아파할 수도 없는 거잖아? 난 못되고 악랄한 인간이라 한 번 상처받은 사람에게 돌아가진 않아. 추억은 추억이야. 좋은 기억들은 어디까지나 기억으로 남겨, 미래를 얽매이게 할 수는 없어. 그렇게 감겨든다면..... 난 살 수 없어. 서윤진, 그러니까 절대로 네게 돌아가지 않아, 그리고 절대로 내 마음을 말하지도 않아. 겨우 죽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치유된 상처를 너를 위해 다시 헤집을 수는 없어. 난 그렇게 숭고하고 박애정신이 넘쳐나는 착한 인간이 아냐. 몇 천을 죽인다 해도 난 내가 아프지 않길 바래. 몇 천을 위해서라도, 혹은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는 단서로도 날 희생시킬 수는 없어. 그렇게는 살지 않아, 절대. “되돌아오는 것 따윈 없어. 이 세상에서 이미 깨어진 걸 맞춰 흐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없으니까..... 사랑 아니라, 그 어떤 위대한 감정이라도 되돌아 올 수 없어. 서윤진, 끝내. 멍청한 짓 하지마. 난 널 사랑하지 않아.” 딱 잘라 말하고 금방이라도 저 바다에 녹아버릴 듯 위태롭게 서있는 녀석을 무시한 채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어느 새 다 타버린 담배를 바꿔 물고 더 이상 따라서지 않는 녀석의 기척에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리고 왜인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대로 돌아갈 마음은 들지 않아 근처의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담배만 한 갑을 뽀작을 내고 천천히 걸어나와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아직 공복에 소주만 들이부어 속이 아려와 빨리 올라가 빵이나 먹겠다는 생각으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늦은 시간이라 다들 퍼져 자는지 안은 고요했다. “후우..... 갔겠지....” 이 녀석들 아직까지 나 기다리고 있지는 않겠지. 방 잡아놨다니까, 돌아갔겠지. 내가 사람 죽일 험한 꼴로 나간 것도 아니니까. 일단 가서 먹자!! 먹고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내가 언제부터 고뇌하고 깊이 생각하고 살았다고 이제 와서 괜히 심각한 척 하겠냐? 나 아무 생각 없이 흘러가는 대로 산다는 거 아는 사람 다 아는 사실인데.....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가는데 숙소 1층의 안쪽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교사용 숙소로 가는 길목을 막아서고 당당히 말하는 권형이 자식의 모습에 기가 막혀 상판을 한 대 갈겨줄까.... 하다가 먹다 나온 빵이 걱정돼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일단 먹고 보자. 위가 쓰려 죽을 것 같단 말이다! “장인하 선생님, 제가 가라고 했어요?” 무시하고 지나가려는데 똑같은 톤의 똑같은 말이 돌아왔다. 밥 좀 먹자, 밥 좀! 너랑 싸우든 뒤집어 엎든 기운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니네 지금 단체로 나 물 먹이려고 작정을 한 거냐? “나 지금 너랑 싸울 기운 없다, 나중에 얘기하자.” 엄청난 위압감으로 앞을 막아선 자식을 툭 치고 지나가려는데....... 왜..... 치기는 내가 쳤는데 내가 뒤로 밀리는 거지? “너, 뭐하냐?” “가지 말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이를 부드득 갈면서 앞을 막아서는 유권형..... 하, 이 새끼가 미쳤나? “내가 니 명령 들어야 돼? 비켜라, 유권형!” 일부러 나도 낮게 목소리를 깔고 말하지만..... 이 자식, 왜 꿈쩍도 안하는 거야? 이 정도 되면 연장자에 대한 예의로라도 곱게 물러서야 할 꺼 아냐? 임마, 나 니네 학교 선생이고 10살 차이 나는 니네 형이야!! “내가 가지 말라고 했어요, 안했어요?” 앞의 대사에 주어만 덧붙여서 살벌하게 말하는 녀석의 돌변적인 태도에 기가 막혀 허탈하게 웃는데 이 자식이 이제는 실력행사로 나온다. 내 손목을 강제로 잡아끌고 현관 벽에 밀어붙이다니!! 이 자식이!! “너 영화 찍냐? 비켜!” “대답해요.” “....... 무슨 상관이야? 내가 가고 싶어서 간다고 한 거야! 니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난리야?” “내/가 가/라/고 했어요?” 한 단어 한 단어를 또박또박 끊어 말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자..... 이젠 아예 기가 막혀 말도 안나온다. 이게...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너, 왜 이래?” “얘기했잖아요. 선생님 악랄한 거 유명하지만 나도 못지 않게 악랄하다구요.” 순식간에 바뀐 차가운 눈동자에 숨을 멈추고 잠시 바라보자 알고 싶지 않은 걸 알아버렸다. 이 자식...... 내 핏줄이다..... 라는 것...... “선생님은 항상 죽을 각오로 덤빈다고 했죠? 전 죽일 각오로 덤벼요. 한번 시작하면 죽/을/때/까/지 물고 늘어진다구요.” 죽을 때까지.... 라.... 그래, 한 번 물고늘어지면 죽기 아니면 살기지.... 너, 아주 근성 있는 놈이구나..... 후훗, 요즘 것들 같지 않게 강단 있고 끈기 있어 좋다, 너. 암, 그 정도는 돼야 내 동생답지!! 후훗.....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잘못 건들인 건가? 이거 우리, 아니 그 미친 년 핏줄에 심히 문제 있는 거 아냐? 죽을 각오도 아닌 죽일 각오로 덤빈다니? 이게 무슨 비이성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이란 말이냐!! “하하....... 너 왜 이래? 어디 아파?” 라며 이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도피를 하려하지만 거머리처럼 나를 따라붙는 녀석의 눈빛 때문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거...... 혹시 진짜 미친 새끼 아냐? 하하...... 하하하하하...... 설마..... 너 나 때문에 충격 먹었니? 그래서 머리가 이렇게, 저렇게 돈 거 아냐? “당신하고 농담할 기분 아니에요. 저도 성질 많이 죽이고 참아줬어요. 그런데..... 이젠 안되겠네요. 바람 피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라면서 싱긋 환상적인 미소를 짓는데...... 역시 내 동생이다! 멋져, 우리 집안 핏줄♡ 이런데서 확인할 수 있다니 말야...... 후훗, 씨발 이거 쓰리고에 흔들고 피박까지 쓴 꼴이잖아! 니네 집안 핏줄 좋아서 좋겠다, 장인하. 참 좋은 핏줄이다, 웃으면서 협박하는 거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 심장 쥐어짜는 거나.... 대단해. 어디 가서 DNA검사라도 받아볼까? 몇 번 째 유전자가 관련된 건지? 후훗..... 그건 실험해서 어따 쓰게? 나중에 성격까지 똑같은 클론이라도 하나 만들게? 클론이라.... 그거 괜찮군, 그래. 나 같은 놈 여러 명 만들어서 원한다는 놈들한테 하나씩 나눠주면 돼잖아. 오오! 역시 나의 이 전인류애적인 희생정신과 봉사정신, 그리고 그에 더한 엄청난 박애정신 굉장하단 말야. 아,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니 감탄과 찬사는 나중에 미루고........ “권형아, 우리 이성을 갖고 말하자. 너 대화 좋아하잖아, 대화 말이야.” 나도 모르게 잔뜩 언 채로 생글거리며 말해도 이 자식은 꿈쩍도 안한다. 하하.... 씨발, 배고프단 말이다, 새끼야!! 넌 힘도 없는 자식이랑 싸우고 싶냐? 나도 먹고 좀 살자구! “그렇게 살살 빠져나갈 생각 말아요. 좀 차분하게 말만 잘 들으면 좋았을 텐데...... 과거사부터 해서 아직까지 문제가 많으니..... 진짜 감금이라도 해놓으면 정신 좀 차릴래요?” 순간 내 귀를 의심케 하는 말에 벙쪄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라구? 이 녀석이 지금 누구더러 뭐라는 거야? 뭐, 감금? 너 그거 아무나 하는 줄 알아? 기가 막혀 웃기지도 않는군.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장인하를 협박하는 녀석이 있다니..... 세상에..... “너 지금 누구더러 뭐라는 거냐?” 라고 나도 열 받아 고압적인 자세로 나갔지만..... 이 자식은 꿈쩍도 안한다. 씨발, 이 자식 진짜 이상하잖아. 얘, 진짜 충격 먹었나 봐..... “당신한테 멋대로 굴지 말라고 충고하는 거야. 타고난 성격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맞춰 주려해도 보자보자 하니 이건 심하잖아, 안 그래?” 뭐라고? 니가 지금까지 나 봐줬니? 아아, 그렇구나, 너무 고맙다. 유권형, 그렇게나 나를 잘 봐줬다니 말야. 그런데 어쩌지? 이제는 내 인내에 한계인 거 같은데....... 이제는 니가 아무리 잘 봐 줘도 내가 너 봐주기 싫다. 사람 성질 건들이지 말라구. 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지 알아? 바로 먹는 거에 관련된 원한이야!! “씨발, 밥 좀 먹자!! 밥 좀! 너 나 말려 죽일래? 싸우든 뭘 하든 일단 배는 채워놓고 말하자구! 니 애인 미이라 되면 기분 좋기도 하겠다! 내가 죽으면 너 끌고 같이 무덤으로 들어갈 꺼야!?” “.......... 풋....... 쿠쿡......” 열 받아서 꽤액 소리를 질러버리자 방금 전까지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녀석이 쿠쿡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왜? 나도 먹고 좀 살자는데? 지들은 아침, 점심, 저녁 세 끼에 야식에 간식까지 일일이 챙겨먹는 주제에 나는 하루에 밥 한끼 먹기도 이렇게 힘들게 해야겠냐? “이래서 재밌다니까? 이렇게 예쁘고 매력적인데..... 왜 그렇게 말을 안들어요? 이제 말 좀 들어요. 그럼 더 잘 봐줄게요.” 라면서 킥킥거리던 녀석이 볼을 가볍게 두들기더니 잡고있던 손목을 그대로 끌고 내 방으로 향해 걷는데..... 암만 봐도 이 자식 이상하단 말야. 뭐가 날 그렇게 많이 봐줬고, 뭘 더 잘 하라는 거냐? “너, 어디 아프냐?” “아뇨. 저 원래 성격이 이래요.” 라고 생긋거리며 돌아보는 건 본래의 유권형의 모습이었다, 상큼하고 댄디하고 예의 바른, 잘 자란 곧은 얼굴의 녀석. 내가 방금 꿈을 꾼 건가? 이 녀석 혹시 너무 충격을 먹어서 이중 인격이 기어 나온다 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권형아.....” “왜요?” “실제 성격이 이렇다는 건 1분 전 얘기를 하는 거냐, 지금 얘기를 하는 거냐?” “둘 다에요. 빨리 가서 밥이나 먹어요.” 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존대말을 쓰며 나를 끌고 간다. 이 상황에 머리를 뭔가로 두드려 맞은 거 같은 건 뭐지?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아, 그래!! 적응이 안돼서 그런가 보다. 이 녀석의 본래 모습은 이중인격인데 나는 착한 학생의 모습밖에 모르니 적응이 안될 수 밖에! 아, 그럼 이제부터 적응해야 하나? 아니면 저 이중인격을 뜯어 고쳐야 하나? 후훗, 너 아예 미쳐가는구나, 장인하! 뭘 뜯어고치고, 어딜 적응해? 이게 지금 그런 일로 해결될 일이야? “우와, 우와, 와왓!! 잠깐, 잠깐만 유권형!! Stop!!” “왜요?” “야, 너..... 너 말이지...... 너,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너 이중인격이라구?” “누가 이중인격이래요? 내숭을 고단수로 잘 까는 거 뿐이에요.” “그게 그거지!!” “틀려요. 전 분열증에 의한 게 아니라 제 의지로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 괜히 열 받게 하지 마세요. 장인하 선생님♡” 하트는 빼, 하트는!!! “너.........” 예감이 안좋아.... 이 녀석 혹시 진짜 악질 아냐? 왠지 내 주니어를 본 기분에 등골이 오싹해져 서있는데 내 방 문이 열리며 안쪽에서 덩치 둘이 나오다 나를, 아니 우리를 보고 멈춰 선 채 잠시 침묵한다. “너, 괜찮냐?” 라고 은근슬쩍 물어보는 건 상원이 놈. 아니, 안괜찮은 거 같아. 그러니까 서윤진 때문이 아니라 이 녀석 때문에, 그러니까 정확히 이 녀석의 이중인격 때문에.... 치가 떨리는 거 같아. “안녕하세요?” 라고 나를 잡은 채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내는 권형이의 얼굴에 모두 100점 만점을 준 듯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는다. 아, 이거 이중인격이야, 이중 인격!! 니네가 몇 분전의 그 광경을 봤어야 돼!! “우리 지금 호텔로 돌아갈 껀데..... 같이 갈래, 인하야?” 못내 내가 걱정됐는지 말하는 세하의 말에, 어어.... 만 반복하다 왠지 그럼 너무 정신이 없을 것 같아 거절하기로 했다. 지금 이 상황도 충분히 적응하기 힘들단 말이닷!! “아니, 난..... 생각 좀 할 게 있어서......” 으악!! 생각할 것은 개뿔!! 생각할 게 아니라 적응할 게 문제라구! “정말 혼자 있어도 괜찮겠냐? 여기..... 주방에서 칼하고 칼 가는 거 갖다 놓고 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 라고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세하 녀석. 임마, 아무리 나라도 남의 집(?)에서 자다 깨 칼 갈진 않는다!! “아냐..... 가라. 내가 내일 전화할게.” 하도 정신이 혼미해져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말하자 이상하다는 듯 나를 보던 두 녀석이 권형이와 인사를 나누고 현관을 향해 나간다. 아니, 그러니까... 가면 안되지 않나? 아니 가야 하나? 아, 미치겠다!! 이게 어떻게 되어 가는 거야? “빨리 가서 밥이나 먹고 좀 자요. 귀신같아요, 꼴이.....” 라며 괜히 다정한 척 다가오는 그 모습에 이 녀석, 진짜 정신병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래, 내가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속진 않는단 말이야. 나도 내숭이라면 세계 챔피온급인데.... 원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란 말야. 내가 못알아 봤다는 건 이 놈이 진짜 정신병자라는 명확한 증거야!! “권형아..... 우리 병원 가자!” “왜요? 어디 아파요?” 라고 은근히 들여다보는 다정한 눈길. 그래 역시 정신병이야!! “저기, 너 지금 충격으로 약간 맛이 간 거 같거든. 나랑 같이 병원 가자.” “아아~ 걱정 말라니까. 원래 그런 거야. 빨리 가서 잠이나 퍼자. 또 쓰잘데기 없이 싸돌아 다니지 말고.” 라고 짖꿎게 웃으며 말투까지 돌변한 녀석이 나를 안고 입술에 가벼운 베이비 키스를 남긴다. oops!! “얘기는 나중에 천천히 해요. 밥 먹고 쉬라구요, 사랑해요...” 오금이 저릴 정도로 다정한 그 모습에 다시 넘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를 방안으로 슬며시 밀어 넣고 눈가에 입을 맞춘다. 이거.... 이 자식이 지금 나 가지고 노는 건가? 내가 빈속에 술을 마셔서 제 정신이 아닌 건가? “혼자서 아프고 그러지 마요. 울지 말고.... 그리고 말 좀 잘 듣구요.” 라더니 휙하니 문을 닫고 사라진다. 나..... 아무래도 내가 이상한 거지? 그렇지, 내가 지금 상태가 아좋아서 그런 것 뿐이야, 암.... 후훗, 저렇게 잘 자란 놈이 이상해질 리가 없잖아? 아무리 핏줄이라도 말야.... 그런데.... 왜 이렇게 찝찝한 거지? ▷ track 03. Overprotected sung by Britney Spears 바다 소리가 들려온다. 낮의 풍경 그대로 넓은 바닷가를 걷고 있는 나와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따라오는 윤진이가 있는 풍경. 아니, 그대로가 아니다.... 스물 둘의 내가, 그리고 스물 하나의 윤진이가 그 모습 그대로 해변가를 말 없이 걷고 있었다. 한참을 침묵한 채 다정한 공기에만 의존해 걷고 있던 내게 뻗어온 따뜻한 손. 그리고 말 없이 다가오는 다정함이라는 공기. 그 부드러움에 아무 말도 없이 이어져 함께 해변을 거닐었다. 그 순간까지는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한 두 번 없을 행복한 꿈이었다. 하지만..... 곧 해가 지고 바다가 밀려온다. 나를 덮쳐 먹을 듯 강하게, 무서운 파도 소리와 함께 덮쳐온 바다에 나는 잠기고 숨이 막혀와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에 감겨있던 윤진이의 따뜻한 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고 그대로 깊은 바다 저 속까지 나를 끌고 가는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정신 없이 휩쓸려간다. 아무리 간절하게 손을 뻗어도..... 내 손을 잡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찝찝한 꿈에 눈을 뜨고 일어나자..... 아니나 다를까..... 꿈자리가 사납더니 비까지 내린다. 젠장...... 비가 오다니..... 아, 그러고 보니 장마철이던가? “으아아악!!!” 오늘 하루 계속될 악운들의 릴레이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러댔다. 씨발, 저 하늘을 콱 막아버리든지 해야지!!! 대체 나랑 무슨 원수를 지었길래 비까지 오고 지랄이야? 하늘, 너 엿이나 왕창 깨먹어라, 씨발!! 하늘을 향해 중지를 들고 fuck you를 쏘다 진짜 하늘을 보고 나려줘야 할 것 같아 서둘러 침대에서 기어 내려왔다. 그리고 창가로 달려가는 순간........ 쿠당--- “으악!!” 아니나 달라? 젠장, 바닥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발로 밟고 그대로 중심을 못잡은 채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젠장.......”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런 날 비가 오는 이유가 뭔데? 오늘은 우리 학교 애들이랑 뭔지 모를 다른 학교 놈들이랑 경기인지 뭔지를 한단 말야!! 내가 안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왜 비가 오냐구!! 게다가, 그 자식들 시합마다 꼭 사고치는 게 특기던데 비까지 오니 아예 내 목 내걸고 나가는 편이 낫지. 씨발.... 그냥 학교 때려치워 버릴까 보다. 머리를 벅벅 긁고 신경질이 나, 창가를 홱 하니 노려보는데 때도 잘맞춰 핸드폰이 울린다. 확 깨버릴까 보다..... 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거야 어디까지나 생각이지. 요즘 핸드폰이 얼마나 비싼데 이걸 깨? 그냥 책이나 하나 집어던지지..... 뭐..... “네.” <비 온다.> 전화하자마자 얄밉게 말하고 킥킥거리는 건 세하 자식이었다. 나도 알아, 안다!! “알아, 방금 일어났어.” <조심해라. 어제 보니 오늘 몸조심하는 게 좋겠던데 때 맞춰 비까지 내려주네.> “긁어라, 전세하. 하늘에 있는 새기를 멱살 쥐고 조져버리든가 해야지... 젠장, 어디 비 안오는 세상 없나?” <어쩌겠냐? 타고난 걸....... 잠은 잘 잤냐?> “응.” 별로 잘 자지는 못했지만..... 개꿈을 꿔서 말야. <그냥 우리랑 같이 나오지. 왜 혼자서 부득 부득 그 방에서 자겠다고 우겨?> “생각할 게 있었다니까.” 라고 말하고 손이 닿는 곳에 있던 담배를 빼들고 불을 라이터를 찾았다. <생각은 무슨.... 혼자서 중얼거리다 금새 결정할 꺼면서.> “넌 내가 생각도 안..... 으악!!!” 전화를 하면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켜는데 순간 앞이 확하니 뜨겨워져왔다. 그리고 나는 노린내..... 젠장!! 이거 뭐야? 어떤 씹새가 라이터 불 최고로 조정해 놨어!!! <뭐냐? 왜 그래?> “씨발, 앞머리 다 탔어!!!” 호호거리면서 그슬린 머리카락을 털어 냈지만 강도가 진짜 셌는지 꼬슬린 머리가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역시..... 재수 없어. 왜 재수 없게 비가 오고 난리야!? <뭘 했길래 앞머리가 타?> “뭘 하긴? 담배 불 붙이다 그랬지!! 젠장!!! 이거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짤라야지......> “씨발! 으악 나 미장원 싫단 말야! 그리고 머리 자르는 것도 싫어!!” <저녁 때 쯤 데리러 갈게, 같이 나가서 밥 먹고 머리 잘라라.> “미쳤냐? 비오는 날 나가게? 나 죽으라고 고사 지내라!” <신경질은..... 오후에 그친다고 했어. 전화할테니 준비하고 있어라. 그리고 너 옷좀 사고.... 대체 니 센스는......> 이라고 한숨을 푸욱 내쉬는데...... 이게 조폭 자식이 왜 남의 패션 감각 갖고 난리래? 옷이야 몸만 가리고 다니면 되는거지, 츄리닝을 입든 핫바지를 입든 빽바지를 입든 뭔 상관이래? “왜 시비 걸고 난리야? 내 센스가 어때서?” <상원이가 너 볼 때마다 쪽 한숨쉬는 거 모르냐? 그 얼굴에 좀 꾸미면 어때서 그렇게 후줄근하게 하고 다녀? 너 그 위에 셔츠 내가 알기로 한 10년 입은 거지? 목이 다 늘어나서 아예 어깨까지 다 내려오겠더라.> 라는 말에 옷을 보니.... 좀 심하기는 하군. 그런데 이게 어때서? 편하면 되는 거지...... <요즘은 애들도 옷 보고 사람 판단한다. 의상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위치를 알려주는 거라고. 그런데 선생이 그게 뭐냐? 그러고 다니면 지나가던 개도 무시해.> “무시하면 그대로 조져버리면 돼. 뭔 상관이래?” <선생이 말하는 거 한 번 잘한다. 하여간 데리러 갈테니 기다려.> “몰라, 임마.... 그나저나 넌 계속 여기 있어도 돼?” <휴가 왔다니까.> “성우는?” <서울에서 일 보고 있지. 안어울리게 걱정하는 척은.....> 이라며 말을 흐리는 꼴을 보자 그제야 알았다. 이 자식.... 일도 바쁜데 억지로 여기 눌러앉아 있다... 라는 거. 내가 바보냐, 전세하? 그 쪽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한참 바쁠 때 여기 박혀서 잘하는 짓이다. 하다 못해 성우라도 데리고 왔으면 휴가라는 말을 믿지. 스물 아홉 살이나 쳐먹은 남자가 이런 여름에 겨우 시간 내서 친구들하고 호텔 방에서 뒹굴고 있으면 진짜 시시한 인간인 거야. 물론..... 나는 빼고....... “병신같이 굴지 말고 서울 올라가. 그리고 성우랑 같이 있어라. 휴가라면서 혼자 뭐 하는 짓이야? 애인 그렇게 팽게쳐두다 바람 펴도 할 말 없는 거다.” 끄슬린 머리를 다 털어 내고 담배를 피며 말하자 녀석이 웃기만 한다. 그 웃음이 무슨 뜻인지 알기에.... 더 올려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때문에 애인 홀대하다 버림받아.” <..... 장인하, 니가 지금 그런 말할 처지냐? 너나 잘해, 임마.> “나야 뭘 하든 내 맘이지..... 내가 누구 말 들을 놈이냐?” <자랑이다.> “성우한테 잘해......” <알아.> “그 자식이 너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렇게 구박하냐? 너 그 놈 때문에 살았어.” 그래서..... 나도 빚이 있지. 그 녀석 아니었으면 나 너 잃어버렸을 테니까..... 만약에, 진짜 상상이라도 하기 싫지만 너 없어졌으면 나 그 녀석들 다 죽여 버렸을 꺼야.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피를 말려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 버렸을 꺼야. 너희들한테 말 안했지만, 그리고 죽을 때까지 말 안하겠지만 장지환 새끼보다도, 그 나쁜 윤진이 자식보다도, 그리고 명세나 권형이보다.... 소중해, 너희가. 내 일생을 지고 가는 녀석들이니까, 평생을 함께 할 녀석들이니까..... 그래서 그 꼬맹이도 내치지 못하는 거야. 다른 녀석이라면 그 꼬맹이 절대로 용서 안해, 아니 용서 못해. 절대 가만 두지 않아. 그렇지만.... 너희니까, 너희 때문에 용서한 거야. 내 안에 나도 조절하지 못하는 독기와 악을 식힐 수 있는 거 너희뿐이라는 거 늘 기억해 둬. 권형이도 누구도 아냐. 너희 뿐이야, 내 미친 짓 막을 수 있는 거..... <알아, 잘할 꺼야. 제일 소중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야.> “그럼 서울로 가. 나야, 내버려둬도 알아서 기어가든 뛰어가든 날아가든 살아가는 놈이지만..... 그 자식 마음 약해. 여리고 착한 녀석이야...... 상처도 잘 받고.....”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나는군. 그 녀석 비쩍 마른 게 어딘지 모르게 나를 닮은 그 분위기에 세하 녀석이 옆에 두는 이유를 알았었다. 그리고....... 굉장히 심술이 나서 괴롭혔던 것도 사실이다. 뭐, 사실 지금도 그렇게 호의적이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며느리 보는 시어머니 심정이랄까나..... 그냥 녀석이 얄밉고 싫었었지. 하지만 지금은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니까. 뭐, 녀석은 그래도 여전히 나를 어려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자, 그 때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이 녀석 한참 난리칠 때, 이유가 뭔지는 정확히 알았지만 내가 해줄 수 없는 일 이었기에 치묵하자 녀석 혼자 고민하고 망가졌을 때, 그 하얗고 예쁘장한 녀석이 내 얼굴에 대고 당당하게 너 상처 입히면 죽여 버릴 꺼다.... 라고 했었으니까. 그 눈이 마음이 들었어. 정직하고 순수한 그 눈동자가...... 너를 닮아서 말야, 전세하. 알아? 그 녀석, 너 때문에 나를 협박하던 놈이야.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하를 말야.... 내 독기에 그 날고 긴다던 아저씨들도 알아서 피해가는데 그 여리고 조그마한 녀석이 내 눈을 정확히 들여다보고 악을 쓰더라. 인간 장인하가 누가 두렵다고 생각했던 거 그게 처음이었거든, 아니 두렵다기 보다는..... 정확히는 부러웠던 거지. 그 열정이, 그리고 그 순한 녀석을 그렇게까지 독하게 만든 그 지독한 사랑이라는 것이..... <성우가 대단하긴 하구나. 장인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게 하다니...... 그럼 너나 잘해, 괜히 그 녀석 괴롭히지 말고.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그 얘기 한 번 하려고 했었다.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그 착하고 여린 녀석을 말야. 상원이 만나는 그 독살 맞은 아저씨한테는 잘하면서....> 그야, 그 자식은 나랑 통하는 바가 있고 나만큼 악당이니까지. 유유상종이라고 나랑 친구하기는 좋은 성격이거든. 하지만....... 성우는..... 그냥........ 작은 새 같거든. 착하고 예쁘고 옆에 두고 싶은, 그래서 사랑스러운 작고 예쁜 새. 나는 그러질 못하니까 심술부리는 거야. 너는 강하고 멋진 표범 같고. 그리고 상원이는 착하고 멋진 백마 정도? 그리고 꼬맹이야 워낙에 고양이 같은 녀석이고. 그리고..... 나는....... 나는....... <무슨 생각해?> “아니, 잠깐.......” <뭐, 성우 보면 어떻게 잡아먹을까.... 하는 생각하는 거냐?> “누가.........” ........ 잠깐만...... 그러고 보니 열 받네. 이거 결국 지 애인 편드는 거 아냐? 기분 나쁜 꿈에 아침부터 비까지 내리는데 이게 전화해서 내 심기를 건들여? “젠장, 나는 못된 독수리라 그 예쁜 새 잡아먹으려는 놈이다! 됐냐? 이 자식이 아침부터 벨 꼴리게 지 애인 편드냐?” <편이 아니잖아. 잘해 줘, 너도 평생 만날 놈이야.> 그야, 당연하지. 내가 너 평생 볼 거니까 그 놈도 당연히 평생 보...... 겠지만....... 녀석의 어조가 조금 틀리다. 나야 ‘평생’이라는 말이 입에 붙은 놈이지만 이 녀석은 이런 말 잘 안하는데...... “평생 본다는 건...... 그런 뜻이냐?” 라고 되묻자 녀석이 웃는 게 느껴진다. 허어....... <그래, 그런 뜻이다.> “....... 우리나라 동성혼 금지야.” <알아, 임마. 누가 호적에 올린대? 그냥 내가 평생 끼고 살 놈이니까..... 식 올릴꺼다. 너희 앞에서 맹세하고 같이 살꺼야. 엄마한테도 말할 꺼고.> 갑자기 머리가 쿠궁거리며 울려왔다. 이 자식이.... 말이야. 나야 원래 다 포기한 놈이고 꼬맹이야 그 마귀할멈 죽었으니 맘 편할 꺼고 상원이야 아집이 강한 놈이니 부모님이 뭐라든 눈 하나 깜빡 안하겠지만 너는 안그렇잖아!! 니 동생, 어머니면 껌벅 죽는 녀석이, 그래서 가족이라면 죽으려고 하는 녀석이 무서운 커밍아웃을 하시겠다? 그것도 니 손주 안아보는 게 일생의 소원이신 너희 어머니 앞에서? 하, 이 자식이 진짜 미쳐 가는구만...... 기가 막혀라.... 이 녀석 어머니가 그렇지 않아도 이 녀석 결혼시키겠다고 나만 보면 애인 얘기 물으시는 통에 등뒤로 식은땀이 흐르던 게 한 두 번이 아닌데 말야. “....... 대대적인 커밍아웃이냐? 아우, 머리 아파...... 그러다 너희 어머니 돌아가신다. 미치겠네. 꼬맹이도 지랄하던데 뭐냐, 대체? 아저씨도 이혼하고 상원이랑 애까지 키운다던데.... 으악!!! 머리 깨져!!” <잘 이해시켜야지. 어떻게든..... 허락 받고 싶어. 성우가 가족이 없으니까..... 우리 가족에게라도 허락 받고 녀석에게 가족이 되어주고 싶어.> 라는 말에 가슴이 촉촉하게 적셔진다. 항상 옳은 말만하는 착한 놈이라...... 젠장, 부럽다, 전세하! “하여간..... 일 치룰 꺼면 지원군이라도 받고 치러라. 니 동생들은 알아서 해결해줄테니......” <또 죽어라 패놓게?> 라며 녀석이 쿡쿡 웃는다. 몇 년 전인가 갑자기 나쁜 길로 빠져 발악을 하던 세하네 막내 동생을 죽어라 패서 갱생시켜놓은 전적을 말하는 거겠지. 그 자식이 하도 싸우고 다니길래 싸움도 잘할 줄 알고 엎어놨는데 생각보다 별 거 아니더라구. 덕분에...... 죽어라 깨졌지, 나한테. 전치 20주 나왔으니까...... “말 안듣는 망아지는 죽지 않을 만큼만 패면 되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말 귀 못알아먹는 놈들은 언어가 아닌 바디 커뮤니케이션이 최고라구. 그래야 알아듣거든.” <그렇다고 그렇게 패놓냐? 우리 어머니는 그래도 고맙다고 우셨지만 너 학교 들어갔을 때 걱정하시더라. 애들 다 줘패놓고 학원 폭력 어쩌고 TV에 나오는 거 아니냐구......> “설마..... 난 관심 없는 놈들은 패지도 않아. 니 동생 아니면 어딜 가서 사고를 치든 맞아죽든 알게 뭐야? 그러게 내 눈 앞에서 걸리래? 누가?” 그러니까 정확히 4년 전이던가? 아직 대학에 다닐 때 녀석의 막내 놈이 한참 여기저기 사고치고 가출까지 하더니만 결국은 학교에서까지 난리가 나서 온 집안을 뒤집어 놓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뭔가 일이 있어서 상원이 만나서 머리 쥐어뜯고 있는데 가게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었지. 그래서 싸움인가.... 하는 생각에 당장에 구경하려고 나가보니 세하와 그 막내 놈이 실랭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둘째 놈도 있었는데 그 막내 놈이 깡패 어쩌고 하면서 형한테 반말로 찍찍 싸대는 꼴에 완전 머리가 피잉 돌아버렸었지. 세 하 놈이 그래뵈도 잘 자란 녀석이라 동생놈 한 대 쥐어박지도 못하고 당하는 꼴에 열받아 냅다 뛰어가 그 놈 죽어라 패놓은 기억이 있다. 전국의 깡패를 무시하는 말 하지 말라고...... 말이지...... 나도 깡패 출신이잖아. 그러니 절대 그런 말은 용납 못하지. 그 덕에 나한테 걸려 그 자리에서 피떡이 되었지..... 훗, 그 덕에 그 자식 지금도 나만 보면 피해 다니더라구. 그 전에는 웃으면서 게기더니만..... <그래, 하여간....... 일단 저녁 때 보자. 이것저것 의논할 것도 있으니까.> “그래, 상원이도 아직 있지?” <응, 같이 있어...... 이따 보자. 하루 종일 몸 조심하고.> “으으...... 그래..... 이따 보자.” 라고 전화를 끊고 창밖을 다시 보자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정지된 화면에서처럼 아까와 같이 여전히 창을 뿌옇게 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젠장...... 오늘...... 살아서 저녁을 맞이할 수 있을까? 휘적휘적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의 풍경을 사펴봤다. 그래, 아직까지는 괜찮아. 그리고 오후에 그친다잖아. 안그치면 절대로 안나가!! 젠장..... 대체 이 놈의 징크스는 언제 없어지는 거야!!!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발광을 하다 그래도 연습경기에는 나가야 할 것 같아 마지못해 일어서 옷을 갈아입었다. 아, 비옷하고 준비 안해왔는데.... 그래도 완전 무장을 하기 위해 씻고 난 후 반바지에 짧은 반팔 T셔츠를 입고 신발은 어차피 젖을 꺼니까 슬리퍼 찍찍 끌고 우산은 아래에서 제일 큰 파라솔 하나 사들고 가면 되는 거야. 까짓 꺼 여기서 저긴데 가는 도중 큰 일이야 생기겠어? 저번처럼 누가 빗물 받은 양동이 내다버리지 않는 이상에야. 그래, 그리고 나가서 권형이 상태 좀 확인하고 나도 내 살 길을 찾아야지. 암!! 역시 식욕은 일지 않아 간단한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열심히 걸어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방, 위아래를 잘 살피고 파라솔을 든 채 조심스레 시간을 확인하고 저 멀리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물은 어떻게 해도 튀는 거니까 최대한 몸만을 보존하며 조심조심해서 체육관으로 향해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 앞 2m 앞에 서서 문이 열린 틈으로 누가 양동이 들고 나오지 않나 확인하고 파라솔을 든 채 지방이 이어진 곳까지 들어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오는 길은 안전했다. 이제 안에서만 조심하면 된다는 생각에 우산을 접고 자신감 있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딛고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서는 순간 찌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하게 바다으로 자빠져서....... 으악!!! 슬라이딩이다, 슬라이딩!!! 씨발, 어째서 스파이크 박힌 슬리퍼는 안나오는 거냔 말이다!! 하다 못해 장마철이 낀 여름에 신는 슬러퍼면 밑에 미끄럼방지 가공이라도 해놔야지!! 대체 기업가들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 거냐구! “괜찮으세요?“ 다다다다 거리는 소리와 함게 달려온 누군가가 바다에 널부러진 나를 끌어 올린다. 씨발, 니 눈엔 괜찮아 보이냐? “누가 바닥에 왁스칠 해놨어!!“ “원래 하는 거에요. 코트 외에는.....“ 나를 제대로 세우며 피식거리며 웃는 태민이 놈을 보자 더욱 열이 받아 발을 들어 녀석의 허리부분을 차버렸다. “아, 왜 때려요?“ “왜 때리긴? 1m내 접근금지령 까먹었냐?“ 그래, 내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지만 넌 내 주변에 접근 금지 중이야!! 니 마음 바꾸기 전엔 절대 근처로 오지 말란 말이다! “아, 씨발 재수 없어!! 왜 비는 오고 지랄이야?“ “그러게 누가 젖은 신발 신고 들어오래요? 체육관 안에서는 체육관 용 신발이나 신발 벗는 거에요.“ 뒤로 물러서서 설명해 주는 태민이의 말에 따라 씩씩거리며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들고 내팽게쳤다. “아, 성질은..... 그렇게 집어던지면 어떻게 해요?“ 라면서 내 신발을 집어들어 차곡히 정리해 놓은 신발장 안에 넣는 모습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자 여지없이 날아오는 시선들..... “어딜 쳐다 봐! 사람 엎어지는 거 처음 봐?“ “여기서 엎어진 사람은 처음이에요.“ 라면서 실실거리면서 다가오는 경진이 놈에게 다가가 당장 그 목에 팔을 감고 힘을 주자 빼액거린다.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거야! 어디서 말대꾸야?“ “노처녀 히스테리 부리지 마세요!“ “노처녀 히스테리가 아니라, 노총각 히스테리다!!“ “놔주세요, 목 아파요!!“ 그래, 소원대로 놔주마! 감고 있던 팔을 풀고 앞으로 나가는 녀석을 맨발로 걷어차 주자 엉덩이를 두 손으로 가리고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돌아본다. “씨이......“ “입 집어넣어! 계속 내밀고 있으면 꿰매 버린다!“ “치잇......“ 부루퉁한 표정으로 안으로 사라지는 녀석을 보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사뿐히 걸어 벙쪄서 바라보는 고문들 사이로 껴 들어갔다. 나도 고문이다, 뭐........ 내가 봐도 같지도 않지만.... “오늘 연습 경기 어떻게 되나요?“ 라고 방긋 웃으며 바라보자 귀신 본 듯 한 얼굴로 넋을 빼고 있다. 왜, 씨발들아, 내 얼굴에 뭐 안달릴 꺼 달렸냐? 어딜 그렇게 쳐다 봐? “아, 일단...... 상학고가 먼저..... 하죠.“ 라며 말을 흐리는 모습에 한 번 눈을 치뜨고 노려보자 슬금슬금 뒤로 물러선다. 아, 이 광선은 아직 유효하구만. “애들한테..... 전달해 주실래요?“ 라고 옆에서 작고 예쁘장하게 생긴 선생 하나가 조용히 말하길래 고개를 끄덕이고 터덜터덜 맨발로 걸어 우리 학교 놈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쪽에 다 닿아 막 녀석들을 부르려던 찰라였다. “야! 연습 경기....... 으악!!!“ 맨발로 그 체육관을 걸어다니다 보니 바닥 사이에서 삐져 나온 나무 가시가 발바닥에 박혀버린 것이다. 으악!! 역시 비 오는 날 나오면 재수가 없어!! “또 왜요?“ 한숨을 내쉬며 이젠 쪽 팔린다는 듯 얼굴을 가린 권형이가 다가와 팔을 휘어잡는다. “가시 박혔어!! 씨, 아프잖아.“ “진짜 칠칠맞긴..... 와봐요.“ 누가 칠칠맞아? 칠칠맞긴..... 무, 내가 좀 칠칠맞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애들 앞에서 선생보고 칠칠맞다니!! 다른 녀석들이 날 뭘로 보겠어? 조용히 내 손목을 잡아끌고 벤취로 간 녀석이 나를 옆에 앉히고 자기도 옆자리에 앉아 내 다리를 들어올린다. “어디 박힌 거에요?“ “여기......“ 아픈 다리를 올려 보이자, 왼쪽 발 중앙의 가장 연한 부위에 박힌 커다란 가시가 보였다. 아, 큰 것도 박혔다. 가시 남으면 아플 텐데..... 낮게 혀를 차며 그 가시를 빼내려 손을 뻗자 옆에 놓인 구급상자에서 소독약을 찾은 녀석이 발 전체에 소독약을 내리 붙는다. “가시 부러지면 안되니까 가만히 있어요.“ “응......“ 큰 거라 얌전히 다리를 들고 기다리자 바닥에 내려앉은 녀석이 내 발을 들어올려 가시가 박힌 부위에 이빨을 갖다대었다. 으악!! 임마, 너 뭐하는 거야? 놀라서 파닥거리며 다른 팔로 나를 눌러 제지하고 이빨로 가시가 박힌 부분 주변을 꽉 깨물어 가시를 뽑아냈다. “됐어요. 좀 정신 좀 차리고 다녀요? 왜 그렇게 사방팔방 미친 듯 뛰어다녀요?“ “아, 몰라!! 니가 비 오는 날 재수 없어 봐. 나오기만 해도 이 꼴인데 내가 정신이 어디 있겠어?“ “평소에도 그러잖아요. 왜 비를 탓해요?“ “비 오는 날 특히 더 재수 없단 말야!!“ “그런 생각이 징크스를 만드는 거에요. 자기가 재수 없길 바라는데 재수가 있을 리가 있어요?“ 순간 온 몸이 얼음장처럼 식어갔다. 뭐라고? 지금 저 새끼가 뭐라는 거야? 내가 재수 없길 바란다구? “너, 그거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에요. 징크스란 건 자기가 만드는 거야. 자기가 그렇게 파고드는데 운이 좋을 리가 있어? 머리 좀 식혀.“ 라더니 날 아예 무시하고 저 멀리서 우리 쇼를 구경하고 있던 학교 녀석들에게로 돌아간다. 그 징크스를 내가 만들었다구? 내가 재수 없길 바란다구? 순식간에 돌변해 차가운 눈초리로 무서운 말만 하고 사라진 권형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자 온몸에 오한이 끼쳤다. 가장 알고 싶지 않았던, 아니 인정하기 싫었던 것만 끄집어내고 사라지다니..... 재수 없어. 유권형, 너..... 젠장...... 싸가지 없는 자식!!! 이를 으드득 갈며 그 뒷모습을 노려봐도 전혀 상관 없다는 듯 자기 할 일만 하던 녀석은 간간이 나를 돌아보며 피식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에 당장에 달려가 물통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었지만 왠지 그럴 기운도 나지 않아 얌전히 벤취에 앉아 경기를 참관했다. 그리고 경기가 반 쯤 진행되었을 때 즈음해서 비가 줄어들어 있었다. 징크스를 내가 만든다구? 내가...... 예민해져서 그렇게 운이 없는 거라구? 씨발, 세상에 이렇게 운이 없는 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낮게 이를 갈며 다리를 끄러 안고 앉아 그 녀석의 뒷통수만 노려보았다. 그리고..... 진짜 심각하게 나의 징크스에 대해 되뇌어 보았을 때, 역시 징크스는 있다는 결론은 내버렸다. 한참 경기 중인 체육관이 갑자기 불이 꺼져 버렸으니까! “거봐!!! 징크스 맞다니까!!“ 갑자기 꺼진 불에 농구를 하던 녀석들과 이하 일동이 멈춰서 벙쪄 있을 때 혼자 신나라 빽하니 소리치자 저 멀리서 경기를 구경하던 우리 학교 놈들이 나에게서 멀리 멀리 떨어지며 원을 만들고 모여 얼굴을 숙인다. “아, 씨발!! 맞다니까!!“ 진짜 쪽 팔린다는 듯 점점 움추러 드는 녀석들에게 달려가려 하자 한숨을 쉬며 돌아본 권형이와 태민이가 지들끼리 쑥덕거리더니 이 쪽으로 다가온다. “그 봐 맞지!!?“ “......... 그래 맞아요.......“ 그래, 니 똥 굵다..... 라는 듯 내뱉은 권형이가 슬쩍 눈짓을 하자 태민이가 다가와 나를 뒤에서 안고 입을 막는다. 그리고 경진이는 싱글거리면서 다가와 내 다리를 안아들고....... 뭐 하는 거야? 이 녀석들!! “쪽 팔리니까 그냥 방에 가서 쉬어요. 더 구경꺼리 되고 싶진 않죠? 그리고 가서 바지부터 갈아 입구요.“ “우웁!!!“ 입을 막고 뒤에서 날 안아든 태민이와 다리를 든 경진이가 게걸음으로 나를 들고 옮겨간다. 그리고 나중에는 아예 나를 업어든 태민이가 나를 방안에 집어던지고 생긋 웃음을 흘리던 게 오후 3시 즈음이었다. “선생님, 나오지 마세요. 저희도 얼굴이 있다구요.“ 라고 마지막 인사를 마친 녀석이 나가자 옆에 서있던 경진이까지 한 마디 한다. “그러게 좀 조신하게 좀 사시죠. 애들이 우리만 보면 놀린단 말이에요. 고문 진짜 웃긴다고.....“ “아, 나 웃긴 거 이제 알았어!! 언제는 예쁘다고 지랄, 언제는 웃기다고 지랄!! 어쩌라구? 이렇게 타고난 걸!!“ “그러니까 가만히 좀 있으라구요. 시합 끝나면 올게요.“ 라더니 문을 닫고 나선다. 으아아악!! 내가 무슨 정신병자야? 왜 내가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는 건데? “젠장!! 역시 비오는 날은 재수가 없엇!!!“ ▷ track 04. Twinkling Of Paradise sung by 신화 “순금이야, 순금!!” 5시 즈음에 진짜 날 데리러 온 녀석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웃는 꼴에 열받아 프로포즈 용 반지를 고른다는 세하에게 빽하니 소리치자 상원이가 한숨을 내쉰다. “제일 가치 있는 거라구!!” “전쟁 나가냐? 반지는..... 성우씨 의견도 중요하니까 같이 골라. 뭐, 프로포즈할 때야, 니 맘대로 고르겠지만.” 아니, 무슨 소리야? 순금이라니까!!!! “순금이 좋다니까!” “인하야..... 요즘 누가 순금반지 끼워주고 결혼해주세요..... 하냐?” “나!” “너 빼고...... 반지 고르는 거 도와줄까?” 라고 아예 내 말을 무시한 녀석 둘이 자기들끼리 소근거린다. 젠장, 열받아!! 내 취향이 어때서? 얼마나 실용적이고 좋아!! “부담스럽지 않게...... 결혼반지는 다이아가 좋겠지만.......” “칫, 알았어, 알았다구! 좋아, 프로포즈용은 니가 고르고 결혼 예물은 내가 해줄게. 아니.... 성우한테 말해야 하나, 그런 건?” 이라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머리를 긁적이자 둘이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 너 그런 것도 아냐?” “내가 바보냐? 예물은 여자 쪽이 준비해야하는 거 아냐? 아, 이런 경우는 다른가? 성우 가족 없으니까 내가 해준다고 해. 돈은 전부 내가 댈 테니까, 알아서 준비하라구.” “니가!!!” 온 가게가 뒤집어 지게 소리친 두 놈이 잠시 후 사람들의 시선에 헛기침만 뱉고 나를 쳐다본다. 왜? 내가 해준다는데...... 뭐가? 나 돈 많단 말야. 평생 뒤집어쓰고도 남으니 돈 좀 써보겠다는데 왠 난리? “왠 일이냐? 너, 그 딴 거 낭비라고 반대할 줄 알았는데.....” “필요 없는 거면 당연히 반대지. 필요한 거랑 필요 없는 거 구분 못할 정도로 바보냐, 내가?” “........ 너, 인간 됐구나......” 라는 세하의 말에 Fuck you를 날려주고 다시 담배를 빼물었다. “성우 아직 모르지? 일단 집에 인사하고 준비되면 말해라. 뭐, 그렇다고 가전제품 같은 게 다 필요한 건 아닐 테니까 필요한 목록 준비하고...... 돈이야 나도 뒤집어 지게 많다구. 아, 차라리 집을 사줄까? 아니, 건물 하나 통째로 줄까?” “됐다, 임마 그런 거 받는 거 기분 별로야. 이 김에 성우는 일 그만 두게 하고 대학 보내줄까 하는데...... 어떻게 말하지? 그 녀석 고집이 세서 내 말 안들을 텐데.” “아, 걔 대학가고 싶어했다며? 고집부리면 패서 보내버려.” “내가 너냐?” 라며 나를 돌아본다. 저 자식이...... “알았어, 내가 말해볼게. 그리고 대학 정보는 내가 알아볼 테니까 적당히 구슬려서 공부나 시켜. 필요하면 학원도 같이 알아봐 줄게. 이래뵈도 내가 고등학교 선생 아니냐?” “그래, 항상 까먹고 있지만 고등학교 선생이지.” 라고 한숨을 쉬는 세하의 말에 상원이 놈이 피식거리며 웃어댄다. 그래, 나도 내가 선생짓 하는 게 용한데 늬들이야 어떻겠냐만..... 그렇다고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뭔데? “일단 내 일은..... 그렇게 하고..... 너는 어쩔 꺼야, 장인하?” 라고 나를 바라보는 두 녀석의 시선에 이 녀석 둘이 굳이 나를 끌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여우같은 자식들.... “뭘?” “니 동생인가, 애인인가 말야. 그리고 윤진이 녀석까지...... 이게 무슨 일이냐? 갑자기 찾아오더니 기다린다구?” “몰라, 기다리던가 말던가. 평생 기다리다 늙어죽으라고 해라.” 라고 애써 딴청을 부리지만 두 녀석은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이래서 오래 사귄 것들은...... 츳!! “그렇게 말할 꺼 아냐. 윤진이.... 나 찾아왔었어. 어떻게 연락처 알았는지 너 기다리고 싶다고. 지난 일은 서로 기억에서 지우자고 하더라.” “그 녀석이 니 연락처를 어떻게 알고?” “우리 회사 모델이잖아. 너 몰랐냐?” “........ 그렇군. 알 게 뭐야?” “윤진이 진심이야. 물론..... 나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아찔하지만...... 그리고 너 애인 있는 거 알지만 쉽게 떨어져 나갈 것 같지가 않아. 그 녀석 너 진짜 사랑했던 거 알아. 너랑 헤어졌을 때도 너 미친 듯이 찾아다녔어. 너한테 말은 안했지만...... 너 잃고 반쯤 인생 포기한 녀석 같았어. 어떻게 할래?” “미치든 폐인이 되든 나랑은 상관없어. 끝났잖아..... 그거면 된거야. 이미 Over된 게임을 다시 시작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아.” “그 쪽에서는 아직 quit 버튼을 누르지 않았는데도?” “.................” 아무 말 없이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뭐, 1년 전까지만 했어도 내가 끝냈으니 끝난 거라고 당당하게 말하겠지만..... 장인하한테도 시간은 비켜가지 않는 건가 봐. 녀석 얼굴 다시 봤을 때는 무작정 화가 나고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어제 다시 봤을 때는...... 왜 좋았던 기억만 떠올랐던 걸까? 처음 겪는 연애였고 처음으로 사랑이라고 느꼈던 상대여서 나도 녀석도 너무 맹목적이었고 행복했으니까...... 만약 그대로 사겼다면 나도 지금쯤은, 아니 이미 예전에 세하처럼 행복한 얼굴로 식이니, 반지니 했을지도 모를 상대였으니까.... 이렇게 자꾸 생각나는 거겠지. 아직도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그 손의 느낌도 목소리도..... 너무 행복하고 사랑스러웠으니까. 다시 예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녀석의 말에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싶었으니까. 안그랬으면 나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어제의 꿈이 생각나 버렸다. 구름 한 점 없이 게인 하늘과 맑은 바다. 스물 하나의 내가, 스물의 윤진이가 웃으면서 바다를 걸어가고 사랑한다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웃음을 흘리는데 갑자기 바다가 덮쳐오고...... 물이 목을 감아 숨을 쉴 수가 없어 손을 뻗었지만 아무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 그래서..... 울어버릴 것 같았는데..... “...... 개꿈이야.......” “응?” 갑자기 흘린 내 말에 반응을 하는 두 녀석을 보고 그냥 웃어버렸다.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 내가 언제는 이것 저것 따지고 계획하고 살아갔냐? 뭐, 냅두면 알아서 해결되겠지. 윤진이 자식 다시 보고싶은 생각은 별로 없고 권형이 자식도 요즘엔 눈에 거슬려. 두 놈 다 가만 둘 생각도 없고 가만 두지도 않겠지만 당분간은 관둘래. 피곤해.” “너도 아직..... 윤진이 생각하지?” 라는 상원이의 말에 돌아보자 녀석이 진지한 눈으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알아, 인하야. 진짜 잊은 거면 너 아예 기억에서 지우고 옆에서 뭐라고 하든 웃으면서 무시하고 인간 취급도 안했을 놈이야. 그런 녀석이..... 명세 만나면서도 그 자식 얘기라면 발악을 하고 꿈이라도 꿀라치면 일어나서 신경질 내고..... 잊지를 못했잖아. 뭐, 너무 데미지가 커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너도 아직 미련이 있는 거야. 그 사랑에.....” 커피잔을 천천히 저으며 말하는 상원이의 이야기에 다시 잔을 내려다보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하나 하나 머리 안을 지나가는 기억들은 빛바랜 사진처럼 향수에 젖게 하는 행복한 기억들뿐이다. 너무 사랑해서 행복했으니까..... 그 녀석밖에 머리 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따뜻했던 시절이었으니까..... 소중하고 행복했던 기억들, 웃음들, 그리고 속삭임들...... “...... 행복했으니까..... 그 녀석을 만나던 몇 개월만은 나를 잊을 정도로 행복했었어. 아무 문제도 장애도 없는 거 같았으니까. 알아? 나 29년 살면서..... 스물 아홉 먹도록 그렇게 절대적인 행복이란 거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었어. 그런데.... 그 때 그 비슷한 걸 느꼈어. 그냥 생각만해도 행복하고 즐거웠으니까..... 꿈같은 거 꾸지도 않았고 옆에 있던 존재만으로도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어. 그런 행복이 지속될까 라는 의심에 진짜 눈물이 난 적도 있었고..... 그런 걱정도 행복했어. 나도 그렇게 사랑 받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거 그 때까지 상상도 못했거든.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다는 거 몰랐거든...... 지금도 가끔씩 그 시절이 꿈이었던 거 같아. 그리고 앞으로도 그만큼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아..... 하지만..... 그건 꿈이었어. 진짜..... 꿈이었던 거야. 짧고 행복했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백일몽..... 같은 거......” 따뜻한 커피잔에 만지작거리다 한 모금 홀짝이자 그 잔 안으로 투명한 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 검은 액체 안으로 눈물이 고인 내 얼굴이 비춰졌다. 하, 이래서 늙으면 죽어야 한다니까...... 꼭 과거 회상하며 눈물짓는 구둘장 늙은이 같잖아. 스물 아홉 해 살고 이러면 다 살고 나면 어쩔래, 장인하. 그렇게 미련이 많아? “....... 닦아라.” 라고 말 없이 손수건을 건내는 세하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상원이 모두 당황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뭘, 이 정도를 가지고....... 나 집에서 잘 우는데....... “인하야..........” 라고 손을 뻗어 잔을 쥔 내 손을 꼭 잡아끄는 건 상원이 놈이다. 하하, 진짜 착해빠진 놈들..... “누가 운대? 커피가 너무 식어서 그래...... 이렇게 차가운 커피를 어떻게 마시라는 거야?” 세하의 손수건을 받아들고 눈물은 닦지 않고 엄한 코만 풀어대자 세하 녀석이 당장에 인상을 찡그린다. 저게 쓰라고 줄 때는 언제고 코 좀 푼다고 인상을 구겨? “손수건 하나 갖고 쩨쩨하게 굴지 마, 전세하.” “임마, 그렇다고 코를 푸냐? 얼굴이나 닦고 와. 젠장, 그거 선물 받은 건데.....” 라길래 더 벨이 꼴려 더러워진 식탁까지 깨끗하게 닦아내자 발악을 한다. “임마!! 그거 성우한테 선물 받은 거야!” “어쭈? 이 팔불출 좀 보게? 니 애인 있다고 자랑하냐, 지금?” “너도 애인 있잖아! 애인에 옛애인까지 줄줄이 엮어놓고 누구더라 애인 타령한다고 구박이냐?” “내가 원하는 거냐, 그게? 그것들이 내 애인 맞기나 해? 한 놈은 이제 와서 기다린다는 둥 어쩐다는 둥 지랄하지, 한 놈은 나 못잡아먹어 난리지!! 내가 열 안 받게 생겼어? 그런 내 앞에서 뭐? 결혼! 씨발, 좋겠다, 전세하!! 니 애인이랑 평생 잘 먹고 잘 살아봐라!!” “쪽 팔린다... 제발 좀 앉아서 말해라.....”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히 속삭이는 말에 주변을 돌아보자 가게 안의 몇 안되는 인간들이 눈을 크게 뜨고 이 쪽을 쳐다보고 있다. 뭐야? 불만 있으면 와서 대놓고 말해!! 왜 말 없이 슬금슬금 쳐다보는 거야? 젠장!! “진짜......” 한숨을 푸욱 푸욱 내쉬는 꼴에 입을 삐죽 내밀고 커피를 다시 삼키자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린 채 세하가 일어선다. “왜?” “쪽팔려서 못 앉아 있겠다. 다른 데로 옮기자....” “뭘 옮겨? 그냥 얘기 하지.” “우리가 너 같은 철판 깔았는 줄 알아? 너야 사람들이 수근거려도 씹고 말지만 우리는 소심해서 그런 짓 못해!” “아, 지랄하긴! 소시한 놈들이 그렇게 쉽게 나한테 넘어왔냐? 진짜 소심한 것들은 내 옆으로 다가오지도 않아.” “그래, 니 눈만 봐도 도망가지. 빨리 나가자, 좀.” “칫!” 내 팔목을 잡아끄는 녀석들을 따라 카페를 나와 식사를 하러 가기로 하면서도 오늘 낮의 권형이의 말이 자꾸 떠올랐다. 스스로 재수 없길 바란다...... 라..... 좀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다. 그 놈의 팔자라는 것에 대해...... ▷ track 05. Survivor sung by Destiny`s Child 왠지 할 일도 없고 힘이 빠져 일찍 돌아오자 식당은 한창 북적거리고 있었다. 역시.... 뭔가 해결책이 필요하다. 그래, 확실하게 해둬야지! 안 그래? 오해의 여지를 만들 필요가 없는 거야. 만약 내가 착각한 거라면 이번엔 진짜 자진해서 정신과 카운슬링을 받아볼 테니까 말야. 그치만 그 놈이 이상한 거면? 그 놈 끌고 정신과 갈래? 허, 말도 안되는 소리.... 미친 놈 나 하나면 충분하지, 뭣하러 둘 다 미치려고 그래? 그래, 아닐꺼야. 내가 착각한 거야, 그렇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줘!!! “으휴......” 길게 한숨을 뽑고 저녁시간임을 이용해 식당가로 들어가 우리 학교 패거리들을 찾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커다랗고 뭉실뭉실한 솜덩이들을! “정경진, 나랑 얘기 좀 할까?” 제일 잘 불 거 같은 경진이 자식의 옆으로 안자 피식 웃자 녀석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진다. 왜? 씨발아, 이 착하고 예쁘고 매력적인♡ - 젠장..... - 선생님이 상담 좀 하자는데..... 뭐가 어때서? “저..... 아무 것도 안물어 봤어요....” 라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하는 녀석의 반응에 피식거리며 웃음이 배어 나왔다. 역시 귀엽단 말야, 이 자식. 훗, 맘에 드는데 내가 끼고 살아볼까? 훗, 끼고라.... 소파로라도 쓰려고? 관둬라, 장인하. 이 덩치 집에 두면 사료비도 엄청나고 메트리스 가는데 드는 비용도 장난 아닐 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너무 눈치가 빨라. 이 녀석하고 있으면 과거사 다 까발리는 건 문제도 아니다. “오늘은 내가 먼저 물어볼 게 있다, 정경진. 니 질문은 그 다음이야.” “......... 왜요?” “임마, 선생님이 보자면 냉큼 달려나올 것이지, 왠 말이 그렇게 많아? 빨리 나와, 임마!” 머리를 투욱 내리치고 먼저 돌아서 나가자 한참 시끄럽던 식당 안에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도움의 손길을 찾던 녀석이 꼬리 내리고 미적거리며 따라나온다. 돼지새끼가 왜 저렇게 소심한 거야? 누가 너 잡아먹는대니? 물론 니 살들이나 근육으로 보아하니 찜해 먹으면 맛있겠지만 아직 식인 취미까지는 갖고있지 않다. 이 예쁜 선생님이 한 번 보자는데 왜 저렇게 어는 거야? 젠장, 이미지 관리를 좀 해야지..... 한참을 밍기적대며 천천히 걸어나오는 녀석을 생글거리며 웃으며 바라보자 더욱 쫄아버린다. 아아.....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무섭냐?” “선생님은 안 무서운데 선생님 입에서 나올 말들은 무서워요.” 그 말에 기가 막혀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내뱉 듯 말해주었다. “....... 하아.... 내 말에 독침이라도 배어있다는 거냐? 자리에나 앉아라.” 침대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제야 겨우 침대 위에 풀썩 내려앉는다. 새끼야..... 너 무겁단 말야! 누가 조신하고 조용하기까지 하래냐, 쿵쾅거리지만 말라구. 아무리 덩치 값한다지만 매트 꺼진 침대 질색이라니까!! “자, 질문 하나! 너 전에 나한테 권형이 무섭다고 한 적 있지?” “...... 그 형 원래 무서워요.” “그래,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냐구?” “무섭다구요.” 라며 뚱한 얼굴로 바라보자 왠지 한 대 내리쳐주고는 싶었지만 일단 아쉬운 놈이 우물 판다고 이죽거리려는 입술을 애써 내리고 눈을 깔았다. 왜 이 자식하고는 유려하고 풍성한 대화가 안되는 거냐? 단답형으로 시작해서 단답형으로 끝나니..... 원...... 언어 공부 좀 해라, 이 자식아! “그러니까 어떤 면이 무섭다는 거냐?” “그냥 무서워요.” “그러니까 왜 무섭냐구?” “무섭다니까요.” 라고 했던 말만 반복하는 녀석에게 확 꼭지가 돌았다. 무섭다는 말 알아들었어!! 아무리 내가 영어선생이라도 한국말 못알아듣겠냐? 그러니까 어떤 점이 무섭냐고 묻는 거잖아, 임마!! “씨발, 너 사람 성질 나게 할래? 그러니까 어떻게 무섭냐구? 단지 엄하고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는 거냐? 아니면 진짜 미친 새끼라는 거냐, 아니면 폭력을 잘 휘두른다는 거냐, 혹은 성질이 개차반이라는 거냐? 아니면 아주 재수 없게도 이중인격이라거나 하는 거냐!?” 뚜껑이 반쯤 열려 퍼부어 대자 갑자기 다리를 꼬고 앉아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듯 하던 경진이 놈이 한참만에 어렵게 말문을 연다. 씨발, 저 새끼 입 한 번 열게 하는 것도 힘드네. 아우, 속 터져!! “그게........” 라고 한참을 고민하던 녀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그게?” “....... 그게...... 다에요.” “뭐? 뭐가 다야? 너 죽을래?”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드는데 녀석이 팔을 들어 머리를 안으며 소리친다. “다라구요!! 다!! 권형이 형 원래 좀 이상하단 말예요!!” “뭐?” 나도 놀라 소리를 버럭지르자 녀석이 담고 있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형 한국으로 돌아온 것도 사실은 다 문제 있어서에요. 기록부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 형 미국에서도 잘나가던 선수였단 말에요. 전미 주니어에도 뽑혔었는데 학교에서 백인들하고 폭력 사건 일으켜서 한국으로 돌아온 거에요!! 한국에 와서도 지형이 사귈 때만 해도 장난 아니었어요. 지형이 성격 버린 거 다 권형이 형이란 말에요. 같이 다니기는 했지만 그 형 눈만 보면 오금이 저린다고 고개 흔들던 게 바로 작년까지에요. 그러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온순해지더니 성격 고치고 학교생활 열심히 한 거에요. 작년 그 폭력 사건도 권형이 형이 주범이었단 말이에요.” “으악!!!” 이번엔 내가 자리에 앉아 머리를 싸안고 소리를 내질렀다. 으악!! 나 진짜 잘못 건들였나 봐!! 역시 핏줄에 문제가 있었어!!! “제가 그랬잖아요, 그 형 무섭다구요!!” “폭력 사건 일으켰단 말은 안했잖아!” “그런 건 알 줄 알았죠. 형하고 잘 지내길래 다 말한 줄 알았어요. 형도 나름대로 성질 잘 죽이길래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서윤진 찾아오고 갑자기 무서워졌단 말에요. 그러게 평소에 잘 좀 하죠!!” 라면서 이젠 나한테 훈계까지 하는 아기 돼지..... 나라고 그 놈이 그런 놈인 줄 알았겠냐? 이 자식, 나한테 과거 얘기한 거 다 구라였잖아!! 어떻게 자기한테 불리한 말은 싹 빼고 자기 당한 것만 이야기한 거냐? “미치겠네......” “선생님 성질 보면 이해는 가던데요, 뭐. 둘 다 열 받으면 눈빛부터 싸늘해지는 게 잘 터뜨리지도 않고 기다렸다 한꺼번에 뒤엎어 버리는 게 비슷하단 말에요. 그래서 다 아는 줄 알았죠.... 뭐......” “왜 하필....... 그런 놈이야!! 나 그 놈 진짜 성실하고 착하고 얌전한 줄 알았단 말야!” “차선생님이 얘기 안해주셨어요? 차선생님은 담임이라 어느 정도 알텐데......” “뭐? 하! 이 꼬맹이까지 같이 나를 물 먹이네. 그 자식.......” “그러게 형이 잘해줄 때 잘하죠. 왜 성질을 건들여요? 지형이도 그 형한테 몇 번 게기다가 무진장하니 당했단 말에요. 그 형 열 받으면 사귀는 사람이고 동생이고 안봐줘요. 선생님한테는 진짜 잘하는 거에요.” 라는 경진이 자식의 말을 들으니 과거가 떠오르는군. 나도...... 말이지 윤진이 놈한테는 꽤 잘했거든. 성질 다 죽이고 하자는 대로 해주고 화도 안내고, 그 자식은 한 번도 팬 적 없단 말야. 그런데..... 역시 내 동생이었어. 장하다, 유권형. 내 동생다워서 아주 좋겠다..... 젠장........ 어떻게 그런 거까지 판박이냐? “권형이형하고 크게 싸운 거에요?” 라고 머리를 쥐어뜯는 내 옆에서 옆꾸리를 쿡쿡 찔러대는 그 손가락을 잡아 꽉쥐자 쇠된 비명 소리를 울린다. “아파요!!” “어딜 찔러? 아우, 미치겠네. 이건 완전 사구에 홍단, 청단까지 뒤집어쓴 꼴이잖아. 젠장 첫뻑으로 넘어가는 게 낫지.... 아욱!!” “형이 뭐라 그랬어요?” “몰라, 임마! 머리 깨지겠다. 진짜... 집안이 대대로 이게 뭐야?” “뭘요, 어딜 가나 형제인 건 티 나서 좋겠던데요.” “그걸 위로라고 하는거냐?” “아뇨, 비꼬는 거에요.” “죽고싶지, 정경진......”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자 당장에 입 다물고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가 앉는다. 내가 미쳤어, 미쳤어!! 그 자식이 어쩐지 눈에 들어온 게 나랑 동류라서였어. 문제는 나도 못 알아볼 정도로 고수였다는 거지. 내가.... 돌아, 돌아!! “미친다....... 미쳐......” “미치지는 말아요. 학기 중에 담임 바뀌면 힘들단 말에요.” 퍼억--- 사람 속 모르고 지껄여대는 경진이 놈을 한 방 갈기자 징징대며 입을 닥친다. 오늘은 건들이면 살인난다, 정경진...... “어쩔 거에요, 이제?” “몰라...... 머리 아파. 젠장 내 주변에 나보다 더한 놈은 없었는데...... 아우...... 재수가 없어도 유분수지!!” “뭘요, 둘이 잘 어울리던데요. 아, 이건 꼬는 거 아니에요. 둘이 진짜 어울리기는 해요. 그림은 되잖아요.” “그림만 되면 뭘 해? 내용이 엉망인데..... 젠장, 난 반드시 착하고 성실하고 제대로 자란 놈이 좋단말야. 나보다 무서운 놈이면 필요 없어!!” “그게 무슨 이기적인 대사에요? 권형이 형 선생님 진짜 좋아하는데.....” “몰라, 임마!!” “뭔지는 몰라도 그래도 권형이 형 한 번 마음먹은 건 죽어도 이루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작년에 아슬아슬한 우리팀 우승으로 만들어 놨구요. 그 형이 얼마나 집념이 강한데요.... 그냥 포기하고 사겨요.” “아슬아슬?” “아, 작년에 진짜 오합지졸이었거든요. 고문도 약하고 작년까지 무섭게 뻗친 권형형 살기에 코치에 트레이너도 암 말 못하고 OB들도 전혀 힘 못쓰고 해서 완전 난장이었어요. 아무리 개인기가 뛰어나도 시합 중에 자기 팀끼리 패스 놓쳤다고 패고 싸우는데 뭐가 되겠어요? 그 와중에서도 권형이 형 무슨 생각인지 우승하겠다고 장담하더니 진짜 우승시켰어요. 작년에 권형 선배가 한국 고등부팀에서 최초로 트리플더블 기록 세웠잖아요. 결승전에서 득점 42점에 리바운드 16개, 어시스트 23개였어요. 거기다 막판에 백덩크까지 해서 완전 뒤집어 엎었다구요. 그 날 우승한 건 우리 팀이 아니라 권형형 혼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엄청났어요. 그 형도 승부욕 죽이거든요. 누구한테 지고는 못살아요. 그래서 코피 터져가면서 공부도 하고, 싸움도 게을리 하지 않고요.” “하아.......” “올 해 우리 농구부 그나마 나아진 거 권형형이 주장이라서 그런 거에요. 2학년들도 그렇지만 제일 문제가 심각한 게 3학년이거든요. 이상하게 그 해 농구부들이 성질 더러운 선수들만 골라 뽑아놔서 아직도 권형형 어디 가고 3학년들만 두면 열라 살벌해요. 학교에서 그 선배들만 졸업하면 농구부 인성 테스트하고 뽑는다고 할 정도로요.” “....... 기가 막혀......” “뭘요, 고맙죠. 선생님 씹었던 그 선배들이요, 사실은 퇴학당해도 몇 번은 당했어야 할 사람들이에요. 그나마 다행인 건 제일 잘 나가는 선수들이고, 집안 빵빵해서 손 못대는 거죠.” “니네 학교.... 진짜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 “별로.......” “세상에 운동부 녀석들이 그렇게 상하관계가 없는 것들이 어디 있어? 내가 데리고 있던 고등학교 깡패놈들도 하극상은 없었다!!” “틀리다니까요. 그 선배들 선생님한테는 그나마 엄청 기는 거에요. 다른 선생들한테는 반말 찍찍 싸고 대꾸도 안해요. 뭐, 선생님 성질 다 뽀롱난 거랑 너무 예뻐서 봐주는 것도 있겠지만.....” “그 딴 녀석들이 예쁘게 봐줘서 머리통 후벼파게 기쁘다, 씨발, 어휴.....” “하여간 그래요. 권형이 형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지금 누가 나쁘다고 했어?! 내가 성격 더러운 것들은 싫다고 했지!! 그래, 일단 머리를 정리해 보자. 권형이는 내 동생이다. 정확히 하면 밭만 같고 씨는 다른 의붓 동생으로 그 놈하고는 태어나자 마자 헤어져 몇 개월 전 눈물의 상봉을 했고 사실을 알기 전에는 내가 반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놈은 현재 나랑 사귀고 있고 나에게 과거를 이야기한 적이 딱 한 번 있다. 그러니까 사귀기 전에 둘이 데이트 비스끄레무레한 액션을 취할 당시의 이야기로 녀석의 이야기로 - 만 - 따지면 녀석은 홀어머니 밑에서 초등학교 시절, 친구 하나 없는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농구를 했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위계질서와 인종차별이 극심한 농구부 안에서 이지메는 물론 집단폭행 비슷한 것도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어머니가 알까 무서워 말하지는 못하고 혼자서 마음으로만 앓다 한국으로 돌아왔다고도.... 했다. 그런데 여기서 브레이크 하나를 걸자면...... 녀석이 다니던 학교는 확인한 바에 의하면 상류층 자녀들이 다니던 뉴욕의 고급 사립학교였다. 그 있잖아, 유치원생부터 유니폼 입고 다니는..... 그 학교를 유치원부터 다닌 녀석에게 친구 하나 없었을까.... 과연? 내 성격에도 남아나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 어린 시절의 녀석에게 친구가 없어 외로움에 농구를 시작했다는 그 말...... 당시에는 찰떡같이 믿었지만 하나가 의심스러워진 지금은 그 말도 순 개구라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민을 간 것도 아니고 1살 때 건너갔으니 미국 쪽이 더 가깝고 편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그 학교에 다니던 애들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하여간..... 이건 넘기고..... 녀석은 농구 실력을 인정받아 에스켈레이터 진학에 전미 주니어 대표로도 뽑혔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브레이크 하나 더, 그 놈의 말에 따르면 이지메를 당했다고 했지만...... - 물론 그 말이 아예 틀리지는 않았겠지, 인종차별이란 거 무서우니까... - 경진이의 말에 따르면 절대 얌전히 당할 놈은 아니었고, 그 폭력 사건들이 기록에 남지 않은 이유는 모두 녀석의 진학과 학교의 명예, 그리고...... 그 놈의 사악한 내숭 때문이었으리라. 녀석을 나와 비슷한 기질의 인간으로 따지면 확실히 예측할 수 있다, 그 놈이 어떤 마수를 썼을지.... 경진이의 조금 과장된 말에 따르면 녀석이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그 폭력사건으로 상대는 갈비뼈 4대가 나갔지만 권형이는 증거불충분으로 징계조차 먹지 않았다고 하니, 역시나..... 또 한 번 핏줄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주 가증스러운 녀석이로군. 엑기스는 쏙 빼고 껍데기만 준 거잖아. 거 참..... 기가 막힌 놈일세. 그 자식 혹시 이무기 아냐? 나를 그렇게까지 완벽하게 속아 넘기다니 말야..... 기가 막혀라... “야, 그만 가봐라. 나 머리 아프다.” 머리 속을 해집어대는 복잡한 이야기들로 안쓰던 머리를 풀가동하니 두통이 도진다. 아아..... 언제나 맘 편히 사는 거냐, 나는? “어? 선생님 이거 반칙이에요.” 어서 사라지라는 듯 손을 설래설래 흔드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따지 듯 물어오는 경진이의 얼굴을 노려보며 대꾸했다. “뭐가?” “전 아직 안 물어봤어요.” 다른 때는 떠다밀어도 꿈쩍하지도 않는 머리, 이럴 때만 열라 굴러가지? 그 머리로 부디 공부를 해라, 공부를!! 누가 너더러 전교 1등 하래? 그냥 보통 아이들만큼만, 아니 최소한 대학 특차로 입학할 때 무리 없을 만큼만 하라고 했잖아!! 시험 때마다 사다리 그리는 니 답안 보기 기분 좋은 줄 아냐? 매일 주관식 답안에다 「I`m hungry.」따위나 끄적대지 말란 말이다!! “묻고 싶은 게 뭐냐?” “서윤진하고 왜 헤어진 거에요?” 가슴을 따끔하게 울리는 말 한 마디에 한숨이 새어나갔다. 나, 너 끼고 사는 거 포기할란다. 진짜 돼지 새끼가 왜 그렇게 알고 싶은 것도 많고 눈치가 빨라? 이건 돼지를 가장한 이무기다, 이무기! “서로 오해가 있었어. 그리고 그 녀석이 바람을 너무 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깨졌다.” “무슨 오핸데요?” “서로가 잘 알지 못했으니까...... 감정을 제대로 읽지 못했어.” “선생님 아직도 서윤진 사랑하죠?” 라는 말에 머리 안에 있던 혼란들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풀가동하던 엔진이 뚝 하니 멈춰 선다. 이 녀석...... “그런 거 같냐?” “선생님 말하는데 후회하는 게 보여서요. 더럽게 깨져서 징글맞다는 게 아니라, 서로가 이해를 못해서 깨졌다.... 라는 건 이제는 이해를 하니까 하는 말이잖아요? 이해하지 못했다면 오해라는 말을 하지 않아요.” “너, 농구 선수로 밥 벌어먹기 힘들면 미아리 가서 돗자리나 펴라.” 한숨을 내쉬며 다시 담배를 찾아들고 불을 붙였다. 나, 진짜 너같이 눈치 빠른 녀석 너무 싫다. “그것도 좋은 거 같네요. 쉽세요, 저도 가서 잘래요.“ “그래, 가라.“ 손사래를 치며 나가길 기다리자 천천히 문 쪽으로 가던 녀석이 돌아서서 나를 쳐다본다. “그래도요, 선생님...... 사랑 받았다는 건 진짜 기쁘죠?“ “...... 그런거 같다.“ 길게 한숨을 쉬며 돼지에게 답해주자 피식 웃은 녀석이 천천히 문을 열고 방을 나간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침대에 널부러져 눈을 감았다. 그래 사랑받지 못하고 깨지느니 사랑하다 깨지는 게 낫지. 그래서 아직도 기억이 나는거지....... ▷ track 06. Smooth played by Santana 합숙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자 합숙소에서는 아주 생뚱한 제의를 해왔다. 다름 아닌 목욕탕 단체 기행..... 이란다. 세상에 다 큰 사내녀석들을 끌고 목욕탕을 가라고? 막말로 저 놈들이 덩치나 작아? 으악, 저 덩치들이 목욕탕 안에 꽉 찰 껄 생각하니 눈앞에 깝깝해졌다. 거기다 고문교사 반드시 대동? 웃기고 자빠졌다 육값을 떠시네. 하, 참 내가 이 나이에 어린놈들 데리고 목욕탕 같은 델 가야 돼? 뭐 막말로 내 몸매가 빠지거나, 몸 안에 문신이 있거나 거시기가 심히 작아서 쪽팔린다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 나쁘단 말이다!!! 대중 목욕탕에 가면 다들 한 번씩 위아래로 훑어보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데? 그래도 고등학교 때 이후로 여탕 들어가라는 말은 안들어 봤지만 기분 더럽다구. 꼭 여자가 남탕에 들어온 듯 눈 휘둥그래 뜨고 쫘악 훑어대는데 열 안받게 생겼어, 내가? “선생님, 목간 가요~” 라고 살며시 다가와 엉겨붙는 돼지를 은근히 뒷굽으로 발을 밟아주자 조금 기분이 시원해진 기분이었다. 목욕탕에서 타올이고 뭐고 다 사면 되니 속옷 하나만 딸랑 챙겨 주머니에 쑤셔넣고 이 한 여름에 노랑 트레이닝바지에 하얀 반팔 T셔츠 하나만 겹치고 모자만 하나 눌러쓴 채 그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목욕탕으로 향해갔다.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시간이 돌아왔다. 어쩌다 보니 우리 학교 녀석들에 옆 학교 녀석들까지 부록으로 따라오게 됐는 줄은 모르겠지만 - 사실은 부록이 아니라 같이 온 거였다. 학교간의 돈독한 상호관계를 위한 목욕 재개라나, 뭐라나? 지랄들은. - 하여간 그쪽 고문과 함께 서서 계산을 치루는데 이 고문...... 묘하게 작은 게 여리여리하게 생겼다. 예쁘장한 게 말이야....... 이런 데서는 위험하지 않나? 나야 내 성질 다 알고, 내 힘 다 뽀롱냈으니 문제없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기사님♡ - 아, 씨발! 나 진짜 상태 나빠지고 있는 거 같아..... - 이 계시니까. 뭐 그다지 반갑지도 않게 생긴, 결코 환영해 주고 싶지 않은 왠수들이지만..... “자, 들어가자. 가서 말썽 부리면 늬들 다 빨가벗겨서 바깥으로 내보낼 꺼야!” 라고 엄포하고 돌아서자 우리 학교 녀석들은 그게 진심인 걸 알기 때문에 사색이 되었지만 간 큰 옆 학교 놈들은 킥킥거리며 하나 두고보자는 투다. 니네 단체로 우리 학교로 전학 올 생각 없냐? 오면 열심히 패주고, 뒤지게 갈궈 주고 피 흘리며 후회할 정도로 말듣게 해줄텐데..... 아깝단 말야. 아, 난 역시 교사 체질이었어! 이것이야말로 신이 내린 나의 사명..... 후훗..... 젠장, 아직 미치고 싶진 않은데 권형이 놈한테 충격 먹은 게 아직도 계속돼나 봐. 나 진짜 미치는 거 아냐, 이러다? 끼익--- 거리는 문을 열고 다들 안으로 들어서자 텅 빈 목욕탕이 보였다. 아, 단체 손님 때문에 비운 건가 보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인원을 눈으로 대강 확인한 후 알아서 사물함 찾으라는 지시를 하고는 아무 거나 열어재끼고 옷을 벗었다. 먼저 모자, 다음에 T셔츠, 그리고 바지......... “안돼요!!!” ........ 를 벗으려 하는데 혜성과 같이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선 녀석이 있었으니, 그 녀석이 바로 강태민이라는 놈이었다. “왜?” “앗, 어디서 함부로 바지를 내려요?” 허어? 이 새끼 보게? 무슨 바람 난 마누라가 엄한 남자 앞에서 옷 벗는 거 보는 것도 아니고 뭐 저렇게 오버를 한 대? 사내자식이 사내자식들 앞에서 벗는데 뭐가? 너는 옷 다 입고 목욕하냐? 아니면 펜티만 입고 목욕하냐? “뭔 신소리야? 날씨가 너무 더워서 더위 먹었냐?” 이미 상반신은 다 벗은 상태라 진짜 바지를 끌어내리려는데 또 하나의 별똥별과 혜성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를 가리며 에워싸는 세 녀석..... 강태민, 정경진, 유권형...... 얘네가 지금 뭐 하는 거야? 심심해? 한 대 패줄까? “너네 뭐하냐?” 인상을 팍싹 찡그리고 묻자 나를 완전히 가리고 선 세 놈이 작게 대꾸한다. “입 닥치고 옷이나 빨리 벗어요.” “헤? 벗지 말라며? 무슨 변덕이 죽 끓듯 하냐? 사내자식들이.....” “빨리 벗고 수건으로 아래 싸요!! 남자들 앞에서 옷 다 벗고 싸돌아 다니고 싶어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태민이의 목소리에 기가 막혀 손을 뻗어 그 귀를 잡아당겼다. “너, 뭐라는 거냐? 내가 발가벗고 나체쇼를 하든, 부채춤을 추든, 남자들 앞에서 싸돌아 다니든 니가 뭔 상관이냐구? 강태민! 내가 여잔 줄 알아?” “선생님 여자보다 더 심해요. 그러다 저 안에서 눈치 챌 새도 없이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우리학교 애들뿐이면 괜찮아도 남의 학교 애들도 있잖아요!!” “하아~ 새끼야, 누가 날 건들여? 나 니네 같이 다리털 나고 - 아, 이건 아닌가 보다 - 아래 달릴 꺼 달리고, 위에 없을 거 없고, 턱에 수염도 나는 남자야!!” “선생님 각선미 죽인단 말이에요!! 엉덩이 선이랑 허리 라인도 죽이고!! 순진한 청소년 마음에 불지르지 말아요.” “이 새끼가 전부터, 내가 무슨 방화범인 줄 아나?” 태민이 놈과 생각나는 바가 있어 꽥꽥거리며 만담을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잘 울리는 목욕탕 안쪽이 쩌렁쩌렁 울렸고 잠시 후 권형이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돌아서더니 옷도 다 입고 있는 상태로 나를 내려다본다. “왜?” “빨리 해! 아니면 내가 억지로 벗겨서 싸 줘?” “너, 어디서 반말을 찍찍 싸대?” 열 받아서 위를 노려보며 소리치자 피식 웃음을 흘리고 다가온다. 그리고 진짜...... 바지를 끌어내리려고 한다. “으악!!! 성희롱이야, 성희롱!! 너희 고소할 꺼야!!” “얌전히 좀 굴어!! 자꾸 까불면 깝질 채로 먹어버린다.” 물론 뒷말은 조용하게 내 귀에만 닿도록 나온 말이지만 그 도발적인 언어와 소름 끼치게 차가운 음성에 그 상태로 멈춰 기계적으로 아랫도리를 훌훌 벗어 던지고 건내는 커다란 수건으로 허리를 감고 하체를 가렸다. 나쁜 자식...... 지독한 자식...... 앗, 젠장 이 수건 크게도 열라 큰데 가슴부터 가려서 아예 여자처럼 해버릴까 보다. 아, 열 받아.......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쫙쫙 잡아당기며 눈을 흘기자 내 상태를 확인한 놈들이 이젠 자기네 락커 앞으로 가 당당하게 벗어재끼기 시작한다. 씨발....... 그래 늬들 운동 선수고 갑빠 죽인다, 이거지? 그래, 나는 체모도 없고 선도 가늘다. 어쩔래? 근육은 암만 싸워도 제대로 붙지도 않고 피부는 아무리 태워도 분필 - 그러니까 하얀 분필 말야, 분홍색이나 파란색 말고, 내가 무슨 파충류도 아니고..... 아, 여기서 또 삐져나오는 교사의식. 나 의외로 교사가 천성인 거 같아 - 처럼 하얗다. 그래도 근육 있단 말이다, 니네 같은 마초 근육이 아니라 적당히 섹시하고 예쁜 근육들이라구! 괜히 열이 받아 저 머릴 걸려 있는 수건들 중 하나를 들어 머리에 푹 눌러쓰고 앞을 쳐다보자 옆 학교 녀석들이 신기한 걸 본 듯 나를 쳐다보고 있다. “씨발, 사내새끼 몸 처음 봐? 나한테 늬들한테 없는 거 달렸어? 어딜 쳐다봐? 그렇게 신기하면 니네 꺼나 감상해!” 빽하니 신경질을 내며 돌아서 보자 다 벗고 아래만 수건으로 감싼 문제의 녀석들이 보였다. 웁스....... 알고는 있었지만 저 근육 진짜 엄청나잖아. 그렇다고 진짜 보기 흉한 너덜거리는 소모적인 근육이 아니라, 정확히 뼈대에 가장 필요한 근육들을 적당히 붙여놓은 그 몸은 모델의 피사체를 완벽하게 재현해놓은 듯 한 그 몸매에 길이라니..... 동양인치고는 다들 다리도 쭉쭉하니 길다. 허 참........ 그 60여명의 사내 녀석들 사이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몸매들을 학을 떼고 바라보다 이쪽으로 돌아오는 시선에 놀라 눈을 돌리자 정면에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들의 거구에 비해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들어 더 말라버린 몸은 그나마 붙어있던 근육마저 지방으로 만들어 흡수했는지 뼈에다 근육 좀 바르고 가죽으로 치장해 놓은 이미지였다. 아, 역시 요즘 너무 얌전하게 살았나 봐. 그러니까 이렇게 근육이 줄지. 운동보다 패싸움이 근육에는 효율적인데..... “안들어 가세요?” “응! 가!!” 라고 욕탕 문을 열며 나를 부르는 태민이의 목소리에 머리에 썼던 수건을 이마에 매고 머리카락에 감싼 후 녀석들을 따라 욕탕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눈앞에 보인 풍경에 감탄사가 쏟아졌다. “우와!!!!” 장정 60명이 뭐냐? 100명이 와도 남을 것 같은 엄청난 넓이에 6개의 탕, 그리고 싸우나실 3개에 수십 개의 샤워 시설까지....... 여기 단체 손님용 목욕탕인가? “좋다!!” 라고 철모르고 날뛰는 경진이는 샤워를 할 생각도 안하고 탕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녀석이 뛰어들자 어김없이 밖으로 출렁거리며 넘쳐흐르는 물........ 아, 그래 너 졸라 존재감 있어 좋겠다. 정경진, 어딜 가든 부피로도, 무게로도, 길이로도 절대로 널 잊을 수 없게 해주는 구나. “선생님!! 되게 뜨거워요!!!” 라고 지랄을 하는 모습에 피식 웃고는 샤워기 앞으로 가 머리를 풀고 아래를 풀려고 하자 다가와 뒤를 감싸는 체온이 느껴졌다. “왜?” “수건 내리지 말고 샤워해.” “넌 샤워할 때 수건 두르고 하냐?” “난 아니지만 넌 해야지. 넌 위험하거든..... 알았지?” 라며 여자라면 가도 몇 번은 뻑 갔을 섹시한 음성으로 속삭이다 귓볼과 뺨을 살짝 물고 핥아온다. 야,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너 섹시한 거 인정하고 테크닉 죽이는 것도 알겠다만, 너 잘못 찍었다. 나 흥분 안해, 임마. 나 임포라고 내 입으로 말해야 알겠냐? 몇 번 해봤으면 대강 눈치 깠을 꺼 아냐? “관둬라, 유권형. 비위 틀린다.” 라는 내 경고도 무시한 채 목가를 혀를 핥던 녀석이 갑자기 목을 이빨로 물어뜯는다. “아파!! 너 미쳤어!!” “아니, 그거 내리면 엉덩이에 이빨 자국 만들어 줄 줄 알아.” “너, 너..... 너너너너...... 너......” 너무 놀라 버벅거리는 사이, 안에서는 잔뜩 얼어붙은 몇 개의 눈동자들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우리 학교뿐만 아니라 남의 학교 애들한테까지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선생님 권형형 말 들어요. 지금도 아슬아슬한데 더 부채질하지 말라구요. 그러다 진짜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라고 태연하게 내뱉으며 머리에 수건을 매고 룰루루~ 노래까지 부르며 어깨에 물을 껴얹는 모습에 기가 차왔다. 니가 무슨 선녀라도 되는 줄 아냐? 그 고운 자태 - 씨발. - 는 뭐냔 말이다! 대체가 말이지, 아무리 살 섞으면서 - 아, 그러니까 가벼운 스킨쉽을 말하는 거다. - 느는 게 사내녀석들의 우정을 빙자한 애정(원래 남성 중심 사회의 저반은 동성애를 기본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여성학 교수에게 들은 말이니 정확한 통신이다. 이건 내 괘변이 아니란 말이다. )이라지만 이 무슨 해괴한 단합회냔 말이냐!!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나누는 육체의 커뮤니케이션이라닛!! 씨발, 이러면서 동성결혼 반대 및, 동성간의 연애 반대 운동 같은 걸 펼친단 말이냐? 가증스럽다 못해 위선적인 것들....... 사실 호모 포비아의 대부분은 호모 퍼그들이라구!!(의심 가면 아메리칸 뷰티를 보라!) 열혈 골수 스트레이트가 실상 얼마나 되는 줄 아냐? 그것들은 정신병원 가보면 볼 수 있다. 그리스의 현자 소크라테스 왈, 남녀의 사랑은 에로스적인 것으로 더러운 육체의 결합이며 남남의 사랑은 로고스 적인 것으로 둘의 사랑은 지(知)를 낳는다고 했다. 아, 물론 이 부분에서 여성학 교수들 대부분은 피를 토한다. 남학생들 여성학 들어가서 이 부분이 나올 때 주의하라. 재수 없으면 괜히 표적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나는 그 부분에서 애를 못낳으니 지(地)라도 낳는다고 정당화 해야하지 않냐고 답했다가 교수랑 두 시간 내내 입싸움만 한 적도 있다. 훗, 그리고 좋은 예로 아르키메데스의 법칙도 목욕탕에서 발견된 걸 보면 그 새끼 취미도 알만하잖아. 그 자식들은 모두 호모가 분명해. 아, 말이 또 샜군. 하여간 그래서 난 허리에 수건을 두른 채 열심히 샤워기를 틀고 물을 맞았다. 아래로 걸리는 수건이 상당히 거슬리고 찝찝하긴 했지만 그 녀석이라면 이 안에서 진짜 덮치고도 남을 꺼라는 걸 알기에, 그 성격이 나를 닮았음을 알기에 피눈물을 흘릴 뿐이다. 저 놈이 내 동생이라면 진짜로 범하고도 남는다. 생각 같아서는 가서 해보라고 대들면서 깡을 부리고 싶지만 안된다. 저 인간을 상대로는....... “내 팔자야..... 내가 약 먹었지.”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한숨을 내쉬자 경진이가 파다닥 거리며 달려나오는데 온 욕탕이 쩌렁 쩌렁 울린다. 아아, 진짜 짜증 만땅이다. “선생님!! 등 밀어주세요!!” 라고 해실대며 바로 내 앞에 등을 대고 앉는데..... 아, 열라 광활해라. 너 등빨 죽인다. 니 이 광야 같은 등빨에 엎혀서 다리로 허리를 조여주고 싶다. 허리 뼈 부러질 때까지..... “임마!! 너, 내 배는 걸리겠다!!” “에이, 밀어주세요~” 라고 너스래를 떠는데 머리 위에 수건까지 감은 그 꼴이 귀여워서 결국 떼수건을 받아들고 등을 밀어주었다. 아아, 진짜...... 해도 해도 끝이 없구나. 어쩜 이렇게 넓니? 부럽다, 야. 농담 아니라 진짜 부럽다. 어디가서 부딪쳐도 날아가진 않을 거 아냐? 게다가 힘도 좋고....... “이번엔 제가 밀어드릴게요.” “응.” 모처럼 때나 밀까 해 돌아서 앉자 때수건을 끼고 선 녀석이 한참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뭐하냐? “안밀어?” “어? 근데요..... 선생님......” “왜?” “못밀겠어요.......” “뭐야? 너 장난하냐? 죽고싶어?” “아니, 그게..... 너무 작고 하얘서 피부 벗겨지거나 다치면 어떻게 해요? 으아, 이런 목으로 밥이 넘어가요? 선생님 이 안에 내장이 다 들어가요? 세상에...... 진짜 하얗다. 선생님 진짜 피죽도 못먹고 자랐나 봐요,”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잘도 떠들어대는 녀석의 목소리에 확하니 짜증이 일었다. 누가 너더러 내 몸매랑 피부 감상 얘기해 달래? 나 멀쩡하게 오장 다 들어있고 피부도 열라 두껍고 식도도 튼튼하다!! “죽고 싶냐, 정경진?” “아뇨..... 우와 진짜 하얗다. 진짜 예쁘다. 옷 입었을 때도 예쁜 몸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선생님 진짜 몸 예쁘네요. 체모도 없고...... 우와!! 진짜 허리 라인도 들어갔다. 우와 골반도 너무 예쁘고 등선이 진짜 고와요!!” 라고 확성기를 입에 댄 듯 피를 토하며 떠벌리는 녀석의 덕분에 안에 들어와 있던 60여명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로 날아왔다. 그리고 마치 찬찬히 감상을 하듯 뜯어보고 곧 입을 헤에 벌린 채 바라본다. 씹새들아!! 구경할 꺼면 돈내고 하란 말이다!! “아, 그만 쳐다 봐!! 닳아, 씨발!! 내가 동물원 원숭이냐?” 신경질을 버럭 버럭 내며 소리를 지르는데 물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자꾸 얼굴로 쓸려 내려온다. 그리고 이마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이 귀찮아져 손가락으로 떼어내자 아예 넋을 빼고 돌아본다. 아, 예쁜 사람 처음 봤어? 물론 나 같은 미모가 흔한 건 아니란 건 알지만 자꾸 쳐다보면 벨 틀리잖아! “시선 돌려! 돈 내고 쳐다봐!! 그리고 넌 빨리 등 밀어!!” 라고 윽박질러도 가만히 서있기만 한다. 이게 사람 인내심 테스트 하나? “정경진 뭐해?” “너무 예뻐서 못하겠어요. 이런 몸에 때를 민다는 건 범죄에요, 선생님. 진짜 가늘다..... 우와, 아까도 보고 놀랐는데 진짜 예쁘네요. 너무 예뻐요. 얼굴만 예쁜 줄 알았는데... 진짜 부럽다!! 우와, 어떻게 이런 얼굴에 이런 몸이 돼요? 이건 진짜 사기야, 사기!! 목이 한 손에 들어와요!!” 라고 몸을 여기 저기 찌르고 만지고 쓰다듬더니 마침내 내 목까지 손으로 쥐어본다. 임마, 내가 인형이냐? 누가 너더러 내 몸 만지래? “지랄 깐다. 남자 몸이 다 거기서 거지지!!” 라고 휙하니 돌아 녀석의 목을 쳐다보자..... 아, 저건 다르다. 내 손에 안 들어오겠구나. “허리도 한 팔에 감기지 않아요? 안아볼래!!” 라더니 옆으로 와 진짜 허리에 팔을 감는다. 이게 지금 나랑 뭐하자는 거야? 때밀라니까, 때!! “정경진, 돼지야.... 빨리 때나 밀어!” “진짜 감긴다, 감겨!! 우와!! 진짜 예쁘다. 나 이렇게 마른 사람들 다 비린내나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 진짜 복 받으신 거에요!!” 라며 흘러내리는 머릿수건을 한 번 정돈하고 옆으로 돌아간다. “내 몸 예쁜 거 이제 알았냐? 제발 때 좀 밀어라!! 응?” 씨발, 다른 새끼가 여기 저기 건들였다면 탕에 빠트려 질식사라도 시켰을 텐데 이 놈이라 뭐라 하지도 못하고..... “선생님 나중에 할 일 없으면 피부 모델이나 다리 모델해도 되겠네요. 어떻게 다리가 가늘어요? 다들 이 정도는 되는데!” 라고 자신 있게 내 앞으로 다리를 들이민 모습에 구역질이 나는 줄 알았다. 임마, 그 족(足) 치웟!! 그래도 여기 있는 놈들 중 제일 길고 곧은, 예쁜 다리지만..... 무섭단 말이다!! 내 허벅지만한 게!! “임마, 그래 니 다리도 예쁘다. 빨리 치우고 때나 밀엇!” “우와, 팔목도 봐!!” 라면서 이번엔 내 팔을 들어올리더니 휘휘 저으며 자기 팔 옆에 갖다 댄다. 얘, 왜 이래, 진짜!! “이런 팔로 어떻게 그렇게 힘이 세요? 선생님 여자 팔찌도 맞죠?” “그래, 다 맞는다! 그래, 나 팔 다리 가늘고 체모도 적고 몸매는 슈퍼 모델에 얼굴은 미스 유니버스다!! 됐지? 때 밀엇!” “아, 공주병!” “이게!! 죽고 싶어!!?” 더 이상은 찾을 수 없다!! 저게 지금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개망신 주더니 뭐하는 짓이야!? 옆에 놓인 작은 바구니를 들고 내려 치려하자 휙하니 돌더니 다다다 - 가 아니라 사실은 타일이 미끄러워서 슬로우 모션으로... - 달려 빠져나간다. “너 죽었어!!” 손에 든 바구니를 당장에 집어던질 기세로 달려 그 녀석이 도망친 한증막 쪽으로 막 달려가는데 누군가의 손이 허리를 잡아챘다. 그리고 순식간에 나를 밀어 탕 속에 집어던지고...... “푸핫!! 누구야!!? 어떤 씹새야!” 라고 물 속에서 겨우 빠져나와 위를 쳐다보자 권형이가 한심하다는 듯 바로 앞에 서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유권형!!!” “선생님, 흥분 좀 식히시죠?” 라고 예의 바르게 말은 하는데.... 눈은 장난 아니게 살벌하다. 그러게 누가 목욕탕 같은 데를 끌고 오래? “아, 젠장!! 난 니네랑 목욕 안해!! 아니, 못해!!!” “그럼 하지말고 나가시죠? 샤워는 했으니 빨리 나가서 옷․입․어․요!” 유난히 옷을 강조하는 녀석의 말에 물 속에 입술까지만 담근 채 노려보자 다가와 강제로 날 끌어낸다. 아, 진짜 내가 무슨 인형이나 되는 줄 알아? 왜 자꾸 만지고 더듬고 난리들이야? “자, 빨리 가서 옷 입어요.” 라며 방긋 웃더니 날 탕 밖으로 밀어낸 녀석이 엉덩이를 톡톡 두들긴다. 하..... 나 아직 사우나도 못 들어갔단 말야!! 내가 온 목적이 뭔데? “야, 나 사우나......” 다시 문을 밀고 소리치자 바로 앞에 선 권형이가 날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생글거리며 웃는다. 아, 그래 저 표정!! 너 내 동생 맞다니까! “말 들어, 응? 사우나 안에서 당해볼래?” “...... 아니.......” 이 녀석이라면 진짜 할 것 같다는 생각에 얌전히 문을 닫고 나와 수건을 들어 몸을 닦았다. 아, 찝찝해...... 하다 말았더니 기분 더럽네. 그리고 유권형, 너.... 어디 두고 보자!! 내가 완전히 니 꺼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니가 정확히 알아야 할 껀 내가 니 꺼가 아니라 니가 내 꺼라는 거다!! 막말로 그 안에서 나만 위험해? 너도 충분히 위험의 소지가.... 있지 않군. 저 놈을 누가 건들여? 얘기 들어보니 성질 장난 아니던데..... 그러고 보니 저 자식, 싸움은 못하지 않나? 분명히 싸움을 많이 해본 솜씨는 아닌데..... “흐음.....” 머리를 털어 말리고 케비넷을 열어 옷을 주섬주섬 꿰어 입었다. 그리고 음료수 하나를 사 들고 큰 마루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진지한 질문에 빠져들었다. 저 녀석이..... 대체 어떤 놈일까..... 정상이 아닌 건 확실한데 아직도 읽히지가 않는단 말야. 내가 보기엔 이중 인격 정도가 아니라, 완전 분열증 수준인데.... 말이지. 아, 한 놈은 정신 분열증에 한 놈은 과대망상 피해망상, 반사회적 정신상태를 갖고 있으면 퍽이나 멋진 커플이겠다. 망할.... 한참 음료수를 마시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누군가 등을 툭툭 두들긴다. “왜?” 학교 녀석인가 해서 돌아보자 어느 새 나온 권형이가 옷까지 대강 걸치고 나를 쳐다본다. 그 눈은 평소의 자상하고 부드러운 것이라 무의식 적으로 나도 부드럽게 응시했다. “피곤하면 잠깐 주무세요.” “어? 글세......” 하아...... 진짜 적응 안돼네, 이거..... “저 쪽에 수면실 있어요.” “응, 그래....” 라고 얼껼에 그 녀석의 손에 끌려 안쪽의 뜨끈뜨끈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 여기 설비 좋군.... 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방에 막 누우려던 찰라였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에 돌아보자 수면실 문을 조용히 닫고 문을 잠그는 데 눈에 들어왔다. 하하..... 얘, 또 왜 이래!? “쉬자구요.....” “응, 쉬어.” 라고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자 내 옆으로 와 앉은 녀석이 피식 웃으며 입을 맞춰온다. 아, 잘자라는 키스인가 보다..... 라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게..... 잘자라는 키스는 아닌가보다. 점점 안으로 파고들어 깊게 입을 맞추며 혀를 겹쳐오는 반응에 까짓 꺼.... 라며 부드럽게 어루며 응해주었다. 나도 테크닉은 남 못지 않은 인간이니까! 아무 거부감 없이 계속된 키스에 문제가 생긴 건 바로 몇 초 뒤였다.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듯 엉망으로 엉켜들던 혀가 이번에는 아예 뿌리째 집어삼킬 듯 세게 입안으로 들어와 해집고 다닌다. “우욱!!” 그 고통과 얼얼한 감각에 놀라 밀어 내려하자 밀려지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바닥으로 쓰러드리며 위로 타고 올라온다. 이 자식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너..... 설마..... 아무리 세게 밀어 내려해도 꿈쩍도 안하는 몸을 어떻게든 해야할 것 같아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봤지만 이 자식 열라 힘 세다. “자, 잠깐!! 탐모!!” 필사적으로 입술을 떼어낸 후 숨도 돌리지 않고 겨우 소리쳤지만 멈추기는 개뿔!! 이제는 아예 편한 츄리닝 바지를 끌어내리며 몸을 겹쳐오는데 하반신에 닿는 느낌에 섬뜩해질 정도였다. 으악!! 아무리 그래도 츄리닝 바지 같은 거 입고 오는 게 아니었어!! 이렇게 쉽게 벗겨질 줄이야!! “야, 잠깐!!” “안돼! 벌써 시작됐다구!” 라며 짖꿎게 웃으며 순식간에 나의 파란 땡땡이 무늬의 사각 팬티까지 벗겨버린 녀석이 다리 사이로 파고들며 자기 바지를 끌어내린다. 얘, 미쳤어, 미쳤어!!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한단 말야!! “아무도 안들어 와.” 그걸 니가 어떻게 알아? ....... 라는 말은 차마 입으로 나가지 않게 짙게 시작된 애무와 키스에 다시 혼절할 정도로 정신을 잃었다. 이건 흥분해서가 아니라 너무 놀라서 그런 거얏!! 농도 깊은 패팅과 함께 스르륵 엉덩이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에 히껍했다가.....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라고 체념하려 했지만 이건 지금 그 문제가 아니라구!! 정신 좀 차려, 장인하!! 자신의 우매함과 단순함을 통탄하며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 했지만 한 번 시작한 이상 끝장을 보겠다는 녀석이 의지가 바로 눈빛에 드러남에 따라 이해했다. 아하!! 이 녀석 지금 이중 인격이지! 라면서 명쾌하게.... 역시 난 눈치가 빨라! 후훗, 지금 눈치 빠르고 느리고가 문제가 아니라구!! 점점 패닉 상태에 접어드는 내게 녀석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으아..... 너무 간만이라 제대로 안될지도.... 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 건 일단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건데...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해도 이미 일은 시작된 거고 반쯤정신이 나간 듯 밀어닥치는 놈을 내칠 방법은 없었다. “너..... 윽... 이러다 누가 들어오면.......” “안들어온다니까......” 완전 쉰 목소리로 열심히 움직여대는 목소리를 듣고 아, 문 잠갔구나... 라는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여기 공공장소란 말이다! 아무리 나도 막 나가는 인생이라지만 공공의 적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구. 이거 경범죄야, 경범죄! 하지만..... 아무리 머릿속으로 온갖 법들과 윤리론을 정리해봐도 결국은 당한 건 당한 거였다. 아, 어린놈 사귀기 힘드네, 진짜. 한참만에야 겨우 떨어진 녀석을 밀쳐내고 안에 싸질러진 정액을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고민을 하는데 녀석이 어느새 준비해온 수건으로 아래를 정성껏 닦아준다. 훗, 이 자식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병 주고 약 주고 다 하는군. “유권형아......” “네?” 우웃!! 저 빛나는 피부와 초롱초롱한 눈빛!! 제대로 살아 순쉬는 거 같은 그 밝고 맑은, 마치 천상의 인간을 보는 듯한 눈부심이 눈을 껌뻑 껌뻑거리다 겨우 정신을 다듬었다. “너, 솔직히 말해라...... 너 원래 성격 이상해?” “이상한 건 아니죠. 사회에 적응을 잘하는 거에요.” “너..... 싸움 못하지?” “싸움은 못해요. 누가 싸움 같은 거에 목숨 걸어요? 덤비면 주변에 있는 거 모조리 집어던지고 시간 두지 않고 패버리니까 져본 적은 거의 없지만..... 그래서 전 싸움은 실내에서만 해요. 실외에서는 약하거든요.” 으헉...... “그럼 너 섹스는? 경험 있어? 없어? 솔직히 까라.” “여자랑은 자 본 적 많지만..... 키스는 서툴죠? 열심히 노력해 볼게요. 키스는 잘 안해요. 립스틱 때문에...... 그리고 기분 나빠서요, 다른 사람 내장기관하고 닿는다는 게 그렇잖아요. 어차피 섹스만 하는 건데......” “...... 그럼..... 나는?” “당신은 예쁘니까♡” 라면서 아이에게 하 듯 뺨에 입을 맞춘다. 아, 그래 물론 내가 좀 예쁘기는 하지. 그렇지만...... 이 녀석 테크닉이라곤 전혀 없는 본능적인 놈이라고, 그래서 순진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내가 한심해질 따름이다. 나, 진짜 저능아 아냐? 어떻게 못알아볼 수가 있지? 그것도 나랑 같은 과의 인간을..... “아, 해골 복잡해. 그만 생각할래.....” “그래요. 언제부터 생각하고 살았다구요.” 라면서 나를 일으켜 엉덩이를 툭툭 두들기며 문을 여는 모습에 재수 없어.... 를 남발하고 먼저 나간 녀석의 뒤를 따라 스르륵 문을 열고 나섰다. 그리고 그 순간 보고 말았다. 뭔가 무서운 걸 본 듯, 아니 들은 듯 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 120여 개의 눈깔들을...... “유권형!!! 개새끼!!!” ▷ track 07. 미래소년 코난 혼자 씩씩거리며 숙소로 돌아와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꾸리면서도 그 놈의 얄미운 면상이 떠올라 분이 식지를 않았다. 세하랑 상원이는 일 때문에 결국 먼저 돌아갔고 혼자서 버스 타고 가야하는데..... 아, 짜증만땅이다!! 망할 놈의 유권형, 사람을 물 먹여도 정도가 있지!! 그 방을 나서는 순간 방긋 웃던 그 미소는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꺼다. 세상에..... 공공장소에서 학생이랑 선생이, 그것도 남자 두 놈이 탕에서는 쇼를 하고 수면실에서 막간을 이용한 섹스타임♡이라니!!! 다음 날도 버스에 타면서도 열 받아 노려보는 나는 완전히 무시한 채 혼자 느긋하게 차에 올라타서는 당당하게 내 옆자리에 앉아 쳐자는 꼴을 보자 속이 몇 배로 뒤집혔지만 당장엔 어쩔 수가 없어서 애꿎은 이빨만 으드득 갈아댔다. 혼내고 화도 내고 짜증도 내야 하는데..... 내가 아직 이 놈의 이중인격에 적응이 안돼서 말이지. 아, 짜증나, 진짜. 한참을 이를 갈고 있는데 한꺼번에 벗어나고 있던 버스들이 각자 다른 길로 흩어지기 전에 멈춰선 곳은 바다였다. 합숙 후의 여흥 같은 거였는지 바다에서 즐기고 가라는 거였는데.... 이 날씨에 바글거리는 인간들이 있는 해수욕장이라니!! 생각보다 사람이 많지 않은 게 유명한 해수욕장은 아닌 듯 했지만..... 그래도 여름이다 보니 인간들이 좀 밟히기는 하는군. 젠장.... 바다는 질색인데. 내가 말이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싫어하는 게 있는데 그게 물이거든..... 그게..... 물이 무섭잖아. 수영은 할 줄 알지만 절대 물 안에는 안들어 가지. 뭐, 재난 대비니 어쩌니 해도 사실 사람이 물에 빠지는 일이 흔한 것도 아니고.... 막말로 물에 빠지만 까짓 꺼 바닥까지 제대로 빠지는 거야. 비행기나 배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 깊은 곳은 아닐 꺼 아냐? 그럼 몸을 쭉 피고 중심만 잡으면 바닥일 꺼고 살짝 눈을 떠서 육지를 확인하고 당당히 물살을 헤치고 걸어가는 거야. 그럼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살 수 있잖아. 사람들이 물에 빠지면 당황해서 허우적대도 더 깊은 곳으로 가는 거라구. 내 독기라면 바다 정도는 일도 아니지..... 훗.... 사람이 살려고 하면 어디서 못살겠어. “자, 여기서 잠시 쉬어간다! 다들 제대로 놀고...... 씻는 건 저기 간이 샤워실에서 해라.” 간단하게 말하고 그 쪽 샤워장 쪽에 요금을 지불한 후 터억하니 파라솔에 앉아 음료수를 시켰다. 망할.... 햇빛도, 바다도 질색인데.... “츳, 역시 따라오는 게 아니었다니까......” 낮게 혀를 차고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데 저 멀리서 태민이 놈이 다다다 달려온다. 뭐, 사실 모래사장이다 보니 슬로우 모션으로 퍼억- 퍼억- 퍼억- 이었지만..... “선생님은 안 들어가요?” 라면서 팔을 잡아끄는데...... 훗, 니가 은근슬쩍 다가오는데..... “손놔라.... 1m 접근금지령 아직 진행중이다. 그리고 나 바다는 질색이야.” 손을 살짝 털어 내며 말하자 표정이 약간 굳어졌다 꼬리 내리고 사라진다. 하하.... 또 심장에 칼날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착해졌지? 옛날에 죽어라 쫓아다니던 놈들한테 죽으라고 예쁘게 웃어주던 나의 기지는..... 나의 그 고고함은 어디 가고.... 우욱..... 이번엔 도끼가.....! 약간 미안한 마음에 셔츠 안에서 썬그라스를 끼고 우리 학생들 쪽을 보자 트레이너에 코치까지 합류해서 아주 난리다, 나리! 저렇게 좋아하는 거 안들렸다 갔으면 내 사물함에 면도칼 들어가 있을 뻔 했다. 뭐, 그렇다면 지문 검색해서라도 그 놈 잡아냈겠지만. 멍하니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태민이와 경진이, 그리고 지혁이에다 주장까지 보여 뭔가를 씨부렁거린다. 뭐냐..... 또... 사고치려고? 불길한 예감에 썬그라스를 살짝 내리고 그 쪽을 바라보자 나를 힐끔 힐끔 바라보는 게 심상치 않아. 설마..... 겠지.... 하하, 지들이 양심이 있고 생각이 있으면 그런 생각은 안하겠지..... 라고 생각하는데 권형이가 터벅 터벅 다가온다. 뭐냐..... 또 시비 걸려고 오냐? “왜?” 바로 앞에서 있는 놈을 올려다 보자니 목 빠진다. 씨발.... 존심 상해. 나도 서서 볼래! 벌떡 일어나 앞에 서서 빤히 바라보자 권형이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연다. “선생님한테 부탁드릴게 있어요.” “뭘?” “...... 저랑 잠깐만 가주세요.” “왜?” “....... 어제 일.... 미안했어요. 하지만 후회는 안해요.... 저 선생님 정말 좋아해요.” 라는 진지한 말에 너무 놀라서, 그리고 감동 받아서 - 그 김에 어제 사건까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 입술을 살짝 깨물고 뭐라고 하려는데 다시 진지한 얼굴로 권형이가 손을 뻗어왔다.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손의 느낌에 잠시 이걸 내쳐야 하나.... 사과를 받아들여야하나.... 망설이는데 이 놈이 대뜸 내 손목을 잡아왔다. 아이...... 사람들 많은데서 이러면 안되는데......... 공공장소에서 사건은 어제 하나로 끝내야지.... 아, 부끄러워라...... “그러니까..... 그건 용서해 주시구요.......” “아, 나 용서한단 말 안했어!!” “그럼 맘대로 해.” 뭐야, 이 자식이!!! 열 받아서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데 내 손목을 잡은 채 녀석이 신나게 달려가기 시작한다. 뭐야? 뭐..... 으아아악!!! 녀석이 그 뛰기 힘든 모래밭에서 내 손목을 잡고 달려간 곳은 바로...... 바다였다!! “잘했어, 형!!” 이라면서 갑자기 모여드는 것도 그 놈들!! “너희 뭐 하는 거야!!!!” 소리를 바락 바락 지르자 나머지 세 녀석까지 합세해 나를 번쩍 들더니 그대로 바다로 뛰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으아아악!!!!” 마침 파도가 가장 높이 올라왔을 때 거의 2m 가까이 되는 곳까지 나를 데려가 그대로 바다에 풍덩--!!! “읍!!!” 나를 감싼 바다..... 나........ 물 질색이란 말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눈으로 코로 입으로 사정없이 바닷물이 들어가고 눈이 따끔해져왔다. 그리고...... 내 핸드폰.... 씹새끼들..... 바지 뒷 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랑 지갑.... 그리고 담배...... 너흰..... 다 죽었어....... 오기로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수영 - 개헤엄 - 을 해서 겨우 겨우 바다를 피해, 토해내고 코를 풀자 이 놈들이 안 보인다. 멀리서 뜨악한 다른 놈들만이 지키고 있을 뿐..... 개새끼들.... 죽었어....... 따끔거리는 눈을 뜨고 겨우 보니 저 앞에서 신나게 달려가고 있는 것들이 보였다. 훗, 나를 물 먹이고 늬들은 신나게 튄다 이거지? 그러게는 못하지. 내가 괜히 장인하냐? 나나 받은 것에 수 백 배는 쳐서 되갚아준다.... 그러지 않으면 벨이 꼴려서 뒤질 것 같거든.... 찝찝한 옷을 손으로 틀어쥐어 짠 후 심호흡을 하고 가만히 그 놈들이 달려가고 있는 꼴을 바라보았다. 모래는..... 열외지만... 달리기는 꽤 잘하는 편이니까.... 그대로 달려가서... 후훗.... 다시 한 번 깊이 심호흡을 하고 열심히 그 놈들이 도망한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씨발..... 내가 코난이냐...... 헤엄쳐라! 거친 파도 헤치고!! 달려라! 땅을 힘껏 박차고!! 죽었어!!! 잡히면 그대로 물 속에 쳐박고 발로 밟아버릴 꺼야!!! 모래사장을 즐거운 듯 뛰어가는 녀석들을 보며 찝찝한 몸으로 열심히..... 눈에 핏발을 세우고 달려갔다. 절대로 가만 안둔다!! 가만 두면 애가 장인하가 아니라 유세경이다! 씹탱구리..... “니네 잡히면 죽었어!!!” 소리를 있는대로 지르며 열심히 달려가자 즐거운 듯 사방으로 흩어진다. 후훗, 그래 늬들이 수로 밀어붙인다 이거지? 한 놈이라도 잡히면.... 4인분이다!! 그렇게 맘을 먹자 화풀이할 상대를 찍기 위해 상황을 살폈다. 그래.... 돼지는.... 아팠고...... 지혁이 놈은 너무 멀리 갔고..... 권형이는.... 으음.... 괴롭히기 아까우니까..... 씨발, 편애한다, 어쩔래? 너다, 강태민!! 맞고 떨어져라! 상대가 결정되자 그대로 열심히 달려가 그 놈만 쫓기 시작했다. “으악!! 왜 나야? 선생님!!! 저기 경진이랑 권형이 형이랑 다 있단 말예요!! 왜 나에요?” “씹탱아! 니가 제일 가까워!” “으아악!!!!!” 물에 젖은 옷이 무겁고 짠물이 들어간 눈이 따갑고 저 멀리 떠있는 햇빛이 눈부셨지만..... 절대 포기할 수는 없지..... 흐흐흐흐흐흣! 열심히 다려가던 녀석이 뒤를 돌아보며 사색이 되는 꼴에 쾌재를 부르며 그대로 점점 사이를 좁혀가 마침내 거의 닿을 듯한 거리가 돼자 몸을 날려, 그러니까 진짜로 날려서 녀석의 등뒤로 타고 올라 그 목을 쥐고 흔들었다. “으악!!! 아파요!!!” “아프라고 하는 거다!! 이것들이 날 물을 먹여!! 어디 죽어봐라, 어린놈들이 감히!!!” “저만 한 게 아니잖아요!!” “몰라, 니가 재수 없게 걸린 거야!!” 라고 소리치며 그 등에 매달려 휘청거리는 녀석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그 목을 사정없이 조이며 난리를 치자 헉헉거리던 녀석이 마침내 바닥으로 쓰러졌다. “흠, 기분이 좀 낫군.....” 손을 가볍게 털며 일어서 명쾌한 기분으로 걸음을 돌려갔다. 그리고 저 멀리서 죽어라 웃고 있든 패거리들을 보자 가서 다들 쥐어박고 싶었지만.... 옷이 너무 찝찝해서 참는다. 너희 어디 다들 두고 보자. 방학 끝나도 보자구, 왠수들아!! ▷ track 08. I will follow him from Sister Act O.S.T 합숙이 끝나고 돌아온 집은 개판이었다. 뭐, 그렇다고 아주 돼지우리 같았다는 게 아니라, 먹을 것은 하나도 없고, 먼지는 쌓여있고, 우편함에 가득 쌓인 고지서들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안좋은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아, 젠장....... 이런 거 대신해주는 사람 좀 없나?” 어차피 자동이체로 신청해놨지만 생각을 해보라구. 난 돈에 집착이 강한 인간이라 일일이 그런 거 확인하는 것도 지친단 말야. 그리고 날씨도 너무 덥고, 손가락은 아프고..... 아이, 젠장!! 그래도 뭔가 먹어야겠기에 일어나 앉아 상가책자를 뒤졌지만 딱히 뭐가 생각나지 않아 무작정 지갑을 들고 근처의 마켓으로 향해갔다. 식사꺼리랑 맥주, 소주 - 이건 이번엔 페트병으로 - 치약이랑..... 등등의 일상용품을 사서 배달시키고는 천천히 걸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햇빛이 아스팔트를 태워버릴 듯 강하게 내리쬔다. 그래도 이상하게 습기가 없어 청명한 날씨라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올라탔다. 그래, 거기까지는 좋았다. 뭐, 기분이야 어떻든 그런 대로 나쁜 일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니네..... 죽고 싶냐?” “아니.” “아뇨.” 바로 내 집 앞, 그리고 눈앞에서 멱살을 쥐고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놈과 한 마리의 꼴에 기가 막혀 쳐다보자 아주 뻔뻔스런 얼굴로 잘도 답한다. “니네...... 지금 남의 집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이 자식이 여기 지키고 있었어요.” 주장이 윤진이를 가리키고 말하면서 잡고 있던 멱살을 놓고 돌아선다. 그리고 태민이, 그러니까 한 마리가 어느새 내 쪽으로 돌아서 쪼르르륵 달려오고. “그/러/니/까 왜 남/의/집/앞에서 지랄이냐구?” “기다렸어.” 라고 갑자기 앞으로 나서서 태민이를 밀어 재끼고 내 앞에 장미꽃다발을 내미는 것은 윤진이 놈이었다. “너, 나랑 장난하냐?” “그냥 주고 싶어서. 나 너한테 꽃 준 적 없었잖아. 지나가다 생각이 나서......” “내가 언제 너한테 꽃 달라고 했냐? 너, 집에 가라.” 일단 준 거니 꽃은 받아들고 사라지라고 말하자 윤진이 녀석의 어깨를 투욱 친 주장 놈이 앞으로 다가와 들고있던 꽃다발을 뺏어든다. “야!! 그거 내 꺼야!!” “이 딴 거 버려요! 왜 이렇게 늦게 와요?” “내가 늦던 말던.... 넌 왜 심술이야?” “내가 기다리고 있는데 늦으니까 심술이죠.” 라면서 인상을 찡그리는데..... 저 놈 어째 가면 갈수록 나랑 판박이냐? 저 말도 안되는 이론은 어디서 기어 나오는 거야? “골치야..... 니네 다 집에 가!” “얼굴 보러 온 거니까.... 오늘은 그만 갈게. 쉬어라.” 라면서 아주 당당하게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윤진이 녀석이 돌아서자 정신이 머엉~ 해진다. 저게....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나랑 자기가 끝난지가 언젠데 갑자기 나타나서 기다리겠다는 둥 어쩌겠다는 둥 멋대로 지껄이더니 이제는 지가 내 애인이라도 되는 줄 아나? 기가...... 막혀...... “선생님..... 바람 피는 거 안된다고 했죠?” 라면서 내 앞을 당당하게 가로막고 선 권형이 녀석의 세리프에 이번엔 이가 딱딱 갈린다. 이것들이 단체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이게 무슨 바람이야? 지 발로 찾아와서 꽃 주고 가는 거지, 내가 달라고 했냐?” “그거나 이거나!.” “그거랑 이게 어떻게 같아? 엄연히 틀려!! 으악, 열받앗!! 꺼져라, 유권형. 늬들 때문에 세상 살 맛 다 떨어진다!!” “누구더러 꺼지라는 거야? 대체 또 어딜 싸돌아 다니다 왔어요? 집안에 좀 박혀있으라고 했죠?” 라면서 빙긋 웃는데 눈에 살기가 어려있다. 하, 나 지랄할 때 친구들 마음 알겠다. 어쩌다 걸려도 걸려도 나랑 똑같은 놈이 걸려서는!!! 으악!! 진짜 여기서 뛰어내려 자살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임마, 장 보러 갔다!! 그럼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쳐박혀 혼자 배 곪고 있으랴?” “전화로 주문하지, 왜 싸다녀? 또 어디서 이상한 놈을 물려고?” 어쭈? 이게 아주 날 바람난 여편네 취급하는데? “임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물긴 뭘 물어? 내가 개새끼냐, 싸돌아 다니면서 물고 다니게?” “남자 잘 물잖아. 빨리 문이나 열어, 그리고 태민이 너 집에 가. 나 선생님이랑 할 얘기 있으니까.” “어? 왜 나는 가? 그냥 같이 얘기해. 선생님, 저 밥 좀 해주세요, 네?” 라면서 싱글거리면서 너스래를 떨어댄다. 왠지 지금에는 이 놈보다 한 마리 쪽이 더 나은 거 같다. 문제는 내 마음이 이놈에게 가있다는 것인데..... 너,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냐? 아니군, 이 놈이 초반부터 우리 반이었으니 시기는 빨랐지. 각성이 늦었을 뿐.... 아, 진짜 권형이 차고 너랑 사귀고 싶다, 강태민!! “가, 태민아.....” 라고 갑자기 분위기 잡고 목소리 까는 권형이의 얼굴에 열심히 엉겨 붙던 녀석이 주춤거리며 내 옆에서 떨어져 나간다. “....... 알았다, 뭐..... 그치만 나 선생님 포기는 안해요. 진짜 좋아하니까!! 그건 무시하면 안돼요!!” “무시하고는 싶은데 무시할 상황이냐? 하여간 가라...... 나중에 학교에서 보자.” “네, 그 전에 봐도 돼요. 또 놀러 올 거니까.” “그래..... 가봐라.” 방그래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고 엘리베이터로 가는 녀석을 보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장인하, 아직은 살만 한가 보다. 좋다는 녀석들 있으니...... “집에 좀 있어요.“ “아, 난 사회생활도 안하냐? 막말로 내가 집에만 있으면 니가 돈 벌어다 나 먹여 살릴 것도 아니잖아?“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하면 돼요.“ 라는 말에 이가 딱딱 갈린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내가 무슨 기운으로 널 말리냐? 이 이중 인격아!! “하여간.... 미치겠다.“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문을 열자 당연한 듯 나를 따라 들어오는 녀석을 보고 진짜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을 과연 어찌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서윤진과 태민이는? 씨발, 필요 없다니까 셋이나 들러 붙냐? 내 팔자는 왜 이래, 진짜? ꌓ 다음 날 햇빛이 쨍쨍 내리 쬐는 거리를 걸어 새하와 성준이를 만나기로 한 카페로 들어가 커피와 케익을 주문하고 셋이 앉아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가는 도중 크게 한숨을 내쉬고 내뱉었다. “나, 무서운 걸 건든 거 같아.” 라고 허탈하게 말하자 다들 무슨 개뼉따구 같은 소리냐는 듯 돌아본다. “권형이 자식...... 말이야......” “이제 알았어?” 라는 건 내 앞에서 열심히 지 케익만 주어먹는 성준이 자식이다. 이게 전부터 사람 살살 긁는데..... “..... 너, 혹시 몰랐냐?” 라는 건 바로 옆의 전세하....... 무슨 소리야? “뭐라구?” “몰랐냐구.... 니 동생, 아니 애인.... 너랑 막상막하던데.” “뭐라구?” 라고 인상을 팍싹 찡그리자 꼬맹이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신 답해준다. “권형이 말야. 세하랑은 다 알아보던데.... 너 임자 만난 거라구.” “뭐?” “저번에 권형이가 우리 찾아온 적 있잖아. 그 때 알았어, 다들. 그 자식 너랑 닮았거든.” 이라면서 내 케익까지 찝쩍거리길래 일단 케익은 뺏고 세하를 돌아보자 녀석 역시 어깨를 으쓱하고 만다. 그건 무슨 뜻이냐? “그 녀석 보니, 너 고등학교 때랑 분위기가 비슷해서 눈치챘지. 그리고 니 피붙이라는데 할 말 다 한 거지..... 너 생글거리면서 사람 협박할 때랑 비슷했거든....... 하하하.....하...... 하..... 너..... 설마 못알아 본 거냐?” 점점 사그라드는 웃음소리와 자신 없는 작은 목소리.... 후훗... 너는 내가 알고도 그런 놈하고 사귀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런 얘기 한 적 없잖아!!” “우린 당연히 니가 아는 줄 알았지. 그렇게 살인광선 몰고 다니는데..... 하긴 너무 비슷하니 신경 안썼을 수도 있겠다. 우리도 니 독기에 마비되서 왠만한 인간들이 발악하는 건 우습게 보이는 거랑 비슷한 거지.” 라면서 피식 웃더니 이번엔 세하 자식이 내 케익에 눈독을 들이길래 서둘러 포크를 대자 안타까운 듯 케익만 쳐다보고 있다. 임마, 너도 양심이 있으면 내 껄 뺏어먹고 싶냐? “미치겠네.....” “그러게 누가 그런 놈을 잡으래? 너랑 딱이야. 둘이 잘 어울리던 걸.” “그래, 우리 환상의 콤비다. 한 놈은 이중인격에 한 놈은 피해망상증이니..... 츳!” 혼자 중얼거리며 케익을 퍼먹자 두 녀석이 모두 자리에 깊숙이 기대어 뚫어져라 나를 바라본다. “왜?” “아니..... 먹어라....” 그 후로 잠시 침묵이 돌았다. 뭔가가 상당히 걸리기는 했지만 뚜렷이 꼬투리 잡을 게 생각나지 않아 입을 다물자 서서히 시간이 흘러간다. 상원이는 바빠서 못나온 가벼운 모임을 끝내고 이른 시간이지만 그래도 집으로 일단 들어가기로 했다. 날씨는 너무 덥고 햇빛은 쨍쨍이니...... 아, 피곤하고 짜증나. 심신이 피로해져 시트 안쪽으로 푸욱 가라앉는데 집 근처의 공원이 시끌벅적했다. 또 뭔가 싸움 났나... 라는 생각에 몸은 심히 노곤했지만 구경해야겠다는 일념으로 방향을 틀어 공원근처에 주차하고 걸음을 빨리 해 그 쪽으로 다가갔다. 간만에 싸움구경이니 기운을 충전하고 집에 가서 맛나는 밥이나 먹어야지..... 하고 가는데..... 하하..... 이게 뭐야? 타앙-- 타앙--- 바닥을 울리는 경쾌한 공 소리에 팔짱을 낀 채 눈을 크게 뜨고 골대 쪽을 바라보자 아주 익숙한 네 놈이 2 on 2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기 공 들고 있는 놈이 윤진이고, 저기 앞에 막아선 게 권형이,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떨거지들이 지혁이랑 태민이 놈이 맞지? 저것들이.....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황당함에 입까지 헤에 벌리고 바보 같이 바라보자 옆에서 아그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익숙한 그 치아와 과자의 부딪침에 옆을 돌아보자 아니니 다를까..... 정경진 폭식 돼지까지 와서 열심히 쳐먹고 있다. 그래, 다 모여라, 다 모여!! 여기 완전 우리 학교 애들 놀이터구만. 왜 농구부 녀석들 다 와서 여기 땅도 파고, 건물도 짓고, 농구도 하고, 춤도 추고하지? 그렇지 않아도 피곤해 죽겠다는데 왜 저놈들까지 와서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 거야? 사라지라구, 사라져!! 나 니네 당분간 안보고 싶은 사람이야. 내가 쫓아가서 발로 차고 한 대씩 두들겨 팬 다음에 보이지 말라고 해야 사람 말 들을래? 앗, 짜증나!! 생각해 보니 괜히 열이 받아 홱하니 경진이 놈이 먹고있던 과자를 빼앗아 먹자 경진이 놈이 억울한 듯 나를 쳐다본다. “그거..... 내 과잔데......” 라면서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빙빙 돌린다. 왜 아예 돌아서 주저앉아보지? 저능아 같이 굴긴. “...... 저놈들 지금 뭐 하는 거야?” “농구요.” “누가 그런 거 물어봤어? 그러니까 언제부터, 여기서, 저것들이, 농구를, 미친 듯이, 왜 하고 있는 거냐구!?” 육하 원칙에 따라 또박또박 묻자 잠시 뭔가를 생각하던 녀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연다. “1시간 전부터, 여기서, 형들하고 지혁이랑 태민이가, 농구를, 갑자기, 시작했어요. 이유는 말하자면 길어요.” 새꺄!! 이유가 제일 중요한 거잖아, 이유가!! 거기서 그것만 빼면 어떻게 해!? “길어도 말해라. 어차피 넘쳐나는 게 시간 아니냐? 그리고 넌 어떻게 여기 있는 거냐?” “저희 집 이 아파트에요.” 라고 102동을 가리킨다.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냐? 같은 아파트에 그것도 바로 앞 아파트인데....... “그러냐?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거냐? 왜 저 놈들이 우리 집 앞 공원에서 저 짓을 하고 있는 거냐구?” “그러니까.... 시간은 한 2시간 정도로 거슬러 올라가구요. 선생님 기다리다 공원에 왔다는 권형이 형이 저한테 나오라고 해서 나왔어요. 그리고 와보니 때 마침 태민이랑 지혁이도 와 있었구요, 형이 2 on 2하자고 해서 준비하는데 서윤진 차가 앞에서 멈추더라구요. 그러더니 이 쪽으로 와서 권형이 형이랑 살벌하게 노려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으면서 인사를 하더라구요. 선생님 동생이니 잘 지내보자구요.... 그래서 권형이 형이 무슨 소리냐고 하니까 사윤진이 선생님하고 다시 시작할 꺼라고 인사하는 거라고 했어요. 선생님 힘들게 했지만 사랑하고 있고 이제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할 생각이라고 하니까, 권형이 형이 볼 집어던지고 웃기지 말라고 했고 서윤진은 과거 얘기는 접어두자고 하면서 선생님한테 이제 잘할 꺼라고 걱정 말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권형이 형, 갑자기 열 받아서 피식 웃더니 한 대 쳤고 서윤진이 웃으면서 그럼 농구로 하자고.... 해서 지금 이 모양이에요. 덕분에 저는 아이스크림 세 개랑 포카리 네 캔이랑 과자만 먹어치우고 있었구요.”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거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상세하고 면밀한 설명은 고맙지만..... 후훗, 마지막 말이 귀에 거슬리는군. “..... 그 먹을 게 다 어디서 난 건데?” 라고 은근슬쩍 묻자 쉽게 답한다. “제가 사온 거에요. 운동하다 보면 배고프잖아요.” “그래, 잘했다.” 라면서 무의식적으로 과자를 으적거리며 왠수같은 자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 뭐, 상원이가 얘기해준 거 같지만..... 이 자식 만나면 가만 안둬!! - 윤진이 자식은 권형이가 내 동생이라는 걸 알았고 알고 나니 내가 저 놈하고 삐리리한 사이라는 건 상상도 못한 채 - 그러니까..... 상원이 놈이 그 얘기를 뺀 거겠지. 그 놈의 의도가 눈에 보이니까, 더욱 용서 못하지. - 내 동생이니 어떻게 해보겠다는 목적으로 말을 걸었고 그러다 한 대 맞으니 농구로 판가름하겠다고 한 거 같은데..... 말이지.... 서윤진, 너 병신이냐? 저 놈 눈 희번뜩거리고 덤비는 거 보고도 우리가 그냥 형제인 줄 알았단 말이냐? 어떤 덜 떨어진 놈이 열 아홉 쳐먹고 형 옛 애인한테 전투심을 불태우겠냐? 너 니네 형한테 그러냐? 웃기지도 않은 녀석들..... 기가 막혀..... 무슨 중세 시대도 아니고 나 하나 두고 둘이 - 윤진이는 모르겠지만..... - 결투라도 하는 거냐? 허어, 장인하 살다보니 별 꼴을 다 보는구나. 장하다, 유권형..... 씹새끼들..... 사람 속을 긁어도 유분수지..... “씹새들......” 이라고 낮게 이를 갈자 경진이가 의아한 듯 바라본다. “그냥 둘 꺼에요?” “그럼 어쩌라구?” “1점씩 20점 선승젠데 1시간 째 하는 거에요. 내버려둬도 돼요?” “몰라, 지들끼리 치고 받고 싸우든 한 놈을 죽이든 살리든..... 그렇지 않아도 기운 없어 죽겠는데 저것들 싸움까지 말리고 다녀야돼? 그리고 싸우려면 화끈하게 패싸움이나 하지, 저게 뭐야? 저게!? 난 저런 싸움은 안좋아해. 집에 가서 잘래, 아우, 머리 아파.” “그래도......” “뭐가 그래도야?” 뭔가 더 말하려고 우물거리던 경진이 놈은 내 눈빛에 쫄아 결국 꼬리 내리고 휙 돌아서는 나를 쭐래 쭐래 따라온다. “왜?” “배 고파서요. 날씨도 너무 덥고 구경하는 것도 질렸어요.” “....... 맘대로 해라.” 나도 혼자 밥 먹는 건 싫으니까 돼지 새끼라도 끼고 먹어야지.... 라고 생각하며 차로 가려는데 그래도 미련이 남아 돌아본 농구 코트에서 녀석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니까...... 귀신같은 권형이 놈과 말이지..... 원래는 서둘러 눈길을 돌리고 차로 가는 게 상책인데 내가 싸움은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거든. 나를 노려보는 권형이 놈 눈 때문에 열 받아 멈춰서고 같이 노려봐 주었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놈아!! 니 놈이 아무리 내 동생이라고 기고 날아봤자 내 29년 내공에 당할 것 같으냐? 나도 싸움에서는 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구!! 녀석이 공을 놓고 나를 계속 쳐다보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날아왔고 곧 다시 돌아가 권형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윤진이 자식도 어느 새 나를 봤는지 땀을 닦고 이 쪽으로 다가온다. 그걸 알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먼저 눈을 돌리기는 벨 꼴려서 그 놈은 무시한 체 권형이 놈만 죽어라 노려보았다. 어쭈? 꽤 오래가는데? “왔네. 늦어서 기다렸어.” 라고 상쾌하게 말을 건내는 윤진이 놈이 신경이 쓰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질 수는 없지..... 으윽, 눈 아파..... 씨발, 눈 치우란 말이다, 이 놈아!! 나 지고는 못사는 성격인 거 몰라서 그래? 유권형, 이 쯤 되면 알아서 돌아가라구! “동생이지....... 학생들이랑.....” 이라며 계속 말을 거는 놈은 여전히 무시한 체 권형이 자식만 노려보는데...... 나이가 나이니 만큼 눈알이 아려온다. 이젠 눈싸움도 못하겠군. 시력은 좋은 편인데 벌써 돋보기 껴야 되는 거 아닌가 몰라. 젠장, 내 시력 떨어지면 다 저놈 탓이야!! “밥 먹었어? 나가서 먹을래?” 그래도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진짜 잡아먹을 듯 나만 노려보는 그 눈빛에 욱하니 화가 솟아올랐다. “씨발!! 유권형, 눈 안치워? 어딜 야려!! 어린놈이!?” 라고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옆에 있던 윤진이랑 경진이가 히껍하더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하지만 나를 여전히 노려보는 유권형과 갑자기 웃어 재끼는 건..... 서윤진. 뭐가 좋아서 웃어? “동생하고 잘 지내네. 쿠쿡...... 그만해. 어리잖아....” 라고 손을 잡아끄는데...... 생각 같아서는 확 내치고 싶었지만 권형이 자식 때문에 열받아서 내버려뒀다. 어떻게 하나 두고 보자라는 심정이었는데 사납게 노려보던 권형이가 갑자기 분노의 오라를 사방에 흩날리며 이 쪽으로 걸어온다. 그래, 와봐라. 그래봐야 니가 무섭기나 한가? “손놔!” 라고 삐딱하니 말하는 권형이의 말투에, 역시나 형제♡ 라고 기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무 심하군. 권형이랬지? 서로 좋게 지내자고 했잖아.” “..... 누가 너랑 좋게 지낸데? 그거 내 꺼니까, 손 놔.” “형한테 너무 집착이 심하군. 간만에 만난 거니 이해는 하지만.... 가족 놀이 하기엔 인하가 너무 자라버린 거 아닐까?” 가족놀이는 개뿔, 나 저놈하고 사귄다. 근친상간이다, 어쩔래.... 라고 말하고는 싶지만 여기서 얘기하면 너무 길어질 거 같아 포기하고 두 놈이 무슨 짓을 하든 신경을 끄기로 했다. “뭐가 가족 놀이야? 넌 니 애인하고 가족 놀이 하냐?” “애인이 아니잖아, 인하는 네 혀....... 아......” 그제야 뭔가 짚히는 바가 있었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돌아보는 그 반응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 손사래를 치며 윤진이의 손을 뿌리치고 my car로 다가갔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에어콘도 있고 카오디오도 있고 썬팅도 돼있지. 이곳에 비하면 천국이라고, 천국. 후훗..... “그런 거였군..... 네가 그 녀석이었냐?” 그 녀석이 언놈일지 알게 뭐야? 아, 이젠 나도 몰라. 늬들끼리 한 놈이 죽을 때까지 치고 받고 싸우든 여기를 뒤엎어 놓든, 농구를 하든 탱고라도 추든 상관 안해. 둘이 알아서 해라. 뒤에서 졸졸졸 따라오는 경진이를 달고 my home으로 향해 가는데..... 하하.... 내가 아무리 멋대로 하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 앞 공원에서 패싸움을 하는 이유가 뭔데? 기가 막혀 아예 넋을 빼고 바라보자 뒤쪽에 있던 두 놈이 달려와 둘을 말리려다 괜히 한 대 씩 맞고 나가떨어졌다. 아아..... 기뻐 죽겠다, 진짜. 나를 두고 잘난 두 놈이 저렇게 대결까지 해주다니..... 눈물난다, 진짜...... “씨발!! 둘 다 죽어벼렷!!!” ▷ track 09. 슬픈 이야기 sung by 이현우 “너 열 받아서 우리 보고 와서 밥 먹으라고 한 거지? 밤 새 만든 거냐?” 너무 열이 받아 그 날 저녁부터 전화 끊고 권형이고 누구고 집에 일체 못들어 오게 한 다음 밤 새 요리를 했다. 내가 봐도 무서운 속도로 온갖 것들 - 완전 잔치 음식이었다. - 을 다 한 후 친구 놈들과 엄한 그 애인들만 불러서 밥 먹이고 있는 중이다. 물론 바쁘다는 걸 억지로 불러내기는 했지만..... “잔말말고 먹기나 해. 갈비랑 나물들 싸줄 테니까 갖고 가고....... 그리고 내가 말하기 전엔 말시키지 마!” 라고 엄포하고 내 앞의 음식들부터 손을 대자 세하도 곧 입을 닫고 먹는 데에 집중한다. 씹탱, 이거 진짜 열 받네..... 두 놈이 고의로 짜고 날 물 먹여도 이러기 힘든데 어떻게 지들 싸울 꺼 다 싸우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냐? 거기다 가세한 태민이 놈까지....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었나? 어떻게 되는 일이 없냐? 입안의 음식들은 내가 느끼기에도 진짜 천상의 것이었지만 열 받으니 맛이고 뭐고 다 모래알 씹는 기분이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다. 화제를 돌려서 머리 안의 것들도 갈아치우려는 속셈으로..... “성우, 대학 준비는 하냐?” 라고 그 녀석을 바라보고 말하자 순간 사래가 들려 콜록거리며 물을 찾는다. 왜.... 이러지? 내가 이름 한 번 불렀다고 왜 사래가 들려? 왠지 기분이 나빠져 뚱하니 밥그릇을 내려다보자 물을 마시고 진정이 됐는지 그제야 답한다. “대학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왜? 전에 가고싶다고 했다며?” “그건 옛날이고...... 지금은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서요.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라고 말하며 다시 밥알을 센다. 거 참...... “이대로가 좋다니? 깡패짓하는 게 체질에 맞냐?” 라고 은근슬쩍 말을 꼬자 순식간에 내 무릎을 차오는 세하 녀석의 발!! 젠장, 그렇다고 쪼인트를 까냐? 그래, 니 애인은 소중하고 니 친구는 길바닥이다, 이거냐? 그래, 마구마구 밟아대라..... 젠장, 부러워 미치겠네. 확 깨버릴까 보다. “신경 쓰지 마, 저 놈 기분 안좋아서 그래.” 라고 성우를 감싸는 세하를 보자 허탈한 웃음이 배어나간다. 이래서 친구놈들 애인 생기면 말짱 황이라니까, 지 애인 귀한 줄만 알잖아. 진짜 미치게 부럽고 예뻐 보이고, 또 심술 부리고 싶잖아. 내가 불러서 먹이고 싸주기까지 한다는데..... 씨이.... 난 이게 뭐야? 열 받는다고 쓸모도 없는 친구들 몸보신이나 시켜주고...... 나도 내 애인한테 개소주 해주고 싶단 말이다!! 「자기, 요즘 몸이 허한거 같아~♡」 라는 세리프까지 넣어서. 미치겠군, 눈에 뵈는 게 없다보니 아예 머리도 빈 거냐? 그런 역겨운 짓이라도 하고 싶어지다니....... “그래, 미안하다. 내 기분이 요즘 바닥정도가 아니라 마그마까지 파고 들어가고 있다. 뭣 같은 개새들이 사방에서 설치고 다녀서 말야........” “행복한 고민한다. 싫다는 것도 아니라 두 놈, 아니 세 놈이 같이 좋다는데 뭐가 아쉬워서?” “세 놈이고 열 놈이고 뭔가 영양가가 있어야지!! 그리고 한 번에 하나씩 오란 말이닷!! 그럼 다들 차례로 사귀어 준다구!! 그런데 왜 세 놈이 동시에 불 켜고 덤비냐구! 그렇게 찾을 때는 한 놈도 없더만 필요 없다니까 동시에 덤벼? 이게 무슨 몰상식하고 성격 나쁜 것들의 짓꺼리냐구? 나라고 이러고 싶은 줄 알아? 제발 다들 꺼져버리라구!! 그럼 내가 어디 가서든 새 애인 찾아오고 만다!” 라고 주먹을 쥐고 하늘을 향해 소리치자 옆에서 가만히 밥만 먹고 있던 성준이가 입을 연다. “니 성질에 배겨날 놈이 어디 흔한 줄 아냐? 그 놈들 정도 되는 뚝심이니까 참는 거지. 사실..... 너 대학 다닐 때 너 눈독 들였던 사람들 꽤 많아, 남자부터 여자들까지 아마 줄 서라면 바다 넘어 일본까지 줄섰을 걸. 일단 보이는 외모는 죽이는 데다 돈도 많아 보이고, 분위기 잡는 게 뭔가 있어 보이잖아. 그치만 너랑 말 한 번 하면 다 나가떨어지더라. 너 말에 칼침 박아 쏘잖아. 나도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도 도전을 안하고 나가떨어지나 신기했다니까...... 아, 하나 도전한 놈 있구나, 서윤진.”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너 모르는 거 같아서 굳이 말 안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너한테 첫눈에 반했다는 애들만 어림 잡아도 몇 만은 그냥 넘길 껄? 뭐, 나나 세하도 그 케이스 중에 하나고.” “....... 날 무서워한 게 아니고?” “무섭긴.... 처음 보면 너 되게 만만해 보여. 차가운 게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일단은 청순가련에 입만 안열면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으니까. 뭐, 입 열면 10초 안에 환상이 깨지지만..... 난 니가 천산 줄 알았다니까..... 물론 너랑 친해지기 전 얘기지만.” 라면서 무심하게 밥을 계속 퍼넣는다. 그리고 그 말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세하 놈을 돌아보고 말 없이 웃기만 하는 상원이의 얼굴을 보고 나도 반사적으로 웃어버렸다. “그래, 그렇게 웃으면 진짜 천사 같다니까...... 너 입만 열지 말고 길거리에서 거지 같이 하고 웃고만 있어도 5초안에 어디든 가서 잘 먹고 산다. 넌 입만 안열면 돼.” “웃는 게 예뻐?” 라고 여전히 웃으며 묻자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후훗, 그래? “죽고 싶냐, 차성준? 누가 입이 문제야? 입만 열지 말라구? 병신 같은 놈들이나 외모 보고 덤비는 거야..... 그런 놈들은 내가 사양이다. 머리에 눈하고 입만 달린 기형들 달고 살 생각은 없어. 머리에는 뇌가 있어야지, 안 그래?” 라고 싱긋 웃자 열심히 밥을 먹던 꼬맹이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그거야 니 경우 얘기지. 너야, 기본 외모가 되니 그렇게 배짱 튕기는 거지, 진짜 못생긴 사람들은 그런 말 안해. 그 사람들은 그걸로도 충분히 차별 받고 있다구. 너 못생긴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면 돌 맞아 죽을 껄? 그건 미인들의 교만이자 건방이라구.” “뭐가 교만이자, 건방이냐?” “당연하잖아. 너 길가에서 누구랑 부딪쳤을 때 상대가 화낸 적 있어?” “당연히 내가 먼저 화내지.” “그 봐, 다른 사람들은 억울하게 분풀이나 화를 많이 당한다구. 너 어디든 가게에 가서 불친절당한 적도 없지? 그리고 길거리에서 말 걸어오는 사람도 무지 많고...... 술집 가면 술 한잔 산다는 사람 태반이지, 게다가 니 그 엽기적인 차림으로 슬리퍼 찍찍 끌고 사방팔방 싸돌아 다녀도 비웃는 사람들 없잖아. 상점에서 뭐 하나 떨어뜨려도 누구든 먼저 주어주잖아.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 한 번 씩 황홀하게 쳐다보고 뒤에서 누가 웃으면서 수근거려도 자기 쳐다보고 그러는 거 같다는 느낌 안받잖아. 그게 바로 미인들 특유의 자신감이라는 거라구.” 불친절은....... 물론 당하면 절대 가만히 안있겠지만, 없었고 말 거는 사람들이야 항상 많았고.... 술 산다는 사람이야 널렸고, 길거리에서라도 뭐 하나 떨어지면 내 손으로 주은 기억은 거의 없지. 그리고...... 마지막 껀..... “병신같이..... 뒤에서 지들끼로 속닥이면서 웃으면 누가 자기 얘기 아닌 거 같아해? 다 그렇지, 다만 신경 쓰느냐, 씹느냐... 의 문제지. 난 뒤에서 수근덕거리면 직접 가서 무슨 얘기 하냐고 확인을 하던가 씹어버려. 그 딴 거 일일이 신경 쓰고 어떻게 살아? 그리고 사람들 누구나 그런 생각 한다구.......” “그게 바로 교만이라고. 하여간 예쁜 것들은 저래서 안된다니까.” 라고 사람 성질을 슬슬 긁어대는 말에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탕수육을 앞에서 빼앗어 성우 쪽으로 넘겨주었다. “앗!! 탕수육!” “지랄하네. 넌 먹지마, 그리고 성우 잘 좀 먹어라. 밥알을 세냐? 밥 그따위로 먹는 새끼들은 복도 없어.” “아이구, 남 말하네!” 끝까지 내 성질을 긁겠다고 결심한 성준이의 말에 그대로 밥을 그릇 채 들어 단 세 숟가락만에 꾸욱 꾸욱 퍼넣어 먹어버리자 다들 눈을 휘둥그래 뜨고 쳐다본다. 상원이는 이마를 꾹꾹 눌러대고..... “너, 진짜..... 요즘 점점 상태가 안좋아진다. 다행히 옛날처럼 서릿발 날리지 않는 건 좋은데.... 방법이 점점 유치해 진다구.” “씨발, 벨 꼴리면 니네도 똑같이 해봐.” “우리가 정신병잔 줄 아냐?” 라고 끼어드는 성준이는 마침내 그 앞의 갈비와 셀러드마저 성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너, 진짜 치사하게 논다......” “긁어봐, 차성준. 내 진짜 성질 아는 놈이니 끝까지 개겨 보라구.” 낮게 이를 갈며 눈만 돌려 말하자 금새 입을 닫고 밥 먹는데 목숨 건 듯 퍼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살벌해진 식탁에서는 숟가락, 젓가락 움직이는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진다. 젠장, 그 새끼들을 어떻게 처리하지? 한 놈도 아니라, 두 놈도 아니라, 세 놈이라구! 세 놈!! 그렇게 찾아도 없더니 왜 이제야 나타나서들 사람 속을 박박 긁어대냐구? 특히, 너 유권형. 내가 너 동생인 거 알고도 다 봐줬는데 이제 와서 뭐가 어째? 니가 날 봐줘~? 내가 누구한테 봐달라고 할 놈으로 보였냐, 너는? 그리고 왜 자꾸 과거 얘기 꺼내서 사람 열 받게 하는 건데? 내가 눈에 뭐가 씌여도 잔뜩 씌였었지, 그 놈에게 반했었다니...... 망할, 나가 죽어라, 장인하! “아, 개씹좇같은 새끼들!!!” “.........!” 테이블을 두드리고 벌떡 일어선 나를 별 꼴을 다 본다는 눈으로 쳐다본 녀석들의 눈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아 베란다고 나갔다. 아, 망할 것들..... 죽일 것들.... 늬들 때문에 내가 일찍 죽으면 다 고소해 버릴 꺼야!! ꌓ 녀석들이 겨우 밥을 다 먹은 걸 확인하고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서는 성우를 따라 옆에서 신나라 물을 튕겨대는 세하 놈을 보자 이젠 그저 웃음만 나온다. 그래, 좋겠다.... 이 놈들아. 부디 행복하게만 살아라. 세하 녀석, 나 때문에 상처받았던 거 다 낫게 네가 잘해라, 성우야. 그 녀석 힘들 때 잡아준 게 너니까, 그래서 저 녀석도 내 옆에 친구로 남은 거였으니까..... 뭐, 사실 친구가 아니라도 별 상관없었을 지도 모르지. 나도 저 녀석 보고 맘에 들었던 게 사실 그런 이유에서였으니까.... 장지환 덕에 햇빛도 못 본 채 구겨 넣은 마음이지만.... 그 때는 감정이라는 게 너무 무서워서 친구로만 잡아놓으려고 온갖 발악을 다했었지. 만약 그 시기가 아니었다면 내가 진짜 사랑했던 놈은 저 녀석일지도 모르는데 말야. 그랬다면 지금쯤 그 옆자리에는 성우가 아니라 내가 있었겠지. 만약 그랬다면....... 나도..... 아, 관두자. 최근 들어 왜 이렇게 과거에 집착하는 거냐? 뭘 후회해?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로 남아있잖아. 그래도 이렇게 평생을 갈 수 있잖아. 혹여라도 사귀었다가 틀어졌으면 너 평생 저 놈 못봤다. 니가 지은 죄가 많으니 무서워서라도 못봤을 꺼야. 아니, 어쩌면 평생 틀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저렇게 너그럽고 강하고 한없이 따뜻한 녀석이니까..... 어쩌면 내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 격렬하진 않아도 일생 사그라들지 않는 사랑으로..... “인하야?” 물끄러미 둘의 뒷모습을 보던 내가 이상했는지 상원이가 어깨를 툭 건들인다. “왜?” “뭘 그렇게 봐?” “...... 예뻐서.....” “뭐가?” 옆에서 놀란 듯 물어보는 성준이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답해버렸다. “두 녀석 너무 부럽고 예뻐서..... 저거 내 꺼였는데..... 세하, 그 때 잡았어야 했는데.... 너무 아까워서..... 사랑했었는데 무서워서 놓쳐 버린 게 너무 아쉬워서......” 쨍강--- 전혀 다른 뜻 없이 흘러나간 내 말에 요란스레 접시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세하와 차갑게 굳어버린 성우..... 거실에 있던 전원이 놀란 눈으로 날 돌아보는 박력에 나 역시 그자세로 멈춘 채 방금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다시 되씹어 보았다. 젠장, 절대 평생 말하지 않겠다고 독하게 다짐하고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냐? “아, 세하 착하다고.....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 그냥 그래서 부럽다는 거지...... 참....” 애써 표정을 가리며 담배를 비벼 끄자 명세 녀석까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왜 그래? 뭐 잘못 먹었냐? 음식이 이상했어? 이상한 거면 정상이다, 내 한이 담겼으......” “말 돌리지 말아, 선배. 확실히 세하씨한테 하는 거 유별나다는 건 알았지만..... 그랬군, 역시.” 심장이 세게 울려댄다. 뭐야? 뭐가 그렇다는 거야? “헛소리하지 마, 주명세!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선배야말로 헛소리하지 말아. 선배 나랑 만날 때도 다른 사람이 부르면 잘도 씹으면서 세하씨가 부를 때는 두 손 걷어 부치고 달려나갔잖아. 안 그래?” 망할 자식..... 그런 것까지 기억하냐? 순간의 실수로 온 집안이 얼어붙은 분위기라 등에 땀이 배었다. 내가 이렇게 긴장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그래. 그래, 너무 긴장을 풀어주면 안좋으니 가끔 이런 일도 있어야지..... 하하.... 사람이 너무 긴장을 풀면 오래 못산다구..... “인하야...... 나랑 얘기 좀 하자.” 어느 새 다가와 말을 거는 세하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피가 나오든 말든 상관없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숨을 고른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우, 있는 데서 말할게. 미안하다, 전세하. 나 너 좋아했다. 그거 말 안했어. 그래서 너한테는 미안해..... 진짜 미안했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어. 너를 잃고 싶지 않았으니까.....” 무겁게 나간 내 말에 세하가 기가 막히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너, 그렇게 힘들게 하고도 말 안한 거 진짜 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너? 그래서 나한테 정 떨어진 거냐? 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던 말이다. 너를 원해서 너를 잃은 수가 없었어. “...... 진심이냐?” “응.” “그 때...... 도 말이냐?” “아마.....” “그런데 지금까지 잘도 속여왔구나, 장인하.....” “그건......” 뭔가 항의를 하려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보자 순식간에 뭔가가 날아왔다. 한 대 패려나 보다.... 하고 눈을 질끈 감는데 날아온 손은 주먹이 아닌..... 따뜻하게 나를 감싸 안는 팔이었다. 왜...... 나 패지도 못하냐? 너 바보야, 전세하. 나 같으면 징그럽게 독하고 잔인한 놈이라고 욕했을 꺼야. 너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면서도 절대로 입에서 내뱉지 않았는데.... 왜 감싸 버리는 거냐? “독한 자식.... 진짜 독해도 너같이 독한 놈 처음이다. 악만 똘똘 뭉쳐서..... 나쁜 자식아, 이 잔인한 놈아. 왜 이러고 사냐, 너......” 귓가에 스미는 것은 나를 비난하는 말이 아닌 부드럽게 나를 어루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래서.... 팔을 뻗어 그 녀석을 끌어안았다. “미안......” “이러고 살지 마, 장인하. 제대로 좀 살아라. 나 버렸으면 제대로 살아, 이 악질천사야.” “미안.” 수없이 되풀이 될 듯 돌아나가는 내 말에 세하는 따뜻한 온기만을 돌려줄 뿐이다. 너, 다 이해하는구나.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다 이해하고 있어서.... 니가 자꾸 이러니까 너한테 어리광만 늘잖아. 너 놓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인하야 나, 너 진짜 사랑했다.” “알아.” “그래서 고마워, 지금이라도 말해준 거. 우리 친구지?” “응........” “그럼...... 친구로서 할 게 있어......” 라는 말을 하며 나를 살짝 떠밀었다. “인하야......” 그리고 들리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리고 다정하게 나를 후려치는 주먹...... 콰당---- 순식간에 바닥으로 나가 떨어져 정신이 들자 다시 앞으로 다가온 녀석이 시간을 두지 않고 나를 끌어올려 명치 부분을 무릎으로 차 올렸다. 이 자식이!! 부드럽긴 개뿔!! “무슨 짓이에요? 지금......” 바닥에 널부러진 나를 보고 당장에 와서 말리려는 명세를 옆에 있던 성준이가 잡아끌며 상관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친다. 그리고 놀라 달려오던 성우는 상원이에게 잡히고..... 아, 그래 늬들 다 세하 편이라 이거지? “욱!! 너, 나 쳤어, 전세하!!” “그래, 쳤다! 넌 좀 맞아야 돼.” 진짜 열 받은 듯 절대 친구들에게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던 녀석이 사정없이 나를 밟아댄다. 그 모습에 처음에는 꼴에 양심이 있어서 참았는데..... 더 이상은 못참아! 니가 날 패!? 당장에 일어나 아픈 몸을 끌고 녀석의 주먹으로 한 대 치자 제대로 먹혔는지 저 멀리로 나가 떨어졌다. “너, 내가 맞고만 있을 줄 알았냐? 씨발, 새끼 열라 주먹 세. 아프잖아!!!” “아프라고 때린 거야!” 라면서 다시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걸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나도 발로 걷어차 주자 옆으로 살짝 피해간다. 이 자식.... 많이 늘었군. “진짜 독하고 독한 자식!! 왜 그 때 말 안했어? 했으면 내가 구질구질하게 달라붙을까 봐 그랬냐?” 라고 날아오는 킥에 복부를 세게 강타 당해 버렸다. “쿠욱!! 씨발, 니가 어딜 달라붙긴 붙어? 니 놈이 그럴 성격이냐?” “그럼 왜 말 안했어? 이 독한 자식아!! 이 내장을 다 파내도 시원찮은 자식아!!!” 온 집안이 떠나가라 질러지는 사자후와 함께 날아온 카운트 펀치에 결국 베란다 창에 부딪쳐 먼저 쓰러져 버린 건 나였다. 아, 씨발 요즘 너무 싸움을 안했나 봐...... 저 놈한테도 지다니....... 얼얼한 뒷통수를 누르며 고통에 멍해진 정신을 겨우 끌어 모으자 입안에서는 찝찌름한 피 냄새가 돌고 코피는 이미 터져 흐르고 있었다. 이 나이에 친구랑 싸우다 코피 터질 줄은 몰랐다. 씨발.... 내가 미쳤지, 어쩌다 그 말을 해서는..... “왜 그랬는지 말해, 장인하!” “....... 모르는 편이 나.”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손으로 막자 손까지 타고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린다. 씹탱, 그렇지 않아도 피가 모자란데..... 아, 나가서 수혈이나 받을까? 저 코피 쏟았어요.... 하면 수혈해줄까? “그래도 알아야 겠어. 이왕 나온 얘기야. 난 알고 싶어, 장인하. 말해!” “씨발, 모르는 게 낫다니까!!” “난 아는 게 나! 어서 말해!!” “말 안해!! 씨발아!!” “장인하!!” 더 이상 못참겠다는 듯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나도 이 이상은 참을 수 없어졌다. 씨발, 나 성질 더럽단 말야!! “씹새야, 그래 나 너 좋아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말해? 그땐 장지환 때문에 내 감정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고, 말했으면 어떻게 하게? 나만 보면 무서워서 슬금슬금 시선 피하는 너 보고 나 너 좋으니 사귀자고 하라구? 니네 어머니 니 손주 보기 끔찍이 기다리는 거 아는데, 니 동생들이 널 얼마나 믿고 있는지 뻔히 보고 있는데 내가 거기에 대고 널 사랑한다고 하면서 잡아야 돼? 나도 감정을 모르는 걸 어떻게 설명을 해?” 점점 커져 마침내는 있는대로 악을 쓰며 미칠 듯 한 감정들이 쏟아버렸다. 나도 제어할 수 없는, 아니 누구도 옆에서 막아줄 수 없는 무서운 감정들이 폭주한다. 내가 평생 말하지 않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던 것들이 전부 언어로 쏟아져 내린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내 가족 같은, 내 생명 같은 녀석들에게도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 안의 가장 깊은 곳에 있던 컴플랙스들이 순식간에 터녀나온다. “너 잡아서, 내가 너 잡아서 불행해지면, 그렇지 않아도 더러운 내 팔자에 너까지 끌어들이면 어떻게 해? 나 너한테 줄 꺼 아무 것도 없는데.... 구를 대로 굴러, 몸도 개판이고 가진 건 진짜 돈 밖에 없는데!! 화나는 대로 쏟아 붓고 누구든 상처 입혀야 속이 시원한데 널 옆에 두고 니가 아파하는 꼴 어떻게 봐? 난 지금까지 친구로서도 널 몇 번이나 죽게 했는데.... 그렇게 아파서 죽게 했는데 널 어떻게 옆에 둬? 나 때문에 너 다치는 꼴은 죽어도 못보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 내가 아는데..... 내가 얼마나 재수 없는 인간인지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는데 널 어떻게 잡아?”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어이없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는 세하를 보자 점점 피가 넘쳐난다. 마치 내 눈물을 대신해서 흐르려는 것처럼..... 점점 세게 흘러내린다. “넌 몰라...... 아무도 몰라. 그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서 망가질 게 뻔히 보이는 게 어떤 일인지!! 너 따위가 어떻게 알아?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불행해지는 걸 보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죽인 그 미친 새끼 말대로 내가 얼마나 요물 덩어린지, 어떻게 사람들을 망치게 하는지.... 그걸 알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비참하고 죽고 싶은 일인지! 뻔히 다 알면서도 무시하고, 뻔뻔하게 나만은 위해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일인 줄 알아?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차라리 내 손으로 내 목을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로, 매일 매일이 미칠 것만 같던 그 고통을 니가 어떻게 알아? 하, 지구 멸망할 때까지 살아간다고? 좇 까지 말라고 해! 어차피 장인하는 미친 새끼고 살아가는 데 아무 희망도 없었어! 장인하는, 아니 유세영은 죽을 래도 죽을 수가 없어서 살아간 거야! 죽어도 낫지 않는 그 상처들 때문에 죽어도 아플 껄 아니까 죽을 수도 없었어. 죽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다 개구라야, 장인하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거야! 죽어도 아프지 않게 죽어서, 내 손으로 지옥문 열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참는 거지, 살고 싶어서가 아냐!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데! 할 수만 있다며 아프지만 않으면 수천 수 백 번이라도 죽고 싶어서.... 어떻게든 죽고 싶어서 바둥거리면서 살았어. 죽고 싶어서 산다는 게 어떤 건 줄 알아? 차라리 죽고 싶은데 너무 아파서 죽을 수도 없는 게 어떤 건 줄 알아? 내가 갖고 있는 악몽들과 함께 살아가는 게 어떤 건 줄 니가 알아, 개자식아! 너희가 어떻게 알아? 매일 밤마다 바다에 갇혀 죽는 그 악몽을, 나를 가두는 그 얼음들 속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게 어떤 건 줄 너희가 어떻게 알아? 내가 나를 죽이는 게, 그렇게 모든 걸 묻고 내 시체를 보고 살아가는 게 어떤 기분인 줄 어떻게 알아?! 아무리 손을 뻗어 구원을 청해도 아무도 잡아주지 않는 그 악몽들을, 필사적으로 나를 지옥으로 끌어들이려는 그 악귀들을 내 눈으로 보고 사는 게 어떤 일인지!! 그것들 때문에 미치기 싫어서 미친 척 더 발악하고 악랄해 지는 게 어떤 건 줄 알아? 내 시체를 내 눈으로 보고 사는 게 어떤 일인 줄 알아? 비명 지르면서 깨지도 못하게 하는 그 악몽들에 갇혀서 내 정신을 내가 갉아먹으면서 피를 토해내는 게 어떤 건지 누가 알아? 너희처럼 편하게 자란 녀석들이 어떻게 알아? 사랑 받고 싶어서, 어떻게든 사랑하고 싶어서 필사적인 그 기분을 어떻게 알아?” 발악 하듯 소리를 지르며 쏟아지는 말들에 숨이 막히고 눈앞에 새하얘졌다. 그리고 시작되는 악몽들...... 나를 뜯어먹는 그 악령들의 손길이 심장을 쥐어짠다. 나를 비웃고 내 눈을 뭉그러트리고 귀를 잡아뜯고 뇌를 파먹으며 심장을 후벼판다. “씨발, 꺼져!! 다 꺼져 버려, 개자식들!! 다 죽여버릴 꺼야. 전부 피를 말려서 죽여버릴 꺼야!! 니네도 그렇게 아파 봐! 나처럼 아파 봐야 돼!! 전부 죽여버릴 꺼야! 나보다 더 잔인하게 몇 배는 아프게 다들 죽여버릴 꺼야!!”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아 미친 듯이 몸부림쳐도 뿌얘진 영상은 사라지질 않는다. 그리고 다가오는 작은 손..... 꿈에서처럼 언제나 손을 내밀어 오는 건 그 녀석 뿐이라..... 그 빌어먹다 죽은 개새끼뿐이라.... 내가 얼마나 미칠 것 같은지..... 악마라도 좋으니 이 악몽에서 날 구해주길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는지....... “뭐하는 거야? 피는 또 왜 흘려?”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턱을 드는 손길에 다시 시야가 환해졌다. “꼴이 왜 이래? 너 이 나이에도 맞고 다니냐? 싸움 잘 한다며?” 손수건을 꺼내 피가 철철 흐르는 얼굴을 닦아주는 그 손을, 손을 뻗어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친구들 다 불러서 무슨 꼴이야?” “너...... 왜 온 거야?” “어제 신경질 내고 돌아가길래 연습 끝나고 왔더니 문 열려 있어서. 엄청난 소리나던데..... 친구랑 싸운 거야?” 왠 일로 친절모드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반말을 찍찍 쏘는 그 모습에도 겨우 거머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겨우 나를 끌어 당겨준 그 손을 놓을 수가 없어서, 내 마지막 생의 보류인 듯, 이 손이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로 그 손을 꽉 쥐었다. “....... 왜 이제 오고 난리야?” “오지 말라며?” “왜 이렇게 늦게 왔어?” “하, 변덕은..... 오면 가만 안둔다고 난리 치더니....... 너 진짜 내숭 캡이다. 스물 아홉이나 먹어서 아직도 튕기는 건 뭐야?” “반말하지마!” 마치 애를 다루는 듯 한 그 어투에 노려보며 톡 쏘자 혀를 차며 손수건을 살짝 떼고 얼굴을 확인한다. “아, 꼴 좋다. 가서 세수해. 입안에 피 찬 거 아냐?” “입안도 찢어졌다, 임마......” “자랑이다. 그 나이에 싸워서 코피 터지고. 대체 누가 널 이렇게 팬 거야? 일어나 봐!” 내 팔을 잡아끌어 일으키려는 녀석의 힘에 고개를 필사적으로 흔들며 목을 끌어당겨 안았다. “피 흘리면서 잘한다. 그러게 그냥 얌전히 굴지, 왜 튕겨?” “몰라, 씨발..... 어린놈이 뭐라고 지랄하는 거야?” “니 정신연령이나, 나나...... 일어나 피 좀 닦고, 옷 갈아입어. 피냄새 진동을 한다.” “싫어.” “고집 부리지 말고.” “싫어, 싫어.” 그 목을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매달리자 길게 한숨을 내쉰 녀석이 그대로 나를 안아들고 욕실로 들어간다. “아, 거기 피 좀 닦아주세요. 그리고 인하 새 옷도...... 아, 진짜 그렇지 않아도 하얀 게 피까지 흘리냐? 내 피 수혈해줄까?” 다정하게 말을 흘리며 끌어안는 팔의 힘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혈액형 안 맞아서 죽으면 어떻게 할래?” “고이고이 시체 모셔둘게. 괜찮아?” “안괜찮아.” “무슨 짓 했길래 친구한테 얻어맞아?” “몰라.....” “내가 가서 패줄까?” 장난스럽게 나온 말이지만 그 말에 이 녀석 전부 들었다는 예감이 들었다. 전부 듣고,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그냥 이해하는 척 하는거구나. 그래서 이 녀석이 날 진짜 사랑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못해 줘. “얼굴 닦고..... 머리 식혀라. 혼자 발악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내뱉고 길길이 날뛴 다음에 씻어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불행해지면 기분 더럽잖아.” “씨발, 그래도 복수는 해야지.” “넌 엄마한테 가장 큰 복수를 한 거야.”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어 얼굴을 씻어내다 문득 나온 말에 놀라 시선을 돌리자 빙긋 웃은 녀석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준다. “엄마가 예쁘게 키운 아들네미 훔쳐 간 거잖아? 지금 만약 엄마랑 너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난 널 선택할 거야. 엄마가 끔찍하게 길러준 내가 널 원했으니, 넌 엄마한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거야. 그 정도면 이젠 원한 잊어. 난 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다고, 장인하.” 그 절절한 고백을 듣기엔 장소도, 분위기도 내 상태도 전혀 아니었지만 그 말 한 마디에..... 진짜 겹겹이 쌓여있던 원한 같은 것이 천천히 녹아 내린다면..... 나 진짜 너무 단순한 건가? “몰라, 이중인격 주제에......” “누가 이중인격이야? 내숭이라니까. 빨리 씻어.” “나쁜 자식......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나서는......” “그래, 좀 더 빨리 나타날 껄 그랬나 보다.” 그 가슴에 얼굴을 대고 툭하니 들이박자 피식 웃으면서 나를 안아준다. 커다란 손이 머리를 쓰다듬고 목을 타고 내려가 허리를 안아준다. 깊은 체온과 체향..... “인하야, 옷...... 어어...” 욕실 문을 열고 옷을 건내 주던 성준이가 분위기 잡고 안고 있던 우리를 보더니 멈칫한다. “아, 주고 가세요.” “응, 그런데...... 권형아, 나 니네 담임이다. 좀 안 보이는 데서 분위기 잡지 그래?” “아, 이건 제 사생활이에요. 피냄새 난다, 빨리 갈아입어. 샤워할래?” “싫어.” 이 녀석과 떨어지면 곧 다시 지옥으로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자 한숨을 내쉬며 얼굴에 키스를 퍼부어 준다. “나도 곧장 왔으니까 같이 샤워하자. 피냄새 때문에 네 향이 나지 않아.” “싫어......” “선생님, 문 좀 닫아 주실래요? 그리고 제 가방도 부탁드릴게요. 샤워하자, 인하야, 응?” “떨어지면 안돼.....” “걱정 마, 안떨어져. 이대로 옷 입고 해볼까?” 킥킥거리며 웃는 음성에 그 녀석의 가슴에 머리를 쿵하고 박자 여전히 웃고만 있다. 이 녀석이 상태 안좋은 이중인격이라도.... 내 성깔 다 받아주는 유일한 인간인데다 겨우 손을 내밀어주는 녀석이다. 그래서 내가 사랑하는 녀석. 아마 그런 예감이 있었을 꺼야. 그래서 너 보고 한 눈에 반하고 다른 건 눈에 안들어 왔나 봐. 왕내숭이든 정신병이든..... 내 손을 잡아줄 수 있는 인간이라는 느낌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사랑한다, 이 나쁜 자식아.....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깨끗하게 치워진 거실은 조용했고 알아서 자리를 피한 듯 집 안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실수로 나간 말이지만 속이 좀 시원한 거 같기도 하고.... 뭔가 서서히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이제 머리가 좀 개운해 진 거 같은 느낌..... 그래서 이 김에 일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동안 내 인생과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것들을 훌훌 털어 버리기로...... “권형아...... 내일 시간 비워라.” “왜?” “나랑 갈 데가 있어.” “뭐.......” 여전히 다정하고 이상한 내 연인은 나를 조용히 끌어안아 주었다. 역시 니가 내 인연인가 보다. “같이 가서.... 정리하자.” “그래.” 닭살스럽게 스킨쉽이 과도한 덕에 나같은 인간에게는 더 없는 연인이다, 이 녀석은. 그러니까 너 절대로 놓치지 않아. ▷ track 10. First Love sung by Utada Hikaru 다음 날 오전 상원이에게 얻어낸 윤진이의 연락처에 전화를 하고 그 녀석을 끌어냈다. 약속장소로 가 아무 말 없이 따라오라는 말만 했고 옆에 이썬 권형이가 살벌하게 눈을 흘기는 걸 무시한 채 두 놈 다 내 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조용히 따라 와.” 내 차에 탄 커다란 녀석들을 무시하고 천천히 차를 몰아 고속도로로 빠져나갔다. “어딜 가는 건데요?” 옆에서 물어오는 권형이의 목소리에 잠깐 한숨을 내쉬고 그래도 제대로 말해줘야 할 것 같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만나야할 사람이 있어.” “누군데요?” “장지환.” 짤막한 답변에 뒷자리에 앉은 윤진이의 몸에 눈에 띄게 굳어진 게 보였다. 그리고 이름을 기억해낸 권형이 역시 싸늘한 눈초리로 나를 노려봐 온다. “죽은 사람을 왜 만나는데요?” “...... 그 녀석이 나한테 남긴 게 있대. 그걸 확인해야겠어.” “무엇 때문에?” “....... 자유로워지고 싶으니까.” “지금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야?” “아직까지 내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그 녀석을 깨끗이 덜어버려야겠어. 그러지 못하면 난 평생을 그 망령에 붙들려 살아야 돼. 그러고 싶지 않아.....” 단정하 듯 말하고 속도를 올리자 권형이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윤진이는 여전히 경직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희들하고도 말 끝낼 게 있으니까, 끌고 가는 거야. 가서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듣고 싶으면 들을 꺼야. 그 전엔 뭐라고 해도 씹을 거니까..... 그냥 따라와.” 다시 고요해진 차안에는 켜놓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오래된 팝송이 울릴 뿐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했다. 저녁 나절에야 도착한 어촌에서 둘째 놈에게 억지로 빼앗은 주소를 들고 그 집을 찾아갔다. 그 지방의 거의 허물어진 집에 비해 유독 눈에 띄는 깔끔한 느낌의 양옥을 찾아 벨을 누르자 둘은 계속 입을 다문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누.... 누구세, 요?> 띄엄띄엄 이어지는 언챙이의 목소리에 가볍게 답해주었다. “장인하.” <....... 아.......> 진짜 뜻밖이었는지 서둘러 문을 열고 달려나오는 녀석의 모습에 손만 흔들어 인사를 한 후 무작정 안으로 쳐들어갔다. “저.... 왜, 왠, 일이, 세요?” “볼 일 있으니까 왔지, 장지환이 쓰던 방 어디냐?” “아...... 혀, 형이 남긴 거, 차, 찾으러.....” “그래, 줄 거 있다며? 있으면 다 내놔. 오늘 아니면 절대 안받아.” 내 말에 입술을 꾹 깨물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서 안쪽의 문쪽으로 달려가 문을 열어준다. “여, 여기, 가, 형, 바, 방이었어요. 그리고 안, 안에 작은, 사, 상자 있어, 어요.” 그 말에 녀석을 한 번 쳐다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옅은 종이 향이 배어 나왔다. 언제나 그 녀석 방을 가득 채우고 있던 씁쓸한 담배 향을 닮은 그 종이냄새가 이 방에서도 여지없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보이는 작고 단아한 가구들과 책상, 그리고 그 위아래도 빼곡이 꽂혀있는 책들은 방바닥까지 점령해 있었고 책상 위에는 수 백 권은 될 법한 공책들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파란 공단 보자기로 감싸놓은 작은 상자가 보였다. 그 쪽으로 다가가 다른 것은 일체 손도 대지 않은 채 그 상자만을 들고 다시 한 번 안을 돌아보았다. 그 녀석의 자취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있는 방이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그 녀석이 썼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 지독하게 답답하고 추운 방...... 무심하게 돌아나가려던 움직임은 그 분위기에 눌려 다시 한 번 저지 당했고 무의식적으로 책상쪽으로 돌아,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은 후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 중 기억하고 있는 것을 하나 꺼내들었다. 분명히 그 놈이 스무 번인가를 읽으면서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던 그 책이었다. 표지는 닳고 닳아 너덜거리고 내지는 누렇게 빛이 바랜 채 손때가 잔뜩 묻은...... 그 책...... 내 기억에도 분명히 있던 그 책이었다. 예전의 기억들이 돌아와 책을 펴고 후르륵 넘겨보았다. 기계적으로 이어진 그 동작 중에 난 무심코 한 페이지에서 멈추고 말았다. 그 오래된 책 안에서도 유난히 많이 본 듯 펼쳐져 있는 그 페이지, 그 안에는 내가 그 책을 보고 장난스레 써놓았던 글귀들과 그 새끼의 단정한 글씨들이 빽빽하게 적혀있었다. 재미없어. 이리라는 게 뭐야? 왜 혼자 방황해야 한다는 거지? 혼자만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그런 사람.... 그래서 자신만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 왜 다른 사람을 위해 고독을 택해야 하는 거지? 그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니까,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하니까..... 그 사람을 상처주고 싶지 않은 거야. 상처라는 건 뭐야? 사랑해서 받는 상처라면 행복해야지. 너무 사랑하면 아파져.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아파져..... 난 아픈 것따윈 몰라. 그게 어쨌다구? 툭툭 내뱉는 듯 한 어조의 내 글과 그에 답하는 녀석의 단정한 글씨, 그리고...... 책 중간 중간 그어져 있는 선들과 그 아래에 쓰인 작은 글씨들..... 인하가 좋아하는 부분 인하가 맘에 들지 않는 다는 대사 인하가 집중해서 읽던 부분 인하가 내게 물어왔던 감정 인하에게 알려주고 싶은 구절 인하가....... 누가 보면 책 제목이 인하인 줄 알겠다, 이 덜떨어진 자살중독증 환자야. 왜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일일이 적어놓고 뭘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너는? 빽빽하게 채워진 그 책을 슬쩍 상자 위로 올리고 상자를 안아들자 문밖에서 보고있던 녀석이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그, 그 책, 형이 제일 아, 아끼던 책이에요. 똑같은 걸로 새, 새책을 선물, 해도 그 책만 봤어요.” 왠 일로 덜 더듬는 거냐? 그 녀석 얘기할 때만 그런 거냐, 넌? “원래 내 책이었어. 이 녀석이 훔쳐간 거야. 싫다는 거 바득바득 지가 안겨놓고 그 집 나갈 때 귀신같이 챙겨서 갔던 그거야. 그러니까 이건 내 책이야. 이거면 됐어. 다른 건 필요 없어. 니가 삶아먹든, 볶아먹든 불을 지피든, 헌책방에 팔던 맘대로 해라.” “당신, 신이 다 가져갈 줄 알, 알았어요. 둘 째 형, 도 당신이 모두 가져갈 꺼라고, 했어요.” 그 새 왔단 간 거냐? 여우같은 새끼. “이게 전부야. 그 녀석이 남긴 건..... 이것밖에 없어.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야.” 그 녀석의 30년 인생에서 남긴 건 이것뿐이라는 걸, 이걸 난 알아볼 꺼라는 걸 넌 알고 이었던 거지. 이무기 같은 새끼..... 너 알고 있었던 거지? 우리가 어땠는지, 왜 그렇게 되어 버렸는지 나도 모르던 그 감정들을 속속들이 알고 아직까지 뒷짐지고 내려다보고 있는 거냐? 한 번 걸리면 죽여버린다, 너.... ꌓ 소주를 페트병으로 사들고 그 녀석이 차곡차곡 싸준 상자를 들고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원래는 이 녀석들이 아니라 친구 놈들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왠지 안될 것 같아서..... 내 옆에서, 더 이상 나 아픈 꼴 보여주는 거 진짜 못할 짓인 거 같아 만만한 이 놈들을 끌고 온 거다. 진로페트병 두 개를 안고 앉아 컵도 들지 않고 그대로 병째로 한 모금 마시자 권형이가 손을 잡으며 저지한다. “컵에 따라 마셔. 죽으려고 왔어?” “냅둬. 살려고 마시는 거야. 제 정신으론 나, 이거 못 봐.” “....... 그럼 컵에 마셔." 옆에서 종이컵을 건내는 윤진이까지 씹고 가만히 상자를 안아 들었다. “컵으로 마시나 병으로 마시나, 어차피 이거 내가 다 마실 거야. 니네는 손도 대지 마.” 왠지 이 상태로도 안될 것 같아 다시 한 번 소주를 마시고 바다를 한 번 들여다봤다. 일렁거리며 내게로 차오르는 파도를 보며 이젠 저 물이 두렵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해 본다. 저 바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나를 잡아먹을 수는 없다고, 나는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갈 존재이니까..... 겨우 저 정도의 파도가 나를 잡아먹을 수는 없다. 아무리 귓가에서 울려대고 세게 몰려와도 말이야. 길게 한숨을 내쉬고 취기가 빨리 오르도록 다시 술을 퍼마셨다. 필름이 끊기기 직전에야 이 편지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마 제 정신으로 본다면, 그래서 저게 내 기억에 남아있다면 나, 평생 이 새끼한테서 못 벗어날 테니까........ 눈을 질끈 감고 속으로 이런 저런 온갖 욕들을 퍼부은 후 한숨을 내쉬고, 긴장을 해서인지 싸늘해진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피를 통하게 했다. 돌아라, 돌아라..... 몸 안의 피도, 그 김에 이 알콜 기운도....... “그만 마셔, 인하야.” 옆에서 다정한 척 말을 걸어오는 윤진이를 한 번 쳐다보자 어두운 바다를 배경으로 불안해서 못견디겠다는 듯 한 눈빛이 눈에 담긴다. 병신..... 이 정도에 뭐가 무서워? 너 나랑 술 안마셔 봤어? “이 정도에 취하지도 않아. 내가 처음 술 마시고 필름 끊겼던 거 얘기해줬냐?” “...... 아니.” “17살 때였을 꺼야. 고등학교 1학년 때, 나 술 엄청 세서 웬만큼 마셔서는 절대 취하지 않는데, 나 키워준 아저씨, 아니 내 아버지라는 새끼 죽고 나서 장지환 열라 패서 병원 보낸 적 있었어. 그 새끼가 제대로 싸웠으면 원래는 나도 같이 입원했을 꺼야, 만만치 않은 새끼였으니까..... 그런데 그 새끼 내가 패는데 아무 말도 안하고 맞기만 하더라. 발로 차고 죽어라 밟고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고 주먹을 날려도 그냥 가만히 내 눈만 들여다보는 거야. 그 눈빛에 열 받아서 더 지랄을 했는데..... 말이지..... 그 병신새끼, 그렇게 맞고 기절하면서도 내 눈만 들여다보고 있었어. 그 때는 그게 뭔지 몰랐어. 그게 어떤 뜻이었는지,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발악을 했던 건지도.” 거기까지 말하고 나자 다시 정신이 돌아와 한 모금 더 마셨다. 술이 센 것도 참 사치스러운 일이란 말야. 다른 사람들 소주 한 병이면 될 껄,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으니...... 돈 아깝게 말야. “그 새끼 그렇게 조지고 나서 하도 기분 더러워서 진로 페트병으로 사들고 집 앞의 공원에 가서 밤새도록 이렇게 마셨어. 아무 생각도 하기 싫어서, 도저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말을 걸어오는 그 새끼 때문에 열 받아서 죽어라 술을 퍼마셨는데...... 그 때 처음으로 술 마시고 기절이라는 거 해봤다. 기억은 안나는데..... 나 절대로 울지 않는 놈인데 그 날 밤새도록 혼자 쭈그리고 앉아 울었던 거 같아. 다음 날 눈이 팅팅 붓고 얼굴이 땡겼거든. 굉장히 많이 운 거 같아,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잘 울지 않게 됐어. 그 녀석이 나 아주 어릴 때 해준 얘기가 있어. 눈물은 마음의 조각이라고..... 그래서 너무 많이 울면 모든 마음이 흘러나와 속 안이 텅 비어 버린다고. 그래서 그 날 밤에 내 심장 비우려고 그렇게 울었던 거 같아. 그러고 나니 정말 눈물이 안나더라, 그 다음부터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자 양쪽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을 의식하며 쓰게 웃고 다시 소주를 마시자 반 정도 빈 페트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때는 몰랐어. 내가 그 새끼를 사랑했는지..... 그냥 악에 받쳐서 누구든지 나 건든 놈들 가만 안두겠다고 날뛰었었거든.” 검고 푸른 바다를 보며 잠시 웃고 병을 바닥에 내려두고 천천히 상자를 풀어갔다. 파란색의 공단 천을 조심스레 풀어내자 안에는 연한 갈색의 나무상자가 누군가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장지환, 너 이 안에 뭘 남긴 거냐?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거냐? 5년을 이 지저분한 바닷가에서 배나 타면서 한 달에 한 번 씩 보내지도 못할 편지를 쓰면서...... 내게 뭘 말하고 싶었던 거냐? 그냥 보내지 그랬냐? 내가 씹고 찢어 버린다고 해도, 그냥 내게 보내주지...... 그럼...... 술 마시고 또 울 것 같아 차마 상자에 손을 대지 못하고 뚜껑 위에 손을 올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의 추억을 받는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 몰랐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장인하가 말이야..... 어서 열어 보고 싶다는 충동과 가능하면 절대 보고싶지 않다는 거부감에 망설이다,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아 천천히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뚜껑을 오른 쪽에 내려두고 하얀색 규격봉투의 꾸러미를 들여다보았다. 하얀색의 그 봉투 위에는 똑같은 발신인과 수신인이 적혀있었고, 하나같이 우표까지 완벽히 붙여진 채였다. 가장 위에 있던 편지 하나를 들어 깔끔하게 봉인된 편지의 윗부분을 찢고 안의 편지지를 꺼내들었다. 네 단으로 접힌 흰색의 종이를 들고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하 듯 조심스레 펴들고 안에 쓰여진 글씨들을 읽어나갔다. 하나, 하나씩...... 천천히......... 편지 하나의 내용들은 길지 않은 것들로 내가 상상하던 사랑하고 있다던가, 보고싶다던가, 용서해 달라거나 하는 꾸질한 내용들도 아니었다. 그냥 그 날, 그 날의 일기처럼 하얀색의 종이 위에 두꺼운 연필로 자신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적어 넣은 편지들이었다. 그게 왠지 그 녀석답기도 하고, 왠지 모를 허전함이 들어 대강 훑어본 후 한숨을 쉬며 다시 상자 안으로 넣으려 할 때였다. “인하야......” “응?” “편지...... 자세히 봤어?” “봤어.” 말을 걸어오는 윤진이의 말에 피식 웃으며 허탈한 듯 말하자 조용히 고개를 저은 녀석이 내가 막 넣으려던 편지를 들어 아무 내용도 적히지 않은 밑 부분을 가리켰다. 서명이 끝난 하얀색의 종이 위에 뭐가 있다고? “이게 뭐?” “....... 지운 자국.....” “뭐?” 윤진이의 말에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희미하게 지우개 자국이 남아있는 부분은 들여다보았다. 바로 위의 가로등에 대가면서까지..... 그 부분을 노려보았다. 마치 매직아이를 하는 기분으로......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자 그 하얀 종이 위에 움푹 들어간, 지워졌던 부위의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어릴 때 하던 유치한 놀이처럼 두꺼운 연필로 꾹꾹 눌러쓰고 지우개로 지운 옅은 자국들...... 그 글을 보고 다른 편지들을 들어 일일이 확인을 해보았다. 유치한 자식....... 지울 껄 뭣하러 써? 그것도 5년에 걸쳐 쓰고 지울 꺼라면 뭣하러....... 아니지, 그럼 5년 간 이런 편지를 쓰고도 보내지 못한 것도 멍청한 짓인 거지. 이렇게 정성 들여 쓰고 우표를 붙이고 수신인까지 모두 적은 후 보내지 못한 5년 간의 기억들..... 그리고 그 5년간 똑같이 반복된 말들...... 내게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거냐? 내 얼굴에 대고는 그렇게 죽어라 욕하고 신경을 긁던 놈이 이런 곳에 숨어 고작 한다는 게 이런 편지를 쓰고 지우고, 결국은 품고 사는 일이었냐? 진짜 찐따같은 것들은 끝까지 병신 짓을 해요...... 멍청이..... 입술을 이빨로 질끈 깨물고 편지들을 정리해 상자 안에 넣고 오른 쪽에 두었던 뚜껑을 들어 닫았다. 그리고 다시 그 파란색의 보자기로 싸 녀석의 마음을 봉했다. 내 가슴 안에서 그 녀석의 기억을 봉하고, 그 녀석의 집착 속에서 나에 관한 모든 것들을 소중히 포장해 두었다. 니가 왜 여기까지 도망 와서 죽으려고 했는지, 그리고 왜 살았는지 알 것 같다. 그리고 끝내 그 편지를 보내지 못하고 이런 식으로 내게 돌아오게 한 것도 알 것 같았다. 병신새끼....... 진짜 모자라도 한참을 모자란 자식...... 끝내 다른 놈 걱정만 하다 죽은 녀석. 하지만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알기에 묘한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올 것 같은데 왠지 웃고 싶어지는 그런 미소..... 병신아, 그게 뭐 어려운 말이라고 그렇게 쓰고 지우고 한 거냐? 그냥 확 까놓고 써버리지, 그럼 신경 안썼을 말에 왜 단서를 붙인 거냐? “뭐라고 돼있어?” 라고 진지하게 물어오는 윤진이의 얼굴에 피식 웃었다. 뭐라고 할까? 이 녀석이 날 사랑한다던가, 그리워한다던가...... 하는 유치한 글을 남겼을 바라는 거냐? “별 거 아냐.......” “뭔데?” “「아프지 마라.」란다. 바보 같은 자식......” 병을 들어 다시 소주를 마시자 아직 남아있던 모래의 열기 때문인지 씁쓸한 소주 맛이 입안에 퍼져갔다. 그래서..... 소주가 너무 써서 눈동자에 눈물이 고였다. 그리고 흘러내린다. 이렇게 맛 없는 술은 마셔본 적이 없어서 말야....... 난 양주체질이거든, 입은 고급이라..... “........ 이 소주 열라 맛없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눈물이 배어 나와 당장에 통곡이라도 할 듯 입가가 떨리며 마른 모래사장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진짜 너무 써....... 너무 써서..... 속이 아프잖아. 씨발, 내가 위암 걸리면 다 이 회사 탓이야.” 장지환, 이 멍청아....... 아프지 마라..... 라니. 그게 무슨 무드 없는 말이냐? 누가 들으면 내가 불치병에 걸린 환자거나 비실거리는 병신새끼로 알 거 아냐? 나 몸 약하지 않아, 물론 외모가 그래 보인다는 건 인정하지만 나 깡만으로 버티는 독한 놈이라 불치병은 절대 안 걸린다. 내가 말했잖아,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꺼라고. 절대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아...... 절대..... “인하야......” “진짜 너무 맛없어, 이 소주. 이래서는 끝까지 마실 수가 없잖아. 소주는 차가워야.....” 투욱--- 병을 모래사장 위로 떨어뜨리자 권형이의 팔이 나를 끌어안는다. 조심스럽게...... 내 목을 잡아당겨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왜 이러고 살아요? 스물 아홉 먹어서......” “몰라, 임마....... 누군 이렇게 살고 싶은 줄 알아?” “울지 좀 말아요. 툭하면 울고 신경질 내고..... 감정 조절을 그렇게 못해요?” “잘난 체 하지마. 그게 얼마나 힘든 건 줄 알아?” “몰라요. 전 제대로 배울 꺼 다 배우고 자라서 그런 거 몰라요.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을 거 같아요.” 가만히 등을 토닥이며 나를 안아든 녀석의 팔에 기대어 그렇게 한참을 운 거 같았다. 그 녀석이 남아버려서, 머리 속에서 잘 떠오르지도 않던 그 얼굴도, 그 미소도, 그 손길도 모두 생생하게 떠올라서...... 잊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머리 안을 채워간다. 그리고...... 내 안에 가장 팽팽히 서있던 어떤 덩이들이 가슴을 채운다. 언젠가 허전한 공간을 채워주었던 윤진이의 대사들처럼 그 멋대가리 없는 말 한 마디가 가장 크게 비어있던 공간을 채워서 내 가슴 안이 벅차 오르도록, 이제 진짜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아픈 곳을 감싸고 정성껏 고통을 치유해 간다. 버림받은 게 아니다. 물론 상처는 남았지만, 이가 갈리도록 아팠던 기억들도 그대로이지만..... 그래도 내 안에 남은 대사들은 말하고 있었다. 넌 사랑 받았었다고, 그렇게 사랑했던 누군가가 너를 기억하고 사랑하고 너에게 집착하고 있었다고..... 넌 그가 죽어서도 사랑 받고 있었던 거라고..... 한참을 울고 난 후 그 녀석의 방에서 가져온 책을 들어 라이터를 켜고 불을 붙였다. 오래된 종이라 더욱 쉽게 타오르는 그 마른 종잇장들을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바람과 파도만이 몰아치는 바닷가의 모래사장 위에서 활활 타오르는 그 책의 위로 상자를 열고 그 안에 있던 편지들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 주었다. 그리고 더욱 더 활활 타오르는 그 불길을 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죽었으니, 이제 그 기억들도 가져가라고. 나를 사랑했던 기억도, 그렇게 서로 상처 줄 수 밖에 없었던 고통과 미련들도, 그리고 아직도 남아 떨어지지 않는 나에 대한 너의 집착도 모조리 가지고 사라지라고....... 그리고 이 세계에 환생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언젠가.... 다시 그 순수했던 모습 그대로 돌아와 이번에는, 제대로 만나 보자구. 그렇게 둘 다 악에 받쳐 지랄해대지 말고, 제대로 살아보자구. 처음 만났던 12살의 너처럼 영롱하게 빛나던 영혼을 가진 그 모습 그대로..... “춥다, 차에 가자.”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불길을 보며 먼저 일어서자 두 녀석 모두 얌전히 따라나선다. 사박거리는 모래사장을 걸어가며 뒤에 남은 잿더미를 한 번 돌아보고 피식 웃고는 파킹해 놓은 차로 다가가 문을 열고 먼저 권형이를 차에 태웠다. “안에서 기다려, 윤진이 나랑 얘기 좀 하자.” 내 말에 아직 내 뒤에 서있던 녀석이 짧게 대꾸한다. “그래.......” “선생님.....” 추궁하는 듯 한 권형이에게 한 번 웃어 보인 후 윤진이와 둘이서만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갔다. “10분이에요.” “알았어, 보채지 좀 마. 어린 놈 사귀기 힘드네, 진짜.” 혀를 차며 문을 닫고 천천히 해가 떠가는 바닷가를 윤진이와 둘이 걷기 시작했다. 10분이든 10시간이든 내가 필요한 만큼,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면 돌아간다. “밤이라 춥다...... 춥지 않아?” 옅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감싸주는 느낌에 예전의 추억들이 머리 안을 훑고 지나간다. 너 다정한 놈이었지, 부드럽고..... 누구보다 날 사랑해주던 녀석이었지. “별로. 우리 처음 만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 “93년 여름, 6월 종강.” “아니..... 그 전이야.” “...... 언제?” 놀란 듯 물어보는 녀석의 얼굴에 피식 웃고는 무겁게 발을 잡아끄는 모래사장을 밟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체육관이었어. 진짜 그 놈의 농구부..... 나랑 무슨 원한이 있는지 권형이도 너도 모두 체육관에서 봤어. 4월에 성준이가 억지로 끌고 간 체육관에서 시범 경기에서 너랑 나 마주쳤어. 그 때 얼굴 다쳐서 모자 눌러쓰고, 졸고 있는데 니가 지나가다 나한테 수건 떨어뜨렸다. 그거 주워 올리는데 펜들이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짜증내면서 돌려주니까 너 웃으면서 받아들더라. 그리고 허리 굽혀서 인사하고 나가는 걸 봤어. 그 미소가 왠지 맘에 들어서..... 체육관에 지나갈 때마다 한 번씩 들러보고는 했었어. 그러다 그 비 오는 날 기분 더러운데 너 만나고 나서 예감이 들었어. 어쩌면 내가 널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하지만 난 그런 감정에 너무 서툴렀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 받는다는 거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자꾸 다가오는 너 보고..... 진짜 몇 대 패서라도 옆에 오지 못하게 하려고 했었어. 너랑 친구로 지낼 순 없을 것 같았거든. 그래서 자자고 한 거야. 한 번 자고 잊으려고..... 그런데 네가 자꾸 다가와서 무서운데도 응했어.”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돌아보자 멍하니 서서 놀란 듯 나를 바라보는 녀석이 보였다. 놀랐냐? 이제까지 말 안했던 거 진짜 독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너? “한 번 정도 사랑 같은 것도 해보고 싶었거든. 그 때 너무 서툴러서 제대로 못한 거 같아. 어쩔 수가 없었어, 나는..... 제대로 자라질 못해서...... 그 때 기억나? 내 생일 날....... 아마 그 일 때문이었을 꺼야, 너랑 나랑 멀어진 게.....” 씁쓸히 말하는 내게 녀석이 조급하게 매달리 듯 말을 가로막는다. “그 때 나는.......” “그 날, 세하가 죽을 뻔 했어, 재수 없게 걸려든 거지. 그래서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 땡늙이 새끼가 세하 버리려고 했다. 그 좇같은 새끼, 지금도 보면 이가 갈리는데..... 그 녀석 구하러 친구들 다 뛰어들고 발광하고 제대로 풀어준다는 조건으로 그 새끼랑 잔 거야. 그 때는 말하지 않는 게 내 자존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잘못했나 봐. 너한테 사실대로 말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 다시 한 번 돌아보고 웃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서윤진이...... 멍청하긴..... 뭔가 후회하고 있는 거지, 너? “몰랐어..... 그런 거.....” “상관없어. 뭐 지금 와서야 그런 생각하는 거지만...... 사실 그 때 난 너보다 세하를 택한 거야. 그 녀석 내가 죽을 때까지 품고가려고 한 놈이거든. 아마, 지금 똑같은 상황이 닥쳐도 난 권형이보다는 그 녀석을 구할 꺼야. 나한테 사랑 같은 건 그렇게 큰 의미가 아니거든. 나에게는 사랑이란 놈보다 친구들이 더 소중해. 그건 죽을 때까지 마찬가지일 꺼야. 내가 늙고 추해져서, 진짜 아무도 돌아보지 않게 될 때, 그 때까지 내 옆을 지켜줄 녀석들은 그 녀석들뿐이거든. 그 녀석들만이 날 제대로 잡아줄 수 있어. 그래서 널 버린 걸지도 모르지....... 아마, 그럴 꺼야.” 담담한 내 목소리 사이로 주먹을 꽉 쥐며 나를 바라보는 윤진이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난...... 아직도 널 사랑해.” “알아, 어쩌면 나도 아직도 그 감정이 남아있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자다가도 니 이름 들으면 벌떡 일어나 부엌에 가서 식칼 갈았다. 농담 아냐. 진짜 그랬어, 나. 그 상처가 없어지질 않았거든...... 그런데 천천히 돌아보니까 이제 알겠다. 너랑 있어도, 지금 권형이랑 있어도 내 마음 안에 남아있던 게 누구였는지. 나 미적지근한 건 질색인 성격이라 너도, 명세도, 권형이도 제대로 사겨 봤으니 단념이 쉬었지만 그 새끼, 멍청하게 죽은 장지환은 사랑한다는 걸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단 한 번도 말해주질 못했거든, 사랑한다고..... 너무 사랑하고 있었다고 말해주질 못했어. 그래서 남아 있는 거 같아. 그 녀석에 관련된 일이 자꾸 주위를 돌면 짜증나고 그 새끼 죽여버리고 싶고, 지금도 무덤만 있다면 달려가 관이라도 뚫고 들어가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사랑했어, 나. 하지만 그 녀석만 사랑한 건 아냐, 너도 명세도 권형이도 다 사랑했어. 일생에 한 번 뿐인 사랑이란 건 없어. 언제든 사랑은 찾아오고 잡으려고만 한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어.” “....... 미안.....” “그래, 넌 나한테 미안해해야 돼. 하지만 나도 미안했어. 너한테 상처준 거, 서툴러서였지만 하여간 잘못은 한 거지. 미안해, 서윤진 그리고 사랑했다. 그건 기억해라..... 그리고 나머지는 지워. 다른 사랑 찾으라고, 멍청아. 나 기다려도 돌아가지 않아. 난 전진만 하는 인간이라 후진 같은 건 몰라. 벼랑으로 떨어지든 어디에 박혀 폭팔해 죽든 난 앞으로만 갈 꺼야. 뒤는 돌아보지도 않을 꺼야.” “기다릴게.....” 틈을 주지 않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바보 같은 짓이야.” “...... 기다릴 꺼야.” 아무리 내치고 뭐라고 욕해도 절대 변하지 않겠다는 듯 굳건한 그 목소리에 이젠 아예 체념해버렸다. 나 남의 일에 그렇게 끈질기게 관여할 정도로 맘 넓고 좋은 인간 아니니까, 니 인생 알아서 살아라. “그래, 평생 기다려라..... 나도 모르겠다. 니 인생 니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거냐?” “난 아직도 널 사랑해.” “아직도 사랑을 하든, 평생을 사랑하든 니 맘대로 해라. 하지만 내게 뭔가를 바라지는 마. 선택을 한 건 너야. 난 틀림없이 경고했어.” 무사히 말하며 뒤돌아 걷다 담배를 빼물고 불을 켜자 그 다 닳은 지포 라이터가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이 놈의 라이터.... 진짜 오래도 간다. 너, 그거 알아, 장인하? 니가 그 지긋지긋한 새끼의 물건을 아직도 지니고 있다는 거..... 너도 사실은 그 놈한테 아버지로서 사랑 받고 싶어서였다는 걸? 재수 없다고 니 손으로 죽이고도 넌..... 그가 아버지이길 바랬었어.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 알자 모든 게 무너져 버린 거야. 하, 그러고 보니 대단하네, 나. 첫사랑은 아버지 쪽 이복형에 마지막이라고 정한 사랑은 어머니 쪽 이복 동생이라...... 하하..... 팔자가 더러워도 유분수지. 재수 없어, 씨발.... 담배를 빨아들며 불을 붙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 없이 치달아 오는 파도 소리를 잠시 듣고 있다 손안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바다로 집어던졌다. 다시는 내 손에 돌아오지 못하도록 저 파도에 쓸려 영원히 사장되어 버리길 바라는 간절한 소망으로...... 사실 무거우니 저 던져진 바닥 안에 잠기겠지만.... 그래도 내 손으로 돌아오지는 않겠지. “자, 서울로 돌아가자! 아, 배 고프고 졸려.....” 담배를 물고 느긋이 걷다 돌아보자 멍하니 서있던 윤진이가 당황한 듯 나를 쳐다본다. 처음 보는 사람인 듯..... “내 얼굴에 껌 붙었냐?” “아니...... 너.......” “아아, 속 시원해.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 그래.” 살며시 웃으며 나를 따라 돌아서는 그 모습에 어쩌면 이 녀석도 내 친구 정도로 옆에 둘 수 없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뭐 그건 이 녀석에게 잔인한 일이겠지. 세하는 처음부터 친구였으니까 가능했지만 그렇게 격렬하게 사랑한 흔적이 남은 녀석을 친구로 둘 수는 없잖아. 차를 주차해놓은 곳으로 걸어가자 왠 일로 그 옆에 차 두 대가 더 와서 붙어 있었다. 뭐냐? 저건...... “인하야, 괜찮아?” 라고 달려나오는 상원이를 보고 차 옆에 모델처럼 붙어서 있던 권형이에게 눈을 흘기자 어깨만 으쓱하며 사악하게 미소짓는다. “너네 스토커냐? 지옥 끝까지 따라오겠다, 너희?” “지환이 형 유품 받았다며?” “응, 다 태웠어. 전부 다.....” “괜찮아?” “괜찮지 않으면 내가 저 바다에 빠져 죽을 줄 알았냐? 권형이 수영도 잘해.” 피식 웃으며 말하고 둘러보자 말없이 선 세하가 다가온다. “독한 자식아..... 때려서 미안하다.” “미안한 줄은 아냐? 몸 상태도 안좋은 거 패니 기분 찢어지디?” “뭐, 기분은 풀린 거 같아.” “아아, 그래? 넌 풀렸겠지만 난 쌓였어.” 바로 앞에 서서 나와 마주친 그 눈을 보고 빙그래 한 번 웃고는 주먹을 꽉 쥐고 힘을 넣었다. 그리고....... 한 대! 퍼억--- 복부를 세게 갈긴 주먹에 허리를 숙이며 고꾸라진 녀석을 보고 손을 털었다. 사실은 이 녀석도 코피 한 번 터트려줄까.... 했지만 이래 뵈도 얼굴 마담 격에 달하는 놈이라 그냥 한 대 치기만 한 거다. “욱, 속 시원하냐?” “아니, 별로 시원하진 않은데...... 보답은 나중에 해줄게, 조금씩! 아, 다들 몰려 내려오고 잘하는 짓이다!! 배고픈데 어디 가서 밥이나 먹자. 윤진이, 너도 갈래?” 돌아보며 멍하니 서있던 녀석에게 묻자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니, 올라가야지. 혼자 생각할 것도 있고..... 이제 잘 좀 자라, 장인하. 그리고 너도 기억해..... 나 너 진짜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한다는 거.” 주차장까지 몰아 치는 소금끼 어린 바다 향에 피식 웃으며 fuck you 를 날렸다. “난 늙어서 치매야. 금방 까먹을 껄.” “그럼 잊지 않게 자주 출몰해 줄게. 나 너 포기 안해.” “아, 니 맘대로 하세요. 니 꼴리는 대로 한다는 거 누가 말려? 평생을 기다리다 늙어 뒤져봐라.” 무심히 말하고는 내 손에 들고 있던 차키를 던져주자 그래도 농구 선수답게 잘도 받아든다. “타고 올라가. 우리 집 앞 주차장에 세워두고 열쇠는 경비실에 맡겨라.” “응.” 왠지 모든 게 꿈같아져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던 그 녀석에게도 이렇게 자연스러운 행동이 흘러간다. 아, 이제 나도 인간 되려나 보다. 이렇게 멋지게 행동하고 부드러워졌으니...... 훗, 아... 그럼 안되는데..... 내 신조는 변함이 없단 말야. 사람이 바뀌면 죽는다는데.... 조심해야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난 지구 멸망까지 산다니까. “권형아, 밥 먹으로 가자.” 가만히 나만 쳐다보던 녀석에게 다가가 목에 매달리자 팔을 뻗어 내 어깨를 안은 녀석이 오만한 표정으로 윤진이를 쳐다보며 웃는 그 꼴에 아, 역시 굉장히 꼬인 핏줄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이 녀석도 사람 도발하고 갈구는데 능숙하단 말야. 뭐, 나보다는 착한 거 갈아 그나마 다행이지만.... “뭐 먹을래?” “회나 먹을까, 바다에 왔으니.....” “그래.” 그 녀석의 허리에 팔을 감고 안겨들어 따뜻한 꿈을 꿔본다. 이제 개학을 하면 학교에 다니면서 이 녀석과 가끔 시간을 갖고, 이 녀석을 내 후배로 쳐넣은 다음에 고등학교 졸업하면 아예 나랑 살자고 하면 돼지. 그리고 봄이 오면 꽃놀이도 가고 둘이서 가끔 사고도 치고, 투닥거리면서 사는 거야. 이번에는 그냥 지나치는 백일몽 같은 게 아니라, 진짜 영원히 계속될 꿈을 꾸면 되는 거야. 까짓 꺼 평생 잠만 쳐자지, 뭐! “사랑한다, 유권형. 그러니까 내 속 좀 긁지 마!” “나도 사랑해요, 대신에 말 좀 잘 들어요!” 저 멀리 일렁거리는 파도를 보면서 걸음을 옮겨갔고 이번엔 진짜 획기적인 결심을 해본다. 아, 수영이나 배워볼까? ▷ Bonus Track Somewhere Over The Rainbow sung by Carol Kid 첫 학기의 첫 출근 날, 뭔가 다른 날과는 마음가짐 자체가 틀렸다. 뭐, 그렇다고 열심히 학교 생활에 임하고 학생들을 모두 갱생시키겠다는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열심히 애들하고 놀아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내가 무슨 잘난 인간이라고 애들 인생까지 일일이 돌아보고 챙겨주고 그러겠어?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면 일찍 죽는다잖아. 오래 살려면 평상심을 지켜야지. 여름 정장을 입고 거울을 확인한 후 그래도 첫날이니까... 라는 생각에 안경까지 끼어보았다. 그리고 어제 짧게 커트한 머리를 살짝 귀에 꽂고, 훗. 이 정도면 누가 봐도 성실하고 얌전한 담임의 표본이로군. “멋져♡” 아, 씨발.... 말해놓고 보니 올라오네. 거울 보고 자뻑한다는 인간들 보통 비위가 아닌 거야. 세상에, 어떻게 매일 쳐다보는 자기 얼굴을 보고 자뻑을 할까? 나 정도 미모도 스스로 질리는데..... 안 질린다면 그것들 변태가 틀림없어. 나르시즘도 정신병의 일종이라구. 아, 이런 얘기는 관두고 일단 가방 안의 소지품들을 확인하고 집안을 둘러 본 후 열쇠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간만에 빤딱 빤딱하게 닦은 차를 타고 스무스하게 운전을 하며 천천히 학교로 들어섰다. 가는 도중에 튼 라디오에서 왠 일로 이 시간에 Song2가 흘러나와 가는 내내 혼자 빽빽거리고 학교에 도착하자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차에서 내려 교무실로 올라갔다. 여기까지는 굉장히 밝은 하루의, 아니 새 학기의 시작이었다. 처음이 좋으면 반은 좋은 거라구, 시작을 잘해야 모든 일이 잘 풀리는 법이지. ꌓ “어이, 반장!” 하고 크게 소리치자 눈이 시뻘건 반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인사구령을 외친다. 하아, 이것도 간만에 들으니 반갑군, 그래. “안녕하세요.” “그래, 아직까지는 안녕하다. 결석, 지각?” “없어요.” “앞으로 결과, 조퇴할 놈들?” “없어요.” 우우 거리는 소리로 답하는 녀석들을 한 번 쭈욱 돌아보자 다들 가관들이다. 눈은 팅팅 부어서는..... 대체 어젯밤에 안자고 뭐했냐, 너희? “자, 우리 반 이번 학기의 목표는?” “무결석, 무지각, 무조퇴!” 일사분란한 굵직한 목소리들의 합창에 피식 웃어 보이고는 천천히 아침 조례를 시작하려 했는데..... 그게, 전달 사항들이 뭐였지? 대머리가 떠들어댈 때 옆에서 성준이 하고 씹느라, 딴 짓 했는데..... 뭐가 굉장히 많았던 거 같은데..... “...... 아, 급한 조례 사항은 없으니까 나중에 말해줄게. 자, 다들 퍼져 자든가, 숙제를 하든가 해라. 이번 학기도 말썽 피우면 죽는 거 알지?” “네에......” 라고 모음을 끌며 말이 끝나자 마자 엎어지는 녀석들을 천천히 돌아보고는 모처럼 담임의 임무에 충실할까하는 마음으로 1분단 쪽부터 천천히 뒷짐을 지고 돌기 시작했다. 아직 8월 말이라 살인적인 햇살이 내리쬐어 오지만 아예 견디기 힘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습기를 머금지 않은 더위는 꽤나 유쾌한 것으로 오히려 기분이 좋은 쪽에 가까웠다. 올 해는 작년보다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좋아. 해밸쭉 웃고는 천천히 걸어 상담실로 향해갔다. 가서 담배 한 대 피고 좀 놀다 수업에 들어가야지....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데 상담실 쪽의 한 구석에 애들이 우루루 몰려서있다. 뭔 일이래? 싸움났나? 왠지 좋은 예감이 들어 파다닥거리며 그 쪽으로 달려가자 뒤에서 오던 누군가가 머리를 툭 건들인다. “어? 왜?“ “뭐해?“ “뭐하긴 싸움 구경 난 거 같아서 구경하러 가지.“ 라고 명세녀석의 손까지 잡아끌고 애들이 모여든 틈으로 파고 들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씩씩거리며 어설프게 싸우고 있는 한 다섯 쯤 되는 교복덩어리들이었다. 한 순간 나와 명세의 등장으로 멈춰선 녀석들이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구경하던 일동 역시 일제히! “아,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해. 적당한 때 적당하게 말릴 테니까. 이왕 터진 거 끝까지 해봐야지. 하다 멈추면 욕구불만 생겨.” 방그래 웃으며 말하자 이 녀석들...... 진짜 싸운다. 허어, 꽤나 강심장들일세. “저 녀석들이!!” 라고 당장에 달려가려는 명세의 팔을 잡고 느긋이 그 쪽을 바라보자 귀청을 울리는 목소리가 터졌다. “말려야지!!” “아, 냅둬.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그게 말이 돼? 저게 애들 싸움이야?” “쟤들 아직 미성년자잖아, 그럼 애들이지, 어른이냐?” “일 커진단 말야. 누구 다치면 어떻게 해?” “다치는 것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거야.” 라고 명세를 한 번 쳐다보고 빙그래 웃는데 그 새 한 녀석이 카운트 펀치를 날렸고 그 위력에 날아간 한 녀석이 바닥에 널부러지며 기절을 감행한다. 그리고 흐르는 쌍코피..... 왠지 기분이 점점 좋아져서 킥킥거리며 웃는데 명세가 이젠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왜? 너는 저렇게 못 싸우니 열 받냐? “지금이 웃을 때야?” “괜찮아, 괜찮아. 애들은 맞고 싸우고 좀 그래야지..... 뭘 저런 일에까지 끼어들려고 하냐? 아, 저 놈 진짜 잘 싸우네.” 연신 킥킥거리면서도 명세가 절대 앞으로 가지 못하게 목을 꽉 쥐고 기대 듯 서있자 어느 새 일을 처리한 녀석이 이 쪽을 돌아본다. 1대 4에 KO승이라. 저것도 꽤 하네. “너, 3학년 진소운이지? 개학 첫날부터 뭐 하는 거야?” 자기도 꽤 맞았는지 흐르는 코피를 손등으로 대강 닦으려 이 쪽을 노려보는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그리고 한기를 담은 서늘한 눈빛이었다. “흐음......” “지금 니네가 패싸움이나 할 때야? 수능 며칠 남았다구?” 라고 선생답게 훈계를 해도 나한테 잡힌 채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떠벌떠벌대는 건 별로 위엄이 없는 걸. 열심히 울그락 불그락 하며 떠들어대는 녀석의 옆모습을 여전히 기댄 채로 빤히 바라보며 더 할 말이 없어 멈출 때까지 기다렸지만 열라 말 많은 새끼다, 이거. 한참 후 겨우 말 다했는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멈춘 녀석을 확인하고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물기를 머금은 촉촉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이 멈춰 있었다. 마치, 고여 흐르지 않는 웅덩이 같은 느낌의 녀석이었다. “야, 쪽 팔리게 뭘 잘했다고 서있냐? 일 처리했으면 냅다 뛰어야지.” 내 말에 살짝 인상을 찡그린 녀석이 나를 돌아본다. “어딜 야려? 누가 이런 데서 싸움하래? 일 복잡해지는 거 싫으니까, 그 새끼들 입 다물게 하고 빨리 반으로나 들어가. 아, 귀찮아...... 학교에서 싸움질을 하려면 안들키게나 할 것이지....” 혀를 차며 고개를 설래설래 젓고 명세의 목을 감은 채 그 복도를 지나치자 놀란 듯 한 그 시선이 따라온다. 뭐, 사실 선생으로서 훈계 좀 하고 벌도 주고 좀 때려주기고 하고 해야하는데....... 막말로....... 남의 반 애잖아. 우리반 녀석들이나, 농구부 놈들도 지겨워 죽겠는데 내가 왜 딴 반 놈들까지 책임을 져야 되는데? 지가 알아서 살아가야지, 안 그래? 난 애들에게 자주성을 키워주려는 것뿐이라구. 요즘 애들이 너무 나약하고 고통에 약한 이유가 뭔데? 다 지나친 과보호에 관심 때문이야. 자기가 벌린 일은 처리할 줄 알아야지.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저 녀석들 죽도록 싸운 거.....” “시끄러워, 주명세! 니 일이나 좀 잘하고 남의 일에 끼어 들어라. 애들 일은 애들이 알아서 하는 거야! 지들끼리 피 터지게 싸우든, 칼로 찔러 죽이든 알아서 하라 그래. 선생 박봉에 무슨 희생 정신이 투철하다고 애들 싸움까지 끼어 드냐? 넌 니 할 일이나 잘해, 임마!” “그게 무슨 소리야? 애들 관리하는 게 선생들 일인데!” “웃기네, 선생 일이 애들 관리하는 거라고 누가 그래?” “그럼 뭔데?” “선생은 자고로 애들 데리고 놀고, 시비 걸고, 발로 차고, 괴롭히는 직업이야! 내가 괜히 교사가 된 줄 알아? 새끼야, 넌 아직도 고래 쩍 생각을 하고 있냐?” “그게 말이 되는....... 읍!” 계속해서 짱알대려는 그 입을 목을 감았던 팔을 위로 들어 막아버리자 더욱 바둥거리며 발악을 한다. “아, 좀 닥쳐! 목소리만 열라 커서는! 씹새야, 너 아까 그 새끼 건들였음 죽었어. 그 놈 눈 보면 모르냐? 그런 것들 눈 뒤집히면 제일 위험한 것들이야.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라, 응? 나는 건들여도 별 탈 없지만 너는 크게 탈 날 놈이야, 제발 끼어 들지 좀 마! 학생들한테 칼 맞고 순직한 교사 명단에 오르고 싶냐?” “으으으웁!!” “아, 배 고프다구? 담배나 피러 가자!” “우우욱!!” “알았어, 임마. 나 말보로 있다.” “우우우웃!!!” “아, 좀 닥쳐라, 사내새끼가 열라 말도 많아!” “우우우우웁!” “알았어, 맨솔 사줄....... 어? 안녕하세요?” 하도 발광을 해대서 입을 틀어막은 채 바라본 곳에는 후훗...... 빛나리가 반짝거렸다. 그 세 가닥 드디어 치우셨군. 아, 시원해라. 저한테 감사하시라구요, 교감 선생님! “뭐하시는 겁니까? 장선생, 주선생?” 나름대로 근엄하게 말을 걸어보지만, 이 봐 대머리. 당신 나한테 약점 잡혔어, 그거 몰라? 우리 학교 고등학교 윤리 교사였던 사람이 말이야~ 이 쯤 하면 알아먹어야지. 하여간 요즘 선생들 진짜 찐따들이란 말야. “아, 주선생이 턱이 안닫힌다고 해서 닫아주느라구요. 제가 뼈를 잘 맞추거든요. 턱이 아예 빠지면 병원 가야 하잖아요?” 라고 하며 생긋 웃어주자 뭐 씹은 얼굴로 흠흠거리더니 모른 체 하며 걸음을 옮겨간다. 손을 양쪽으로 뻗어 살며시 들고 마치 경보라도 하 듯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말야. 대머리 주제에..... “아, 씨발.... 저 새끼는 툭하면 튀어나와!” “으욱!! 무슨 헛소리야? 누가 턱이 빠져!?” 잠시 방심한 사이 손을 떼어내고 뒤로 물러선 녀석이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소리를 꽥꽥 질러댄다. 씨발아, 그렇게 말을 해대는데 턱이 안빠지겠냐? 난 널 위해서 도와준 거야. “진짜 뭐든 지 맘대로냐?” “이제 알았냐?” “아니!! 전부터 알았어도 적응이 안돼!! 대체 그 알 수 없는 자신감과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난 예쁘니까 뭘해도 괜찮은 거야. 입 닥치고 수업이나 들어가라.” “아, 진짜!!!” “진짜 예쁘다구? 알았어, 접수해줄게. 그러게 있을 때 잘하지, 나 같은 미모 어디서 찾냐?” 해실거리면서 나간 내 말에 명세 녀석이 드디어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발광을 한다. 야, 너 많이 늘었다. 내 전매 특허인 지랄발광도 제법 하고. “으악!! 장인하가 드디어 미쳤어, 미쳤어!!!” “응, 미치도록 예쁘다구? 그런데 이미 헤어진 걸 어떻게 하냐? 아무리 예뻐도 덮치지는 마라, 지금 세 놈이 걸려서 머리 깨질 것 같으니까. 넌 그 뒤로 줄 서.” 피식 웃으며 돌아서자 아예 복도 벽에 머리를 박아대는 그 놈의 꼴에 뒤로 fuck you 한방을 날리고 여유 있게 상담실로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막 음침한 과학실을 지나치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나를 확하니 끌어당겨 안았다. “씹, 좇탱이같이 덮치면 죽..... 어?” 팔을 들어 명치를 가격하려는데 들리는 작은 웃음소리에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나를 끌어안고 킥킥거리고 있었다. 이 자식이 고 3이 수업은 안들어가고 어디서 땡땡이를 까는 거야? “너 여기서 뭐하냐?” “잤어요.” “이 음침한 데서?” 라고 그 먼지 쌓이고 거무튀튀한 과학실 안을 둘러보자 허리를 잡아채 억지로 돌려 안는다. 그리고 내 목가에 얼굴을 묻고 음미하 듯 깊이 향을 빨아들인다. “간지러워..... 너 뭐하냐?” 그 행위에 소름이 돋고 우스워져 킥킥거리자 더 세게 팔에 힘을 주는 바람에 한치의 틈도 없이 가슴이 맞닿아 완벽하게 끌어 안겼다. 그 무식한 힘에 허리가 빠져나갈 것 같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아져 그 목에 팔을 둘러 안았다. “..... 좋은 향이야, 그거 알아?” “뭘?” “너한테서 항상 아기 비누향 같은 게 나. 굉장히 순수하고 맑은 향이......” “뭐야, 그게? 나 아기비누 안써.” “응, 알아. 그런데 그냥 그런 향이 나...... 아라비아의 별..... 같아.” 그 말에 안겨있던 채로 살짝 몸이 굳었다. “왜?” 내 반응이 의외인 듯 안은 채로 귓가에 물어오는 음성에 고개를 젓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그 몸을 끌어당겨 안았다. 아라비아의 별..... 이라....... “아니...... 아무 것도 아냐.......” “오늘 몇 시에 끝나?” 다시 끌어안고 목에 이빨을 박는 그 감각에 간지러워져 킥킥거리자 한 손을 풀어 셔츠 깃을 살짝 내리고 입술이 닿은 부분을 빨아댄다. 낯뜨거운 자식..... “넌 몇 시에 끝나냐?” “연습하고...... 학원 갔다 오면 10시 정도?” “아하하..... 간지러워, 임마. 영어는 내가 가르쳐 준다니까.” “안돼. 같이 있으면 정신 산만해서 아무 것도 안돼. 너 너무 예쁘다고 했잖아.” 이제는 아예 대놓고 너란다. 세상에..... 내가 10살이나 어린놈하고 야자를 틀 줄은 몰랐다. “그럼 이 김에 도도 닦을 겸 도전해봐라. 그 성질 좀 죽이게.” “필요 없어. 니 성질 감당하려면 나도 성깔 좀 있어야지.” “아아, 그래.... 두 놈 다 성질 개차반에 미친놈처럼 날뛰면 참도 좋겠다. 하나라도 정상이라야지.” “쿠쿡, 그럼 니가 정상으로 돌아와 봐.” “그건 싫은데......” 그 부위를 마음껏 빨았는지 목가를 서서히 혀로 핥는 동작에 녀석의 목을 끌어당겨 깊숙이 안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녀석의 머리카락과 몸에서 느껴지는 체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너나 나나 무슨 동물도 아니고 왜 이렇게 서로의 냄새에 집착을 하는 건지....... 포옹하는 것도 꼭 매킹 같잖아. “사랑해, 장인하....” “응, 나도 사랑해. 이 이중인격 자식아.” 목가를 서서히 타고 올라오던 입술은 곧 내 입술에 닿았고 곧 입술을 그대로 빨아먹을 듯 겹쳐와 혀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온몸에 전율이 일 듯 깊게 감겨오는 혀와 숨소리, 그리고 맞닿은 심장의 고동...... 이 느낌을 잃고 싶지 않아,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이라도 사랑하고 싶어...... 유권형. 동생이든, 내 속을 박박 긁어놓든 널 사랑한단 말이다..... 이렇게나. 키스와 녀석의 향에 취해 눈을 감고 나 역시 다가오는 그 혀를 깊이 빨아들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자 이번엔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터트릴 듯 움켜쥐는 녀석의 힘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장선생, 유권형 학생?” 키스야, 보면 모르냐? “뭐..... 하시는 겁니까?” 아, 씨발, 봤으면 알아서 접수해!? 응? 한참 키스를 하던 중 날아온 낯익은 음성에 놀라 후다닥 떨어지자 반짝거리는 대머리가 우리 둘을 당장에라도 찢어죽일 듯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이 대머리 날 스토킹이라도 하는 거냐? 왜 이렇게 가는 곳 족족 나타나서 시비야, 시비는? “지금..... 뭐...... 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장․선․생.” 아, 골치야. 나 선생인 거 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 있어? 학생은 사복 안입고 다니잖아? 당신 세 가닥 뽑히더니 뇌까지 같이 뽑힌 거야? 유난히 선생을 강조하는 말에 저걸 이번엔 어떻게 처리하나.... 하고 한참을 고민하는데 내 옆에 서서 아쉽다는 듯 뺨과 귓가를 핥던 녀석이 그 대머리의 후광을 능가하는 초강력 분노 빔을 쏘아댄다. 허허...... “뭐하시는 겁니까!!!” 라는 말에 가서 한 대 치고 기절시켜서 꿈이라고 쇠놰를 시킬까, 아니면 또 다른 가쉽 거리를 만들까...... 하는 생각에 한참 고민을 하는데 열심히 나를 핥아대던 녀석이 문득 방향을 틀어 그 쪽으로 다가간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얼굴에는 조금의 미동조차 없앤 채 느릿하게,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무서운 기백과 힘을 담고 사냥감을 눈앞에 둔 야수처럼 위압적으로 다가간다. 저게 뭘 하려고 하는 건가? 물론, 가서 무릎 꿇고 빌려는 게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저 태도와 눈빛을 보라, 어디 빌려는 태도인가? 당장에 다가가서 니 목 물어뜯어 버린다는 표정이지? 팔짱을 끼고 다음의 모션을 기다리는데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은 그 녀석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대머리의 앞으로 바로 코가 마주칠 정도로 다가간다. 한 대 패려는 건가? 아니면 협박? 그것도 아니면...... 흐음.... 이럴 때의 내 행동패턴에 따르면 분명히 머리를 한 대 쳐서 기절시킨 후 그 귓가에 대고 ‘그건 꿈이야.’를 반복하며 기억을 잃게 하겠지만, 저 녀석은 어떨까? “흐음......” 실상은 몇 초 되지도 않는 시간이었지만 꽤나 지루하게 이어지는 눈 마주치기에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신경을 곤두세운 채 다음 반응을 기다리는데 녀석의 손이 서서히 올라간다. 그리고 그 안의 진동으로 녀석이 웃는 게 느껴졌다. 후훗, 이젠 그런 것에도 감이 오냐? 그래, 저 놈 니 쌍둥이나 해라. 씨발...... 그리고 다음 순간 뭔가 일어나려나 보다..... 하는 기대에 팔짱을 빼고 열심히 바라보자 녀석의 손이 떨고 있는 대머리의 뺨에 닿았다. 흐음, 저대로 머리를 쥐고 흔들어 기억을 소멸시키려는 건가? 뭐, 들켜도 상관없지만 골치 아프잖아. 지금 저 놈이랑 형제라는 핑계로 어울리고 있는데..... 다음 광경을 자세히 보기 위해 살짝 앞으로 나가 허리를 구부리고 정면이 아닌 비틀린 각도로 다음 상황을 기다리자 빙그래 웃고 있던 녀석이 단번에 대머리의 얼굴을 잡아 끌어올리는 게 보였다. 아, 박치기하려나 보다!! 라고 생각한 다음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건 대머리와 이중인격의 생생한 키스씬이었다. 아니다, 그건 입술 박치기였다!! “으아...... 웁!” 놀라서 새어나오려는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 바라보자 그야말로 주둥이 박치기를 한 자식이 몇 초간 그렇게 붙어있다 입술을 떼어낸다. 그 엽기적인 씬에 놀라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눈만 휘둥그래 떴다. 저거.... 초극악 악질이잖아!!! 부들부들 떨려오는 손에 하염없이 바라보자 녀석이 과학실 바닥에 그대로 침을 뱉었고, 그 침이 떨어짐과 동시에 대머리는 혼절상태로 들어갔다. 으아....... 잔인한 자식..... 극악무도한 놈!! 오뉴월의 뱀같은 자식!! 인간 말종 같은 새끼!! 저 놈이 나보다 한수 위일 줄이야!!! “...... 아, 재수 없어.....” 라고 한 마디 쏘고 돌아보는 녀석의 등에는 『건들지마! 그럼 이 꼴 돼!』라고 써붙어 있는 거 같았다. 저 극악무도한 자식, 나도 생각지 못했던 일을...... “나가자, 괜히 분위기 망쳤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돌아서는 그 모습이 한없이 섹시하고 댄디하고 멋져 보였건만 그 표정만은 왜 그리 오금이 저리도록 사악한 건데? “넌..... 진짜 악당이야......” 기막힌 연출에 놀라 쳐다보자 녀석이 나른한 미소를 짓는다. “누구도 만만치 않잖아요.” 다시 모범적인 농구 소년으로 돌아온 녀석이 미소짓자 그 음침한 과학실이 다 눈부실 정도였다. 그래, 그거야말로 후광이었다. 대머리의 번쩍임이 아니라 진정한 빛, 광(光)이라는 것. 난 그 때 처음으로 빛나는 인간이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진짜 빛난다, 빤딱빤딱......... 하아, 저것도 대머리 기질 있는 거 아냐? 난 대머리는 싫은데........ 얼굴을 기묘하게 비틀고 인상을 찡그리자 의아한 듯 한 쪽 눈썹만 치켜올린 녀석이 이 쪽으로 다가온다. “왜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교.......” 콰앙---- 순간 열려진 문틈으로 들어오려던 누군가를 보고 반사적으로 문을 발로 걷어차자 쾅하고 문이 닫기고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진다. “Oops!!” 어떻게 해? 무의식중에 세게 차버렸는데..... 문짝이 다 흔들거리는 걸 보니 이가 딱딱 갈렸다. 저거 아무래도 목소리가..... 선생 같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교감이 이 안에 들어온 걸 알고 있는 선생 중의 하나..... 지? 그럼 이 놈은 교감을, 나는 모모모선생을 기절시킨 건가? 그것도 과학실에서 밀회를 즐기다가....? “아, 진짜.... 무식하게 처리하네. 이럴 때는 쇼크요법이 최고라니까......” 씹새야!! 지금 니가 여유 있게 그딴 소리 지껄인 때냐? 이 상황을 돌아보라구, 상황을!!! “누구...... 였을까?” 불길한 예감에 차마 문은 열지 못하고 눈만 돌려 그 쪽을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한 녀석이 내게 다가와 손목을 잡아챈다. “왜?”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하나지.” “뭐?” “지금이 도망가야할 타이밍이라는 거!” “도마....?” 권형이가 얼빵하게 반응하는 나를 끌고 그 커다란 테이블이 놓인 과학실을 요리 조리 빠져나가 활짝 열린 창 틈으로 재빨리 빠져나가며 문턱에 걸터앉아 나를 끌어당긴다. 그 반응에 무의식적으로 창문틀을 잡고 뛰어내리는데...... 젠장!! 여기 2층이었어!? 이 씹새, 왜 나한테 말 안해준 거야? “으악!!!” 얼껼에 뛰어내린 2층 창문에서 바닥에 닫기 직전 초인적인 운동신경과 반사신경으로 중심을 잡고 겨우 낙상을 면하며 아래 화단에 발이 닿자 그대로 몸에 힘을 빼버렸다. 아아 진짜, 내가 왜 이 벌건 대낮에 2층 과학실에서 자살을 해야 하는 거냐? 하다 못해 10층 정도나 되면 몰라!! 쪽팔리게 2층에서 뛰어내리다 다쳤으면 내 명예에 막대한 금이 갔을 거라구! 이제까지 빠르고 날렵하지만 파워 있는 몸으로 살아왔는데!! 아우, 씨발 진짜.... 살다 살다 별 일을 다 겪네. 망할......... 세상에나, 내 애인이 대머리와 나눈 열렬한 키스씬을 목격하자마자 창문으로 떨어지다니!!! “괜찮아요?” 갑자기 태도를 바꿔 이번에는 깍듯이 선생님 대접을 하는 녀석의 얼굴에 왠지 욱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 열 받아라~ 아, 한 대 패주고 싶어라~ “넌..... 니 꼴릴 때만 존대말이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아프지 않아요?” “괜찮아..... 아, 씹탱, 이게 무슨 꼴이야!?” “이런 꼴이죠......” 라고 느긋하게 말하는 폼에 이 자식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악질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머리를 돌았다. 나 진짜 잘못 건든 거 같아. 내가 미친 짓 할 때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 맘 이제야 알 것 같다. 니네 진짜 성격 좋은 것들이야, 친구들아...... 내 친구였다면 절대 가만 안뒀어. 죽도록 패서 성질 고치든가, 아니면 진짜 죽여버렸지. “자, 이제 수업 들어가자구요. 장인하 선생님!” 이라고 상쾌하게 웃어 보이며 내 손을 잡아끄는 녀석의 손에 얼결에 일어서자 잠시 멈춰선 녀석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아, 끝까지 갈 수 있었는데.....” “웃기네. 학교에서 가긴 어딜 가?” “갈 수 있는데까지요. 사랑해요, 선생님!” 이라며 갑자기 입을 맞춰오는 그 상황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 나도 이러고 사는데 이 정도 악질이야, 귀엽지. 옆에서 나 악랄하다고 욕하지는 못할 거 아냐? “나도 사랑한다, 동생!” 스치 듯 지나간 키스에 빙그래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악의를 갖고 퍽-- 하고 들이박자 그래도 좋다고 웃기만 한다.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야, 이거..... 19년 내공으로 내 29년 내공을 파악하고 누르다니...... 츳, 저 녀석 대체 어떻게 자란 건지 한 번 확인이나 해보고 싶네? 입을 댓발은 내밀고 걸음을 옮기자 옆으로 다가온 녀석이 팔을 잡아끌며 방긋 웃는다. 허어, 저 미모에 눈물나게 환한 웃음이라니 옛날 같았으면 침 흘리면서 반겼을 것을...... 저 놈의 정체를 파악하고 나니 저 미소에 ‘이거 연기에요.’라는 표딱지가 붙은 거 같다. 아, 씨발..... 그렇지 않아도 꼬인 속 더 배배 틀리게 생겼잖아, 이거. “자, 우리의 미래를 위해 가자구요.” “미래는 개뿔! 그딴 게 어딨어? 이 세계에는 현실만 존재하는 거야!” 라고 툭하니 내뱉고 앞서가는 녀석을 따라가자 어느 새 발을 걸어오는 걸 살짝 피하고 옆으로 가자 피식 웃으며 마주봐온다. “시비 거는 거냐, 유권형?” 이마에 솟으려는 핏대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생글거리며 묻자 역시 만만치 않게 웃으며 대꾸해온다. “때때로 피해 가는 지혜도 필요해요.” “그거 알려주려고 발 걸었냐? 눈물나게 고맙다, 유권형!” 낮게 으르렁거리며 내쏘자 녀석이 살짝 눈꼬리를 접으며 웃어준다. “뭘요, 제 사랑의 힘이죠.” 사랑은 개뿔!! 한 번 만 더 사랑했으면 나 패겠다, 너! “그 사랑 두 번 만 받았다간 길바닥에서 구르고 코 깨지겠다!” 이른 가을의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다가온다. 내 인생에서 찾아온 이 녀석처럼 눈부시게 환하게, 그리고 따스하게...... 이제 이 녀석과 함께라면 평생을 약속할 수 있을 것이고 이렇게 사랑 받고 사랑하는 나날들만이 남아있다고 말해주는 거 같아 웃음이 흘렀다. 뭐, 그렇다고 내가 이제 와서 내 인생 주관을 바꾸고 착실하게 살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나도 이렇게 사랑 받고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생활이 있다는 거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그래서 삶은 살아볼 만 한 거라고.... 아무리 아파도 죽을 듯이 고통스러워도 살길 잘했다고 안으로만 되뇌인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이게 행복이라는 거라고..... 이제 나도 잡았다고...... 하루아침에 그 상처와 흔적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만 언젠가 나이가 들고, 이 녀석이 내 옆에 있어준다면 그 때는 웃으면서 모든 걸 말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하고, 사랑한다 속삭이고 너에게 말하지 못했던 모든 과거들 다 이야기해 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햇살이 너무 따사롭고 아름다워서.......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이 녀석의 향이 나를 미치도록 행복하게 만들어서...... 저 너머 어딘가엔 진짜 행복이란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그래서 찾아가면 된다고....... 속삭여본다. 장인하, 29세 - 아, 이제 곧 서른 된다. - 무지개를 넘어간다. End 깨어진 마리아(차성준)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유난히 여자 같은 얼굴과 특이한 취향 때문인지 반 아이들의 집단 따돌림에 헤매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역시 누군가가 나의 책상 안에 쓰레기를 잔뜩 넣어 놔 결국 그걸 다 치우고 책 상 앞에 앉았을 무렵에는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점점 어깨를 움츠리며 책상 안을 정리하고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이, 이 기집애가 왜 우리 학교에 와있는데?” 나를 가장 악질적으로 괴롭히는 뒷 번의 커다란 녀석이 킥킥대며 말을 했고 반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날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기집애는 여중으로 가야지, 응?” 내 앞에 놓인 가방을 들어 빙빙 돌리며 웃던 녀석은 가방 안의 내용물을 그대로 바닥으로 쏟아냈다. 너무 화가 나서.... 눈물이 날 만큼 화가 치밀고 슬펐지만 내겐 그 녀석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기에 언제나와 같이 쏟아진 내용물을 주워 책상 위에 올렸다. “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라며 윽박지르는 녀석. 그 놈은 우리 반의 대가리였고 이미 학교에서도 포기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반 아이들의 대부분은 그 녀석이 두려워 나를 도와주지도 어쩌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러니 내겐 그에게 어떤 반항의 말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저 쥐 죽은 듯 그 녀석과 반이 갈라지기만을 기다리며 순응하는 수 밖에. “씨팔, 이 새끼가!” 라며 익숙하게 손을 쳐드는 커다란 녀석의 움직임에 난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움츠려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손은 내 얼굴로 날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난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펴지 않은 채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실눈을 뜨고 앞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녀석을 보았다. 인형 같은 얼굴에 반에서 가장 키가 크던 마르고 하얗던 그 녀석을. “뭐야?” 나를 내리치려던 녀석의 손목을 움켜쥔 그 애는 입가에 비웃음을 흘리며 그 커다란 덩치의 녀석을 바라보았다. “뭐긴? 니 손 잡고 있지. 이 기집애한테 관심 있어?” “뭣?” 버럭 노성을 지르는 그 덩치에게 그 조각 같이 예쁜 아이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니라면 관둬. 추잡하잖아, 자기보다 약한 애들만 건드는 거 말야.” 그 인형 같은 얼굴로 차가운 말을 내뱉은 녀석은 「장인하」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피곤한 듯 멍한 눈을 갖고 있던 아이였다. 늘 학교에서는 잠을 자거나 멍하니 산을 바라보고 있어 그 존재감조차 투명하던,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얼굴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끌던 그런 존재였다. “넌 뭐야? 같은 기집애들끼리 도와주는 거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진 덩치가 말하자 그 인하라는 애는 샐쭉하니 웃으며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 같이 더러운 새끼만 보면 열이 캡 봤거든. 병신 새끼, 아작 낼 꺼면 제대로 내야지, 어설프게 괴롭히는 거 진짜 힘없는 새끼들이나 하는 짓 아냐? 이 놈이 진짜 맘에 안들면 어딘가를 부러뜨리든 얼굴을 짖이겨 버려. 그 정도도 못하면서 뒤에서 지저분하게 노는 거 재수 없어. 그렇게 생각 안해?” 우리 반, 아니 우리 학교에서 누구도 대들지 못하던 그 덩치에게 쏘아 말한 녀석은 너무나 예뻐서 눈물이 나올 정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려면 제대로 붙어. 못 할 꺼면 하지를 마. 아니면 이런 기집애랑 제대로 붙을 자신도 없는 거냐?” 계속해서 이죽거리는 인하의 말에 덩치는 바들 바들 떨며 인하가 잡고 있던 손목을 뿌리치려 했지만 떨리는 팔 때문인지 힘을 제대로 못 쓰고 있는 듯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예쁜 아이의 차가운 동공 속에는 살기가 언뜻 내비춰 있어서..... 무서워서.... 함부로 말도 걸지 못할 정도였다. “더 할 말 있어? 할 말 있으면 해 봐.” “너..... 장인하.......” “나랑 붙어 볼래? 붙어서 지면..... 넌 진짜 내 손에 죽는 거야.” 웃으면서 상상도 못할 말을 내뱉은 인하는 그 덩치를 도발하고 있었다. 반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고 나 역시 숨을 멈춘 채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예쁜 얼굴에 상처를 내고 싶지 않아서.... 차라리 내가 다치는 쪽이 나을 꺼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이 자식........” 그 차가운 눈과 베짱에 밀린 덩치가 이를 갈며 말하자 반 안은 순식간에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때였다. “무슨 일이야? 거기!” 막 교실로 들어온 담임의 목소리에 덩치는 순식간에 몸을 펄쩍 뛰며 녀석에게 잡힌 팔목을 빼려고 했지만 인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장인하, 뭐야?” 체육 담당의 담임이 크게 소리치자 모두들 숨을 죽인 채 그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별 거 아닌데요. 이 녀석이 성준이 가방을 뒤엎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야?” “성준이가 싫은가 봐요. 괴롭히더라구요. 그래서 말리고 있었어요.” 싱긋 웃으며 말한 녀석은 그제야 덩치를 놓아주었다. 담임은 그 녀석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그 덩치에게 따라오라는 말을 하고 사라졌다. 얼굴이 하얘진 채 담임에게 끌려나가던 덩치의 손목이 새빨갛게 부어 점점 파래지고 있다는 건.... 나의 착각이었을까? “그 녀석이 괴롭히냐?” 덩치가 교무실로 불려간 후 멍하니 앉은 나에게 그 인형같은 아이가 바로 앞 자리에 앉아 턱을 괴고 내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 녀석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이자 녀석은 손을 뻗어 내 턱을 잡아 올렸다. “사람이 말할 때는 눈을 보면서 들어야지. 난 눈 피하는 놈들 재수 없거든.” 억지로 자신의 시선과 같은 높이로 내 얼굴을 끌어올린 녀석은 다시 한 번 피식 웃더니 내 눈을 바라봤다. 그 눈은 뭔가... 내게 해명을 구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 “너, 구제불능이구나?” 작게 나간 내 말에 녀석은 잔인하게 반응해 왔다. 왜 피해자는 나인데...... 어째서 내가 구제불능이란 말을 들어야 하지? 그리고 도와준 건 자기 아닌가? 난 도와달라고 한 적 없었다. “흥, 재수 없어. 그렇게 자기만 세상 고민 다 진 척 슬픈 얼굴로 고개 숙이고 피해자인 척 하는 거 다 자기 합리화에 이기주의 아냐? ‘난 잘못한 거 없어. 다 너희가 나쁜 거야. 너흰 악당이고, 난 고고한 피해자야.’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 좋지? 니가 약하고 형편 없는 인간이라는 거 감춰지니까. 좋겠다, 자기만 불쌍해서!” 한 마디 한 마디 가슴에 와 박히는 말을 내쏜 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일어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게 어때서? 힘으로 안되는 거 알면서도 덤비는 게 멍청한 거 아냐? 내가 피해자인 게 내 잘못이야? 맘에 안들고 자기들과 다르다고 괴롭히는 놈들이 나쁜 거 아냐? 멍하니 당하지 않고만 있으면 어쩌라는 거야? 같이 맞서 싸우라고? 내겐 녀석들과 대항할 아무런 무기도 없는데.... 무모하게 저항하는 게 멍청한 거 아냐? 그 입술에서 나온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독설에 잠시 멍해져 책상을 내려다 보다 겨우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이미 이어폰을 꽂은 채 멍하니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사복제이던 학교에서 트랜디에 따라 승마바지와 후드티를 주로 입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늘 깔끔한 면 티에 일자형의 청바지만을 고집하던 녀석은 어떤 옷을 입어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외견을 갖고 있어 멍한 시선조차 영화의 한 컷이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언제나 뒷 자리에서 그렇게 앉아 있던 녀석은 그 날 처음으로 내 시야에 들어섰다. 가슴을 시리게 하는 독설과 나를 상처 입히는 칼을 품고.... 그렇게 내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터벅 터벅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나를 도발하던 녀석의 말에 하루 종일 우울한 기분을 어쩔 수가 없었다.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약자의 입장으로 치우칠 수 밖에 없는 게 어떻다는 거야?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예쁘고 똑똑할 수만은 없는 거잖아. 어디 선가 녀석이 재벌집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성적 역시 최상위권이지만 감투만은 절대로 싫다고 반장도 어떤 부장도 맡지 않은 채 늘 눈을 나른하게 뜨고 멍하니 있는 아름다운 소년. “후우.............” 길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야, 그 새끼가 감싸주니 기분 좋았냐?”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끔찍한 악몽과 같은 그 녀석이었다. 주변은 온통 주택가에 이미 시간은 보통 가정의 출입 시간을 지나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날 구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거니와 혹시나 여기서 맞고 돌아가기라도 한다면 어머니의 잔소리와 함께 학교 방문이 시작될 것이다. “왜? 입이 달라붙었냐? 새끼야?” 갑자기 복부를 강타하는 녀석의 발차기에 변변한 방어 한 번 못해보고 나가떠어졌다. 170이 넘는 키에 우락부락한 녀석과 140이 겨우 넘는 작은 체구의 내가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오늘 오전의 일이 오히려 내게는 화가 되어 버린 것이다. “쿡...... 아냐...... 난.......” “넌 뭐? 그 기집애 같은 놈이 감싸주니 좋았지? 그 개새끼!!” 계속해서 복부와 등을 걷어차는 그 힘에 난 맥 한 번 못추고 그렇게 널부러졌다. 이건 아니다.... 내가 원하던 평화와 빗나가고 있다. 그냥... 조용히..... 이 녀석과 다른 반이 되기만을 기다렸으면 끝났을 것을 니가 다 망쳐버린 거야, 장인하!! “아아...... 재미없어. 싸움도 좀 비슷한 놈들끼리 해야 재밌지, 이건 구경 꺼리도 아니잖아.” 순간 나를 강타하던 폭력이 멈추었고 그 낮은 목소리의 근원을 겨우 찾자 그 곳에는 쭈그리고 앉아 담배를 입에 물고 있던 그 녀석이 보였다. 장인하....... “넌, 뭐야?” 겁에 질린 듯 한 걸음 물러서는 덩치에게 인하는 빙그래 웃어주었다. “싸움 구경. 그런데 너무 재미없잖아......” 라며 피고 있던 담배를 집어던진 녀석은 서서히 이 쪽으로 다가왔다. 낮에 학교에서 본 차림 그대로에 가방 역시 그대로였다. 아마.... 저 녀석도 학원에 들렸거나 혹은 어딘가에서 놀다 오는 것인가.... 하는 쓸데 없는 의문에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싸움이란 건 말야....... 이렇게 해야지.” 라며 빙그래 웃고 난 녀석은 순식간에 덩치의 발을 걸어 녀석이 휘청거리는 사이 재빠르게 덩치의 멱살을 쥐고 뺨을 내리쳤다. 체구는 조금 작지만 키는 인하쪽이 더 컸기에 손쉽게 녀석을 잡고 좌우로 몇 대나 뺨을 내리치고 무릎으로 녀석의 복부를 올려쳤다. “커억.......” 입에서 누런 액체를 쏟아낸 덩치는 그대로 배를 안은 채 바닥을 대구르르 구르고 있었다. “흥, 이것도 별 거 아니잖아. 힘도 없는 새끼가......”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녀석의 등을 발로 한 대 더 찬 후 인하는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차가운 눈동자에 그대로 얼어버릴 듯 한 느낌이었다. 왜 이 놈은 나를 도와주면서 저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마치 인간 쓰레기를 보는 듯 한 멸시와 조롱이 담긴 차가운 눈동자였다. “병신..... 덤빌 근성도 없는 새끼가 이 시간에 혼자 다녀? 차라리 엄마 치마 쓰고 나돌아다니지 그래? 재수 없어.” 차갑게 내 쏜 녀석은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가방을 챙겨 그 곳을 떠났다. 방금 전의 육체적 폭력과 인하 녀석의 살기 어린 독설에 난 바닥에 주저앉은 채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몸이 아픈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인하가 내게 남겨준 경멸 어린 언어 폭력의 상처는 절대 치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음 날..... 덩치는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나 학교에 소문이라도 났을까 걱정해서일까, 아니면 인하에게 당한 자존심의 상처일까..... 교실에 앉아 수업 시간 도중에도 내내 인하가 신경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인하는 어제의 그 일은 자신과 전혀 무관한 얘기라는 듯 차분하게 수업을 들었고, 쉬는 시간에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초점이 잡히지 않는 그 시선에 난 녀석이 어떤 몽상에 빠져있는가 점점 궁금해졌다. 대체 뭐가 저 놈을 저렇게 초췌해 보이게 만드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뭐 들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다가가 이어폰을 꽂고 있는 녀석에게 말을 걸자 녀석은 멍한 시선을 돌려 초점을 맞춘 후 나의 눈을 정확히 바라보았다. “어.... 방해한 거라면.....” 왠지 그 눈빛에 또 상처를 받을 것 같아 뒤로 물러서는데 인하가 한 쪽 이어폰을 빼 내 귀에 대주었다. 이어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가요도 일반 팝송도 아닌 묘한 멜로디의 어두운 음악이었다. “이거...... 뭐야?” 겨우 상대해 주었다는 기분에 안도해 묻자 녀석이 빙그래 웃는다. 그 미소는 마치 천상의 마리아처럼 자애롭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모든 죄악과 상처를 순식간에 씻어줄 듯한 그런 미소. “엘리스 쿠퍼. 찢어지는 보컬이 좋지? 섹스할 때 나오는 쉰 목소리 같지 않아?” 너무 적나라한 녀석의 표현에 얼굴을 붉히며 뒤로 돌아서자 피식하고 웃은 녀석이 워크맨을 꺼내 테잎을 갈았다. 그리고 다시 내 귀에 흘러오는 음악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감미롭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어때?” “어..... 목소리가 너무 예뻐.” “헬렌 메릴이야. 음색이 굉장히 단아하지? 게다가 섹시하고.” “으응.... 나 음악은 잘 몰라.” “그래? 아는 게 아무 것도 없네.” 라며 피식 웃고 내 귀에서 이어폰을 뺏어간 녀석은 다시 음악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다정한 미소와 말투에 끌려 저 놈이 얼마나 잔인한 놈인지 잊고 있었던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내게 상처만 주지, 절대 따뜻한 위로의 말도 부드러운 인사도 건내지 않는 녀석을 나는 왜 이렇게까지 끌리고 있는 걸까? “...... 나 바보...... 아냐......” 작게 나간 내 말이 녀석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발을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무심한 태도에 눈물이 복받쳐 오를 정도로 화가 치밀고 서러웠지만 더 이상 그를 방해할 수는 없었다. 그의 화도 두려웠지만 더 이상 그 앞에 서있다가는 진짜 울어버릴 것 같아서였다. 그대로 교실을 뛰어나와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통을 끌어안고 다음 시간이 시작되기 전까지 실컷 울어버렸다. 그 녀석은.... 내게 상처를 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무엇이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지,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아무 해결책도 주지 않는 거야? 차라리 크게 욕을 하고 재수 없다고 나를 패는 쪽이 낫지 않아? 왜 그렇게 상냥하게 굴다 또 차가워지는데.... 왜 그렇게 나를 상처 입히는 말만 골라 하는 건데...... 도대체 녀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화장실을 나와 교실로 돌아갔고 아프다는 핑계로 하루는 땡땡이친 후 학원까지 빠지고 집으로 도망쳐 버렸다. 엄마에게는 아프다는 변명으로 돼지 않으니 학원이 휴강이라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나의 기이한 성벽과 외모, 그리고 어머니의 강압과 그에 대한 상대적 위축감으로 난 점점 내 안으로만 파고들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이 시간을 탈출하고 싶다는 열망과 이 안에 이대로 변화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점점 나를 혼란으로 몰아가고 있다. 누구든 내게 이 수렁 속에서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때의 난 무엇보다도 간절히 누군가를 원하고 있었다. 한참을 울다 잠이 들었고 등교시간도 늦어 허둥지둥 학교로 달려갔다. 그리고 교실에 도착했을 때 덩치는 여전히 결석이었고 맨 뒷 자리에 앉아 아예 눈을 감고 음악을 듣고 있는 녀석을 보고는 심장이 아파 와 둔한 동작으로 내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지금은 그 덩치보다 인하가 더 두려운 존재였다. 덩치의 괴롭힘은 인하의 독설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모처럼 조용한 아침의 연속에 가방을 열어 책을 넣으려는데 책이 깊숙히 들어가지 않았다. 또 쥐의 시체인가..... 아니면 면도칼인가 하는 생각에 안을 조심스레 헤집어 보니 작은 상자가 잡혔다. 아무래도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상자를 꺼내 열어보았다. 안열어봐도 되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와 절대 피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였다. 숨을 들이쉬고 상자를 열어보니 안에는 예쁘게 포장된 테잎과 책들이 들어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제목의 노래들과 낯선 책들. 그 안에는 헬렌 메릴과 엘리스 쿠퍼의 테잎도 함께 있었다. 설마하는 기분에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여전히 음악을 들으며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에 눈물이 나올 것도 같고 어딘지 기뻐지기도 해서 잠시 그것들을 바라보며 동작을 멈추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니? 너 나 좋아하는 거니? 아니면... 날 놀리고 있는 거니? 제발.... 날 힘들게 하지마. 네 얼굴 보면 울고 싶어진단 말야. 날 더 이상 괴롭게 하지마. 상냥하게 대할 꺼라면 다시 차가워 지지말고, 냉정하게 바라볼 꺼라면 이렇게 애정 어린 행동 같은 거는 하지 마. 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상처입고 아파하는 거 싫어. 나 너무 힘들단 말야. 녀석이 내게 준 책 위로 작은 물방울이 하나 떨어졌다. “나쁜 자식.......” 그리고 그 날부터 나는 서서히 변해 가기 시작했다. 학원을 자주 빠지고 집에서도 책을 편 채 멍하니 음악을 듣거나 공부를 하는 척 하며 인하가 선물한 책들을 읽었다. 엄마를 속이고 있다는 쾌감과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있다는 두근거림. 그 시간이 내겐 다시 없을 소중한 시간이 돼고 있었다. 덩치의 연속된 결석과 녀석과의 묘한 조우에 마음을 한 껏 놓고 있을 무렵 드디어 불행은 다가왔다. 몰래 읽던 소설과 테잎을 어머니한테 들켜버렸다. 어머니가 화를 내며 갈갈이 부서버린 테잎과 책들의 참상한 꼴에도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나마 들키지 않은 것들의 존재에 감사하며 학교로 그것들의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마음을 놓을 무렵 드디어 덩치까지 나타나 버렸다. 녀석은 나타나자 마자 나를 다시 괴롭혀 왔고 인하는 더 이상 나를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할까..... 하는 막막함에 주저 앉아 버렸던 어느 날 내가 소중히 하던 나머지 테잎과 책이 모두 쓰레기통에서 갈갈이 찢어진 채로 내 눈에 들어왔다. “나한테 반항하면 이렇게 되는 거야......” 쓰레기 통 앞에 선 내게 그렇게 말한 덩치는 내 목을 쥐고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반 안은 조용했고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서러움에..... 터지려는 울음을 겨우 겨우 막고 화장실로 뛰어가 얼굴을 씻고 하교시간이 지나서도 학교를 떠나지 않고 엉망이 된 쓰레기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누구든 나를 이 현실에서 끌고 나가 줄 사람이 필요했다. 누구든 좋으니..... 나를 끌어줄 사람을 원했다. 그게 그렇게까지 대단한 소원이었나? 단지..... 날 구해달라는 것인데..... 뚝뚝 떨어지는 눈물 방울을 보며 정신을 놓고 있는데 바로 귀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돼지 새끼, 퇴학시켜줄까? 아니면 두 번 다시 걸어다니지 못하게 해줄까?” 낮고 섹시한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바로 내 뒤에서 나를 안고 귓가에 속삭이던 그 목소리는 너무나 선정적이고 차가워서 순간 환청인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 무슨 소리야?” “니 책....... 테잎들..... 그 새끼 짓이지? 뭘 원해? 말만 해.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놀라 돌아보는 내 눈앞에는 바로 녀석의 잔인한 눈이 어려 있었다. 한 치의 감정도 이성도 어떤 감각도 들어있진 않은 얼음 같은 눈동자. 순간 심장이 쿵하니 내려앉았다. 농담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설픈 치기도 아니다. 이 녀석은 진심으로 녀석을 처리할 방법을 내게 선택하라고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 왜...... 내게 이러는 건데?” 녀석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에 겨우 입을 열자 인하는 웃으며 내 얼굴을 감싸쥐고 조용히 속삭였다. “글세..... 심심해서.... 가 아닐까? 아니면 니가 너무 맘에 안들어서?” “......... 왜.......” 순간적인 두려움에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나를 좋아한다고는 생각 안했지만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한다고도 생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싫어하는 녀석을 그렇게 번번히 도와줄 리 없을 테니까.... 난 그 녀석이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에 조금이라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라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얘기했잖아. 자기만 피해자인 척 하는 거 재수 없다고. 그게 싫으면 근성을 보여 봐. 아니면..... 나를 이용해 보든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내 눈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반 최고의 장신이자 전교에서, 아니 우리나라에서 이 나이 또래에서는 절대 보기 힘든 예쁜 얼굴을 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절대 질이 좋아보이지는 않는. “어떻게........ 하라는 거야........” “맘대로. 언제나 착한 척 당하기만 하고 사는 것보다는 비열하지만 군림하는 쪽이 낫지 않아?” “....... 난.......” “넌, 뭐? 그럴 배짱도 능력도 없다라는 소리는 집어쳐. 10살 짜리 꼬맹이도 살려고 지 몸 팔아 연명했어. 15살이나 쳐먹어서는 살려고 투쟁하는 게 무섭다는 말 따위 하지마. 열 받으니까.” 나를 비난하는 듯 한 눈빛과 신랄한 입술이 심장을 할퀴어냈다. 이 녀석은.... 어쩌면 이렇게도 가장 창피한 부분만 집요하게 파고드는 걸까? 왜 이렇게 차고 제 멋대로인데도 사람 마음을 휘어 잡는 걸까? 그리고 난 왜 이런 잔인한 놈에게 끌리는 거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을 상처 주고, 자기 외에 타인은 인간 취급도 안하는 듯 한 이런 악랄한 녀석을...... “난...... 잘 모르겠어........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네가 말해준다면 할 수 있지만 내게는 그런 걸 결정하고 생각할 여유같은 게 없어. 왜 이해를 못하는데..... “.......... Time Over!! 병신!” 머뭇거리는 내게 차갑게 내쏜 녀석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 번의 기회 따윈 없다는 듯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금의 거침도 없이 몸을 옮겨간다. 지금이 아니면...... 나 저 놈을 잡을 수 없겠지? 지금부터 녀석은 절대 날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난 평생을 겁쟁이로 살아야 하는 걸까? 고개를 숙이고 모두에게 죄를 지은 듯, 타고난 나의 성벽과 소심한 성격 때문에 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어째서? 이건 잘못된 게 아닌데..... 보통 사람들이 이성에 반응하 듯 나 역시 동성에게 끌리는 것 뿐인데 어째서, 내가 죄인처럼 살아야 하지? 너, 그대로 좋은 거냐? 차성준!! 어쩌면, 아니 확실히 두 번 다시 네게 손을 내밀지 않을 저 인간 같지 않은 폭군을 그냥 보내도 좋은 거냐? 네 인생을 바꿔 줄 단 하나의 카드를 짖이겨 버릴 셈이야? “........... 하... 야........” 작게 기어나가는 나의 부름에 녀석은 뒤를 보지 않은 채 손만을 흔들어 답한다. “인하.....야.” 여전히 돌아보지 않는 어깨. “장인하!!” “............” “야, 장인하!!!” 온 복도가 울리도록 날카롭게 날아간 내 목소리에 드디어 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미소를 띤 얼굴이었다. 천사 같은..... 순식간에 나의 죄책감과 양심 따위 날려버릴 듯 한 성모 마리아와 같은 자애로운 미소였다. “왜 할 말 있냐? 차성준!” 하며 나와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는 녀석의 얼굴에서 난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사람과 사람의 시선이 부딪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어째서 저 녀석이 시선을 피하는 녀석들을 싫어하는지..... 그리고 같은 높이의 시선으로 바라봐 지는 것이 관계의 정신적인 측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녀석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난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녀석이 내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것이 처음이라는 것도. “..... 보복따윈 필요 없어! 내가 벗어 날꺼야.....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목구멍에서 튀어나올 듯 뜨거운 것이 솟아올랐다. 굉장히 뜨겁고 아픈 것이.... 목구멍에 걸려 더 이상 넘어오질 않고 있었다. 어서 말해야 하는데...... 어서 말해서....... “그러니까, 뭐?” 완전히 몸을 돌려 나와 마주보며 내 말을 기다리는 녀석. 그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 잔인한 악당이 애초에 내게 원하던 것이 바로 이거라는 것을. 내 입에서 나올 단 한 마디를 기다리며 이제껏 나와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란 사실에 확신이 들었다. “그러니까...... 내 친구가....... 돼 줘. 나 니 옆에서 절대 부끄럽지 않을 인간이 될꺼야.” 저렇게 막되 먹은 인간의 옆에서 어떤 인간인들 안부끄러울까마는..... 난 그냥 그런 자신감이 생겼다. 모르겠다. 그 녀석을 만난 후로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고 정리되지도 않는다. 그저.... 그렇게 버려둘 뿐이다. 흘러가는 대로 갈 때까지 가본다면..... 알게되겠지. 이게 제대로 된 선택이었는지 잘못된 선택이었는지...... “뭐, 부끄러워도 상관없지만..... 근성만 있다면 좋아. 내 친구로 받아주지.” 살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그 때만큼은 누가 뭐래도 아름다운 천사 그 자체였다. 모든 아픔과 고통을 거둬들일 것 같은 자애로운 천사....... 물론 그 방식에 조금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 근성을 키울게.” “좋아, 받아주지. 대신 우는 소리 하면 가만 안둔다.” 라고 역시나 독한 소리를 하는 녀석이지만...... 이번 말은 그 전의 표독스러운 독기와는 다른 부드러움을 가진 마약과 같은 분위기였다. 뭐, 질은 더 나쁘겠지만 계속 공급만 해준다면 사는 게 즐겁지 않을까 한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좋은 걸 알려주지. 칠전팔기(七顚八起)! 근성을 보여라, 차성준!” 오른 손의 검지를 들어 흔들거리며 말한 녀석은 유쾌하게 웃으며 가방을 들고 하교길에 올랐다. 근성......... 과 칠전팔기........ 라........ 역시 그 수밖에 없는 건가? 다음 날이 되었다. 오늘도 여전히 인하는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였고 모처럼 난 새벽 이른 시간에 등교했다. 내가 도착한 시간이 6시 30분이었는데 먼저 와있던 인하는 대체 몇 시에 학교를 등교하는 걸까? 저 녀석은 왜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학교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지만 그건 진짜 친구가 된 후로 해결을 미루고 덩치를 기다렸다. 오늘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내 스스로의 길은 자신이 찾아가는 방법과 근성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만 나는 살아갈 수 있고 저 악마 같은 녀석도 내게 시선을 보내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시간이 서서히 흐르고 7시 20분이 되었을 무렵 손안에 고인 흥건한 땀을 보며 덩치가 등교하길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녀석이 도착했다. 먼저 와 자리에 앉아있는 나를 보며 피식 웃고는 가방을 집어던지고 내 쪽으로 다가오는 녀석을 위해 난 마음 속으로 내게 용기가 생기기를 수 없이 기도하고 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안된다고 해도 내 뒤엔 장인하가 있다. 이 놈이 절대 이길 수 없던 놈이다. 근성만 보인다면..... 치사한 방법이지만 인하는 틀림없이 나를 도와줄 것이다. “일찍 왔네. 왜 오늘은 화장 안해도 되더냐?” 짖꿎게 말하는 그 녀석의 앞에서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정시키며 인하 같은 말투로 쏘아올렸다. “너도 이르네. 오늘은 아침 길에 돈 뺏을 애들이 없었나 보지? 아니면 니가 약하다는 걸 애들이 알아버렸던가?” 억지 웃음을 띠고 나간 내 말에 녀석은 갑자기 안색이 하얘지더니 무서운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니가..... 간이 부었구나...... 차성준.....” “너야말로 힘도 없는 새끼가 만만한 녀석만 건드리는 게 저질 아냐?” “너... 죽고 싶냐?” “아니, 너 같은 녀석에게는 절대 죽지 않아. 죽더라도..... 혼자는 안죽어.” 가슴에 독을 품고 나간 내 말에 녀석은 흠칫하더니 내 멱살을 쥐고 끌어올렸다. 순간 숨을 헉- 하고 멈췄지만 이왕 시작한 싸움이라면 끝가지 가보기로 했다. 만약 안된다 해도...... 인하가 있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니, 잘못 먹은 건 너겠지. 힘만 세다고 꼴불견이야. 머리도 나쁜 게!” 라고 나간 내 비명에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내 얼굴을 때려 난 그대로 책상 사이로 떨어져 쓰러지고 말았다. 그 공포스러운 고통에 도망가고 싶어졌지만 절대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럼 난..... 평생을 겁쟁이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만은 죽기보다 싫다. “나쁜...... 자식........” 고통에 신음처럼 새어나간 내 말에 녀석의 발차기가 내 배에 직격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폭력. 머리가 어찔해지고 끈적한 붉은 액체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아니 당장에 일어나 잘못했다고 하고 싶었지만 그대로 덩치의 주먹과 발길질을 계속 당하는 쪽을 택했다. 그건..... 내 자유와 장인하라는 인간을 얻기 위한 일종의 고행과도 같은 과정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겨우 겨우 참아 내고 있었다. “개새끼!!!” “쿡....... 아는 욕이....... 쿨럭...... 그것밖에 없냐....... 병......신.....” 입안이 찢어졌는지 얼얼하니 정신이 알딸딸했지만 그래도 입을 노려 녀석을 한껏 비꼬아 주었다. 반 아이들은 모두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계속되는 고통에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갈 무렵 난 겨우 겨우 눈을 뜨고 저 멀리서 자리에 앉아 있는 인하를 볼 수 있었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재밌다는 듯, 비웃음도 허탈한 웃음도 아닌 즐거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제야 난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놈은 절대 나를 도와줄 녀석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기에 전에 날 도와줬던 두 번의 일은 녀석이 이미 내게 가진 기대감에 대한 선금이었다........ 고....... 독한 놈....... 등교시간 교실에서의 난동으로 덩치는 퇴학 처리 - 정확히는 자퇴 처리 -를 당하고 난 병원에서 12주 진단을 받았다. 뼈와 이빨은 이상이 없었지만 온 몸의 타박상과 머리의 상처가 꽤 커서 당장 얼마간은 입원을 해야했다. 따사로운 날씨에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나를 가장 괴롭히던 인간이 사라졌다. 이젠 누구도 날 괴롭히지 않을 것이고 인하는 나를 친구로 인정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변할까? 나는 게이고 여전히 어머니는 나를 압박할텐데. 그제야 난 알 수 있었다. 내가 두려워 하던 건 그 덩치가 아니라 이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장인하를 원하는 이유는 녀석의 곁에 있으면 언젠가 나도 그런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동경이라는 것을. 똑똑-- “네, 들어오세요.” 어머니의 극성으로 들어온 일인실의 문이 열리며 낯익은 누군가가 들어왔다. 커다란 키에 얇은 셔츠와 청바지, 그리고 여전히 차갑게 웃고 있는 얼굴로...... “괜찮냐?” “아아........ 그럭 저럭. 옆에 앉아.” 녀석이 내 문병을 온 것은 뜻밖에었지만 옆에 있던 간의 의자를 권했고 인하는 피식 웃으며 가방을 내리고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예쁜 녀석의 얼굴을 보자 녀석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알아버렸다. 이 녀석이 그 덩치를 없애기 위해 나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사실 덩치가 퇴학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녀석의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이 녀석을 위해서든지, 혹은 나를 위해서든지 이 놈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기보다 나를 이용해 녀석을 처리한 것이다. “너........ 나 이용한 거지?” 무겁게 나간 내 말에 인하는 여전히 웃으며 맞받아쳤다. “뭐, 그 자식 항상 눈에 거슬렸거든. 그렇다고 그냥 뒤엎긴 뭔가 아쉽고.... 속 시원히 퇴학당하니 좋지 않아?‘ 너무나 태연히 말하는 녀석의 표정은 사악함 그 자체였다. 대체...... 내가 왜 저런 놈에게 빠졌을까? “어때? 근성은 좀 생긴 거 같아?” “넘쳐 흐르는 거 같아.”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녀석이 눈으로 웃는다. “그래? 다행이네. 뭐, 어차피 나랑 다니려면 쌈박질을 수시로 해야 하니까..... 실력이 안되면 맷집이라도 좋아야지, 안 그래?” “그런 이유로 내가 목숨 걸고 그 놈이랑 붙었던 거냐?” “그렇지.......” 이거 진짜 나 잘못 걸린 거 아닐까? 이 자식, 하는 짓으로 봐선 아무리 봐도 제 정신이 아니다. 최악의 악당이든, 증세를 알 수 없는 정신병자이든 둘 중의 하나이다. “........... 내 인생이 허무해지려고 해.......” 어떤 황망함 같은 것이 나를 뚫고 지나가 아무렇게나 지껄이자 녀석이 내게 다가와 눈을 들이대며 웃으며 말한다. “어째서? 이렇게 쉬운 걸 괜히 참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 넌 이상해.” 그래, 진짜 이상해. 왜 그렇게 핵심 부분만 파고드는 건데? 나도 모르는 것들을 어떻게 그렇데 잘 알아내는 건데? “나, 원래 이상해. 나 상태가 별로 안좋거든.” 이라며 자기 왼쪽 관자노리에 손가락을 대고 빙글 빙글 돌리며 피식 웃는다. 그거 미쳤다는 뜻..... 이지? 역시 정신병자 쪽이 더 가능성이 있었던 거군. “아, 참고로 하나 더 말해줄까?” “뭘?” “그 돼지 새끼 말야.......” “응......?” “그 새끼 널 좋아했어. 그래서 더 괴롭혔겠지. 몰랐지?” 라며 싱긋 웃는데 당황해 할 기운도 나지 않았다. 그래, 날 좋아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간 일이지..... 그 녀석의 애정 표현 방법이 그게 다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내게 고통이라면 그런 애정따윈 없느니만 못해. 그런 거 다 사기야..... 진짜 좋아하면 그러면 안되는 거 아냐? “기운 없다. 그런 얘기 듣기도 싫어.” “흐응..... 의외네. 표정이라도 변할 줄 알았는데.” 노골적으로 실망스럽다는 녀석의 반응에 난 이 녀석의 친구가 되기로 한 걸 조금 재고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진짜 미친 놈이라면....... 내 앞날이 걱정이다. “너랑 있다 보니 세상 일이 다 별 거 아닌 걸로 보여서 그런다. 관두자..... 머리 아프다.” “꽤 대범해졌네. 그럼 자라. 난 간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든 녀석은 마지막으로 해사한 미소를 한 방 날리고 병실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뒷 모습에 왠지 불안해져 난 녀석을 한 번 불러세운다. “.......... 인하야......” “왜? 꼬맹이.” “내가 왜 꼬맹이야?” “중 2가 되도록 140대면 꼬맹이 아냐?” “나보다 작은 애도 있어.” “내 눈엔 꼬맹이야, 그래서 할 말은?” “........ 또 올 거야?” “응, 음료수 마시러 올게. 많이 챙겨 놔라.” 어깨를 으쓱하며 병실을 나간 녀석의 뒷모습을 문이 닫힐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사적인 일에 나를 이용해 먹은 극악무도한 인간이지만 무거운 굴레를 덜어주고 새로운 길을 개척해준 - 그 길이 그다지 사회에 부합하는 길이 아니더라 해도 - 인간이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악당. “친구....... 지?” 그 놈이 나의 친구, 장인하였다. “뭘 그렇게 생각해?” 어깨를 두드리며 커피 잔을 건내는 명세에게서 잔을 받아들고 녀석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이 녀석이..... 내게 그 장인하를 배신하게 한 녀석이다. 장인하의 말과 행동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하던 내게 장인하를 상처 입히게 한 녀석. 나보다 연하에 고지식하고, 무뚝뚝하고 재미 없는 녀석이지만 이 녀석의 손을 잡기 위해 난 15년 간을 따라온 손을 놓아야만 했다. 물론 그 녀석뿐만이 아니라 친구들도 역시지만. “그냥 중학교 때 생각이 나서.” “중학교?” “응, 인하 처음 만났을 때. 그 녀석 진짜 굉장했는데....... 진짜 나쁜 놈이었거든..... 그런데....” 인하 얘기에 얼굴이 굳어진 녀석의 어깨에 기대며 서서히 입을 열었다. “..... 진짜 예뻤어. 성모 마리아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리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제 멋대로였지. 그래서 끌렸어. 그 녀석은 세상이 뒤엎어져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을 것 같았거든. 그리고 날 구해줬지. 그 녀석 아니었으면 나..... 자살하거나, 나쁜 쪽으로 빠져버렸을 수도 있는데..... 그 놈이 손을 잡아 끌어줬어.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고, 더 악랄해져도 된다고 말해줬어.” “그런 거 그다지 바람직한 건 아니잖아요. 인하.... 선배랑 당신 사고방식은 너무 극단적이에요.” “응,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기지 못할 상황도 있는 거야. 그 때 내가, 인하가 그랬어. 뭐 그놈은 원래 극단적이지만.” “비관 자살하지 않는 게 신기하죠.”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명세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장인하가 비관 자살이라구? 설마....... “설마....... 너 진짜 인하 본 모습을 모르는구나.” “무슨 소리에요?” “장인하는 말이지..... 절대 비관해서 자살하거나 상처받거나 하지 않아. 장인하는 근성있고 굳세고 세상에서 제일 독하고 잔인한 놈이야. 그리고 죽을 꺼라면 핵폭탄이라도 터뜨려 누구든지 같이 죽지, 절대 혼자는 안죽을 껄..... 그러니까 너랑 나랑 살려둔 게 대단한 거야. 그 놈이라면 우리 둘 다 공사장에 묻고도 남을 놈이라구.” 진지한 내 말에 명세 놈이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뭔가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 그런 얘길 태연하게 하는 저의가 뭐에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만큼 그 놈이 우리를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거야. 그 놈은 한 번 배신한 놈은 절대로 두 번 보지 않아.” “성격 나쁘네요, 정말.” “그래...... 악질이지. 세계 최고의 악질 정신병자야.” 빙긋 웃으며 녀석의 어깨에 몸을 더욱 파고 들었다. 처음 녀석의 친구로 인정받고 썼던 각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장인하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하지 않는다........ “미안해요. 나 때문에 친구들하고.......” “그런 거 아냐. 걱정 하지 마.” 단단한 어깨를 두들기며 눈을 감는데 문득 핸드폰이 울려왔다. “네.” 서둘러 전화를 받자 수화기 안에서는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약간 높은 톤의 쇠된 음성. <야, 나와라.> “왜?” <그냥, 명세도 같이 있지? 같이 와. 할 말 있어.> “명세도?” <응, 「Knives」로! 빨리 와라.> “잠깐, 인하야!! 장인하!!” 이런...... 이렇게 순식간에 전화를 끊어버리다니. 역시..... 이 놈 성격은 전혀 개조를 하지 못했어. “어이, 여기!!” 갑작스런 부름에 명세까지 얼껼에 딸려나간 곳은 우리들의 아지트인 「Knives」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줄기차게 오고 있는 이 가게는 - 솔직히 가게라기 보다는 건물은 - 나와 인하 그리고 상원이와 세하 녀석 네 명만이 오던 곳으로 우리 외에 절대 다른 사람들은 달고 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곳이었다. 우리가 인정한 각자의 연인들만을 허락한 곳. 그래서 인하가 이 곳으로 명세를 함께 불렀다는 것은 단순한 만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건 인하가 나와 명세의 사이를 인정하고 용서하고 있다는 것..... 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늦었어. 빨리 나와야지.” 가게 안 쪽에 언제나 앉는 그 자리에는 인하와 우리 반의 유권형, 그리고 세하와 가끔 보던 세하의 오른팔이라던 그, 그리고 상원이와 낯 선 남자가 함께였다. “차가 막혔어.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명세와 자리를 잡고 앉자 인하가 한 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신경질적인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어야 부르냐? 그냥 간만에 모인 거지. 그리고 확실히 해 둘 일도 있고.” “.........?” 의아해 하면서도 일단 자리에 앉았다. 인하는 곧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고 잔과 술을 더 주문한 후 턱을 괴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왜?” “왜는...... 쳐다보면 안돼? 기분 나쁘냐?” 설마, 그렇게 예쁜 얼굴로 봐주는데...... 감지덕지지. 인하의 반응에 쓴 미소를 짓고 잔을 받아 들었다. “자, 이제 얘기를 하자. 흐음......” 인하는 뭔가 거창한 얘기를 꺼내려는 듯 옆에 놓인 작은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들었다. “뭐야?” 상원이가 굳은 표정으로 이미 빈 인하의 잔에 술을 따랐고 인하는 당연한 듯 잔을 받아들며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세 장의 각서로, 15년 전 내가 썼던 것과 13년 전 세하의 것, 그리고 20년 전의 상원이의 것이었다. “그건 왜?” 찔리는 바가 있어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묻자 인하는 생긋 웃으며 그 종이를 갈갈이 찢어갔다. 우리 세 명은...... 뜻 모르는 나머지 네 명이야 어쨌든..... 우리 셋은 그대로 숨을 멈추고 그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 각서를 여지껏 갖고 있었던 것도 대단하지만 그걸 우리 앞에서 폐기하는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그게 뭐야?” 명세가 우리의 반응에 놀란 듯 묻자 인하는 찢어진 종이 조각을 테이블 위에 던지고 느긋이 입을 열었다. “강상원, 차성준, 전세하의 충성 각서들. 이제 관두자. 이 딴 거 지겹잖아?” 옆에 놓인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빼물며 인하는 웃어 보였다. 15년 전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다름 없는 차갑고 예쁜 미소였다. “나한테..... 화난 거야? 장인하?” 떨리는 목소리로 나간 내 말에 인하가 나를 쏘아보고 다시 시선을 돌려 나머지 두 명을 훑어보았다. “흐응.....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런 것 때문은 아냐. 그냥..... 다 지겨워 져서 그래. 그리고 권형이가 원한 일이기도 하고....... 이제 됐지? 싸가지야! 니 소원대로 다 없앴다. 그러니 두 번 다시 그 딴 소리 지껄이지 마라.” 권형이를 돌아보며 인하가 말하자 권형이는 인하의 목을 끌어당겨 안고는 머리카락을 입을 맞추었다. 그 낯간지러운 행위에 인하는 킥킥거리는 웃음을 흘렸고 고개를 들어 권형이의 입술에 살짝 입술을 겹쳤다. “어린 놈 데리고 고생한다....... 아아, 이거 평생을 써먹으려고 했는데.” 아쉬운 듯 찢어진 종이들을 바라보며 인하는 서서히 우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다들 인사부터 해야지. 자, 여기는 내 반쪽 유권형..... 내 친구들이니까 너도 수족처럼 부려도 돼.” “선생님은 그런 사고방식이 문제에요.” 라며 한숨을 내쉰 녀석은 일단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고 그 반응에 인하는 기분 좋은 듯 쿠쿡대다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긴 니네 반 담임이자 내 15년 지기 친구인 차성준이고 저쪽은 성준이 애인이자 내 바로 전 애인 주명세, 그리고 저 쪽의 인간은 내 사촌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강상원이고 그 옆은 그 애인으로 성격 나쁜 아저씨고 저 쪽은 한 번 봤지? 내 13년지기 친구이자 조폭인 놈으로 전세하라고 한다. 그리고 옆은 그 애인 윤성우. 다 됐지? 소개해 주니 속 시원하냐?” “조금은........ 도대체가 인간 관계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보니......”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권형이의 목을 잡아끈 인하는 권형이의 머리카락에 뺨을 대고 기분 좋은 듯 비벼댔다. 저 고양이 같은 행동 역시 변함이 없다. 세하 녀석이 애정결핍증이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게 했던 그 닭살스러운 행동. “머리 헝클어져요. 왜 그렇게 사람 만지는 걸 좋아해요?” 라며 어느 새 인하의 팔을 떼고 일어나 다시 인하를 품에 안은 권형이가 잔을 채우며 말했고 인하는 그 반응에 히죽거리며 웃기만 한다. 다른 녀석이라면 틀림없이 억지로 패서라도 자기가 안고 있었을 것을, 저 악랄한 인간이 단 하나의 인간에게만 허용해 주는 특권이다. “아, 어디 싸움이라도 안나나? 왜 이렇게 재미 없어? 시사하게...... 흥......” 피던 담배를 끄고 입을 삐죽 내민 인하가 나를 바라봤다. “꼬맹아!” “왜? 이 비열한 자식아.” 녀석의 반응에 시큰둥하니 답하자 녀석이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재밌는 일 좀 만들어 봐. 어디 가서 애새끼 하나 물고 와라. 조져버리게.” 그 예쁜 얼굴로 여전히 악랄한 말만 내뱉는 건 여전하군. “나쁜 짓 하지 말아요, 언젠가 벌 받아요.” 그 나이 또래 치고는 지나치게 어른스럽고 근엄한 목소리로 권형이가 말하며 인하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 반응에 더욱 킬킬대는 인하. 예전보다 행복해 보이지만 상태는 그다지 호전되지 않은 것 같다. 저 놈의 정신상태는 정신병이라는 말로 밖에는 설명이 안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세계 최악의 악당일 테니...... 친구가 악당인 것보다는 정신병자인 게 낫지 않을까..... 아니, 그 반대인가? “흐응..... 술이나 마시자. 거기 성격 나쁜 아저씨, 인상 좀 펴. 다리미라도 갖다 대려줘?” “말하는 싸가지하고는......” 낯 선 얼굴의 그는 인하의 반응에 인상을 쓰면서도 잔을 들어 인하와 부딪쳐 주었다. 상원이의 애인이라구? 그런 얘긴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역시 인하만 알고 있었던 건가? “쿠쿡......” 갑자기 이상한 웃음소리를 내는 인하의 반응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바로 인하의 맞은 편에 앉은 성우라는 녀석의 새빨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 어디 안좋아요?” 그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듯 말하자 그는 고개를 저어 부인한다. “아니에요. 그런...... 게....” 라고는 하지만 얼굴색이 보통이 아니다. 열이라도 있는 건가? “야, 조폭, 니 애인 데리고 가라. 몸이 안좋은 모양인데.” 그렇게 말하자 세하 녀석도 그를 돌아보며 열을 재보곤 놀란 듯 급히 일어섰다. “가자. 안되겠다. 병원에라도.......” “병원 말고 화장실로 데려가주~” 갑작스런 인하의 말에 세하가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가보면 알아.” 라며 생긋 웃고는 마시던 잔을 비워나갔고 뭔지 알겠다는 듯 한 권형이는 인하의 목을 세게 감아쥐었다. “그런 짓 하지 말랬죠?” “...... 아아, 가끔의 심술은 인생을 사는 데에 행복을 준다고.” 설마........ 저 인간이...... 혹시나 하는 생각에 식은 땀을 흘리며 테이블 밑을 내려보자 또 슬리퍼를 끌고 나왔는지 모양 좋은 녀석의 맨 발이 저 앞의 성우 녀석의 중요한 부위에 닿아있는 것이 보였다. 저........... 놈...... “악랄한 자식........” 그제야 상원이도 알아챘는지 한숨을 쉬며 말했고 세하는 겨우 눈치를 채고 펄펄 뛰기 시작했다. “야!! 장인하!!! 이 순악질 깡패에 미친 놈아!!! 너!!!!!” 길길이 날뛰는 세하의 뒤에 있던 상원이가 그 팔을 잡아 말렸고 나도 한 마디 해주었다. “인간 같은 니가 참아라, 전세하. 저 정신병자를 상대로 뭘 한다구? 성우씨나 빨리 도와줘라.” “그래, 인하 너도 성우한테 사과해. 인간이 왜 그렇게 못된 짓만 골라하냐?” 상원이도 화가 났는지 낮은 목소리로 말해도 인하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자기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상쾌한 얼굴이었다. “흐응........ 세하 녀석이 너무 오래 버려둔 거 같길래 도와주려던 건데? 바람직한 부부관계의 지침서!”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웃던 놈은 손을 뻗어 세하에게 뭔가를 건내주었다. “근처의 호텔 스위트룸 키! 간만에 즐기라구, 계산은 내가 할테니. 미적거리는 남자 재미없잖아?” 얼껼에 키를 받아둔 세하 놈은 얼굴이 아예 파랗게 질린 성우를 데리고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그리고 나가면서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넌 좋은 일도 꼭 이렇게 악랄하게 해야 속이 풀리지? 진짜...... 악질천사......” “괜찮아, 나 예쁘잖아!” 제발, 그렇게 웃는 얼굴로 진지하게 그런 말은 하지 말아줄래? 장인하. “그래, 예뻐서 좋겠다. 평생 그 얼굴로 빌어먹고 살아라.” 비꼬는 세하의 말에도 인하는 오른 손을 들어 검지를 까딱거리며 웃는다. “아니지, 빌어먹고 사는 게 아니라 공양을 받아야지.” “진짜 저걸!!” 결국 세하는 본전도 못찾고 성우를 안아든 채 서둘러 이 안을 벗어났고 남은 여섯 명은 어색한 침묵에 시달려야했다. 대체 왜 나오라고 한 건지..... 각서 파기야 얼마든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걸. “인하야.........” 녀석에게 질려 나간 내 말에 인하는 담배를 하나 더 빼물며 싱글거렸다. 저거...... 진짜 상태가 갈 때까지 가고 있는 거 같아. 피가 섞인 권형이와 사귀면서 오히려 점점 더 어긋나고 있응 거 같다. 나, 대체 왜 저런 놈에게 빠졌었던 거지? “넌...... 인간이 대체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어떻게는........ 대강 살면 되는 거지.” 낄낄대며 답한 녀석은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빨았고 부드러운 눈으로 10살이나 어린 연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을 성모마리아라고 착각을 했다니.......” 작게 나간 내 말을 언제 들었는지 녀석이 입술을 떼고 눈만으로 나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흥, 웃기네. 지들 머리 속의 이미지대로 맞추고 그게 아니라면 이상한 놈이라니 그거 진짜 웃기는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대체 저 놈의 성격에는 15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한숨을 쉬며 명세를 보자 명세의 표정은 아주 가관이고 상원이는 그저 묵묵히 잔을 바라볼 뿐이다. 하긴 상원이 놈이야 인하가 사상 최악의 살인마라 해도 무조껀 적으로 믿을 놈이니.... “관두자, 장인하를 상대로 말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그래.” 빙긋 웃으며 상원이의 애인이라는 그와 잔을 부딪친 인하는 즐겁게 술을 마셨고 그도 막판에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비워갔다. 진짜..... 몇 번을 생각해도 이상한 놈. 어떻게 저렇게 제 멋대로에 비열할 수 있을까? 저 놈의 힘든 과거사야 둘째로 치고라도 이 녀석의 극악 무도한 성격은 늘 사람을 긴장하게 한다. 그래서...... 절대로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나중에 놀러나 가자. 나 여름에 합숙 들어가서 끝나면......” 여전히 기분 좋은 듯 웃는 그 얼굴에 저 장인하가 드디어 임자를 만났구나..... 라고 생각하며 나도 잔을 들어 명세와 한 잔을 마셨다. 어떻게 될지 모르면 그냥 끝까지 가보자. 그게 장인하를 만난 14세의 어느 날 배운 삶의 방법이었으니까. End 악질천사(전세하) Prologue 가끔씩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한다. 따뜻하고 행복했던 유년기, 조금은 혼란스러웠던 소년기를 지나 말 그대로 폭주해 버렸던 청년기까지...... 사실 그 녀석을 만나기 전의 나의 생활이란 보통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는 사소한 일들의 나열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 녀석을 만나고 나의 생활은 급변하기 시작했고 모든 것은 뒤집혀 버렸다. 내가 추구하던 이상, 꿈이라는 것 그다지 거창한 것들이 아니었음에도 어느 순간에인가 나의 괘도는 서서히 이탈해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까지 날아가 있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가도 가도 너무 엄청난 곳으로 떨어져 있어서..... 그 현실에 적응을 하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지금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녀석을 택했고, 내 손으로 녀석의 손을 맞잡았다. 지금도.... 자시 그 시절이 돌아온다면 나는 내게 내밀어지는 그 하얗고 차가운 손을 미련 없이 잡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평생을 망치게 하는 것이라 해도..... “뭐야?” 막 다음 가게로 옮겨가던 차 안에서 전화를 받고 소리 지르자 운전을 하던 성우가 놀라 뒤를 돌아본다. “아, 신경 쓰지 말고 운전해. 또 경찰서야?” <소리지르지 마, 개새끼야. 누군 오고 싶어서 왔냐? 애새끼들이 시비를 걸잖아. 아우, 내가 지금 고삐리들 하고 싸울 판이야?> “그래, 니 나이가 몇인데 애들하고 싸워서 경찰서에 끌려가냐? 이건 진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 <흥, 남이사! 빨리 와서 빼주기나 해. 너 이 쪽 관할이잖아.> “진짜, 왠수!! 왠수도 이런 왠수가 없어. 내가 이런 놈 밑에서 있었단 말야?” <닥치고 빨리 오기나 해, 나도 열 받아.> “알았어. 나잇 값 좀 해라!” <너나 잘해, 애새끼들 끼고 노는 주제에!> “한 번이다........ 지금 갈테니 시간이나 끌고 있어.” <좇 빠지게 튀어 와.> “진짜........ 차 돌려!” 핸드폰을 끄고 말하자 성우가 의아한 듯 뒤를 돌아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조금. 경찰서로 가라.” “애들이 사고라도.......” “아냐, 개인적인 일이다. 서둘러라.” “네, 형님.”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차를 돌리는 성우를 보고 참 편리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뭘 하든 어떤 요구를 하든 절대 거절하는 일이 없는 이 녀석은 왜 이런 조직에 있나 의심스러울 정도로 영리하고 깔끔한 느낌의 녀석으로 조금은 치사한 방법으로 손에 넣은.... 지금은 나에게 가장 소중한 녀석이다. 그 재수가 이 녀석만큼만 이성적이고 조용하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외모만은 왠만한 미녀 저리 가라하는 녀석이 성질은 꼭 뭐 같아서.....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을 알고 지낸 게 13년이군. 그러니까 정확히 고등학교 1학년 입학식이었지. 01. 입학식 날 아침, 날 깨워주지도 않고 출근해 버린 어머니 덕에 제대로 지각을 해버렸다. 뭐, 까짓 꺼 지각을 하든 결석을 하든 별 문제는 없겠지만 예의 상 오리엔테이션 날 봐놨던 학교 뒷 뜰을 통해 교실로 향했다. 입학식이야 하나 마나한 행사이니 미리 들어가 잠이나 잘까..... 하는 생각에서였는데 녀석을 만나 버렸다. 백주 대낮에, 그것도 바로 아래에서는 입학식이 한창 중인데 학교 뒷 뜰 바로 앞에서 당당히 담배를 피던 녀석을 보며 담 위에서 뛰어내리려던 나는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아우, 씹.....” 다행히 어디 다치지는 않았지만 찝찝한 기분에 일어서 그 쪽을 바라보자 나보다 조금 큰 키의 녀석이 그 화사한 얼굴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꽤 길었던 커트 머리 - 우리 학교는 무조껀 스포츠형이었다. - 에 아치형의 눈썹과 그 아래의 긴 눈매, 그리고 무엇보다 눈을 끌었던 하얗고 가느다란 목선. 키는 나보다 컸지만 한 대 치면 날아갈 듯 한 몸을 하고 아침 햇살에 비쳐 투명해 보이기까지 하는 피부라니..... 난, 이 학교가 공학이었나.... 하는 의심까지 하고 있었다. “어이, 너 괜찮냐?” 눈꼬리를 접으며 살짝 웃는 모습은 마치 천사강림을 보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입가에 물린 담배가 조금 그림을 망치기는 했어도 보기 드문 미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괜찮아..... 넌 뭐냐?” 이미 녀석의 목에 걸린 타이 색이 나와 같다는 걸 확인하고 말을 트자 그 녀석은 묘하게 피식거리며 웃었다. 한 쪽 입술 끝을 올리고 비웃는 듯 한 그 표정이 눈에 거슬렸다. “학생! 넌 뭐냐?” “나도 학생이다.” 3월의 꽃도 피지 않은 뒤뜰의 교정에서 녀석과 나는 그렇게 처음 만났다. 물론 그 후로 선생한테 걸려 교무실로 끌려가는 것도 같이였다. 02. 그리고 두 번 째의 만남은 어느 나른한 오후의 점심시간이었다. 그 녀석은 1반이었고 나는 7반이었으니 서로 만날 일은 없었지만 입학한지 불과 한 달 만에 녀석은 온 학교의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3학년의 짱먹은 녀석의 동생이자.... 유명한 걸레라고..... 뭐, 사실 남학교에서 그 정도의 미모라면 뒷다마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각오해야겠지만 녀석에 대한 소문이란 게 조금 악의에 차있어 신경을 자극했다. 워낙에 유명한 인간의 동생이니 뭐, 재벌집 아들이라는 것과 입양아라는 사실은 밝혀져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그 뒤의 소문들은 참으로 듣기 거북한 것들 투성이었다. 내가 비록 전 학교에서 세 번의 정학을 먹고 퇴학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진학을 하고, 입학하자마자 학생부의 주목할 만한 학생 리스트 1에 링크 되었다지만 그 녀석은 그런 류의 것과는 다른 문제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뭐, 가장 악의적인 소문만 고르자면 그 아버지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던가, 예전에 몸을 팔았다던가...... 혹은 형과도 그런 관계에 있다거나, 아무나 하게 해준다는..... 그런 것이었다. 그 후로 녀석을 두 어번 보기는 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 또래 남자애들의 전유물 같은 까만 얼굴과 땀 냄새, 그리고 뭔가 어수선한 느낌이 없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것 같은 녀석에게서는 늘 깨끗한 비누 향이 묻어났다. 처음에는 향수라도 쓰는 건가.... 했지만 그건 유아용 비누에서 나는 향이었다. 맑고 깨끗하고 어딘지 모를 향수(鄕愁)까지 불러일으키는 그 부드러운 향에 삭막한 남고의 청소년들이 나름대로 상상을 하며 소문을 지어냈던 것이다라고...... 난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간혹 그 사춘기의 소년들이 만들어냈다기엔 조금 악질적인 이야기들도 돌곤 했다. 그 날도 그런 이야기들이 한창인 중이었다. “....... 라니까. 확실해, 내가 봤다니까........” 점심시간, 순식간에 도시락을 비우고 잠을 청하려는데 또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돌았는지 반 녀석 하나가 그 녀석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진짜 남의 일에 관심도 많은 녀석들... 같으니. 자기 일에 저 정도의 열과 성을 보인다면 얼마나 좋을까? “둘이 안고 키스하고 있었어!” “진짜?” 여자라고는 교사 생활에 찌들고 찌든 노처녀들 밖에 없는 이 썰렁한 학교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녀석은 그렇게 종종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 내리고 있었다. “우리도 그 놈한테 한 번 가서 하게 해달라면 해줄까?” 순간 비웃음이 가득한 그 말에 인상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키려는데 내 바로 뒷자리의 의자가 넘어가는 소리가 교실에 울렸다. 의아한 생각에 그 쪽을 보니 반장이 쓰러진 의자의 다리 부분을 밟고 서있었다. 이름이...... 강상원이던가..... “남 씹을 시간 있으면 잠이나 퍼자지 그래? 그리고 너희들을 위해 말하는데 그 딴 얘기 그만 둬라. 그 새끼한테 죽고싶지 않으면.” 범생 같은 반장의 답지 않은 말에 한 순간 교실은 조용해졌다. 선배들이 나와 같은 서열로 인정한 놈이라서인지 시끄럽게 떠들던 녀석들이 분열하 듯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벨도 없는 새끼들, 그렇게 입 닫을 꺼면 뭐하러 얘기를 꺼내? 낮게 혀를 차며 다시 잠을 청하려 책상으로 고개를 묻는데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의 시원스런 목소리가 울렸다. “어이, 사촌!!! 밥 먹으러 가자!!” “아직 안 먹었어?‘ 반장의 묻는 소리에 돌아보니 방금 전까지 화제의 인물로 떠올랐던 바로 그 녀석이 서있었다. 감색의 정장형 교복에, 자켓 단추를 풀러 내리고 타이는 자켓 주머니 속에서 반쯤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까 까먹었어. 배 고파........” 무표정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반장은 할 수 없다는 듯 의자를 바로 세우고 녀석을 따라나섰다. 사촌이었군.... 그래서 이야기를 막은 거구나.... 그러고 보니 어딘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 쪽을 바라보는데 반장과 함께 나가던 녀석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나의 눈동자에 초점을 맞춰 노골적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 쳐다보다 녀석은 그 아름다운 얼굴로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려 반장과 함께 교실을 나섰다. 그게 녀석과 두 번 째의 만남이었다. 03. 세 번 째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옆 학교 녀석들과 조금 바디 커뮤니케이션을 나눈 일로 학생부에 끌려갔다 나오던 길이었다. 이미 하교 시간이 훨씬 지난 학교 안은 적막했고 남아있는 사람이래 봐야 나랑 그 학주, 그리고 수위들이 전부일 꺼라고 생각하고 뻣뻣한 목을 가누며 교실로 돌아가는 길, 7반을 막 지나려던 찰나에 이미 비어 있어야할 교실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어딘지 외설적인 움직임의 소리도.......... “제대로 조여 봐......” 뭘? 은밀한 상상에 불을 붙인 그 한 마디에 빼꼼히 고개를 들고 창문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보인 풍경은 과히 컬쳐 쇼크라 할 정도로 적나라한 광경이었다. 어두운 교실 안에서 책상을 짚고 서서 무릎까지 바지가 끌어내린 채 뒤에 선 남자의 남근을 받아들이는 학생의 모습..... 남자끼리 할 때 그곳을 사용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지만 생생한 그 광경은 일반인이었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하던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해, 맞고 싶어?” 뒤에 선 남자는 앞에서 힘겹게 버티고 선 녀석의 허리를 끌어당기며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자 힘겹게 입을 여는 녀석은..... 바로 그 놈이었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한 그 녀석....... “패 봐, 개새끼야. 나 때리면...... 니 아버지한테 까발릴테니까........” “주둥이 나불대는 실력은 굉장하군.” “씨발아..... 넌..... 니 아버지 아니었음 내 손에 죽었어. 윽.......” 뒤의 녀석이 신경질적으로 말하던 천사의 머리카락을 쥐어뜯 듯이 뒤로 당기자 녀석은 가는 신음 소리와 함께 활처럼 몸을 휘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 선정적이라 순간 사타구니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뜨거운 열기가 감기는 듯 한 느낌..... 심장이 크게 요동치며 짜릿함이 온 신경을 돌았다. “닥쳐....... 씨발.......” 녀석의 가느다란 신음과 헐떡거림에 아랫도리는 더욱 아파와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났다. 진짜였다.... 그저 소문만이 아니라, 진짜 그렇고 그런....... 뒤의 남자를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목소리와 실루엣만으로도 소문났던 그 녀석의 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틀림없이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주쳤던 이 학교의 짱이라던..... 녀석. 도망치 듯 집으로 돌아와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서둘러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잔뜩 성난 아래를 진정시켰다. 눈 앞에 생생히 떠오르던 그 광경...... 뒤로 휘어지던 가느다란 허리와 부드러운 목선, 새하얀 피부...... 그 녀석의 모든 것이 나를 미치게 하고 있었다. “형님...... 길이 막히는데요. 돌아가겠습니다.” “많이 막히나?” “네. 뒤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그래........” 앞을 꽉 메운 차들을 보며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또 핸드폰이 울렸다. “네.” <씨발아, 왜 안오고 지랄이야?> “길 막힌다, 진짜..... 넌 무슨 선생 말투가 그 모양이냐?” <내 입버릇 시궁창인 거 이제 알았냐?> “말을 말자. 새끼야...... 내가 이런 놈을....” 그 때는 몰랐지. 이 놈이 이렇게 입이 걸고 단순한 데다 다혈질이고 폭력적일 줄이야. 그 때는 그저 아름다운 얼굴에 청순 가련하고 연약한 피해자인 줄만 알았지. 후에 그 놈이 그 형 갈비를 부러뜨렸다는 얘기를 듣고도 절대 믿지 않았었다. 그러니까....... 그게 정확히 1학기 중간 고사 기간 중이었다. 04. “야야, 3학년 짱 갈비 나가서 입원했대.” 라며 1반의 소식통이 날아다니며 전하는 소식에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3학년 짱이라면 그 새끼의..... 형? 아니, 애인? “무슨 소리야?” “진짜야. 지금 학교에서 난리라구. 어디서 싸운 거 아니냐구!!” 그런 소식은 못들었는데..... 하고 기억을 더듬는 사이 그 차가운 얼굴의 반장이 벌떡 일어나 웅성거리는 반을 조용히 시켰다. “조용히 하고 넌 니네 반으로 가.” “상원아, 이거 보통 일이 아니라구!!! 다른 학교 새끼면.......” “다른 학교 애들 아니니까 돌아가.” “그럼 우리 학교 놈이라구?” 소리를 꽤액 지르는 1반 녀석의 반응에 반장이 표정을 굳히며 다시 말을 이었다. “집안 싸움이니까 문제 될 꺼 없어. 반으로 돌아가라.” 집안 싸움이라는 말에 문득 그 녀석이 떠올랐다. 의아한 눈으로 반장을 쳐다보자 녀석은 내게 싸늘한 시선을 쏘아준 후 자기 공부에 열중했다. 설마.... 그 얼굴을 하고 갈비를 부러뜨린다 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시험이 끝나고 찝찝한 기분에 담배를 찾아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험기간이라 학주 단속도 덜하고 하니 여유 있게 펴볼까.... 하고 갔는데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온 녀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5월의 새하얀 햇살을 받고 서있던 녀석은 어느 새 얇은 하복을 입은 채 담배를 피고 서있었다. 물론 타이는 여전히 바지 주머니 안에 넣어져 있었다. “왔냐?” 비틀린 웃음으로 나를 맞이한 녀석은 손가락을 까딱 까딱 흔들며 곁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 너 보러 온 거 아닌데. “날씨 좋다.......” 하얀 연기를 내뿜는 입술은 그린 듯 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섹시한 선에 도발 당해 또 다시 하반신에 후끈한 열이 올랐다. 망할..... 내가 호모새끼일 줄이야. “나...... 너 봤다.” “나도 너 봤어.” “3학년...... 장지환하고 하는 거 봤다구, 교실에서.”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의 눈이 싸늘해졌다. 화가 난 것도 아닌 그렇다고 기분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는 묘한 눈빛이었다. “그러냐? 그래서? 너도 나랑 하고 싶냐?” 아무래도 한 쪽 입술을 올리며 웃는 게 녀석의 버릇인 거 같다. 또 그렇게 웃는다. 사람을 도발하는 듯 한 그리고 사람을 비웃는 듯 한. “글세..... 그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발정한 건 사실이야. 너 예쁘잖아.” 솔직하게 나간 내 말에 녀석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전의 조소와는 다른 크고 쾌활한 웃음을. “그래, 예쁘지. 쿠쿡... 너 맘에 든다. 깝치지만 않으면 조지지는 않으마.” 피식 피식 웃음을 토해내며 연이어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절대 믿을 수 없는 언어들의 나열이었다. 이 자식..... 대체 한 문장에 욕이 몇 개가 들어가는 거야? “입버릇이...... 원래 그러냐?” “씨발, 그럼 너도 내가 장미성에 사는 공주님인 줄 알았냐?” 이죽거리며 담배를 든 내 앞에 지포라이터를 든 손을 올렸다. “비싼 거 갖고 있네?” 불을 받아 붙이며 말하자 또한 번 싱긋 웃는다. “돌아가신 아버...... 지 꺼. 유물로 받았지. 그런데 그거 알아?” “뭘?” “라이터로 불 붙여주는 거 말야.......” “그게 뭐?” 친구끼리 불 붙여주는 거야 별 일인가? “상대가 라이터로 불을 붙여주는 건 말야...... 너랑 같이 자고 싶다는 거야.” “켁!!” 순간 연기가 목에 걸려버렸다. 뭐? 같이 자........ 뭐가 뭐? “순진하긴...... 동정은 뗐냐? 병신아.” “너....... 누구더러 병신이래?” 나보다 아주 조금 더 큰 녀석을 쳐다보며 분위기를 잡는데도 이 놈은 꿈쩍도 안하고 웃기만 한다. 내가 1학년 짱이라는 거 알고나 있나? “너지. 그렇게 벌게진 얼굴로 벅벅대는데. 동정 안뗐으면 떼게 해줄까?” 새빨간 입술로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말에 그만 심장이 두근거려버렸다. 이러면... 안돼. 절대 넘어가서는 안된다. 만약 이 놈과 자버린다면 난 제 정신으로 있기 힘들 거 같아. “니가..... 무슨 수로?” “펠라? 아님 애널? 원하는 대로 해줄게. 나 꽤 잘해.” 라고 빙그래 웃는데 그 순간 해달라고 해버릴 뻔했다. 말하는 녀석의 입술이 너무 예뻐서 살짝 살짝 보이는 그 붉는 혀가 미치도록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절대 이 놈과는 자면 안된다는 막연한 느낌이 있었다. 중독되어 버릴 것 같았다. “필요 없어. 동정은 이미 뗏고 남자와의 섹스는 관심 없어.” “나 예쁘다며?” “예쁘지만..... 너랑 자는 건 무서워. 너... 나한테 상처 줄 거 같거든.” “.......... 소심하긴........” 라고 말하면서도 녀석의 눈은 웃고 있었다. 좋은 장난감을 찾은 어린 아이와 같은 해맑은 그 미소에 난 그만 넋을 놓고 바라보고 말았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아깝지 않은 남자도 있다. 그 흙투성이에 정신 사나운 사내아이들 중에 그렇게 꽃 같은 느낌의 소년도 있을 수 있다는 걸 그 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물론..... 그건 내가 아직 그 놈을 잘 몰랐기 때문에 가능했던 망상이었지만. “너 내 꼬봉해라.” “... 뭐?” 순간 내 귀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뭐라구? 내 「애인」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꼬봉」이라구? “내 밑으로 들어오라구. 이번에 대대적으로 2, 3학년 정리할 꺼다. 씹새끼들이 날 뭘로 보고 지랄들인지 모르겠지만 그 발정나 안달인 놈들 좇으로 만들어 놓을 예정이니...... 너도 나한테 깨지고 들어오느니 좋게 들어오는 쪽이 낫잖아. 뭐, 내가 시작 안해도 지들 짱 병원에 보내놨으니 곧 쳐들어 오겠지만......” “잠, 잠깐!!! 3학년 장지환 놈 갈비, 니 짓이라구?” 놀라 버럭 소리를 지르자 녀석이 한 쪽 손의 인지를 들어 좌우로 흔들더니 눈을 빤히 뜨고 말을 한다. “갈비만이 아니라 어깨뼈도 같이야. 자꾸 깝쭉거려서 말야. 아버지 계실 때는 봐줬지만.... 뭐, 아버지도 돌아가셨겠다. 신나게 두들겨 줬더니 금새 입 닫대. 흥, 좇만한 게 누구랑 맞짱을 뜰려고. 그 새끼 순 다구발이지. 별 거 아닌 놈이야. 힘도 없는 새끼가..... 츳!” 말을 다 하고 기분이 상한 듯 바닥에 침을 퉤액- 뱉는다. 이건... 꿈이야. 나의 천사가..... 그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저런 짓을 할 리 없어. 담배를 물고 침을 뱉고 욕을 하고 사람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씹새야, 표정이 왜 그래? 너도 내 얼굴하고 말투에 놀랐냐? 왜들 지들 멋대로 환상을 만들고 거기에 날 껴맞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난 원래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야.” “........ 그건 이해하겠는데....... 왜 내 발은 밟고 있는데?” 어느 사이엔가 다가와 내 발을 지긋이 밟고 있는 녀석의 힘에 발등이 얼얼해 묻자 녀석은 또 한 번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아프라구. 애새끼들은 폭력으로 다루지 않으면 무서운 걸 모르거든.” “너......... 악마냐?” “쿡, 마음대로 생각해. 그나 저나 결정하라구, 내 밑으로 들어올 거야, 말 거야.” “너..... 무슨 대책이나 있는 거야?” “아니. 난 그 딴 거 생각 안하고 움직여. 일단 중요한 건 행동력이니까. 눈에 거슬리면 조져놓고 조용하면 협박만 하지. 하지만 반항하면....... 죽지 않을만큼만 패지.” 눈은 웃고 입은 협박하고 손은 왜 내 거시기를 잡는 건데? 바지 위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내 다리 사이에 녀석의 오른 쪽 다리가 들어왔다. “놔.... 윽!!” 서둘러 손을 떼내려는데 내 팔목을 잡은 녀석의 힘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 자식......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거야? “아프게 안해. 잘해준다니까....... 말만 잘 들으면.” 천사 같은 얼굴을 바로 앞에 대고 말하는 녀석의 목소리에 허리가 녹아든다는 느낌을 알았다. 이대로 녀석을 덮쳐도 시원찮을 판에 왜 거기를 쥐고 있는 거야??? “응? 존말로 할 때 들어와라. 안그럼 니네 자손한테 굉장히 미안해 질거야.” “윽!!” 짜릿한 쾌감을 동반한 그 부분의 고통에 인상을 찌푸리자 녀석의 눈이 바로 내 눈 앞에 닿았다. 긴 속눈썹에 아름다운 다갈색 눈동자.... 그리고..... 부드러운 입술...... “으읍!!! 우우욱!!!!” 어느 새 내 입 안을 헤집고 다니는 녀석의 혀에 놀라 몸을 뒤로 빼려해도 택도 없는 얘기다. 내 팔뚝 반만한 놈의 팔에서는 믿을 수 없는 파워가 용솟음쳤다. 저 가느다란 녀석이... 바람불면 날아갈 것 같은 미소년이..... “우욱... 나의 첫 키스가............” 첫 키스는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전망 좋은 높은 건물 위에서 장미꽃 100송이의 프로포즈와 함께.... 라는 남의 꿈을 여지없이 깨버린 순간이었다. 첫 키스를, 반하기는 했지만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 은 아니지만... 사실.... - 사내녀석과 분위기 없는 학교 옥상에서, 그것도 담배를 피던 중에 남자의 중요한 부분을 잡혀버려 억지로 당하다니...... 그것도 지 밑으로 들어오라는 협박의 말과 함께!! “사내자식이 그 정도에 쪼잔하게 연연해하지마. 대답이나 해! 임마!! 라면서 내 무릎을 발로 툭툭 차는 녀석. 어떻게 이런 게..... 나의 첫 키스 상대일 수 있는 거야? 하필.... 얼굴만 예쁘고 성격은 최악인 녀석이.... “그래, 니 꼬봉이든 서방이든 맘대로 해라. 내가 미쳐!!!” 라며 소리를 버럭 지르자 녀석은 아주 예쁘게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훗, 잘해보자. No.2!! No.1은 나다!” 라면서 싱긋 웃고는 들고 있던 주머니에 있던 담배를 하나 꺼내 권해준다. 망할... 덕분에 담배가 다 타들어가는 것도 잊고 있었다. 다시 라이터를 들어 불을 켜주는 녀석을 경계해 이번엔 내가 라이터를 들고 직접 불을 붙였다. 아아, 저 얼굴에 성격만 다소곳하면...... 그럼 완전 천사였을텐데..... 길게 한숨을 내쉬어도 이미 파진 무덤! 고이 누을 일만 남았기에 스스로 관을 짜고 깊숙히 들어가는 수 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라면.. 이건 내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수 밖에. 05. 그리고 다음은..... 순식간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체육대회를 얼마 두지 않은 어느 날 운동장에서 열심히 뜀박질을 하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운동장 스탠드 위에서 쭈그려 앉아 왼손과 팔목에 붕대를 감은 채 운동장을 바라보던 녀석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야, 뭐해?” “응... 잠깐만.....” 열심히 농구를 하던 녀석이 하나 말을 걸자 손을 흔들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새하얀 햇살에 부서지는 피부는 저러다 타버리지 않을까 할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뭐하냐? 운동 안해?”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묻자 녀석이 피식 마른 웃음을 뱉어내며 입을 열었다. “하는데...... 귀찮아서 쉬는 중이야. 지금 행렬 준비하잖아.” “넌 뭐 하는데?” “100m 달리기랑 계주, 축구.” “많이 하네. 운동은 할 수 있냐?” 왠지 쓰러질 것 같은 녀석의 연약함에 걱정스러워 묻자 그 녀석은 또 푸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망할, 내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냐? 걱정 마라. 싸우다가 정학만 안 먹었으면 나도 어디든 운동부에 들어갔을 테니까.” “정학...... 먹었었냐?” 그 얼굴에 너무 의외의 일이라 묻자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 뜨린다. “애들 조지다가 직방으로 걸렸지. 현행범이라 어쩔 수가 없어서 말야.... 쿠쿡, 너 머리카락 부드럽네.” “아파, 임마.” 마구잡이로 움직이던 손이 일순 멈추더니 녀석이 내 머리를 자기 가슴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어, 어이.... 이거 왠지 안아울리는 포지션이 아닐까..... 하는데...... “저기, 놔줄래?” “싫은데..... 킥, 야 기억하냐?” “뭘?” “옥상에서..... 나 너랑 자도 상관없는데..... 나랑 잘래?” 그 무서운 말에 화들짝 놀라 떨어지자 녀석이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이거.... 진짜 악질인 놈 아냐? “왜 그렇게 놀라? 대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주겠다는 건데.” “어떻게...... 어떻게 남자랑 잘 생각을 하냐?” “어떻게는, 그냥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그 새끼 떨궈놓고 나니 그게 좀 아쉽네. 니 깔이 해준다니까.” 라면서 아주 즐겁다는 듯 웃는다. 이 자식, 아무래도 나 놀리고 있는 거지? 이 놈이 나 그냥 시험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퍼뜩 스쳐갔다. “너,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니가 맘에 들거든. 나랑 자면 잘해줄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체 이 녀석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뭘까? 나랑 진짜 자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단순히 나를 놀리는 것인지..... 아니면 나를 자신의 틀 안에 넣을지 어떨지 시험을 치고 있는 건가? “곤란해하잖아, 그만 둬. 인하야.” 혼람스러움에 이것저것 재고 있는 사이 익숙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장..... 아, 사촌이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이 놈 이름이 인하던가? 세상에, 아직까지 이름도 몰랐다니. “그런가? 이 놈 보기보다 순진하네. 니네 반은 연습 잘 하냐?” “그런 대로. 세하 괴롭히지 말고 가서 연습이나 해.” “세하? 아, 이 놈 이름이 세하냐? 그러냐?” 나를 보고 묻는 녀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또 끌어안는다. 켁, 이거 애정결핍증 아냐? “니 힘 얼마나 센 줄 알고 그래? 세하 숨막힌다.” 위에서 여전히 내려오는 반장의 말에도 인하라는 놈은 여전히 킥킥거리며 나를 끌어안고 부비부비해댄다. “이 녀석 느낌이 너무 좋은 걸. 나 이거랑 자도 돼지?” “그거야 니 맘이지, 나한테 물어보고 잤냐?” “너, 나 남자랑 자는 거 싫어하잖아.” “남자랑 자는 걸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때 니 상태가 문제지. 그렇게 멋대로 아무하고나 잘려고 하지만 아님 상관 안해. 미쳐서 날뛰지 말고 성질 죽여.” “나름대로 죽이고 있어. 아, 성준이다, 음료수 사왔냐?” 어느 새 나한테서 떨어져 나간 녀석의 팔 위를 보자 하얗고 조그만 녀석이 인하에게 음료수를 건냈다. 꽤나 미소년 측에 낀다는 작은 녀석은 나를 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옆자리에 앉았다. “마실래?” 갑자기 내게 콜라를 내미는 녀석 때문에 난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서야 했다. “아니, 됐어. 연습하러 가봐야 돼.” “그래. 가라..... 나랑 자고 싶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너 내 취향이거든.” 싱글 벙글 웃으며 음료수를 마시는 녀석 덕에 도 한 번 얼굴을 붉히고 반장과 스탠드를 떠났다. 5월의 뜨거운 햇살과 녀석의 환영이 뇌리에 남아 떨어지질 않았다. 아름다운 빛과 열기가 그 녀석과 함께 내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06. 그리고 다음은 내가 완전 녀석의 수하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는 사건에서였다. 야자를 끝내고 집에 돌아가던 길 간만에 한 잔 하고 가겠다고 근처의 자주 가는 가게로 들어서는데 옆 학교의 녀석들이 시비를 걸어왔다.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려다 도저히 그럴 상황이 되질 않아 가게 뒤쪽으로 녀석들을 끌고 가 돌아봤을 때였다. “젠장......” 망할 것들이 나를 잡으려고 아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뒤쪽에서 시커먼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1대 5정도만 되도 어떻게 치고 내빼보겠는데 이 자식들 수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아무나 데리고 다녔으면 편했을 것을. 성격상 누구와 함께 다니지 못한 게 한이다. 못해도 10주.... 라고 입술을 달짝거리고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주먹을 쥐는데 그 녀석들의 뒤쪽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미친 새끼가 이 다급한 상황에서 구경이야? “야, 늬들 진짜 비겁하다. 재밌는데.....” 그 목소리에 우르르 돌아선 녀석들의 떼 사이로 그, 인하가 보였다. 그리고 옆에는 그 예쁜 꼬맹이와 반장도 함께였다. “넌 뭐야? 저 새끼 깔이냐?” 패거리 중 리더로 보이는 놈이 말하자 왁자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새끼들이........ “아직은 아니지. 저게 날 안 먹거든. 내 서방 건들였으니 너희들은 죽어야 돼, 씹새들아!” 라며 빙글거리며 웃던 녀석이 옆의 작은 꼬마에게 가방을 던져주더니 교복 타이를 벗어 던졌다. “늬들 그대로 깨지면 거기 짱인지 뭔지 하는 새끼 거시기에 근사한 선물을 해줄게. 나 성(性)고문 전문이거든.,” 라고 웃더니 순식간에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반장 역시 녀석을 따라 뛰어들고 나도 달려들고..... 그 장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 가게는 거리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었고 그 가게의 뒤쪽은 역시나 더 안이라 개미 새끼 한 마리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었다. 그러니 그렇게 요란 뻑쩍지글하게 싸움을 해도 경찰은 올 생각을 안했고 그러다 보니 우린 여유롭게 싸움을 끝내고 녀석들을 바닥에 꿇린 채 나머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좇같은 새끼들, 늬들 일부러 노리고 있다 친 거지?” 인하는 바로 앞에 있는 짱인 것 같은 녀석을 무릎 꿇린 채로 발로 걷어 찼다. 놀라울 따름이다. 저 놈 싸우면서 아무리 맞아도 쓰러지지도 않았고 그 주먹의 괴력은 굉장했다. 싸움도 물론 잘하지만 포인트는....... 놀라운 맷집이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 뭐 어차피 그 학교 원정 갈 생각이었으니 별 상관은 없지만...... 아, 진짜 맘에 안드네. 새끼, 이거 면상도 졸라 찌그러져서는!” 다시 한 번 꿇어앉은 짱을 발로 찬 인하가 말하자 옆에서 가방을 들고 있던 작은 놈이 입을 열었다. “인하야,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그런 식의 말을 하면 안돼. 저 놈이 비록 비위 상할 정도로 못생기고 한 대 패주고 싶은 면상인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그런 인격모독의 말은 하는 건 예의가 아니잖아. 하도 맞아서 얼굴이 무너진 걸 수도 있으니.” “닥쳐라 꼬맹아. 저 새끼 바지나 벗겨.” “엣?” 하고 고개를 들고 보자 인하 녀석이 꼬마한테서 자기 타이를 받아들었다. 설마.... 진짜 뭐 할려는 건 아니겠지? 성.....고문? 설마... “뭐 할려고?” “성고문! 빨리 벗겨, 팬티까지 싸그리!” “이, 인하야... 그건 너무 악랄하지 않냐?” 남자애한테 그게 얼마나 창피한 일인 줄 알기에 인하를 돌아보자 인하는 한 쪽 눈썹을 올려 꿈틀하더니 또 인지를 들어 까딱거린다. 저것도 버릇인가? “뒤에서 패거리로 치는 게 더 비겁하지. 난 기분 좋게 해주려는 거야.” “그래도......” 꾸물대는 꼬맹이에게 인하는 날카로운 눈빛을 쏘았고 꼬마는 곧 발악을 하며 도망가려는 녀석의 바지를 훌러덩 벗겨버렸다. 차마 보기 민망한 광경에 시선을 돌리자 인하가 그 녀석의 앞으로 가서 그 부분을 가리고 꿇어앉아 있는 녀석을 발로 차 쓰러뜨리더니 그 부분에 자기 타이를 꽉 묶어 놓는다. “아팟!!!” “아프라고 한 거야. 야, 바지 줘.” 무릎 꿇고 앉아 벌을 서는 듯한 녀석들 사이로 손을 뻗자 꼬마가 벗겨놓은 바지를 건냈다. 재밌다는 듯 한 얼굴로 그 바지를 건내 받은 녀석은 묶은 곳 위에 놓고 그 위로 내려 않는다. 저게 뭔 짓을 할려고 저러나 해서 그 쪽을 바라보자 나를 보고 빙그래 웃고 녀석의 목을 다치지 않은 오른 손으로 쥐어 누르고 녀석의 중요한 부위에 닿아있는 엉덩이 부분을 묘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앗.........” 꼬맹이 입에서도 황당하다는 소리가 나왔고 그 앞에 꿇고 있던 녀석들이 모조리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상대는 180이 넘는 키에 괴력을 가진 무식한 놈이지만 얼굴만은 예술인 녀석이다. 게다가 달빛 사이로 비친 그 고혹적인 선이라니.... 나까지 흥분이 될 것 같아 시선을 돌리는데 깔려 있는 녀석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 사람 잡는 거다, 저거..... 잔인한 녀석. “하고 싶지? 그러게 말 듣지. 내가 전에 니네 새끼 하나 조져서 메시지 쳤잖아. 까불면 죽인다......고. 존 말로 할 때 알아서 기어 들어오지 왜 일을 복잡하게 하니? 난 눈에 뵈면 모조리 죽여버리고 싶은 새끼란 말야.” 녀석의 바지를 깔고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이는 녀석의 허리 놀림에 그 짱은 아예 거의 죽을 듯 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불쌍한 놈.... 이젠 동정까지 간다. 저런 악랄하고 야비한 놈에게 걸리다니.... 장인하, 날 도와준 건 좋은데 말이지..... 인간이 왜 그 모양이냐? 얼굴은 천사같이 생겨서 하는 짓은 인간 말종에 극악무도하기 그지 없잖아. 불쌍해라. 아이구, 인생이 처절해라. 저 자식 고자 되면 어쩔꺼냐? 인생 책임질래? “자아, 그럼 대답을 해봐. 니네 학교 정리하고 나한테 넘길래? 여기서 개망신 당할래?” “으흑...... 괴로.........” “강도를 좀 높혀볼까나?” 하고 싱긋 웃더니 녀석은 손을 뻗어 그 녀석의 교복 셔츠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저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미치겠지? 남자 성감대가 거기만 있는 게 아니라구. 어서 대답해 주 면 봐주지.” “개새..... 너.......” 헐떡거리며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한 녀석의 위에서 빙글거리던 인하는 다시 한 번 세게 내려앉으며 녀석의 목을 더욱 세게 쥐었다. “대답은? 빨리하면 할 수록 편해질텐데, 말야. 응?” “으......... 알았어, 시키는 대로 다할테니.... 하악........” 이제는 거의 죽을 듯 숨이 넘어가는 그 짱의 허리 위에 앉아있던 인하 는 그 대답에 만족했는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진즉에 그러지.” 라면서 그 녀석의 복부를 덮고 있던 바지를 걷고 그 밑의 타이를 후루 룩 풀어 집어던졌다. “자, 그럼 잘 처리해라. 우리는 간다.” 굉장히 상쾌한 얼굴로 싱긋 웃으며 그 악마는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 다. 그 손을..... 잡아야 하나.... 망설이는데 녀석이 싱글거리더니 다시 한 번 손을 내밀었다. “무서워?” “....... 사실은 좀 그래.” 솔직하게 말하자 유쾌하게 웃고는 다시 한 번 손을 흔든다. “잡아도 돼. 같이 자잔 말 안할게.” “.........” 자자고 해도 돼는데...... “다시 한 번 말한다, 너 내 친구 해라. 할 꺼면 내 손 잡아도 돼.” 그 말에 끌려서....... 꼬봉이 아니라 친구라는 말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 손을 잡아 버렸다. 차갑고 매끈한 느낌의 그 손의 느낌은 이후로 평 생을 나를 이끌고 있다. “가자!” “그래, 니가 짱이다.” 빙긋 웃으며 나 역시 그 손을 맞잡고 그 곳을 떠났다. 물론 그 사건의 원인이 된 것이 그 놈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얼마 안가서였다. 07. “저건.... 악마야.....” 알고 보니 놈은 나도 모르는 사이 학교를 뒤엎었고, 며칠 전의 그 싸움은 사실을 안 옆 학교 짱이 시비를 건 거였다. 물론 그들은 내가 그 잔인한 자식의 오른팔이라고 굳게 믿고 한 짓이었지만...... “말도 안돼.....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는......” 머리를 쥐어싸고 끙끙대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뭐야?” 그 작은 자극에 신경이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내가 날카롭게 대꾸하며 돌아보자 그 앞에는 잔인한 천사가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궁시렁 대? 나와라, 밥 먹으러 가자.” 라며 싱긋 웃는 얼굴은 내 눈 상태가 의심이 갈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지금 2교시 끝난 거야. 벌써 점심이야?” 그 얼굴에 왠지 맥이 빠져 답하자 붕대를 감은 왼손으로 내 머리를 부스스 흐트러 뜨리더니 귓가에 나즈막히 속삭인다. “상관없잖아. 2교시든 3교시든 내가 먹자면 먹는 거야.” 이거 진짜..... 악질에다 절대 상대하지 말아야할 인간형이 아닐까? 이렇게까지 제 멋대로인데다 이기적인 녀석에게 설득력이 있다니 말이야. 이 녀석의 억지는 존경스러울 정도로 사람을 설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학교 녀석들이 뒤로 욕을 하면서도 이 놈을 따르는 거겠지만. “너, 진짜 못된 놈이구나.” 인상을 찡그리며 나간 내 말에 녀석이 빙그래 웃더니 내 목에 매달려온다. 목가에 스치는 옅은 샴푸향과 볼을 간지럽히는 부드러운 머리카락. 이봐.... 순진한 사춘기 소년의 마음에 불지르지 말라구. “응, 나 못됐어. 하지만 예쁘잖아.” 라고 하는데..... 몇 번 당해보니 알겠다. 그 ‘예쁘다’ 라는 건 이녀석의 입버릇 같은 것이며 이 녀석은 거기에 굉장한 강박관념과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히려 극도로 폭력적 성향으로 치우친다는 사실. 이 얼굴이면 그저 입만 다물고 있으면 누구에게든 대접받는 건 일도 아닌데 이 녀석은 일부러 그 호의를 잔인하게 깍아내린다. 호의를 베풀려는 사람들의 마음 역시. 그래서 결론은 이 놈 상당히.... 꼬여 있다.... 라는 것, 그리고 가정교육 역시 그다지 잘 받은 거 같지는 않다는 것이다. 진짜로 이상한 놈.... “인하야!! 우리 다음 체육 수업이야. 지금 끌고 나가서 어쩔려는 거야?” 딱 잘라 말하는 것은 역시나 반장이었다. 묘하게도 반장은 이 놈의 페이스에 절대 휘말리지 않는다. 뚝심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이 놈에게 면역이 되었다고 해야 하나? 반장이 하는 걸 보면 이 녀석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게 보이는데, 어떻게 저렇게 냉정하고 칼같을 수 있는지.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반장이 무서워졌다. 이 얼굴을 보고 저렇게 딱딱한 소리를 해댈 수 있다는 건, 불감증이 거나 혹은 아예 인간의 미적 감각을 갖고 있지 않은 외계인이 아닐까? “알고 온 거야. 체육한테 아파서 양호실에 갔다고 하면 돼잖아? 난 다음 수업 음악이라 빠졌어.” 여전히 내 몸을 부대끼고 있는 녀석은 확실히 애정결핍증이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가 이 녀석처럼 좋은 향이 나는 것도 아니고 안기에 좋은 사이즈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끌어안고 있을 리가 없다. “안되는 건 안되는 거야, 인하, 너도 반으로 돌아가.” “싫어!! 상원아......... 나 좋아하지?” 뜬금 없이 나간 소리에 놀라 반장을 보자 반장은 눈 하나 깜빡 안하고 대꾸한다. “...... 그래, 좋아한다, 이 악질아.” “그래, 나 예쁘니까..... 그러니까 봐줘. 나 얘랑 밥 먹을 꺼야. 할 얘기도 있고.”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억지야!!! 대체 예쁘니까 좋아하고 봐주라니!!! 저런 인간차별적 발언을 아무렇게나 해도 되는거야? 반장, 설마 저런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겠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반장을 올려다보자 반장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4교시까지는 들어와야 돼. 안 그럼 결과야.” 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 체육복을 갈아입는다. 세상에....... 이게 대체 어느 나라의 언어래? 저런 말도 안되는 대화로 납득하는 거냐? 반장!!! “나가자!! 응?” 이라며 나를 잡아끈 녀석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더니 나를 거의 질질 끌다시피 해서 교실을 나섰다. 대체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냐? 컵라면과 빵을 사들고 도착한 곳은 불량학생들의 전형적인 아지트인 옥상이었다. 어디서 배웠는지 손쉽게 문을 따고 들어온 녀석은 문가에 기대앉더니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나도 그냥 암말 없이 라면만 먹었다. “있잖아...... 너 내 친구할 꺼지?” “하라며?” “응, 해.” 라면서 이 이상한 놈은 라면 국물을 후루룩 마시더니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빵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라 입을 다물고 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지... 그럴려면 나한테 충성 각서를 써줘야 하거든.” 빵을 오물거리며 나온 녀석의 말에 난 적지않게 충격을 받았다. 뭐, 충성각서? “뭔 소리냐?” “흐응.... 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잘 믿지를 못하거든. 그러니까..... 내 친구들한테는 꼭 각서를 받아둬. 그래야.... 오래 가거든.” “... 어떤 각서?” 각서야 쓰라면 쓰겠지만 왠지 그 내용이 궁금해져 묻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조항은 별 거 없어. 첫 째 절대 나를 배신하거나 버리지 않는다. 둘 째 나랑 절대 섹스하지 않는다. 셋째 날 좋아한다고 늘 말해줘야 한다. 그거야! 간단하지?” 입술 끝을 올리며 녀석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게.. 뭐냐? 보통 친구들 사이에서 걱정할 사항은 1번 밖에 없지 않냐? 어째서 너랑 섹스는 하면 안돼지만 좋아한다고 늘 말해줘야 하는데? 난 단순한 놈이라 좋아해, 좋아해.... 라고 하다가는 진짜 좋아하게 된다구. 너, 그런 거 알고나 하는 말이냐? “표정을 보니 맘에 안드는 모양이지만 어쩔 수 없어. 안그럼 친구들이 남아나질 않더라구. 대부분 2번 조항을 지키지 못해서 말야. 몸 버리고 친구 버리고..... 그런 바보 녀석들과는 친구하기 싫거든.” 백설기를 뜯어먹으며 말하는 녀석은 너무나 차분해서 엽기적일 정도였다. 어째, 이거 농담이 아닌 거 같지? “후우.. 좋아. 각서는 쓰겠지만 대신 너도 나한테 해줄 일이 있어. 친구란 거 어느 정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야 하는 거잖아? 내가 네게 충성 각서를 쓴다면 너도 내게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하지 않아?” 진지하게 말하며 눈동자를 응시하자 동공이 유난히 큰 녀석의 눈이 즐거운 듯 웃고 있었다. “그래, 뭘 원하는데?” “니 과거! 전부 다!” 내 조건에 녀석의 눈이 급속도로 차가워졌다. 하지만..... 이 정도에 굴할 수야 없지. 너도 친구 고르는 거 까다롭 듯이 나도 친구 고르는 거 무지하게 까다롭다구!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 내가 모르는 과거가 많지? 혹여 나중에라도 소문이나 다른 사람의 말로 그런 얘기 듣는 거 싫어. 그러니까 니가 말해줘. 한치 오해의 여지도 없이. 난 친구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신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친구는 난 친구로 인정 안해. 그게 설혹 네게 잔인한 일이 된다 해도..... 난 니 입으로 직접 듣고 싶고 그래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나중에 너에 대해 어떤 오해를 갖게 된다 해도 넌 할 말이 없는 거야.” 눈을 바라보며 정직하게 나간 내 말에 인하는 잠시 나를 노려보다 피식하니 시니컬한 웃음을 터뜨렸다. “........ 고양이 새낀 줄 알았더니 의외로 범이었군. 쿡...... 좋아. 조건 받아들이지.” 녀석은 그 예쁜 눈으로 싱긋 웃더니 빈 백설기 봉지를 꾸겨 바닥에 집어던지고 서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얘기를 하자면 길어. 너랑 나 이번 수업 결과다.” “상관없어.” 우리 아버지 왈, 친구를 얻음에 있어 소소한 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셨다. 물론 그 소소한 일에 수업을 빼먹는 게 포함될지 말지는 아버지의 마음이지만 일단 내겐 지금 이 상황이 가장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난 두 번 다시 녀석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단..... 나 알지? 우리 집 재벌이란 거.” “응.” “그런데 난 그 집 친자식이 아니거든.” “그것도 알아.” “흐음, 그럼 얘기가 쉽겠네. 나 열 살 때던가.... 엄마가 동생을 낳았다. 남동생이었는데 얼굴도, 이름도 가물가물해. 그런데 그 때 아버지 회사가 도산이 나 버린 거야. 지금에야 알았지만 사채를 쓴거 같았어. 결국 불어가는 사채이자를 갚지 못하고 아버지는 여기 저기 도망 다니셨지. 그러다 보니 막 태어난 애기는 시끄럽고 집안은 난장에 매일 매일이 지옥 같았어. 사채업자와 채무자들, 그리고 공장에 있던 노동자들이 매일 부수고 소리치고 엄마는 그걸 견디지 못해 동생만 데리고 어딘가로 가버린 거야. 뭐, 나야 열 살이었으니까... 어떻게든 살 수 있으니 동생이라도 데려간 게 다행이었지. 사실 우리 엄마 아빠,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날 끔찍하게 싫어했거든. 그 때는 왠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알 것 같아. 나 우리 아빠 자식이 아니었나 봐.... 그래서 그렇게 내가 싫었나 봐.” 상상도 못한 얘기에 내가 침을 꿀꺽 삼키자 녀석이 역시나 빙그래 웃으며 교복 주머니 안에서 은으로 된 가느다란 담배 케이스를 꺼내 담배를 물었다. “필래?” “...... 응.....” 왠지 모를 긴장감에 담배를 하나 받아들고 나머지 얘기를 들었다. “하여간 그래서 혼자 여기 저기 동냥 다니며 사는데 아버지한테 돈을 빌려준 사채업자들이 나타난 거야. 그래서 뭐, 그대로 끌려갔지. 열 살 짜리 꼬마가 뭘 할 수 있겠어? 처음에는 아버지 어딨냐.... 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온갖 욕설에 구타까지 당하고 며칠을 기절해 있었는지 몰라. 폭력이란 게 그렇게 무서운 건 줄 그 때 처음 알았거든. 그 때에는 왜 엄마 아빠가 날 찾으러 와주지 않나.... 하고 분해서 울었었지. 그러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니 그냥 알아지더라. 그 사람들 절대 나 찾으러 오지 않을 꺼라는 거 말야.... 그런 확신이 있었어. 어린애의 감은 무서운 거거든.”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녀석은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들이 마셨다. “그러다 보니 점점 머리가 맑게 개이고 정신이 또렷해졌어. 나 버린 그 사람들 때문에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깡패들 우두머리 같은 인간이 왔을 때 바지 자락을 잡고 매달렸지. 뭐든 다 할테니 살려달라고. 나 뭐든 다 할 수 있다고, 앵벌이라도 할테니 살려만 달라고 매달리니 그 사람 피식 웃더라. 내가 물건이래, 어떻게든 살아갈 놈이라더니.... 진짜 뭐든 할 꺼냐고... 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날 팔아 넘기더라. 그런데 있잖아, 그 변태 아저씨들 많이 다니는데. 그 중에 유독 어린이만 밝히는 것들이 있어서 말야, 날 그 쪽에 넘겼지. 돈은 아버지가 빌린 돈의 원금만큼은 받은 모양이야. 나 예쁘잖아?” 라며 날 바라보며 웃는다. 그 사악하고 차갑던 미소가 그 때만큼은 눈물이 날 만큼 슬퍼 보였다. “뭐, 그래서 거기서 실컷 구르다 어느 순간 눈 떠보니 몸은 엉망이지, 머리는 개판이지. 한 세 달 정도 지나고 나니 너무 아픈거야, 그래서 보니 나 불능이 돼버렸대. 남자 구실 못할 거라고 하니까 거기 있는 개새끼 오히려 좋아라 하더라. 어차피 내 얼굴엔 남자 꺼 필요 없다면서 입이 찢어지는데 그 새끼 아가리에 칼 쳐박고 싶은 거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 그러다가.... 한 1년인가 지나서였어. 나 키워주신 분, 그 아저씨를 만났지. 어떻게 된 건지 얼껼에 클럽에 들어온 아저씨가 말야, 날 보더니 울더라. 킥, 지 부모도 버린 자식 보고 생판 모르는 남이 눈물을 펑펑 쏟고는 날 데려가는 거야. 날 산 값에 배를 치루고 말야.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 뭐, 저딴 인간이 다 있나... 했어. 나사가 몇 개 빠지지 않고서야 볼 거 없는 10살 짜리 꼬마를 사려고 그 큰돈을 쓸 리가 없잖아? 그래서 절대 믿지 않았어. 또 어딘가로 팔려가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살 궁리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이 날 덥썩 입양을 시키더니 이름까지 새로 지어주고는 자기 아들을 하라는 거야. 그 집에는 이미 그 아저씨의 아들이 셋이나 있었는데.... 쿡, 그래서 처음에는 무슨 플레이인가... 라고 했는데 그 때부터 진짜 아빠처럼 구는거야. 처음에는 나도 경계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믿고 기대게 됐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봐. 아저씨 큰 아들이 그 쪽 변태였거든. 내가 불쌍하기도 하고 그 변태 아들놈 여기 저기 놀고 다니는 거 밝혀질까 봐, 아예 나를 사서 그 자식을 묶어두려 한 거였지. 그래서.... 뭐 큰 형이라는 작자한테 실컷 당하고 나니 다음은 그 빌어먹을 셋 째 놈이더라. 그 큰놈은 미국으로 가서 결혼해 버렸거든. 그 변태 새끼랑 결혼한 년이 불쌍하지. 흥......” “............” 너무나 엄청난 진실에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녀석이 툭툭 건드렸다. “손가락에 담배빵 낼래?”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서둘러 바닥에 버리고 녀석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잔인한 일인 줄은 알지만..... 이제 와서 되돌릴 수는 없다. “뭐,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아저씨가 덜컹 죽어 버린 거야. 그것도 나한테 엄청난 유산을 남기고 말이야. 뭐, 그래서 보니 나랑 계약을 한 건 그 아저씨잖아. 그리고 돈도 있겠다 해서..... 그 셋째 놈을 죽어라 패버렸지. 아마 당분간은 움직이기도 힘들꺼야. 어디 하나 못 쓰게 만들어 버릴려다가.... 그건 너무 심한 거 같아서 참았지. 뭐,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다.... 그 얘기야. 더 듣고 싶은 사항은?” 다른 담배를 하나 빼들며 말하는 녀석의 말에.. 난 가장 궁금했던 사실을 입에 담았다. “....... 너... 그래서 본명이나..... 친 가족은..... 찾지 않았어?” “개뿔 친가족은 무슨? 본명은 기억나지도 않고, 자기 이름도 기억 안나는 놈이 가족이 기억나겠냐? 내가 기억에서 일부러 지워버릴려고 한 것도 있겠지만.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인간들 내가 재산 물려받은 걸 알면 벌떼처럼 달려들 껄? 이제 와서 핏줄이네 어쩌네 하면서 달려드는 것도 기분 더럽고, 그 정도로 센치한 성격도 아냐. 어차피 뒤죽박죽 된 거라면 그냥 뒤죽박죽으로 내버려둬야지.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는 매듭도 있는 거야. 그런 건 가위로 시원하게 잘라버리던가, 그냥 꼬인 채로 내버려두는 게 좋아. 어설프게 풀려고 하다가는 더 꼬이거든.” 마지막 말을 끝내고 담배를 비벼 끈 녀석은 다시 빙긋 웃더니 마지막 말을 덧붙었다. “그런데....... 너 진짜 그 말을 믿니?” 진지하게 눈을 들여다 보는 녀석의 반응에 난 벙찐 반응을 해보였다. “응?” 눈을 깜빡거리며 멍할 내 얼굴에 녀석이 눈으로 먼저 웃더니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하하, 바보!! 다 거짓말!!! “어어?” 순간 어이가 없어 머리가 띵하니..... 또 속은 건가.... 라고 잠시 고민을 했지만 녀석의 웃음을 보고 알아 버렸다. 너 정말 힘들게 살았구나. 자기 얘기를 모두 거짓말로 치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살았구나. 그냥...... 그렇게 알아버렸다. 크게 웃어재끼는 그 녀석의 웃음소리에는 물기가 서렸고 그 녀석의 차가운 유리알 같은 눈에는 투명한 막이 있었으니까..... “그럼 그렇지, 이 순악질 깡패아!! 넌 진짜 악랄한 놈이야!!” 그 분위기에 등을 내리치며 웃으며 말하자 녀석이 싱긋 웃으며 내 어깨에 팔을 둘러왔다. 그 녀석도 내가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심전심이라고나 할까? “나 소설가 해도 되겠지? 키킥, 여기서 한숨 자고 내려갈까? 까짓 꺼 오전 수업 재끼지, 뭐!” “그래, 재끼자!!” 어차피 괘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내 팔자가 수업 하나 제대로 듣는다고 올바르게 돌아오겠니? 애초에 널 만난 시점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이니, 니 말대로 어디까지 가나 한 번 보자. 갈 때까지 가서..... 그래서 안된다면 다시 돌아오면 돼지, 뭐.... 그렇지? 너 같은 놈도 잘 살고 있는데 나 정도야 앞으로 시간도 기회도 얼마든지 열려있잖아. 08. 그리고 그 순간부터가 내 인생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이 녀석은 아주 악랄한 방법으로 2, 3학년들을 뒤엎고 학교의 짱을 먹었고 학교 깡패들의 오리엔테이션과 단체 모임까지 도모하는 반면 집을 나가는 놈들은 아주 죽을 쒀 놓는다 거나 삥을 뜯는 놈들은 적확히 10대만 녀석에게 맞아야 했다. 세 대 맞으면 정신이 아찔한 그 놈의 주먹을 10대 맞는다는 건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 100대 맞는 것보다 더 큰 데미지를 남겨주었다. 덕분에 학교의 질서는 확립되었고 몇 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근처의 모든 학교들을 장악해가서, 난 졸업 때까지 다섯 번의 정학을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3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진짜 가도 가도 너무 엄청난 곳으로 가있었다. 근처의 조폭에서 사정없이 들어오는 제의라니. 하아.... 우리 엄마 아빠가 알았다간 난리 났을 꺼다. “진로 어떻게 하지?” 혼자 살고 있는 녀석의 아파트에 죽 치고 앉아 한숨을 내쉬자 녀석이 나를 돌아보며 여전히 그 천사 같은 얼굴로 미소 짓는다. “왜?” “진로..... 대학 갈 성적은 안돼고.” “대학은 가지, 어디냐가 문제지.” “성적까지 좋은 너 같은 괴물하고 비교하지 마. 넌 대학 갈 거지?” 툭 내뱉듯 말하고 침대에 엎어지자 침대 근처에 있던 녀석이 침대 위로 턱을 괴고 나를 쿡쿡 찌른다. “왜?” “난 대학 가서 교사 될꺼야. 넌 뭘 하고 싶은데?” 방금.... 너무 엄청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뭐라고? 지금 니가 한 말 내가 제대로 들은 거냐? 교사라구?” “응.” “너, 전교 학생의 조직화... 같은 걸 꿈꾸고 있는 거냐?” 심각하게 묻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설마, 아저씨 유언이었거든. 나 어찌 될 지 모르니 꼭 교사가 되라구. 나 학교 싫어하지 않잖아, 게다가 사람들하고 부대끼며 살기에는 그 쪽이 짱이고. 나 갈 길은 그거나 조폭 밖에 없지. 그렇다고 회사 생활 같은 거 제대로 할 성격도 아니고 프리랜서 같은 전문직할 주제도 못돼고. 그런데 넌?” “글세.......” 이 놈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천사 같은 얼굴에 생각도 못할 끔찍한 일만 저지르고 다니는 주제에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지..... 이 녀석의 그 끈질긴 생명력과 근성을 생각한다면 그건 별 것도 아니지. 전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어쩌면 이 놈은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스쳤다. “니 길이니 니가 정해야지. 안된다면 다시 돌아와도 돼는 거고. 공부할 꺼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지?” 그 성격으로 잘도 그런 상식적은 말을 하는구나. 온 몸에 흉폭, 악랄, 잔인을 감고 다니는 놈이... 말이지. “글세.... 학력 고사 볼 자신은 없으니..... 내 갈 길을 찾아봐야겠지.” “니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변 눈 같은 거 신경쓸 필요 없잖아! 나 봐라!! 내가 대학 가서 교사한다면 누가 믿겠냐? 푸하하하!!” 당연하지. 그건 니가 들어갈 학교의 학생들을 걱정해서 일거다. “나도... 공부나 해볼까?” “해, 하면 돼지?” 그렇게 어려운 일을 쉽게 말하지 마. 나랑 같이 펑펑 놀고 책 펴는 걸 본 적이 없는 놈이 전교 10등 안에 든다는 거 상당히 벨 꼴리는 일인 거 모르지? “쉽게 말하지 마라. 이제까지 논 전적이 있는데 그게 돼냐? 너 처럼 운 좋은 놈 아니고서야!” “운이라니? 무슨 신소리야? 나 중학교 때까지 쉬지도 못하고 공부 했다구. 몰랐냐? 나 고등학교 들어올 때 수석이었어. 공부를 늦게 시작했잖아. 그래서 그 아저씨가 전과목 과외 붙여서 중 3 때 고 3 과정까지 다 떼고 들어왔어. 니가 몰라서 그렇지, 그게 얼마나 끔직한 일인 줄 아냐? 그 집에 들어간 게 11살 때니까 그 때부터 5년 간 밥 먹고 자고 그 미친 새끼한테 당하는 시간만 빼면 매일 공부만 했다구. 학교 수업 끝나고 와서 하루에 못해도 8시간은 공부했다.” 너무 엄청난 말에 놀라 쳐다보자 녀석이 어깨를 으쓱한다. “말도 안돼. 난 그럼 미쳐 버릴꺼야.” “죽기 살기로 덤벼 봐, 공부하는 거 별 거 아냐. 그 미친 새끼에 대한 저주를 공책과 책에 쏟아 부었거든. 두고 봐라, 개새끼야, 내가 널 뛰어넘어 줄꺼다. 그 때는 너 고자로 만들어 버리고 아가리에 똥 쳐 바를꺼다..... 뭐, 그런 생각으로 책한테 분풀이를 했지. 심할 때는 너무 열 받아서 그 새끼가 좋아하던 영문 소설을 통째로 암기해서 그 새끼 앞에서 줄줄줄 읊었던 적도 있거든.” “..... 독한 놈......” 다른 녀석이 그랬다면 진짜 갸륵하구나 라고 했겠지만 이 놈이라면 반응이 알만 하다. 진짜 상상을 초월한 악질이다, 이거. 이 놈 친구이길 잘했지. 적이었다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 보복할지 알 수 없는 놈이다. “진짜..... 니 독기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겠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까지 사악할 수가 있냐? 너 지고는 못살지? 죽어도 미안하단 말은 안하지?” “당연하지. 난 당하고 사느니 그 새끼랑 동반자살할 껄. 절대로 혼자는 안죽어. 피해자인 척 할 마음도 없어, 내 인생은 왜 이래... 하며 한탄하고 내 인생 버릴 맘도 없어. 난 그 더러운 새끼들이 후회하고 눈물 흘리며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 때까지 버틸꺼야. 그 씹새들도 자기 새끼들 낳고 살다보면 죄 지은 거 알겠지. 아니면 똑같은 방법으로 당하게 해주던가? 그 새끼들 덕에 내 인생 버리고 살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나 같은 환경에 이 정도 살고 있으면 대단한 거 아냐? 그래서 별것도 아닌 일로 자살하고 죽는다 지랄하는 놈들 보면 캡 열 받고 벨 꼴려. 내 앞에서 인생이 힘들다느니 괴롭다는 놈들 보면 더 괴롭혀 주고 싶다구.” 담담하게 말을 하는 녀석을 보니 이 녀석 앞에서 우는 소리 안한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설프게 울고 위로를 기대했다간 나도 보복을 당했을지도..... “세상에..... 너 같은 놈 또 있을까 봐, 겁난다. 젠장, 나도 공부나 할래.”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과외 해줄까?” “됐네요, 반장..... 이 아니라 상원이나 꼬맹이한테 부탁하고 말지. 넌 모르면 갈굴꺼잖아. 니 그 독설을 듣느니 혼자 하고 말지.” “잘 생각했어, 친구!!” 엎어져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상쾌하게 웃는 녀석을 보니 나도 대학이나 가서 교사나 할까...... 라고 생각했지만..... 뭐, 사람의 앞날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거였다. 09. 고 3 끝으로 접어든 어느 날 아버지가 운영하던 작은 사업체가 횡령사건으로 인해 부도나고 집안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야 이제 곧 졸업이니 별 문제 없었지만 문제는 생활력 없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이었다. 하루 하루가 가시밭길 같다는 게 그럴 때에 쓰는 말일 것이다. 고3 마지막 4/4 분기 등록금도 아직 처리를 못했으니 대학은 택도 없는 얘기였고 내일이면 당장에 집 내주고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다. 19살의 나도 그렇게 막막했는데 10살의 인하는 어땠을까..... 그 녀석이 그렇게까지 성격 파탄자가 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거야 그런 일이고 순식간에 벼랑으로 내 몰린 기분에 조용히 교실을 나와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디로든 갈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었다. 나마저 사라진다면 엄마, 아빠.... 동생들 어떻게 될까? “야!” 속이 상해서 담배를 빼물려는데 또 그 악랄한 천사가 잠입했다. “뭐야?” “뭐긴..... 니네 집 부도 났다며?” 내 옆에 털썩 앉은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드물게 진지한 눈을 한다. 왜 이래...... 무섭게 시리. “응, 대학이고 나발이고 끝장났다. 뭐, 그것도 핑계지만..... 조금 막막하네.” 이 녀석에게만은 묘하게 솔직해 지는 나이기에 그냥 편하게 툭 터놓고 말했다. “대학 안갈꺼야?” “응. 어차피 별 생각도 없는 거고. 지금은 집이 먼저니까. 씨발, 내일 당장 거리에 나앉게 생겼다. 동생들 등록금도 있고..... 막내 곧 중학교 입학인데.....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순식간에 이 꼴이 되니.” “막내..... 세진이지. 그리고 둘 째는 세경이.... 똑똑한 애들인데.” “응, 세경이야 조금 문제는 일으켜도 꿋꿋한 놈이니 괜찮지만 막내가 걱정이다.” 녀석이 내미는 담배를 하나 들고 불을 붙이자 그 놈도 담배를 빼문다. “내일이면 집 비워줘야 되는데, 갈 데가 없어. 어디로 가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빨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 인생에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었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시간은 흐르고, 저 밑의 작은 세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자들은 변함이 없다.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착찹한 기분에 담배를 빠는데 녀석이 내게 작은 종이와 열쇠를 내던졌다. “이거 뭐야?” “집 값은 나중에 돈 벌면 니가 갚아.” “무슨 소리야?” “아저씨 유산 중에 맨션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집이 비었어. 그러니까 부담 없이 살아도 돼. 기본 적인 가구들은 모두 있으니 생활 용품만 있으면 될 꺼야. 대신 그 맨션 관리는 너희가 해줘야 돼. 그게 이자야.” “너.........” “관리해주면 집세 중 반은 니가 가져가. 어머니한테 맡겨도 돼고. 살길이 막막하다며? 친구한테 집 빌려주는 거야 일도 아니고, 나 돈 많으니까....... 대신 나중에 빚은 확실히 받을 꺼야.” 녀석이 나를 쳐다보지 않고 말한다. 그게 울 것 같은 나에 대한 배려인지, 혹은 간만의 선행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는 나를 보라보지 않는 녀석에게 크게 고마워 하고 있었다. 보고 있었다면 내 표정 흉했을 테니까. “..... 고마워........” 순식간에 찾아온 안도감에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내일 당장 길바닥으로 나앉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대한 안도와 이 녀석에 대한 고마움. 진짜 나쁜 놈이지만..... 그 순간만은 천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19살의 내가 할 수 있는 일로서는 가족을 지킬 방법이 없었다. 두 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내가 무슨 수로 책임질 수 있었겠는가? 이제 곧 겨울인데.... “고마워......” “니가 예쁘니까 봐주는 거야. 싫은 놈이면 안봐줘. 니 동생들 예쁘니까도 있고. 어머니 잘 모셔.” “응.... 잘할게......”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교복 소매로 눈물을 닦는 나를 녀석이 안아주었다. 내 어깨에 둘러진 녀석의 팔은 3년 사이에 나보다 가늘고 약해져 있었다. 뭐, 힘은 여전히 세지만..... “나한테 평생 잘해. 그럼 돼.... 나 좋아하지?” “응, 좋아해.” 진짜..... 좋아한다. “계속 좋아해.” 차가운 11월의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내 일생 최대의 사건은 생각지도 않게 해결점을 찾아냈다. 그 후의 일들을 말하자면 끝이 없고 쉽게 말하자면 이런 저런 사건들을 걸쳐 최후로 내가 의탁한 곳은 조직이었다. 동생의 일들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들어가게 된 곳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했고 지금은 이 정도의 자리에 올라오게 되었다. 물론 그 악질 천사도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교사까지 되었으니.... 다들 자기 길을 찾은 셈이었다. 상태가 그다지 정상적이지는 않지만...... “형님 도착했습니다.” “아, 그래.” 잠시 옛 생각을 하는 동안 경찰서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한숨을 내쉬고 차에서 내려 반갑지 않은 경찰서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애들 문제로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라 손쉽게 소년계를 찾았고 그 안으로 들어서자 여전히 아름다운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하얀색 남방에 청바지, 그리고 여전히 가늘고 새하얀 목과 어딘지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발목을 까딱거리고 있다. 진짜..... 13년 전이나 지금이나 얼굴까지 저렇게 변함이 없다니, 저것도 요물은 요물이지. “또 뵙는군요.” 기분 나쁜 듯한 녀석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앞의 경찰에게 인사를 건내자 히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어, 여긴 왠 일로.......” “제 친구거든요.” 라고 그 녀석을 가르키자 인하 놈이 사나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본다. “씹새야 왜 이렇게 늦게 왔어?” “길이 막혔다니까. 얘기는 대강 들었습니다. 그냥 작은 싸움이니 봐주시죠.” 빙긋 웃으며 말하자 담당 경찰은 사색이 된다. 저번에 애들 몇 잡아넣었다 윗 놈들한테 깨진 게 기억난 모양이군. “하지만...... 애들하고 성인이.......” “성인이라도 이 놈이 어디 애들을 팰 것 같습니까? 맞으면 맞았지. 니 자식은 주먹 한 방이면 날아간다구요. 생긴 걸 보세요.” 나 역시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하자 경찰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인하 녀석을 훑어보았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예쁜 얼굴이니 유리하지. 보라구, 한 번 훑고는 얼굴 빨게지는 걸. 하여간 외모란 게 성격을 감추어 주는 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선 타고난 복이라니까. “그거야...... 으음......” “상부쪽엔 제가 연락하죠.” 뚝 잘라 말하자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경찰 앞에 연륜 있어 보이는 경사가 다가와 풀어주라는 모션을 보냈다. 역시 나이가 쳐먹을수록 말귀를 잘 알아듣는군. 피식 웃으며 지갑을 꺼내 안보이게 그 경사의 주머니에 찔러주자 서둘러 나가라고 한다. 망할 것들..... 저런 썩은 것들이 국민의 수호자라구? “제발 그만 좀 해라. 애들하고 싸워서 그게 뭐냐?” 경찰서 문을 나오자 마자 담배를 물고 말하자 녀석이 기분 나쁜 듯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무릎을 한 대 걷어찼다. “아파! 왜 까고 지랄이야? 기껏 꺼내줬더니.” “난 체는...... 오라면 눈썹 뽑히게 달려와야지. 왜 이렇게 늦게 와?” “길이 막혔다니까!! 하여간 성질 머리 하나는 죽인다니까.” 불을 붙이며 쪽 팔린 걸 만회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자 인하 놈의 학생인 듯 한 녀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엄청난 덩치의 트레이닝복을 입은 녀석이 넷. “학생들 앞에서 그게 무슨 짓이야? 어린 놈들하고.” “닥쳐! 내 맘이다. 일하는 중이라며? 빨리 가봐, 이 원수는 이자까지 쳐서 갚으마.” “별로 받고 싶지도 않다. 니 보답이라면 후환이 두려워.” 인상을 쓰며 말하는데 어느 새 성우가 내려 인하에게 인사를 건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어, 성우네. 너 아직도 거기 있니?” “네.........” “흐응, 오래 가네. 너무 괴롭히지 말라구. 성우 얼굴이 저게 뭐야? 잘 먹여가면서 하든가.” 라면서 이죽거리고 내 손가락 사이의 담배를 빼서 피는 녀석의 말에 성우의 얼굴은 아예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 새끼가....... 자기 애인한테는 말 한 마디도 못하게 하면서...... “잘 먹이마. 그러는 니 애인은 잘 먹여가며.... 아.. 미안.” 반격으로 나간 내 말에 녀석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듯 한 그런.. 표정. “잘 키워 엉뚱한 곳에 헌납했다. 아아, 복도 지지리 없지.” 쓴 미소를 띠고 말한 녀석은 은근슬쩍 옆에 있던 커다란 녀석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끊었다. 어째 눈빛이...... “가라!” “가지 말래도 간다. 너나 잘 먹고 다녀, 임마. 나이 서른이 되도록 몸이 그 꼴이냐? 부러진다, 부러져. 너 안을 때 뼈끼리 부디낀다고 뭐라 안하디?‘ “난 살집 있는 놈만 사귀니 걱정마라. 너나 저 자식 잘 챙겨. 나야 원래 마른 체질이지만 저 놈은 왜 저렇게 말랐니? 잘 좀 챙겨라. 니 꺼라며?” “그래, 내 거다.” 너에게 상처받은 첫사랑을 겨우 치유하고 겨우 손에 넣은 두 번째의 사랑이다. 너처럼 무심하고 무식한 놈에게 빠졌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저렇게 착하고 얌전한 녀석을 택한 건 내가 봐도 의외였다. “일 하러 가기 전에 어디 가서 밥이나 사 먹여라. 나한테는 돈이고 뭐고 팍팍 쓰는 놈이 지 애인한테는 그렇게 짜게 구냐? 친구한테 목숨 건 남자 치고 멋진 놈들 없어. 있을 때 잘해, 새끼야.” 어느 새 뒤로 돌아가 내 어깨를 떠밀며 발로 엉덩이를 차댄다. 이게 쪽 팔리게!!! 성우도 있는 앞에서! “임마, 놔!!” “빨리 가, 씹새야, 나중에 성우랑 한 잔 하자. 근사하게 쏘마!” “선생은 박봉이라며? 상원이 월급 뜯지 말고 싼데서 사.” “나 돈은 많아, 자식아! 그리고 상원이 자식은 요즘 말도 못붙인다. 가라!” “뭐야? 그렇게 바빠? 언제 한 번 모일려고 했더니.” “고등학교 깡패들이 뭐가 자랑이라고 모이냐? 그 자식 애인 무서워서 전화도 함부로 못한다. 새끼가 걸려도 그런 순악질한테 걸리냐? 나야 얼굴 안보면 그만이니 상관없지만......” 답지않게 걱정스러운 표정에 은근히 이 놈의 음침한 사촌이 나도 걱정되었다. 언제나 조용하고 과묵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강한 존재감을 갖고 있던 반장이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난 건가? 나야 이 놈 성격에 진작 두 손 두 발 다 들었지만 그 놈은 그 성격마저 좋다던 놈이니...... 축하해줘야 하나? “하여간... 뭐, 나중에 시간 봐서 마시자. 빨리 가라. 나도 가보게.” “응, 잘 있어.” 인사를 마치고 차로 돌아오자 성우가 어느 새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마른 몸에 어딘지 모르게 가느다란 느낌이 드는 게 저 무식한 놈을 닮기도 해서 건들여 봤다. 하지만... 지금은 가장 소중한 녀석이다. 가장 사랑하고 가장 옆에 두고 싶은... 이 녀석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 안이 100% 충족되는 듯 한 감각에 늘 행복하고 편해진다. 저 무식한 놈도 어서 그런 연인을 만나야할텐데. 그래야 이 녀석한테도 함부로 못하지. “오늘은 내가 운전할게. 간만에 어디 야외로 나가볼까?” 차 뒷문을 닫고 앞으로 돌아가자 성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이 놈은 이런 호의조차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지. 뭐, 어디의 누구처럼 그걸 당연시 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렇게 소심하면 내가 미안해 진다구. “하지만 일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요.” “오늘은 이만하지. 안그랬다간 우리 짱한테 혼난다구.” 베어져 나오는 웃음에 성격 나쁜 짱을 바라보자 멀리 있던 인하 녀석이 왼손을 들더니 Fuck you!를 날려주길래 나 역시 밝은 미소로 튕겨주었다. “짱? 아, 인하형님......” “우리의 영원한 짱이지. 성(性)고문 전문의! 가자!” 먼저 차를 타고 조수석을 열자 멍한 얼굴로 머뭇거리던 녀석이 인하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어색한 몸짓으로 올라탔다. “어디로 갈까?” “아무 곳이나.......” “그럼.... 간만에 거기나 가볼까?” 예전의 기억들에 웃음을 흘리며 차를 몰아갔다. 고등학교 입학 초기의 나는 매우 무료했다. 그 시간은 성(性) 고문 전문 짱을 만나 바뀌었고 내 인생 역시 바뀌었다. 29살의 난 즐거운 일들만을 안고 살아간다. 가끔은 골치 아프고 복잡해지지만....... 인하 같은 놈도 꿋꿋하게 사는 걸 발판 삼아 언제나 인생은 살만한 거다... 라고 한다. 열 살에 부모에게 버림받아 팔리고 엉망으로 버려진 후 겨우 찾아온 빛은 그만한 그늘을 인하에게 안겨주었다. 그 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저 무심한 녀석은 상상도 못할 일들을 겪어내야 했고 그 덕분에 성격파탄자가 되어버렸다고 해도 저 놈은 나의 첫사랑이었고 영원한 짱이다.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온갖 흉폭한 짓은 다 해대고 성격도 나쁜...... 하지만...... 나의 첫사랑이었다. 그래도..... 저 얼굴에 저 성격은 엽기니.... 성격은 좀 개조하지. &nb - 폭력선생찬가 외전 - Memories Seo yoon-jin & Jang In-ha Prologue 1993년 6월 대학교 1학년의 어느 날이었다. 1학기 종강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연습을 끝내고 과방에 들르려 학관으로 향해가는데 갑자기 세찬 소나기가 쏟아져 내렸다. "이런......" 낮게 혀를 차고 있는 힘껏 달려 가장 근처에 있는 건물 쪽으로 뛰어가 비를 피했다. 우리나라 일기예보가 아무리 맞는 날보다 안맞는 날이 많다지만 비 올 확률 10%의 날에 소나기가 내리다니....... 찝찝한 기분에 비에 맞은 옷을 떨어내고 조금이라도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학관까지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니 달려가도 상관은 없겠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6월 초의 뜨거운 햇살 아래 갑작스런 소나기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서...... 지속적으로 바닥을 두들겨대는 그 리드미컬한 소리가 좋아서 그냥 그곳에 서있었다. 그리고 한 10분 쯤이 지나서였을까...... 약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빗줄기를 보고 결국 달려야 하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 엄청난 빗 사이를 뚫고 천천히 걷다 멈춰선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농구 선수인 나보다는 조금 작지만, 180은 충분히 넘을 키에 비에 젖어 달라붙은 얇은 티셔츠 사이로 드러나는 가느다란 몸, 그리고 빗물에 젖어 내린 검은 머리카락에 고혹적인 목선을 가진 남자였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싸인 얼굴은 그 몸보다도 더 흥미를 당기는 생김이었다. 여자였다면 바비인형을 연상케하는 이미지... 랄까? "씨발!!! 망해먹을 일기예보! 엿으로 떡쳐먹어라, 개새끼들아!" 그 이미지에 홀려 멍하니 그의 외모를 샅샅이 탐하고 있는데 내 레이더 망의 중심에 있던 그가 순식간에 소리를 질러 재꼈다. 사나운 빗줄기 속에서도 귀에 선명히 박히도록 날아오는 목소리에 멍하니 그 쪽을 바라보자 그는 주먹을 불끈 쥔 채 다시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오늘 같은 날 학교에 오는 게 아니었어!!!!!" 찢어지는 듯 한 그의 음성과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저 외모에 저 말투라니...... 그 갭에 왠지 즐거워서 킥킥거리며 웃고 있는데 흠뻑 젖은 그가 강아지처럼 몸을 부르르르 떨더니 터벅 터벅 이 쪽을 향해 걸어왔다. "............" 점점 가까워져가며 그의 얼굴선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매혹적으로 보이는 붉은 입술과 높지는 않지만 우아하게 뻗은 가는 콧선, 그리고 아치형의 눈썹과 쌍커풀은 없지만 남 못지 않게 커다란 눈매에 새하얀 피부가 더없이 어우러진 이상적인 얼굴형이었다. 되기만 한다면 바비 인형사의 사장들에게 사진을 보내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순간.......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다...... 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퍼억--- 꿈을 본 듯 한 기분에 멍하니 시선을 놓고 있던 중 갑자기 들려온 엄청난 소리에 놀라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보자 그......... 바비 인형이 땅바닥에 철퍼덕하니 엎어져 있었다. 뭐냐...... 이건..... "씨........ 발........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젠장......" 개구리 같이 납짝한 자세로 엎어져 욕설을 내뱉는 그의 반응에 본능적으로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뭔가 상당히 유쾌한 케릭터의 남자인 거 같았다. ".......... 어떤 개새끼가 남이 엎어지는 거 보고 기분 째져?" 두근---- 위로 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쳐든 그는 무서울 정도로 크고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지 실루엣을 확인한 방금 전과는 달리 바로 눈앞에 들이밀어진 그의 얼굴은 보는 순간 숨을 멈추게 하는 힘을 가진 미모였다. 어째서...... 이런 사람이 이제껏 눈에 띠지 않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수가......... 없으려니......." 엎어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잔뜩 젖은 옷을 털어내고 가방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 행동 하나 하나가 마치 그림 같은 느낌이라 혼을 빼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울려온 그의 신랄한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어질 야려? 애새끼가..... 건방지게....."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불을 붙인 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난 그의 생각지도 못한 폭언에 멍하니.... 서있을 따름이었다. 그 도발적인 입술로 하는 말이 모두 그렇게나 차고 꼬여있다니..... 게다가....... 어째서..... 만난지 겨우 10분도 돼지 않은 그에 관해 내가 이런 생각을 해야하는 것인지...... 한숨이 흘러나올 뿐이다. 남자와 몇 번 자 본 적은 있지만 그렇다고 내 성적 취향을 바꿀 정도로 남자 쪽이 좋아서는 아니었는데 어째서 저 남자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이 가는 걸까? 여자에게도 이런 적은 없었는데...... 심각한 기분으로 나의 성(性)정체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을 하던 순간 내가 서있던 건물의, 그러니까 바비인형이 들어간 건물 전체의 빛이 순식간에 꺼져버렸다. 갑작스런 일에 당황해 건물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 엄청난 비명 소리가 울렸다. "씨발!!! 학교 관둬 버리겠어!!!!!!!" 01. 1학기 종강 전에 겨우 겨우 찾아낸 것은 그의 이름이 장인하라는 것과 영어교육과 2학년이라는 것, 그리고 비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며, 고등학교 때 이름 꽤나 떨치고 다녔었다는 것들이었다. 학교 안에 돌고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엄청났지만 실제로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 그 중 믿을 만한 것은 얼마 없는 듯 했다. 너무 튀는 외모다 보니 그에 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정확히 그를 알고 이야기를 해 본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이유였다. 고등학교 다닐 때 깡패였다던가.... 혹은 같은 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이 아직도 그의 이야기만 들어도 치를 떤다는 것, 그리고 무슨 재벌가의 아들인데 나와서 혼자 살고 있다는 것과 같은 과의 친구 한 명 외에는 누구에게도 말도 시선도 건내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알면 알수록 더욱 신기하고 뭔가 알 수 없는 인간이라는 점이 마음에는 들었지만 그에 반해 그의 연락처나 집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교학과에 남아있는 것은 모두 본가의 것이었고 그 본가에서는 그에 관해서는 입에 담는 것조차도 꺼려했기 때문이다. 왜 내가 겨우 한 번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것인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어쨋든 그 시절의 나에게는 한참 일고 있는 농구붐으로 사기가 올라간 팀의 분위기나, 하루하루 늘고 있는 집 앞의 여고생의 숫자나, 나의 미래에 관해 줄기차게 물어오는 사람들의 곤혹스런 관심들보다도 그의 작은 행방 하나 하나에 더 신경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서 방학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이대로는 다시는 못볼 것 같다는 생각에 그가 사라지기 전에 꼭 만나고 싶어서....... 바보 같이 긴 여름방학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지루한 방학을 보내던 중, 방학의 끝자락의 어느 날 우연히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별로 나가고 싶은 곳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점점 초조함만 늘어가던 터라 다른 돌파구를 찾아 나간 모임이었다. 그 안에 모인 것은 모두 아버지 친구분들의 아들들로 도덕관념이나 상식, 예의 범절로만 따진다면 인간 말종들이겠지만 친구로서는 꽤나 괜찮은 녀석들이었다. 부담 없이 즐기고 우는 소리 따윈 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서로에 대해 끝까지 무관심할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어 어울리고 있는 녀석들이다. 성적 모럴따윈 엿바꿔 먹은 지 오래니.........친구사이에서도 내키는 대로 관계를 갖고 뒷끝 없이 다시 어울릴 수 있는 관계이니 더욱 금상첨화지. "그런데..... 서윤진....." 한참을 이런 저런 얘기로 떠들고 있는데 재우 녀석이 문득 무겁게 입을 연다. "왜?" "너 요즘 장인하 뒤를 케고 다닌다며?" "........ 거기까지 소문이 돌았냐?" 우리 학교와는 견원지간에 있던 대학에 다니던 재우 녀석의 말에 담배를 비벼 끄며 비웃 듯이 말하자 녀석이 쓴 미소를 지으며 술이 담긴 글라스를 들어 흔든다. "장인하라면..... 손 떼라. 니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모처럼 진지하게 입을 여는 녀석의 말에 모두들 제각기 놀던 태도를 거두고 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소리야?" 피식 웃으며 되묻자 녀석이 곤란한 듯 입술을 달짝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녀석..... 그러니까 장인하 선배..... 기억 안나? 내가 고등학교 때 말했잖아. 천사 같은 얼굴에 진짜 악마 같은 인간이 있다고...... 그게 그 사람이야......" 순간 기억을 더듬어 보니 술자리에서 녀석이 몇 번 입에 담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틀림없이..... 어딘가 비정상적인 성격 파탄자... 라고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사람이라구?" "그래..... 우리학교 1년 선배였는데..... 하는 짓이 너무 악질적이라 누구도 건들지 못했던 인간이야. 게다가..... 자기 형하고도 그런 관계였다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어. 지금은 소문이 없는 거 보니 조용한 거 같지만 고등학교 때는 아무나 닥치는 대로 다 자줬다구. 선생하고 잤다는 소문도 있었고..... 뭣보다 그 사람 덕에 인생 버린 남자 여럿이야. 아직 시작하지 않은 거라면 신경도 쓰지 마. 한 번 자고 나면 그걸로 끝장나는 인간이야." "........... 그건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야. 사실.... 남자랑 자는 거 다들 호기심에 하는 일이잖아. 특히 우리처럼 도덕관념 없는 인간들이 말이야.... 그런데..... 그 도덕관념 없는 인간들이 그 인간하고 한 번만 자고 나면 모두 생각이 바뀐다는 거지. 그 자식.... 말이야, 우리 같이 그저 즐기는 놈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인간이야. 우리는 한 번 자고 좋으면 다시 시도하지만........... 그 자식은 틀려. 한 번 같이 잔 남자는 절대 두 번 다시 쳐다보지도 않아. 도덕관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도덕이라는 경계선 자체를 갖고 있지 않은 인간이야. 하지만 문제는 그 놈하고 한 번 자고 나면 진짜 바비인형을 트럭 째로 준다고 해도 던져버린다는 거지. 장인하.... 잠자리 테크닉 죽이거든. 그 새끼 엉덩이 한 번 올라탄 새끼들은 대부분이 반쯤 미쳐버리는 게 정설이야. 그 놈 아니면 안된다고 난리를 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웃어넘겨. 그리고 두 번 다시 근처에도 못오게 하지....... 섣불리 접근하면 그 자식 독기에 심장마비로 죽을 것 같거든." 진지하게 말하고 시선을 내리까는 녀석의 반응에 짚히는 바가 있어 그 점을 파고들었다. "........ 그렇다는 건..... 너도 잤다는 얘기겠지?" 직선적으로 나간 내 말에 녀석이 쓴 미소를 지으며 잔을 흔들었다. "뭐..... 얼굴이 맘에 든다고 자자고 해서...... 도발에 넘어갔지. 게다가 그 얼굴이라면 내가 먼저 대쉬했을텐데.... 먼저 다가와 잤어. 그리고..... 하룻 밤에 미쳐버렸는데 일 끝나자 일어서 눈도 쳐다보지 않고 돌아서 나가더라. 그 뒤로 학교에서 마주쳐도 아는 체도 하지 않고 아무리 따라붙어도 웃기만 하더라. 나 같은 거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며칠 뒤에는 다른 남자 끼고 돌더군. 뭐 그래봐야 그 곁에서 버겨나는 건 친구들 몇 밖에는 안됐지만......." "고등학교........ 때 말야?" "그래.... 고등학교는 별 것도 아니지. 그 사람 굉장히 어렸을 때부터 매춘했다는 소문도 있었고 애들 데리고 노는 게 취미인데다 늘 정신을 반쯤 놓고 있어서 정신병자라는 소문까지 있었어. 우리처럼 그냥 노는 녀석들과는 달라. 우리는 그저 즐기지만....... 그 사람은 즐기는 것도 아니라, 그냥 일상 같은 거야. 그렇다고 섹스 중독증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내키면 아무나 붙잡고 자더군. 누구라도 상관없다는 식이었어." "............." 어쩌면 그와 너무도 어울릴지도 모를 이야기에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문 채 잔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나와 자준다는 건 나와도 잘 수 있다는 것이고, 한 번 자고 나면 끝이라는 건 오히려 대환영이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았다. 하얀 얼굴을 한 바비 인형은 더없이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였는데...... 밝히는 남자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맑고 투명하고 안으면 좋은 향기가 날 것 같은 어린 소년 같던 그에 대해 어째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그 사람..... 주변에 간 적 있어?" 갑자기 터져 나온 녀석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렇게 가까이 간 기억은 없었다. 사실 실제로 본 것은 처음 만났던 그 날 뿐이라는 게 맞겠지만..... "아니.... 그냥 궁금해졌을 뿐이야. 심각한 건 아니라구. 그냥 흥미가 생겨서인데 다들 오버를 하는군." 피식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넘기려하자 녀석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래를 끄덕인다. "그럼 다행이고....... 그 사람 가까이 가면 말야....." 뭔가 좋은 이야기를 하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는 재우의 표정에 시선을 들자 재우가 서서히 입을 연다. "..... 그 사람 가까이에 있으면 굉장히 좋은 향이 나. 아이들이 쓰는 비누향처럼.... 맑은 향기가 나지. 그 향기에 미쳐버렸던 것 같아. 진짜.... 그 사람을 순진한 아이로 착각하게 되거든. 그 얼굴로 그렇게 아이 같은 느낌이라면 남자는 누구라도 미쳐버리잖아. 그래서 빠져버린 거 같아..... 하지만 시작이 순간적인 것처럼 끝나는 것도 순식간이야. 엉망이 되어버리지.... 거기다 더 열 받는 건 그 사람은 아무렇지 않다는 거야. 언제나와 같이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지. 거기에 더 상처를 받는다면 믿겨져? 고작 하룻밤 보낸 남자한테 말야......." 뭔가 아픈 듯 아련하게 말하는 녀석의 말에 난 묵묵히 잔으로 신경을 돌렸고 주변의 녀석들은 곧 수군거리더니 다시 자기들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하지만 내 안에는 뭔가 아련한 느낌만이 남아 머릿 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소년 같은 분위기의 매춘부라........ 진짜 남자가 가장 좋아하는 모든 조건은 다 갖춘 셈이로군....... 그 내부야 어쨌든...... 점점 그에게 끌려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02. 왠지 초조하고 지겨웠던 여름 방학이 끝나고, 그와 같은 강의를 듣기 위해 교수들을 따라다니면서 겨우 강의 시간표를 정정할 수 있었다. 그냥 한 번 자는 거라면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음에도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정도의 바보짓을 하고 있다. 미친 짓이라고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도 그가 듣고 있는 전공 강의실을 찾아다니는 건 거의 본능적인 반응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냥..... 옆에서 바라보고 재우가 말한 그 아이 같은 향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도 생각해놓지 않았지만 무작정, 그런 재우의 말에 질투를 느끼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될 정도로....... 유치하게.... 그와 같은 강의를 듣는다 해도 왠지 용기가 나지 않아 시간만 흘려 보내고 있다. 뭔가 더 깊이 빠지면 안될 것 같은 두려운 마음과 함께 그 이유를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정확히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혼란 때문이었다.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만남 속에 그와 같은 공간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지는 것이 왠지 가벼운 증상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점점 복잡해지고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위의 반복에 한숨을 내쉬고 그와 같은 강의를 듣기 위해 강의실을 찾아갔다. 그와 같은 수업을 들은 지 벌써 1개월 정도 되었지만 지독히도 얼굴을 보기 힘든 인간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당연한 듯 수업에 빠졌고 타인과의 접촉 역시 극도로 적었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건 그와 같이 다니는 - 고등학교 친구라던 - 단 한 사람뿐이었다. 그 나마도 학교에 안나오는 날이 많다보니 거의 이야기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조금 이른 시간에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문득 강의실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딘지 허스키한 음성에 안을 들여다보자 왠 일로 먼저 와있던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 가슴이 두근거린다? 웃기지도 않는군. "너, 그러다 또 학고 먹어!!" 나른한 듯 작게 말하는 그에 반해 그의 앞에 서서 크게 잔소리를 해대는 친구도 함께였다. 뭔가가 상당히 불만스럽다는 듯 이야기하는 친구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본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꾹꾹 눌렀다. "쟁쟁대지마. 시끄러우니까..... 가서 커피나 뽑아와." "2학기 때도 그런 식이면 너 졸업 못해! 투고면 징계 먹는 거 몰라?" "졸업장 정도 돈으로 사면되는 거야. 빨리 커피나 뽑아와. 어제도 잠 못잤어." "또 누구랑 있었던 거야?" 이른 시간이라 강의실에 사람이 없어서인지 두 사람은 내 존재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몰라. 씹새끼가 하도 졸라대서 자줬더니 사람을 밤새도록 갖고 놀대....... 한 번 만 더 알짱대 봐라. 고자로 만들어 버릴테니까." "그러게 아무나하고 자지 말랬잖아." "당분간은 소강이다. 아무하고도 안해. 귀찮은 새끼들.... 어우, 머리야......." 고개를 뒤로 젖히며 피곤한 듯 한 모습에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내리누르고 서서히 걸음을 옮겨 그의 바로 뒷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야, 강의실 금연이야!!" "몰라, 가서 커피나 뽑아 오라니까." "하여간!!!" 눈을 흘기며 못마땅한 듯 삐죽거리던 그의 친구가 지갑을 꺼내들고는 나를 지나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묘한 광경에 잠시 강의실을 나간 그를 보다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자 길게 연기를 내뿜는 그가 뒷골을 살짝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고.... 추운 듯 잠시 몸을 떨더니 몸을 앞으로 숙인다. 추운가....... 작게 몸을 떠는 그 반응에 얇은 T-셔츠 한 장만을 걸친 그가 애처로워 보여 들고 있던 남방을 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그건 뭔가 생각할 사이도 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 역시 당황해버렸다. 내가 왜 그런 거지? "뭐야?" 입에 담배를 물고 쳐다보는 그의 반응에 난 서둘러 변명할 말을 찾았다. 뭐라고 해야하는 거지.... 뭐라고... 할까? "추워 보여서....." "너 몇 학번이야?" "93학번. 그 쪽은?" 뭔가 이야기가 통하는 분위기에 빙긋 웃으며 말하자 시니컬하게 비웃은 그가 바닥에 담배재를 털며 말한다. "92학번이다. 어디서 말을 까?" "....... 알고 있었지만.... 말 놓으면 안돼나요?" "안돼. 어린 녀석이....." 낮게 혀를 차면서도 내가 걸쳐준 셔츠를 벗지 않고 그대로 꿰어 입는 그의 모습에 나도 그냥 웃어버렸다. "이름..... 장인하 맞죠?" "그래." "전 서윤진이에요, 만나서 반갑다... 고 해야겠죠?" "반갑니?" 뚱하니 기분 나쁜 듯 말하며 바닥으로 담배를 집어던져 끄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자,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더 할 말 있어?" "글세요......" "그럼 말아." 사납게 나온 그의 말에 당황해 하는 사이 휙-- 하니 돌아앉아 책상으로 몸을 숙이는 그 모습에 더 이상 말을 건낼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생각보다.... 어린 목소리였다. 약간 쇠된 음성에 하이톤. 의외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어울린다고 해야하나? 두근--- 순간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강의실 문틈으로 살짝 불어오는 바람에 그에게서 옅은 향이 풍겼기 때문이다. 언젠가 재우 녀석이 말한 것처럼 아이 같이 맑고 부드러운 향이었다. 재우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저렇게나 꼬이고 제 멋대로인 인간에게서 그런 향이 풍길 꺼라고는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난 그 때 또 한 번 정신이 아찔해졌다. 아무래도 나 깊이 빠질 것 같아....... 뭔가 너무 이상한 사람이라..... 이제까지 주변에서 보던 누구와도 달라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까지 든다.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냐..... 서윤진..... "장인하!! 또 자냐?" 잠시 생각하던 사이 뒷문을 열고 들어선 친구의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자 그가 커피 두 잔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이 쪽으로 다가와 그의 바로 옆자리에 책상을 끌어다 놓고 앉았다. "일어나, 장인하!! 수업 제대로 들란 말야!! 안 그럼 상원이한테 다 이른다." "일러라..... 니가 애냐, 자식아? 그리고 그 놈이 내가 사람이라도 죽인다고 나한테 뭐라고 할 놈이냐?" "뭐라고는 안해도 아무 말 없이 한숨만 쉬겠지. 너 그래도 상원이한테 제일 약하잖아." 인하의 자리에 커피 한 잔, 그리고 자기 자리에 커피 한 잔을 놓고는 투덜거리 듯 말한 그의 친구가 갑자기 인하의 상체를 보고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너 남방 같은 거 안가져 왔잖아." "아.... 줏었어." 내가..... 버린 거였나? 그런 생각에 쓰게 웃으며 앞쪽을 보자 의식한 듯 친구가 나를 돌아본다. "그 쪽이 준거죠?" 라면서..... ".... 네......" "하아..... 이런 녀석 신경 쓰지 말아요. 얘는 알몸으로 북극에 내다버려도 한국까지 헤엄쳐 올 놈이에요." "........ 그런가요?" 친구의 말에 피식 웃자, 인하.... 가 몸을 일으켜 턱을 괴고 앉아 그의 친구와 시선을 맞춘다. "왜..... 왜애?" 라며 쟁쟁대는 친구에게 인하는 아무 말 없이 차가운 시선을 날리더니 곧 나를 돌아보았다. "흐응....... 서윤진..... 농구선수..... 맞지?" "...... 맞는데요......." "그래? 그렇군...... 흐음......" 뭔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묻던 그는 곧 다시 책상으로 쓰러져버렸고 친구는 기가 막히다는 듯 인하를 한 번 보고는 나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하더니 곧 앞으로 돌아앉아 책을 펼쳤다. 뭔가...... 상당히 어긋나고 있는 기분이었다. 점점 다가가려는 나의 마음과 어딘지 모르게 확실한 경계선을 긋고 내게는 시선조차 던지지 않는 그 차가운 사람의 알 수 없는 감정...... 어쩌면..... 여기서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면 상처받지 않고 상처 입히지 않고 끝날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차라리 어서 붙잡아 버리면 깨끗한 하룻 밤 관계로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미 내 감정의 수위는 내가 자제할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서 있었다. 관심도 없는 교육학 강의가 끝나고 앞에서 계속 신경 쓰이게 했던 존재는 수업 내내 책상 위에 널부러져 있더니 결국 끝나고 나서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말을 걸고 싶어,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있는데 그 친구라는 사람이 엎어져 있는 인하를 툭하니 건들였다. "야, 강의 끝났어. 나가자." "......... 응...... 피곤해......." "누가 밤새 놀러 다니래? 잠 안오면 약이라도 먹으란 말야. 나가서 헤매지 말고." "싫어. 나 약은 질색이야........ 세하 연락은 없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하는 그의 말에 친구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좀 위험한 거 같은데...... 너 그 아저씨 한 번 만나보지 그래..... 니 말이라면 들어줄지도 모르는데......" "......... 그 아저씨는 너무 음험해서...... 좀 더 두고 보자." "뭐..... 니가 그렇다면...... 하지만 이번엔 작은 일이 아닌 거 같아........" "그래..... 책임은 져야겠지......" "............."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확실한 듯 한데...... 그가 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걱정을 늘어놓는 모습이 의외라 나 역시 신경을 곤두세우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대체 어떤 친구길래 모든 일에 무관심한 듯 한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 걸까? 왼손의 엄지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간혹 초조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그의 모습에 가방을 챙길 생각도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하니 건들였다. "어?" "뭐해? 서윤진. 안나가? 애들 기다려." 긴 생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며 상쾌하는 웃는 건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소하였다. "아..... 나가야지." "오늘 나 연습 구경간다. 과 애들 몇 명도 같이 갈 거야. 니가 친구라고 자랑해 놨다구." 눈을 찡긋하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반응에 나 역시 웃어주었다. 모처럼의 등장이니 배려해주지 않으면 안되겠지... 란 생각에 씁쓸한 기분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바로 앞자리에서 다른 시선에 느껴졌다. 다시 두근거리는 가슴에 그 쪽을 돌아보자 그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긴 스타일로 눈가를 살짝 가린 머리카락에, 싸늘한 눈매로 돌아보는 하얀 얼굴은 심장이 멈춰버릴 정도로 도발적이었다. 만약 그 곳이 강의실이 아니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의식하는 나의 이성만 없었다면 당장에 그대로 으스러지게 끌어안고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아름답고 도발적인.... 마치 유혹하는 듯 한 시선이었다. "........ 예쁜 여자네......." 두근-- 순간 그가 소하를 바라보며 눈물이 나올 정도로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리고 난 그 얼굴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정신까지 아찔해졌다. 나를 향해서는 그렇게나 차고 신랄하던 그가 소하를 대하는 태도는 부드러움 그 자체라 머리 위로 번개가 내리 꽂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여자를 질투한다.... 라? 너무 웃겨서 자살이라도 해버리고 싶은 기분이다. "저..... 요?" 소하 역시 당황한 듯 살짝 홍조를 띄고 웃으며 말하자 그가 더욱 환하게 웃는다. 흐드러진 꽃잎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마치 무슨 영화나 만화에나 나올법한 환상 같은 미소였다. "응....... 그런데 머리는 나쁠 것 같네. 뇌가 엉덩이에 붙어있지 않으면 좋으련만......" "인하야!!" 생각지도 못한 폭언에 소하와 내가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그는 유유히 가방을 챙겨 들고 웃으며 남방을 내게 집어던지고 강의실을 나섰다. "어, 죄송...... 저 녀석 기분이 요즘 개떡이라....... 아니, 원래 성질이 지랄 맞은 놈이니 이해하세요. 그럼..... 어이!! 장인하!! 야, 이 나쁜 놈아!!!" 인하의 뒤를 따라 소리 지르며 달려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는 나와는 달리 소하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 뭐야..... 저 사람? 세상에........ 뭐, 저 딴 인간이 다 있어? 서윤진, 저 사람 누구야?" "..........." "야!! 서윤진?" 봇물터지 듯 쏟아져 나오는 소하의 비난도 아무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점심 하셨어요?" 그 주의 다음 강의 시간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다 강의실로 막 들어서는 그를 막아섰다. 검은색의 폴라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검은 색의 하프코트를 차려입은 그는 딱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명품들로만 몸을 휘감은 채 기분이 상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살짝 찡그린 그 얼굴에 애써 미소지으며 다정하게 묻자 그 아름다운 입술로 차갑게 대꾸한다. "비켜......." "같이 먹으러 가요." "다음 강의인 거 몰라서 그래? 귀찮으니 비켜." "강의 끝나구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차가운 인상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입술을 비틀어 웃는다. "강의 끝나고는 내 변덕을 책임지지 못하겠는 걸." "그럼 그 때 다시 묻죠." 싱긋 웃으며 나간 내 말에 그가 다시 싸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며칠 전 그의 친구와 같은 말이 나갔다. "강의실 금연 아닌가요?" "웃기는군..... 내 맘이야....... 솔직히 까라, 너도 나랑 자고 싶냐?" ".......... 뭐, 솔직히 말하자면......" 솔직히 나간 내 답에 그가 잠시 기가 막히다는 듯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는다. "........ 골치 아픈 녀석이로군. 좋아. 가자." "어딜요?" "너희 집이나 우리 집, 아니면 호텔?" "지금요?" "그래." 무표정하게 담배를 문 채 말하는 그의 시선에는 아무 감정도 들어있지 않았다. 어떤 당혹감이나 호기심, 혹은 비웃음 같은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안에서 뭔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나 그런 식으로 해요?" "......... 그래....." 그 오만한 표정에 애초의 나의 목적따윈 상실한 채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 그렇게는 싫은데요. 제가 하는 만큼은 선배도 따라와 주시길 바라는 건 안되나요?" "내가 왜? 내가 그럴 의무나 지킬 예의 따위가 있는 관계인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하는 그는 진짜 그렇게 묻고 있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룻밤 자고 끝내는 건 싫거든요." 갑작스레 나간 나의 말에 더 당황한 건 나였다. 하룻밤 자고 끝내는 게 싫다..... 라...... 내가 원한 건 그게 아니었던가? 이제 와서 뭘 말하려는 거야, 서윤진. "웃기는군........ 내 뒤를 켄 거야?" "알고 싶었으니까요." "알았으면 됐겠네. 난 같은 인간이랑 두 번은 안자. 남창이고 뭐고 떠들어도 상관 안해. 나만 만족하면 되니까. 그게 싫고 감당할 수 없다면 덤벼들지 마. 어린놈들 객기라도 난 안봐 줘." 신랄한 그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 변화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발가에 치이는 귀찮은 걸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그 표정에 난 자존심의 상처와 함께 가슴 안의 어떤 통증을 느꼈다. "인하야, 여기서 뭐 해? 아까......." 그의 뒤에서 나타난 친구에게 인하....... 그는 나와의 시선을 떼고 돌아보았다. "얘기 중이야...... 무슨 일이야? 넌?" "어.... 저기.... 나오는 중에 상원이 전화 받았어. 오늘 좀 보자는데? 세하랑 연락되었대. 좀 심각한 일이 있나 봐. 너, 요즘 연락도 안된다며?" "오늘 어디서? 그 자식 괜찮은 거야?" 급하게 담배를 입에서 떼며 말하는 인하에게 그 친구라는 사람이 따로 이야기하자는 시선을 보냈다. "나중에 얘기하자. 세하 괜찮으니까." "지금 어디 있는데? 병신이 튈 데 없으면 먼저 연락을 해야할 꺼 아냐? 그래야 내가 손을 쓰지?" "네 도움이 무서워서 연락 안했겠지. 세하..... 그런 거 싫어하잖아." "어린놈들이 꽉 막히기는......... 필요하면 써먹어야지.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야 내가 손을 쓰든 할 꺼 아냐. 지금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구!" "그러니까.... 만나서 애기하자구. 너무 화내지 마. 세하도 곤란한 상태인 거 같으니까..... 그 녀석이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 할 놈이냐? 그리고 니가 알면..... 무슨 짓 할지 모르니까 그러는 거기도 하고... 아무래도 그 아저씨랑 연결이 된 것 같기는 한데......" "망할...... 꼰대 같으니...... 츳!" 낮게 혀를 차며 말하는 그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 멍하니 바라보자 거칠게 담배를 집어던지고 가방을 들이맨 채 강의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점심은요?" 그의 팔을 잡고 서둘러 말하자 인하는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시선을 들어 나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뭔가 할 말이 많지만 차마 그 언어를 고르지 못해 횡설수설하는 아이처럼 곤란해하는 표정이었다. "......... 좋아........ 끝나고 보자....." "진짜요?" "그래....... 강의 끝나고 보자." 그의 반응에 놀란 듯 한 친구가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고 나 역시 놀라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너무 빠른 반응이었다. "뭐해? 강의 안들어가?" 라며 나를 툭 치고 들어가 앉은 그의 뒷모습은 같은 수업을 들은지 거의 두 달 여만에 처음으로 잠들지 않은 모습이었다. "뭐 먹을래요?" "..... 밥." 강의가 끝난 후 그 때까지도 멍해 있던 친구를 발로 차서 돌려보낸 후 그는 가방을 챙겨 나와 함께 건물을 나왔다. "그러니까.... 어떤 걸로요?" "아무거나 밥이면 돼." 차가운 가을바람이 스며들자 약간 몸을 떨고 흐드러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모습은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매력적이었지만...... 문제는......... 그 다음 순간 계단에서 엎어졌다는 것이지만........ "....... 괜찮아요?" "......... 너람 괜찮겠냐?" 다행히 다음 계단에 발을 디뎌서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스물이 넘은 남자가 계단에서 엎어진다는 건..... 좀....... "젠장..... 그러게 왜 이렇게 계단이 많은 거야?" "계단 싫어해요?" "당연하지. 계단도 싫고, 비 오는 것도 싫고, 눈도 싫고, 사람 많은 것도 질색이야." "싫은 게 많네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버리자 뚱하니 보던 그도 피식 웃는다. 왠지 상당히 풀어져버린 듯 한 모습이었다. 강의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나를 경계하던 사람이 왜 이렇게 다정한 듯 보이는 걸까? 대체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걸까? 보통 남자라면 같은 남자후배의 식사초대를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라면 어떨까? 단순히 같은 강의를 듣는 내가 흥미로 초대를 했다고 생각할 리가 없는 것은 확실하지만..... 이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식사에 응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단순한 변덕일까.... 아니면 귀찮으니 먹고 떨어져라... 하는 것일까..... 혹은....... 어느 정도 내 기대에 부흥을 해줄 생각인 걸까.... 아니면..... 같이 잘 남자가 부족해서일까? 같이 학교를 나가 식사를 하는 내내 내 머릿 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들 덕분에 모처럼 함께 한 시간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은 걸까? 그냥 이 순간을 즐기면 안되는 걸까? "오늘 뭐 하실 거에요?" "아, 친구들 만나고 쉬어야지." "친구들이라면 고등학교 친구들이요?" "초, 중, 고." "아아.......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물어봐." 무심히 말하며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던 그의 모습에 왠지 김이 빠져버렸다. 내가 무슨 고민을 하든 저 사람은 아이스크림보다는 관심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 저랑 사귈래요?" ".......... 글세......." 의외로 진지하게 답하며 숟가락을 잠시 멈춘 그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랑 사귀고 싶어? 그냥 자고 싶은 게 아니라?" "자고도 싶지만 사귀고도 싶어요. 그러니까 정확히..... 사귀면서 자고 싶은데요." "자는 건 되지만 사귀는 건 안돼. 나... 연애는 절대 안하거든." 잔인한 말을 하면서도 너무 환하게 미소짓는다. 달콤하게 모든 것을 녹여버릴 듯 다정한 얼굴로 태연하게 사람을 상처주다니...... 최악이잖아......... "왜 연애를 안하죠?" "골치 아프고 귀찮아. 자꾸 사생활을 간섭하려 들잖아." "........ 안한다면?" 그의 말꼬리를 잡고 물어지자 아이스크림을 다 먹어치운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안할 자신이 있다면 생각해보지. 하지만..... 그걸 지키는 남자 같은 거 나 이제까지 보지 못했거든." 피식 웃으며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말하는 그의 반응에 아연해졌다. 이 사람은 절대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게 보인다. 나 역시 그다지 믿는 쪽은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사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 한 느낌이었다. 피던 담배를 재떨이에 털고 웃으며 다시 내게 시선을 돌린 그는 잠시 후에는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한숨을 내쉬고 나를 바라본다. 뭔가 아파하는 그 눈빛에 마주한 시선을 돌리자 빤히 나를 바라보던 그가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어쥽잖은 치기로 덤벼들지마. 나 상처 입히는 게 주특기인 사람이야. 어리다고 예외는 아냐. 곱게 자라서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들이 내게 다가오다간 죽어버려..... 심장이 내 독기에 얼어 버릴거야.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 널 위해서 하는 얘기야..... 널 잘은 모르지만 맘에 드는 녀석이고 싫지 않아. 그러니까...... 그 이상은 다가오지 마.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으려고 하지마." 냉정하게 잘라 말하고 가방을 들고 먼저 일어서는 그 모습에..... 난 그냥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쉽게 응한 건 이런 이유였었군. 한 번에 잘라버리려고..... 다가오지 말라는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어....... 잔인한 인간..... "만약..... 넘으려 한다면요?" 일어선 그의 뒤에 대고 그렇게 말하자 그가 잠시 멈춰서 돌아본다. ".... 그랬다간..... 명이 짧아질 걸. 나 나쁜 인간이거든. 너만 다쳐, 다가오지 마..... 서윤진..... 잘 나가는 인생 망칠 생각 말라는 거야." 내 이름까지 또박 또박 말하며 말을 마친 그는 먼저 가게를 나가버렸고 난 그 자리에 앉은 채 그가 피던 담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저히 안되는 건가...... 될 수 없는 건가? 03.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절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그의 무심함에 어떤 관계의 진척도 없이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그 후로도 물론 그와 계속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식사를 했지만 겨우 겨우 옆에 다가갔다 생각하면 여지없이 선을 그어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도 없었고 추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점점 커져만 가는 사랑이란 것에 절망해가고 있던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어...... 장인하다......" 옆의 녀석의 말에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을 보니 왠 일로 차를 끌지 않고 걸어서 등교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언제나 검은 정장과 코트를 고집하던 그가 모처럼 은색의 파카에 야구 모자를 눌러쓴 채 담담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난 그가 나보다 겨우 한 살이 많은 대학 2학년생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휴학한다더니..... 신청하러 왔나....." "뭐?" '휴학'이란 단어에 놀라 그 쪽을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 내 친구가 같은 관데. 이번에 휴학할 모양인가 봐. 학교도 드문 드문 나오더니만...." 그와 나의 접점이란 것은 오로지 학교뿐이었다. 휴학을 한다면 이젠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인가? 절대 자의적으로 먼저 연락할 사람도 아니었고 내 연락 따위에 응할 사람도 아니란 걸 알기에 조급해진 마음에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저기.... 나 오늘 연습 빠질게." "무슨 소리야? 서윤진!!" "미안......" 팀의 녀석들에게 대강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그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를 보자 느껴지던 아련한 통증으로부터의 탈피보다는 그를 만나고 싶다는 소망이 강했다. 그를 만나서..... 어떻게 된 일인지, 그리고 어째서 학교를 관두려는 건지 묻고 싶었다. "저기...... 장인하 선배!" 단숨에 달려가 그의 앞에 서 숨을 몰아쉬자 멍하니 걷던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춘다. "얼굴..... 왜 그래요?" 검은 색의 야구 모자 아래의 새하얀 피부 위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멍 자국 때문에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아 버렸다. 어디서 다친 건가? 아니면......누군가에게 맞은 건가...... "..... 조금 싸웠어. 넌 무슨 일인데?" "아....... 요즘 수업 안나왔죠?" "........ 내 사생활인데..... 말해야 돼?" "걱정했어요. 많이 다친 거에요?" "글세....... 어린놈들이 칼 갖고 설치길래 간만에 흥분을 해버려서......" 표정의 변화 없이 무덤덤히 말하는 그의 반응에 오히려 긴장해 버린 것은 나였다. 얼굴의 멍들과 함께 그의 손에 감긴 붕대를 봐버려서였다. "병원에는 간 거에요?" "..... 형이 의사야........"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말한 그는 방금 전과는 달리 애절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 슬픈 눈빛에 다시 한 번 심장이 쿵하니 내려앉았다. 대체...... 왜 이 사람이 이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걸까. 나에 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없다던 이 사람이 왜 이렇게 나를 슬프게 바라보는 걸까.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겨 버린 사람처럼..... 손안에서 빠져 나가버린 소중한 것을 다시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어린 소년처럼...... "........ 연습 들어가라." 그렇게 말하고 그는 먼저 시선을 돌리고 내 옆을 지나가려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그가 내 곁을 지나가는 순간..... 익숙한 어떤 향기가 흘렀다........ 깨끗하고 맑은 비누 향, 아니 아기의 향기였다. 아련하게 가슴까지 울려오는 부드러운 향기에 순간 그 사람을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사람을 놓친다면..... 난 아마 평생을 후회할 것이다. 난생 처음 겪는 감정의 혼란이나 앞으로의 삶에 대한 어떤 두려움 같은 것도 그를 놓친 후의 후회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닐 꺼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절대 놓고 싶지 않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어떤 집착인지, 혹은 한 순간의 흥미인지 모르겠지만..... 이 사람만은...... 절대 이 사람만은 인생의 한 기억으로 흘려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난 진짜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갈 것이다. "선배......." 작게 나간 나의 부름에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서있다. ".......... 좋아해요." "............" 아무 말 없이 멈춰 서 있는 그의 뒷모습에 난 서서히 걸어 그의 앞으로 돌아갔다. 깊숙히 눌러쓴 모자 때문에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뭔가 불안한 듯 달짝거리는 입술만으로도 그가 나의 말에 반응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가슴 속에는 뭐라고 형용하지 못할 희망이 솟아올랐다.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 사람도 어쩌면 나를 조금은 사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선배가 싫다고 해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꺼에요. 나를 무시하고 두 번 다시 쳐다보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안돼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온 오로지 진심만으로 싸인 나의 말에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땅을 바라보다 시선을 들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쌍커풀이 없는 커다란 눈은 맑게 나를 투영하고 있었다. 그 동공 안에 잡혀있는 것이 나뿐이라면 좋겠지만..... "나는....... 운이 없어..... 인간이든 뭐든..... 나도 인정할 정도로 재수 없는 놈이야. 너도 애 옆에 있으면 다칠꺼야. 그래도 좋아? 나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해도 상관없어?"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덤벼들진 않아요." "..... 난 어린애들 치기라고 안봐줘. 오기나 자존심 때문이라면 나가떨어지는 쪽이 좋아. 니가 감당할 수 없는 일도 많을 테니까." "나가떨어진다면 평생 후회할 거에요." ".......... 멍청하게..... 자기 무덤을 파는 거야, 알고 있어?" "..............."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모든 것을 읽어냈다. 그가 그 동안 그토록 나에게 경계선을 그었던 게 사실은 나를 위해서였다는 걸. 뭘 두려워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와의 관계가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는 걸 무서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도 나를 받아들이길 두려워했다는 것을...... "흙은 선배가 덮어주면 되겠네요. 괜찮죠?" 라며 너무 기뻐 흘러나간 나의 웃음에 그가 슬픈 얼굴로 웃는다. 이 때까지 봤던 어떤 얼굴보다도 슬프고 아름다운 얼굴로...... 혼자 산다는 그의 아파트로 돌아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하고 비디오를 보다 안고 잠들어버렸다. 섹스를 하기 싫었던 건 아니지만 그냥 함께 있는 순간이 아까워서, 조금이라도 더 얼굴을 바라보고 싶어서 비디오가 돌아가던 중에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안고 있으면 가늘고 부드러운 몸이 좋은 향을 담고 몸 안으로 파고 든다. 이렇게 스킨 쉽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째서 다른 사람들과는 이야기하는 것조차 싫어했던 걸까 싶을 정도로.....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온다. 편히 자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너무 아름다워서 살짝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그 감촉을 느꼈는지 조금 뒤척이다 다시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제 겨우 시작인데....... 어째서 이렇게 피곤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가 피곤하다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너무나 무겁고 피곤했다. 이렇게 젊고 아름다운 사람이 나의 연인인데 어째서 벌써 슬퍼지는 걸까? 너무 아름다워서...... 아니면.....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아서? 그냥 바라 보기만해도 슬퍼진다는 건 대체 뭐야? 이게 사랑이란 거야? 그렇게 생각해, 장인하? 너를 바로 곁에 두고 이렇게 안고있는데도 행복하기보다는 슬퍼져. 어째서 이제 시작하는 사랑이 이렇게 불안하고 아픈 걸까? 내가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사랑이라는 걸 한 번도 해보지 않아서....... 원래 이런 건데 내가 익숙치않아서일 뿐인 걸까? 너는 어때? 너는 사랑을 해본 거야? 그래서 그렇게 태연하고 편한 거야? 이렇게 답답하고 불안한 건 나뿐인 거야? 안좋은 예감이 머리를 훑고 지나가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무겁게 짖누른다. 잠든 그가 깨지 않게 살며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한 기분에 거실 소파에 앉아 그가 피는 담배를 한 가치 손에 들었다. 그리고 불을 붙여 길게 한 모금 빨자 머리가 아찔해져 온다. 고등학교 때 흥미본위로 잠시 피웠던 적은 있었지만.......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가? 사랑이란 거 한다면 기분 좋고 행복한 거라고 알았는데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어째서 시작부터 전전긍긍하는 거지? 스스로가 비관론자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이렇게 손에 잡힌 상대를 보면서도 가슴이 아프고 점점 초조해지기만 하는 건지........ 어째서 행복해야할 사랑의 시작이 절망인 걸까? 내가 기억하기론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젠.... 아무 것도 모르겠어. 그냥 행복해지고 싶어......... 다음 날부터 우리의 진짜 연인 관계는 시작되었다.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강의를 듣고 가끔은 섹스도 하고 시간이 날 때면 함께 밤을 보내기도 하고....... 가끔은 교외로 드라이브를 가고....... 날씨는 점점 추워져 갔고 그와의 시간이 늘어가면서 조금씩 그에 관해 알게되었다. 비 오는 날에는 항상 재수가 없다고 바깥에 나기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고, 친구는 단 세 명..... 그리고 소문에서 들었듯이 어떤 대재벌가의 아들이라는 것과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현재 혼자 나와 산다는 것, 그리고 가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음식은 가리지는 않지만 그다지 즐기는 쪽은 아니고 어느 쪽인가 하면.... 거의 살기 위해 먹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듯한 타입이었다. 술과 담배는 언제나 집안에 완비되어 있었고 은색의 오래된 지포 라이터를 늘 갖고 다니며 날씨가 추워지면서부터는 은제의 고급 술병도 갖고 다녔다. 옷은 모두 고급 브랜드의 니트와 청바지가 주류였고 외투 역시 재질도 디자인도 최고품질의 것들만이 쌓여있었다. 그런 걸 따질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물어보니 역시나..... 아무 생각 없이 주어오는 것들 -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 이라고 한다. 그를 만나는 건 대부분이 학교 안에서였고 함께 식사를 하고 내가 연습을 하면 그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가 끝나면 그의 집이나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거나 그의 집으로 가서 섹스를 한다. 가끔 급한 일이 생기거나 해서 그와의 약속을 깨게 될 때도 그는 화 한 번 내지 않았고 당연한 듯 쉽게 물러섰다. 그리고 간혹 늦게라도 그의 집을 찾게 되면 언제나 거실의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리는 그였다. 영화를 보거나 잠을 자거나 메뉴는 그 날 그 날 달랐지만 약속이 되어있는 날에는 어김없이 거실에서 나를 기다리다 내가 문을 여록 들어서면 웃으면서 반겨주었다. 처음 봤던 인상과는 달리 그는 나보다 연상이라는 것을 의식한 듯 나를 배려해주었고 내게 부담을 주는 일은 극히 적었다. 그게 사실은 도를 지나쳐 어쩌면 무관심해 보일 정도로 그는 나를 겉돌게 만들었고 가장 중요한 순간에 그가 부르는 것 역시 친구들이었다. 그게 많이 섭섭하고 가슴 아파서...... 시즌에 들어가 바쁘던 중, 모처럼의 데이트에 조금 심술을 부렸다. "...... 왜 그렇게 뚱한데?" 겨울 햇살이 비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뜨거운 커피 안에 준비해온 브랜디를 쏟아 붓던 그가 피식 웃으며 아이를 대하 듯 물어온다. "....... 그냥.... 기분이 안좋아서......." "흐응........" 마음 껏 쏟았는지 천천히 잔을 휘젓던 그를 보자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술 같은 게...... 맛있어?" 사귀고 난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그에게 말을 놓게 되어 이제는 존댓말이 오히려 어색해져버렸다. "글세.... 맛있나? 맛있다고 생각해? 운동 선수라도 술은 마셔봤겠지?" 라며 오히려 되묻는 그. 언제나 그는 나의 질문에 먼저 답한 적이 거의 없다. 조금씩 뒤로 돌려 한 발 물러선 채 느리게 답을 한다. 그것 역시 지나칠 정도로 내 기분을 살피는 것 같아 언짢아지기 일쑤였다. 이 사람은 대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만나는 걸까? 물론 소문으로 들은 바로는 싫어한다면 절대 나를 곁에 둘 리 없겠지만 그렇다고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내 말이라면 모두 들어주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주려 했지만 그에게서 아주 작은 애정의 편린도 느낄수 없었기 때문이다. "별로 맛은 몰라. 모두들 마시니까 마시는 것 뿐이야." 이런 저런 생각에 왠지 맥이 빠져 아무렇게나 답하자 피식 웃는다. "그래? 보통 그렇지........ 그런데 너 물이 맛있어서 먹니?" "물에도 맛이 있던가? 필요하니까 마시는 거지....." "그래, 몸이 원하는 거지. 나한테는 술이 그래.... 보통 사람들이 물을 마시 듯 난 술을 마셔. 그것 뿐이야....." 뭐야..... 그건...... 알콜중독자 같잖아..... 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이번엔 타겟을 돌렸다. "담배는?" "아아.... 그건 버릇이지. 누구에게나 물으면 마찬 가질 껄." "언제부터 핀 건데?" 이번엔 진지하게 묻자 약간 눈빛이 흐려진다. ".......... 어렸을 때....." "그러니까 언제? 보통 고등학교 때 시작하잖아. 설마 중학교 때부터 핀 건 아니겠지?" 약간 짖꿎게 웃으며 묻자 씁쓸하게 웃는다. 들은 소문은 있지만 설마...... 해서 였다. "그보다 조금 아래." "..... 초등학교?" 살짝 눈쌀을 찌푸리며 묻자 피식 웃으며 양손을 펼쳐 보인다. "뭐........ 열....... 살?" "대강 그 때 쯤인가..... 뭐..... 그럴꺼야......" "맙소사......" 기가 막혀 테이블에서 몸을 돌리자 인하가 억지로 내 손을 잡아 다시 시선을 다잡는다. "나랑 하나만 약속해라." "뭘?"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날 믿어. 그리고 내 과거에 대해서는 절대 들먹거려서는 안돼. 내 앞에서 가족 얘기랑 과거 얘기는 금기야. 그걸 깬다면 난 절대 널 용서하지 못할꺼야." "어째서냐고 묻는다면?" "....... 복잡한 게 많아서 그래. 나 별로 제대로 살지는 못했거든. 그러니까 알려고 하지 마. 언젠가 내가 말해도 좋을 정도로 편해지면 그 때는 다 말해줄게. 대신 나도 약속할게. 너한테 절대 거짓말은 하지 않을 꺼야. 그러니까 너도 나를 믿어 줘." 진지하게 말하며 나를 잡고 있던 손이 살짝 떨려와 뭐라고 해야할지 찾던 답을 접고 입을 열었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거야?" "응..... 믿고 날 배신하지 마. 나..... 배신하는 것만은 절대 용서 못해." 지친 듯 답을 구해오는 그 눈빛에 열심히 앞뒤를 재던 머리를 잠시 멈추었다. 어렵게 손에 넣은 사랑이었다. 혹여라도 이대로는 끝내기 싫으니까...... 믿으면 되는 걸까? 배신하지 않으면, 그를 믿고 절대 배신하지 않으면 되는 걸까? 머릿 속에 떠오르는 시끄러운 생각들에 조금 찝찝한 기분은 들었지만 내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애절해서 그 시선에 끌려 고개를 끄덕였다. ".... 맹세할게. 절대...... 배신하지 않아." "그래... 배신하지 마...... 배신하지만 않으면 나...... 너한테는 뭐든 관대해질 수 있어. 그러니까 절대 날 배신하지 마." "그래..... 그걸로 모든 게 확실해진다면..... 그렇게 할게." "고마워." 빙긋 웃으며 나를 잡은 손을 아쉬운 듯 놓은 그는 곧 잔을 들어 조용히 한 모금 들이켰고 슬픈 듯 예쁘게 웃어주었다. 항상 내 곁에 들리는 이야기로 제 멋대로에 이기적이고 최악의 인간이라던 소문은 모두 거짓인 듯 여리고 착한 어린 아이가 내 앞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처음의 계기야 어떻든 내 앞에 선 그는 사귀기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순수한 모습 그대로였다. 한없이 아이 같고 맑기만 한 사람. 가끔 부리는 심술이야 어쨋든 난 지금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의 무관심이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생각한다면 그 역시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난...... 그걸 믿었어야 했다. 그의 진심을...... 자기를 믿어달라는 그 말을 지켰어야 했다. 그리고 알았어야 했다. 그도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어린아이였고 나보다 더 사랑에 대해 무지하고 서툴렀다는 것을...... 하지만 난 어느 순간인가부터 그 사실들에 점점 의혹이 들기 시작했고 믿고 배신하지 말라는 그의 경고를 내 기억의 저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게 우리의 파멸의 시작이었다. - 폭력선생찬가 외전 - 04. 그와 만나고 처음으로 그의 생일이 돌아왔다. 생일이란 거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파티따위 한사코 거절을 해서 결국 둘만 조촐하게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사람을 사귀는 거란 생각에 작은 케익과 샴페인을 예약하고 그에게 건내줄 반지까지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함께 밤을 보내고 다음 날 데이트 코스까지 일일이 준비하고, 그 일주일 전부터는 코치의 지적이 잦아질 정도로 들떠 있었다. 그 때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그가 기뻐해줄까...... 어떻게 하면 보통의 연인처럼 기쁘게 입을 맞추고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 날이 되었을 때는 거의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정신이 산만해져 있던 상태였다. "생일 축하!" 작은 케익에 불을 켜고 그에게 말하자 기쁜 듯 밝게 웃어준다. "흐음..... 고맙다." "이제 스물 둘인가?" "아니, 스물 하나. 생일이 늦어." "아, 그렇지..... 신기하네.... 이제 진짜 나보다 한 살 연상이잖아." "웃기네." 환하게 웃으며 답하는 그의 모습에 나 역시 기뻐져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도 편안한 얼굴로 웃으면서 내게 기대었고 점점 분위기가 익어가던 중이었다. RRRRRRRRRR "뭐야?"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조금 짜증을 내자 그가 피식 웃으면서 손을 뻗어 수화기를 든다. "네, 장인하네 집입니다!" 밝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던 그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내 얼굴을 한 번 바라보고 그 쪽으로 신경을 돌렸다. "응...... 얘기해....... 그래서?" 한참을 심각하게 전화를 받던 그가 급하게 수화기를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서둘러 일어나 옷을 챙겨들었다. "미안, 나 지금 나가봐야 돼." "무슨 일인데?" 놀라서 그 쪽을 바라보자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잠시 시선을 돌렸다 답한다. "급한 일이 생겼어. 세하.... 친구한테 문제가 생겼어. 오늘 못 돌아올 것 같은데......." 급하게 말하며 그가 입는 옷은 언제나 입고 다니는 검은 색의 코트가 아니라 짙은 붉은 색의 파카였고 방으로 들어가 야구모자까지 챙겨들고 나왔다. 그 답지 않은 복장에 놀라 쳐다보자 묘한 표정을 짓는다. "미안..... 나중에 보답할게. 급한 일이야......" "그런 차림으로? 뭐 하러 가는 건데?" "........... 간만에.... 싸우러. 미안." 차라리 거짓말을 해주면 편했으련만 부담스러울 정도로 솔직하게 말한 그는 한숨을 내쉬고 차 키를 들고 집을 뛰쳐나갔다. 멍하니 그가 나간 것을 보고는 할 수 없다는 기분에 앉아 불만 끈 채 제대로 자르지도 못한 케익을 보고 와인을 한 잔 마셨다. 그리고 그제야 그의 생일 선물로 준비한 반지를 건내주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 날 밤 그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밤을 꼬박 새며 그가 남긴 담배를 줄창 피워대야만 했다.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대체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은 생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커다란 맨션에 혼자 앉아 밤 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끔찍한 일이었다. 게다가 더군다나 위험한 곳에 갔다는 사실을 안다면....... 자꾸만 불안해진다. 뭔가 점점 손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겨우 움켜쥐고 있던 그의 옷자락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리는 듯 한 묘한 느낌........ 서서히 서서히 사라져가 두 번 다시 내 눈앞에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틀 간 연습까지 빠져가며 집에도 돌아가지 않고 그의 맨션을 지키고 있었다. 거실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앉아 그만을 기다리는 나의 모습은 처절해보이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떠날 수는 없었다. 확실히 그를 보기 전에는..... "...... 있었니?" 문을 열고 들어오다 나를 보고는 잠시 시선이 흔들린다. ".........." 아무 말 없이 돌아본 그의 모습에 전신이 난자당하는 느낌이었다. 손목과 팔목에 잔뜩 감긴 붕대와 나갈 때와는 다른 옷차림, 그리고 찢어진 듯 부어오른 입술, 마치 살인이라도 하고 온 듯 한 험악한 오라에 놀라 숨까지 멈춰 버렸다. "무슨 일이야......." "별 거 아냐. 조금 일이 있어서..... 얘기했잖아, 싸우러 간다구." "싸우러 갔으니 싸우고 왔다? 당연한 듯 말하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기다렸어?" 방금 전의 그 험악한 기운은 어느 새 갖다버리고 억지로 환하게 웃으며 다가온다. 그 모습이 왠지 싫어져 뻗어오는 손을 쳐내자 당황한 듯 멈칫거린다. "........ 미안. 피곤하면.... 쉬어라." 낮게 말하며 쓰고 있던 야구 모자를 벗어던지고 주방으로 걸어들어가는 그에게서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향수라면 질색을 하던..... 사람인데...... 더군다나 이렇게까지 진한,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라니...... 순간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래서 그를 따라 일어나 주방으로 갔고 거칠게 그를 잡아 돌려 세웠다. 그리고..... 그 순간 눈에 들어온 목가의 선명한 키스 마크. "그건 뭐야?" "아아......" 목가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키스마크를 보고 추궁하 듯 말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흘리며 냉장고 문을 열어 물을 꺼내 마신다. "조금 그럴 일이 있었어." "그럴 일이라니? 나한테는 말할 수 없다는 거야?" "...... 말했잖아, 날 믿으라구. 말해서 좋다면 말하겠지만 절대 좋을 리 없는데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냥 날 믿어......" 자신은 당연한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인하이지만 그 정도의 말로 나를 납득시킬 순 없었다. 대체... 반동거 상태까지 들어간 연인이 적나라한 부위에 달고 나타난 그 흔적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차라리.... 거짓말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인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를 믿으라고 별 거 아니라고만 한다. 그 말에 내포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난 어리석지는 못하다. "어떻게 된 거야? 얘기해....." 고개를 갸웃하며 마시던 물병을 싱크대에 집어던지고 그가 나를 바라본다.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 그냥.... 필요한 거였어." "별 거 아니니까 얘기해달라는 거잖아. 안 보였다면 몰라도 본 이상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이건 뭐야? 긁힌 상처라고 변명하지 마. 그 정도도 구분 못하는 바보는 아냐." "...... 그 정도로 유치하진 못해. 그렇게 귀여운 성격도 아니고." "그럼 뭔데? 그것도 아니면 내게 실증이 났다는 거야?" "그런 거 아냐. 얘기했잖아. 내 근성은 굉장하다고..... 그냥......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야." "그 필요한 게 뭐냐고 말하잖아!?" 콰앙-- 그의 옆에 싱크대를 두 손을 치며 그를 감싸자 그는 조금 놀란 듯 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는 곧 다시 예전의 표정을 찾았다. "거래할 게 있었어.... 그래서.... 필요한 사람과 잤을 뿐이야. 그거야...... 단 한 번으로 끝나는 거고 감정은 없었어. 그걸로 끝이야." "어째서... 그런 게 필요했다는 거지?" "..... 내게 필요했어. 내가 판단해서 움직인 거야..... 걱정하지마... 객기도 오기도 장난도 아냐. 나 니 말이라면 모두 믿고 니 말이라면 모두 따라갈 수 있어. 하지만 그 안에서 벗어난 문제였으니까 말하지 않겠다는 거였어. 한 번이야." "어떻게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할 수 있어? 내 앞에서 당당하게 다른 사람과의 흔적을 갖고 오는 이유는 뭔데?" "당당하게는 아냐.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너도 할 말이 없는 거잖아?" 얼마 전에 인가..... 술을 마시고..... 소하와 자버렸다는 걸 들켰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건 실수였어!" "실수니까 나도 아무 말 안한 거야. 어쩔 수 없었다는 거였잖아, 니 말도? 나도 마찬가지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러니까 너도 이해해주기 바래." 아이 같은 눈으로 진지하게 이해를 구해오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내칠 수도,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갈 자신도 없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겨우 조금 다가섰다고 생각하면 어이없이 나를 뭉개 버리는 이 사람을......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느낀 이 사람의 무심함을 뭐라고 해야하는 걸까? 이제는 이게 진짜 사랑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다. 사랑하는데.... 사랑하고 있는데.... 원래 사랑이란 거 달콤하고 부드럽고 기분 좋은 거 아냐? 그냥 보기만 해도 행복하고 따뜻하고 기분 좋은 그런 거 아니냐구.... 하지만 난 너를 보면 울고 싶어져. 너를 보고 있으면 그냥 슬프고 아프고 괴로워. 널 어떻게 해야 되니? 이렇게 사랑하는데.... 넌 이렇게나 냉담하고 나만 미친 사람처럼 횡설수설해대고. "날....... 사랑하니? 그러니, 장인하?" "사랑해. 사랑하지도 않는 녀석을 이렇게까지 곁에 둘 정도로 난 마음 좋지 않아. 알잖아.... 널 사랑해." 목에 팔을 감고 깊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그 행위에 이를 악물고 그 가느다란 몸을 마주 안았다. 세게 끌어안으면 그대로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그 몸을 안고 이대로 부셔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이대로 이 몸을 강하게 끌어안아 숨도 못쉬게 만들어 내 안에만 가두어 둔다면.... 그럼 이 고통이 조금은 줄어들까....... 인하야? "사랑해........ 날 버리지마......" 가늘게 속삭이는 그 음성에 차마 yes 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머리가 너무 혼란스러워서.... 가슴이 아파서..... 그 작은 매달림에 답해주지 못했던 것이 일생을 건 사랑을 후회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피곤해. 집에 가서 쉬고 싶어...... 나중에 얘기해." 가느다란 기분 좋은 몸을 겨우 몸에서 떼며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나오는데도 나를 붙잡지 않는다. 그도 피곤해서인지, 혹은 내 기세에 눌린 것인지...... 아니면..... 잡을 필요성을 못느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나를 잡지 않는 그가 갑자기 싫어졌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한동안 그에게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연락하지 않았다. 05. 시즌이 끝나 대학팀 우승을 먹고 잠시 쉬는 시간이 났을 때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는 것이었다. 이대로 끝나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 두려웠고, 그렇다고 그에게 다시 연락할 용기도 나질 않아 점점 망가져 가고 있는 자신을 본다. 내 자신이 감정이라는 것에 이렇게 끄려다닐 꺼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아 더욱 당황스러웠다. 난생 처음 겪는 감정이라는 폭류는 달콤함보다는 고통스러움에 더욱 가까웠으니까..... 그래서 도망만 다니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결승 경기를 끝내고 우승을 축하하는 회식 자리였다. 시즌 끝이라 조금의 음주는 허락된 터라 모두 간만에 들떠 있던 중 잔득 취한 듯 한 2학년의 선배가 입을 열었다. "윤진이, 너 장인하랑 친하다며?" 시끌벅적한 회식 자리에서 갑자기 나온 이야기에 모두의 시선이 이 쪽을 향해 날아왔다. 워낙에 유명한 인간과 교제하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긴다는 생각에 웃어넘기자 그가 큰 소리로 외치듯 말한다. "그 자식 소문 하나 대단하지! 참, 그 얼굴에 성격이 그 모양이니......." "왜요? 장인하 선배가 왜요?" 나와 인하의 사이를 아는 우경이가 은근히 묻자 그는 요란하게 잔을 비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굉장하지! 우리 아버지가 장인하 아버지 회사 간부잖아. 그런데 얘길 들어보니 과간이더만. 쳇, 그 새끼 입양아야. 겉보기엔 재벌집에 입양된 운 좋은 녀석 같지만 그 사정이 기구하더라구." "입양이요? 헤에.... 그거 돌고 돈 얘기 아니에요?" 우경이가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자 그가 크게 오버를 하며 더 크게 떠들기 시작했다. "그게 사정이 복잡하다구. 그 녀석 사실은 입양되기 전에 진짜 이상한 곳에 있었다잖아. 얘기 듣기로는 집이 망해서 그 부모가 애새끼 버리고 튀었다더라. 사채업자들 알잖아, 그 깡패들..... 걔들이 그 놈 잡아다 이상한 클럽 같은 곳에 팔았는데 말야....... 그 사장인가 회장이 그 클럽에서 데려온 거라잖아. 사실은 그 사장과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하던데.... 게다가 그 형들과도 뒹굴고...... 그러니 그 모양이지. 아무나 돈만 주면 같이 잔다더라. 그 놈이 고등학교 때 학교 휘어잡은 것도 사실은 그 밑에 놈들하고 다 뒹굴어서라던데." "그딴 거 다 소문이잖아요." 우경이가 그를 한 번 보고 내 쪽에 힐긋 시선을 날리며 이야기를 무마시키려 하자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금새 일어설 기세가 되었다. "아니라니까!! 모두 사실이야!! 우리 아버지가 직접 봤다더라, 참 남사스러워서...... 지네 큰 형하고 집에서 뒹구는데..... 얼마나 밝히는지 우리 아버지 있는 거 빤히 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웃었대. 그리고 그 친구 있지, 그 뭐냐, 경영학과에 있는 사촌, 강상원! 그 놈하고도 그렇고 그런 사이에 그 아버지가 끼고 있던 조직에 대가리랑도 잤다더라.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그 아버지란 인간이 그 놈 갖고 장사했대. 참 더러워서...... 그리고 그 놈도 얼굴만 보고 맘에 들면 그대로 침대로 끌어들이는데.... 야, 할 말이 없더라. 그 새끼 건들면 온갖 깡패들이 다 튀어나온다고 소문 쫙 돌았잖아. 진짜 망조야, 망조! 그러니 집안 꼴이 그 모양이지!" 혐오스럽다는 듯 말하고 혀를 차는 그의 말에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선배가 직접 봤습니까?" "뭐?" "선배가 직접 본 일이냐구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본 적 있습니까? 그 사람하고 말이라도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있냐구요?" 얼굴을 굳히고 말하자 그가 확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떤다. "너...... 내 말을 못믿는다는 거냐?" "못 믿는 게 아니라 믿을 근거가 없잖아요. 제대로 말이나 해보고 그런 말씀하시죠? 장인하,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무심하고 냉정하고 차갑지만 ...... 어리고..... 마음 약하고....... 부드럽고...... 맑은...... 그런 인간이다, 장인하는....... 그렇게 멋대로 굴러먹은 놈이 아니라구! "윤진아....." 옆에서 말리는 우경이의 팔을 뿌리치고 그대로 가방을 챙겨들고 회식 자리를 먼저 나왔다. 왜..... 어째서 너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녀석들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해? 너와 가장 가까운 인간은 나여야 하는 거 아냐? 가장 사랑하고 있는 건 난데.... 너와 가장 긴 시간을 보내고 널 가장 많이 알고 있어야 하는 나인데.... 왜 다른 사람에게 저런 말을 들어야 해. 왜 너는 너를 알지도 못하는 저런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야? 왜 그렇게 사는 거야? 순간 알 수 없는 분노가 솟아올랐다. 아무에게도 자신을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모두가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도 결국은 중도에 포기하고 소문만을 만들어내는 거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반복되는 소문들은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니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말을 믿고 싶어지는 걸 어떻게 해야 하니, 장인하..... 순간..... 인하가..... 보고 싶어졌다. 이대로 볼 수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나쁜 자식이 보고 싶어졌다. 홧김에..... 잔뜩 취해...... 정신이 흔들릴 정도로 자신을 잃은 모습으로 그에게 향한다. 틀림없이 소파 위에 웅크리고 누워 나를 기다리다 잠들었을 녀석을 만나기 위해, 잠시나마 깊이 자고 있을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주체할 수 없는 몸을 이끌고 택시를 잡았다. 겨우...... 한 달 정도 못봤을 뿐인데도 미치도록 그리워서, 그 녀석이 너무 보고 싶어서 겨우 움직여간다. "야, 서윤진, 너 오늘은 안돼. 그냥 우리 집에 가자, 응?" 어느 새 따라나와 내 술 상대까지 되어버린 우경이의 걱정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그를 보고 싶었다. 언제나 차갑고 냉정한 사람, 내가 손을 뻗지 않으면 절대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그 사람의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혼자 잠들었을 그가 안타까워서.... 아니, 사실은 그가 다른 사람을 찾을까 두려워서 그를 묶어두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곁에 있는 건 두려워하면서도 절대 그를 놔줄 수는 없다는, 아니 그를 절대 다른 사람에게만은 줄 수 없다는 이기-- 내 정신을 먹어치우는 건 그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증오와 독점욕이다. 손에 잡혔다 하는 순간 어이없이 빠져나가고 겨우 품에 안았다고 안심하면 다음 순간 어이없이 머리를 내리치는 그의 잔인함과 제 멋대로에 늘 마음 졸이며 벌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가 나를 버릴까 봐...... 나를 바라보지 않을까가 너무 두려워 잠시도 가만 두지 못하는 마음....... 그가 내게 다정하지 않아서, 나를 배신해서 두려운 게 아니다. 나 같은 건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듯 한 그의 무심함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변하지 않는 그와 나 사이의 견고한 벽이 나를 점점 망가트려 가고 있었다. 그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해서 가슴 안에 쌓아만 가는 고통..... 그저 처음처럼 몸만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돼진 않았을 텐데..... "윤진아, 안돼겠다. 우리 집으로 가자." "택시나 잡아........" 머리 안이 흐려지며 모든 것이 돌아간다. 정신 없이 돌고 돌고 돌아서 나를 미치게 하려는 듯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비웃고 있다. "너, 안돼. 서윤진!! 차라리 본가로 들어가, 그럼!" 화를 내는 듯 한 우경이의 목소리에도 술에 절은 입에서는 같은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택시... 잡아.... 그 자식 보러..... 가야 돼." "차라리 집으로 들어가!! 이런 꼴로 가면 누가 반기겠냐?" "...... 가야돼...... 그 새끼가 기다려..... 그 나쁜 자식..... 혼자서 거실에 누워서.... 날..... 기다려." "어린애가 아니잖아. 내일 만나도 되는 거야." "가야 돼. 그 불쌍한 자식..... 나 기다려...... 장인하, 개자식......" "윤진아........" "장인하... 세상에서 제일 독하고 못된 자식.... 잔인한 놈.... 내가 사랑하는... 나쁜 자식....." "윤진아!!!" 세상이 멀어지며 몸이 흔들린다. 이젠 여기가 어디이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대로 편히 쉬고 싶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녀석을 모르던 시절처럼... 마음 편히 눈을 감고 그저 즐겁기만 하던 그 때처럼....... 그래도.... 니가 보고싶어, 장인하...... 다음 날, 아니 정확히는 몇 시간 후 눈을 떠보니 우경이의 집이었다. 머리가 깨지는 듯 한 고통에 몸을 일으키자 기다렸다는 듯 우경이가 물 잔을 건낸다. "너 무지하게 많이 마셨어. 꼴이 그게 뭐냐?" "...... 글세......" "시즌이 끝났더라도 몸 관리 정도는 잘해야지. 너 프로야.... 장난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힐책하는 듯 한 우경이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웃을 뿐이다. 그 녀석처럼..... 언제나 웃어버리는 그 녀석처럼....... "그 사람이 그렇게 힘들게 하냐? 너답지 않아.... 이렇게 취하고 망가지는 거." "나다운 게 뭔데? 그냥... 하룻 밤 자고 웃고 바이바이 하는 거? 그게 나다운 거냐?" "....... 그런 뜻이 아니잖아. 너... 노는 척 하면서도 우리 중에 제일 중심 잡고 사는 놈이잖아. 그런 놈이 왜 이런 바보짓을 하는데?" 우경이의 말에 더 이상 변론할 말이 없어 차갑게 식은 잔을 한 모금에 들이켰다. 목이 따갑고 아프고.... 온 몸이 나른하다. 이렇게 마시고 나면 아픔만이 남는 것을 인하는 왜 그렇게 죽어라 마셔대는 걸까? 너무 아파서.... 비명이 나올 정도로 가슴이 아파서 마셔대는 술을 왜 그 녀석은 그렇게 일상으로 만들어버린 걸까...... "그거 마시고 자라. 얘기는 나중에 하자. 너 이러는 거 너희 부모님이 아시면 난리 나." "집에 갈꺼야." "이 시간에 어딜 가냐? 잠이나 자. 피곤하겠다." "인하... 형이 기다릴꺼야." "......... 너 바보냐?" 직설적으로 나온 우경이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래.... 난 바보인가? 사랑에 미친 바보.... 뭐, 나쁘지는 않겠군. "그럴지도 모르지. 그 자식 나 기다려. 택시나 불러라." "...... 서윤진이 진짜 임자 만났구나. 그렇게 잘난 체 하던 자식이......." "벌 받는 거겠지. 이 때까지..... 너무 사랑을 우습게 본 벌..... 그렇지?" 웃으며 우경이를 바라보자 녀석의 눈에 떠오른 당혹감을 읽어버렸다. 너도.... 이런 내가 이해되지 않겠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나를 알 수 없는데 너라고 이해하겠니? "모르겠다..... 하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아..... 나도 얼마 전에 운명 같은 사람을 만나버렸거든..... 어쩌면 너한테는 장인하가 운명인지도 모르지...... 택시 부를테니 조금이라도 쉬어." 어깨를 툭하니 치고는 일어서 전화기를 드는 우경이를 보고는 잔을 테이블에 얹고 잠시 어지러운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머리 아픈 일을 왜 시작했을까..... 어째서 그 녀석이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 안에서 어지럽게 맴돌았지만 어떻게 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지금 그 녀석이 너무나 그립다는 것..... 겨우 겨우 무거운 몸을 끌고 아파트에 닿자 텅 빈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녀석이... 혹시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나를 기다리다 감기라도 들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한 걸음에 달려온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광경이었다. 일단은..... 방에서 제대로 자고 있거나 친구들과 술이라도 마시러 나갔으려니 하는 생각에 소파에 앉아 어지러운 머리를 다시 가다듬었다. 테이블 위에는 녀석이 피다만 담배 갑과 오래된 지포 라이터, 그리고 마시다 내버려둔 듯 한 술병이 놓여져 있었다. 라이터가 있다는 건 일단은 집에 있다는 얘기겠지. 절대 라이터만은 놓지 않고 다니는 녀석이니까. 앉아서 청승 떠는 걸 관두고 나 역시 자기 위해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가서.... 어서 잠들어 있는 인하의 얼굴을 보고 그 옆에서 같이 잠들고 싶었다. 그 녀석의 체취를 맡고 하얀 피부를 끌어안고 편하게 쉬고 싶다. 그러면 이런 혼란 따위 그냥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보........." 스스로가 한심해져 그렇게 비웃고는 침실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문을 열었을 때 가장 보고 싶지 않던, 아니 어쩌면은 언젠가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급히 닥칠 꺼라고는 생각 못했던 광경을 보게 되었다. 장인하의 옆자리는 비어 있던 게 아니었다. 멍하니..... 한참을 문을 연체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의 허리를 꼭 껴안고 고양이처럼 몸을 부벼대는 그의 모습에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이래서 연락을 하지 않은 거냐? 이대로 끝내자는 거야? 장인하...... 당장이라도 달려가, 자고 있는 그를 깨워 자초지정을 따지고 싶었지만 내게는 그럴 권리따위 없는 거 같았다. 너무 편하게 그의 품에 안겨자는 모습에 절망해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니가 보고 싶어서 미친 듯이 달려왔는데 너는......... "으음......" 멍하니 서있던 중 인하가 아닌 다른 남자가 몸을 뒤척이다 눈을 떴다. 어딘지 모르게 지쳐보이는 모습을 한 건장한 남자였다. "어....... 쉿......" 나를 보고 잠시 당황한 듯 한 그는 인하가 옆에서 뒤척이자 곧 오른손 검지를 입술에 대고 조용히 하라는 표시를 한다. 그리고 그의 가슴 위에 올려져있던 인하의 팔을 친절하게 내려두고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인하와 거의 비슷한 키에 단정한 용모를 한 그는 내 어깨를 툭 치더니 따라나오라는 듯 고개짓을 하고 조용히 문을 닫는다. 귀신에 홀린 듯 거의 무의식 중에 그를 따라 주방에까지 닿았다. "...... 니가 그 농구선수군." 당당히 냉장고 문을 열고 문을 꺼내 마신 그는 잠시 안을 들여다 보고는 낮게 혀를 찼다. "하여간....... 이 놈의 냉장고에는 먹을게 있는 날이 없군. 그러게 우리 집에서 반찬이라도 갖다 놓으라니까....." 잠시 한숨을 내쉬고 컵을 싱크대에 담근 후 그는 자연스런 동작으로 작은 주전자를 찾아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물을 받고 가스렌지 위에 올린 후 나도 모르고 있던 커피를 찾아들었다. "인하형과는 어떤 관계죠?" 스스로도 유치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집안 구조를 나보다도 훤히 알고 있는 그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질투심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아-- 고등학교 때 친구. 저 놈 엉망이지?"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은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스렌지를 끄고 끓은 물을 잔에 부었다. "상대가 워낙에 막강하니 꼬이고 머리 아프겠지만 잡았으면 절대로 놓지 마. 넌 운이 좋은 거니까." "...... 그 말은....... 당신은 운이 나빴다는 겁니까?" 주방과 거실의 경계선에 삐딱히 서서 그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대답해온다. "내 첫사랑이 장인하였으니까. 뭐, 그 놈 성질하고 악랄함에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운이 나빴다기 보다는 용기가 없었던 거지. 그 녀석을 있는 그대로 안아줄 배짱 같은 거 나한테는 없었거든." 조금도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똑바로 말하는 그의 곧은 시선에 먼저 시선을 돌려버린 것은 나였다. 뭐가..... 용기가 없었다는 거야? 그렇게 오래도록 그 사람을 지켜볼 정도라면... 용기따윈 넘치는 거 아닌가? "장인하.... 상처 입히지 마라. 뭐, 사랑이란 게 영원한 건 아니겠지만.... 언제라도 끝날 꺼라면 상처 주지 않게 조심스레 끝내. 너무 아파서 미쳐버린 놈이니까...... 더 이상 아프게 하지말고 사랑해 줘. 그 꼬인 인생살이에서 꿈 좀 꾸게 해준다고 폐 끼칠 껀 없을테니."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자르는 그의 말에 차마 yes 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알지만.....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의 이기는 그를 웃게 하기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그의 상처를 잡아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한다. 단지 상냥하게 대하는 것만으로는 그에게 각인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차라리 잔인하게 상처를 줘서 나를 잊게 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이라도 나를 증오하며 절대 잊지 못하도록..... "인하.... 형과 잤나요?" "...... 뭐?" "잤냐구요?" 내 질문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한 얼굴로 물어온다. "아버지 계셔?" "..... 네... 그게 무슨 상관이죠?" "아버지랑 사이가 좋은가?" "....... 그걸 말해야 하나요?" "아버지랑 자고 싶다고 생각해?" "뭘 말하고 싶은 겁니까?" "마찬가지야. 장인하는..... 다른 녀석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그래. 가끔은.... 믿음직한 친구 같고 어떤 때는 사랑스러운 연인 같기도 하고 가끔은 자상한 아버지 같기도 하고..... 그리고 때로는 말썽쟁이 막내동생 같기도 하고..... 그런 거야. 따뜻하고 사랑스럽고, 자상하고 기대고 싶고.... 그리고 불쌍하고 가끔은 얄미워서 한 대 패주고 싶은...... 넌 그렇게 소중한 존재와의 관계를 섹스라는 걸로 더럽힐 수 있다고 생각해? 부정은 안해..... 나 첫사랑이 그 놈이었고 발정했던 것도 사실이야. 하지만 난 그런 순간의 감정으로 녀석과의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그 놈이 나한테 어떻게 했는데..... 그 놈이 나한테 어떤 존재인데..... 그런 생각을 하겠어? 다른 녀석들에게도 마찬가지일꺼야. 그 녀석은 우리가 가장 힘들 때 도와줬고 그걸로 우리의 인생을 바꾼 녀석이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아마 나도 그 놈을 만나지 않았다면 조폭 같은 거 될 생각도 안했고 돼지도 못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녀석을 만난 걸 후회하는 건 아냐. 지금도 만약 그 상황이 돌아온다면 난 내밀어진 인하의 손을 미련 없이 잡을 꺼야. 뭐..... 상원이 놈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난 그래."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으면서 머릿속이 뭔가가 둔하게 울려왔다. 그는...... 사랑은 언젠가는 끝나는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절대 장인하를 사랑하지는 않겠다고, 너무나 소중해서..... 너무 소중하고 소중한 존재라 그 관계를 절대 끝내지 않기 위해 그는 장인하와의 섹스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우정을 택했다. 그건 애초에 그와의 섹스만을 기대하고 있던 내게는 청천 벽력같은 괘변이었다. 몸을 따라 움직이는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뭐..... 그거야 그런 얘기고.... 배가 고픈데 먹을 게 전혀 없네. 이 녀석을 깨워야 하나?" "......... 시킬 꺼라면 그냥 시키죠." "시켜 먹는 건 이제 질려서. 성질은 그 모양에 요리는 잘하거든. 한 달에 한 두 번씩 몰아서 만드는데... 그 놈이 요리할 때는 극도로 기분이 나쁘거나 굉장히 기분이 좋을 때 뿐이라 억지라도 부리지 않으면 안해주거든. 하여간 언벌런스의 극치라니까......"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에 어리둥절해졌다. 네 달 정도 사귀었는데다, 거의 반동거 상태인데도 그가 요리하는 걸 본 적은 없다. 배가 고프면 가까운 곳에 나가 해결하거나 뭔가를 시키거나 하는 식이었고, 냉장고 안에는 맥주와 가벼운 안주꺼리 뿐이라 요리를 한다는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누가 뭐라구?" 심각한 생각에 입술을 악다무는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거실에 서있었다. "배 고프다구. 밥해 줘. 요즘 제대로 된 걸 먹어본 적이 없어." "집에 들어가서 먹어, 임마!" "집에 들어갈 입장이 아니라서.... 우리 엄마 잘 계시지?" 쓰게 웃으며 말한 그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째서 자기 어머니의 안부를 인하에게서 묻는 걸까? "응, 가끔 연락은 해라. 세경이도 걱정이 많더라. 그 자식..... 또 까불면.... 아아, 관두자. 머리 아파. 커피 내 놔!" 나를 지나 부엌으로 들어간 인하는 자연스럽게 그의 컵을 빼앗아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다..... 경기 잘 끝났어?" "응......." "다행이네....... 머리 아파......" 마시던 커피를 내리고 뒷골을 누르던 인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의 친구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나 얼마나 잔 거야?" "네 시간 정도. 아직도 밤에 못자냐?" "아니..... 최근엔 잘 잤는데..... 씨발.... 갑자기 또.... 잠이 안와." "그래도 약은 먹지 마. 밥도 잘 먹고...... 그런 의미에서 아침 좀 해줘. 너랑 마시면 속이 찢어진다. 무슨 놈이 술을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냐?" 투덜거리 듯 친구가 말하자 그가 피식 웃는다. "내 인생의 옵션이라니까." "그러다 빨리 죽을 꺼야. 병 걸려서 얼굴도 상하고 피부도 늘어지고." "괜찮아..... 이 미모에 그 정도 시련이야 우습지." "....... 그래 있는 건 얼굴하고 돈 밖에 없으니 좋겠다." "신의 가호지!" "언제는 신따위 엿 먹고 뒤지라면서?" "그 신 말고 다른 신." 싱긋 웃으며 나간 인하의 말에 친구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두들기더니 따라 웃어버린다. 익숙하게 아주 친근한 사이처럼 바라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 어떤 위화감에 느껴졌다. 너무 잘 어울려서..... 나와 있는 그보다 그 친구와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더욱 사랑스러워 보여서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건. "그래, 간만이니 기분 내서 요리나 하자. 뭐 먹고 싶어?" "밥 종류로 아무 거나..... 저번에 너 집에 다녀와서 열 받아서 한 거 맛있었는데.... 닭 가슴 재워서 한 거....." "아아.... 별 생각 없이 해본 건데..... 그거랑 나물이랑 해서 밥 먹자. 아, 윤진이 너 지금 들어왔지?" "....... 응....." "그럼 가서 자. 밥하고 깨울게. 넌 짐꾼으로 따라와, 전세하!" "나 수배 중이야!" "사람들이 수배자 명단 보고 다니냐? 나랑 같이 다니면 괜찮아." "뭘 믿고? 경찰이라도 만나면?" "괜찮아..... 난 예쁘니까." 방긋 웃으며 나간 그의 말에 그의 의외의 면을 본 것 같아 멍하니 지켜보자 그의 친구 역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그런 얘길 그렇게 당당하게 하고 싶냐? 니 그 말 들을 때마다 황당해진다구. 너 그거 입버릇인 거는 알지만...... 그런 얼굴로 그렇게 진지하게는 말하지 말아 줘..... 4년 째지만 적응이 안된다구." "적응해. 나 좋아하지?" "..... 그래, 좋아한다, 이 나쁜 자식아." "응, 계속 좋아해...... 나 예쁘잖아?" "그 얼굴로 평생 빌어먹고 살아라." "설마....... 남자 후리는 거야 취미지만 빌어먹는 건 취미 밖이야. 이왕이면 공양 받는 게 낫잖아." "그러다 평생 혼자 살지......" "설마..... 내 미모로 혼자야 살겠어?" "그러니까 그 미모가 문제라는 거다. 관두자, 너랑 그런 얘기 해봐야 내 입만 아프지...... 어이, 농구 선수!! 너 이 놈 교육 좀 잘시켜. 이 성격파탄자 죽을 때까지 성격 못고칠까 무섭다." "누가 성격파탄자야?" "그럼 악질이라고 해줄까?" "언제는 천사라며?" "그거야 얼굴만 보고 그런 거지." "흥, 웃기네. 얼굴만 본 이미지랑 실제 이미지는 완전 다르다? 그거 자기네들 맘대로 보고 맘대로 결정하는 거잖아. 천사로 봤으면 끝까지 가." "넌....... 악질이야, 임마." "그 악질 친구는? 유유상종이라잖아." "난 정신병은 없어..... 욱!! 왜 때려, 임마?" 이를 갈며 말하는 친구의 말에 팔꿈치로 그의 복부를 치자 친구가 심하게 아픈 듯 인상을 찡그린다. 인하는 그 모습에 빙긋 웃으며 마시던 잔을 싱크대에 두고 내게로 다가왔다. 두근--- 심장에 아플 정도로 두근거린다. 어째서..... 또 이러는 거야? 끝날지도 모르는 관계에......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냐구..... "윤진이 들어가 자. 이따 깨워줄게. 피곤하지?" 내 얼굴을 손으로 조심스레 만지며 얼마 전의 그 일은 완전히 잊었다는 듯 그가 다정하게 웃는다. 그 모습에 얼떨떨해져 바라만 보자 슬픈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살짝 입술을 포갠다. 어머니가 자기 싫다고 투정부리는 아이를 달래는 듯 한 그 키스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더욱 더 녹아 들어갈 것 같은 음성으로 속삭인다. "...... 같이 식사하고..... 얘기하자. 사랑해." 이건 반칙이야. 그렇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면 난 어쩌라구? 그 동안 연락을 안한 거 따위 별 거 아니라는 거야? 왜 이렇게 또 다정하게 구는 건데? 차라리 화를 내고 싸우는 쪽이 낫지 않아? 왜 연락이 없었냐고 추궁하지 않아? 어째서 이제서야 당당히 나타난 거냐고..... 화내지 않아? 걱정하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과 그의 무심함에 대한 상처로 머리가 어지러워 시선을 돌리자 그 친구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이 쪽을 바라본다. 아마 내가 그와 있던 인하의 모습에 넋이 나갔던 것처럼 그도 나를 대하는 인하의 태도에 놀란 것 같았다. 그가 아는 친구 장인하와 내가 알고 있는 연인 장인하의 모습은 어째서 이렇게나 갭이 큰 걸까? 그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생각에 다시 머리가 아파왔지만..... 내 앞에서 나를 구하고 있는 이 손을 뿌리칠 순 없었다. 아직은 그에 대한 사랑이 더 컸을 때니까....... 06. 그렇게 서로 그 일에 대해서는 입밖에 내지 않은 채 다시 예전과 같은 시간으로 돌아갔다. 뭔가 내 안에 앙금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그에게 뭐를 구체적으로 따져야할지 알 수 없었고 그는 전보다 더 내 눈치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끌려 다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예전보다 더욱 조심스러워졌고 내가 약속을 한 두 번 어기는 것 정도로는 화도 내지 않았다. 그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차마 그에게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에 관해서는 어떤 것도 터치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지만...... "내일 시간 낼 수 있어?" 정사 후 한껏 끌어안고 있던 그에게 말을 걸자 그는 고개를 들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왜?" "내 생일. 친구들 몇 모이기로 했는데..... 너도 나왔으면 해서. 다들 보고 싶어해." "사람들 많은 데는 싫은데........" "작은 바야. 친구 몇 모이는 거니까....." 마주친 시선에 인하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 꽉 끌어안았다. 마르고 가느다란 어깨는 안으면 부드럽고 따뜻해 기분 좋고 그 피부는 매끄러워 빠져들어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중에도 왜 그렇게 불안한 건지...... 아무리 안고 놓지 않으려 해도 자꾸만 빠져나가 버릴 것 같은 예감에 그대로 그를 꽉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여긴 내 친구들, 그리고 이 쪽은 장인하..... 나랑 연애 중." 언제나 모이는 바에 앉아 먼저 인사를 시켜주자 인하형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룸의 가장 안쪽 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원래가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일부러 가장 안쪽으로 앉히고 대화로 끌어낼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형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재우 녀석은 오늘 모임에 자발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참, 형이라고 불러도 돼죠? 체육관에서 몇 번 뵜죠." 한참의 이야기 중 우경이가 붙임성 있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묻자 인하형은 쓴 미소를 머금고 조용히 말을 열었다. "그래." 우경이의 말에 빙긋 웃으며 말한 그는 함참 떠들어대는 녀석들 사이에서 조용히 술잔을 비워나갔다. 굳이 우리 이야기에 끼어주길 바란 건 아니지만 적어도 조금의 관심을 보여주길 바랬던 게 큰 잘못일까? "아, 나도 오늘 애인 오기로 했다." 말을 돌리며 웃는 우경이의 반응에 뜻 밖에 인하도 아는 척을 해온다. 우경이 놈의 살가운 성격이 맘에 든 모양이었다. "곧 올텐데....." "어느 새 꿰찬 거야?' 주변 여자 친구들이 어깨를 툭 건드리며 묻자 멋 적은 듯 한 미소를 짓고 싱긋 웃어 보인다. "응, 우연히...... 굉장히 멋진 남자야." "너도!! 우와!" 친구들의 거센 반응에 그저 웃기만 하던 우경이는 다정한 미소를 지었고 때를 기다렸다는 듯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반갑게 답하는 녀석. "지환형, 여기!!" 라고 손을 흔드는 사이 호명된 이름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해갔다. 얼마 전 우연히 만났다던.... 우경이 녀석이 운명 어쩌고 하던 그 남자인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 깍쟁이 같은 녀석이 공개적으로 소개를 할 리도 없으니까. 예의 상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으며 그를 맞이하는데 순간 안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인하......." "............" "어? 인하형하고 아는 사이?" 금새 일어나 그의 팔짱을 끼고 선 우경이는 인하와 그를 돌아보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니가...... 왜 여기 있지?" 무겁게 나간 그의 말에 인하형을 돌아보자 인하는 차가운 조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는 사이야?" 의아함에 나간 내 말에 인하는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서있는 그를 노려보았다. "아직 안죽었냐? 언제 뒤질래?" 잔뜩 비웃음을 담고 나간 그 말에 홀 안의 사람들은 숨을 멈추었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놀라 인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는..... 인하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 입만 산 건 여전하군." "그 입만 산 새끼 엉덩이에 미친 듯이 달라붙었던 게 누군데? 아직도 살아있는 꼴 보니 벨 틀리네...." 차가운 표정으로 진심인 듯 말한 인하는 서서히 자리를 차고 일어나 그와 맞섰다. 그 모습에 룸 안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장인하......" "왜? 자살중독증에 걸린 병신 새끼야." 비슷한 키로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선 두 사람은 칼부림이 나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를 증오와 적개심, 그리고 아픈 듯 한 표정의 낯 선 남자와 감정 하나 없이 차갑고 냉정한 비웃음을 가득 담고 있는 듯 한 얼음 같은 눈빛의 인하.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둘의 감정은 조금 비슷하고 많이 차이가 있었다. 철썩-- 순간이었다. 모두가 둘만을 바라보던 순간 인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의 남자의 뺨을 내리쳤고 당황한 그가 얼굴을 들자 다시 반대쪽을 내리쳤다. "인하형!!" 놀라 그의 앞을 막아선 우경이따윈 시선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은 서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와는 다른 공간에 떨어진 듯 그들은 오직 그들만의 작은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 성질은 여전하군. 진짜 죽여버릴 기세인 걸?" "니 꿈이잖아. 소원을 이루어주겠다는데도 싫어? 아직도 병신 짓 하고 다니냐, 장지환? 니 애새끼나 제대로 보지 그래?" "내 애새끼니 죽이든 살리든 내 맘이야. 너나 뒷일 처리 잘하고 다녀. 또 어떤 자식을 잡았길래 그렇게 요란한 거냐? 장인하가 사랑에 빠졌다구? 웃기는군." 입가에 피를 닦아내며 비웃는 그의 말에 인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스듬히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정면이 아닌 약간 비틀린 각도의 시선으로....... "니가 니 새끼 챙긴다는 것보다는 내가 사랑에 빠진다는 쪽이 더 현실감 있지 않아?" "니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 날이 세계 멸망 아닌가?" "멸망이라도 한다면 다행이지. 너도 같이 죽을테니까."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서로의 목을 물어뜯을 기세의 둘은 그렇게 한참을 마주보고 서있었다.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할 것들이 많은지 서로의 시선만을 의식한 채 미동도 없이 노려보고 있다. "장인하.... 꺼져라." "그건 내가 할 말인 걸. 먼저 온 건 나야. 꺼져줄 건 너라고 생각하는데." "그 성격은 전혀 좋아질 기세가 없군. 평생을 그러고 살꺼냐, 장인하?" "너처럼 미련하게 살기는 싫으니까. 내 멋대로 사는 게 어때서? 왜? 넌 그렇게 할 배짱도 능력도 없으니 부러워?" "미친 자식.....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자고 뒹굴고 멋대로 망가져서.... 반쯤 미친 상태로 죽기만을 기다릴 셈이야?" "죽기를 기다리는 건 너겠지. 난 늬들이 이 세상에서 피가 마를 때까지 살아볼 생각인 걸. 그리고 내가 어떤 자식과 자든 뒹굴든 상관없잖아. 니 일이나 잘하지 그래?" 피식 웃으며 도발적으로 나간 인하의 말에 그는 노려보 듯 인하를 바라보았다. 어딘지 모르고 둘은 닮아있었다. 외모가 아니라..... 무언가가 닮아있었다. 근본적으로 서로가 서로를 닮아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넌 실패할 꺼야, 장인하. 지금의 너는 조금도 자라지 못했어.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처음 만났던 그 때나 넌 조금도 변하지 않았어. 그 상태로는 넌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못해. 어째서 스스로가 망가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데?" "자살 중독증에 걸린 미친 새끼한테서 그런 말 듣고싶지 않을 걸." "아직도 그 모양이지? 꿈도 꾸지 못하고...... 언제나 악에 받쳐서 오기로만 뭉쳐서.... 누구든지 물어뜯을 준비만 하고..... 자기 안에 칼을 품고 그 날에 상처받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말야......" "내가 내 칼에 베어 상처 입든 그 칼로 니 목을 쳐내든 그건 내 맘이고 너와는 상관없잖아, 안그래? 내가 상처받는 걸 왜 니가 걱정해?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지는 거야? 누구나.... 가슴에 칼을 품고 살아. 하지만 내 가슴의 칼을 비수가 되도록 다듬어주는 건 너희라고 생각 안해? 내가 악에 받쳐서 살려고 발악하는 걸 즐기는 건 너희잖아? 내가 쉽게 항복을 하면 재미없지 않아?" 입술 끝은 바짝 올리고 잔뜩 선 날을 말로 풀어내는 인하의 반응에 그의 눈빛이 잠시 흐려졌다. 많이 아픈 듯 상처받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안좋은 예감이 점점 확실해지는 기분이었다..... 뭔가...... 알고싶지 않은 것을 알게 되어버릴 것 같았다. "여전히.... 못됐구나. 사람을 상처 입히는 방법이라도 연구하고 사는 거냐, 너는........" "살다 보니 느는 건 그것뿐이던 걸. 상처 입히지 않으면 상처받아..... 그걸 일찍 깨달아서 이 꼴이지. 왜 나만 피해자가 되야하는데? 상처는 누구나 받는 거고, 받아야 하는 거야. 그 정도 상처받는다고 니 인생이 내 인생보다 더러워지겠어? 장지환? 병신새끼야..... 안그래?" 빙그래 웃으며 말하는 인하의 표정은 제 3자인 나마저도 심장이 얼어버릴 정도로 강한 한기를 품고 있었다. "....... 여전히 잔인하고.... 차갑고..... 넌 인간 같지도 않은 놈이야...... 하지만 이건 알아둬. 장인하, 불행을 자처하는 건 너야. 언제나 니가 모든 문제를 만들어 나가.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들을 니 독기로 크게 만들어버리는 거야. 그 독에 가장 상처입는 게 너란 것도, 그 사실에 몇 배로 더 아파지는 게 너라는 것도 모르고 말야. 넌 아직도 애야. 조금도,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 상처받은 11살의 아이로 머물러서 영원히 그 안에서만 살려고 하지. 니가 스스로 상처받고 아파하고 싶어하는 걸 모르는 한 넌 그 딜레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어." 침착하고 조용하게 나오는 그의 말에 인하는 순간 눈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환한 얼굴로 웃으며 받아쳐준다. ".......... 그럴 듯하게 연설은 잘하네. 니네 큰형처럼 말야..... 말은 늘 그럴 듯 하지...... 그것 뿐이야. 아무 것도 책임지려하지 않으려 하지. 잘났어, 장지환.... 그렇게 모든 걸 내 탓으로만 돌리면 기분 좋겠지. 니 잘못 같은 건 모두 사라지니까...... 전부 내 탓이면 되니까..... 너희는 착한 피해자고 성질 더럽고 이기적인 내가 세계 최고의 악당이지. 내가 니 인생을 조진 거야, 그렇지? 너는 잘해보려고 했는데 내가 아무 이유 없이 너를 그렇게 괴롭히고 죽여버릴 듯이 달려드는 거야. 나만 나쁜 인간이면 넌 편해지지? 아주 편한 방법이네...... 그렇게 평생 모든 일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살라구. 그러니까 넌 매일 그 모양인 거야....... 흥, 딜레마? 난 구원따윈 바라지도 않아. 난 내가 살아나갈꺼야. 너의 손따윈 필요없어, 물론 너의 충고도.... 니 뒷처리나 잘하고 다녀. 그 불쌍한 년하고 새끼같은 것들 또 만들지 말고 말야..... 알아? 너 같은 인간들 때문에 나같이 미친 놈이 생기는 거야. 너 같은 것들 때문에 나 같은 인간들이 이 세상을 말아먹는 거라구..... 너처럼 착한 선의의 피해자들을 만들지 않으려면 애초에 나 같은 것들을 만들지 말란 말야..... 그러니까..... 재수 없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죽어버리라구. 사라져 주는 게 지구 평화를 위해 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니까 말야." 잔뜩 선 칼날에 독을 묻힌 듯, 스치기만 해도 죽어버릴 듯 한 느낌의 언어들이 그에게 날아간다. 인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서울 정도로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잔인한 말들을 내뱉고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 언제나와 같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의 가장 깊은 곳의 한 부분까지 모두 읽어내려는 듯 뚫어져라 그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가장 알고싶지 않던 사실을 알아버렸다. "......... 장인하...... 넌 망가질꺼야......" "여기서 더 망가진다구? 그건 그거 나름대로 끔찍하지만...... 안됐지만 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어.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는 건 망가질 곳이 있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지, 내겐 잃을 것고 아쉬운 것도, 상처받을 껀덕지도 남아있지 않아. 심장은 애초에 타고나질 못했고 팔자는 너무 더러워서 말야. 너처럼 사는 게 두려워서 전전긍긍하며 죽을 생각을 하는 것도 사치스럽지. 난...... 살아가는 것에 의의가 있거든. 풍족하고 여유롭게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되서 죽고싶다는 것따위 병신들이나 하는 짓이야. 내게는 살아가는 게 제일의 목적이야. 그걸 위해서라면..... 다른 것 따위 필요 없어. 죽고 싶어지게 하는 사랑 따위 나한테는 무의미한 거야......" 다시 표정을 굳히고 차가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인하의 얼굴에 그는 크게 상처받은 듯 눈빛이 어두워진다. 많은 걸 품고 만힝 상처 받아.... 지쳐버린 눈동자..... ".......... 단지..... 살아가는 게 네 목적이라면...... 그렇게 살아..... 모두 잊고..... 아무 것도 알려하지 말고..... 알게되면 넌 미쳐버릴거야, 장인하...... 넌..... 미쳐서 죽어버릴꺼야....... 그 성격에 모든 걸 안다면 넌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게 나아, 장인하...... 네게 사는 건 고문이야. 어쩌면 나보다 더 죽고 싶어하는 건 너일지도 모르지만...... 살고싶다면... 니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무 것도 보지마, 누구의 말도 듣지 말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마. 그냥 그렇게 죽은 듯이 살아가.... 그럼 넌 살 수는 있을 거야." "........ 그렇게 살고 있어,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갈꺼고. 니 일이나 잘해, 장지환....... 난 절대 죽지 않아." ".......... 그래, 너라도 살아야지..... 그래야지..... 장인하...... 불쌍한 자식......" 방금 전과는 달리 슬프게..... 바라보는 내 가슴까지 저며오도록 슬프게 말하는 그는 그렇게 돌아서 룸을 나갔고 인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불안하던 마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 둘은..... 단순한 형제 사이가 아니라는 것......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 아픈 표정에서 두 사람의 감정을 읽어버렸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을...... 몰랐다면..... 차라리 모르고 살았더라면 그렇게 서로 상처받지는 않았을텐데...... "........ 솔직히 말해 줘. 그 사람 누구야?" 그 난리를 치고는 그대로 곧장 나와 인하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난 현관 안에 들어서자 마자 다그치 듯 그에게 그 형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알잖아.... 내 뒤 케고 다녔다면...... 형하고 잤다는 거 정도 알 거 아냐? 그게 그 형이야." "우경이의 애인이 니 형이라구? 그것도 너하고 잤던? 단지 그것 뿐이라구?" "봤잖아.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거. 그 새끼 고등학교 때 거하게 당하고 입원했던 것도 내 짓이야." "내가 바본 줄 알아? 그 정도는 볼 줄 알아! 그냥 형이 아니잖아!"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질투라는 추한 감정에 테이블을 내리치며 소리지르자 그는 잠시 놀라는 듯 하더니 다시 표정을 굳히고 답을 한다. "....... 죽이고 싶은 인간이야. 됐어?" "웃기지마! 솔직히 말해보지 그래? 사랑했던 거 아냐? 아니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거 아냐? 그것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냐!" 화가 나서 나간 내 말에 인하는 잠시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내 추측이 들어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역시..... 그런 거였군. 그렇게나 적개심을 불태우던 건 증오가 아니라..... 애증이었나? 어이가 없어....... 너무 기가 막혀서 웃기지도 않는다. 그렇게 발광을 하고 시작한 사랑이 겨우 이거냐? 혼자 쇼한 거로군, 서윤진. 이제야 장인하가....... 그 제 멋대로라는 인간이 그렇게까지 내게 소극적이고 무심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나는 눈 앞에서 알짱거리는 귀여운 장난감 같았던 거지, 장인하? 혼자 있기는 싫고 외로우니 미친 듯이 따라붙는 날 선택한 거지? 그래서였어? 그래서... 처음부터 그렇게 선을 그은 거야? 니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아무 것도 알려하지 말라고...... 널 믿으라던 그 말은 모두 미리 방어막을 쳐놓은 거였군. 이럴 때 변명을 하려고 미리 말을 박은 거지? 그러면 내 잘못이 되니까....... 언제나 남의 탓으로 돌리는 건 너 아냐? 진짜 이기적이고 나쁜 건 너잖아. "........ 대단해, 장인하..... 차라리 말하지 그랬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모두 말하지...... 왜 속인 거야?" "속인 게 아냐........." "아니면 날 갖고 논 거야? 니 말에 그렇게 흔들리는 거 보니 기분 좋았어?" "그런 거 아냐. 장지환은...... 너랑 틀려........" "어떻게? 그놈은 진짜 사랑이고 나는 시간 때우기였어? 진짜 사랑한 건 그 놈 뿐이었던 거 아냐? 그래서.....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는 거지, 너는. 옆에서 전전긍긍하는 나따위 우스웠지? 얼마나 비웃었어? " "..... 비웃은 적 없고..... 그럴 이유도 없어. 널 사랑해." 타앙--- 침착하게 내 눈을 들여다 보고 말하는 그 말에 화가 치밀어 테이블에 있던 재떨이를 집어던졌다. 그 행위에 인하는 잠시 놀라는 듯 물러서서 나를 내려다본다. 당혹스럽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어린애 같은 눈으로....... "그렇게 쳐다 보지마! 그렇게 착한 척 아이인 것처럼 순진하게 바라보지 말라구. 아니잖아, 제 멋대로에 잔인한 녀석이, 그렇게 엉망으로 더러운 녀석이 아이 같은 눈으로 바라보지 마! 재수없어!" "....... 왜..... 화를 내는데? 서윤진." "왜? 왜냐구? 그래, 아무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쇼하는 거 같아? 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나도 그럴 꺼라 생각하는 거지? 하지만 난 그렇지 못해!" "...... 장지환은...... 나한테...... 구원 같은 거였어." 미친 듯이 날뒤는 내 앞에서 차분하게...... 생전 처음 듣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인하가 설명을 시작한다. "그 집에 들어가서..... 처음 입양되서 조금 힘들었어. 나 입양아라는 건 알지? 그런데......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 줬고 아무 사심 없이 나를 감싸준 건 장지환 뿐이었어.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아무리 독하고 못되게 굴어도 뻗은 손을 다시 돌리지 않은 건 상원이랑...... 그 놈 뿐이었어. 상원이랑은 조금 다르게 언제나 날 보호하려 했지. 그래서..... 사랑했어. 가족이란 거..... 이런 거구나라고 처음으로 느꼈으니까. 물론 그 자식이 갑자기 뒤통수 치는 덕에 상처 받고 많이 힘들었지만..... 이제는 괜찮아. 마음 정리했으니까..... 내가 처음으로 사랑을 한 건 너야. 나....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너뿐이야. 내 친구들 아무리 친해도 나 절대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내뱉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는 늘 하고 있어. 널 사랑해..... 그냥 그 말을 믿어주면 안돼?" "........ 넌 늘 믿으라고만 하는구나........." "믿는 게 힘든 걸 아니까. 나 사람을 다시 믿게 되는데 11년이 걸렸어. 그 동안 나 아무도 믿지 않았어. 친구라도, 아무리 가족 같은 녀석들이라도 절대 믿지 않았어. 하지만 넌 믿어...... 그러니까 너도 믿어주길 바래. 그러면 내가 잘할게. 나, 니 말이라면..... 다 들을꺼야."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이 박혀온다.... 그대로 가슴을 찢어버릴 듯 날카롭게.... 장인하, 넌 자기가 얼마나 잔인한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를꺼야. 그러니까 그렇게 태연하지. "........... 넌 잔인한 놈이야...... 그런 말을 하면 내가 널 버릴 수가 없잖아." 그의 말에 상처받아 머리를 싸안고 말하자 바로 내 앞에 그가...... 들어와 앉는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나와 겨우 시선을 맞추면서 애처로운 얼굴로..... 또 그렇게 상처받은 아이 같은 얼굴로 내 안에 파고 들어온다. "버리지마........ 넌 나 버리지 마. 나 너무 많이 버림받았어...... 그래도 나 아무한테도 동정해달란 말 한 적 없어. 내가 버리면 되니까, 내가 먼저 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너한테는 동정이라도 상관없어. 버리지마......" "....... 넌 잔인한 놈이야. 세계에서 제일 잔인하고 이기적이 놈이야......." "그래도 상관없어. 이기적이든 잔인하든 세계 최고의 악당이든..... 난 살꺼야. 그렇게 독하게 마음먹고 이날 이때까지 버텼어. 아마..... 네게 버림받아도 난 살꺼야. 하지만...... 그럼 또 망가질 거야. 나 이기적이라.... 나쁜 놈이니까..... 망가지기 싫으니까...... 너한테 버림받기 싫어. 나 절대 너를 놓지 않을꺼야. 그러니까....." ".............." 애처롭게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이 끊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또 한 번 포기하고 만다. 왜 이렇게 어려운 사랑을 하는 걸까? 나...... 이렇게 아픈 건 질색인데. 왜 너는 그렇게 슬픈 얼굴로 나만 바라보는 건데..... 니가 이러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잖아. "........ 나쁜 자식......" 그래도 버릴 수 없으니까....... 사랑하니까....... 다시 그 차갑고 마른 몸을 안아버렸다. 아프지 않으면 좋을 걸..... 행복하기만 하면 더 좋을 걸......... 이젠...... 아파도 좋다고 생각해버리는 내가 무서워진다. 이젠 너밖에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아....... 07. "흐음...... 너, 요즘 엉망이야........" 아침 연습에 들어가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오자 소하가 비웃 듯이 말한다. "뭐가?" "요즘 여기 저기 여자애들 다 끌어들인다며? 이미지 망치고 있잖아. 잘생기고 댄디하고 천재적인 농구 선수 강윤진이 말야....... 연습도 빠져가며 여기 저기 놀러다닌다고....... 말야." 새벽부터 쳐들어와 내 침대에 걸터앉아 담배를 빼무는 그 모습에 얼핏 인하의 인영이 겹쳐진다. 하얗고 마르고 기분 좋은 스타일의 미인.... 그 내면은 상당히 차이가 있겠지만 분위기가 닮아있어..... 그대로 멈춘 채 소하를 바라봤다. 병신....... 아직도 미련투성이냐? "갑자기 무슨 일이야? 이 시간부터......" "그냥, 어머니도 뵐 겸 간만에 쳐들어왔는데 꼴이 가관이라....." "너랑은 상관없잖아, 아니면 너도 그런 소문에 신경쓰는 거야?" "설마...... 그 딴 거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어. 쓰레기 같은 것들이 소일 꺼리로 떠들어대는 꼴 보는 것도 지겨워. 하지만 너 확실히 변하기는 했어." "뭘 말하려는 거야?" 소하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대꾸하자 싱긋 웃는다. 이 여자는.... 대체 왜 이렇게 싫은 성격인 걸까? 외모도 집안도 모두 좋지만 저 성격으로 편하게 세상 살기는 힘들텐데..... "진실! 원래 노는 놈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놀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넌 지금 마치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 같아. 대학농구부의 3년 연속 우승팀에서 1학년으로서는 처음으로 레귤러를 따고 유학 얘기에 온갖 잡지와 신문을 도배하는 멋진 남자가 말야...... 유명해지고 성공하면 할수록 더 망가지는 거 말야. 다른 사람들은 너무 높이 올라가다 보니 눈에 뵈는 게 없다지만 그게 아니잖아...... 그 사람 때문이지? 그 인형 같은 미인 말야....." "진짜..... 난 너 싫어......." 그녀의 그 날카로움에 짜증을 내며 말하자 어깨를 들썩일 뿐이다. "그렇게 아픈 표정으로 그런 말해도 별로 기분 나쁘지 않은 걸...... 뭐, 이런 얘기 내가 끼어 들어서 할 생각은 없었지만..... 니 표정 보니 해야겠다. 하면 안되는 거 알지만..... 나 니 친구니까 널 위해서 하는 얘기야. 그러니까 확실히 해둬." 갑자기 정색을 하는 그녀의 반응에 대강 옷을 걸친 채 그녀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앉았다. 그녀가 절대 헛튼 소리를 할 사람은 아니란 걸 알기에...... 자신이 확신할 수 없는 이야기는 애초에 입에 담지도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녀으 이야기에는 믿음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 그 사람.... 장인하 맞지? 하정그룹...... 장회장 막내 동생." "....... 맞아." "11살 때 입양되었고..... 사실...... 우리 집 제대로 된 집은 아니잖아. 그래서 알게된 건데..... 우리 삼촌이 그 사람 알더라. 이름 얘기하니 대번에 기억하더군. 생긴 건 너무 예뻐서 인간 같지도 않은 녀석이 속은 제 멋대로에 자존심 강하고 독한 인간이라구." "....... 어떻게....... 안다는 거지?" "뭐, 사실 쪽 팔리는 얘기지만.... 우리 삼촌 그런 이상한 클럽 갖고 있잖아. 돈 많은 변태들 상대로 하는 섹스 클럽. 집안으로서는 쪽 팔리는 얘기지만 그거 사실은 우리 아버지가 하는 거거든. 한 10년 정도 전인가...... 그 때 거기서 처음으로 애들 쪽으로 손을 댔는데..... 초반 멤버로 꿰차고 들어와 그 클럽에서 No.1 먹은 녀석이 있었다는데, 그게 그 장인하야. 본명은.... 삼촌도 몰라. 거래하던 사채업자가 끌고 왔던 모양인데 얼굴 보고 그대로 사들였었대. 뭐, 얘길 들어보니 기구한 팔자기는 하더라. 집안이 망해서 사채업자 손으로 넘어온 거 같은데...... 사실은 그 안에 들어오기 전에도 처녀는 아니었대. 대부분이 한 다리 걸쳐 팔려오는 애들이라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 정신도 거의 엉망이 된 데다 몸도 걸레였다고..... 삼촌이 보고 기가 막힐 정도였대. 거기서 구를대로 구른 창녀들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거의 미치기 일보직전이었나 봐. 게다가 그 안에서도 유난히 밝히는 인간들이 지명을 하는 통에 살아있는 게 기적이라고 하더라. 그 클럽에 있던 애들 대부분이 몇 개월을 못넘긴대..... 미치거나.... 몸이 못버텨 병신이 되는 게 대부분인데.... 기차게 살아가서 진짜 독한 놈이라고 삼촌도 하더라. 그러다 11살 때인가 그 집으로 입양돼갔는데 그것도 순수한 호의에 의해서는 아니었나 봐. 그 집 큰 아들이..... 약간 그런 쪽이라 입막음 겸으로 착한 일 좀 해보려 한 거겠지. 그러다 큰 형 결혼하고 나서는 곧 그 셋째 형인가랑 관계 갖고...... 그러나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 집을 나온 모양이야. 나도 기가 막히더라......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도 만만치 않은 성격이라는 거야. 얘길 들어보니 필요하면 자기 몸이 아니라 영혼까지 팔 인간이라는데..... 나야 그 사람을 모르니 뭐라고 말할 수는 없고, 하여간 들은 바로는 그렇게 착하게 사는 사람 같지는 않아. 그래서 니가 걱정돼. 그 사람 정상적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 같아서..... 그래서 너 다치는 거 아닌가 해서...... 뭐, 너도 썩 좋은 인간은 아니니까....... 마찬가지겠지만." 천천히 나온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자 정신이 아득해졌다. 돌고 돌아온 소문들의 실체는 그런 거였었나. 그래서 그 사람이 그렇게 자기 이야기를 하길 싫어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사람에 대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던 거야?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런데도 그는 그의 셋째 형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래서 그렇게 독하게 구는거야? 그렇다면 그의 마음 안에 가장 크게 남아있는 건 그에게 상처를 주고만 그 잔인한 사람들이라는 거야? 결국 사랑하기만 해서는, 달콤하고 다정하기만 해서는 그의 뇌리 조그만 구석도 차지할 수 없다는 건가? "윤진아........." 멍하니 앉아있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소하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자식..... 미친 거야........ 너무 아파서 미쳐버린 거야.........." "그렇게 극단적으로 갈 필요는 없어. 하여간 널 위해서 충고하는 건데..... 사람은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야 하는 거야. 그 사람... 너랑은 너무 달라. 얼마 전에 재우 만나서 얘기했는데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재우, 그렇게 나약한 애 아냐, 너도 알겠지만..... 그 녀석이 고 1 때 그렇게 힘들어하던 시기 기억나? 그게 그 사람 때문이었어...... 너도 힘들어질거야." "..............." "윤진아........." "이젠.... 모르겠어.... 조금 생각해봐야 겠어.... 조금만......" 착찹한 기분으로 학교로 향했고 버릇처럼 그와 만나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뜻밖의 사람과 마주쳤다. 그의 사촌..... 강상원..... "...... 안녕하세요?" 먼저 알아보고 인사하자 살짝 고개를 숙여 답한다. "인하랑 만나기로 했는데..... 너도지?" "아, 네......" "앉아." 앞의 의자를 권하며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 그 사람 덕분에 긴장한 채 자리에 앉았다. 학교 안에서 몇 번 마주쳐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둘만 마주친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돌았다. 그 사이에도..... 이 사람은 인하에 대해서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이 사람이라면 알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니, 거의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 저기........." "응?" 뭔가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들기자 보고있던 책을 덮고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뭔가....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차가운 눈이었다. 인하와 함께 있던 그는 말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심한 부분까지 배려해주는 다정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의 그는 딱딱하게 굳어있는 목석같은 느낌이다. 이 사람은 원래가 자신의 감정을 보이지 않는 걸까.....? 나만이 열외인 걸까, 아니면 장인하만이 열외인 걸까? 물론 후자 쪽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 인하선배......" "뭔가 묻고 싶은 거라면 그만두는 게 좋아. 장인하에 관해서는 난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을 꺼고 너도 알 필요 없으니까." "그건..... 무슨 뜻이죠?" "너는 그걸 감당해낼 수 없으니까야. 10년을 넘게 사귀고 모두 지켜봐온 나도 가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있는데 이제 겨우 몇 개월 알고 지낸 니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넘치고도 쌓였어. 둘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너무 깊이 알려고 하지 마." 딱 자르는 그의 말에는 확실히 인하가 내게 그어놓은 경계선까지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 사람은 인하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곳의 경계선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걸까? 10년이란 세월이 쌓은 유대감이라는 걸까..... 아니면.... 또 다른 감정이 있는 것일까? "인하.... 사랑하지?" 사촌이라는 그가 무겁게 묻는다. "....... 네....." "그럼.... 아무 것도 묻지 말고 상냥하게 대해 줘. 그 놈 아직 10살이야. 저 녀석 성격하고 행동에 사람들이 갭을 느끼지 못하는 건 10살 때도 20살 같던 놈이라서 그런 것 뿐이지..... 그 녀석 어린 시절부터 조금도 자라지 못했어. 아직.... 어려서..... 직설적인 표현밖에 이해 못해. 돌려 말하면 짜증을 내지. 아직 아이니까.... 그리고 고양이 같은 녀석이니까 다정하게 대해 줘. 사랑해주고 상처 입히지 마." 감정이 없는 듯 하지만 어딘지 모를 힘을 가진 그의 언어에 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평균 정도의 키에 딱딱한 인상을 가진 엘리트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말 안에는 냉정하지만 근심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려서였다. 이 사람..... 그 녀석 사랑하는 구나..... 그냥 알아버렸다. "....... 연적에게 그렇게 친절할 정도로 여유가 있나요?" 가장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의 존재에 조금 질투가 나 비꼬아 말하자 그가 희미하게 웃는다.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 희미하게.... "연적 따위가 아냐. 난 그놈과 절대 연애는 안해." "어째서요?" "그 놈을 아니까..... 애인이라면 언제 끝날지 모르거든. 만약 연인으로서.... 곁에 있었으면 미쳐버렸을테니..... 게다가 녀석과 약속했거든....." "약속이요?" "응, 절대 녀석과는 섹스하지 않겠다고." 나를 보며 보란 듯이 웃는 그의 얼굴에서 어떤 안도감과 함께 불길함이 흘러들었다. 아무리 곁에 있고 친한 관계라 해도 이 사람은 인하와 절대 연애를 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라면 평생을 곁에 있을 수 있겠지. 하룻 밤, 며칠 간 지내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 할 동반자로 장인하는 연인보다는 친구들을 택할 것이다. 틀림없이 언젠가 만났던 또 다른 친구처럼....... 그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온 몸이 오싹해졌다. 이 사람은.... 그래서 친구이길 택한 것이다. 사랑하면서 멍청하게 바라보는 건 바보라고 비웃던 나에게 그는 보여주는 것이다. 때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이라고.... 장인하에게 사랑이라는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럼.... 난 이만 가지. 인하에게 약속 잊지 말라고 전해 줘." "..... 그러죠....." 여유 있는 그에게 쓴웃음으로 답하자 그는 가방을 챙겨들고 매점을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함정에 걸려든 건 나인가? "어이, 어...... 상원이는? 만나기로 했는데......" 테이블에 가방을 내려놓고 마주 앉은 그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 모습에 왠지 화가 나...... 유치한 말을 내뱉어 버렸다. "인하형..... 아니, 장인하." "왜?" 위에 입은 짙은 회색의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놓은 그가 내 눈을 바라본다. 정확히 사람의 눈과 마주치는 그 차가운 시선에는 가끔 심술을 부리고 싶게 하는 어떤 힘이 있었다. 사람을 도발하는..... "만약에..... 나와 상원이 형이 절벽에서 떨어지는데 넌 단 한 사람 밖에 구할 수 없어. 그렇다면 넌 누굴 구할꺼야?" "너. 상원이는 절대로 안죽어. 내 곁에서 지금까지 버텼는데 절벽에서 떨어지는 정도로 죽을 리가 없잖아." 순식간에 딱 잘라 말하는 그의 반응에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한참의 생각 후에 그렇게 말했다면 어쩌면 굉장히 기뻤을 지도 모르지만 너무나 순식간에 결론이 나버린데다, 그 뒤에 붙은 이유가 이상해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는 넌 어떻게 할 껀대? 나와 니 어머니가 그런 상황이라면?"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그의 말에 난 어디선가 들었던 그럴 듯 한 답을 생각해 냈다. "어머니를 구하고.... 나도 너를 따라 죽을 꺼야." "쿡, 여자가 들었으면 감동했을 모범 답안인데..... 다시 묻자. 진짜 그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해. 인륜이니 예의, 다른 사람이나 날 의식하지 말고 솔직히 답해. 니네 어머니와 내가 벼랑에 매달려 있어. 니가 구하지 않으면 죽는 거야, 그런데 넌 단 한 사람 밖에 구할 수 없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상태에서 넌 본능적으로 누구에게 달려갈까? 아니, 누가 먼저 눈에 들어올 것 같아?" 진지하게 턱을 괴고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그 장면이 생생히 눈 앞에 펼쳐졌다. 마치 진짜 있었던 일처럼 머리 안에 그려진 영상에서..... 먼저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장인하였다. "............" "의식하지 말고... 그 상황에서라면.... 넌 누구에게 본능적으로 시선을 보낼까?"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난 네게 미쳤으니까..... 인륜따위 모두 버리다면 내 눈에는 어떻게 해도 너밖에 들어오지 않아. "그럼 나도 물을게. 너라면 누가 먼저 눈에 들어올 거 같아?" 대답을 피하고 그에게 묻자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조금 전처럼 답해온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건 당연히 상원이지. 정이란 게 무서운 거거든. 하지만 구하기는 널 구할꺼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널 구할 꺼기 때문에 녀석이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 내 눈을 바라보고 정확히 말한 그의 얼굴에 내 안에 나도 모를 이상한 느낌이 솟아올랐다. 먼저 의식하는 건 그이지만 구하는 건 나다... 장인하, 뭔가를 의식하고 있는 건 아무래도 너 아냐? 내가... 현재 사귀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날 구한다는 거잖아. 그런 거라면 난 필요 없어. 차라리... 니가 애타게 바라보는 사람이고 싶은 마음 알겠냐? 이 나쁜 자식아. "이번엔 니가 대답할 차례야. 말해 봐, 나야, 어머니야?" 다시 묻는 그의 말에 심술이 났다. 어째서 자기는 그렇게 잔인한 말을 하고도 태연히 내게 물을까? 나쁜 자식... 잔인한 자식.... "......... 어머니야. 니 말대로.... 정이란 건 무서운 거거든." 내 말에 유쾌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웃는 그의 얼굴에 난 또 한 번 상처받아 버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한, 당연히 그럴 꺼라 예상했다는 그의 미소에 가슴이 난도질당한 거다. 니 그 미소가 얼마나 사람을 설래게 하고, 또 아프게 하는지 넌 당연히 모르겠지. 그래서 늘 그렇게 웃기만 하는 거지.... "밥이나 먹자. 너 오후에 연습 들어가야 하잖아. 시즌 끝났어도 연습 많지." "....... 응......" 빙긋 웃으며 식단을 보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려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자꾸만 강상원과 그의 친구의 말이 신경쓰여서...... 그가 먼저 바라보게 될 그 친구들의 존재가 부럽고 싫어져서..... 의식하게 된다. 너무.... 피곤한 일들이 많아, 어떻게 해야할까... 장인하? 날씨가 풀려가고 해가 길어지면서 5월이 되었다. 실제로 그와 사귄 것은 이제 겨우 6개월 정도인데...... 우리는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우경이가 한 말처럼 나의 운명이 인하라면... 이래서는 안되는 건데. 어재서 겨우 6개월만에 이런 지경까지 와버린 걸까.... 스스로도 너무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지지만..... 무심한 그에 대한 반항과 조그만 복수의 마음으로 난 마음껏 그를 할퀴어대고 있었다. 연락 없이 약속을 깨는 건 다반사였고 가끔 체육관에 찾아오는 그를 내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언제까지나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넘겨주었다. 소리 한 번 지르지 않고 한숨을 내쉬고...... 내게 미안하다... 는 말을 종용하지도 않는다. 그 반응에 더욱 화가 나 점점 어긋나고 있던 우리였다. 그 날도..... 난 그와의 약속장소에 나가지 않았고 물론 연락도 하지 않았다. 적당히 기다리다 돌아갔을 거라고 생각하고 팬이라고 접근했던 여자와 호텔에서 시간을 때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집 앞에는 익숙한 차가 서있었고..... 내가 나타나자 기다렸다는 듯 차에서 내린 것은 장인하였다. "연습.... 길어진 거야?" 화가 난 듯 고개를 들고 도발적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에 난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아니, 어떤 여자가 따라와서.... 같이 잤어." 당연한 듯 말한 내 말에 인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다. 화가 난 기색도 없이 오히려 방금 전보다 더 약해진 모습으로 다시 고개를 든다. "...... 너 왜 이러는 건데?" "그냥..... 이해해 줄꺼잖아, 어차피. 너도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하고나 자고 다니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 없잖아. 정확히 이유를 말하려면 말해주지...... 필요해서였어." 비웃으며 말한다. 그가 상처받길 바래서.... 제발 내가 아픈만큼 그도 아프길 바래서 할퀴어낸다, 그가 아파할 곳을 조심스레 서서히........ "........... 그렇구나. 알았어...... 하지만.... 나와의 약속은 어기지 말아. 아니면 미리 연락을 하던가." 한숨을 내쉬고 그는 너무나도 쉽게 수긍해 버린다. 어째서...... 화내지 않아? 너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와 뒹굴다 뻔뻔스레 나타난 내게 어째서 따지지도 화도 내지 않냐구? 난 너한테 그 정도냐? 겨우..... 약속을 어기지 말라는 말 한마디로 끝날 그런 존재야? 내가 다른 여자를 안는다해도 너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다는 거야? 나따윈.... 네 친구들에 비한다면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거야? "오늘은 이만 갈게. 나중에 보자." 한숨을 내쉬고 말한 그가 다시 차 안에 올라타고 시동을 건다. 뭔가..... 변명을 하게 해달라고, 제발 내게 뭔가를 추궁해 달라고 소리치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절대..... 돌아보지 않는다. 나란 건 아무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런 거야? 장인하? "빌어먹을......." 그대로 돌아선 그가 얄미워져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차피 전과 같이 다가올 그란 걸 알기에.... 이제까지 몇 번이나 헤어질 뻔 했던 그 기억에 안심하고 마음 껏 심술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내게 돌아온다는 묘한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그에게 먼저 상처받은 것은 나니까 그에게 상처주는 건 당연하다는 이상한 논리도 그런 내 행동에 한 몫 해주었다. 그렇게 한 달 여가 지나 6월이 되었다. 그와 처음 만났던 그 때....를 떠오르게 하는 시기였다. 처음 만났던 날을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렀다. 비오는 날에는 그토록 재수가 없다는 말.... 그래서 절대 비오는 것만은 사양이라는 그의 말에 비 안오는 나라로 도망가자는 말을 하자 말도 안된다며 웃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이처럼 웃고 품에 안겨오는....... 그러자 다시 그가 보고싶어졌다. 지금쯤이면.... 찾아가도 좋겠지. 그래도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받아들여줄 것이다. 전처럼..... 틀림없이..... 그런 생각이 들자 그를 만나러 가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을 뒤졌다. "윤진아!! 나와봐라, 학교 선배라는데....." 문을 두들기고 말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찾아올 선배가 있었나... 하는 의아함을 접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현관으로 들어서지 않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인하와 마주쳤다. 한 달 사이 많이 갸원 모습에 6월이라 꽤 더운 날씨인데도 긴팔 남방에 얇은 자멧까지 껴입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못 본 사이 많이 자란 머리카락도 그 창백한 인상에 한 몫해주었다. "...... 어서 들어와요." 어느 새 내려온 어머니가 반갑게 맞이하자 인하는 살짝 고개를 흔든다. "아뇨, 나가서 얘기할게요. 할 얘기가 있어, 잠깐 시간 좀 내줄래?" 딱딱한 표정으로 예의 바르게 말하는 그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졌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나? "무슨 일인데?" 그의 소심한 반응에 그를 만나러 가려던 생각을 접고 삐딱하게 말하자 당혹스럽다는 눈빛이 스쳐간다. 그 눈빛에 왠지 더 심술이 부리고 싶어져 어머니께 잠시 들어가 달라는 말을 하자 인하는 더욱 불안 한 듯 손을 가만히 두질 못한다. "..... 나가서 얘기하자. 여기서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 "여기서 해. 바쁜 일이 있어." 현관문 앞에 서서 그에게 다음 말을 조르자 안방을 의식한 듯 인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소하라는 애 만났어. 너.... 다른 사람 사귄다고.... 헤어져달라고 하던데...... 나 니 입으로 들어야 겠어." 순간..... 얼마 전 소하와의 약혼 어쩌고 하던 얘기가 떠올랐다. 망할.... 진짜 시킬 생각인 걸까? 뭐, 소하라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결혼은 절대 사양이고..... 이 사람을 놓칠 생각도 없지만 그의 불안한 표정에 안에서 묘한 충동이 일었다. 사실이라면.... 어떻게 할까, 이 사람은? 결혼따위 하지 말라고 매달릴까, 아니면 상관 없다는 반응일까? "사실이야....." 딱 잘라 말하며 빙긋 웃자..... 그의 표정이 변해간다. 그 표정에.... 그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으스러지고 있는 듯 한 얼굴이었다. "그래....... 그렇군......." 고개를 숙이고 표정을 보이지 않으려는 반응에 더욱 상처 입히기 위해 더욱 매몰차게 말을 던진다. 하지만 그래도 넌 상처 받지 않아, 그렇지? "...... 그래도 상관 없잖아. 넌 금새 다른 사람 찾을테니까..... 너한테 나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더욱 더 삐딱하게 그를 상처 입히려는 목적으로 나간 내 말에 인하는 고개를 들어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너.... 정확히 이러는 이유가 뭔데? 말을 해봐........ 내가 니가 하는 말 안들어 준 적 있어? 니가 원하는 것 무시한 적 있어? 이런 식으로 빙빙 돌리지 말고 정확히 말을 해. 헤어지고 싶어? 아니면....... 단순히 날 괴롭히면서 즐기는 거야?" 아프게 찔러오는 말이지만...... 별로 현실감은 들지 않았다. 이 녀석을 만난 후로 너무 큰 상처들을 많이 받아서 어떤 말을 들어도 이젠 별 느낌이 없다. 그저, 또 그렇구나...... 그냥 그런 거구나....... 이렇게 아픈 거구나...... 하며 체념하는 수밖에. 넌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도 내 심장을 순식간에 갈라놓을 수 있지만 난 아무리 독한 맘을 먹고 잔인한 말을 쏴대도 넌 조금의 긁힘도 받지 않으니까. 결국 어떻게 해도 나만 손해라는 거지........ 그래서 널 상처 입히려는 거야. 나만 아프면 너무 억울하잖아. 이런 식의 화풀이라도 참아 줘. "이도 저도 아냐. 그냥...... 니가 내키는 대로 하 듯,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 뿐이야. 니 말대로 절대 네게 강요하지 않아. 그러니 너도 내게 강요할 권리 없는 거지?" "............" 입을 꾹 다물고 마주친 시선을 먼저 돌린 인하는 한참을 뭔가를 생각하는 듯 사방으로 시선을 돌린다. 내게 변명을 하려는 건지, 혹은 화를 내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인하에게 나를 추궁할 마음은 없었다는 것이다. 어째서.... 권리 어쩌고 운운하는 건지........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관둬......... 장인하. 넌 죽을 때까지 이해 못할 일이지........ 그만 꺼져라. 아직 할 일이 남아있어." "......... 헤어지고 싶다는 거야?"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차마 답을 할 수는 없었다. 헤어지고 싶냐구? 그건 내가 너에게 묻고 싶은 말이야. 내가 왜 이러는 건지 전혀 이해하질 못하고 있잖아, 너는. 나는 구속을 원해. 니가 나를 원하고 내게 욕심을 내는 걸 보고 싶다구. 어째서 그렇게 무감각한 건데? "원한다면 말해. 헤어져 줄게." 차가운 눈으로 아무 표정 없이 던지는 그의 말에........ 순간 이성을 잃었다. 내가 이렇게 너에 대해 머리가 깨지도록 고민하고 있다는 것 따윈 전혀 상관없는 거지? 너는....... 너에겐 네가 가장 소중하니까....... 나 같은 건 어떻게 돼도 좋다는 거지? "그것도 좋겠지........ 아무래도 나 역시 여자가 더 좋아. 아무리 예뻐도 남자랑 결혼할 수는 없잖아. 뭐, 넌 걸레였으니까.... 상대가 나만은 아니었을테니 다른 놈 찾아봐. 그 얼굴이면 꽤 괜찮은 놈 사귈 수 있을 꺼야. 남창 새끼!"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내 의식을 배신하고 먼저 튀어나갔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너무 화가 나서....... 헤어져도 별로 아쉬울 것 없다는 그의 표정이 너무 미워서...... 그냥 되는 대로 지껄여 버렸다. "형하고도 붙어먹는 놈이니 나 같은 건 없어도 별 상관없지? 멋대로 해. 아무나하고 잘 수 있으니 상대가 아버지나 형이라도 상관없지? 잘 살아봐, 장인하...... 그렇게 평생을 살라구. 아무한테나 구걸하면서....... 버림받고, 상처만 입히고 악랄한 자식...... 본성은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렇게 어린 나이부터 굴렀으니 한 남자로는 만족도 못하지? 헤어지고 싶은 건 오히려 너 아냐? 가서 잘난 니 형이나 붙들어 봐. 그러다 또 매춘이나 하라구. 그게 니 취미잖아." 빈정거리며 그가 한껏 상처받도록 최대한 냉정하게 말을 해나갔다. 비난하 듯이...... 너 같은 건 나에게 필요없다는 듯이...... 내가 한 말에 스스로가 상처받고 있다는 것조차 숨긴 채 그가 드러내지 않으려하던 과거의 일까지 끄집어내어 상처를 준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지, 너는? "......... 어디서 들은 거야?" 한참을 나간 내 말에 인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어디서나...... 어딜 가나 워낙 유명한 분이니 소식이 널려서 말야. 니네 집 사채로 망한거라며? 그래서 팔려가고...... 얼마나 지겨웠으면 부모조차 버릴까? 넌 사람 질리게 하는 자식이야." 잔뜩 비웃음을 담고 나간 내 말에 순간 인하의 눈빛이 점점 굳어간다. 그저 건조하게 나를 바라보던 눈이....... 곧 싸늘하게....... 내 심장까지 얼려버릴 정도로 싸늘하게 식어간다. 그 시선에 내가 잘못 본 건가 하는 착각에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이미 다른 표정이 그 눈동자에 얽혀있었다. 그의 눈은 상처받고 아파하는 게 아니라.......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어떤 감정도 생각도..... 시선도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건조하고 메마른 눈동자만이 있을 뿐...... "그래..... 그렇군. 그런 거지....... 니가 좋은 걸 말해주는구나, 서윤진." 순식간에 바뀐 눈빛과 바로 조금 전 나와 대화하던 것과는 완전 다른, 마치 타인을 대하는 듯 한 말투에 문 앞에 기대어 있던 몸이 반사적으로 밀려 뒷걸음질치고 말았다. 그의 표정에 공기마저 얼어붙어 버린 느낌이었다. "그래..... 질리지. 그래서 그 미친 년이 나 버린 거구나? 그래서..... 너도 날 버린다구? 좋은 변명이구나....... 아주 좋아. 생각보다는 머리가 좋은 모양이지? 서윤진." 한 순간에 살기를 띤 눈동자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내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악다물던 무표정한 얼굴은 사라지고 오만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 한 그가 허리를 꼿꼿히 펴고 내 앞에서 서서 삐딱한 시선으로 나를 올려다 봐온다. 아니..... 실제로는 내려다보고 있다. "그럼 너도 나 버린 미친년하고 똑같은 놈이야, 개새끼야...... 깡패들에게 잡혀있을 때..... 그 년이 나 찾으러 오지 않을 줄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잡혔다는 얘기 들었을 때, 어쩌면 날 구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우리 엄마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년 내 앞에서 울면서 소리쳤어. 난 자기 자식이 아니라구..... 너도 마찬가지지? 사랑이라고 하면서... 결국 자기가 견디기 힘들어지면 다시 '사랑이 아니다.'라고 하지? 달콤한 희망을 주고 그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도 너야, 서윤진. 개새끼..... 그 미친년도 장지환도.... 너도 다 똑같은 것들이야........." "..............." "내가 네게 해주지 않은 얘기 하날 해줄까? 나 키운 아버지 말야.... 그러니까 이럴 때는 친아버지라고 하는 거겠지? 그 새끼가 나 일곱 살 때 건들였어. 그 놈이 처음이었지. 그 때는 우리 아빠라고 믿고 있었는데 말야...... 그 새끼가 어떻게 죽었는 줄 알아?" 갑자기 나온 그의 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뭐라구? 지금....... 내가 들은 말이 맞는 거야? 일곱살 때라구? 그것도 친아버지가......? "그 새끼, 내가 죽였어. 둘 째 놈과 짜고 같이 자준다는 조건으로 그 새끼 겨울의 한강에 발로 차서 빠트려 죽였지. 그 새끼 죽고 나서는 너무 기분이 좋아 수면제를 끊을 수 있었으니까.... 말야." "....... 무슨......... 소리야?"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경악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웃는다. 지금까지 내 앞에서 빙긋거리며....... 살짝 도발하는 듯한 미소와는 달리 차가운 눈으로 입술 끝을 올린 채 비웃는다. "그런 소리지. 서윤진. 그래서 달려들지 말라고 했잖아? 병신 새끼야..... 다른 녀석들이라면 벌써 죽여버렸을 걸 참아준 건데...... 너무 어이없는 곳에서 뒷통수를 내리치네? 알아? 지금 내 기분? 뒷통수에 도끼가 찍힌 기분이야....... 내가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차라리 헤어질 꺼면 조용히 헤어지자고 하는 편이 나았을 걸......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군. 이래서 나이 어리고 골빈 운동 선수들은 질색이라니까. 뇌를 어디다 달고 낳는지 알 수가 없거든. 어리석고 멍청하고 둔한데다 학습 능력도 없거든. 아는 건 섹스뿐이고 확실히 사용할 줄 아는 것도 페니스뿐이지. 늬들은 뇌가 근육덩어리로 뭉친 저능아들이야. 이래서 어린것들과는 상종을 하면 안되는데....... 장인하가 실수를 했어. 오래도록 간직하게, 이번 오류는." 무서울 정도로 잔인한 눈빛이 내 심장을 할퀴고....... 머리 안은 혼란으로 엉망이었다. 이건 장인하가 아니다...... 장인하는 내가 화내면 입술을 꾹 깨물고 나를 흘겨 본 후, 다시 손을 뻗어와 나를 달래주는 녀석이야. 절대로 먼저 화내고 저렇게 신랄한 말따윈 내뱉지 않아. 그냥....... 화가 나면 말을 험하게 하는 것 뿐이지, 절대 나를 상처 입히는 직접적인 말은 내뱉지 않아...... 저건 장인하가 아냐. "장인하가.... 너무 행복해서 잠깐 잊고 있었어. 세상에는 절대 믿지 말아야할 말이 있는데.... 그게 '사랑해'라는 걸 말야. 나...... 미리 네게 상처줄 게 너무 많아서 네게 무엇도 말하지 않았어. 니가 무슨 짓을 하든 누구와 어떤 일을 하든 이미 내게는 너를 탓할 권리같은 게 없으니까..... 그래서 니가 하는 말이라면 모두 들어주었고 믿었어. 하지만 결과는 이렇게 더러운 거야, 서윤진. 알아? 장인하는 니 말대로 절대 상처받지 않아, 그 딴 거 안키워..... 감정이라는 거 아픔이라는 거 절대 곁에 두지 않아. 하지만...... 지금 니 말로 상처받았어. 넌 내게 절대 해서는 안될 말을 한 거야, 서윤진. 내가 처음에 얘기했지, 니가 하는 모든 일 용서해도 그 일에 대해 떠들어대는 것만은 용서 못한다구." 차갑게 굳은 눈동자가 내 바로 눈 앞에 와 닿았다. 뻥 뚫린 듯 부서지던 눈동자가 지금은 차갑게 가라앉아 무서울 정도로 잔혹한 빛을 내고 있었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한 냉정한 눈동자....... 그건..... 내가 알고 있던 장인하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장인하는 바비 인형 같은 얼굴로 칠칠맞고 제 멋대로인데다 단순하고 어린..... 고양이 같은 녀석이었다. 하지만 그 눈은 상처받고 아프고 깨어져 이미 넝마 조각이 되어 흔들거리는 소년의 것이었다. 오로지 오기와 증오만이 남아있는.... "그래서 처음부터 그랬잖아, 병신이... 치기에 덤벼들지 말라구. 어린 객기에 미친 짓 한 번 해보겠다는 거라면 꺼지라구. 넌 나를 받아들일 준비도 그 일로 인한 일들을 이겨낼 배짱도 없는 새끼야. 그러면서 어디서 사랑 어쩌고 나불대? 2년 전만 같았어도 널 죽여버리려 했겠지만.... 네게는 그럴 가치도 없어. 니가 원하는 대로 상처받았으니 끝내줄게, 서윤진." 딱 잘라 말하고 피식 웃은 그가 싸늘한 눈초리를 남기고 돌아선다. 두 번 다시 이 쪽을 바라보고 싶지도 않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바로 내 앞에서 돌아선다. 이건 안돼...... 아직 난 준비가 돼지 않았어. 너와 헤어지려는 게 아니었다구. "........ 아직은..... 안돼. 난 널 제대로 상처 입히지 못했어. 장인하......" 더듬더듬 나간 내 말에 인하는 그대로 멈춰 돌아보지도 않고 말한다. "...... 더 이상의 상처는 없어. 너는..... 날 제대로 죽인 거야, 서윤진. 축하한다, 장인하에게 세 번 째의 절망을 보여준 사람이 된 걸. 이제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 실수로라도...... 옷깃이라도 스치는 일 없길 빈다....... 개자식........" 흔들림도 아픔도 없이 정확히 쏘아 말한 그가 눈앞에서 사라진다. 내 상처 따위 전혀 상관없다는 듯, 낯선 그가 사라져간다. 이런 거였냐....... 그래서...... 내가 운이 좋았다는 거구나. 너 원래 이렇게 차갑고 냉정한 놈인데...... 내게 했던 그 무심함은 비교도 안될 정도로 원래 잔인한 놈인데....... 난 내가 알고 있는 너만을 보고 그게 너의 사랑이라는 걸 몰랐었던 거구나. 너는 온 힘을 다해 사랑한 건데....... 난 그게 무심하다 한 거였던 거야? 너....... 대체 얼마나 상처받았던 거야? 너무 아파서 완전 미쳐버린 놈이었던 거야? 장인하........ 내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해 봐. 제발..... 그렇게 돌아서서 떠나가지 마. 두 번 다시 날 보지 않겠다는 듯 사라지지 말라구....... "가지.... 마......." 인하는 작게 울리는 나의 목소리따윈 전혀 듣지도 못한 듯 6월의 햇살 사이로 사라져간다.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주변의 공기를 굳힌 채 걸어간다. 그 뒷 모습에 난 더 이상의 말도 어떤 변명도, 애원도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어야만 했다. 왜...... 이렇게 된 건지..... 난 널 사랑한 것 뿐인데..... 왜...... 그가 그렇게 돌아간 뒤 멍하니 현과 문 앞에 서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돌아선 그의 마음을 어떻게 되돌려야 할까?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대체.... 뭘 한 거야? 숨도 쉴 수가 없고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돌아가던 그의 뒷모습만이 망막에 남아 아련하게....... 아프게...... 심장을 조이고 있다. "윤진아...... 무슨 일이니?" "............" "윤진아...... 얘!" "....... 그런 게.... 아냐......." "윤진아..... 얘, 윤진아!!" 귓가에 울리는 어머니의 근심스런 목소리와 내 어깨를 두들기는 손의 느낌도 현실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눈 앞의 있는 건 돌아서가는 그의 뒷모습..... 그것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런 게 아냐...... 널 사랑해서....... 사랑해서...... 내가 너무 아파서........" "윤......... 어머... 얘가...... 얘, 윤진아!!! 세상에! 무슨 일이니?" "그런 게 아냐....... 그런 게......." 입밖으로 쏟아지는 말하지 못했던 진실들과 흔들리는 음성....... 그리고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과 그의 잔상만이 남아있었다. 집안에 쳐박힌 채 멍하니 이틀을 보냈다. 연습도 수업도 나가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머릿 속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숨 쉬는 것마저 귀찮아져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학교도 난리였지만 지금 내 머릿 속에 있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장인하는..... 두 번 다시 나를 돌아보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난 집안에 박혀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두 번 다시 나를 잡고 살짝 웃으면서 가볍게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을텐데..... 왜 나는 이렇게 멍하니 헤어짐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왜 그를 믿지 않았던 거지?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가 나를 받아들일 때까지 그가 얼마나 차갑고 신랄했는지 왜 잊고 있었던 거지? 장인하가 너무 따뜻하고 다정해서 잊어버렸던 거야..... 그게 사랑이란 것도 모르고 이미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내 손안에 있었던 것도 모르고...... 그가 친구들에게 준 작은 다정함이 부러워서 그를 상처 입힌 건가? 문득 무서운 생각이 스쳤다. 지금이 아니면.... 장인하를 만날 수 없다. 지금이 아니면..... 그 녀석은 진짜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그의 형처럼 - 그가 사랑했다던.... - 그는 나를 보고 차가운 표정만을 남기고 뒤돌아서 다시는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스치자 문도 잠그지 않은 채 차 키만을 들고 나가 인하의 집으로 향해갔다. 일생에 단 한 번 있는 사랑일지도 모른다. 잃고 나면 두 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소중한 것을 한 순간의 오기로 버리려 한 거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일생의 사랑을 단 한 순간에 스스로 박살내 버린 걸지도 모른다. 아찔한 생각에 인하의 아파트에 닿아 미친 사람처럼 뛰어올라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어 미친 듯이 달려 올라갔다. 이렇게는..... 안돼..... 난 이대로 널 보낼 수 없어. 어떻게 시작한 사랑인데...... 바보가 되어도 좋아..... 그렇게 매달려도 좋다고 맹세하고 시작한 사랑이야. 난 널 보낼 수 없어..... 이렇게는 안돼..... 미친 사람처럼 달려가 집 앞에 멈춰섰다. 그리고..... 그가 건내주었던 키를 조심스럽게 꺼내들고.... 차마 벨을 누를 용기는 나지 않아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실수를 하고 겨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이대로 내쫓긴다면....... 아니, 내게 칼을 휘두른다 해도 절대 물러설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의 단 한 번의 사랑이다...... 놓쳐버릴 정도라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나을 정도로 간절했던 감정이다. 절대 너를 놓치지 않아...... 끼익--- 호흡을 다지고 겨우 겨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근 한 달만에 오는 그의 집에서 난 죽어버리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로 절망해버리고 말았다. 집안은....... 사람이 살았었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깨끗하게 텅 비어 있었다. 그 후로 한 달 여를 학교와 구석 구석을 찾아 헤맸다. 3학년 1학기 종강을 얼마 안남기고 갑자기 휴학을 해버린 그는 마치 증발해버린 듯 어디에서도 연고지를 찾을 수가 없었고 그의 친구들 역시 같이 휴학계를 제출하고 사라져버렸다. 전화는 끊어져버렸고 온갖 친구들과 아는 사람들을 동원해 수소문을 해도 그의 머리카락 한올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를 만난 1년 전의 6월부터 그가 떠난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환상인 것처럼, 아니 모두 내가 꿈을 꾼 듯 그의 존재도 그 주변의 작은 것 하나도 남아있질 않았다. 어떻게든 그를 다시 만나야 한다고 다짐하며 레귤러 자리까지 포기하고 미친 사람처럼 그 사람만을 찾아다녔다. 부모님이나 친구들의 걱정이나 힐난따윈 그를 잃는 고통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난 어떻게든 그를 다시 만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난 이대로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방학이 된 어느 날이었다. 하루 종일 그가 갈만한 곳을 뒤지고 학교 교학과에 알아도 보고 본가로 연락을 해도 그들은 그저 모른다... 라고만 한다. 마치 앵무새처럼, 누군가가 주입시켜놓은 듯 하나 같이 사라졌다... 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의 친구들의 연락처를 찾아 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구들까지 함께 증발해버린 것이다. 단 하나의 실마리마저 사라져 앞이 보이질 않는 암담함.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에 대한 자기 비하...... 그런 생각들이 나를 점점 미치게 하고 있었다. 막막함에.....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할 정도로...... 그 날도 그렇게 절망하고 엉망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의 길가에........ 멍하니 걷고 있는데 낯이 익은 차를 겨우 발견했다. 우리 집 앞에 서있는 익숙한 차...... 돌아온 건가..... 나를 만나러 온건가... 하는 생각에 한 걸음에 그 쪽으로 달려가자 차 안에서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검은 색의 야구모자를 쓰고 많이 야윈 듯 한 모습의..... 장인하...... 환상이 아니었어....... 지난 1년이 모두 환상이 아니고 겨우 다시 그를 만났다는 생각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돌아왔구나..... 진짜 살아있구나...... "........ 인하......." "....... 간만이다, 서윤진......." 새벽의 달빛을 받아 고혹적인 얼굴선이 환하게 웃는다. 설마..... 이건 환영일까?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미쳐버린 건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 왠만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벨이 꼴려서 살 수가 있어야지. 나 나쁜 놈이거든." 꿈을 꾸는 듯 한 느낌에 멍하니 바라보자 그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웃는다. 그리고....... 퍼억-- 순식간에 내 복부를 발로 찬 그가 다시 싱긋 웃으며 손 안에 든 야구 배트를 가볍게 흔든다. "애들 시켜서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그럴 가치도 없잖아. 나 상처받고는 못살거든...... 어떻게든 복수해줘야 돼. 그러니까.... 얌전히 당해라... 안 그럼 나 또 무슨 짓 할지 나도 모르거든." 살기를 띤 눈으로 싱긋 웃은 그가 그대로 들고있던 배트로 나를 내리친다. 등에 둔탁한 고통이 느껴지고 여전히 웃고 있는 그는 그대로 몇 번 더 나를 내리치다 손을 멈춘다. "욱........" 익숙치 않은 고통에 겨우 비명을 삼키며 그래도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웃고 있을 거란 예상과는 달리...... 그는 어둑한 달빛을 받으며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대로 꺼져버릴 듯 안타깝게......여유 있게 나를 내리치던 방금 전과는 달리 마치 그대로 죽어버릴 듯 파리한 얼굴로, 슬픔을 가득 담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 본다. ".......... 인하야........" "......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진짜...... 우리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말자, 서윤진....... 그래야..... 내가 살아...... 난 살꺼야..... 살아야 되니까......"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 눈 안에 맺혀있던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그의 눈물에 온 몸이 경직되어버렸다. 그렇게나 그가 울고 있는 걸 보고 싶어했지만 지금 그의 눈물이 나를 가두고 있다. 그의 눈에 보이는 절망과 고통으로....... 그대로 나를 숨이 막힐 것 같이 가둔다. "........ 우리 죽어서라도..... 마주치지 말자..... 나 찾지 마........ 윤진아, 니가 준 상처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테니까....... 다시 나타나면 나 진짜 너 죽일지도 모르니까.... 만나지 말자. 서윤진......." 투욱--- 뺨을 타고 내리던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는 손을 들어 아무렇게나 눈물을 닦아내리고 천천히 움직여 차 문을 열고 사라진다. 그렇게....... 마치 내가 꿈을 꾼 것처럼..... 사라진다........ 08. 한 순간의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인하의 모습에...... 다시 그의 집을 찾아갔다. 어쩌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른다. 돌아왔다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내 마음을 말하고 다시 그를 붙잡고 싶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바닥에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그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픈 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이 열려있음에 기뻐 미친 듯이 안으로 달려갔지만..... 그 안에 있던 것은 장인하가 아니라..... 그의 사촌인 강상원이었다. "...... 인하...... 는?" "........... 오늘 쯤 나타날 것 같아서..... 기다린 거야. 어제 인하가 찾아갔지?" "장인하는.......?" "......... 충고 하나 하자, 인하 앞에 두 번 다시 나타나지 말아라, 서윤진.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 것도 그만 둬. 이 집은 어차피 처분할 꺼지만......." "장인하는?!" 당당히 그의 집에 앉아 나를 기다린 강상원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소리를 내지르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찾아봐야 소용없어. 인하, 떠났어. 그리고...... 돌아오더라도 너랑 마주칠 일은 없을 꺼야. 그 녀석이 알아서 피해 다닐 테니까." "그건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냐! 장인하..... 만나게 해줘. 장인하와 얘기하겠어!" "인하는 널 만나고 싶어하지 않아. 그 독한 놈이...... 겨우 한 달만에 정신 차렸어. 또 미치게 하고 싶지 않아. 너도 만나지 않는 편이 나을거야. 그 녀석은 쉽게 잊어. 금새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녀석이니까 너도 잊어. 아무리 찾아봐야 찾을 수 없을꺼야." "떠났다구.......?" "그래, 어쩌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시간이 필요하다고 사라졌어. 그러니까 너도 찾지 마. 인하는 곧 괜찮아져. 기다리고 찾는 거 너만 손해야. 그 불쌍한 녀석 아프게 한 건 너야..... 포기해. 끝난 사랑에 연연해 하는 거 꼴불견이야." 비웃는 것도 아니고 화를 내는 것도 아니라 진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딱딱하게 말을 끝낸 그가 조용한 걸음으로 거실에서 나와 내 곁을 스쳐지나간다. 그리고...... 먼저 문을 닫고 사라지고..... 안에는 나 혼자 남겨져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사람이 살지 않는 텅빈 집은 그곳에 누군가 존재했었다는 것 자체가 거짓 인 듯 뻥 뚫려있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인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런 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적막하고 추워서..... 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멍하니 그 안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떠났다고..... 장인하? 나는 버리고..... 친구들과 함께....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구? 니가 나를 버린다구? 내가 널 그렇게 아프게 한 거냐? 지금이라도..... 너를 붙잡고 용서를 빌고 무릎이라도 꿇는다면 너 돌아와 줄까? 아니, 그 때 그렇게 차갑게 내치지 안았다면 너 내 옆에 있었을까? 나 버리지 않았을까? 말해 봐....... 장인하, 제발...... 다시 한 번만..... 내 앞에 나타나서..... 욕이라도 해봐. 소문대로..... 성질 껏 욕하고 퍼부어 보라구..... 나쁜 자식..... 잔인한 자식, 장인하. 09. "축하한다, 서윤진!!" 그와 헤어진 직후 군대를 다녀오고 제대 후 곧장 유학을 떠났다 돌아온 환영회 자리에서 소하와 우경이가 축하해주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움직인 터라 내가 돌아왔을 때는 모두가 해외로 나간 상태였기에 남아있던 사람은 소하와 우경이가 전부였다. "곧 복귀하고.... 뭐, 당연하지만...... 열심히 뛰어야지." "그래, 열심히 해라. 다른 녀석들 지금 다 해외 나가 있어서 우리 밖에 없다."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내는 우경이의 말에 웃으며 답하고 한참 술을 마시다 거리로 나왔다. 뭐, 오랜만은 아니지만 그 사이 많이 변한 거리는 당혹스럽게 한다. 군대에서의 3년과 유학기간인 2년을 합해 겨우 5년 나가있었는데도 처음 와본 곳인 것처럼 많이 변해있었다. "많이 변했지?" "응......." "경제가 뭐 같다 해도 여전히 노는 녀석들은 놀고 다니고 돈이 넘치는 인간들은 넘쳐흐르니까......." 빙긋 웃으며 말하는 우경이의 말에 나 역시 웃어주고 차를 주차해놓은 곳을 향해 걷던 중 소하가 걸음을 멈춰 선다. "어머...... 저거..... 앗....." 고개를 돌리고 여기 저기를 살피던 소하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소하를 바라보았다. "뭐? 왜 그래, 성소하!" "아, 아냐.... 아무 것도......" 방금 전과는 달리 억지 웃음을 지으며 과장되게 다른 이야기를 꺼내려는 모습에 미심쩍어 다시 그곳을 바라보자 지나가는 사람들의 행렬에 정신이 없어진다. 뭐, 이상한 거라도 본 건가.... 귀신이라도 본 듯 한 반응에 사람들 사이를 시선으로 쫓자...... 소하가 그렇게 반응한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행렬 사이에 껴서 누군가와 즐겁게 웃고 있던 어떤 한 사람...... "....... 윤진아....... 저기....." 말을 끄는 그녀를 무시하고 멍하니 그 쪽을 바라보았다. 전보다는 많이 짧아진 머리카락에 비슷한 키의 한 남자와 마주서서 뭔가 따지고 있는 듯 화가 난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다시 미칠 듯 한 고통이 스며들었다. 너무 보고싶어서..... 그렇게나 보고 싶어서.... 미치게 하던 사람이 바로 눈 앞에 있다. 그렇게나 찾아 헤매던 소중한 것이..... "........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인가 봐. 소문 다 돌았더라. 같은 과 후배래." 미리 알고 있었던 듯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우경이의 말에 가슴이 쓰려온다. 시간이 지나면 모두 치유되고 괜찮아질 꺼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어. 아직도 이렇게 아프고 보고있는 게 힘이 드는데....... 대체 시간 따위가 할 수 있는 게 뭐라는 거야? 지끈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그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뭔가 화난 듯 남자의 가슴을 손으로 밀치는 인하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인하를 붙잡고 화를 풀어주려는 듯 한 남자.... 그리고 금방 이어지는 포옹...... 할 수 없다는 듯 그의 어깨를 안으며 뽀루퉁한 표정이 되는 인하...... 나와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장난끼 가득한 아이 같은 그 모습에 정신이 얼얼해진다. 이미... 다른 사람이 있는데.... 왜 나만 미련을 갖고 있는 거지? 잊기 위해, 잊는다는 핑계로 온 갖 짓을 다 했는데.... "어?" 그 모습에 멍하니 있는데 몇 명이 다가와 둘을 바라본다. 그리고 바로 앞에 서서 시비를 거는 다섯 명 정도의 남자들...... 놀란 마음에 뛰어나가려 하자 소하가 팔을 붙잡는다. "그만 둬.... 니가 참견할 일 아니잖아." "............" "그래, 그리고 기사님이 계시는데...." 우경이의 비웃는 듯 한 말에 돌아보자 인하를 막아선 그 남자가 보였다.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서서히 모여드는 사람들의 틈으로 끼어 들었다. "야, 이 호모자식들아, 여기가 어디라고 나와서 지랄이야? 꺼져!" 욕설을 내뱉는 무리들에게 그 남자는 앞을 막아선 채 말린다. 그리고 인하는 뒤에 가만히 선 채 기분 나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라질테니 이러지 마세요. 인하형, 어서....." 퍼억--- 그가 돌아보며 인하에게 뭔가 말하려는 순간 앞의 무리 중의 누군가가 그를 발로 걷어찼다.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그 모습에 순간 인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고 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차갑게.... 인하의 눈 안에 담은 얼음 같은 냉정함에 모두가 주춤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 개새끼들.... 누구 앞에서 지랄이야..... 씨발.... 내가 모처럼 착하게 살아보려는데....." 조용히 말하고 가방을 집어던진 그의 모습에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헤어졌어도 여전히 그가 다치는 모습은 볼 수가 없어 앞으로 달려나가려는데 소하가 다시 막아선다. "그만둬! 스캔들이라도 일으키고 싶어?" "비켜." 막아서는 소하를 밀치는 순간...... 무리들 중 하나가 세게 뒤로 밀려났다. 여자들의 작은 비명에 놀라 그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앞의 남자들을 날리고 있는 인하가 보였다. "........ 세상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볍게 몸을 움직이는 그 모습에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모두 놀라 박수까지 치면서 구경을 시작했다. "이, 호모새끼가!!" 쓰러져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그렇게 소리치며 달려가자 인하는 그 녀석의 목을 잡아 채 복부를 무릎으로 몇 번 찍어올린다. 고통스러운 듯 이상한 신음과 함께 바닥으로 내던져진 그에게 인하는 싱긋 웃으며 말해주었다. "니네는 잘난 스트레이트라 그 모양이냐? 병신 새끼들이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지....... 대갈통이 깨져봐야 정신 차리지..... 츳!" 혀를 차며 바닥에 널부러진 녀석들을 몇 번 더 발로 차는 인하의 모습에 놀라 멍하니 있는데 인하 뒤의 남자가 서서히 일어선다. "깡패........" 라고 남자가 한숨을 내쉬 듯 말하자 인하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발가에 치이는 녀석 하나를 또 한 번 걷어찬다. "그만 때려! 사람 잡을래? 이 깡패야!!" 그 모습에 남자가 화가 난 듯 소리치자 인하도 만만치 않게 대꾸한다. "시끄럿, 주명세! 그러게 누가 이런 양아치들 한 방에 나가 떨어지래? 덩치 값을 해라!" 인하가 끙끙대는 발 밑의 또 다른 덩이를 발로 꾸욱 밟고는 집어던졌던 가방을 챙겨들자 그 사람은 기가 막히다는 듯 인하를 바라봤다. "내가 너처럼 깡팬 줄 알아? 장인하!!" "누가 깡패야? 난 건달이길 꿈꾸는 사람이다. 저런 양아치 새끼들하고 똑같이 취급하지 마." "그거나 그거나!! 진짜.... 어우...... 싸움 좀 하지마. 시비 걸면 거는 대로 다 받아치냐?" "씨발아, 내 맘이다. 육갑 떠는 새끼들 밟아주는 게 잘못이냐? 눈 앞에서 깝죽대면 그저 조져버리는 게 상책이야." "말 버릇 좀 고쳐!! 선생이 말투가 그게 뭐냐?" "꼰대처럼...... 니 나이가 몇인데 그 모양이냐? 이 세상에 선생 같은 선생이 얼마나 된다구? 나는 비주류가 아닌 주류이고 싶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궤변 늘어놓는 버릇부터 고쳐. 성준이형 반만 못닮냐?" "왜 여기서 그 새끼가 나와? 난 원래 성질 이 모양이야!! 그리고 그 놈이 겉만 얌전하지 내 곁에서 10년을 산 놈이다, 나 못지 않다구!!" "그게 다 너 때문에 그렇게 된 거잖아!! 친구들이 불쌍하다!!" "이게, 죽을래, 주명세!" 남자의 앞에 서서 소리를 빽하니 지르는 인하의 모습에 남자도 못지 않게 대꾸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자꾸 이러면 나 진짜 화낼꺼야!" ".......... 치사한 새끼...... 사내 자식이 벨도 없냐? 그걸 협박이라고 하냐?" "난 건전하게 살고픈 사람이야." "건전은 개뿔!" "나보고 덩치 값 하라고 할 꺼면 형도 얼굴 값 좀 해!" "임마, 내가 얼굴값 하면 갈 데가 유곽밖에 더 있냐? 니 애인 몸 파는 꼴 보고 싶냐?" "누가 그런 얼굴 값 하래? 말하는 싸가지는....... 성질 좀 죽여!! 그 얼굴로 한 번 웃어주면 넘어갈 걸 왜 시비를 거냐구? 세상이 그렇게 싫어?" "응, 벨 꼴리고 더럽고 개 떡 같아서 싫어, 그래도 살기는 할꺼야. 엿 같은 세상에 찰떡 같이 붙어서 멸망할 때까지 살꺼야." "....... 진짜 못됐어...... 그런 말 들으면 나 기분 나쁘잖아." "실컷 나빠해, 새끼야..... 씨발..... 열받아...... 늬들은 뭐야? 니네 갈 길이나 가!" 갑자기 열심히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을 돌아보고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내지른 후 휙하니 돌아선 인하의 뒷모습에 그 남자도 금새 따라간다. "신경질 좀 부리지 마." "...... 내가 노처녀냐? 신경질 부리게?" 여전히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두 사람의 모습에 그나마 갖고 있던 모든 희망이 끊겨나간 기분이 되었다. 그는 새로운 모습으로 나와는 다른 사랑을 하고 있다. 전혀 다른 사람을 만나 화를 내고 싸우고....... 나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조금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기뻤을 텐데...... 내 앞에서는 늘 참기만 하던 그가 감정을 터트리고 화를 낸다. 나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았던 그 모습들.... 그래서.... 이미 끝나버렸다고 생각했던 사랑이 다시 생각나 버렸다. 기억들만이 아니라 그 두근거림과 고통들까지 모두.... 현실의 일처럼 생생하게 머리에 떠올랐다. "가자, 윤진아....... 이젠 아니다." "..........." "윤진아......." "..... 아직..... 끝난 게 아니었나.... 봐....." "뭐?" 천천히 이어진 내 말에 우경이가 놀란 듯 돌아보지만...... 나도 놀랐으니 그런 표정 해봐야 설명할 길이 없다, 우경아. "나..... 아직도 저 녀석 사랑하는 거 같아......." "......... 윤진아......" "어떻게 하지..... 이미 끝나버린 사랑이 운명이라면..... 어떻게 할까, 정우경......." "............." 그 시끄러운 밤거리에서 나도 소하도, 우경이도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얼마 전 우연히 맡게 된 광고 때문에 미팅을 하던 중, 광고주와 만나던 곳에서 그를 보았다. 그를 사랑해서 불행하던 사촌....... 그다지 호감을 갖고 있던 상대는 아니었지만 오늘만은 만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니,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사람이라면 나를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느꼈으니까..... 아니 이해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꺼라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그의 사무실로 쳐들어갔고 그 안에서 여전히 시린 눈을 가진 그와 마주쳤다. "실례..... 오늘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 니가 나와 무슨 얘기를 하는데, 서윤진." 동료들이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상대가 나여서인지, 혹은 원래가 그런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나에게 대꾸했다. "묻고 싶은 게 있어. 장인하.... 일이야. 당신에게 말할 게 있어." ".......... 상처받았구나." ".........." 단숨에 내리 찌른 그의 말에 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날카로운 건데..... 당신..... 미리 알아버린면 할 말이 없어지잖아. "얘기했잖아, 그 녀석 특기라구. 지하 카페에서 7시 정도면 돼?" "고마워........" "아니..... 내가 부린 심술에 대한 대가야." 딱히 할 일도 없어 이른 시간부터 커피숖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언제나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이제야 제대로 뭔가를 물어볼 수 있게 된 느낌이었다.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대체 내가 뭘 하고 싶은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마음 안에 쌓인 것을 털어내고 싶었다. 내가 그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는 기껏해야 우경이 정도였지만....... 그 녀석 역시 너무 힘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데 그 앞에서 인하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인하 때문에 녀석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나 서로 증오하고 멀리 있으면서도 그 둘은, 인하와 그의 형은 마치 하나의 영혼처럼 묶여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치 온 몸의 신경이 연결된 듯 그 둘은 너무나 닮아 있었고.... 반대로 너무나 달라 그렇게 헤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얼마 전 줄기차게 기다리고 있던 우경이의 뒷통수를 내리치듯 장지환이라는 사람은 다른 연인과 동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하는 아마 지금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스스로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고 있는 것은 아직도 장지환 단 한 명뿐이라는 것을......... "조금 늦었지." 7시가 조금 넘어 나타난 그는 딱딱한 얼굴로 내 맞은 편 자리에 자리 잡고 앉았다. "아니..........." "아, 커피요." 어느 새 다가온 메이드에게 커피를 시킨 그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라면...... 인하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겠지. "어제..... 장인하를 만났어." 문득 나온 내 말에 그도 말을 끊는다. "그랬구나. 어쩌다 만난 거야?" "거리에서...... 술을 마시다...... 지나가는데 우연히 본거야. 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더군......." "..... 주명세. 둘이 사귀고 있어." "그래......"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 진실로 드러나자 그가 담담한 얼굴로 바라본다. 이 사람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역시 다른 남자였다. "의외지. 그 녀석이 그렇게 제대로 된 남자와 만나다니...... 나도 놀랐어. 덕분에 지금은 좋아. 얼마 못가 때려칠 줄 알았는데..... 학교도 잘 다니고 얼마 후엔 그 녀석 따라서 학교도 옮길 모양이야. 잠도 잘자고..... 집에서도 허락을 받은 모양이야. 장인하가 같이 살 생각까지 다하고........ 지금 그 녀석은 행복해." 다시 접근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을 빙 돌려 말하는 그에게 화나기 보다는 뭔지 모를 동지애까지 느껴졌다. 이 사람도... 그렇게 말을 하지만 장인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지키면서 장인하가 자기에게 향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이다. 어쩌면 나보다 더 불쌍하고 집요한 인간일지도......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몇 년 간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의문을 말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사람이라면 어쩌면 그 의문에 답을 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만약에..... 내가 그 때 진실을 말했다면 이렇게 돼지 않았을까? 내가..... 그 녀석을 찾으러 미친 듯이 헤매고 다녔고, 그 녀석 때문에 모든 걸 다 포기했었다는 거... 얘기하면 인하 나를 돌아봐줄까? 그 녀석과 다시 만나기 위해 포기 안하고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거 알면....... 우리 변할 수 있었을까? 그래, 단순한 객기였어. 그 녀석이 상처받지 않는 거에 상처받아 아프게 해주고 싶었어. 내가 느끼는 만큼 인하도 나를 사랑하고 소유해주길 바랬지만 녀석은 절대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 때는 몰랐거든. 녀석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걸.... 단지 날 원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어. 누구와 비교 당한다는 거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니까......." 애절한 내 목소리에 앞의 그가 무심한 얼굴로 반응해 온다. "얘기했잖아, 인하는 아이라구. 그 녀석은 너무 어려서..... 누구에게든 잔인한 짓을 할 수 있고 상처 입히는 것도 쉬워. 하지만 그만큼 상처도 잘 받는 다는 거 왜 몰랐지? 상처를 잘 입히는 사람은 그만큼이나 상처받고 있다는 걸 왜 알려고 하지 않았어?" "볼 생각도 하지 못했어.... 너무 어려서.... 나밖에 보이질 않았어. 내 감정밖에...... 보이지 않았어." 내 안에 있었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진심들이 흘러나가자 그가 담담하게 받아쳐준다. "........ 그렇다면 후회할 필요도 없는 거네. 잊어, 장인하는 쉽게 잊어. 기억하는 거 너만 손해라고 했잖아." "그렇게 쉽게 잊혀질 기억인가...... 그게?" "인하는 쉽게 잊어..... 아니 쉽게 잊어야 돼. 그러지 않았으면 그 녀석 진짜 미쳐버렸을 꺼야. 뭐, 지금 상태도 그다지 양호한 건 아니지만...... 거기서 더 미쳐버린다면...... 차라리 내가 녀석을 죽여버릴 거니까.......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돼게 죽여줄 거니까........ 이 이상은 안돼. 장인하를 정신 차리게 한 건 너지만 그 배로 미치게 했던 것도 너야. 실수라는 말로 되돌리려 하지마. 때론 절대 하지 말아야할 실수도 있는 거야." "........ 그래...... 알고 있어........" 어느 새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담배를 빼무는 그의 모습을 멍하니 보자 그가 의식한 듯 웃으며 불을 붙인다. "조금 피워....... 뭐, 그 놈처럼 줄창 피는 건 아니지만." 점점 그를 닮아가는 듯 한 그 사촌의 모습의 쓴 미소가 떠올랐다. 그의 옆에 있으면 모두가 그와 동화되는 느낌이다. 그의 그림자를 밟 듯이 하나 하나 바뀌어 그의 옆에 당연한 듯 놓여진다. 이 사람도 그런 걸까....... "만약에......." "응?" "실수로 놓아버린 손이 진짜 운명이었다면...... 어떻게 할꺼야?" 머리 안을 가득 채운 생각들을 겨우 말로 풀어내자 그가 피식 웃는다. 이 미소까지 닮아있다. 아니, 닮은 건 그인가? 나와 함께 있던 그는 어쩌면 이 사람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를 꺼란 생각이 스쳐갔다. "만약..... 진짜 실수라면 어떻게든 되돌리려 하겠지. 하지만..... 진짜 돌아올 수 없다면 다른 운명을 만들어. 인하는 이제껏 그렇게 살아왔어. 그래서 너를, 명세를 만난 거야. 그 녀석도 만날 때마다 운명을 느끼는 놈이라서....... 아마...... 널 만나지 않았다면 장인하 평생 사랑이란 거 모르고 살았을 꺼야. 그 녀석이 장지환을 사랑했다는 걸 안 것도 너를 만나면서야. 그 전에는 사랑이란 것도 모르고 있었지. 니가 그 녀석에게 세상을 터준 거야. 그것에 대해서는 감사해..... 하지만 넌 그 대가로 장인하를 죽을 정도로 아프게 했어. 그럼..... 계산은 비긴 거지?" "....... 그런 논리인가?" "그런 논리야......" 딱 잘라 말하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그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다. "먼저 일어날게. 약속이 있어서......" "그래..... 오늘 고마워....." "아니...... 아, 한 가지 얘기해줄게. 장인하가..... 그 독한 놈이 말야..... 너와 헤어지고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었어. 그 놈 자기 아버지 죽을 때도 웃고만 있던 녀석이....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운 거야. 그 녀석은 그렇게 너를 사랑했어. 그건 니가 기억했으면 한다." 처음으로 다정하게 나를 바라 본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래...... 그것이라도 위안이 되는 바보가.... 나다. 장인하가 울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인간일테니까..... 그걸 위해 그렇게 너를 몰아붙였던 것이었으니 그걸로라도 위안을 삼아야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직 사랑은 끝나지 않은 것 같아. 어제 본 네 모습에 아프고..... 그리워졌으니까..... 아직도 널 사랑하는 것 같아. 아마 넌 다르겠지. 그 때 그렇게까지 독하게 굴고 사라져 버린 거... 니가 그만큼이나 내게 상처받았다는 거지. 너는 취선을 다했는데 난 그걸 몰랐으니까...... 서로 말했다면 좋았을 걸. 지금에 와서 이런 후회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처음이라 너무 서툴고 이기적이었던 거 이제야 알겠어.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어른이었고 니가 조금만 덜 소극적이었다면...... 서로가 좀더 믿을 수 있었다면 그렇게 헤어지진 않았겠지. 엉망이 되어 끝나버린 사랑이지만...... 내가 진짜 너를 사랑했었다는 사실만은 기억해 줘. 장인하.... 이미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너이지만.... 기다릴거야.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내 인생의 사랑은 너뿐이었으니까.... 미련하다고 해도, 바보 같다고 해도 너를 기다릴게. 너를 얻을 수 있을 때까지...... 그 때가 되면 다시는 널 아프게 하지 않을꺼야..... 다시 사랑하면.... 그 때는....... End A Sad Love Song Kang Sang-won & Jang In-ha Prologue 처음 느낌은 그런 것이었다. 날렵하고 아름답고 깊이 상처받은 눈동자를 한 고양이.... 그것이 녀석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이었다. "인하라고 한다. 너의 새로운 사촌이야. 동갑이니 상원이가 잘 도와줘라." 외삼촌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바라본 녀석은 인형처럼 예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무표정한 시선을 날렸다. 아무 감정 없는 인형 같은 얼굴에 난 잠시 숨을 멈추고 그 녀석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상당히 나른한.....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 한 눈동자를 가진 아이였다. "잘 부탁해." 인사를 건내며 손을 내밀자 녀석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맞잡아 온다. 내가 마음에 안드는 건가.... 라고 생각한 다음 순간 녀석이 눈꼬리를 접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그 미소에 난 나도 모르게 따라 웃고 말았다. "아, 예쁘게 생겼네." "응, 원래 예뻐." 라며 다시 한 번 미소짓는다. 새카만 머리카락에 하얀 얼굴, 지나치게 말랐지만 선이 가늘어 불쌍하다기 보다는 아름다워 보였다. "잘 부탁해." 예의 상의 인사를 하며 넋이 나간 내게 인하는 갑자기 이상한 표정을 짓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흐응..... 딱딱하잖아. 재미없어." 라며 갑자기 휙 돌아서더니 거실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갔다. "인하야! 인사는....." 이라고 부르시는 외삼촌의 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는 돌아보더니 야릇한 표정을 짓고는 계단을 달려 올라갔다. "아, 저 녀석이 좀 변덕이 심해서. 상원이가 이해해라." "아니에요......." 외삼촌의 말에 예의 상 답을 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한참의 시간을 보낸 후였다. 원래가 사람이 없는 집이기는 하지만 급한 일이 생겨서 모든 가족이 나가는 바람에 멍하니 큰 저택에 남아있던 나는 결국 돌아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현관으로 나가려는데 계단 쪽에서 우당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아한 기분에 계단 쪽으로 가 위를 올려보자 나선형으로 비틀린 그 위쪽에 청바지 자락이 보였다. 혹시나 해서 고개를 돌려 위를 보니 그 위에는 인하가 무릎을 껴안고 앉아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많이 깨어지고 아파하는 것이었다. "....... 거기서 뭐해?" "....... 아아, 엎어졌어." 그 요란한 소리는 녀석이 낸 소리였다. 인하.... 는 불편했는지 서서히 자세를 바꿔 계단에 엎드린 채로 난간 사이로 나를 내려다 본다. 그 눈빛에는 이미 아픔이나 고통 같은 것은 자취를 감추고 악의에 찬 호기심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변덕이라고만 하기엔 그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의 본성을 알 수 있다지만 녀석의 눈빛의 변화에서는 전혀 그런 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뭔가 불안한 기분이 되어 나도 모르게 먼저 입을 열었다. "....... 내려올래?" "니가 올라 와." 라며 생긋 웃는다. 그 미소에 이끌려 가려던 것도 잊고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한 걸음, 두 걸음.... 이질적인 세계로 발을 내딛는 기분에 서서히 걸음을 옮겨갔다. 그 계단이 마치 사차원으로 향하는 것처럼 느껴져 올라서면 두 번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없지 않을까.... 하는 기분에 걸음 하나 하나에 신경을 쏟았다. 만약 잘못 떨어진다면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세계로 떨어져 버릴 지도 모른다. 난 나의 세계를 벗어나 녀석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천 근 같은 침묵과 무거운 걸음에 막 녀석의 앞에 닿았을 때 녀석은 나의 얼굴을 보며 즐겁다는 듯 환하게 웃어 주었다. 그 미소에 정신이 뺏긴 사이 녀석은 금새 일어서 계단을 달리 듯 뛰어 올랐다. "자신 있으면 따라와도 좋아, 하지만... 각오가 없다면 내려가. 아직 갈 수 있을 때." 라며 싱긋 웃은 녀석은 금새 2층에 닿아 좁은 복도를 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면.... 내려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혼란스러움에 걸음을 멈추고 다시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두려운 것인지.... 혹은 단순한 거부감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휭 하니 조용한 복도에 순간 발소리가 퍼졌다. 그건 인하의 소리였다. 어디에서인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녀석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잠시 간의 망설임을 접고 난 다시 가방을 들쳐 맨 채 인하를 찾아 복도로 향했다. 一. 같은 학교로 전학을 오고 같은 반까지 되어버린 인하 덕분에 난 하루 하루 녀석의 수발을 들어가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 인형 같은 얼굴로 사교성은 제로인데다 항상 눈은 풀려 있는 상태였다. 나른하고 퇴폐적으로까지 보이는 그 눈은 평소에는 어디에도 머물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인가 초점이 맞춰지면 그 순간은 사단이었다. 녀석이 뭔가에 눈을 빛내는 순간에는 꼭 사건이 터지는 때였으니까. 청순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늘 생각지도 못한 일만 저지르다 보니 배로 신경 쓰는 수밖에 없었다. 가령..... 반 아이 중 누군가 시비를 걸면 말 없이 배를 걷어찬다던가, 놀리거나 안좋은 말을 하면 몇 배의 눈물을 뽑게 잔인한 말을 한다. 상처받은 자에게 위로의 말을 건내지 않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신랄한 비웃음을 날릴 뿐이다. 절대 먼저 화내지 않고 시비도 걸지 않지만 녀석의 거만한 태도에 분노하는 자들에게는 그 이상의 대가를 치루게 해주었다. 가끔은 치사하기 그지없는 방법으로도......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있었다. 처음의 인상과 같이 녀석은 고양이 같은 인간이었다. 다가서면 절대 가까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두면 어느 새인가 다가와 몸을 부대끼며 애교를 떤다. 물론 그런 변덕이 오직 나에 한해서이기는 했지만...... "심심해......." 제법 날씨가 더워진 초여름의 어느 날, 녀석이 내 무릎을 배고 누워 애처로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할 일이 없어. 너무 심심하단 말야. 나랑 놀아 줘." "무슨 소리야? 어떻게 해달라구?" "심심해, 심심해, 심심해!!!" 보채 듯 말하는 녀석의 반응에 어이가 없어 멍하니 내려다보자 순간 녀석의 표정이 싸늘히 식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다시 멍하니 공허해진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내 무릎 위에서 서서히 손을 뻗었다. 내 볼에 닿은 그 손은 한 여름의 무더위를 실감할 수 없게 하는 차가운 느낌의 것이었다. 바로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얼굴과 부드러운 시선, 그 환상적인 무드에 혼을 빼앗겨 있는데 서서히 녀석의 얼굴이 다가왔고 곧 입술이 포개어졌다. 그 행위에 어떤 거부감이나 현실감은 없었다. 그냥..... 입술이 닿았구나. 우리 키스했구나.... 라는 거랄까...... "흥, 별로 반응이 없네. 무뚝뚝하긴." 뚱한 표정으로 내뱉은 인하는 그대로 데구루르 굴러 일어서서는 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제야 인식이 되었다. 키스했다..... 라는 것. 인하가 방을 나서고 한참을 멍하니 있다 퍼뜩 정신이 들자 얼굴이 붉어져왔다. 어쨌건 그건 나의 첫키스였다. 입술에 살포시 포개어져 감겨오는 시선을 잡은..... 달콤한 키스.... 당혹감에 잠시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그 녀석이 대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것 역시 녀석의 단순한 변덕이라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할 수 없었다. 녀석은 그런 녀석이니까...... 내키면 내키는 대로 뭐든 하고야 마는.. 그런 녀석이니까 이 정도 키스따위 별 거 아니다... 라고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일단 머리를 정리한 후 녀석을 찾으러 방을 나왔지만 인하는 2층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에 일단 2층을 내려가 거실로 향했다. 때마침 큰 형이 돌아왔는지 시끌거리는 계단을 내려가다 오랜만에 큰형과 마주치고 말았다. "어, 형. 오랜만이네." "그래....... 인하랑 같이 있었니?"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는 그의 모습에 난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다. 인하를 찾아서....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까.... 큰형과는 그 이상의 대화를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난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딘지 감정을 알 수 없는 살아있는 시체 같은 느낌이라서일까..... 혹은 이미 그 때 나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난 그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인하를 찾아야한다는 생각에 그의 존재를 무시하고 1층으로 내려가려던 순간 우악스러운 손이 내 팔을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형!!" 놀라 다그치는 내 말에 그가 낮게 대꾸한다. "그 자식 곁으로 다가가지 마." "무슨 소리야, 형." "그 새끼랑 같이 다니지 말라구. 널 위해 하는 충고야. 그 새끼 건들면...... 가만 안둬. 그건 내 꺼야." 단정하고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평소의 그 답지 않은 폭언에 난 멍하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동생인데.... 어째서 그는 이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마치 인하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듯 한 그의 반응에 난 인상을 찡그렸다. "인하..... 랑은 같은 반이고 친구야. 같이 다니면 안돼?" "친구...... 라구? 그런 녀석과? 그 녀석과 진짜 친구 같은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너?" "물론이야...... 난 인하를 좋아해. 인하 역시 날 좋아하고... 형에게 그런 말 들을 이유가 없는 걸." "어린 녀석이 겁 없이 까불다가 큰코다친다. 그 놈은 악질이야." "형........" 놀라 바라보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는 무서울 정도로 독점욕에 가득 찬 차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에 심장이... 싸늘히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형이......" 타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바로 그의 뒤로 묵직한 것이 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놀라서 그 쪽을 바라보니 커다란 청자 하나가 박살이 나 있었다. "..........." 그게 머리에 맞았다면...... 이라고 생각하자 정신이 아찔해진다. 대체....... 2층 창가에 있던 저것이 어째서 이런 계단으로 떨어진 걸까? "이런..... 빗나갔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목소리에 위를 올려다보자 계단 난간에 기대어 선 인하가 싱긋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 얼굴에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과 즐겁다는 표정이 섞여 있었다. 상상도 못한 어이없는 상황에 멍하니 바라보자 인하가 입을 열었다. "다음에는 제대로 던져줄게. 상원이가 다칠까 봐 조준을 잘못했어." 라며 말하고 웃는 인하의 눈에는 살기가 어려 있었다. 도대체...... 저런 짓을 웃으면서 할 수 있는 건 어떤 정신이야? "장인하......." 낮게 으르렁거리는 형의 말에 인하는 샐쭉하니 웃더니 독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왜? 니가 나한테 하는 짓 생각하면 별 거 아니잖아? 머리 좀 깨지는 게 어때서? 뭐, 머리도 딱딱하니 그 정도에 맞아도 별 탈 없을테니 걱정 말라구." "장인하!!" 노성을 지르는 그의 말에도 인하는 빙그레 웃기만 한다. 입은 웃고 있지만 그 눈에는 바라보기 두려울 정도로 차가운 독기가 어려있어 장인하라는 인간의 새로운 면을 본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면이 아닐지도 모른다. 항상 멍하니 있던 것은 저 표정을 속이기 위한 위장일지도 모르니까....... "왜? 무서웠나 보지? 상원이 건들면 그 땐 진짜 직빵으로 뇌수 터뜨려줄테니 꺼져. 그 녀석에게 손도 대지 마!" 낮게 깔린 음성의 차가운 표정.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한 그 얼굴의 변화에 나마저 숨을 멈춰 버렸다. "까불지 마라..... 꼬맹이가....." "너나 까불지 마. 너 같은 새끼가 아무리 협박해봐야 우습지도 않아." 싸늘한 조소를 띤 입가로 이죽거린 인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2층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충격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자 형도 파랗게 질린 얼굴로 인하가 사라진 2층 계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처음으로 장인하란 인간을 제대로 바라보기 시작한 때였다. 二. 점점 추워져 가던 어느 날...... 또 인하와 함께 죽치고 있던 중 집안이 요란스러워졌다. 인하와 나는 그 소리에 놀라 터덜 터덜 함께 거실로 내려갔고 그 아래에서 작은 강아지를 껴안고 있던 첫 째 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는 생각에 내려가 보니 버려진 강아지를 주어온 것이었다. "사람 많은 집이니까 조금만 도와주면 키울 수 있을 꺼야....." 라며 즐겁게 웃고 있던 큰 형의 곁에는 한숨을 내쉬는 외숙모와 다른 형들이 있었다. 그 강아지는 태어난 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것으로 마르고 하얀 게 어쩐지 인하를 닮아 있었다. 사람을 경계하는 날카로움도 그렇고...... "병신.... 또 주어 모으는군. 미친 새끼라니까..... 사는 게 편하다 보니 하는 짓도 가관이야." 라며 팔짱을 낀 채 아직 다 내려오지 않는 계단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말한 인하의 목소리에 모두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인하는 어깨를 으쓱하며 신랄하게 한 번 웃어주고는 다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저 새끼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형, 신경 쓰지 마. 귀엽네...... 일단 병원 가서 주사 맞히고 먹을 것을 줘야지." 둘 째 형이 빙긋 웃으며 강아지를 쓰다듬었고 나도 호기심이 일어 강아지의 보드라운 털을 만져 보았다. 부드럽고 하얘서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녀석이었다. "....... 인하도 좋아할 거에요. 강아지 키우고 싶다고 했으니까......" 형에게 조용히 말하자 큰 형 역시 안심한 듯 웃으며 강아지를 끌어안았다. 평소의 그 같지 않은 표정에 멍하니 바라보자 그도 어색했는지 금새 표정을 바꾸고 강아지를 안은 채 걸음을 옮겼다. 항상 인간같지도 않다고 여기던 그의 얼굴에서 본 모처럼의 다정한 표정에 떨떠름했지만..... 어쩌면 그게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가도 그 하얀 강아지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않았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졌기 때문인지 인간을 경계하고 두려워했다. 먹을 것을 가진 사람에게도 절대 다가가는 법이 없었고 누구든 주위에 오면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호의를 갖고 다가가려해도 경계는 쉽게 풀리지 않았고 가족들은 점점 그 작은 생물체에게서 소홀해져갔다. 나 역시 처음에는 다가가려던 생각을 버리고 그저 먼 발치에서 음식을 두고 가는 정도로만 행동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그 강아지의 앞에 음식을 두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길에 공책을 두고 왔다는 생각에 다시 집으로 들어가던 길에 다시 강아지의 집으로 들렀다. 그리고 그곳에서 너무 의외의 광경을 보고 말았다. 작은 강아지의 앞에 주저앉아 쓰다듬고 있는 인하의 모습을. "너도 버림받았지? 왜 이렇게 세상엔 엿 같은 것들이 많냐?" 라며 강아지를 쓰다듬은 녀석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멍하니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알아채지 못했는지 인하는 강아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미친년이 내 동생 안버렸나 모르겠다...... 하긴, 그 놈 살리겠다고 나 버린 년이니 잘 키우겠지. 나 그 놈 이름도 모르는데..... 니가 내 동생 해라.... 보신탕으로 만들지는 않을테니." 항상 먹는 것을 든 인간 외에는 사람의 곁으로 오는 적이 없던 그 작은 강아지가 처음으로 인하의 품으로 들어가 몸을 비벼댄다. 놀라움에 바라보자 인하는 그 강아지를 안고 보드라운 털에 입을 맞춘다. 동병상련.... 이라는 걸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대하는 강아지가 인하에게만은 사근사근 안겨든다. 마치 엄마의 품을 찾은 듯 편안하게 그 품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인하 역시 이제 껏 본 적 없던 부드러운 미소로 안아들었다. 이것으로 네 안의 독기가 조금은 가시길 바래.... 장인하.... 아마, 큰 형도 그러길 바란 게 아니었을까.....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쩐지 내가 칭찬받은 기분에 으쓱해져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이 인하는 내가 보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아무리 차고 매몰차게 굴어도 인하 역시 아이니까, 작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은 생물을 대하는 그 모습에 인하가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라는 걸 실감한 것이다. 그래서 그 때는 그 환희에 들떠 인하가 중얼거리던 이야기를 흘려들은 것이다. 어째서 버림받았다는 것인지..... 그리고 왜 이 세상을 엿 같다고 했었는지......... "자고 가라. 내일 일요일이잖아." 가을의 문턱을 넘어 겨울로 달려가던 어느 날 빙긋 웃으며 말한 인하의 반응에 난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최근 들어 이상한 버릇이 들어버린 게 인하가 하는 말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여버린다는 것이다. 이젠 이 녀석의 종노릇이 몸에 밴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 녀석의 말하는 표정이나 말투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그냥 무조껀 OK라고 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 녀석의 억지도 한몫했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이 녀석이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바도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이 인형 같은 얼굴에 대재벌의 사랑 받는 막내아들로 입양된데다 머리도 꽤나 영특하다고 가정 교사들의 칭찬이 마를 새가 없는 인간이 왜 이렇게 안되고 측은해 보이는 것인지...... 이 녀석만 보면 가슴이 아리고 뭔가 해주고 싶어지는 것은 내가 봐도 확실히 「연민」 혹은, 「동정」이라는 감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난 대체 이런 녀석의 어디가 불쌍한 걸까? 저 인형 같은 얼굴이? 아니면 입양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면 어딘지 멍한 그 시선이......?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하여간 난 녀석에 대해서만은 무엇보다도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그래서.... 그 날도 그렇게 수락을 해버린 것이다. 집에 연락을 하고 인하의 잠옷을 빌려 입고 인하의 침대에서 함께 잠을 청하기로 했다. 킹 사이즈의 침대를 사용하는 덕에 따로 이부자리를 준비할 필요는 없었지만 옆에 있는 인하에게서 나는 좋은 향기 덕분에 차라리 다른 방을 쓸 것을.... 하는 후회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13세의 소년들은 서서히 성에 눈을 떠가고 있었고 그런 내게 인하는 상당히 자극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이제 자자." 라면서 밤 9시가 되기 무섭게 인하는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2층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인하의 방에는 이제 막 뜬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왠지 그 빛과 옆의 존재가 신경쓰여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자냐?" 문득 물어오는 인하의 질문에 일부러 답하지 않자 인하가 살며시 일어나 방을 나선다. 이 시간에 화장실에라도 가는 건가..... 해서 굳이 신경쓰지 않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그 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 눈만 뜬 채 몇 번이나 몸을 뒤척여도 인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설마.... 길을 잃은 건가..... 이 집이 넓다해도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닌데..... 잠도 오지 않고 왠지 걱정 돼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나섰다. 먼저 화장실에 들렀지만 불은 꺼진 채였고 안에도 역시 비어있었다. 산책이라도 간 건가? 하지만 그 녀석 성격이라면 억지로라도 나를 깨워 끌고 갔을텐데..... 이상하다는 생각에 일어나 2층을 여기 저기 돌아다닐 때였다. 큰형의 방을 지날 때 즈음해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질척한 마찰음과 억누른 듯 한 신음 소리...... 13살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는 아니었기에..... 누가 설명해주지 않는다 해도 그게 어떻게 나오는 소리인지는 알고 있었다. 두근..... 가슴이.... 아프게 고동친다. 그 때 즈음해서 남자끼리도 관계를 갖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인하가 아무리 도발적인 미모라 한다 해도...... 설마.....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고 큰형의 방에 닿자 조금 열려있는 문틈으로 침대 위의 선정적인 나체가 눈에 닿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음란함으로 뒤얽혀 있는 인하와 지원이형...... 이제까지 갖고 있던 나의 상식적인 세계를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그 광경에 난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 자리를 떠날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나의 사고 회로는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나의 시선은 그것을 쫓는다. 두 개의 상반된 인식이 머리를 돌고 돌아.... 토악질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울렁거리는 위를 움켜쥐고 어떻게든 자리를 떠나려하는데..... 문득 형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인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다. 당연하다는 듯, 당연히 내가 거기 있을 줄 알았다는 듯 한 눈빛으로 인하는...... 웃고 있었다. "우욱...... 쿡........." 화장실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안에 있던 모든 것을 토해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어 노란 위액만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토기는 멈추지 않았다. 인하는 웃고 있었다. 내가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단순한 당혹감을 감추기 위한 미소이든...... 사실 전자 쪽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서 더욱 미칠 것 같은 거지만..... 왜....... 형은 그런 일을 하는 걸까? 인하에게 보이는 그 독점욕은 그 때문이었던 걸까? 인하는 그래서 그 토록이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그토록 신랄하고 냉정한 걸까..... 대체 너 어떻게 살아온거니, 장인하. 아니, 그렇게 어떻게 살아있는 거니? 진짜 니가 원하는 일인 거니, 아니면 어쩔 수 없었던 거야? "괜찮아?" 이런 저런 생각에 잠시 가라앉았던 토기가 뒤에서 들리는 인하의 한 마디로 다시 일어났다. "흥, 그 정도에 그 난리야?"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느낌에 겨우 겨우 뒤를 돌아 보자 팔짱을 끼고 문턱에 기대어 있는 인하가 보였다. 여전히.... 냉정하고 차분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한 태도로 나를 내려다본다. 어떻게.... 방금 전의 그 광경을 본 내게 이렇게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는 거지? 인간으로서 느끼는 기본적인 수치심조차 없는 거냐? "....... 내 옆에 있으려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냐. 그래서 말했잖아, 자신 없으면 따라오지 말라구. 나를 택한 건 너야." 조금의 동정심도 없이 내려오는 인하의 말에 나는 다시 변기통 위에 고꾸라진 보라빛이 도는 액체를 토해냈다. 하지만.... 인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상냥하게 다가와 등을 두들겨 주거나 미안하다든가하는 사과나 조금의 변명도 하지 않았다. 마치 그건 당연한 일이고 그 정도 일에 토하는 내가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 들 정도로 담담하게 바라볼 뿐이다. "...... 무서우면 도망가. 그게 널 위한 길이니까...... 이 정도에 놀라 기절이라도 한다면 내 옆에서 배겨나지 못할 껄." 독한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인하는 그대로 나를 남겨둔 채 그곳을 떠나갔다. 머리와 위가 아프고..... 혼란스러워서.... 난 그 안에서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때는 이미 사흘이 지나있었고 집에서는 난리가 나있었다. 병명은 신경성 위염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난 후에도 나의 뇌리에 남은 것은 인하의 도발적인 언어들이었고 나는..... 멍청하게도 절대 그 녀석을 떠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래서 상처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녀석에게 다시 다가가고 말았다. 그 때는 그 감정이 단순한 연민.... 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그 녀석이 안타까워져서.... 그 녀석을 지켜줘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영웅심에 친구로서의 내 자리를 지키기로 결심했지만..... 그 날 밤 나의 감정의 수위는 우정의 그것에서 훨씬 넘쳐버리고 있었다는 걸 난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三. 시간은 흘러 겨울이 되었다. 그 해는 유난히 온도가 낮고 눈도 많은 해였다. 곧 겨울 방학이 되어가기에 내 나름대로 방학 기간 안의 즐거운 상상을 하며 보냈지만 인하는 겨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듯 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옷을 껴입는 것은 질색을 하는데다 눈이 쌓인 거리에서는 10분 이상을 제대로 걷기 못하다 보니 겨울이 싫어지는 것도 이해는 가지만....... "이 놈의 눈.... 지겹게도 내리네." "그래도 비보다는 낫잖아." 비가 오는 날에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사고가 많이 생기는 인하의 징크스가 생각나 그렇게 말하고 웃자 인하도 피식 웃어버린다. 검은색의 폴라 니트에 청바지, 그리고 그 위에 하프 코트를 껴입은 인하는 그 키에 차가운 인상만 아니라면 여자라고 해도 충분히 믿을 정도로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하교 길에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이 기다렸다 꽃이나 선물을 주는 일은 다반사였고..... 뒤에서 달려와 말을 거는 남자들도 꽤나 되었지만 인하는 그들의 그런 반응을 때로는 장난으로, 때로는 차가운 비아냥으로 무시하고 넘겼다.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울리지 않는 가방을 매고 터벅 터벅 걷던 인하는 불만스러운 듯 중얼거리다 다음 순간 눈이 쌓인 길가에서 멋지게 엎어지고 말았다. "괜찮냐.......?" "젠장..... 왜 눈이 쌓이고 난리야. 그렇지 않아도 잘 엎어지는데......." 왠지 모르게 그 차가운 인상의 인하가 칠칠맞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삐져 나왔다. 외모는 바비 인형 같은 녀석이 성격은 험하고 사생활에서는 이렇게 칠칠맞고 정신을 반쯤 빼고 다닌다는 거, 꽤나 즐거운 케릭터였다. "일어 서." 손을 내밀며 말하자 인하는 장갑도 끼지 않은 차가운 손으로 내 손을 맞잡아 왔다. 그 손의 차가움에 순간 가슴이 두근하고 움직였다.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하는 것은 더욱 자극이 강했다. 그 때 난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다 질색이야. 쌓여서 좋을 것 없잖아." "다들 그런 건 아냐....." 내 손을 잡고 일어서 눈을 털고 터벅 터벅 걷던 인하는 한강 근교의 길가를 앞두고 갑자기 뚝하니 멈춰섰다. 또 뭔가 이상한 일이 생겼나..... 해서 인하의 옆에 가서 170이 넘어버린 녀석을 올려다 보자 녀석이 멍한 눈으로 뭔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뭐 봤어?" 이상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어도 인하는 싸늘히 식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시 주변을 돌아보자 그 곳에는 커다란 통에 뭔가를 태우며 몸을 녹이는 노숙자 몇과 앵벌이를 하는 아이들 몇이 보일 뿐이었다. 고급스런 옷차림에 떡 봐도 있는 집의 자식 같은 우리 같은 아이들이 있을 곳이 아닌 분위기였다. 특히.... 인하는...... "인하야, 다른 길로 가자." "............" 삐딱하니 서서 그들을 노려보는 인하를 앵벌이꾼 같은 꼬마가 바라보며 옆의 남자에게 뭐라고 수군거리자 수염을 기른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우리 쪽을 돌아본다. 아무래도 서둘러 떠나야겠다 싶어 인하의 팔을 잡아채려 했지만 인하는 내 손을 뿌리치고 그 쪽으로 다가갔다. "인하야!!" 초조함에 소리치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앞으로 걸어간 인하가 아까 그 남자의 앞에 서다 그는 놀란 눈으로 인하를 바라보았다. 인하보다 조금 작은 키의 그는 초라한 차림 때문인지 훨씬 더 작아 보였지만 인하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아직 살아있네..... 추하게 말야......." 자신보다 조금 작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한 인하는 비웃 듯이 한 쪽 입술 끝을 올려 웃는다. "....... 세영이구나......." "세영이? 그게 누군데? 아직도 살아있다니 놀랍네.... 빨리 죽어버리는 쪽이 지구 평화에 도움을 주는 일일텐데 말야..... 흥..... 하여간 바퀴벌레 같은 것들만 생명력이 징하단 말야...... 재수 없어." 환하게 웃고는 있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신랄함으로 그를 비웃던 인하는 코트 안자락에서 지갑을 꺼내들고 그 안에 있던 지폐를 들을 손에 들었다. "돈에 환장한 새끼가 돈이 없으니 죽을 맛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하는 것처럼 구걸해 봐. 무릎 꿇고 비굴하게 웃으면서 손을 비비고 애원해. 이 정도면 오늘 하루 수입보다 훨씬 좋은 거 아냐? 아니면 요즘 거지들은 소득이 좋던가?" 연신 웃어대며 손에 든 지폐를 흔들던 인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를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서있었다. 그리고 그는.... 굳은 표정으로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인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왜? 안내켜? 이 돈이 뭔줄 알아? 니가 나 팔아먹은 데서 번 돈이야. 내 몸 팔아서 오기로 벌어들인 돈이야. 돈 보니 팔아먹은 거 후회 안돼? 아니면 진짜 내 포주 노릇이라도 할 걸... 하고 후회하는 중이야? 남의 새끼 따윈 깡패들에게 맞아죽던 바닥을 기던, 매춘부로 전락하던 상관없다는 놈이니까 말야. 안 그래?" "...... 세영아......."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앓는 듯한 그는 인하의 차가운 반응에 상처 입은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장인하,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봐. "그래도 자존심은 아직 있는 건가? 웃기는군..... 창피한 줄 알라구...... 더러운 자식....." 이번엔 표정을 굳히고 딱딱하게 내뱉은 인하는 들고있던 지폐를 그대로 공중에 집어던지고 내게로 다가와 내 팔을 잡아끌고 그 곳을 벗어나 걸음을 빨리 해 한강으로 향해갔다. 세영이라....... 설마....... "저거 우리 아빠야." 허름한 차림의 노숙자를 본 인하가 비웃 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순간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싱긋 웃으며 내가 답해온다. "내 아버지라구... 정확히는 호적상만...... 이지만 말이야. 저 개새끼가 나 팔아 넘겼거든." "........ 팔아?" "흥, 내가 지 자식이 아니라고 어디다 버리든 앵벌이를 시키든 맘대로 하라고 하고 튀었지. 얼마나 잘 사나 두고볼려고 했는데 결국 저 꼴이네. 병신 새끼..... 저 모양이니 마누라가 딴 놈 새끼 배고 와도 아무 말 못했겠지. 쓰레기 같은 자식." 입에서 계속 튀어나오는 욕과 이해할 수 없는 진실들에 경악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자 인하는 예의 예쁜 미소를 띠고는 내 눈을 들여다 보았다. "왜? 얘기 못 들었어?" "뭘?" 숨을 꿀꺽 삼키고 말하자 인형 같은 얼굴이 바로 코앞에 닿았다. "흐응..... 거기까지 말한 필요는 없으니까.... 하긴....." 작게 말한 인하는 강 쪽으로 내려가 중간 정도에 주저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인하야....... 담배....." "닥쳐! 내가 피고 싶으면 피는 거야." 얼어버린 듯 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본 인하는 고급스런 은색의 라이터를 들고 불을 붙였다. 대체 저 담배는 어디서 나는 거고 저 라이터는...... "언제부터 핀 거야?" "열 살. 앉아." 아직 서있는 내게 옆자리를 권한 인하를 보다 한숨을 내쉬고 주저앉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담배를 길게 한 모금 빤다. 그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고 인하의 눈을 바라보자 순간 심장이 철렁하니 주저앉았다. 방금 전에 들었던 진실이나 혼란스러움 따위를 일시에 불식시켜버리는 인하의 눈동자..... 때문이었다. 인하의 시선은 아무 곳에도 향해 있지 않았고 그 눈에는........ 차가운 유리 같은 동공만이 어려 있었다. 무기물 같은.... 오래 전 책에서 봤던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어떤 생물들의 눈처럼 불투명하고 삭막한, 죽어버린 눈동자....... 잔뜩 상처받고 절망만으로 가득 찬 그 눈에.... 나 역시...... 절망해 버렸다. "저 새끼랑 날 낳은 년 말야...... 뭔진 모르겠지만 사채를 써서 집안 말아먹고 나 팔았다. 그래서 엄청난 곳에 있다가 그 아저씨가 나 데려온 거야. 지원이 새끼 말야, 그 자식이 나한테 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닌 그런 데에 있다가 말야....... 개같은 새끼들...... 언젠가 다들 한강에 쳐박아 버릴꺼야. 다...... 죽여버릴꺼야......" 보통 사람이라면 울분에 차서 토해낼 그 단어들을 인하는 담담하니 말하며 담배 필터 쪽을 지근 지근 씹었다. 그 표정에는 조금의 분노도 슬픔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두려워질 정도로..... "...... 인하야......." "생각 같아서는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은 거 겨우 참았어. 언젠가.... 죽여 버릴꺼야. 저 새끼...... 지 새끼는 금같고 나는 엿같다는 새끼.... 저 놈이 나 건들였어. 나 그 때 겨우 일곱 살이었어. 겨우... 일곱 살이었단 말야......"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슨 소리냐....... 장인하..... 너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저 사람이... 널 그런 의미로 건들였다는 거냐? 너 일곱 살 때? 겨우.... 일곱 살 때? "다들.... 죽여 버릴꺼야. 피 토하고 후회하고 후회할 때까지........ 다들 나처럼 괴롭혀서 죽여 버릴꺼야. 나보다 더 비참하게, 더 잔인하게 상처 입힐꺼야. 절대로 용서 안해...... 나 미치게 한 저 새끼 절대로 용서 못해." 다 꺼진 담배를 집어던지고 다시 담배를 빼무는 인하의 눈에는 이번에는 상상도 못한 한기가 어려 있었다.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심한 녀석은 또 처음이었다. 어느 순간 화를 내나...... 하고 생각하면 다음 순간에는 웃고 있고 그 다음에는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변덕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그 모습에 난 잠시 말을 끊고 숨을 들이켰다. "사람은 행한 대로 받는 게 맞지?" 라며 이번엔 나를 돌아보고 싱긋 웃는다. 행한 대로 받는다는 것은 정설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는 게 사실이지. "언젠가..... 후회하게 만들어 줄꺼야. 피를 토하면서......"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시 말한 인하는 뭔가 이상한 음을 흥얼거리더니 갑자기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는다. "피곤한데 집에 가서 자자. 오늘은 뭐하고 시간 때우냐?" 몸을 쭈욱 피며 자리에서 일어선 인하는 먼저 눈밭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생각지 못한 진실과 지금의 상황에 난 멍한 머리를 겨우 들어올리고 인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밤이었다. 아무래도 걱정이 돼서 짐을 싸들고 쳐들어온 집에서 인하의 옆에서 한참을 자고 있던 중 일어나 옆을 보니 인하가 없었다. 또 형에게 불려갔나 하는 생각에 일어나 지원형의 방으로 가봤지만 형은 숙면을 취하고 있던 중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거실과 주방에 가보아도 인하는 없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녀석이 좋아하는 서재 쪽으로 가자 뭔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하는 이상한 소음..... 새벽의 커다란 집안의 정적 안에 들려오는 그 소리에 섬뜩한 기분이 몸에 스쳤지만 일단 그곳으로 향해갔다. 서재로 향하면 향할수록 그 소리를 더욱 커져 그 안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두려움과 호기심에 서서히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몇 천 권의 책들이 빼곡히 쌓인 그 안에는 널찍한 탁자와 의자가 희미한 달빛을 받아 그 형체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쿵-- 쿵-- 안으로 들어서자 그 소리는 더욱 확실해졌다. 조여오는 심장을 부여잡고 책장 사이를 돌아 안으로 들어섰다. 등에 식은땀이 흘러 질척한 느낌이 들었다. 유령이나 귀신따위 믿지 않지만 한 밤 중에 들리는 소리는 12실의 내게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부드러운 카펫을 밟고 살며시 창가 쪽으로 돌자 쿵쿵거리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안고 겨우 겨우 그 소리가 나는 진원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는 그대로 멈춰서 버렸다. 차라리 귀신이 더 나을 뻔 할 정도로 그 안의 광경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쿵-- 쿵--- 나의 존재를 전혀 발견하지 못한 듯 서재의 창가를 향해 앉아 있는 인하는 얇은 잠옷 차림으로 고급스런 벽지로 싸인 벽에 자신의 이마를 들이받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작은 중얼거림.... 멀리서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근처에서는 확실히 들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작고, 낮고 슬픈 목소리였다. 그 소리는 웅얼거리는 느낌으로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이 끼어있었다. "인하..... 야......." "......... 다친다... 다친다.... 아프다....... 죽였어.... 내가 죽였어... 머리가............" "인하야!!" 계속되는 언어에 온 몸이 얼어버릴 듯 한 공포를 딛고 겨우 달려가 인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하지만 인하는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초점을 잃은 동공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꺼풀 위로 올리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하야!!! 장인하!!!!" 놀라움에 어깨를 잡고 흔들자 뭔가 툭하니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날카로운 신경들이 일제히 반응을 하고 온 몸의 핏기가 가시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정신을 겨우 가다듬고 난 서서히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보고 말았다. 인하의 무릎 위로 떨어진 목이 비틀린 강아지의 시체를...... "인하야......" "........ 죽는다.... 가라앉아서... 그대로 깊이... 깊이..........." "장인하!!" 철썩-- 있는 힘을 다해 올려붙인 따귀에 인하의 동공이 서서히 자리를 찾으며 초점을 찾아 내 눈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숨을 쉬기 시작한다. 몇 분이나 숨을 쉬지 않고 있었던지 갑자기 몰아쉬는 커다란 숨소리에 인하의 등을 두들기자 녀석이 겨우 숨을 진정시키고 눈앞에 있는 강아지의 시체를 보고 다시 숨을 멈추었다. "인하야, 숨 쉬어..... 장인하!!" 다시 등을 세게 두들기며 소리치자 녀석이 겨우 숨을 내쉬고 부들 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는다. "......... 괜찮아?" "..... 아니..... 이거 내가 죽인 거지?" "뭐?" 강아지의 시체를 더듬거리 듯 손으로 쓰다듬은 인하의 말에 충격을 받아 멍하니 시체를 바라보자 인하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 빌어먹을...... 좀 괜찮아 졌나 했더니....... 죽이려던 건 아니었는데....." 입술을 깨물고 인하는 공허한 눈으로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죽은 시체보다 더 상처받고 아파하는 차가운 눈동자에는 물기는 어려있지 않았지만 그보다 더한 절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 녀석...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다. 너무 아파서, 너무 상처 받아서 제 정신이 아닌거야...... 미쳐버린 거야....... 장인하..... 너 그렇게 힘들었던 거야? "........ 미쳐..... 개자식들.... 와서 계속 떠들더니만.... 환영들 주제에......" 이를 갈며 말하던 인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뜨고 작은 시체를 들어 두 손 안에 담는다. "이거... 내가 죽인 거야..... 그렇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질문을 하는 인하에게 당황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자 책 장 뒤의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그래, 니가 죽인 거야, 장인하. 잔인한 자식....." 어둠 속에서 들린 그 목소리는 환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는 것이었다. 놀라움에 소리의 방향을 찾아 돌아보니 그곳에는 생각지도 못한 지경이 형이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교복차림인 것으로 보아 막 돌아온 듯 했지만.... 난 문을 여는 소리나 벨 소리따윈 듣지도 못했는데..... "그러게 정신 좀 차리고 다니지. 빨리 치워라..... 형이 보면 난리 난다." "........ 다 보고 있었으면서 놔둔 거냐? 미친 새끼....." 지경이형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나간 인하의 언어에 난 어떻게 된 상황인지 겨우 알 수 있었다. 형은.... 아까 전부터 이 곳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하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릴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눈 까뒤집고 있는 널 어떻게 말리냐?" "........ 미친 새끼........" 아무 말 없이 일어 선 인하는 그대로 작은 강아지의 시체를 들더니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강아지를 내려다보았다. 그 행동에 조심스레 녀석을 올려다보자 그 눈에는 이미 방금 전의 절망이나 상처 따윈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로지... 신기하고 재밌는 것을 본 듯 한 호기심만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 갑작스런 변화에 놀라 녀석을 바라보자 인하는 갑자기 피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 재밌네..... 그냥 버리기는 아깝잖아?" "또 무슨 짓을 할려고?" 앞에 서서 신경질적인 얼굴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지경이 형의 반응에 인하는 아주 예쁘게.... 무서울 정도로 예쁘고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장지원이 좋아하는 개였잖아. 빌어먹을 자식..... 아침에 심장 한 번 떨어져 보라지." 흥- 하고 비웃은 인하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게 된 나는 인하의 손을 잡아 막았다. "하지마! 누구든 상처는 받아.... 그런 짓 하면 안돼!" "상처 좀 받으면 어때서? 상처받지 않고 사는 사람 있어? 누구라도 예외는 아냐." "안돼! 너도 좋아했던 강아지잖아. 왜 그런 것까지 이용할려고 하는 거야? 너도 상처받았잖아!" 너무 당황스럽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화가 나 버럭 소리를 내질렀지만 인하는 그런 내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며 결국 또 웃어버린다. "그러니까..... 혼자 상처받기 싫다는 거야. 나 나쁜 놈이거든....... 싫으면 꺼져, 강상원." "..........." "밝고 곱게 자라, 나쁜 짓은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내 근처로 다가오지도 마. 실컷 도망가고 편하게 살라구. 난 그렇게 살기에 너무 괘도를 벗어난 팔자야. 그 안에 들어올 자신 없으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마. 재수 없으니까." 평소에 나에게 대하던 것과 180도 다른 차갑고 잔인하고 제 멋대로인 그 반응에, 난 멍하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무서우면...... 나쁜 짓을 할 자신이 없으면 니 곁에 다가가지도 말라구? 왜 너를 얻는데 그런 조건이 필요한 거지? 너를 위해.... 나도 욕을 하고 침을 뱉고 누군가를 상처 주고..... 아프게 해야만 하는 거야? 그런 거야..... 장인하? 그게 너의 진심이야? 그렇지 않으면 나 같은 건 필요도 없다는 거야? 너는 너만 있으면 된다는 거야? 나 같은 건 너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거냐? 난 그저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소모품인 거야? 난 이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너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절망적인 정도로 너를 사랑하는데...... 너는 나를 너의 경계 밖으로 밀어내려는 거야? 말해 봐.... 장인하..... "상원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자라. 저 정신병자 하는 일에는 상관하지 마. 저거 미친놈이야." 이미 돌아서 서재를 나서고 있는 인하를 가리키며 나온 지경이 형의 말에 방문을 열던 인하가 돌아보더니 푸르스름한 달빛에 비친 창백한 얼굴로 미소짓는다. "그 미친 새끼 엉덩이 좋다고 덤벼드는 개새끼들은 어느 집안의 누구더라∼ 잘난 체 하지마, 장지경, 너도 결국 미친 새끼야." "너처럼 진짜 정신병까지는 없지." 어깨를 들썩이며 답하는 지경이형의 말에 인하는 차가운 조소를 날린다. "이 정신병자한테 머리 터져 죽기 싫으면 입 닥치고 물러서 있어. 안그러면..... 계약이고 뭐고 니 잘난 아가리에 칼 먼저 쳐박아 버릴테니까." 섬뜩한 말을 하며 빙긋 웃은 인하는 문을 열고 사라진다. 그 모습에 난 상처받아 버린 것 같아..... 그대로 우뚝 서서 하염없이 문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 상원이 너 빨리 가서 자고..... 이제부터 저 새끼 근처로는 가지도 말아라. 저거 진짜 정신병자야. 저 자식 말하는 거 들으면 오뉴월에도 목가가 섬뜩해진다." 먼저 말하고 서재를 떠난 형을 보자 난 그제야 지원이 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근처로 가면.... 안된다는 이야기...... 이제야 알 것 같아......... 나.... 진짜 저 녀석에게 빠져버린 것 같아. 나 저 정신병자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다음 날로 집에 돌아와 조금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녀석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은 모두 나와 인하가 크게 싸운 거라 생각했는지 내 앞에서 인하의 이야기는 일체 하질 않았고 인하는 점점 반 안의 아웃사이더가 되어갔다. 세상과 연결되던 유일한 고리인 나를 잃고 인하는 점점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들어 현실을 보지 않는다. 공허한 눈은 늘 허공을 향해있고 누구의 도발에도 시비에도 응하지 않았다. 늘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음악으로만 빠져들어서...... 누구와도 자신의 시간을 공유하러 들지 않았다. 그 모습이.... 왠지 망막에 걸려..... 눈물이 날 것 같고 아프고..... 가슴에 익숙치 않은 고통이 박혀왔지만.....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녀석을 받아들이고 세계를 버릴 의지를 얻을 시간.... 혹은 녀석을 잊고 나의 정상적인 세계로 돌아갈 길을 찾을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바로 그 시간으로 인해 인하는 점점 비틀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 때의 난 알지 못하고 있었다. 四. "...... 나랑 갈 데가 있어." 라며 녀석이 모처럼 이어폰을 빼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처음으로...... 녀석과 만난 후 처음으로 먼저 말을 걸어온 녀석의 반응에 난 가방을 싸던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눈을 마주치는 게 대화를 할 때의 녀석의 버릇이었다. 난 그것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 녀석과 같은 곳을 바라볼 자신이 없으니까..... 녀석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싶어서였지만..... 그것을 절대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왜? 무서워?" 즐겁게 웃으며 말을 건낸 녀석은 눈꼬리를 접으며 유쾌하게 웃었다. 사실은 무섭지만..... 그건 네가 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두려움이야. 난 니가 아니라.... 너에게 점점 빠져드는 내 마음이 두려워. 널 너무 사랑하게 될 것 같아서... 하지만 넌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 난 네게 크게 상처받을 꺼야. 너는.... 내게 절대의 행복과 함께 평생 가장 큰 상처를 남길 녀석이야. 하지만... 그래도 난 널 버릴 수는 없겠지. 그래서 난 겁이 나. 너를 평생 안고 살 것 같아서....... 너를 대신할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서...... "어딜 가는 건데?" "악몽의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안 그러면 미쳐 버릴 것 같거든." 또 웃는다. 즐겁게...... 뭔가 재미난 모험을 하러 떠나는 악동처럼 즐겁게 웃기만 한다. 하지만...... 너 알고 있는 거야, 장인하? 니 그 눈에 굉장한 고통이 보인다는 거 말야. "좋아." 쉽게 답하고는 기다리던 다른 친구들에게 대강 상황을 설명하고 인하를 따라 학교를 나서자 외삼촌이 보내셨는지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 데 가는 거야?" "조금......." 이라고 웃으며 녀석은 차에 타고 아저씨에게 테잎을 건내고 한강으로 가달라는 말을 남겼다. 곧 차안에는 익숙치 않은 멜로디가 흘러 묘한 기분에 곡명을 묻자 인하는 싱긋 웃으며 답해주었다. "「Doors」 의 「The End」" 다시 시선을 돌려 멍한 눈으로 단조로운 가사를 흥얼거리던 녀석과 나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노래를 스무 번 쯤 들었을 무렵 도착한 곳에서 인하는 가볍게 차에서 내리며 추운 듯 코트를 여몄다. "여긴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에......" "아이들에게는 말야..... 참 편리한 것들이 많단 말야......." "무슨 소리야?" 내 질문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답을 한 녀석은 빙그래 웃으며 앞서 가기 시작했다. "12살과 13살 사이의 아이들은... 말야.... 어떤 죄를 지어도 절대 추궁받지 않거든. 가령..... 사람을 죽인다 해도 말야....... 보호관찰 같은 거 전혀 받지 않게 되어 있거든." 순간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살인이라니...... "장인하........ 그거 무슨 뜻이야?" "......." 내 말을 무시한 녀석은 방금 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상쾌하게 웃고는 전의 그..... 인하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있던 곳으로 향해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설마, 아무리 증오한다 해도 그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적어도 그를 키워준 아버지인데...... 자신의 인생을 망친 사람이라 해도..... 설마겠지... 아무리 저 녀석이라도 그렇게 잔인해질 수는 없을테니까. 난 그렇게 자신을 애써 타일르며 인하를 따라 걸었다. 뭔가 굉장한 일을 벌일 것 같던 인하는 문득 가던 길을 돌려 내 팔을 잡아끌고 백화점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옷과 신발들을 잔뜩 사고 삼촌의 크레디트 카드로 계산을 끝내고 다시 식사를 하고 내 손을 잡아 끌어 여기 저기를 돌아다녔다. "너, 뭐 하는 거야?" "글세..... 그냥..... 소비. 스트레스 해소로 쇼핑이 꽤 괜찮더라구." ".........." 아무 말 없이 인하를 바라보자 인하는 싱긋 웃으며 나를 끌어당겨 다시 여기 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이 되었을 때 인하는 다시 한강으로 향해갔다. 또 무슨 짓을 할 껀가.... 하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려왔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이 녀석은 진짜 심장에 좋지 않은 녀석이었다. "여기엔 왜 온거야?" "얘기했잖아, 악몽의 원인을 제거하러 왔다구." 피식 웃으며 말한 인하는 터벅 터벅 걸어 강가 가까이로 다가갔고 난 인하의 저편에서 다가오는 두 사람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 두 사람은 지경이 형과 예전에 만난 인하의 아버지라는 사람이었다. 어째서 지경이 형이 저 사람과 같이 이 쪽으로 오고 잇을 걸까? 아니, 그 전에 지경이 형은 어떻게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있었던 걸까? "인하야!" 놀라 쳐다보자 인하는 담배를 빼문 채 이 쪽으로 돌아섰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보고는 싱긋 웃는다. 그리고...... 곧 그들이 다가오자 담배를 집어던지고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의 앞에 선다. 그리고 지경이 형은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고는 내 쪽으로 다가와 어깨를 두어번 두들긴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형에게 따지고 싶은 마음은 산 같았지만..... 물어보려 해도 형은 그저 빙그래 웃어줄 뿐이다. "저번에는 미안했어요." 그....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람의 앞에 서서 조용하게 말하는 인하는 착한 아이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난 그 모습에 그다지 동정이 일지는 않았다. 대체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온 신경이 곤두서 있을 뿐이었다. "...... 세영아...... 그래, 그래야지......" 인하의 말에 감격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인하는 빙긋 웃으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나.... 지금 그 집에서 꽤 사랑받고 있고...... 용돈도 많이 받아요. 그래서 차라리 그 집으로 입양가게 해준 것에 고마워하고 있어요." "그래.... 그 때 우리 같이 있었으면 다들 고생이었을 꺼다. 내가 널 위해 그런 거 아니겠니? 그러니까 세영아.... 그 아저씨한테 잘 말하면...... 잘해주실 꺼다. 내가 뭘 하려는 건 아니고 이제 건축 쪽이 힘이 나고 있잖아. 내가 다시 한 번 일을 피면 우리 가족 다 같이 살 수 있고 너도 남의 집에서 고생 안해도 돼. 너 동생 예뻐했잖아.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 집안 정도면 네게 그 정도는 해줄꺼야." 하...... 대체 저 사람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인하가..... 옳다는 건 아니지만.....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인하에게 저런 말을 하는걸까? 인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잇는 줄 알고.... 저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까? "..... 아저씨라면 해줄꺼에요." "그래. 내가 널 알잖니. 얼마나 착하고 예쁜 아인데...... 우리 세영이도 아빠가 보고싶었지?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사랑해 주겠어? 니 엄마하고 너 때문에 항상 다투기는 했지만 내가 진짜 사랑한 건 너뿐이다. 예쁜 우리 세영이....." "그래? 그렇게 사랑해서 팔아넘긴 거야? 쓰레기 같은 새끼........." "너 같은 건 죽어주는 게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된다니까. 진짜 개자식이잖아. 니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잊은 모양이지? 단순한 머리라 좋겠어." 빙긋 웃은 인하는 그대로 발로 차 그를 강으로 떨어뜨렸고 놀란 그가 인하의 바지를 당기려 하자 가볍게 옆으로 피해냈다. "뭐야? 장인하!!!" 놀라서 그 쪽을 바라보자 인하는 천천히 코트를 벗어 지경이 형에게 던져주고는 강으로 뛰어들었다. 12월의 한강은 드문 드문 표면이 얼어버릴 정도로 추웠다. 대체.... 자기가 빠뜨리고 뛰어드는 건 무슨 짓이야? "지경이 형! 빨리 구급차, 아니 소방서 불....." 지경이 형을 돌아보며 서둘러 전화할 것을 요청했지만 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강 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형!!!" 그 태연한 움직임에 기가 막혀 내가 전화박스를 찾아 뛰려하자 형이 내 손목을 잡고 그 쪽을 보라는 시선을 보냈다. 그 움직임을 따라 나 역시 강쪽을 돌아보았고 그리고...... 보고 말았다. 물 속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면으로 나오려 허우적대는 그를 안 쪽으로 붙잡고 있는 인하의 실루엣을.... 인하는 그를 구하려한 게 아니라 확실히 죽이려 한 것이라는 것을......... "....... 미친 새끼..... 저거 진짜 미친 놈이야......" 낮게 혀를 차면서도 그걸 바라만 보고 있던 형도 그 안에서 그를 죽이려하는 인하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이 사람들은...... 이럴 꺼라면 왜 나를 데려온 거지? 나는 대체 뭐야? 이게 너를 무시한 벌이라는 거야, 장인하! 잠시 동안 물 안에서 허우적대던 실루엣이 사라지고 인하가 수면 위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한강에서 인하는 천천히 물 밖으로 나오며 추운 몸을 으슬으슬 떨었고 지경이형은 당연한 듯 인하에게 다가가 코트를 건내주었다. "이제 속 편하냐? 미친 놈......" "........ 웃.... 기네......" 바들 바들 떨며 코트를 받아 입은 인하는 새파래진 안색으로 더듬 더듬 코트 단추를 잠그고 지경이 형이 건낸 머플러로 얼굴까지 가려버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바들 바들 떨고 있던 인하에 대한 연민은 나중의 문제였고 왜 그런 일을 한 건지..... 그런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인지..... 하는 의문만이 머리를 싸고돌았다. 대체 자기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그런 짓을 하는 이유가 뭔데? 만약..... 너도 가라앉았다면..... 너도 심장마비로라도 죽어버렸다면 어쩔려고 그런 짓을 하는 건데? "너..... 무슨 짓이야? 너, 대체!!" 경악스러운 현실과 자신을 아끼지 않는 녀석에 대한 안타까움에 인하를 향해 추궁하자 옆에 있던 지경이 형이 나를 막아선다. "관둬. 이 녀석이 원하는 거니까...... 누가 뭐라고 하겠어?" "형, 이건 원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살인이야." 버럭 내질러진 내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경이 형의 뒤에 선 인하는 강가에 서서 부들거리는 손으로 담배를 빼물고 불을 붙였다. 검은 색의 털이 트리밍된 짙은 회색의 하프코트를 입고 멍하니 강가를 바라보던 녀석은 뭐라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어두운 강가를 내려다보았다. "....... 그러니까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했잖아, 상원아. 너만 상처받아. 저 놈이 하는 짓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거야. 나 니가 내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이야." "이건 말도 안돼!!" 머리를 쥐어 싸고 소리치자 지경이 형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어째서..... 인하는 이런 일을 하는 걸까? 그리고 어째서 지경이 형은 그런 모습을 그대로 봐주는 거야..... 그리고 어째서 내게 이런 광경을 보여주는 거지? "...... way cooling in deep my hair......." 혼란스러움에 머리를 쥐어싸고 있던 중 가늘게 퍼지는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해가 저무는 강가에 서서 겨울의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음을 내는 것은 인하였다. 보통 때와는 달리 굉장히 허스키하고 슬픈 목소리가 강가에 울려 퍼진다. 녀석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작게 읊조리는 노래 소리 밖에 듣지 못했던 나로서는 마치 피를 토해내는 듯 한 노랫소리에 멍하니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이 녀석은...... 아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어째서 저 알 수 없는 음울한 노래를 부르는 걸까...... "........ 미친 자식......." 조용히 말하며 결국 돌아서 인하를 바라보는 형의 반응에 난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녀석은 내가 말리기를 바라며 나를 데리고 온 것이라는 걸..... 저 노래는 자기를 불러달라는 간절한 구조요청이라는 것을...... 녀석이 토해내는 것은 노래가 아닌 가슴속의 상처와 분노이고 그 안에는 나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한 같은 것이 서려있다는 사실을....... 그 녀석이 그 동안 얼마나 애타게 나를 부르고 있었는지..... 얼마나 내가 손을 잡아주길 바라고 있었는지 난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기적인 건 니가 아니라 나였겠지. 내 상처에만 급급해 니가 날 부르고 있다는 것을 무시하고 너의 손을 잡으려 하지 않았어. 하지만 나도 그 정도로 무서웠다는 거..... 알아줬으면 해. 점점 더 널 사랑하게 되는 내가 얼마나 무섭고 슬프고..... 아파해야 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난 니가 무서운 거야. 인하야...... 너의 상처 아픔, 과거 아직 알지 못하지만 나 네게 다가가고 싶어, 아니 이미 다가가 있어. 투욱--- 계속되는 외침에 바닥으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술에 취한 듯 흔들리며 긴 노래를 끝낸 인하는 장난치 듯 휙 돌아서더니 코트 안자락에서 뭔가를 꺼내 뚜껑을 열고 들이켰다. 그리고 빙그래 웃으며 내게 다가온 녀석이 나의 턱을 들어올렸다. 여전히 웃고 있는 얼굴...... 너의 그 표정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몰라서 나 너무 혼란스러워.... "흥, 우네....... 놀라서 우는 거야? 내가 불쌍해서 우는 거야?" "니가 무서워서 우는 거다." 라며 딱 잘라 말한 지경이 형의 말에 인하는 피식 웃더니 점점 가까워진다. 그리고....... 뭔가 독한 향에 머리가 아찔해 질 무렵 난 녀석의 입술이 지금 내 입술에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차갑게 얼어버린 입술이 내 입술에 닿고 취해버릴 듯 독한 술을 품은 혀가 입안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래서 난 그냥 눈을 감아버렸다. 여기서 만약 녀석을 밀쳐낸다면 난 두 번 다시 녀석의 세계 안으로 들어설 수 없게된다. 그렇다면..... 평생을 후회와 그리움으로 살아가야 하겠지. 녀석을 잃게 되느니 악당이 되기로 결심을 하는 쪽이 내게는 더 쉬울테니까........ "....... 나 좋아하지?" 잔인한 호기심으로 가득찬 눈앞의 눈동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계속 좋아해..... 나 예쁘잖아?" 그리고 내 어깨를 둘러오는 가느다란 팔의 느낌과 내 얼굴에 닿는 부드러운 털의 느낌에 난 그대로 녀석의 허리를 마주 안은 채 서럽게 울어버렸다. 이제 두 번 다시 난 이 녀석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 아름답고 차갑고 제 멋대로인.... 하지만 너무 불쌍하고 여린.... 어린아이를...... 내 가슴에 품고..... 나를 할퀴는 칼날을 감싸안아 시간을 걸어갈 것이다. "추워, 씨발......" 집안에 들어서자 마자 짜증을 낸 인하는 서둘러 내 손을 잡고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어이, 장인하!! 약속은?" 우리를 보며 소리치는 지경이 형에게 인하는 웃으며 답한다. "나중에....... 오늘은 이 녀석과 해결 볼 일 있어." "흐응, 좋아.... 뭐......." 아쉽다는 듯 답하는 지경이 형에게 웃어 보인 인하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코트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후 욕실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리고 한참 후에 뛰어나온 녀석은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있던 나를 쳐다보고는 먼저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우우, 추워. 너도 빨리 들어와, 강상원," "...... 옷은 걸어둬야지." 서서히 일어나 인하의 코트를 들어 내 코트와 함께 옷걸이에 걸자 침대 위에 누워있던 녀석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침대 안에서 뒹굴거렸다. "왜?" 그 모습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무심한 체 묻자 인하는 그저 웃기만 한다. "잠옷이라도 입어..... 차가운 물에 들어갔으니까........ 웁......" 녀석의 옷장에서 잠옷을 찾아드는데 인하가 어느 새 나가와 내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살며시 포개어진 입술의 느낌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평정을 찾았고 녀석은 잠시 후 내게서 떨어지더니 또 한 번 빙그래 웃고는 내 팔을 잡아끌고 침대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곧 고양이처럼 몸을 구부리고 내 안으로 파고 들었다. 가느다란 어깨와 부드러운 향기.... 그리고 새하얀 살결에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몸이 떨려온다. "만지고 싶으면 만져도 돼...... 너는 용서해줄게....... 나 피곤해서 잘거야." 라며 내 몸 안으로 더욱 파고든 녀석은 나의 허리를 안고 깊게 몸을 겹친 체 눈을 감았다. 진짜.... 고양이 같은 녀석...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우아하지만.... 제 멋대로에 잔인한 녀석 같으니...... 내 가슴 안에 있는 인하의 등을 껴안고 눈을 감자 자연스레 눈물이 흘러나왔다. 미쳐가는 녀석이 안타까워서..... 도와달라는 말을 절대 할 수 없는 녀석이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그런 녀석을 사랑해버려서 불행한 내가 불쌍해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 내칠 수는 없었다. 평생을 나를 따라다닐 나의 사랑이니까...... 인하..... 불쌍한 자식..... 내가 사랑한 단 하나의 인간...... 五. "열 받게 하는 녀석이 있어......" "뭐?" 중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인하는 눈을 반짝이며 또 이상한 소리를 시작한다. 대체 이 녀석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중학교는 추천제라 결국 다른 학교를 가버리게 되어 학교에서까지 돌봐줄 수는 없었지만 녀석이 무슨 일만 생기면 연락을 하는 게 나였기에 이 놈이 어떤 악질적인 사고를 치고 다니는 지는 내가 훤하다. "얼굴은 예쁘장하니 생긴 게 맘에 드는데 말야.... 하는 짓은 병신 같아. 보면 열 받는단 말야......" 라며 그 예쁜 얼굴로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눈에 거슬리면 무시하면 돼잖아. 신경 쓰지 마..." 딱 잘라 나간 나의 말에 인하는 피식 웃더니 내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바닥에 눕니다. "그런데..... 말이지......" "그런데?" "이용해 먹을만 하단 말야..... 내가 이번에 없애버리기로 결심한 녀석이 그 놈을 좋아하거든..... 좀 이용해도 되겠지?" "..... 그거야 니 맘이지. 사람 상처 주고 이용해 먹는 거야 니 특기잖아. 막 가기로 한 거 아니었냐?" 이제 이 녀석의 잔인한 성격에 어느 정도 포기를 한 상태이기에 솔직히 말하자 녀석이 피식 웃는다. 그리고..... 얼마 후 녀석에게는 또 다른 친구가 생겼다. "차성준"이라는 귀엽고 어딘지 음침해 보이는 소년이..... 그리고 녀석에게 또 다른 친구가 생긴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입학식 날부터 왠지 기분이 좋아 보이던 녀석은 자주 우리 반에 출몰했고 반에서 꽤나 분위기 잡고 다니던 깡패 녀석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어째서 이 놈이 그런 녀석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인지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이 악당은 그 녀석이 상당히 맘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녀석..... 착하지?" 라며 눈을 빛내는 장인하 덕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다. 대체 이 녀석은 그 놈을 어쩌려는 걸까? 나야.... 스스로 원한 일이고 성준이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어째서 그런 불량아에게까지 손을 뻗치려는 걸까? "착하기는 하지만.... 어쩔 셈이야?" "뭐..... 어쩐다기 보다는..... 귀엽잖아. 바르고..... 눈이 맘에 들어." "니가 맘에 든다는 말을 다 하고.... 굉장하구나." "응........ 맘에 들어, 진짜......" 작게 말하고 웃은 녀석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들고 핑그르르 돌더니 갑자기 키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이 녀석을 괴롭히던 지원이 형은 중 3 말에 결혼을 하고 유학을 떠났고 이 놈은 조금 정신이 들만하더니 이젠 지환이 형, 셋 째 형과의 관계로 서서히 미쳐가고 있었다. 몰랐다면 좋겠지만..... 이미 알아버린 사실이기에 머리가 멍할 따름이다. 이 악당이 진짜 사랑하는 단 하나의 인간이.... 이 녀석에게 가장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 보기만 하면 물어뜯을 듯 비아냥거리는 그 셋 째 형을 이 녀석이 오랜 시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에 가슴의 통증은 커져만 갔다. 이 집안에서 인하가 오던 날부터 가장 귀여워 해 주던 그가 왜 갑자기 그렇게 태도를 바꿔버렸는지 이해할 수 는 없었지만 그의 그런 태도에 인하 뿐 아니라 그 자신도 상처를 받고 있다는 거 두 사람은 알고 있을까? 그 형이 인하를 바라보는 눈에는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그렇다고 이 녀석을 그저 남창 취급만 하는 비웃음도 아닌 애절한 감정이 얽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걸까...... 너, 그거 알고 있는 거야, 장인하? "지환이형하고 얘기는 해봤어?" "무슨 얘기? 멍멍거리고 대화하라구? 차라리 닭대가리 갖다 놓고 말하는 쪽이 낫지." 몸을 쭈욱 피며 바닥을 구르던 인하는 잠시 동안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벌떡 일어나 앉았다. "왜?" "....... 처리해야겠지......?" "처리? 뭘?" "장지환, 병신 새끼..... 미친놈이 여기 저기 일만 저지르고 다니고.... 말야......뭐, 조만간에 아작을 내주지." 라며 혼자 묻고 혼자 결론을 낸 인하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침대 위에 누워 뒹굴거리더니 이내 그것도 질렸는지 나를 끌고 영화관이며 여기 저기를 헤매고 다녔다. 제 멋대로인 게 매력이고 그걸 알면서도 좋아하기는 했지만 중간 고사가 다가오는 이 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아마 이 녀석이 사고를 친다면 작은 사고는 아닐테니 좀 더 옆에서 두고 봐야겠지..... 완전 하인병이 몸에 벴다는 생각에 한숨을 내쉬고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던 중 의외의 소식을 듣고 말았다. 인하의 아버지..... 그러니까 외삼촌께서 갑작스런 발작으로 돌아가신 거였다. 외삼촌은 인하에게 유난한 애정을 보이시며 많은 재산을 남겨주셨고 그 가족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아무도 왈가불가하지 않았다. 그게 오히려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 형제들과 인하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그러려니... 난 그 때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안이했지만..... 그리고 얼마 후 인하는 셋 째 형을 집안에서 죽지 않을 정도로만 패고는 그 집을 나왔다. 외삼촌이 물려주신 재산 중에 맨션이 몇 개 있어서 그 안에서 살기로 하고 아무 미련 없다는 듯 그 집안의 물건은 하나도 남김없이 버려 두고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 때 즈음해서 인하는 결국 주변 학교와 탈환과 함께 전세하라는 깡패를 손에 넣었다. 조금은.... 치사한 방법으로.....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난 이젠 인하가 정신을 차렸을 거라고 믿고 있었고 다른 친구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인하도 제 정신으로 보통 사람처럼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어이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대학에 간 후에도.... 인하는 더욱 망가져갔다. 왜인지 몰라 어리둥절 하던 중 우연히 지환이 형이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때문이라는 걸 겨우 알게되었다. 소중한 것을 자기도 모르게 놓쳤다는 초조함이 인하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그렇게 엉망이 되어가는 인하를 바라보는 것 외에는 아무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어떤 길을 제시할 수도 그렇다고 인하와 함께 망가질 자신도 없었으니까..... 그냥 바라만 보았다. 그러던 중, 2학년이 되었고 인하는 어느 날인가 이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누군가가..... 신경쓰인다는 것이었다. 이 악당이 또 누군가를 끌어들인다고 생각하던 나는 또 하나의 친구가 생길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날부터 인하는 조금씩 변해갔다. 예전보다 많이 나아지고 평범한 생활에 적응하려는 모습이었다. 그 안하무인의 인간이 스스로 뭔가를 하려든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해 있던 사이 인하는 웃으며 이야기했다. 애인이 생겼다고....... 그 순간의 충격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지환이형과는 관계는 인하 스스로도 어떤 감정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니 상관없었다. 하지만..... 인하 스스로 입밖에 낸 것이다,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평생을 혼자서, 상처를 껴안고 살아갈 것 같던 그 불쌍한 아이가 사랑을 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에..... 하룻 밤을 새며 울었던 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그 때는 나름대로 포기할 수 있었다. 인하가 행복해하니까...... 이제 겨우 사람답게 살려고 하니까....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지만...... 3학년의 1학기 종강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인하에게서 연락이 끊어졌다. 이미 그의 연인과의 관계가 순탄치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걱정이 되어 인하의 집을 찾아갔던 날이었다. 끼익-- 왠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밀고 들어서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집안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원래 조용한 걸 싫어해서 음악이라도 크게 틀어놓는 녀석인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서자 엉망이 된 거실이 보였다. 사방에 널린 술병과 담배, 그리고 여기 저기 뭔가가 깨진 흔적들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절대 망가질 녀석이 아닌데.... 쿵쿵거리는 심장을 안고 안을 들여다보자...... 베란다 쪽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인하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얀색의 목재 의자에 걸터 앉아 마른 팔목을 팔걸이 사이로 늘어트리고 지친 듯 앉아있는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챙-- 깨어진 유리 조각을 피해 조심스레 가던 중 발가에 치인 유리 소리에 밑을 내려다보자 전신 거울의 파편인 듯 한 그 조각 사이에 베인 핏자국이 눈에 띄었다. 설마........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장인하가.... 설마..... 살기 위해 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장인하가..... "인하... 인하야!!" 바닥에 유리 조각이 밟히는 것도 모르고 서둘러 창가 쪽으로 다가가 의자 앞에 서자 멍하게 눈을 뜨고 있는 인하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 것도 보고 있지 않은 듯.... 처음 만났던 그 날을 생각나게 하는 탁한 눈동자였다. 죽어버린 시체의 눈처럼..... 마르고 힘이 없는..... 온 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인하야..... 장인하..... 뭐 하는 거야?" "............" "인하야......" 섬뜩한 느낌에 인하의 늘어진 손을 잡아 올리자 한기가 스쳤다. 언젠가 죽어버린 시체에 닿았을 때 느꼈던 그런.... 차갑고 시린 느낌..... 공기까지 얼어붙게 하는 그 한기에 인하의 손을 더욱 꽉 쥐자 초점 없던 눈동자가 점점 깨어난다. "인하야.... 눈 떠 봐...." "............." "장인하......" 싸늘한 손을 내 양손으로 쥐고 체온을 찾게 하기 위해 온 난리를 쳐도 따뜻해지지 않는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너 독한 놈이잖아, 장인하..... "..... 상원이냐?" 희미하게 겨우 초점을 맞추고 나온 인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들여다 보자 파리한 입술이 들썩이며 조금씩 말을 이어간다. "..... 윤진이랑.... 깨졌다..... 웃기지...... 장인하가....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줄이야...... 미쳤었지..... 병신 같은 자식...... 왜 그렇게 빠진 거야? 별 거 아닌 녀석인데..... 미쳤었어....." 시니컬한 얼굴로 말하면서 서서히 몸을 일으킨 인하는 내 손에서 자기의 손을 떼어 뒤돌아 거실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담배를 한 가치 빼물고 불을 붙인 뒤 거실 끝의 진열장에 가서 술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바닥의 유리조각에 배어 피가 나오는 발의 아픔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의자로 다가와 털썩하니 주저앉았다. "멍청한 짓을 했어..... 시간 낭비였는데....... 이젠 괜찮아." 나를 보며 싱긋 웃고 독한 향을 풍기는 술을 한모금 마신 인하는 의자 위에 스르륵 미끄러진다. 그대로 바닥으로 꺼져버릴 듯 불안한 모습으로 밑으로 밑으로 내려앉는다. "인하야......" 그 모습에 놀라 서둘러 손목을 잡아 올리자 진땀이 배어나온 내 손의 느낌에 인하가 웃어버린다. 지친 듯 슬프게..... 피곤한 얼굴로 웃어버린다. "괜찮아....... 그 딴 자식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고 나는 숨을 쉬고 살아. 별 거 아니잖아...... 그 자식도 마찬가지였어. 장지환 옆에 있으면 죽을 것 같았는데..... 그 녀석 옆에 있었어도 죽을 것 같아서... 관뒀는데..... 조금 아프다. 심장 있는 데가 많이 쓰리고.... 답답해. 얼음을 얹어놨나 봐. 머리도 아프고.... 눈이 제대로 떠지지 않아. 졸리운데.... 잠은 안오고..... 머리가 멍하고....... 뭔가..... 바람이..... 불어와서...... 파도가...... 시끄러워서....... 벽이........" 점점 빛을 잃는 눈빛과 문법이나 뜻이 전혀 맞지 않는 단어들의 나열에 인하의 뺨을 때려도 인하는 계속해서 뜻 모를 말만을 중얼거린다. 이해할 수 없는..... 마치 귀신의 언어 같은 그 말에 신경 하나 하나가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 뭔가 무서워져서........ 손을 떼자 인하의 몸이..... 늘어진다. 인형사의 손을 잃은 마리오네트처럼 생기를 잃고 늘어진다. "인하야.... 장인하!! 정신 차려!! 장인하!!" 애타게 나가는 나의 부름에도 인하는 답하지 않고 헛소리만을 반복한다. 왜 이 꼴이 된 거야, 니가? 장인하, 정신차려. 너 이러는 거 아니잖아. 너처럼 잔인하고 제 멋대로인 놈이 상처받아서 이러는 거 어울리지도 않아..... 눈을 떠, 장인하! "........ 상원아......." "그래, 나 강상원이야, 정신 차려 봐. 인하야..... 응?" "응..... 괜찮아...... 그냥 피곤해서 그래..... 잠 좀 자자..... 강상원..... 사내 자식이 주저리 주저리 말이 많아....... 늙은이처럼......" 내 안에 안긴 채 몸에 힘을 빼고 인하는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지금 눈을 감으면 영원히 이 녀석이 깨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대로 인하를 안아 일으키며 소리를 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인하야.... 눈 떠 봐, 장인하..... 제발.... 이대로 잠들지 마. 이 독한 자식아...... 너 끝까지 살아간다며? 이렇게 손을 놓지 마. 장인하.... 제발 눈 떠!" 애타게 나간 나의 부름에 인하가 힘겹게 눈을 뜨고 잠시 희미하게 웃으며..... 손을 뻗는다. "...... 나쁜 자식..... 날 믿지 않았어..... 진짜 나쁜 자식..... 서윤진...... 죽여버릴거야..... 가만 안둬......... 강상원.... 넌 나 버리지마라. 그냥 옆에 살아라.... 강상원..... 니네는 절대 나 배신하지마. 그럼 지옥까지 쫓아가서 복수할꺼야. 절대로 용서 안해." 인하는 자기가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무 표정 없이 떠들어대기만 한다. 이녀석, 자기가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무표정한 거야. 차라리 통곡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이 녀석은 크게 화내지도 소리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읖조린다. 자기가 얼마나 울고싶은지 모르는 거야.... 울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울고 왜 울어야 하는 지도 모르는 거야. "알았어. 절대 배신 안해, 장인하...... 그러니까..... 너도 먼저 가지 마. 우린 절대 널 배신하지 않아. 내가 죽는다 해도 너만은 지켜줄게....." 나도 모르게 흐른 눈물에 인하가 피식 웃는다. 그리고 내 목에 팔을 감고... 다시 편안한 듯 눈을 감는다. "그래..... 너흰 믿을게......" 작게 나온 그 목소리에 인하의 목을 끌어안고 내가 울어버렸다. 인하가 깨지 않게 소리를 죽여 통곡했다. 인하는 절대 먼저 울지 않을 것을 아니까..... 절대로 소리치고 화낼 녀석이 아니니까...... 그 때 다시 한번 죽어도 그 녀석을 떠날 수 없다는 맹세를 했다. 인하는 그 다음 날로 짐을 정리하고 집을 옮겼고 나와 성준이는 인하를 따라 휴학을 하고 세하까지 함께 여행을 떠나갔다. 집에도 어디에도 알리지 않은 채 인하의 차를 타고 바다를, 산을, 그리고 조용한 강가를 돌아다녔고 그대로 한 달정도 지났을 때 인하는 군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곧 인하를 따라 군에 가고 있는대로 줄을 대어 인하와 같은 부대로 배치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은 점점 흘러 인하는 제대를 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이번의 상대는 너무나 바른 생활 사나이라.... 오히려 걱정될 정도였다. 인하가 그다지 정상적인 녀석이 아니라서..... 하지만 둘은 그런 예상을 깨고 인하의 무차별 공격으로 집안의 허락까지 받아내 사귀기로 했지만 인하가 취직을 하고 2년 정도가 지난 후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것도..... 하필 성준이때문이라니..... 기가 막혔지만 이미 끝난 일이기에 인하도 쉽게 수긍을 하고 전보다는 빠른 회복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신경쓰이는 녀석이 있다던 인하는 두 번의 연애를 걸쳐 진짜 엄청난 상대와 사랑을 하고 말았다. 자기의 동생이라는....... 같은 학교의 농구부 녀석과....... 어떻게 보면 가장 순탄해 보이지만..... 어쩌면 이 때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연애를 시작했다. 六. 멍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빛이 창가에 쏟아져 시야가 쓰라려온다. "후우........" 무거운 몸을 들고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였다. 무단으로 회사를 나가지 않은지 일주일 째다. 인하..... 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오늘 오전 7시에 잠들었으니 실상 잔 시간은 4시간 뿐인데도 더 이상 잠이 오질 않는다. 뭔가 아련한 꿈을 꾼 것 같은데...... 전화 코드도 핸드폰도 모두 빼놓고 집도 당분간은 어머니가 갖고 계신 맨션으로 들어와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않은 채로 지내고 있지만.... 그 녀석 지금 쯤 화가 났을지도 모르니 연락을 해야겠지. 또 연락 안된다고 길길이 날뛸 녀석의 반응에 멍하니 핸드폰을 키자 메시지가 사정없이 들어온다. 그 반응에 쓰게 웃고 일단 인하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긴 신호음 뒤에 들리는 것은 막 잠에서 깬 듯 한 푸석푸석한 음성이었다. <어디야?> 대뜸 어디냐고부터 묻는 말에 웃으며 답을 해주었다. "어머니 맨션. 뭐 해?" <뭐 하긴..... 난리 났더라. 그 아저씨... 나한테까지 연락을 했다구. 어디로 튀었던 거야?> "그냥.... 잠깐 쉬고 싶어서." <망할..... 나와.> "더 자고 싶어, 오늘은......" <웃기네. 우리 집으로 오든가....... 밖에서 만나던가 택해.> 수화기 너머로 녀석이 담배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린다. 정확히 그 동작의 하나 하나까지 연상이 돼자 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너무나 오랜 시간 동안 곁에 있어서 이 녀석의 작은 버릇 하나 하나 행동의 흐름을 눈에 보이 듯 연상해낼 수 있는 자신의 집착이 지겹게까지 느껴진다. "밖에서 보자. 그럼..... 1시까지 「Karma」에서......." <응, 좀 있다 보자.....> 라며 전화를 끊은 녀석의 반응에 다시 한숨을 내쉬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간만에 만나는 거라 조금 기분이 이상해져 버렸다. 언제나 당연한 듯 곁에 있던 존재가 이렇게나 그립고 사랑스럽다니...... 자신의 어리석음에 머리를 흔들고 일어서 약속 장소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언제나..... 만나고 싶었어...... 이렇게 그리운데 내가 너를 떠나 어떻게 살까..... 조금 빨리 약속 장소에 도착해 커피를 시키고 앉아 있는데 익숙한 누군가가 창가로 비추었다. 여전히 인형 같은 얼굴에 기분 나쁜 표정으로 하얀색 면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슬리퍼를 끌고 나른하게 걷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두들 웃으며 쳐다 볼 그 차림이 인하에게만은 패션이 되어버린다. 그만큼 완벽한 외형과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스스로는 저 외모가 가장 큰 컴플랙스이니 문제겠지. 녀석을 아는 사람 중 100이면 90이 녀석이 저 외모를 이용해 먹고 있으며 꽤나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생각하겠지만 - 보통 남자들은 자신이 아무리 아름답다 여겨도 대놓고 '나 예쁘잖아...' 란 말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구에게든 자신이 예쁘다고 밝히는 인하는 그 외모에 엄청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게 당연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다. - 그 녀석의 주변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녀석이 얼굴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다는 것을. 어딘지 모르게 퇴폐적이고 성(性)적인 느낌이 묻어나는 분위기의 녀석이 어슬렁거리며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방학 중이라 제법 긴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얼굴이지만 목마름을 채워줄, 세상에 단 하나뿐인 녀석의 얼굴에... 난 혼을 빼고 녀석을 바라보았다. "간만.... 연락이나 하지?" 라며 어느 새 다가와 앞자리에 앉은 녀석은 졸린 듯 한 얼굴로 턱을 괴고 커피를 시키며 담배를 빼문다. 여전히 들고 있는 은색의 지포 라이터가 저 녀석이 죽인 아버지의 것이라는 걸 안 건 한참이 지난 후였지만...... "회사 맘대로 빠진 거라며? 그 아저씨가 빡이 이빠∼이로 돌았던데. 뭐, 덕분에 꽈주는 재미는 있었지만 괜찮은 거야?" 답지 않게 걱정하는 듯 한 인하의 말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녀석도 나를 걱정하긴 하는구나..... 아직 10살인 채로 남아있는 이 어린아이가 나를 걱정해주는구나. "괜찮아.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야." 아직 이른 오후 시간의 카페는 한산했지만 녀석에게서 뚝뚝 떨어지는 페로몬 덕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이 쪽으로 향해있었고 몇 몇은 노골적으로 수근거리는 이들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점에 대해서라면 무식할 정도로 무신경한 녀석이니 나도 신경을 끄는 쪽이 낫겠지. "흐응....... 그런데 말이지....." "응?" 갑자기 생긋 웃는 녀석의 얼굴에 불안감이 몰려들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웃을 때는 항상 못된 짓을 계획하고 있을 땐데... 말이지. "너 저번에 기억하지? 권형이네 집에서......" "아......." 세하의 전화에 금새 동해 녀석을 친모에게로 끌고 갔었던 사건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 날 이 녀석은 내가 보는 앞에서는 18년 만에 발작을 일으켰다. 다 나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의 앞에서만 괜찮은 척 했던 거지..... 장인하..... 독한 자식..... "생각해 보니 그 날 상당히 열 받더라구..... 그래서 집에 가서부터 계속해서 수면제만 먹어댔거든. 덕분에 이 꼴이다...." 라며 방긋거리는데 그 꼴이라는 게 사실 녀석의 기준에서 '꼴'이지 타인의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질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나른하게 풀린 눈매와 졸린 듯 한 인상 덕에 항상 빈틈 없이 청순한 이미지를 고수하던 녀석이 한없이 도발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는 거 알기나 하는 걸까? 카페 안의 남자 점원들의 시선이 이 녀석의 목가와 어깨선에 머물고 있다는 거 진짜 모르고 있는 걸까? "미안. 널 생각 못했어.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언제고 알게 될 일이었고...... 풀어 버렸으니까." "글세, 풀렸다기 보다는 더 꼬인 거 같지만 말이야....." 라며 앞의 커피를 들이키고 쓰게 웃는 녀석의 얼굴에서 이 놈이 나와 연락이 안되는 며칠 사이 큰 사건을 쳤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 무슨 짓 한 거야?" "별 건 아니고...... 그 집 가서 모조리 깨부수고 왔거든. 덕분에..... 권형이랑 제대로 싸워 버렸지." 라며 또 피식거리며 웃는다. 그 웃음에 독기가 어려있으니..... 지금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는 거지, 장인하. "연락 안하고 있는 거야?" "뭐....... 대강...... 이번엔 진짜 동반 자살이라도 할까.... 생각 중이니까." 라며 또 배시시 웃는다. 그 웃음에 가슴 안에 둔한 통증이 울려온다. 네 그런 미소 보면...... 슬퍼지는 건 나뿐이니? 어째서 당사자인 너는 그렇게 담담한데 내가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 거니. 왜 이렇게 미련해, 강상원.... 멍청한 자식.... "권형이 입장도 생각해. 너 때문에 모든 걸 버릴 수는 없잖아." "그러길 바라는 내가 잘못이라는 거야?" 정색을 하고 내 눈을 들여다보는 인하의 눈에서..... 난 그나마 가지고 있던 희망의 끈을 놓아버렸다. 이 녀석은.... 절대 그 녀석을 떠나지 못한다. 설혹 이 녀석의 말처럼 동반 자살을 하게 된다해도.... 절대 그 녀석의 손을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이 미련한 연심따윈 어떻게 되도 상관없겠지..... 이제 내가 널 놓아야 할까..... 장인하? 응? "강상원....." 갑자기 풀네임을 부르는 인하의 말에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자 인하는 또 웃는다. 즐거운 듯.... 하지만 그 눈 안에는 아직 슬픔이 서려 있어 따라 웃을 수는 없었다. 예전처럼 장난기와 오기만으로 웃는 인하의 미소라면 그저 같이 웃어주었겠지만 인하의 눈에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떤 분노와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나 좋아하지?" "응..... 좋아해.... 나쁜 자식아." "그래, 계속 좋아해라. 각서는 찢어버렸지만..... 진짜 나 좋아하지?" "그래, 사랑해....." "그래." 라며 녀석이 환하게 웃고 커피를 들어 마시다 손사래를 치며 켁켁댄다. "왜?" "웃, 혀 데였나 봐....... 씨이...." 진지하던 순간에 갑작스런 일로 난 그만 웃어버렸다. 이 녀석.... 정신 반쯤 흘리고 다니는 건 변함이 없구나. 오히려 완벽하니 깔끔한 모습의 인하보다는 이렇게 흐트러진 그를 더욱 사랑하는 건 저런 모습을 알고 있는 게 나 외의 극소수라는 점 때문이겠지. "혀 좀 봐봐...... 많이 데였나...." 탁자에 몸을 숙이고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내민 인하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내가 다가오라는 신호를 했다. 그 모션에 본능적으로 다가가 인하의 혀를 보니 끝만이 살짝 데여 붉어졌을 뿐, 많이 데인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아..... 끝이 살짝 빨가니까..... 매운 거나 뜨거운 것만 먹지 마라." "으응...... 망할....... 재밌는 거 알려주려고 했는데....." "재밌는 거?" 우리의 행동에 가게 안의 사람들은 모두 긴장을 하며 쳐다봤지만 인하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찬 물을 들이키고 싱긋 웃는다. "나 예쁘지?" 싱글벙글한 얼굴에 한숨을 내쉬자 여전히 웃는다. "그래, 예뻐......" 진짜 예쁘지. 얼굴이 아니라..... 난 니가 무조껀 예뻐. 너무 사랑하니까..... 니가 무슨 짓을 해도, 어떤 인간이라도 너만은 아름답고 고결해.... 내게는.... "그래야지. 그럼 잠시만 기다려....." 라며 눈꼬리를 접으며 유쾌하게 웃는 녀석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며 커피를 마시고 문득 창 밖을 보았을 때 인하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녀석!! "어, 빨리 왔네...... 성질 급하긴.... 츳...." 혀를 차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문 녀석은 황망함에 일어서려는 내 손목을 잡아챘다. "어딜 가려고?" "장인하!! 내가 왜 숨었는지 몰라서 그래?" "알아." "그런데 왜........" "심술, 나 권형이네서 열받았다고 했잖아." 그 말에 내 손목을 잡고있는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이 녀석이 얼마나 힘이 센지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것이다. 내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아귀힘에 다른 손을 이용해 인하의 손을 떼려 했지만 인하는 거의 힘도 주지 않고 빙그래 웃으며 손목을 틀어 나를 자리에 앉히고 내 목가로 손을 뻗어 나를 끌어 당겼다. "도망치지마, 강상원. 일을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지. 병신 같이 도망만 가느니 확실히 매듭을 짓는 쪽이 낫잖아. 죽어도 놔주지 않는 다면 앞에서 손목이라도 그어 봐. 니 피 보면 질려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럴 베짱 없으면 얌전히 안겨 살아. 유부남이라는 거 맘에 들진 않지만 너 잡을려면 저 정도 성격 아니면 안돼잖아. 유부남 티 안낸 벌은 곱절로 갚아줬으니 이젠 니 차례야. 귀찮으면 한 대 치고 욕이라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니 감정이 무서워 피하는 거라면 일단 박아버려. 엎어치든 메치든 누가 하나 죽을 때까지 가 봐. 그래서 아니면..... 돌아오라구."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하는 인하의 반응에 난 멍하니 그 차가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20년 가까이를 함께 해 온 내 사랑은 너무 잔인하고 제 멋 대로에...... 극단적이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고 실랑이를 하는 사이 카페 문이 열리며 그가 안으로 들어온다. 화가 난 듯 한 얼굴에.... 많이 힘들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고개를 숙이자 그가 인하에게 잡혀있던 나를 세게 잡아당겼다. "어이, 아저씨.... 그 놈 얼굴색 말도 아냐. 거칠게 하면..... 죽어." 라며 빙그래 웃는 인하의 말에 그를 겨우 올려다 보자 얼굴에 커다란 멍 자국이 보였다. 아마..... 얼굴만이 아닐 것이다. 장인하와 1대 1로 붙어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니까..... "이 빚은 나중에 갚지." "당연하지. 내가 수면제 먹은 지 10시간 만에 깨서 나온 거라구. 잊었다간 며칠 전보다 심하게 당할 껄...... 그리고 상원이 울리면 진짜...... 죽여버릴꺼라구. 나 달밤에 습격하는 게 특기거든." 입은 웃지만 눈에는 살기가 도는 인하의 반응에 그가 쓴 미소를 짓는다.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제 둘이 해결 볼 일은 둘이 알아서 해 그리고 강상원, 도망치지 마. 언제나 약한 척, 피해자인 척 하는 인간들 제일 밥맛이야. 생명력이 약하다는 걸 정당화시키지 마. 재수 없으니까......" 턱을 괴고 화난 듯 말한 인하의 말에 숨을 멈추자 그가 인하와 나의 사이를 막아선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자기 처신이나 잘하지." "내 처신 걱정하기 전에 자기 엉덩이나 잘 닦고 다녀. 그 불쌍한 년하고 애새끼.... 잘 처리해. 개인적으로 어떻게 돼도 상관없는 인간들이지만..... 만약에 그 일 때문에 상원이가 상처받으면 그 땐 진짜 콘크리트에 묻어줄테니. 그것도 아니면 옛날의 어떤 누구처럼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에 쳐박아 버리는 수도 있고." 빙긋 웃으며 담배를 피고 라이터를 꺼낸 인하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은색의 지포 라이터를 켰다 껐다 하며 장난을 친다. 인하의 성격을 알아버렸는지 이젠 어느 정도 대응을 하는 그가 대꾸한다. "걱정 마..... 절대 상처 입히지 않아. 내 거니까......" "푸웃..... 뭐, 좋아......" 그의 선언에 신나게 웃어재낀 인하는 서둘러 손사래를 치며 나가라는 신호를 한다. "귀찮으니까 빨리 가봐, 아저씨. 나도 커피 한 잔 하고 들어가서 또 자야 되거든." "그럼......" 서둘러 내 손목을 잡고 나가는 그에게 끌려나가며 돌아보았을 때.... 인하는 멍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18년 전에도 지금에도 변함이 없는 텅빈 눈동자...... 내가 사랑하는 아이가 아직도 저기에 존재한다. 11세의 모습 그대로, 그 때의 아픔과 상처를 안고 여전히 아이인 채로 몸만 큰 녀석이 저 안에 머물고 있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랑과 나도 모르게 시작해버린 사랑을.....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할까...... 장인하....... 무기력한 눈빛의 소년, 그리고 그를 향한 나의 시선과 나를 소유하려는 남자....... 이 고리는 어떻게 해야 풀리는 걸까....... 응? 너는 알고 있니, 장인하? END